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 · AI 협업 · 직장 윤리
기계가 쓴 글을 사람에게 넘길 때
전달의 기준은 '노력'이 아니라 '책임'이다. 인공지능은 글을 만드는 비용을 거의 0으로 낮췄지만, 그 글을 읽고 검증하는 비용은 한 글자도 줄여 주지 않았다.
디버깅 기록, 보고서, 코드의 상당 부분을 이제 기계가 쓴다. 그러면서 새로운 예의(禮儀) 문제가 하나 생겼다. 인공지능이 만든 산출물을 다른 사람에게 읽으라고 그대로 넘겨도 되는가. 소프트웨어 개발자 톰 베도(Tom Bedor)는 한 짧은 글에서 이 문제를 정확히 건드렸다. 그는 자신이 낸 설계안에 대해 한 동료가 인공지능에게 비평을 시킨 뒤, "내가 안 읽어봐서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아 그 결과물을 보내온 일을 떠올린다. 그의 반응은 단순했다. 당신이 읽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글을, 왜 내가 읽어야 하는가.
베도가 거기서 끌어낸 원칙은 이렇다. 사람의 주의(注意, attention)를 요청하려면, 사람의 노력을 보여라. 인공지능이 만든 내용을 동료에게 보낼 때는 그것이 기계 산출물임을 분명히 표시하고, 자기 의견을 덧붙이고, 코드 리뷰를 부탁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읽는다는 것이다.
옳은 방향이다. 다만 이 원칙은 한 단계 더 다듬을 여지가 있다. 동료가 진짜로 요구하는 것은 당신이 고생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당신이 그 내용을 책임진다는 보증이기 때문이다. 노력과 책임은 비슷해 보이지만 같지 않고, 인공지능은 바로 그 둘 사이의 오래된 연결고리를 끊어 놓았다.
01진짜 문제는 '비용의 비대칭'이다
이 불편함의 뿌리는 예의가 아니라 경제(經濟)에 있다. 인공지능은 글 한 편을 만드는 비용을 사실상 0에 가깝게 끌어내렸다. 반면 그 글을 받아서 읽고, 사실인지 따지고, 쓸 만한 부분을 골라내는 비용은 예전 그대로다. 한쪽 비용만 폭락하고 다른 쪽은 그대로일 때, 검토하지 않은 산출물을 그냥 넘기는 행위는 자기가 치렀어야 할 선별(選別) 비용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것이 된다.
예전에는 긴 편지를 받으면, 보낸 사람이 그만큼 시간을 들였다는 뜻이었다. 분량은 곧 정성(精誠)의 신호였다. 열 장짜리 편지는 열 장만큼의 마음이었다.
이제는 버튼 하나로 열 장이 나온다. 분량은 더 이상 정성의 증거가 아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이 그 열 장을 읽는 데 드는 시간은 예전과 똑같다. 보내는 비용은 0이 됐고, 읽는 비용은 그대로다. 이 어긋남이 모든 갈등의 출발점이다.
02'워크슬롭'이라는 이름의 증거
이 현상에는 이미 이름이 붙었다. 2025년 9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실린 스탠퍼드 소셜미디어랩(Stanford Social Media Lab)과 베터업랩스(BetterUp Labs)의 공동 연구는 이것을 워크슬롭(workslop)이라고 불렀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정작 일을 진척시키지는 못하는, 알맹이 없는 인공지능 산출물을 가리킨다. 온라인을 뒤덮은 저질 인공지능 게시물을 'AI 슬롭(slop)'이라 부르는 데서 따온 말이다.
미국 정규직 노동자 1,150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40%가 최근 한 달 안에 워크슬롭을 받아 봤다고 답했다. 직장에서 받는 콘텐츠의 약 15%가 인공지능 생성물이었고, 그중 다수가 동료에게서, 일부는 상급자에게서 내려왔다. 한편 인공지능을 쓰는 사람 가운데 18%는 자신이 도움 안 되거나 질 낮은 인공지능 결과물을 보낸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워크슬롭을 받았다
짜증이 났다
덜 신뢰하게 됐다
연구진의 표현을 빌리면, 워크슬롭의 가장 음험한 점은 부담을 하류(下流)로 떠넘긴다는 것이다. 받는 사람이 그 내용을 해석하고, 고치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 노력이 만든 사람에게서 받는 사람에게로 이전되는 셈이다. 비용 비대칭 이야기가 추상이 아니라 실제 직장에서 측정되는 현상임을 이 조사가 보여 준다.
비용은 시간과 돈에 그치지 않는다. 관계도 상한다. 조사에서 워크슬롭을 보낸 동료를 두고 응답자 절반가량이 이전보다 덜 창의적이고 덜 유능하며 덜 믿음직하다고 평가했고, 37%는 덜 똑똑하다고까지 봤다. 검토 없이 넘긴 한 번의 산출물이 보낸 사람의 평판을 깎는다.
03반대 방향의 압력 — '역량 페널티'
그런데 정반대로 작용하는 힘도 있다. 2025년 8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린 또 다른 연구는 인공지능을 썼다고 밝히는 것 자체가 평판을 깎는다는 사실을 보여 줬다. 연구진은 1,026명의 엔지니어에게 똑같은 파이썬(Python) 코드를 보여 주되, 한쪽에는 사람이 혼자 짰다고, 다른 쪽에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았다고 알려 줬다. 코드 품질 평가는 거의 같았지만, 인공지능을 썼다고 들은 쪽은 작성자의 역량을 평균 9% 낮게 평가받았다. 이 역량 페널티(competence penalty)는 여성과 고령 노동자에게 더 가혹했다.
