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ergy · Economics
에너지 전환의 경제학: 트릴레마는 무너졌는가
에너지를 둘러싼 논쟁은 오랫동안 "값싸게 쓸 것인가, 깨끗하게 쓸 것인가" 사이의 선택으로 다뤄졌다. 그러나 발전 단가가 무너지고 해협 하나가 막히면서, 경제성·안보·환경이라는 세 축이 점차 같은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한국이 그 흐름의 가장 뒤에 서 있다는 사실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다.
01 / 문제의 풍경해협이 막히던 날
2026년 봄,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었다. 세계 해상 원유 물동량의 4분의 1가량이 통과하는 이 좁은 길목이 닫히자, 한국은 즉각 수급 불안에 직면했다. 국내 원유 수입의 약 70%가 중동산이고, 그 중동산의 95% 이상이 호르무즈를 거쳐 들어오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국제유가는 단기간에 40% 넘게 뛰었고, 산업연구원은 유가가 10% 오를 때 국내 제조업 생산비가 평균 0.71% 상승한다고 분석했다.
이 사건이 남긴 것은 단순한 가격 충격이 아니다. 그동안 에너지 문제는 환경적 시각과 경제적 시각의 대립으로 다뤄졌지만, 이제 국가 안보라는 세 번째 축이 전면에 등장했다. 에너지가 추상적 미래 담론이 아니라, 두 달치 비축유가 동나면 무엇이 멈추는가 하는 즉물적 질문으로 바뀐 것이다.
그 질문 앞에서 한국의 위치는 불편할 만큼 선명하다.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면서, 정작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는 재생에너지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다. 이 글은 그 역설을 경제의 언어로 해부한다.
02 / 오래된 공식'트릴레마'라는 삼각형
에너지 정책에는 오래된 격언이 있다. 값싸고(경제성), 안정적으로 공급되며(안보·안정성), 동시에 깨끗한(환경성) 에너지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 없다는 딜레마를 흔히 에너지 트릴레마(energy trilemma)라 부른다. 셋 중 둘은 잡을 수 있어도 나머지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일종의 체념의 논리였다.
트릴레마는 삼각형의 세 꼭짓점이다. 한 변에 손이 닿으면 반대편 꼭짓점에서는 멀어진다. 과거에는 이 삼각형이 매우 넓었다. 싼 화석연료(경제성)를 택하면 환경을 잃고, 깨끗한 재생에너지(환경성)를 택하면 비싸고 들쭉날쭉했다(경제성·안정성 상실).
그런데 기술이 발전하면서 삼각형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꼭짓점들이 안쪽으로 당겨지며 서로 겹치는 영역이 생겼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라"던 명제의 전제가 약해진 것이다.
이 글이 던지는 핵심 질문이 여기 있다. 트릴레마는 여전히 유효한가, 아니면 무너지고 있는가. 결론을 미리 말하면, 세 축은 더 이상 서로 멀어지지 않는다. 단가는 환경성과 경제성을 화해시켰고, 이번 해협 봉쇄는 안보와 환경성을 같은 편에 세웠다.
03 / 가격의 역전단가는 어떻게 무너졌나
트릴레마의 한 변, 즉 "재생에너지는 비싸다"는 명제부터 살펴보자. 한때 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 태양광 모듈과 풍력 터빈 가격이 규모의 경제로 급락하면서, 발전원의 생애주기 비용을 따지는 균등화발전원가가 화석연료 수준으로 내려왔다.
균등화발전원가(LCOE)는 발전소의 '평생 가계부'다. 발전소를 짓는 데 든 돈, 20~30년간 연료를 사고 정비하는 데 드는 돈을 모두 합한 뒤, 그 기간 동안 생산한 전기량으로 나눈 값이다. 자동차를 살 때 차값만 보지 않고 기름값·보험료까지 합쳐 '킬로미터당 비용'을 따지는 것과 같다.
