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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 인프라 공학

유럽이 받아 든 더위의 청구서

2026년 6월, 서유럽을 덮친 기록적 폭염은 단순한 날씨 사건이 아니었다. 철도가 휘고, 도로가 물러지고, 원자력 발전소가 멈췄다. 멀쩡하던 시설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그 시설을 설계할 때 전제했던 기후의 범위 자체가 움직였다는 신호다.

유럽의 여름은 오랫동안 온화하고 쾌적한 것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2026년 6월의 서유럽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스페인 남부 안두하르에서는 6월 22일 기온이 45.1도까지 치솟았고, 프랑스 본토에서는 44도를 넘는 지역이 나오면서 6월 23일이 1947년 관측 이래 가장 더운 날로 기록되었다. 영국에서도 6월 기온 기록이 새로 쓰였으며, 스페인의 일평균 기온은 1950년 이후 가장 높았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정작 주목할 대목은 온도라는 숫자 자체가 아니다. 같은 시기에 레일이 휘고, 노면이 끈적해지고, 원전이 출력을 낮추는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더위가 인프라의 약한 고리를 차례로 드러낸 것이다. 이 글은 그 연쇄가 왜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것이 공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리한다.

45.1℃
6월 22일 스페인 안두하르 최고기온
약 4 GW
정지·감발된 프랑스 원전 출력. 정오 무렵 수요의 약 7%
약 19%
유럽 가정의 에어컨 보급률(한국·미국 대비 크게 낮음)
+2℃
1976년 이후 유럽 평균기온 상승폭(세계기상기구)

01왜 이렇게까지 더웠나

이번 폭염의 중심에는 오메가 블로킹(omega blocking)이라는 대기 패턴이 있었다. 상층의 제트기류가 그리스 문자 오메가(Ω) 모양으로 크게 휘면서, 그 안쪽에 고기압이 양옆의 저기압 사이에 끼여 며칠씩 거의 움직이지 않는 현상이다. 고기압권에서는 공기가 아래로 내려오며 압축되어 데워지고, 구름과 비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 지표는 계속 달궈진다. 여기에 북아프리카에서 올라온 뜨겁고 건조한 공기가 더해졌다.

흔히 이런 상황을 두고 ‘열돔(heat dome)’이라 부른다. 다만 이 표현은 약간의 오해를 부를 수 있다. 뜨거운 공기가 냄비 뚜껑처럼 갇혀서 위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열을 만들어 내는 조건이 같은 자리에 며칠씩 정체된다고 보는 편이 실제에 더 가깝다. 그 결과 밤이 와도 좀처럼 식지 않는다. 낮 최고기온이 35도를 넘는 것은 물론, 밤 최저기온도 20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열대야가 여러 지역에서 이어졌다.

쉽게 풀면

오메가 블로킹은 강물 한가운데 큰 바위가 놓인 상황과 비슷하다. 물줄기(제트기류)가 바위를 크게 돌아 흐르면서, 그 안쪽에는 물이 거의 고이듯 공기가 정체된다. 비구름을 실어 나르던 ‘날씨의 흐름’이 멈추니, 같은 곳이 며칠 내내 뙤약볕에 노출되는 것이다.

02공학의 본질은 ‘어디까지 견딜지’를 정하는 일

공학이라고 하면 더 빠른 반도체, 더 좋은 자동차, 더 높은 빌딩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공학의 본질 가운데 하나는 ‘어디까지 견뎌야 하는가’를 정하는 일이다. 여름엔 어디까지 더워질 수 있는지, 전력 수요는 최악의 순간에 얼마까지 오르는지, 레일과 교량은 몇 도까지 버텨야 하는지를 먼저 정한 뒤, 그 범위 안에서 작동하도록 도시와 인프라를 만든다. ‘설계온도’, ‘설계하중’, ‘재현기간(설계 기준이 되는 극한 사건이 평균 몇 년에 한 번 올지)’ 같은 말들이 모두 여기서 나온다.

