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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의 첫 길 — 다음 이택경이 건너온 세 번의 물결

아무 인프라도 없던 1990년대, 1,200bps짜리 느린 모뎀으로 PC통신에 접속하던 한 공대생이 포털 '다음'을 세웠다. 설립 4년 만의 코스닥 상장, 스물아홉 살 창업자, 그리고 다시 빈손으로 시작한 투자자의 길. 웹과 모바일과 인공지능이라는 세 번의 큰 물결을 건너온 사람의 이야기다.

2026년 6월 14일

그는 한 시대의 첫 길을 낸 사람이다. 웹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던 때 회사를 세웠고, 그 회사를 국민 절반이 쓰는 포털로 키웠으며, 정점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다른 이들의 첫 길을 돕는 투자자가 됐다. 이택경 대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 사람의 성공담이라기보다, 인터넷이 한국에 처음 들어오던 시절의 풍경에 가깝다.

먼저 정리 화자는 이택경, 포털 다음(Daum)의 공동창업자이자 초기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 매쉬업엔젤스/매쉬업벤처스의 대표다. 다음에서는 CTO(최고기술책임자)와 커뮤니티 서비스 본부장을 겸했고, 이후 국내 최초의 액셀러레이터(초기 창업 지원·투자사)를 공동창업했다. 본문의 인용은 영상 속 이택경 대표의 발언을 옮긴 것이다.
4년
법인 설립(1995)에서
코스닥 상장(1999)까지
29살
상장 당시
창업자의 나이
500만$
IMF 시기
독일 베텔스만의 투자
1,200bps
첫 PC통신 모뎀
(1989년, 30만 원대)

011,200bps의 별천지

시작은 한 대의 느린 모뎀이었다. 1989년, 대학 2학년이던 그는 과 동기에게서 "해외에 모뎀이랑 PC통신이라는 새로운 트렌드가 있다"는 말을 듣는다. 아르바이트로 번 30만 원가량을 털어 1,200bps짜리 모뎀을 샀다. 1,200K가 아니라 1,200bps, 글자 한 줄이 화면에 한 자씩 찍히는 속도였다. 당시 PC통신 가입자는 전국에 몇백 명. 대부분이 연구소 연구원이었고, 대학생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그 느린 화면 안에서 그는 다른 세상을 봤다. 얼굴은 못 봐도 사람과 사람이 공감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공간. "별천지 세상이었다." 그리고 1993년, 그래픽 기반의 웹브라우저 '모자이크(Mosaic)'가 나온다. 대학원 연구실의 워크스테이션에 브라우저를 깔고 써 보며 두 사람은 직감했다. 앞으로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이 웹과 함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것. 거기에 새로운 혁신의 기회가 있으리라는 것.

02아이템 없이 비전만 들고

그가 회사를 세운 방식은 지금 기준으로도 특이했다. 특정한 아이템을 정하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황무지라 뭐가 될지 몰랐기 때문에" 잡은 건 비전 하나뿐이었다. 웹을 통해 소통과 공동체가 자라나고, 거기서 사업 기회와 혁신이 생긴다 — 그 큰 방향만 정해 두고 여러 가지를 동시에 시도했다. 지금 말로 하면 '여러 번 방향을 틀어가며(피벗) 제품과 시장의 궁합을 찾는' 방식이다.

그가 창업을 택한 이유도 거창한 야심은 아니었다. 그는 창업자를 두 부류로 나눈다. 언젠가 창업하고 싶어 하다가 좋은 아이템이 생겨 뛰어드는 쪽, 그리고 풀고 싶은 문제가 있어 그 수단으로 창업하는 쪽. "나는 후자였다." 웹이라는 새로운 물결에서 혁신을 만들고 싶었는데, 그걸 할 수 있는 기존 기업이 없었다. 다음이 거의 최초였으니, 창업은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길이었다.

"사업가가 회사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황무지에 마차를 타고 한 바퀴 돌면 자기 땅이 되는 개척기였다. 인프라가 없으니 뭘 제대로 하긴 힘들었지만, 어디를 가도 뭐든 되는 시기였다."

03한메일, 그리고 외로웠던 국민들

그렇게 여러 서비스를 시험하다 답을 만난 것이 한메일이다. 발단은 기업용 인트라넷 솔루션이었다. 인트라넷을 만들다 보면 기업들이 웹메일을 자주 요청했는데, 그 웹메일이 유난히 편해 보였다. 당시엔 메일을 보려면 전용 프로그램을 PC마다 설치해야 했고, 한 번 받아 온 메일은 그 PC에서만 보였다. 그렇다면 아이디와 비밀번호만으로, 브라우저만 있으면 세계 어디서든 메일을 보게 하자 — 지금은 너무 당연한 그 개념이 한메일의 출발이었다.