태양광·풍력은 설치비가 들 뿐 연료비가 0원이다. 햇빛과 바람에는 청구서가 붙지 않는다. 반면 화석연료 발전소는 평생 연료를 사야 한다. 설치비가 떨어지는 순간, 이 '평생 가계부'의 승부는 빠르게 뒤집힌다.
이렇게 재생에너지의 단가가 다른 발전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점을 그리드 패리티(grid parity)라 부른다. 이미 미국 텍사스, 중동 일부, 중국 등에서는 태양광에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결합한 발전 단가가 가스복합화력 수준에 근접했다. 한국에서도 발전 단가만 놓고 보면, 육상풍력과 태양광이 산업용 전기요금보다 낮아지는 구간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한국에는 단서가 붙는다. 출력이 들쭉날쭉한 재생에너지에 ESS를 더하면 아직 비싸고, 설치 면적당 발전량을 좌우하는 일사량과 부지 여건도 불리하다. 정부가 2026년 5월 발표한 제1차 재생에너지 기본계획은 바로 이 단가를 정조준한다. 태양광 계약단가를 현재 kWh당 150원 수준에서 2030년 100원, 2035년 80원까지 끌어내리고, 같은 기간 누적 100기가와트(GW)를 보급해 '세계 10대 재생에너지 강국'으로 올라서겠다는 것이다. 보급 물량을 키우는 대가로 입찰 단가를 낮추는, 규모의 경제를 정책으로 설계한 셈이다.
04 / 역설최대 수입국이자 재생에너지 최하위
여기서 한국의 위치를 숫자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2024년에만 1,365억 달러어치 에너지를 수입했다. 원유 854억, 가스 347억, 석탄 164억 달러다. 국제 에너지 가격이 높았던 해에는 이 금액이 2,000억 달러를 넘어 200조 원을 웃돌기도 했다. 에너지 수입의존도는 90% 중반대,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다 포함한 자립도조차 20% 안팎에 머문다.
그런데 이런 나라의 재생에너지 비중은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다. 최종에너지 소비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한 자릿수로, OECD 평균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발전량 기준으로 넓혀 봐도 10% 안팎에 그친다. 매년 수백조 원을 들여 에너지를 수입하는 제조업 강국이, 정작 국내에서 만들 수 있는 에너지원은 가장 늦게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격차는 단순한 환경 지표의 문제가 아니다. 수입 에너지에 90% 이상 매여 있다는 것은, 해협 하나가 막히거나 산유국 한 곳에서 분쟁이 터질 때마다 경제 전체가 흔들린다는 뜻이다. 국내에서 만드는 에너지는 그 자체로 안보 자산이다. 재생에너지가 '환경 문제'에서 '안보 문제'로 재정의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05 / 정체의 원인왜 20년 동안 제자리였나
친환경 전환은 어제오늘의 구호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이미 2000년대 후반부터 '녹색성장'을 내걸고 에너지 전환을 이야기해 왔다. 그런데도 20년 가까이 재생에너지 비중은 두 자릿수에 닿지 못했다. 기술도, 자본도, 의지도 부분적으로는 있었는데 결과가 없었다. 무엇이 가로막았는가.
가장 자주 지목되는 원인은 정책의 변동성이다. 에너지가 정치와 등치되면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향이 출렁였다. 한쪽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사업이 다음 정부에서 멈추고, 다시 뒤집히는 일이 반복됐다. 기업 입장에서 이런 변동성은 치명적이다.
대규모 발전 사업은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비롯한 장기 투자를 끌어와야 성립한다. 그런데 정책 불확실성이 크면 금융 조달이 어려워지고, 위험을 반영한 금리(요율)가 올라가며, 결국 사업성이 떨어진다. 사업성이 낮으니 참여자가 줄고, 참여자가 적으니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지 않아 단가가 떨어지지 않는 악순환이 굳어졌다.
