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낯을 피해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던 사람이,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비로소 위를 향해 들려 올려진다. 요나서 2장은 절망의 밑바닥이 어떻게 성찰과 회복의 자리가 되는지를 한 편의 시로 압축해 보여 준다.
요나서의 첫 장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니느웨로 가라는 부름을 등지고 요나는 반대편 항구 욥바로 내려간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향해 내려가고, 풍랑이 몰아치자 배 밑바닥으로 내려가며, 마침내 뱃사람들의 손에 들려 바다로 던져진다. 히브리어 본문은 이 여정을 줄곧 '내려감(야라드)'이라는 동사로 표시한다. 사명을 회피하는 마음은 지리적으로도 계속 아래로 향한다.
이름부터가 역설이다. '요나'는 비둘기를, 그의 부칭 '아밋대의 아들'은 진실·성실을 뜻한다. 진실의 아들, 하나님의 비둘기라 불릴 사람이 정작 자기 안의 어둠을 떨치지 못한 채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바다에 던져진 순간, 그는 홀로 살아남는 것이 불가능한 극한에 잠긴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실존철학자)는 인간이 스스로 넘어서거나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Grenzsituation)'을 말했다. 죄책감, 유한성, 죽음, 질병의 고통과 같은 경험은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다. 뜻하지 않은 병이 찾아왔을 때 인생이 끝난 듯 느껴지고, 가족의 불행 앞에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을 때 무력감이 밀려온다. 그것이 한계상황이다.
야스퍼스가 주목한 것은 이 상황의 역설이다. 벼랑 끝은 불행처럼 다가오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인간은 지금까지와 다른 삶을 향해 자기를 밀어 올리는 실존적 도약을 경험한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진 장면은 단순한 파멸이 아니라, 그런 도약이 시작되는 문턱이다.
한계상황은 평지에서 갑자기 만난 절벽과 같다. 절벽 앞에서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 주저앉아 절벽만 원망하거나, 발밑을 다시 보고 넘어갈 길을 찾거나. 절벽 자체는 재앙이지만, 그것이 사람을 멈춰 세워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묻게 만든다. 요나에게 바다가 그런 절벽이었다.
바다에 던져지기 직전, 요나는 놀라운 말을 한다. 자기가 탄 배가 위기에 처하자 그는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청한다. 남을 희생시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여 남을 살리려는 태도다. 여기서 요나는 회피하던 존재에서 책임적 자아로 돌아선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순간을 '타자의 얼굴' 앞에 설 때로 보았다. 내 앞에 선 사람의 절박한 처지가 나에게 응답을 요구하고, 그 요구에 응답할 때 비로소 사람은 사람이 된다. 나만을 위해 사는 삶은 아직 그 문턱을 넘지 못한 삶이다. 어려운 말 같지만 요지는 단순하다. 사람은 자기 앞에 놓인 누군가의 부름에 답할 때 사람다워진다.
뒷날 예수는 표적을 구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말한다. 흔히 이 표적은 물고기 뱃속의 사흘과 십자가·부활의 사흘을 잇는 것으로만 읽힌다. 그러나 요나의 표적에는 또 다른 층이 있다. 자기를 던져 다른 이들을 구하려는 그 결단 자체가 이미 하나의 표적이다. 요나가 바다에 몸을 던지는 장면에서 십자가의 흔적이 미리 어른거린다.
우리 이야기 속에도 바다에 던져진 사람이 있다. 심청이다. 판소리 심청가와 고전소설 심청전의 구조는 뜻밖에도 요나서와 겹쳐 읽힌다.
흥미로운 것은 이름에 담긴 문자적 울림이다. '심청'의 심(沈)은 성씨로 쓰일 때는 '심'이지만, 본래 뜻으로는 '가라앉을 침'이다. 침묵(沈默), 침수(沈水)의 그 글자다. 이름 자체가 물에 잠기는 운명을 예고하는 셈이다. 그러나 동시에 심청은 세상을 밝히는 정화의 존재이기도 하다. 가라앉음과 맑음이 한 이름 안에 겹쳐 있다.
아버지 심학규(沈鶴圭)의 이름에 든 학(鶴)과 규(圭)는 옛 사대부의 이름에 즐겨 쓰인 글자다. 가문은 양반이되 정작 앞을 보지 못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처지가, 이름과 현실의 대비로 드러난다. '봉사'라는 호칭 또한 여기에 얽힌다. 봉사(奉事)는 본디 조선시대 종8품의 하급 관직 이름이었는데, 시각장애인에게 침술이나 점복 같은 일을 맡기고 그 직함을 부르던 관행에서 앞 못 보는 이를 이르는 말로 굳어졌다.
어머니 곽씨 부인의 성 곽(郭) 역시 예사롭지 않다. 성(城)이 안쪽 성벽이라면 곽(郭)은 그 바깥을 두르는 외성이다. 이름 안에 이미 '둘러 지키는 자'라는 뜻이 들어 있다. 어린 딸과 앞 못 보는 남편을 감싸는 보호자의 자리를, 인물의 성씨가 조용히 예고한다.