지금 유럽에서 벌어진 일은 시설이 갑자기 약해진 것이 아니다. 시설을 만들 때 참고했던 기후의 확률 분포 자체가 이동한 것이다. 과거의 설계 기준에서는 이 정도 폭염이 6월에 이렇게 자주 오리라고 보지 않았다. 같은 시설이 같은 자리에서, 더 자주 한계선에 닿게 되었을 뿐이다. 이 한 문장이 이번 사건 전체를 꿰뚫는 열쇠다.

03철도 — 휘어지는 레일

레일은 강철이고, 강철은 온도가 오르면 팽창한다. 흔히 레일과 레일 사이의 틈이 팽창을 흡수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과거의 짧은 이음매 레일 이야기다. 오늘날 간선 철도 대부분은 장대레일(CWR, continuous welded rail), 즉 수백 미터에서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레일을 통째로 용접해 이어 붙인 연속용접레일을 쓴다. 틈이 거의 없는 대신, ‘중립온도’라는 기준 온도에 맞춰 레일의 응력을 미리 조정해 둔다. 중립온도에서 레일 내부의 응력은 0이다.

레일 온도가 이 중립온도보다 크게 오르면, 늘어나려 해도 양 끝이 침목과 체결장치에 꽉 물려 있어 움직이지 못한다. 그만큼 내부에 압축응력이 쌓인다. 체결장치와 침목, 자갈 도상이 이 힘을 버티지 못하는 취약 구간에서는 선로가 옆으로 휘어지는 궤도 좌굴(track buckling)이 일어날 수 있다. 영국의 경우 중립온도(stress-free temperature)는 대략 27도로, 전통적인 여름철 평균 레일 온도에 맞춰져 있다.

장대레일 좌굴 메커니즘 중립온도에서 응력이 0인 레일이 고온에서 압축응력을 받아 옆으로 휘어지는 과정 장대레일이 더위에 휘어지는 원리 중립온도 — 레일 내부 응력 = 0 곧게 안정 고온 — 늘어나려는 힘이 갇혀 압축응력 축적 압축 압축 ↑ 궤도 좌굴(옆으로 휘어짐) 양 끝이 침목·체결장치에 물려 있어 늘어나지 못하면, 갇힌 힘이 가장 약한 구간을 옆으로 밀어낸다. 직사광선을 받은 레일 표면은 기온보다 약 20도 더 뜨거워질 수 있다.
장대레일은 중립온도에서 응력이 0이 되도록 미리 조정된다. 온도가 그 위로 크게 오르면 갇힌 압축응력이 가장 약한 구간을 옆으로 밀어내며 좌굴이 발생한다.

문제는 레일이 공기보다 훨씬 뜨겁다는 점이다. 직사광선을 받은 레일 표면은 기온보다 약 20도 가까이 더 뜨거워질 수 있어, 기온이 37도일 때 레일은 50~60도에 이른다. 그래서 폭염에는 감속 운행을 한다. 속도를 낮추면 차량이 궤도에 가하는 동적 하중과 횡압력이 줄어, 이미 압축응력이 높은 레일의 좌굴 위험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레일은 표면을 흰색으로 칠해 온도를 5~10도 낮추고, 센서로 위험 구간을 실시간 감시하기도 한다.

쉽게 풀면

중립온도는 ‘힘이 0이 되도록 미리 잡아 둔 균형점’이다. 긴 고무줄을 적당히 당겨 양쪽 못에 걸어 두었다고 하자. 이 상태가 중립온도다. 날이 더워져 고무줄이 늘어나려 하면, 못에 묶여 있으니 늘어나지 못하고 안쪽에 미는 힘만 쌓인다. 그 힘이 한계를 넘으면 고무줄은 옆으로 불룩 튀어나간다. 레일의 좌굴이 바로 이 ‘옆으로 불룩’이다.