여기에 '진영 논리'가 겹친다. 특정 발전원이 더 싸다는 분석을 내놓아도 "너는 어느 편이냐"는 프레임이 먼저 씌워진다. 가성비를 따지는 산업의 언어가, 정체성을 따지는 정치의 언어에 묻혀 버리는 것이다. 비용 계산이 통하지 않는 시장에서 합리적 투자는 설 자리가 없다.
06 / 바깥의 현실미국·중국·유럽이 보여주는 것
한국 안에서 에너지는 진보와 보수, 친미와 친중의 대리전처럼 다뤄진다. 그러나 국경 밖을 보면, 이 구도는 현실과 어긋나 있다. 정치 체제와 무관하게 세계의 발전설비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석유를 더 파자(drill, baby, drill)"는 구호 아래 화석연료 회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데이터는 정반대다. 2025년 미국에서 새로 들어선 발전설비의 약 88%가 재생에너지였고, 유틸리티급 태양광 한 종목만으로 신규 설비의 72.6%를 차지했다. 태양광은 28개월 연속 최대 신규 발전원 자리를 지켰다. 정치 구호와 무관하게, 가장 빨리 전기를 만들어 내는 방법이 재생에너지였던 것이다.
유럽연합에서는 2025년 풍력과 태양광만으로 발전량의 30%를 채워, 처음으로 화석연료(29%)를 앞질렀다. 수력을 포함한 재생에너지 전체로는 발전량의 절반 가까이에 이른다. 유럽은 2030년 재생에너지 목표를 30%에서 42.5%로 오히려 상향했다.
중국은 흔히 '석탄 대국'으로 인식되지만, 동시에 세계 최대의 재생에너지 설치국이다. 2025년 한 해 태양광만 약 378GW를 새로 깔았는데, 이는 전 세계 신규 태양광(약 647GW)의 절반을 넘는다. 누적 태양광 설비는 1.2테라와트(TW)로 세계 전체의 절반에 달한다. 풍력과 태양광을 합한 설비가 석탄을 추월한 것도 이 무렵이다.
중국이 석탄을 버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력 수급 불안을 겪은 뒤 한 해 수십 기가와트의 석탄발전을 새로 허가했다. 다만 그 성격이 달라졌다. 과거처럼 기저부하를 책임지는 주력 발전원이 아니라, 출력이 변동하는 재생에너지를 떠받치는 유연성·백업 설비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신규 석탄 허가량 자체도 2022년 정점 이후 줄어, 2025년에는 4년 만의 최저 수준으로 내려왔다.
요점은 분명하다. 미국·중국·유럽이라는, 체제도 이념도 전혀 다른 세 거대 경제권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산업의 흐름이다. 한국만 그 흐름 위에서 진영 논쟁을 벌이고 있다.
07 / 수출의 함정CBAM과 RE100, 산업계의 진짜 위치
재생에너지 확대에 가장 반대한다고 흔히 여겨지는 쪽은 산업계다. 제조업은 24시간 끊김 없는 전력을 써야 하고, 전기요금이 오르면 원가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논리다. 한국이 제조업 비중이 높아 에너지 전환이 어렵다는 주장도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절반만 맞다. 정작 수출 대기업들은 재생에너지 전력 구매를 서두르고 있다. 이유는 환경이 아니라 시장 접근권이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국경에서 받는 '탄소 통행료'다. 유럽연합은 자기 역내 기업에는 탄소 배출에 비용을 물리면서, 규제가 느슨한 나라에서 만든 값싼 제품이 그냥 들어오면 불공정하다고 본다. 그래서 수입품에도 생산 과정에서 나온 탄소만큼 인증서를 사서 내도록 했다.
탄소를 많이 쓰며 만든 철강·알루미늄은 국경에서 비싼 통행료를 문다. 재생에너지로 깨끗하게 만든 제품은 그만큼 통행료가 싸다. 환경 규제가 곧 무역 장벽이 된 것이다.
CBAM은 2026년 1월부터 인증서 구매 의무가 발효돼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대상은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력·수소 6개 품목으로 시작하지만, 2030년에는 산업 전반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영국도 2027년부터 유사한 제도를 도입한다. 탄소 집약적이고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 산업은 이 규제에 정면으로 노출돼 있다.
