jacobhan.me

인공지능 시대의 인문학

인공지능 시대에 인문학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

기계가 답을 거의 공짜로 쏟아내는 시대에, 정작 값이 오르는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과 판단과 의미다. 인문학이 오랫동안 다루어 온 바로 그 영역이다.

2026년 6월 11일

한 세대 동안 한국 사회의 진로 조언은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인문학으로는 먹고살기 어렵다." 1990년대부터 대학가에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떠돌았고, 실용적인 충고는 늘 "돈이 되는 것을 공부하라"였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글을 쓰고 코드를 짜고 보고서를 분석해 내는 지금, 그 통념은 한층 강해진 듯 보인다. 그런데 사정은 정반대다.

2025년 10월, 옥스퍼드 대학은 르네상스 이후 이 대학이 받은 최대 규모의 단일 기부로 지어진 새 건물을 학내에 개관했다. 기부액은 약 1억 8,500만 파운드, 기부자는 세계 최대 대체투자운용사 블랙스톤의 창업자 스티븐 슈워츠먼이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 돈이 향한 곳이다. 건물의 이름은 "인문학 센터"였고, 그 안에는 "인공지능 윤리 연구소"가 들어섰다. 기계의 미래를 설계하는 자본이 인문학에 베팅한 셈이다. 왜 그랬을까. 이 글은 그 이유를 따라간다.

핵심은 한 문장으로 압축된다. 인공지능은 을 생산하는 데 능하다. 그러나 무엇을 물을지, 그 답이 옳은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함인지에는 무력하다. 이 세 가지가 인문학의 영토다.

01 — 사실과 가치기계는 '∼이다'를 배우고, 인간은 '∼해야 한다'를 정한다

오늘날 화제의 중심에 선 대규모 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이 하는 일은 의외로 단순하게 요약된다. 인류가 남긴 방대한 글을 학습하여, 어떤 말 다음에 어떤 말이 올 가능성이 높은지를 확률적으로 잇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인간이 써 온 텍스트의 거대한 통계적 압축이다. 모델은 세계를 직접 겪은 적이 없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서술을 가졌을 뿐이다.

여기에서 좀처럼 주목받지 않는 역설이 나온다. 인공지능은 인문학에 기생한다. 모든 모델은 문학과 역사, 철학과 언론—인류가 의미를 빚어 온 기록—을 먹고 자란다. 셰익스피어를 학습하지 않은 모델은 셰익스피어풍의 문장을 흉내 낼 수 없고, 수천 년의 윤리적 논쟁이 적힌 글이 없었다면 옳고 그름에 관한 어떤 말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기계의 유창함은 인문학이 쌓아 올린 자산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 자산을 아무리 통계적으로 압축해도 넘을 수 없는 경계가 하나 있다.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지적한 것으로, 흔히 "흄의 단두대"라 불린다. '∼이다(is)'라는 사실 명제로부터 '∼해야 한다(ought)'라는 당위 명제는 논리적으로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써 왔는지를 아무리 많이 쌓아도, 그것만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도출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정확히 '무엇이 사실인가'를 학습하는 기계다. 그래서 그것만으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답할 수 없다.

당위 · ‘∼해야 한다’ (Ought) 가치 · 목적 · 무엇이 좋은가에 대한 판단 인간의 몫 흄의 경계 — 건널 수 없음 존재 · ‘∼이다’ (Is) 데이터 · 사실 ·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것 기계의 영역
인공지능은 무수한 '사실'을 학습하지만, 거기서 '당위'로 올라서는 통로는 논리적으로 닫혀 있다. 그 통로를 메우는 일은 인간의 판단에 달려 있다.
비유

인공지능은 인류가 남긴 모든 악보를 통째로 외운 연주자와 같다. 바흐든 재즈든, 어떤 곡이라도 청하는 즉시 흠 없이 연주한다.

그러나 "오늘 밤 누구를 위해, 어떤 곡을, 왜 연주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악보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그 답은 연주의 바깥, 연주를 듣는 사람들의 삶과 그 자리의 의미 속에 있다.

이것이 추상적인 철학 얘기로만 들린다면, 1980년대 로봇공학자 한스 모라벡이 정리한 또 다른 역설을 떠올려도 좋다. 인간에게 쉬운 것이 기계에는 어렵고, 기계에 쉬운 것이 인간에게는 어렵다. 복잡한 적분이나 수백만 건의 검색은 기계에 순식간이지만, 다섯 살 아이가 자연스럽게 발휘하는 상식·맥락 파악·"지금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감각은 오히려 흉내 내기 가장 까다로운 능력으로 남아 있다. 인공지능이 발전할수록, 인간 고유의 가치는 그 발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더 또렷해진다.

