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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규칙은 끝났고 새 규칙은 없다 — 로렌스 웡이 본 탈미국 세계

세계에서 가장 개방된 나라의 총리가 지금의 국제 질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옛 규칙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새 규칙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미국이 세계의 보증인 자리에서 물러나는데 그 빈자리를 채울 나라는 없다. 그 어수선한 전환기에서, 작은 나라는 어떻게 살아남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2026년 6월 14일

큰 나라의 지도자는 질서를 만든다고 말하고, 작은 나라의 지도자는 질서를 읽는다고 말한다.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세계화된 나라이고, 그래서 바깥 세상의 날씨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한다. 진행자가 "당신은 규칙과 정밀함과 수학을 좋아한다"고 운을 떼자 총리는 곧바로 정정한다. "우리는 안정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가 지금 마주한 세계에는 바로 그 안정이 사라지고 있다.

먼저 정리 화자는 로렌스 웡(Lawrence Wong)이다. 싱가포르의 현직 총리이자 집권당 인민행동당(PAP)을 이끄는 지도자다. 이 대화는 한 국제 매체와의 대담으로, 관세 전쟁과 미중 갈등 한가운데에서 작은 나라가 택할 생존 전략, 그리고 그가 목격하는 세계 질서의 근본적 전환을 짚는다. 본문의 인용은 모두 영상 속 발언을 옮긴 것이다.

01대전환 — "어수선하고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웡은 지금을 "다극 세계로 가는 거대한 전환의 한복판"이라고 규정한다. 그가 쓰는 표현은 두 단어다. 탈미국 질서(post-American order), 그리고 다극(multi-polar) 세계. 이 전환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고 그는 말한다. "어수선하고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이유는 구조적이다. "미국이 세계의 보증인 역할에서 물러나고 있는데, 그 공백을 채울 능력이 있거나 의지가 있는 다른 나라가 없다." 그래서 세계는 불편한 자리에 놓인다. 옛 규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데, 새 규칙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더 많은 격랑에 대비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웡의 답은 단호하다. 가만히 기다리거나 어떻게든 일이 저절로 풀리기를 바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행동해야 한다. 지금 계획을 세우고 함께 투자하기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무역 연결망을 짓고, 무역 자유화의 동력을 이어 가는 일. 싱가포르 혼자서는 못 한다. 그러나 뜻이 맞는 나라들과 함께라면 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02미국의 불만은 정당한가 — "무임승차자는 있었다"

진행자가 핵심을 찌른다. 미국이 "이용당했다, 당연하게 여겨졌다"고 말하는 데에 일리가 있느냐는 것이다. 웡은 회피하지 않는다. "일부는 정당할 수 있다. 무임승차자(free rider)가 있었던 게 사실이고, 나라들은 자기 경제 안보와 안정에 더 많이 투자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그는 싱가포르를 예외로 둔다. "우리는 한 번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다. 해마다 우리 안보와 국방에 투자해 왔고, 이 지역에서 미국의 주둔도 도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한 일의 한 가지 효과는, 많은 나라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기 안보에 더 투자하도록 자극한 것이라고 그는 인정한다.

하지만 거기서 결정적인 단서를 단다. 그 자기성찰이 좋은 결과를 낳더라도, 그 행동의 대가로 오늘의 세계 질서가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되돌아갈 길은 없다고 본다. 새로운 다극 세계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가 미국에서 벌어진 일을 일시적 현상으로 보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미국의 정치 문화, 나아가 미국 사회 자체의 더 넓은 변화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자신이 만든 질서에서 이득을 보지 못했다는 정서, 그 질서를 떠받칠 무거운 짐을 더는 지지 않겠다는 정서. "이건 이번 정부를 넘어서는 문제다."