여기에 글로벌 기업들이 협력업체에까지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구하는 RE100 흐름이 더해진다. 반도체·배터리처럼 글로벌 공급망 깊숙이 들어간 산업일수록, "우리 부품은 재생에너지로 만들었다"는 증명이 없으면 거래에서 밀려난다. 유럽이 탄소 배출에 이미 상당한 부담금을 매기는 동안 한국은 그러지 않았기에 전기요금이 상대적으로 쌌지만, 그 격차가 이제는 '무임승차'로 지목돼 규제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렇다면 "산업계가 반대한다"와 "산업계가 전환을 서두른다"는 모순된 진술이 어떻게 공존할까. 답은 간단하다. 산업계는 전환 자체가 아니라 전환의 속도와 주도권을 두고 다툰다.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외부 압력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자기 페이스대로 하고 싶을 뿐이다. 대규모 재생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을 정부가 만들어 주지 않으면, 의지가 있어도 움직이지 못한다.
이대로 가면 결말은 분명하다. 깨끗한 전기를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는 나라는, 가만히 앉아서 수출길이 막히는 '섬'이 된다.
08 / 두 번의 충격가스와 원유는 어떻게 달랐나
에너지 안보를 실감하려면 최근 두 번의 공급 충격을 비교해 보면 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번 중동 사태는 한국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충격은 주로 천연가스에서 왔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서유럽으로 향하던 가스가 끊기면서 유럽이 직격탄을 맞았고, 한 시점에는 가스 가격이 폭등했다. 다만 한국에는 이 충격이 비교적 간접적으로 전해졌다. 가격이 오르긴 했어도, 공급선이 물리적으로 끊긴 것은 아니었다.
이번 중동 사태는 성격이 다르다. 호르무즈가 막히면 한국이 들여오는 원유 자체가 당장 부족해진다. 가격 변동이라는 간접 충격이 아니라, 배가 들어오지 못하는 물리적 타격이다. 과거 오일쇼크에 비견될 만한 위기가, 이번에는 한국에 직접 닿았다.
09 / 다변화의 착시원유는 어디서 사도 비싸다
충격에 대한 가장 흔한 처방은 "공급선을 다변화하자"는 것이다. 중동 의존을 줄이고 북미나 호주에서 원유를 들여오자는 발상이다. 단기 대응으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안보 차원의 근본 해법으로 보면 한계가 뚜렷하다.
이유는 원유 가격의 움직임에 있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 브렌트유, 두바이유 같은 주요 유종은 산지가 달라도 가격이 거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통상 90%를 크게 웃도는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한 곳에서 가격이 뛰면 다른 곳도 함께 뛴다. 호르무즈가 막혀 중동산이 비싸지면, 북미·호주산도 덩달아 비싸진다. 게다가 급히 수입선을 바꾸려 해도 이미 가격이 올라 있어 다변화의 실익이 작다.
진정한 다변화는 '어디서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쓰느냐'를 바꾸는 것이다. 같은 원유 안에서 산지만 옮기는 것은 한 바구니 안에서 달걀을 옮기는 데 그친다. 원유라는 바구니 자체를 줄이고 재생에너지·원자력처럼 가격이 다르게 움직이는 국내 생산 에너지를 늘릴 때, 비로소 공급과 가격의 위험이 분산된다. 안보의 관점에서 보면, 약간의 경제성을 내주더라도 이 분산을 사는 것이 합리적이다.
10 / 시스템의 문제독점, 시장, 그리고 효율
발전원만 바꾼다고 전환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재생에너지 확대, 전기화, 효율 개선이라는 세 박자가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가격 신호가 작동하지 않아 셋 다 더디다.