02 — 질문의 값답이 흔해질수록, 질문이 귀해진다

지식의 경제학에는 오래된 규칙이 있다. 희소한 것이 값을 가진다는 것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답'은 희소재였다. 무언가를 알아내려면 도서관을 뒤지고, 전문가를 찾고, 시간을 들여야 했다. 좋은 질문을 떠올리는 일은 상대적으로 흔했다—답을 구하는 비용이 워낙 컸기 때문에 질문은 늘 넘쳐 났다.

인공지능은 이 균형을 뒤집었다. 웬만한 답은 이제 즉시, 거의 공짜로 나온다. 그러자 희소성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무엇을 물을 것인가, 그 질문이 과연 옳은 질문인가, 돌아온 답에서 무엇이 빠졌는가를 알아채는 능력이다.

이전 비싸다 답 산출 흔하다 질문 · 판단 지금 거의 공짜 답 산출 희소 질문 · 판단
답을 만드는 비용이 0에 가까워질수록, 좋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가려내는 일의 가치가 올라간다. 값이 옮겨 간 자리가 인문학이 다뤄 온 자리와 겹친다.

좋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그저 호기심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알 가치가 있는지를 분별하고, 흐릿한 상황을 다룰 수 있는 문제로 틀 짓고, 답 속의 빈틈과 숨은 전제를 짚어 내는 일이다. 이는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정독), 사안을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놓고, 개념을 분별하는 훈련—바로 인문학이 길러 온 능력—에서 나온다. 국내의 한 신문 기고문도 같은 진단을 내놓았다.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경쟁력은 결국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같은 도구를 쥐여 줘도 결과가 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사람은 인공지능을 정답 자판기처럼 쓰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설을 되묻고 논거의 허점을 찾는 소크라테스식 대화 상대로 쓴다. 둘을 가르는 것은 기술 숙련도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물을 줄 아는가라는 인문학적 소양이다.

03 — 진실의 분별기계는 그럴듯함을 만들고, 인간은 진실을 가린다

인공지능이 최적화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그럴듯함이다. 모델은 "맞는 말"이 아니라 "맞아 보이는 말"을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다. 대개는 둘이 겹치지만, 어긋날 때가 문제다. 그럴듯하지만 사실이 아닌 출력을 가리켜 흔히 '환각(hallucination)'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환각은 추상적 우려가 아니라 이미 일상의 사고로 번지고 있다.

가장 또렷한 무대는 법정이다. HEC파리 경영대학원의 법학자 데미앙 샤를로탱이 운영하는 데이터베이스에는, 인공지능이 지어낸 가짜 판례 인용이 실제 법정 문서에 등장한 사례가 1,500건 넘게 집계되어 있다. 그 대다수가 2025년에 몰려 있다. 변호사가 인공지능에 의존해 작성한 서면에 존재하지도 않는 판례가 버젓이 인용된 것이다. 미국의 한 특별심리관(전직 치안판사)은 제출된 인용이 진짜인 줄 알고 하마터면 판결문에 넣을 뻔했다고 토로하며, 해당 로펌에 3만 1,100달러의 제재를 부과했다. 그는 그 상황을 두고 "섬뜩하다"고 적었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단순하다. '마지막 한 걸음'—검증하고, 판단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일—은 자동화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기계가 내놓은 것을 비판적으로 읽고, 출처를 대조하고, "이것이 정말 사실인가"를 따져 물은 뒤 자신의 이름으로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새로 발명할 능력이 아니다. 사료의 진위를 가리고, 회의하며,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인문학의 오랜 훈련이 정확히 그 능력이다.

비유

역사가는 사료 앞에서 결코 순진하지 않다. 이 문서가 진짜인가, 누가 무슨 의도로 썼는가, 다른 증거와 어긋나지는 않는가를 의심하고 저울질하는 것이 역사 연구의 기본기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이 기예가 소수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기계가 그럴듯한 텍스트를 무한히 쏟아 내는 세계에서, 사료를 의심하는 역사가의 태도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일상의 생존 기술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인공지능이 정교해질수록 이 분별의 부담은 줄지 않고 오히려 커진다. 어설픈 거짓말은 쉽게 들통나지만, 정교한 거짓말은 전문가조차 속인다. 앞의 특별심리관이 가짜 인용에 넘어갈 뻔한 것도, 그 인용이 어설퍼서가 아니라 너무 그럴듯해서였다.

