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탐구 · 과학기술
전봇대 위 변압기부터 전기차 충전기, 잠수함의 추진 전동기, 전기차 배터리 음극재까지. 우리가 매일 의지하는 ‘전기’의 품질과 안전을 떠받치는 연구기관이 경남 창원에 있다. 설립 반세기를 앞둔 한국전기연구원(KERI, Korea Electrotechnology Research Institute)의 역사와 구조,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기술들을 정리했다.
주요 수치 한눈에 보기. ‘세계 3대’와 ‘8,000 MVA’의 의미는 본문에서 설명한다.
한국에는 20여 개의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이 있다. 그중에는 화학·기계·재료·전자통신처럼 넓은 영역을 다루는 곳이 많다. 한국전기연구원은 이름 그대로 전기 한 분야에 집중하는, 국내에 하나뿐인 전문 출연연이다.
여기서 말하는 ‘전기’는 가전제품 콘센트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수백 킬로미터 밖 도시까지 안전하게 보내는 송배전망, 그 전기를 끊고 잇는 차단기와 변압기 같은 중전기기(重電機器), 전기를 원하는 형태로 바꾸는 전력반도체, 전기를 저장하는 이차전지, 전기로 움직이는 전동기와 선박·자동차까지. 전기가 ‘만들어지고 → 보내지고 → 쓰이는’ 전 과정의 기반 기술이 KERI의 무대다.
소속 관계를 정리하면 이렇다. KERI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National Research Council of Science and Technology)가 관리하는 기타공공기관이다. 국가가 출연금을 대고, 그 위에서 국가·기업이 의뢰하는 연구와 시험을 수행한다.
KERI의 출발은 1976년 12월 29일 세워진 한국전기기기시험연구소다. 당시 한국은 중화학공업 육성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고, 국산 전기기기가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검증할 ‘시험 인프라’가 절실했다. 연구보다 ‘시험’이 먼저 기관 이름에 박힌 것은 그 때문이다.
덜 알려진 사실 하나. 1981년 정부의 연구기관 통폐합 정책에 따라, 전기기기시험연구소는 통신 분야 연구소와 합쳐져 한국전기통신연구소가 됐다. 이 조직이 훗날 통신·전자 분야의 대표 출연연인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Electronics and Telecommunications Research Institute)으로 이어진다. 즉 한동안 KERI와 ETRI는 한 지붕 아래 있었다. 1985년 6월, 전기 분야가 다시 분리·독립하면서 한국전기연구소가 발족했고, 2001년 지금의 이름인 한국전기연구원으로 바뀌었다.
연혁 요약
창원 본원을 중심으로 보면, 처음에는 시험 기능이 컸지만 시간이 지나며 원천기술 연구의 비중이 함께 커졌다. ‘시험으로 시작해 연구로 확장한’ 궤적은 오늘날 KERI가 가진 두 개의 정체성, 곧 연구개발과 시험인증이라는 두 축의 뿌리이기도 하다.
KERI의 연구 조직은 전기가 만들어져 쓰일 때까지의 흐름을 따라 짜여 있다고 보면 이해가 쉽다. 크게 네 개의 연구본부(전력망·전기기기·전기응용·전기재료)와, 분원에 자리한 두 개의 연구단(안산의 전기의료기기, 광주의 스마트그리드)으로 구성된다.
전기가 ‘생산 → 수송 → 변환·저장 → 활용’으로 흐르는 동안 각 단계에 KERI의 연구본부가 대응한다. 시험·인증은 전 단계를 가로지르는 별도의 축이며, 안산·광주 분원에는 특화 연구단이 있다.
거점은 네 곳이다. 경남 창원 본원이 중심으로 전력·전기기기·전기재료 연구와 대전력 시험설비가 모여 있다. 경기 안산분원은 전기의료기기와 전자기파, 그리고 전기차 충전 시험을, 경기 의왕분원은 배전급 단락시험 등을, 광주 스마트그리드본부는 신재생·분산전력 변환 기술을 맡는다.
대부분의 출연연은 ‘연구’가 핵심 업무다. KERI는 여기에 ‘시험인증’이라는 또 하나의 엔진을 함께 돌린다. 이 둘은 분리된 일이 아니라 서로를 밀어준다. 시험설비를 다루며 쌓은 데이터가 연구의 밑천이 되고, 연구로 쌓은 이해가 시험기술의 깊이를 더한다.