이는 결코 추상적인 위험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2018~2021년 사이 레일 좌굴로 인한 탈선 사고가 수백 건에 달했고, 영국은 2022년 여름의 폭염 동안에만 수십 건의 좌굴과 노선 폐쇄를 겪었다. 이번 폭염에서도 영국에서는 가장 더운 날 필수적이지 않은 이동을 자제해 달라는 권고가 나왔고, 일부 노선은 오후 운행을 멈췄다.

04도로 — 물러지는 아스팔트

같은 일이 도로에서도 벌어진다. 아스팔트 역시 강철처럼 온도에 반응한다. 일반적인 도로 포장은 표면 온도가 50도쯤 되면 물러지기 시작하는데, 맑은 날엔 기온이 20도 후반이어도 검은 노면은 50도를 쉽게 넘는다. 노면이 물러지면 끈적해지고, 차량은 물론 보행도 어려워진다.

흥미로운 대목은 같은 도로라도 설계 기준이 다르다는 점이다. 고속도로나 주요 간선에는 개질 아스팔트(고분자 등을 섞어 내열성을 높인 포장재)를 써서 약 60도, 기온으로 치면 대략 40도까지 견디도록 만든다. 반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도로는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 더워질지’를 미리 정해 두고 그 기준에 맞춰 재료를 고른 결과다. 그래서 폭염이 오면 고속도로는 멀쩡한데 동네 도로만 물렁해지는 일이 생긴다. 이것은 고장이 아니라, 설계 기준이 오늘의 극한 기온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신호다.

05원전의 역설 — 가장 더운 날 멈추는 발전소

이번 폭염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장면은 원자력 발전소였다. 더울수록 에어컨이 더 돌고 전기가 더 필요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일부 원전은 오히려 출력을 낮추거나 멈춰야 했다.

폭염 속 전력 수요와 원전 공급의 역설 가장 더운 순간 냉방 수요는 오르고 강물 수온 상승으로 원전 출력은 내려가는 가위 모양 구조 가장 더운 순간, 수요와 공급이 엇갈린다 폭염 · 강물 수온 상승 냉방 전력 수요 증가 원전 출력 감소 에어컨 가동 급증 방류수 온도 한계 초과
강물로 냉각하는 원전은 폭염에 두 방향의 압력을 동시에 받는다. 냉방 수요는 오르고, 방류수 온도 규정 때문에 출력은 내려간다.

원전은 터빈을 지난 증기를 다시 물로 응축하면서 막대한 폐열을 처리해야 한다. 강물을 냉각에 쓰는 발전소는 이 열의 일부를 강으로 되돌려 보낸다. 그런데 강물 자체가 너무 따뜻해지면, 생태계 보호를 위한 방류 기준을 맞추기가 어려워진다. 프랑스의 골페슈(Golfech) 원전 2호기는 가론강 수온이 환경 기준에 근접하면서 6월 22일 밤 가동을 멈췄고, 이어 센강의 노장(Nogent), 론강의 뷔제(Bugey)·생탈방(Saint-Alban) 등 여러 원자로가 환경 규정에 따라 감발하거나 정지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원자로가 폭염으로 위험해져서 멈춘 것이 아니라, 강의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환경 규정 때문에 멈춘 것이다. 가령 골페슈는 냉각수를 방류한 뒤 가론강 수온이 28도를 넘지 않도록, 노장은 센강의 수온 상승폭을 일정 한계 안에 두도록 규정돼 있다. 이때 정지·감발된 프랑스 원전 출력은 모두 합쳐 약 4기가와트(GW), 정오 무렵 전체 전력 수요의 약 7%에 이르렀다. 다만 공급이 무너진 것은 아니어서, 프랑스 송전계통운영기관 RTE(Réseau de Transport d’Électricité)는 수요를 감당할 용량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주목할 것은 다른 지점이다. 냉방 수요가 가장 크게 늘어나는 바로 그 순간, 공급 쪽 일부도 동시에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평소엔 보이지 않던 취약성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가격은 출렁였다. 원전 감발과 냉방 수요 증가, 약한 바람과 줄어든 태양광이 겹치면서 프랑스와 독일의 도매 전력 가격은 2025년 초 이후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 벨기에에서는 6월 24일 해 질 무렵, 도매 전력 가격이 한때 킬로와트시당 1유로(메가와트시당 1000유로)를 넘었다. 가정이 실제 내는 소매 요금이 아니라, 단 15분짜리 도매 가격이라는 점은 짚어 둘 필요가 있다.

