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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 · 개혁주의 신학

성경을 보는 관점 — 구약은 거울, 신약은 길

열왕기를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답답해진다. "하나님만 섬기면 되는 그 간단한 일을, 이스라엘은 왜 그토록 못 지켰을까?" 한국 개혁주의 설교자 박영선 목사는 이 물음을 뒤집는다. 문제는 신앙이 간단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읽는 우리의 관점이 어긋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영선 목사(1948~ )는 1985년 서울에 남포교회를 세워 30년간 강해설교로 한국 교회에 깊은 자취를 남긴 개혁주의 설교자다. 대표 설교집 『하나님의 열심』, 『믿음의 본질』, 『다시 보는 로마서』로 알려져 있다. 이 글은 그가 풀어낸 '성경을 보는 관점'을 일반 독자가 따라갈 수 있도록 재구성하고, 그 성경적·신학적 배경을 보강한 것이다.

1.왜 이 간단한 신앙을 못 지켰을까

구약의 역사서, 특히 사사기와 열왕기를 펼치면 같은 장면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한 세대는 하나님을 섬기다가, 다음 세대는 우상에게 돌아선다. 왕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왕"과 "악을 행한 왕"으로 갈려 기록된다. 읽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그 단순한 명령을 왜 그렇게 못 지켰을까.

박영선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백성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신앙에 바라는 것은 대개 '만사형통'이다. 내 일이 풀리고, 내 뜻대로 되고, 평안한 것.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그 자리에 가만히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 하신다. 바로 거기서 신앙의 충돌이 시작된다.

이 충돌을 이해하려면 먼저 구약이 무엇을 하는 책인지부터 다시 봐야 한다.

2.구약은 거울이다

박영선이 거듭 강조하는 명제가 있다. 구약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진면목을 보여주시는 것을 보는 일이다. 구약의 긴 실패의 역사 — 출애굽 이후의 광야, 사사 시대의 혼란, 왕국의 분열, 바벨론 포로 — 는 우연한 흑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너희의 정체가 무엇인가, 너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이 내 뜻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비춰 보이시는 거울이다.

그래서 구약은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인간의 바닥이 드러난 그 자리에서 신약이 시작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기로 하셨는가" — 그 아들이 오신다. 구약과 신약은 분리된 두 책이 아니라, 한 이야기의 두 국면이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 구약은 거울, 신약은 길, 둘은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 구약 — 거울인간의 진면목과 한계를 비춘다 신약 — 길길·진리·생명이 찾아온다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 우리를 믿음과 사랑의 상대역으로 빚으심
구약은 인간의 진면목을 비추는 거울이고, 신약은 그 인간에게 찾아오는 길이다. 두 국면은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데려가려는 그 '다른 곳'은 어디인가. 박영선의 신학에서 이 질문이 모든 것의 열쇠다.

3.믿음과 사랑은 '상대'가 필요하다

기독교를 특징짓는 두 단어를 꼽으라면 박영선은 믿음과 사랑을 든다. 그런데 이 두 가지에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둘 다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도 사랑도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상대는 대등해야 한다. 사랑이 한쪽으로 크게 기울면 동정(同情)이 되어 버리고, 믿음이 대등하지 않으면 강제력이 되어 버린다. 진짜 사랑과 진짜 믿음은 양쪽이 자발적으로 마음을 줄 때만 생긴다. 그리고 자발성이 있으려면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 강요된 사랑, 강요된 신뢰는 이미 사랑도 신뢰도 아니다.

박영선이 보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한 피조물이나 학생으로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을 나눌 상대역으로 빚으려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과 마주 설 만한 자리에 가려면 사람은 자라야 한다. 지혜와 분별과 통찰은 책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직접 겪고, 부딪치고, 실패해 봐야 비로소 생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인생에 자유를 허락하시고, 자라나고 겪고 실패하도록 두신다.