03다극은 세력권이 아니다 — ASEAN이라는 열린 마당

다극 세계가 곧 세력권(spheres of influence)으로 갈라지는 것을 뜻하느냐는 질문에, 웡은 분명히 선을 긋는다. 미국 정부의 운영 방식을 보면 몇몇 강대국이 각자의 구역을 나눠 갖는 그림을 선호하는 듯 보인다는 지적에, 그는 그렇게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답한다. "세계가 배타적 블록과 세력권으로 끝난다면, 더 위험하고 불안정해질 것이다."

그가 그리는 다극은 다르다. 여전히 세계적 연결을 만들어 내는 다극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동남아시아의 ASEAN을 "모든 강대국과 열리고 포용적인 방식으로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한다. 한쪽 편에 줄 서는 진영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린 마당.

웡은 ASEAN의 성취를 평가절하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동남아시아는 수많은 민족과 언어와 종교로 이뤄진 극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지역이고, 한때 지리적 분열 때문에 "아시아의 발칸"이라 불렸다. 그런데도 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래 수십 년간 큰 충돌을 피하고 상대적 평화를 지켜 왔다. "ASEAN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흥미롭게도, 미국이 부과한 관세가 오히려 ASEAN 지도자들이 더 절박하게 통합을 서두르도록 만들었다고 그는 덧붙인다.

04관세의 현실 — "0%가 정답인데 10%가 새 기준이 됐다"

싱가포르는 비교적 가볍게 넘어갔다. 미국과의 상품·서비스 무역에서 적자가 없기 때문에 세율이 10%에 그쳤다. 그러나 이웃 나라들은 사정이 다르다. 일부는 가장 높은 관세를 맞았고, 협상 끝에 대략 19% 선에 안착했다. 진행자가 짚는다. 이제는 10%나 20%조차 사실상 "안도"로 느껴진다고. 웡도 동의한다. 하지만 곧 본질을 끄집어낸다.

"우리 입장에서 옳은 숫자는 0%다. 그런데 10%가 새로운 기준이 되어 버렸다. 어쩌겠는가."

위쪽 막대그래프는 미국이 매긴 관세율 비교. 로렌스 웡이 말한 '정답' 0%, 싱가포르가 받은 10%, 이웃 나라들이 협상 끝에 안착한 19%를 나란히 보여준다. 아래쪽 도식은 한 나라(미국)가 규칙을 보증하던 단극 질서가, 여러 극이 존재하지만 중심이 빈 다극 질서로 전환되는 모습을 화살표로 표현한다.

관세의 현실과 질서의 전환. 협상으로 세율을 깎아도 0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고, 한 나라가 규칙을 보증하던 시대는 끝나 가지만 그 빈자리를 채울 나라는 보이지 않는다.

관세가 미국의 위상에 입힌 상처는 분명하다고 웡은 인정한다.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이 이 지역에 등을 돌렸다"는 감정이 커졌다는 진행자의 말에, 그는 그 충격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균형을 잡는다. 동남아 나라들은 여전히 미국이 이 지역 최대 투자국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최대 교역 상대는 중국이지만, 외국인 직접투자(FDI)로 보면 미국이 여전히 최대 투자국이다." 그래서 모두가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하고, 그래서 그토록 길게 협상한 것이다.

경제 성장이 관세 충격에도 별로 흔들리지 않은 점에 대해 그는 세 가지 이유를 든다. 실제 시행된 관세가 처음 위협만큼 높지 않았고, 미리 당겨 둔 거래 활동(front loading)이 충격을 완화했으며, 인공지능(AI)과 신기술 덕분에 경제가 그런대로 버텨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향은 올 것이라고 그는 못박는다. "싱가포르 경제는 탄광 속 카나리아다. 너무 개방돼 있어서, 바깥 환경이 약해지면 가장 먼저 느낀다." 올 상반기엔 느끼지 못했지만, 하반기로 접어들며 불확실성 탓에 기업들이 신규 투자와 채용을 미루고 경기 둔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한다.