여기서 모순처럼 보이는 긴장이 생긴다. 한쪽에서는 검토 안 한 인공지능 산출물을 출처도 안 밝히고 넘기면 워크슬롭이 되어 신뢰를 잃는다. 다른 쪽에서는 인공지능을 썼다고 정직하게 밝히면 역량을 의심받는다. 밝혀도 손해, 안 밝히면 더 큰 손해처럼 보인다.
두 연구를 겹쳐 놓으면 빠져나갈 길이 보인다. 사람들이 실제로 처벌하는 대상은 '인공지능을 썼다'는 사실이 아니라 '검토 없이 떠넘겼다'는 행위다. 워크슬롭 연구는 인공지능 표시 여부와 무관하게 사람들이 알맹이 없는 산출물을 알아채고 평가를 깎더라고 보고했다. 즉 도구를 썼는지가 아니라, 보낸 사람이 그 내용에 책임을 졌는지가 평판을 가른다. 그렇다면 베도의 원칙은 '노력을 보여라'가 아니라 '책임을 보여라'로 다시 쓰는 편이 정확하다.
동료가 요구하는 것은 당신이 고생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당신이 그 내용에 책임진다는 보증이다.
04그래서 기준은 '검토했는가'다
핵심 변수를 하나만 고르라면, 그것은 인공지능을 썼는지가 아니라 보낸 사람이 그 내용을 검토하고 보증했는지다. 아래 네 칸으로 나눠 보면, 신뢰를 가르는 경계는 '인공지능이 만들었는가'라는 세로축이 아니라 '발신자가 검증·보증했는가'라는 가로축에 있다.
봉투를 그대로 건네며 "난 안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우편배달부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그것이 맞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톰 베도가 받은 '안 읽은 인공지능 비평'이 정확히 이것이었다.
같은 문서를 읽고 중요한 대목에 표시를 한 뒤 "이 부분이 핵심이고, 이 수치는 내가 직접 확인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보증인(保證人)이다. 동료가 원하는 것은 배달부가 아니라 보증인이다. 도구로 무엇을 썼는지는 여기서 부차적이다.
05표시하기와 책임지기는 다른 축이다
베도의 실천 지침 중 하나는 인공지능 산출물임을 분명히 표시하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묘한 긴장이 있다. 내가 충분히 읽고 검증해서 내 글로 흡수했다면, 굳이 인공지능이 만들었다고 표시할 이유가 약해진다. 반대로 표시가 꼭 필요하다면, 그것은 아직 내가 그 내용을 완전히 책임질 만큼 소화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긴장은 두 가지가 사실은 다른 축이라는 점을 인정하면 풀린다. 표시(labeling)는 정직함과 출처 추적의 문제다. 이 주장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검증됐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책임(accountability)은 품질의 문제다. 그 내용이 맞다고 내가 보증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둘은 충돌하지 않으며 함께 갈 수 있다. 출처를 밝히면서 동시에 책임질 수 있다. 베도의 글은 이 둘을 '노력'이라는 한 단어로 묶었지만, 실제로는 별개의 요구다.
06오래된 의심, 새로 끊긴 연결고리
도구가 사람의 능력을 의심하게 만든다는 불안은 새롭지 않다. 2025년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한 연구는 인공지능 사용자가 더 게으르고 덜 유능하게 평가받는 '사회적 평가 페널티'를 네 차례 실험으로 확인하면서, 그 뿌리가 매우 오래됐음을 짚었다. 기원전 4세기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edrus)』에는 글쓰기라는 새 발명에 기대면 사람이 기억력을 잃는다는 걱정이 나온다. 새 도구가 능력을 대신해 주면 그 사람의 진짜 실력을 의심하게 되는 패턴은 수천 년째 반복돼 왔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새로 바꾼 것은 무엇인가. 끊어 놓은 연결고리다. 예전에는 들인 노력이 들인 정성의 믿을 만한 대리지표(代理指標)였다. 긴 분석, 두꺼운 보고서, 잘 짜인 코드는 그만큼 사람이 시간을 들였다는 신호였고, 시간을 들였다는 것은 대체로 신경을 썼다는 뜻이었다. 인공지능은 그 신호를 무력화했다. 이제 잘 다듬어진 겉모습은 정성과 무관하게 몇 초 만에 나온다. 노력이 더는 책임의 증거가 못 되는 것이다.
베도의 직관이 옳았던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단계 다듬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노력을 들이는 의례'가 아니라 '내용을 책임지는 실질'이다. 노력은 더 이상 자동으로 책임을 증명하지 못하므로, 노력 자체를 목표로 삼으면 형식만 남는다. 검토했는가, 보증할 수 있는가 — 물어야 할 것은 이 두 가지다.
겉모습이 거의 공짜가 된 세상에서, 희소해진 것은 산출물이 아니라 그 산출물을 책임지는 판단이다. 사람의 주의를 청구하려거든, 노력의 흔적이 아니라 책임의 서명을 함께 보내는 편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