이해를 돕는 비유

체스를 둘 줄 아는 사람이 막 규칙을 배운 어린아이와 진지하게 한 판을 두려 한다고 해보자. 매번 봐주고 일부러 져 준다면, 그건 둘이 '함께 두는' 것이 아니라 어른의 일방적인 배려일 뿐이다. 아이가 진짜 상대가 되려면 수없이 지면서 스스로 수읽기를 익혀야 한다.

박영선이 말하는 하나님의 방식이 이와 닮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봐주고 안고 가는 대신, 실패까지 포함한 자유를 주신다. 그것이 매정해 보일 때가 있지만, 그래야 우리가 '상대'가 되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은 실패와 자책을 요구하시는지, 왜 우리를 거의 절망에까지 몰아넣으시는지 — 그것이 나의 큰 관심사였다. 박영선, 설교 사역 40년을 돌아보며 (2023)

4.도덕과 윤리라는 함정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상대역으로 키우시는 일에, 의외의 방해물이 등장한다. 박영선은 그것을 도덕과 윤리라고 지목한다. 선하게 사는 일이 어떻게 신앙의 방해가 된다는 말인가.

문제는 도덕과 윤리가 '인간이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데 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최선의 경지를 만들어내면, 그 최선이 너무 만족스러운 나머지 더 갈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가지 못한다. 자기가 세운 '의(義)'에 갇히는 것이다. 도덕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이 최후의 심판자가 되는 구조다. 거기에는 '상대'가 끼어들 틈이 없다. 믿음과 사랑이 자라야 할 자리를 자기만족이 차지해 버린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분석한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자기 의를 세우려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진단한다(로마서 10장 3절). 율법을 지키는 그 성실함 자체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이해를 돕는 비유

평생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우등생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자기 노력의 결과가 자랑스럽고, 그 자부심은 정당하다. 그런데 바로 그 자부심 때문에, 누군가 그에게 "성적과 무관하게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잘했으니까"라는 계산이 먼저 작동하기 때문이다.

박영선이 말하는 '자기 의의 함정'이 이렇다. 도덕적 성취가 클수록,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 앞에서 더 뻣뻣해진다. 한국 교회가 빠지기 쉬운 율법주의·완전주의에 대한 그의 오랜 경고가 여기서 나온다.

5.우상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도덕과 종교성에 갇혀 있을 때 실제로 무엇을 섬기게 되는가. 박영선은 '우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우상이란, 내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대신 이뤄주되, 나를 향한 어떤 목적이나 뜻도 갖지 않는 신이다.

우상과 인간의 관계는 철저히 거래다. 나는 정성과 제물을 바치고, 우상은 그 대가로 내 소원을 들어준다. 딱 거기까지다. 우상은 자신을 섬기는 자를 위한 계획도, 의지도, 간섭도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는 한에서만 신일 뿐,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상은 편하다. 나를 바꾸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목적이 있다. 우리를 자녀로, 믿음과 사랑의 상대역으로 빚으려 하신다. 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그대로 들어주시지 않을 때가 많다. 사람들이 우상을 더 편하게 느끼는 이유, 그리고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우상에게 돌아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종류의 신앙 우상을 향한 신앙은 거래이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목적이 있다 두 종류의 신앙 — 무엇을 향하는가 우상을 향함 우상 정성·제물 소원 성취 거래는 있으나, 나를 향한 뜻은 없다 하나님을 향함 하나님 자유·연단 그 아들까지 나를 자녀이자 상대역으로 빚으신다
우상을 향한 신앙은 정성과 소원을 주고받는 거래에 머문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나를 향한 목적이 있기에, 자유와 연단을 거쳐 나를 빚어 간다.
이해를 돕는 비유

자판기와 부모를 비교해 보자. 자판기는 정확히 동전만큼만 돌려준다. 요구한 것을 주고, 그 이상은 아무 관심이 없다. 편리하지만, 자판기는 나를 위한 어떤 뜻도 품지 않는다.