04 — 정렬의 문제인공지능을 '정렬'하는 일 자체가 철학을 부른다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렵다고 입을 모으는 과제가 하나 있다. 흔히 '정렬(alignment)' 문제라 부른다. 강력한 인공지능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말은 간단해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기술로 풀 수 없는 두 개의 물음이 숨어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누구의 가치에 맞출 것인가.

이것은 공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에서 가장 오래된 물음이다. 무엇이 좋은가, 무엇이 정의로운가, 우리는 어떻게 더불어 살아야 하는가. 인공지능 윤리를 연구한 철학자 이아손 가브리엘은 이 점을 분명히 짚는다. 가치에 관해서는 인간들 사이에서조차 보편적 합의가 없으므로, 정렬은 데이터로부터의 추론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어떤 가치에 맞출 것인가라는 '규범적' 물음이 기술적 구현보다 앞선다. 그는 사람들의 깊은 의견 차이를 전제하면서도 함께 살아갈 원칙을 찾는 길로,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합당한 다원주의' 개념에서 실마리를 구한다.

앞서 본 흄의 경계가 여기에서 다시 작동한다. 사람들의 실제 선택을 데이터로 아무리 많이 모아도, 그 선택이 옳다는 보장은 없다. 사람들은 편견에 빠지기도 하고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존 행동을 학습시키는 것만으로는 윤리적인 인공지능을 만들 수 없다. 어딘가에서 인간이 "무엇이 옳은가"를 숙고하고 판단해 넣어야 한다.

비유

정렬 문제는 강력한 엔진을 단 자동차에 핸들과 브레이크를 다는 일이 아니다. 그건 차라리 쉬운 공학이다. 진짜 어려운 물음은 따로 있다. "이 차로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엔진의 출력—기술의 힘—은 목적지를 알려 주지 않는다. 목적지는 기술 바깥, 인간이 무엇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가에서 온다. 더 강한 엔진은 이 물음을 더 절박하게 만들 뿐, 대신 답해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앞서 옥스퍼드 인문학 센터 안에 인공지능 윤리 연구소가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월드와이드웹을 만든 팀 버너스리도 같은 취지의 말을 남겼다.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이로우려면, 그 도덕적·윤리적 함의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를 더 똑똑하게 만드는 일과 그 똑똑함을 어디에 쓸지 정하는 일은 별개이며, 후자는 끝내 인문학의 몫으로 남는다.

05 — 인간 조건기계가 가질 수 없는 것

인공지능에는 몸이 없다. 죽음도, 유년도, 누군가를 잃은 슬픔도, 세계에 거는 이해관계도 없다. 모델은 이 모든 것의 표현—사람들이 사랑과 상실과 두려움에 관해 써 놓은 문장들—을 능숙하게 다룬다. 그러나 표현을 다루는 것과 그것을 겪는 것은 다르다. 기계는 슬픔에 관한 텍스트를 학습할 수 있지만, 슬픔을 살아 본 적은 없다.

문학과 예술, 역사와 종교, 철학은 결국 살고 죽으며 그 사실에 의미를 부여해야만 했던 존재들의 기록이다. 인공지능은 이 기록을 먹고 자라지만, 스스로 겪은 바가 없으므로 그것을 처음부터 빚어낼 수는 없다. 호메로스가 오늘도 읽히고 셰익스피어가 시대를 건너 살아남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자신의 조건과 정면으로 마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표현을 처리하는 것과 그것을 살아 내는 것 사이의 거리는, 인공지능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좁혀지지 않는다.

이는 신비화가 아니다. 측정 가능한 차이다. 기계는 수많은 사례를 일반화해 평균적인 패턴을 만든다. 인간은 단 한 번뿐인, 대체 불가능한 구체적 삶을 산다. 문학이 하는 일은 그 단 한 번의 삶, 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잠시 들어가 보게 하는 것이다. 공감과 도덕적 상상력은 거기에서 길러진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우리의 소통을 점점 더 매개할수록, 화면 너머의 한 사람을 진짜로 이해하는 능력은 더 드물어지고 그만큼 더 귀해진다.

기술의 시대일수록 이 질문이 무거워진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 인공지능과 자연과학이 의료적·기술적 문제를 풀어 줄 수는 있어도, 인간의 정신과 가치관을 대신할 수는 없다. 효율은 기계의 언어이고, 의미는 인문학의 언어다.

