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 메모리 시장
범용 D램, 누가 먼저 잠그느냐의 싸움 — 창신메모리·텐센트 30억 달러 계약 읽기
애플이 사겠다고 미국 정부에 매달리던 그 회사의 물량을, 정작 중국 텐센트가 3~5년치 먼저 잠갔다. 흔히 "중국이 싼 D램으로 시장을 덮친다"고 읽지만, 이 계약이 가리키는 방향은 반대다. 푸는 게 아니라 조이는 쪽이다.
한 회사를 두고 갈린 두 장면
2026년 6월, 같은 회사를 둘러싸고 정반대의 장면이 겹쳤다. 한쪽에서는 애플이 미국 상무부를 상대로 "이 회사 메모리를 사게 해 달라"며 한 달 넘게 로비를 벌였다. 다른 쪽에서는 중국 텐센트가 바로 그 회사와 200억 위안(약 29억 4천만 달러, 약 30억 달러)이 넘는 장기공급계약을 맺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회사 이름은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스(ChangXin Memory Technologies, CXMT). 중국 최대이자 세계 4위의 D램 제조사다.
보도에 따르면 계약은 서버용 D램(Dynamic Random Access Memory, 동적 임의접근 기억장치)을 대상으로 하며, 기간은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치다. 텐센트만이 아니다. 알리바바 클라우드, 바이트댄스, 레노버(Lenovo), 샤오미(Xiaomi)도 CXMT의 주요 고객으로 이름을 올렸고, 비슷한 장기계약이 추가로 논의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핵심은 단순하다. 미국 대표 기업이 "사게 해 달라"고 줄을 서는 사이, 그 물량을 중국 자국 기업들이 먼저 묶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비대칭이 이번 계약의 전부를 설명한다.
(200억 위안 초과)
장기공급 기간
(2025년 점유율 약 7.7%)
왜 하필 지금, 장기계약인가
핵심 메시지 — 품귀가 총체적이라, 자국 공급사를 둔 기업마저 미리 잠가야 했다
장기계약 자체가 신호다. 자국에 공급사를 둔 텐센트가 굳이 몇 년치를 미리 묶는다는 것은, 지금 당장 사려고 해도 물량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Counterpoint Research) 추정으로 메모리 가격은 최근 세 분기 만에 네 배가 됐다. 투자은행 UBS는 D램 계약가가 2026년 1분기에만 전 분기 대비 약 95% 뛰었다고 봤고, 이번 업사이클이 최소 2027년 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품목별로 보면 상승폭은 더 가파르다. DDR4 8기가비트(Gb) 제품은 1년 새 1.65달러에서 16달러로 약 870% 올랐고, DDR5 32GB 모듈 가격은 불과 석 달 만에 네 배로 뛰었다는 집계가 나왔다. SK하이닉스는 2026년 HBM·D램·낸드 물량이 이미 완판됐다고 공식 확인했고, 삼성전자도 지금 확보한 수요만으로 2027년 수급 격차가 2026년보다 더 벌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가격을 깎기보다 몇 년치를 미리 잠그는 게 급해진 환경이다.
월세가 분기마다 뛰는 동네에서, 세입자는 집주인과 5년치 장기 임대를 미리 계약해 버린다. 깎는 협상보다 '확보' 자체가 급하기 때문이다. 텐센트의 3~5년 계약이 정확히 이 심리다 — 가격이 아니라 물량을 잠그는 것.
구축 효과 — 빅3가 비운 자리
핵심 메시지 — 'HBM이 없다'는 약점이 범용 시장에서는 증산의 자유로 뒤집힌다
이번 품귀의 뿌리는 AI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Micron) 세 회사는 한정된 생산능력을 AI 가속기용 고대역폭 메모리(HBM, High Bandwidth Memory)에 몰아넣고 있다. HBM이 고마진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반 PC·서버용 범용 D램을 만들 라인이 줄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구축 효과(crowding out)' — 더 매력적인 곳으로 자원이 빨려 들어가면서 다른 쪽이 비는 현상 — 가 메모리 라인 안에서 일어난 셈이다.
여기서 역설이 생긴다. CXMT는 HBM 양산 계약이 사실상 없다. 그래서 라인을 HBM에 묶을 필요가 없고, 생산능력 전부를 범용 D램에 쏟을 수 있다. 빅3에게는 'HBM에 못 들어간 격차'가 CXMT에게는 '범용을 마음껏 늘릴 자유'가 된다. 빅3가 비운 자리를 정확히 그 자유가 메운다.