부모는 다르다. 부모는 아이가 달라는 것을 늘 그대로 주지는 않는다. 사탕만 달라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게임기 대신 책을 권한다. 그 '거절'은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이다. 박영선이 말하는 우상은 자판기이고, 하나님은 부모다.

우상은 내 소원을 들어주지만, 하나님은 나를 빚으신다.

6.열왕기의 선과 악, 그 반복

이 관점으로 열왕기를 다시 읽으면, 끝없이 반복되는 선한 왕과 악한 왕의 교차가 다르게 보인다. 박영선이 즐겨 드는 예가 유다 왕조 말기의 흐름이다.

선한 할아버지 웃시야와 선한 아버지 요담의 시대에도 나라가 평안하지만은 않았다. 그러자 그 아들 아하스는 평안과 형통을 얻겠다며 온갖 우상을 끌어들인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인신제사까지 서슴지 않았다(열왕기하 16장). 그러나 그 모든 우상도 그에게 평안을 주지 못했다.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아들 히스기야가 등장한다. 박영선의 해석은 과감하다. 아버지가 우상이란 우상을 다 끌어다 써 보고도 실패하니, 아들에게는 결국 하나님만 남았다는 것이다. 히스기야의 신앙은 진공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철저한 실패를 두 눈으로 본 자리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그 아들 므낫세는 다시 우상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그랬듯 자기 아들을 제물로 삼는다(열왕기하 21장).

유다 왕조의 선악 교차 선한 왕과 악한 왕이 번갈아 등장하는 유다 왕조의 역사 유다 왕조의 선과 악, 그 반복 웃시야선한 왕 요담선한 왕 아하스우상의 왕 히스기야선한 왕 므낫세우상의 왕 아버지가 우상을 다 써먹고 실패한 자리에서 아들에게 하나님만 남았다
선한 왕과 악한 왕이 번갈아 나타나는 유다 왕조. 박영선은 아하스의 실패가 히스기야의 신앙을 빚어낸 토양이었다고 읽는다.

그래서 박영선은 이 역사를 "왜 히스기야처럼, 요시야처럼 못 하느냐"고 한심해하며 읽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읽으면 핵심을 놓친다. 악과 선이 교차하는 그 굴곡 전체가 하나님이 인간을 가르치고 빚어 가시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7.느닷없이 들어오시는 하나님

구약을 읽다 보면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종종 아무 맥락 없이, 느닷없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점이다.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은 앞뒤 문맥과 거의 무관하게 불쑥 부름을 받고 복의 약속을 받는다. 모세는 한때 동족을 위해 분발했다가 쫓겨나, 스스로도 잊고 백성도 잊은 80세의 노인이 되었을 때 부름을 받는다(출애굽기 7장). 엘리야는 아무 소개도 없이 "디셉 사람 엘리야"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아합 왕에게 가뭄을 선언한다(열왕기상 17장).

박영선은 이 '느닷없음'에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본다. 인간이 서로 찢고 빼앗는 그 모든 사건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번씩 불쑥 들어오셔서 "내가 주인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라, 다시 해 보라"고 일깨우신다. 출애굽도 바벨론 포로도, 그 큰 사건들은 결국 "내가 너희의 주인이다"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수업인 셈이다.

8.하나님도 아들을 주셨다

여기서 박영선은 구약의 가장 끔찍한 장면 하나를 신약과 나란히 놓는다. 아하스와 므낫세가 자기 아들을 우상에게 불살라 바친 그 인신제사 말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소원을 위해 갈 수 있는 극단, 신을 향한 정성의 가장 잔혹한 형태였다. 그러나 그렇게 바친 우상은 끝내 인간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박영선은 거기에 하나님의 응답을 겹쳐 놓는다. "나도 너희에게 내 아들을 주었다." 인간은 자기 소원을 위해 아들을 불에 던졌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내어주셨다. 같은 '아들을 바침'이지만, 방향과 목적이 정반대다. 한쪽은 자기 욕망을 위한 제물이고, 다른 한쪽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내어줌이다. 박영선은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신약에 오면 구원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구약에서 우리가 거울 앞에서 우리의 한계를 보았다면, 신약에서는 그 아들이 직접 찾아오신다. 그는 스스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요한복음 14장 6절). 박영선은 이 '인격적인' 구원의 성격을 강조한다. 우리가 여러 길 중 하나를 골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우리를 찾아오고, 생명이 도망가는 우리를 붙잡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길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길이 우리를 찾아온다.