전력망 운영, 중전기기, 전력반도체, 이차전지, 초전도, 전동기·정밀제어, 전기의료기기 등 전기 전 분야의 원천기술을 개발하고 기업에 이전한다.
국가가 인정하는 공인기관으로서, 만들어진 전기기기가 국제표준과 안전 기준에 맞는지 시험하고 인증서를 발급한다. 기업의 제품이 세계 시장에서 통하게 하는 ‘여권’ 역할이다.
KERI는 스스로를 ‘전기 시험 분야 세계 3대 국제공인 시험인증기관’으로 소개한다. 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핵심은 대전력 단락시험이라는 특수한 시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세계적으로 드물다는 데 있다.
비유로 이해하기 — 전기기기의 ‘충돌 시험’
자동차 회사는 신차를 팔기 전에 멀쩡한 차를 벽에 일부러 들이받는 충돌시험을 한다. 사고가 났을 때 사람이 안전한지 통제된 환경에서 미리 확인하기 위해서다. 전기기기에도 똑같은 발상이 필요하다.
전력망에서 사고(단락, short-circuit)가 나면 평소의 수십~수백 배에 달하는 거대한 전류가 순식간에 흐른다. 차단기는 그 순간 불꽃(아크)을 견디며 회로를 끊어야 한다. 이게 안 되면 화재와 정전이 도시 규모로 번진다. 그래서 일부러 사고를 일으켜, 차단기가 그 충격을 버티고 정상적으로 끊는지 확인하는 것이 단락시험이다.
단락시험 개념도. ‘MVA’는 전력의 크기 단위로, 8,000 MVA는 통제된 환경에서 순간적으로 만들어 내는 시험 전력의 규모를 가리킨다.
이런 시험은 거대한 전용 발전기와 안전 설비, 그리고 결과를 표준에 맞춰 판정할 기술력을 모두 갖춰야 가능하다. KERI는 단락시험 분야 국제 협의체인 STL(Short-circuit Testing Liaison, 단락시험협의체)의 정회원으로, 여기서 발급한 인증은 전 세계에서 통용된다. 국내 차단기·변압기 제조사가 해외에 수출할 때 KERI의 시험성적서가 사실상의 통행증이 되는 이유다.
연구기관의 가치는 결국 ‘무엇을 만들어 냈는가’로 드러난다. KERI가 최근 십수 년간 내놓은 대표 성과 가운데, 일상이나 산업과 맞닿은 것들을 골라 정리했다.
전력반도체는 전류의 방향과 전력 변환을 제어하는 핵심 부품이다. 그중 탄화규소(SiC, Silicon Carbide)는 실리콘보다 고온·고전압에서 효율이 높아 전기차 구동장치와 대용량 전력변환에 쓰인다. KERI는 트렌치 구조 SiC 모스펫(MOSFET) 제조 원천기술을 확보해 전문기업에 이전했고(기술료 30억 원대 규모), 최근에는 우주 방사선 환경에서도 견디는 내방사선 SiC 소자 평가기술까지 연구 범위를 넓혔다.
전기차반도체 국산화우주 부품리튬이온전지의 음극에 흑연 대신 실리콘을 쓰면 에너지 밀도를 크게 높일 수 있지만, 충·방전 때 부피가 부풀어 수명이 짧아지는 문제가 있다. KERI는 실리콘 알갱이를 그래핀이 껍질처럼 감싸는 코어-셸 구조로 이 문제를 완화하고, 값싼 마이크로미터급 실리콘으로 대량생산하는 공정까지 개발했다. 이 기술은 기업에 이전되어 양산 기반 구축으로 이어졌고,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에도 실렸다.
배터리주행거리 향상양산 공정전기 저항이 ‘0’이 되는 초전도 현상을 이용하면 같은 크기로 훨씬 강한 자기장을 만들 수 있다. KERI는 초전도 전자석을 더 작고 가볍게 만드는 기술을 연구한다. 이는 의료영상장비, 가속기, 미래 전력기기 등 강한 자기장이 필요한 분야의 기반이 된다.