서사의 큰 줄기도 닮았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심청은 스스로 인당수의 제물이 된다. 남을 희생시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던져 아버지를 구하려는 마음이다. 물에 잠겼던 그는 연꽃에 실려 다시 떠올라 왕후가 되고, 마침내 아버지가 눈을 뜨는 회복으로 이야기가 닫힌다. 한 사람의 자기희생을 통해 여러 사람이 어둠에서 눈뜨는 구조는, 그 자체로 오래된 구원 서사의 형식을 품고 있다.
심청전에는 여러 이본(異本)이 있어 세부 줄거리는 판본마다 조금씩 다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특정 판본의 사실관계가 아니라, '가라앉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를 던져 다른 이를 살리고, 물에서 다시 떠올라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의 뼈대다. 그 뼈대가 요나의 여정과 맞물린다.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해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요나는 밤낮 사흘을 그 뱃속에 머문다. 사람을 삼킬 만한 물고기가 실재하는가를 두고 오래전부터 논쟁이 있었지만, 생물학적 진위를 따지기 전에 그 상황이 무엇을 그려 내는지를 보는 편이 본문에 가깝다.
어머니의 태(胎)와 물고기의 배는 언뜻 비슷해 보여도 정반대다. 태 안에서 우리는 탯줄로 양분을 받고 어머니의 숨으로 숨 쉬며 안전하게 떠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은 어둡고 축축하며 숨조차 제 힘으로 쉴 수 없는 곳,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자리다. 물고기 뱃속은 그런 극한을 가리키는 그림이다.
이 물고기에는 신학적 결이 하나 더 있다. 히브리 성경에서 다곤(Dagon)이라는 신이 등장한다. 흔히 반인반어(半人半魚)의 물고기 신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내력은 좀 더 복잡하다.
다곤(다간)은 본래 시리아·메소포타미아 일대에서 널리 숭배된 곡물의 신이다. 우가리트어·히브리어에서 그 어근 dgn은 '곡식'을 뜻한다. 물고기 신이라는 이미지는 히브리어 다그(dāg, 물고기)와 발음이 비슷한 데서 생긴 후대의 연상으로, 오늘날 학자들은 이를 대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에서 다곤은 아시리아가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의 신으로, 아스돗과 가사에 신전이 있었고 삼손 이야기와 사무엘상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요나를 삼킨 '물고기'를 특정 민족의 신으로 곧바로 등치할 수는 없다. 다만 상징의 층위에서는 이렇게 읽어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아시리아에, 이어 신바벨로니아에 삼켜진 듯 억눌린 기억을 유전자처럼 새기고 있었다. 물고기에게 삼켜진 요나의 모습은, 거대한 제국의 공포에 통째로 갇힌 한 민족의 처지를 겹쳐 떠올리게 한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억압의 기억, 그것 또한 하나의 '물고기 뱃속'이다.
성경은 이런 극한을 통과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에서 물고기 뱃속은 사람을 나락으로 끌고 들어가는 자리가 아니라, 절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만나 희망으로 소생하는 자리로 그려진다.
| 아브라함 | 고향과 친족을 떠나 낯선 땅으로 향하며 감당해야 했던 나그네의 취약함 |
|---|---|
| 이삭 | 아버지의 칼날 앞에 놓였던 모리아산의 경험 |
| 야곱 | 돌베개를 베고 자던 광야의 밤, 그리고 형과 마주하기 전 밤새 씨름하다 환도뼈가 부러진 날 |
| 요셉 | 구덩이에 갇히고 상인들에게 팔려 가며, 이국의 감옥에 갇혔던 시간 |
| 모세 | 사람을 죽인 일이 드러나 광야로 달아나 의지할 곳 없던 처지 |
| 다윗 | 사울을 피해 아둘람 굴에 숨어 지내던 날들,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잘못 앞에 선 부끄러움 |
| 다니엘과 세 친구 | 풀무불과 사자굴 속에 던져졌던 밤 |
절망의 자리에서 결국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만남으로 변화된 존재가 된다 — 성경이 되풀이해 들려주는 하나의 이야기다.
물고기 뱃속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마음의 두 층위를 구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나는 '감정(feeling)'이다. 감정은 나와 대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누군가의 말이 불쾌하게 다가올 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지 흘려보낼지 스스로 정할 여지가 있다. 이유 없이 남을 깎아내리는 말이 넘쳐 나는 시대에, 그런 말에 굳이 휘둘릴 필요가 없다고 마음먹으면 감정은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정서(emotion)'는 다르다. 정서는 나와 대상 '사이'가 아니라 내 존재 '안'에 스며든 것이다. 수치심, 죄책감, 불안 같은 것들이다. 이것은 흘려보내려 해도 쉽게 떨어지지 않고, 때로 몸의 반응으로까지 드러난다.