06건물 — 거대한 축열체로 변하는 집

유럽 가정에 에어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정용 보급률이 약 19~20%로, 한국이나 미국에 비하면 크게 낮다. 흔히 ‘두꺼운 석조벽이라 여름에 취약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다. 두꺼운 석조벽은 열용량이 커서, 낮의 열이 실내로 들어오는 시간을 오히려 늦춰 준다. 선선한 밤에 창문과 덧문을 열어 열을 빼낼 수 있다면 꽤 영리한 구조다.

진짜 문제는 열대야가 이어져 밤에도 식지 않을 때 생긴다. 밤 기온이 20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날이 며칠씩 계속되면, 낮 동안 벽과 지붕에 쌓인 열을 밤에 빼낼 수가 없다. 선선한 밤을 전제로 지어진 건물이 열을 품은 거대한 축열체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 결과는 건강 피해로 이어진다. 스페인의 초과사망 감시 체계는 6월 21일 이후 며칠간 약 327명의 고온 관련 사망을 통계적으로 추정했고, 독일의 한 요양원에서는 실내 온도가 약 35도까지 올라 입소자들이 다른 시설과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폭염은 한 번에 닥치는 재난이 아니라 조용히 진행되는 재난이어서, 실제 피해 규모는 한참 뒤에야 드러난다.

쉽게 풀면

두꺼운 석조벽은 보온병과 닮았다. 낮의 열을 천천히 받아들여 한낮의 더위를 늦춰 주지만, 일단 데워지면 그 열을 오래 붙들고 있다. 평소엔 ‘밤에 뚜껑을 열어 식히는’ 환기가 그 보온병을 비워 주었다. 그런데 밤마저 더우면 보온병을 비울 기회가 사라진다. 며칠이 지나면 벽 전체가 데워진 보온병처럼 실내로 열을 계속 내뿜는다.

07유럽은 무엇을 하고 있나

대응은 크게 세 갈래다. 첫째는 도시 자체를 바꾸는 패시브 쿨링(passive cooling,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는 냉각) 설계다. 스페인 세비야는 전통 지혜와 현대 기술을 결합했다. 대표적인 것이 카르투하 카나트(CartujaQanat) 프로젝트다. ‘카나트’는 약 3000년 전 페르시아에서 비롯된 지하 수로 기술로, 이란 야즈드의 사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세비야는 1992년 엑스포 부지에 이 개념을 현대적으로 되살려, 태양광 펌프로 끌어 올린 찬물과 증발 냉각, 차양을 결합했다. 사업비는 약 500만 유로로 그 80%를 유럽연합의 도시혁신사업(UIA, Urban Innovative Actions)에서 충당했다. 그 결과 지표 온도를 최대 10도, 실내 온도를 바깥보다 최대 12도까지 낮추면서도 연간 에너지 소비는 사실상 0에 가깝게 유지한다.

벨기에 안트베르펜은 ‘쿨 스폿(cool spot)’을 도입했다. 200제곱미터 이상의 공간에 수관 피복률(나무 그늘이 덮는 비율) 80% 이상, 절반을 넘는 비포장·녹지, 그늘과 식수대를 갖춘 시원한 장소를 만들고, 취약 계층이 집에서 약 150미터 안에 걸어 닿을 수 있도록 배치한다. 단순한 체감이 아니라 습구흑구온도(WBGT, Wet Bulb Globe Temperature·햇빛·습도·바람·그늘까지 반영해 ‘얼마나 덥게 느껴지는가’를 재는 지표)로 열 스트레스가 큰 구역을 먼저 찾아 우선 배치한다.