성장 속도는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한메일은 천만에서 3천만 가입자까지 4년이 채 안 걸렸다고 그는 기억한다. 인터넷이 막 시작되던 단계였으니 정말 빨랐다. 더 놀라운 건 다음 카페였다. 카페의 성장 가속도는 한메일보다 더 높았다. "우스갯소리로 내부에서 그랬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렇게 외로웠구나." 사람들이 그토록 열심히 모임을 만드는 걸 보며 한 농담이었다.

04야후, 그리고 검색이라는 분수령

경쟁은 안팎에서 왔다. 밖에서는 글로벌 강자 야후코리아, 정확히는 그 뒤의 야후 본사였다. 다음은 국내 고객의 특성을 더 잘 맞췄다. 본사가 전 서비스를 일괄 관리하던 야후는 한국화된 서비스가 적었고, 다음 카페는 PC통신의 정서를 닮아 더 한국적이었다. 그 격차를 파고든 마케팅이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이었다. "다음은 야후를 물리치겠습니다." 검색하면 늘 먼저 떴던 그 애국 마케팅을, 정작 다음 내부에서는 "이 광고 창피하다"고 했다고 그는 솔직히 털어놓는다. 다양성과 개방을 표방하던 회사 색깔과는 어긋났지만, 그만큼 그 시절의 경쟁이 절박했다.

안에서의 경쟁자는 네이버였다. 그가 짚는 패인은 '검색으로의 권력 이동'이다. 네이버는 설립 때부터 검색이 주력인 회사였고, 검색을 기반으로 다른 서비스를 붙였다. 반면 다음은 메일과 카페를 주력으로 키운 뒤 검색을 붙였다. 초기엔 메일·카페 사용자가 압도적이라 다음의 검색량이 네이버의 열 배에 달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이든 네이버에서 검색해 들어가는 흐름으로 바뀌자, 검색된 네이버 카페에 가입하고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쓰는 식으로 격차가 벌어졌다.

그는 이 대목에서 솔직하다. "네이버보다 다음의 검색 기능이 뛰어난 적은 별로 없었다." 다만 자원 배분의 아쉬움은 남는다. 검색이 중요하다는 보고는 내부에서도 올라왔지만, 네이버가 검색 한 축으로 확장할 때 다음은 여러 서비스로 넓게 펼치다 선택과 집중에서 밀렸다. "검색에 좀 더 직접 붙였더라면 따라잡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05정점에서 내려와, 다른 이의 첫 길로

IMF의 한가운데서도 다음은 자금을 구했다. 돈이 마른 시기였기에 가족과 친척에게까지 돈을 빌리며 버텼고, 결국 독일의 미디어 기업 베텔스만에서 500만 달러를 투자받았다. 환율이 치솟던 때라 지금 가치로 가깝게 환산하면 막대한 금액이었다. 데이콤의 전략 투자와 미래에셋의 상장 전 투자가 더해져, 회사는 1999년 가을 코스닥에 올랐다. 법인 설립부터 상장까지 딱 4년,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정점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너무 정신없이 살아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잘 모를" 4년이었다는 아쉬움, 그리고 다음 시절 몇 번 해 본 엔젤 투자에서 느낀 보람이 그를 다른 길로 이끌었다. 자기에겐 별것 아닌 조언이 후배 창업가의 시행착오를 줄여 주는 걸 보며 든 생각. 2008년, 그는 함께 창업했던 동업자와 나란히 다음을 떠나 투자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렇게 만든 것이 매쉬업이다. 여러 곡을 섞어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매시업'처럼, 창업가와 투자자와 생태계가 협력해 새 혁신을 빚자는 뜻이었다.

투자자로서 그가 거듭 강조하는 한 문장이 있다. "설문조사를 믿지 말고 지표를 믿어라. 고객의 말이 아니라 고객의 행동을 보라." 그렇게 봐 온 팀들 가운데는 마이리얼트립, 스타일쉐어, 눔, 오늘의집처럼 모바일 시대를 대표하게 된 회사들이 있다. 그가 처음과 끝을 관통해 꼽는 자질은 한결같다. 문제 해결력, 그리고 끈기. "고객이 좋아하는 서비스라면, 그 믿음을 가지고 계속 가시라. 언젠가 봄은 온다." 빈손의 황무지에서 시작해 세 번의 물결을 건넌 사람의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비유

이택경의 시작은 아직 길이 없는 황무지에 처음 마차를 몬 개척자와 같다. 포장도로도 표지판도 없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지만, 바로 그래서 한 바퀴 돌기만 하면 그 땅이 자기 것이 되는 시절이었다. 다음은 그렇게 웹이라는 빈 들판에 처음 낸 길이었다.

정점에서 투자자로 옮겨 간 그의 선택은 먼저 산을 오른 사람이 밧줄을 내려 주는 일과 같다. 자기는 이미 정상을 봤으니, 이제 뒤따라 오르는 이들이 헛디딜 곳을 미리 일러 주는 자리로 내려온 셈이다. 끈기라는 말은, 그 밧줄을 끝까지 붙잡고 오르라는 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