9.그래서 내 인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박영선이 성경 읽기에서 끝내 도달하는 곳은 신학 강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이다. 그는 성경을 읽는 법이 곧 자기 인생을 해석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구약의 굴곡과 신약의 찾아오심은 먼 옛날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인생에서 뒤섞여 반복된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울면 모든 일이 풀리는' 이상한 거래로 만들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것은 결국 우상에게 정성을 바치고 소원을 얻어내려는 그 오래된 패턴의 반복일 뿐이다. 오히려 그는 답이 없을 때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답이 없는 현실 앞에서 원망하고 슬퍼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 — 그것이 바로 시편이라는 것이다. 시편에는 찬송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명이 필요한지가 정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정의하는 믿음은 이렇다. 우리의 존재와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되, 하나님은 그것을 권력으로 움켜쥐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대와 소원보다 더 큰 것을 만들어내려고 일하고 계신다는 신뢰. 그 신뢰의 증거가 바로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서로 원망과 한숨을 나누는 것까지가 신앙생활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나도 그래, 나도 그래. 그런데 어떻게 넘어왔는지 모르겠어" — 그런 고백들이 오가는 자리 말이다.

박영선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말로 이 모든 것을 매듭짓는다. 정작 자기가 오르고 있는 산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하나님이 정말 간섭하고 계신지 잘 실감하지 못한다. 그러다 고갯마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볼 때, 비로소 자기가 이만큼 올라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걸음 같은 오르막이 이어지고, 다음 고갯마루에서 시야는 또 한 번 그만큼 넓어진다.

한 문장 정리

박영선에게 성경은 '착하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최선이 어디서 멈추는지를 비추는 거울이자, 그 멈춤의 자리로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시는 이야기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은 소원을 이루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상대역으로 빚어지는 데 있다.


10.'하나님의 열심'이라는 한 줄기

이 '성경을 보는 관점'은 박영선의 즉흥적 발상이 아니라, 그가 40년 설교 사역 내내 붙들어 온 한 줄기 신학에서 나온다. 그 핵심을 한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의 열심'이다.

젊은 시절 그는 '하나님께 열심을 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몸부림쳤다고 한다. 그러다 믿음의 주체와 원동력이 신자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눈을 떴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짜내는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품으신 열심 — 그것이 신앙의 토대라는 깨달음이다. 이 전환은 그가 한평생 붙들어 온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집요한 추적의 결과였다.

그 위에서 그는 한국 교회가 익숙하게 여겨 온 두 가지 경향, 곧 열심히 노력해 구원의 자격을 갖추려는 열심주의와 흠 없이 완전해지려는 완전주의 윤리관을 성경의 자리에서 비판했다. 그가 거듭 다룬 주제어들 — 성화, 믿음, 교회, 자유 — 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목적하셨는가"라는 한 질문 위에 서 있다. 이 글에서 본 '거울로서의 구약', '상대역으로 빚으심',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 역시 그 질문의 다른 얼굴들이다.

물론 이것은 한 설교자의 해석이며, 그가 스스로 인정하듯 더러는 과격한 읽기이기도 하다. 성경을 보는 길은 하나가 아니고, 같은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도 강조점은 갈린다. 다만 박영선의 관점이 던지는 질문만큼은 분명하다. 우리는 신앙에서 정말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 내 소원을 들어주는 신인가, 아니면 나를 빚어 가시는 하나님인가. 그 물음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익숙하던 성경의 풍경은 한 번 더 낯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