핵심은 시장 구조다. 유럽에서는 소비자가 고를 수 있는 전기요금제가 수십에서 수백 종에 이르고, 일부 국가는 15분 단위로 요금이 바뀐다. 전기가 쌀 때 쓰도록 소비 패턴을 맞출 유인이 생기고, 그 수요에 맞춰 히트펌프나 스마트 가전 같은 효율 기술 시장도 함께 자란다. 반면 한국은 단일 공기업이 가격을 사실상 독점 결정한다. 소비자는 청구서에 적힌 금액을 받아들일 뿐, 절약하거나 시간대를 옮길 유인이 약하다.
독점 구조의 비용은 곳곳에서 새어 나온다. 발전 공기업이 비싸게 산 배출권 비용까지 모두 원가로 보전받는다면, 배출을 줄일 유인이 약해진다. 안정적 운영이 필요한 송배전망은 공공이 맡되, 더 싸게 전기를 만들고 더 싸게 공급하는 발전·판매 영역에는 경쟁이 들어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흔히 이런 제안에는 '민영화'라는 프레임이 즉각 씌워지지만, 쟁점은 소유 형태가 아니라 경쟁의 도입이다. 경쟁의 부재에서 오는 비효율이, 통폐합으로 줄이려는 비효율보다 훨씬 크다.
한국전력의 재무 상태는 이 구조의 압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25년 사상 최대인 13조 원대 영업이익을 냈는데도, 총부채는 200조 원을 넘고 하루 이자만 100억 원을 웃돈다. 흑자를 내도 부채가 줄지 않고, 유가가 흔들리면 흑자 자체가 위태로운 구조다. 가격 기능 없이 정책만으로 끌고 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전면 개방은 현실적으로 마찰이 크다. 특정 산업단지나 특구를 정해 민간 참여를 시범 도입하고, 신호가 좋으면 점진적으로 넓혀 가는 단계적 접근이 충돌을 줄이는 길이다.
11 / 당장 할 수 있는 일규제와 사업성
장기 비전과 별개로, 지금 당장 손댈 수 있는 지렛대도 있다. 가장 빠른 것은 규제 완화로 사업성을 높이는 일이다.
정부가 대규모 거점 단지를 직접 조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더 빠른 길은 사업자들이 스스로 뛰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사업성만 보이면 민간은 빠르게 움직인다. 그동안은 사업성을 억누르는 방향의 규제가 많았다. 발전설비와 주거지 사이 간격을 정한 이격거리 규제, 농지 전용 제한, 의무 공급 비율(RPS)이 낮게 묶여 있는 상태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규제만 풀고 의무 비율을 높여도, 시장은 빠르게 물량을 채울 여력이 있다.
규제로 경제성을 확보해 주는 일은,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 일에 비하면 정부가 상대적으로 손쉽게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정부의 2030년 누적 100GW 목표를 맞추려면 매년 평균 10GW 이상을 새로 깔아야 한다. 남은 시간은 4년 남짓이다. 인공위성과 인공지능(AI) 기반 분석으로 잠재 부지를 빠르게 찾아내고, 전력망 분포와 연계한 실행 가능한 계획을 신속히 집행하는 일이 함께 가야 한다.
12 / 맺으며한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들
이 글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보자. 에너지 트릴레마는 무너졌는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세 축이 더 이상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발전 단가의 하락은 환경성과 경제성을 화해시켰다. 해협 봉쇄는 안보와 환경성을 같은 편에 세웠다. 국내에서 만드는 에너지는 그 자체로 안보 자산이자, 수출 시장의 입장권이며, 장기적으로는 더 싼 전기다. 미국·중국·유럽이 체제를 가리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의 과제는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이미 아는 것의 실행이다. 정책의 변동성을 줄여 장기 자본을 불러들이고, 규제를 풀어 사업성을 확보하며, 시장에 가격 신호를 되살리는 일. 화석연료 90%를 수입에 매단 제조업 강국에게 이 전환은 이념의 선택이 아니라, 충격에 견딜 체력을 갖추는 문제다. 흩어져 있던 화살표들이 한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한 지금, 남은 것은 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