둘째는 철도다. 흰색 도색과 온도 센서, 감속 운행이 단기 대응이라면, 장기적으로는 더 높은 온도 기준에 맞춘 레일로 교체하는 길이 있다. 다만 유럽 철도망은 수만 킬로미터에 달해 비용과 시간이 만만치 않다. 셋째는 전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전원 하나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고 풀리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낮의 잉여 전력을 저녁으로 옮기는 배터리 저장장치, 시간대별로 수요를 조절하는 수요반응, 흩어진 분산 자원을 하나처럼 운영하는 가상발전소(VPP, Virtual Power Plant), 그리고 국가 간 계통 연계가 함께 필요하다. 원전 역시 냉각탑이나 대체 수원처럼 고온에 덜 민감한 방식으로 보완해야 한다.

08에어컨이라는 딜레마

더위를 말하면서 에어컨을 빼놓을 수는 없다. 분명히 해 두자면, 오늘날의 에어컨은 폭염에서 생명을 지키는 필수 안전망이다. 노인과 영유아, 만성질환자에게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에어컨만으로 도시 전체의 문제를 풀 수는 없다. 에어컨은 실내를 식히는 대신 그 열을 실외로 내뿜기 때문이다. 실외기의 폐열은 이미 뜨거운 도심을 한 번 더 달군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이 필요하다. 도시 열섬의 주범은 에어컨이 아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의 열 저장, 줄어든 녹지, 바람과 복사열의 방출을 막는 도시 구조가 주된 원인이고, 에어컨의 폐열은 이를 증폭하는 한 요인일 뿐이다. 게다가 냉방 수요가 몰린 시간에 가스나 석탄 발전이 추가로 들어오면 탄소 배출이 늘고, 냉매 누출까지 겹치면 냉방 확대가 다시 기후를 밀어 올리는 고리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에어컨을 없애는 것이 답은 아니다. 고효율 냉방기기와 낮은 지구온난화지수(GWP, Global Warming Potential)의 냉매, 깨끗한 전력, 외부 차양과 단열, 나무와 녹지, 밤에 열을 빼내는 환기 구조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에어컨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에어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09공짜였던 전제가 끝나는 자리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유럽이 누려 온 쾌적한 여름은, 따지고 보면 그동안 비용을 치르지 않은 혜택이었다. 에어컨을 깔지 않아도 됐고, 도로와 레일과 원전을 극한의 더위까지 견디게 만들 필요도 없었다. 온화한 기후가 그 비용을 대신 내주고 있었던 셈이다. 이번 여름이 보여 준 것은 그 청구서가 이제야 도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밤에는 식는다는 전제, 강물은 늘 차갑다는 전제, 6월은 그렇게 덥지 않다는 전제. 도로도 레일도, 원전도 건물도 모두 이런 운 좋은 ‘공짜 전제’ 위에 세워졌다. 그 전제가 사라지자 멀쩡하던 시설이 하나둘 한계를 드러냈다. 앞으로 치러야 할 비용도 작지 않다. 프랑스 전력공사 EDF(Électricité de France)는 앞으로 15년간 냉각 설비를 포함한 기후 대응에 연간 약 6억 유로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원전을 식힐 강물과 전력은, 데이터센터도 공장도 도시의 에어컨도 모두 필요로 하는 자원이다. 가장 더운 날, 모두가 같은 강물과 같은 전력을 두고 동시에 줄을 서게 된다.

그동안 더위를 견디는 일은 인도, 중동, 한국, 일본처럼 해마다 폭염과 열대야를 겪는 나라들의 숙제였다. 우리가 에어컨을 깔고 한여름 전력 피크를 관리하며 열대야에 적응하는 동안, 유럽은 그 숙제를 사실상 면제받아 왔다. 세계기상기구(WMO,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는 유럽이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더워지는 대륙이며, 1976년 이후 평균기온이 약 2도 올랐다고 밝혔다. 면제가 끝나면서, 더위를 견디는 능력 자체가 인프라의 새로운 설계 조건이 되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