05미국과 중국 — 서로를 죄면 함께 무너진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길을 찾느냐는 질문에, 웡은 한발 물러서서 그 관계 자체를 본다. "세계에서 가장 중대한 관계이자, 국제 관계에서 가장 위험한 단층선"이라는 것이다. 두 나라는 서로에게서 자신을 격리하려 하면서도, 경제는 깊이 얽혀 있고, 서로의 약점을 지렛대로 쓸 길목(choke point)을 찾고 있다.

문제는 그 역학이다. "한쪽이 경제를 조이면 다른 쪽이 즉시 되받아친다. 결국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한쪽이 어떤 의존을 무기로 쓰는 순간, 다른 쪽은 대안을 찾도록 내몰린다. 미국이 반도체를 통제하면 중국은 우회로를 찾고 기술 자립을 추구한다. 중국이 희토류를 통제하면, 웡의 말마따나 "그것이 사실은 그리 희귀하지 않다는 걸 모두가 깨닫게 될 것"이다. 미국과 동맹들은 대안을 찾을 것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로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이렇다. "공급의 탄력성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역학의 끝에서, 그는 미국과 중국이 결국 새로운 공존의 방식(modus vivendi)에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서로 공존하는 법을 찾는 것. 당장 무역 합의가 모든 것을 풀어 줄 전략적 합의는 아닐지라도, 경제 관계를 관리할 최소한의 안전난간(guardrail)이라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그는 말한다. 미국과 중국이 완전한 디커플링으로 치닫지 않고 공존할 수만 있다면, 싱가포르와 ASEAN은 이 새 환경을 항해하며 양쪽 모두와 관계를 이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06중국은 '떠오르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떠오른' 나라다

미국의 경제 민족주의가 역설적으로 중국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웡은 중국 사회 전반에 커지는 자신감을 짚는다. 중국의 부상이 세계 곳곳에 불안을 일으키는 것은, 단지 거대한 규모의 신흥 강국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경제 모델과 정치 체제를 가진 강국"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본다. 그러면서 세계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을 말한다. "중국은 서구의 규범으로 수렴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자기만의 근대화 경로를 찾을 것이다."

중국의 1인당 GDP는 아직 미국의 5분의 1 수준이어서 따라잡을 성장 여력이 크지만, 어떤 분야에서는 이미 추격을 넘어섰다고 그는 말한다. 첨단 제조업과 재생에너지 같은 영역에서는 기술 선도국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그저 떠오르는 강국이 아니라, 이미 떠오른 강국이다." 그 증거로 그는 중국이 최근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자국에 주어졌던 특별·차등 대우 조항을 스스로 포기하기로 한 것, 그리고 지난 한 해 동안 국제기구에 대한 지지를 배로 늘린 것을 든다. 중국이 세계 체제에서 핵심 행위자, 나아가 핵심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싱가포르는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 중국과의 강한 무역 관계 사이에서 결국 선택을 강요받는 지점에 다다른 것 아닌가. 웡의 대답은 의외로 침착하다. 방금 한 모든 말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중국은 아직 미국의 역할을 대신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국내에 많은 도전을 안은 중간소득 국가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 지도자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우리는 매우 어수선한 전환기에 있다. 이 시기는 수년, 어쩌면 십 년 넘게 이어질 수 있다.

07작은 나라의 생존 전략 — 비슷한 처지의 나라들끼리

그래서 싱가포르는 무엇을 하는가. 웡의 전략은 여러 갈래로 동시에 진행된다. 첫째, WTO 같은 기존 기구를 되살리는 일이다. WTO의 만장일치 의사결정 원칙은 한때 귀중한 가치였지만 이제 "마비의 공식"이 되어 버렸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뜻 맞는 일부 나라끼리 먼저 움직이는 복수국 간 합의(plurilateral)가 출발할 수 있도록 길을 터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역할을 배제하지는 않되, "일부가 먼저 움직여 동력을 유지하자"는 것이 그의 제안이다.