인기 식당이 잘 팔리는 코스 요리(HBM)에 주방 인력을 다 돌리면, 값싼 백반(범용 D램) 줄은 손이 모자라 길어진다. 그때 옆에 새로 연 식당(CXMT)은 코스 요리를 안 하니 인력 전부를 백반에 투입해 그 줄을 가져간다. 약점이 곧 무기가 되는 구조다.
빈자리를 메우며 커진 숫자
CXMT의 성장 속도는 이 빈자리의 크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세계 D램 점유율은 2024년 약 5%에서 2025년 약 7.7%로 올라 세계 4위, 중국 1위가 됐다. 2026년 1분기 매출은 508억 위안(약 73억 달러)으로 전년 동기 대비 약 700% 뛰었고, 1년 전 16억 위안 적자에서 약 250억 위안 흑자로 돌아섰다.
생산능력도 빠르게 붙고 있다. 현재 허페이(合肥) 두 곳과 베이징 한 곳에 12인치 D램 팹(fab, 반도체 생산공장)을 두고 월 약 30만 장을 찍는다. 상하이 신설 공장 등으로 이를 약 60만 장까지 두 배로 늘릴 계획이다. 시장분석업체 세미애널리시스(SemiAnalysis)는 CXMT의 글로벌 D램 생산능력 비중이 2025년 약 13%에서 2027년 약 17%로 오를 것으로 봤다. 회사는 상하이 커촹반(STAR) 시장 상장을 추진하며 약 295억 위안(약 41억 달러) 조달을 노리고, 기업가치는 최대 약 420억 달러로 거론된다.
"싼 D램으로 시장을 덮친다"는 그림이 지금은 안 맞는 이유
핵심 메시지 — CXMT 물량은 내수가 거의 다 흡수한다. 푸는 게 아니라 조이는 쪽이다
중국 D램 증산을 두고 오래된 공포가 있다. "중국이 싼 물량을 현물시장에 쏟아 가격을 무너뜨린다"는 그림이다. 과거 디스플레이·태양광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의 D램에서는 이 그림이 맞지 않는다.
이유는 수요처에 있다. CXMT는 생산량을 현물시장에 대량으로 풀지 않는다. 텐센트·알리바바·바이트댄스·화웨이 같은 자국 대형 수요처가 거의 다 흡수한다. 특히 알리바바는 CXMT의 주요 고객이면서 동시에 소액 지분을 든 주주다. 정부 연계 지분을 합치면 약 40%에 이르고, 중국 당국은 완제품에 자국산 메모리를 쓰면 메모리 금액의 15%를 보조하는 정책으로 내수를 더 끌어당긴다. 생산능력을 두 배로 늘려도 내수가 모자란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그래서 텐센트가 3~5년치를 잠그면, 시장에 풀릴 범용 D램은 오히려 줄어든다. 새 공급사가 등장했는데도 바깥에 도는 물량이 더 빡빡해지는 역설 — 푸는 게 아니라 조이는 쪽이다.
다만 가장 아래 소비자 모듈에서는 균열이 시작됐다. 메모리 모듈 브랜드 코르세어(Corsair)가 DDR5 일부 제품에 CXMT 칩을 넣기 시작했고(우선 중국 시장 시범), HP와 델(Dell)은 비(非)미국 시장용으로 CXMT 메모리를 검증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에이서(Acer)·에이수스(Asus)도 중국 파트너에 자국산 조달을 요청했다. 서버·하이퍼스케일러는 아직 안 쓰지만, 소비자용부터 문이 열리고 있다.
| 구분 | 흔한 통념 | 현재 실제 |
|---|---|---|
| 판매 경로 | 현물시장에 대량 방출 | 자국 대형 수요처가 거의 흡수 |
| 가격 효과 | 덤핑으로 시세 붕괴 | 범용 물량을 묶어 단기엔 더 조임 |
| 외부 노출 | 전 세계로 저가 확산 | 소비자 모듈부터 일부만 균열 |
약해지는 애플 카드, 흔들리는 제재 지위
이 구도에서 애플의 협상 카드는 점점 얇아진다. 애플이 가격 협상력을 만들 거의 유일한 수단은 빅3 바깥의 '제4 공급처'인데, 그 후보가 바로 CXMT다. 그러나 한 달 넘게 워싱턴을 설득하는 사이, 그 물량을 중국 하이퍼스케일러가 먼저 잠갔다. 워싱턴이 허락하느냐 이전에, 중국이 내줄 물량이 남느냐가 먼저 걸리는 셈이다.