자기장의료·가속기전기는 저장해 두기 어렵고, 만든 만큼 즉시 써야 한다. 그래서 ‘지금 어디서 얼마를 만들고 어디로 보낼지’를 실시간으로 조율하는 운영시스템이 핵심이다. KERI는 한국형 배전자동화시스템(KODAS)과 차세대 전력계통운영시스템(EMS, Energy Management System) 같은 기술을 상용화해,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전기품질(정전이 드문 정도)을 유지하는 데 기여해 왔다. 최근에는 변동성이 큰 신재생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통합·운영하는 기술도 기업에 이전했다.
정전 예방신재생 통합전기품질전기차를 충전하려는데 특정 충전기에서 차가 인식되지 않거나 중간에 멈추는 일이 흔하다. 차량과 충전기 제조사가 제각각이라 ‘서로 말이 통하는지(상호운용성)’를 검증할 곳이 필요하다. KERI는 안산분원에 세계 최초로 전기차 글로벌 상호운용성 시험센터(GiOTEC)를 열었고, 국제 충전표준 협의체 CharIN으로부터 관련 평가기관으로 지정받았다.
전기차 충전세계 최초국제표준창원 본원에는 전기로 움직이는 선박의 추진 시스템을 육상에서 미리 검증하는 전기선박육상시험소(LBTS, Land Based Test Site)가 있다. KERI는 이 설비를 활용해 국산 잠수함 ‘장보고-Ⅲ 배치(Batch)-Ⅱ’ 1번함의 진수에 기여했다. 함정의 전기추진은 정숙성과 직결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기술이다.
전기추진국방공작기계의 두뇌에 해당하는 수치제어장치(CNC, 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는 오랫동안 해외 의존도가 높았다. KERI는 인공지능을 접목한 CNC의 국산화·첨단화를 실증하는 센터를 열어, 제조업의 기반 장비 자립을 지원하고 있다.
제조 자립인공지능KERI는 2025년 창립 49주년 기념식에서 ‘전기로 세상을 이롭게’라는 비전을 내세웠고, 2026년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반세기를 정리하는 해인 만큼 안팎으로 움직임이 적지 않다.
대외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미국 시장 진출이다. 2026년 초 KERI는 미국 캘리포니아 에너지위원회(CEC)가 발주한 400만 달러(약 56억 원) 규모의 전기차 충전 시험 인프라 사업 ‘차지 야드(Charge Yard)’를 수주했다. 안산분원 GiOTEC의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같은 방식의 상호운용성 시험센터를 구축하는 사업으로, 유럽 등 경쟁자를 제치고 따냈다. 국산 시험인증 체계를 해외에 ‘이식’하는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운영 측면에서는 인공지능을 업무 전반에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리더십 변화도 있었다. 2023년 1월 취임한 김남균 제15대 원장의 임기가 2026년 초에 마무리되면서, 같은 해 후임 원장 선임 절차가 진행됐다. 김 원장은 서울대에서 무기재료공학을 전공하고 1990년 KERI에 입사해 전력반도체연구센터장과 연구부원장 등을 거친, 이른바 ‘정통 KERI인’이었다.
전기 기술은 화려하지 않다. 스마트폰 신제품처럼 매년 사람들을 줄 세우지도 않는다. 그러나 전기가 한 번 끊기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모든 것이 멈춘다. 그 ‘당연함’을 지키는 일은 발전소와 송전탑만으로 되지 않는다. 차단기가 사고를 제대로 끊는지 검증하고, 새로운 전력반도체와 배터리를 먼저 개발해 두고, 신재생에너지가 늘어나도 전력망이 흔들리지 않게 운영 기술을 다듬는 — 보이지 않는 기반 연구가 필요하다.
KERI가 ‘전기 한 분야’를 50년간 파고든 결과는, 한국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전기품질과 중전기기·시험인증 경쟁력을 갖게 된 배경의 한 축이다. 전기차·인공지능·데이터센터로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탄소중립으로 전력망의 구조 자체가 바뀌는 지금, 이런 기관의 쓸모는 줄기는커녕 더 커지는 쪽에 가깝다.
전기는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움직일 것이다. 그 흐름의 품질과 안전을 묵묵히 받치는 자리에, 창원의 이 연구기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