06 — 노동시장의 신호'취업에 무용하다'는 통념의 반전

지금까지의 논의가 가치와 의미 같은 추상의 영역이었다면, 마지막으로 가장 현실적인 지점을 보자. 인문학은 정말 '먹고살기에 불리한' 선택인가. 최근의 데이터는 통념보다 훨씬 흥미로운 그림을 보여 준다.

스탠퍼드 디지털경제연구소(Stanford Digital Economy Lab)가 2025년 11월 내놓은 연구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탄광 속의 카나리아인가?" 미국 최대 급여처리 데이터로 수백만 명의 고용 변화를 추적한 이 연구는, 동일 직군·기업 요인을 통제한 뒤에도 한 집단에서 뚜렷한 고용 감소를 발견했다. 인공지능에 가장 많이 노출된 직군—소프트웨어 개발, 고객 상담 등—의 22∼25세 청년 노동자였다. 이들의 고용은 제너레이티브 인공지능 확산 이후 약 16% 상대적으로 줄었다.

핵심은 그다음에 있다. 감소는 인공지능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직무에 집중되었고, 인간 노동을 보강하는 직무나 숙련 노동자, 대면·수작업 직군에서는 고용이 안정적이거나 오히려 늘었다.

고용 변화 0% −16% AI 고도노출 청년(22∼25세) 안정/증가 AI 고도노출 숙련 노동 안정/증가 AI 저노출 직군 안정/증가 대면 · 수작업 직군
스탠퍼드 디지털경제연구소(2025)의 분석. 인공지능이 '대체'하는 직무의 청년 일자리만 두드러지게 줄었고, '보강'하는 직무·숙련·대면 노동은 흔들리지 않았다. (−16%는 검증된 수치, 나머지는 방향성 표시.)

역설이 여기에 있다. '안전한 길'이라 여겨지던 기술직의 입문 자리가 가장 먼저 깎였다. 반대로 인공지능이 쉽게 대체하지 못하는 능력—판단, 소통, 해석, 윤리적 추론, 모호한 상황을 다루는 힘—은 그대로 값을 유지했다. 공교롭게도 이는 인문학이 오래 길러 온 능력 목록과 거의 일치한다.

오해는 없어야 한다. 이것이 "이제 인문학 전공이 취업을 보장한다"는 뜻은 아니다. 진짜 함의는 다른 데 있다. 'STEM(과학·기술·공학·수학)이냐 인문학이냐'라는 오래된 이분법 자체가 애초에 거칠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양쪽을 잇는 사람—기술을 이해하면서 그 기술을 인간의 언어와 가치로 번역할 줄 아는 사람이다. 국내에서도 인문·사회 융합인재를 기르려는 시도가 이어지는 것은 이 흐름과 닿아 있다.

2016년 알파고 충격 이후 한국 사회는 너도나도 코딩으로 몰렸다. 그런데 지금, 그때 양산된 입문급 개발 일자리가 인공지능에 가장 먼저 잠식되고 있다. "문송합니다"라는 자조 섞인 말이 무색하게도, 정작 시대가 다시 찾는 것은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고, 갈등하는 이해관계 사이에서 합의를 설계하며, 기술이 만든 세계를 사람의 언어로 다시 쓰는 능력이다.

맺음말향수가 아니라 필요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이 글의 주장은 잃어버린 황금시대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인문학을 교양의 장식이나 여유 있는 사람의 취미로 보는 시각과도 거리가 멀다. 논거는 오히려 냉정하고 실용적이다. 생산을 기계에 넘긴 문명일수록, 판단과 의미와 가치를 다루는 인간의 역량에 이 아니라 투자해야 한다. 바로 그 역량이 이제 모든 것을 좌우하는 병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짜 위험은 인공지능이 인문학을 대체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진짜 위험은, 우리가 인문학을 가장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시들게 내버려 두는 데 있다. 그 끝에 남는 것은 더없이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쥐고도, 그것을 어디로 겨눌지 결정할 지혜는 잃어버린 사회다. 옥스퍼드에 르네상스 이후 최대의 기부가 인문학으로 향하고, 그 안에 윤리 연구소가 자리 잡은 것은 그 위험을 먼저 읽은 자들의 응답이었다.

효율은 기계에 맡길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효율인가'는 끝내 사람이 답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강력해질수록, 그 물음에 답할 인문학적 역량은 더 희소하고 더 값진 것이 된다. 답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에게 남겨진 진짜 과제는, 더 나은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책임지는 일이다. 그것이 인문학이 줄곧 해 온 일이며,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