둘째, 새로운 길을 여는 시도다. 그가 직접 추진하는 것은 작고 중간 규모이면서 무역에 크게 의존하는 경제들의 모임 — 미래 투자·무역 파트너십이다. 규칙 기반 무역 체제를 지키려는 점에서 처지가 닮은 약 15개 경제가 모였다. 이미 거의 무관세 상태이기 때문에, 자유무역협정(FTA)을 또 맺자는 게 아니라 새로운 발상을 테이블에 올리자는 것이다.

~15
새 파트너십에 모인
중소 무역의존 경제
19%
이웃 나라들이 협상 끝
안착한 미국 관세율
1/5
미국 대비
중국의 1인당 GDP

구체적으로는 규칙과 규정, 통관, 서류를 표준화해 기업들이 여러 나라를 넘나들며 손쉽게 사업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전자 송장과 데이터 흐름 같은 기술을 매개로 삼는다. 이런 새로운 시도가 자리를 잡으면, 언젠가 그것을 WTO의 원칙으로 다자화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 그의 그림이다. "불확실하고 어수선한 전환기에, 우리는 뜻 맞는 나라들과 손잡고 중요한 다자 틀을 지키고 강화할 길을 찾아야 한다."

미국에 대한 대규모 투자자로서, 연방준비제도(Fed)를 향한 공격과 경제 정책의 예측 불가능성을 보면서도 투자를 줄이지 않는 이유도 그는 설명한다. 거시적 위험만이 아니라 개별 기업의 역동성과 성장 전망을 함께 본다는 것이다. 미국의 거시 위험 프리미엄이 높아졌어도, 여전히 최첨단 기술과 엄청난 기업 활력이 보이기에 투자를 유지한다. "그러나 미국 한 곳만은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 세계 곳곳에서 기회를 계속 찾는다."

08가장 힘들었던 일 — 사람을 내려놓는 것

웡은 이 전환기가 국내에도 그늘을 드리운다고 본다. 세계 곳곳에서 젊은 세대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탕핑(lying flat)", 일본에서는 히키코모리, 미국과 유럽에서는 "대퇴직(great resignation)" 같은 말이 등장했다. 환경이 덜 안정적이고 더 혼란스러우니 젊은이들이 자기 미래를 더 걱정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그는 말한다. 싱가포르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정치적·국내적 초점은 "젊은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총리가 된 뒤 가장 힘들었던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트럼프를 아직 만나지 못한 일이라는 농담 섞인 답을 지나 진짜 속내를 꺼낸다.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이 자리에 와 보기 전에는 그 무게를 모른다." 그는 총리이면서 동시에 당을 이끄는 사람이다. 선거를 치르려면 팀을 새로 짜야 하고, 그러려면 누군가를 내려놓아야 한다.

PAP의 성공 비결 중 하나가 선거 때마다 팀을 쇄신해 온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현상 유지가 편하지만, 쇄신을 게을리하면 5년, 10년, 20년 뒤에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팀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 만나 "미안하지만 함께 갈 수 없다"고 말해야 했다. "그것이 정말 고통스러웠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해내야 했다." 좋은 선거 결과로 끝나 다행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가장 위험한 단층선과 가장 거대한 전환을 이야기하던 지도자가, 마지막에 가장 인간적인 무게를 털어놓는 대목이다.

비유

지금의 세계는 관리인이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큰 아파트 단지와 같다. 그동안은 한 관리인(미국)이 규칙을 정하고 분쟁을 중재했는데, 이제 그가 손을 떼려 한다. 그런데 그 일을 대신 맡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옛 관리 규칙은 더 이상 통하지 않고, 새 규칙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어수선한 시기. 웡의 처방은 단순하다. 빈 관리실을 멍하니 바라보지 말고, 처지가 비슷한 이웃들끼리 먼저 모여 "우리 동만이라도 쓰레기 분리 규칙을 정하자"며 작은 합의부터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관세는 한 번 올라간 천장과 같다. 협상으로 19%를 10%까지 낮춰도 원래의 0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낮아진 것에 안도하는 사이, 어느새 10%가 '정상'이 되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