제재 지위 자체도 유동적이다. CXMT는 미국 상무부의 수출통제 명단(Entity List)에는 올라 있지 않다. 대신 국방부의 '중국 군사연계 기업'(1260H) 명단에 있다. 두 명단의 무게는 다르다. 엔티티 리스트에 오르면 미국 기업이 거래할 때 사실상 받기 어려운 허가가 필요해 공급망 편입이 막힌다. 반면 1260H는 평판상 위험 신호일 뿐 민간 거래를 금지하지는 않는다. 애플의 로비 목표가 'CXMT를 엔티티 리스트에 넣지 말아 달라'는 보장인 이유다.
이 명단은 실제로 흔들렸다. CXMT와 낸드 업체 YMTC는 2026년 2월 1260H에서 빠졌다가, 6월 업데이트에서 다시 올랐다(명단이 188개로 확대되며 알리바바·바이두·BYD도 추가). 미 하원 중국특위 위원장 존 무얼레나(John Moolenaar)는 중국 군사연계 기업과 손잡는 것은 중대한 실수라고 못 박았다. 워싱턴의 정치 기류와 베이징의 내수 우선순위가 동시에 애플의 발목을 잡고 있다.
두 종류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1260H는 '평판 경고장'이라 거래 자체는 가능하지만 손잡으면 욕먹는다. 엔티티 리스트는 '거래 금지 자물쇠'다. 애플이 원하는 건 단 하나 — "지금은 경고장만이라도, 앞으로 자물쇠는 채우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한국에는 두 얼굴이 있다
핵심 메시지 — 내준 자리는 전략적 선택이었지만, CXMT는 단계를 올려 오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게 이 흐름은 양면적이다. 두 회사는 레거시 범용 D램에서 발을 빼 HBM에 집중해 왔고, 중국이 범용을 가져가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스스로 내준 자리다. HBM 고지는 삼성·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으니, 당장의 고마진 전장은 안전해 보인다.
문제는 CXMT가 단계를 한 칸씩 올려 온다는 점이다. DDR4에서 DDR5까지 따라왔고, 빅3와의 수율 격차를 좁히는 중이다(2026년 1분기 DDR5 수율은 아직 서구에 뒤진다). 그다음 칸이 HBM이다. CXMT는 상하이 후공정에서 HBM을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 미미하다. 양산과 수율을 잡는 순간, 빅3가 쥔 고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가격은 두 갈래로 열려 있다
앞으로의 가격은 상반된 두 시나리오가 동시에 열려 있다.
한쪽은 상승 압력이다. 장기계약이 범용 물량을 더 단단히 잠그면서, 메모리를 쓰는 완제품의 원가 부담이 이어지는 경로다. 실제로 애플은 6월 25일 맥·아이패드·홈 기기·비전 프로(Vision Pro) 가격을 일제히 올렸다. 13인치 맥북 에어는 1,099달러에서 1,299달러로, 16인치 맥북 프로는 2,499달러에서 2,999달러로, 비전 프로는 500달러 인상됐다. 차세대 아이폰의 메모리 원가가 크게 뛸 수 있다는 추정도 같은 흐름에 있다.
다른 쪽은 하강 경계다. CXMT와 YMTC의 증설이 2027년 어딘가에서 공급을 수요 위로 끌어올려 가격을 꺾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 메모리는 늘 그렇게 사이클을 돌았다. 다른 점은, 이번 증설의 상당 부분을 국가 보조금을 받는 중국이 쥐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하강의 속도를 베이징의 생산 결정이 좌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범용조차 이제 '누가 만드느냐'가 아니라 '누가 먼저 잠그느냐'의 싸움이 됐다.
이번 계약이 가리키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범용 D램에서도 경쟁의 축이 제조 능력에서 '선점'으로 옮겨갔다. 둘째, 중국이 따라온 것은 범용까지이며 HBM은 아직 멀리 있다. 진짜 질문은 그 거리가 몇 년이냐다.
지켜볼 지점은 분명하다. CXMT가 HBM 양산과 수율에 닿는 시점, 그리고 중국이 그 물량을 끝까지 자국 안에만 둘지 여부다. 텐센트와의 30억 달러는 그 시계가 돌기 시작했다는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