감정이 창문으로 들이치는 바람이라면, 정서는 벽에 밴 습기다. 바람은 창을 닫으면 그만이지만, 습기는 벽 속에 스며 오래 남는다. 회피한다고 마르지 않는다. 결국은 벽을 열고 직면해야 한다.
심리학자 카를 융(Carl Jung)은 우리 안의 이런 어두운 층을 '그림자(shadow)'라 불렀다. 모든 어른 안에는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있다. 어린 시절의 결핍, 잊히지 않는 상처, 묵은 분노 같은 것들이다. 일흔이 되어서도 옛 서운함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정서에 사로잡힌 삶은 새로운 것을 향해 창조적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그림자는 회피가 아니라 직면을 통해서만 넘어설 수 있다.
여기서 두 가지를 구별하면 길이 보인다. 하나는 '희생자가 되는 일(victimization)'이다. 교통사고나 재난처럼, 내 의지와 무관하게 닥쳐오는 불행이 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았고 막을 수도 없었다. 다른 하나는 '희생자 의식(victimhood)'이다. 그 기억을 끝없이 되살리며 '그 일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무너졌다'는 자리에 스스로를 묶어 두는 태도다. 희생자 의식에 사로잡히면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이지선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의 이야기가 이 구별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는 이화여대 4학년이던 2000년, 음주운전 차량이 낸 7중 추돌 사고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40번이 넘는 대수술을 견뎌야 했다. 누구라도 그날을 원망할 수 있는 처지였다. 그는 분명 '희생자가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희생자 의식에 갇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사고를 만났다'고 표현한다. 그 사건에 붙들려 사는 대신 그것을 계기로 더 나은 삶을 살아내려 했고, 미국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3년 모교의 교수로 돌아왔다. 그리고 부모의 수감으로 홀로 남겨진 아이들을 돕는 단체 '세움'(사단법인 아동복지실천회세움, 2015년 설립)과 함께, 사회의 가장 그늘진 자리에 있는 아이들 곁에 서 있다. 죄인의 자식이라는 시선 앞에 주눅 든 아이들에게, 그런 여건을 통과해 낸 사람이 자기들 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이 된다.
나를 괴롭히는 기억은 회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안에서 울고 있는 그림자는, 직면하여 넘어가야 한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서 그가 비로소 떠올린 것은 하나님이었다. 잘나갈 때는 굳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어려움을 겪을 때에야 사람은 자기 삶을 자꾸만 성찰한다. 성찰이란 결국 나 자신과 나누는 대화다. 묻는 나와 답하는 나로 갈라져, 깊이깊이 삶을 되짚는 일이다. 극한의 상황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성찰하게 만들기에 그 성찰의 시간은 변화의 시간이 된다.
'사흘'이라는 시간에도 결이 있다. 고대 근동의 신화에서 산 자가 지하 세계를 다녀오는 시간은 흔히 사흘로 그려졌고, 그믐에서 초승으로 달이 사라졌다 되살아나는 주기도 대략 사흘로 헤아려졌다. 사흘은 죽음 같은 어둠을 통과해 다시 살아나는, 의미심장한 변화의 기간이다. 요나의 사흘도, 뒷날의 또 다른 사흘도 그 결 위에 놓인다.
그 어둠 속에서 요나는 기도한다. 물이 목까지 차오르고 바다풀이 머리를 감싸며 산의 뿌리까지 내려가, 땅이 빗장으로 자신을 영원히 가둔 듯한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을 부른다. 그가 '영혼'이라 옮긴 히브리어 네페쉬는 '목구멍'을 뜻하기도 한다. 물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죽음의 문턱, 바로 거기서 그는 위를 바라본다.
그리고 고백이 바뀐다. 헛된 것을 붙좇던 자리에서 돌이켜, 감사의 목소리로 서원을 갚겠다고 말한다. 믿음이 회복된 것이다. 누가복음의 탕자가 돼지 먹이를 지키다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 집을 향하듯, 하나님의 낯을 피하던 요나가 절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떠올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다시 알게 된다. 그러자 본문은 말한다. 하나님이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요나를 육지에 토해 냈다고. 끝없이 내려가던 사람이, 이제 올라온다.
신앙의 여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물고기 뱃속에 갇힌 듯한 난감함에 잠길 때가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절망의 자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자리가 된다. 사자굴 속 다니엘이 사자의 입을 막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풀무불 속 세 친구가 함께 걷는 이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뜻한 바가 순조로울 때 우리는 쉽게 하나님을 잊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 바로 그때가 은혜가 흘러드는 시간이었음을 요나서 2장은 조용히 증언한다. 우리를 사로잡던 어두운 그림자가 도리어 은총으로 들려 올려지는 자리로 바뀌기를, 물고기 뱃속 같은 현실을 지나는 이들이 그 속에서도 위를 바라보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