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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 한 편의 드라마

구약, 하나의 흐름으로
— 달아나는 인간과 찾아오시는 하나님

39권, 수백 년의 시간, 창조에서 예언까지. 흩어져 보이는 구약 전체를 하나의 실로 꿰면 무엇이 남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올라간 기록이 아니라, 끝없이 달아나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남는다.

성경을 한 문장으로 줄이라면 어렵지 않다. 예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두 마디로 율법과 예언서 전체를 요약했다. 그러나 그 한 문장이 어떻게 태초의 창조에서 시작해 제국의 폭력을 뚫고 언약과 왕정과 예언을 거쳐 흘러왔는지를 따라가려면, 이야기는 결코 짧지 않다.

구약을 관통하는 서사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써 내려간 드라마다. 방향을 뒤집어 읽는 것이 핵심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상승의 기록이 아니라, 자꾸만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인간을 애타게 뒤쫓아 오시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다. 달아나는 인간과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 오래된 숨바꼭질이 구약 전체의 뼈대를 이룬다. 그 뼈대를 먼저 한눈에 보자.

구약 전체를 하나로 꿰는 흐름 토라·역사서·성문서·예언서를 거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구약 서사 구조 구약, 하나의 흐름으로 달아나는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1 토라 · 모세오경 창조와 타락, 출애굽, 시내산 언약 2 역사서 왕정의 그늘 — 배교와 회복의 되풀이 3 성문서 일상의 지혜와 탄식: 잠언·욥기·전도서·시편 4 예언서 하나님의 눈으로 본 심판과 위로 5 신약으로 하나님의 꿈이 몸을 입다 — 예수 그리스도 창조 → 타락 → 구원의 여정, 끝없이 달아나는 인간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구약은 네 개의 큰 묶음(토라·역사서·성문서·예언서)을 거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로 흘러든다.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같은 동력이 흐른다.

1토라 · 창세기 — 사랑으로 지은 세계

제국의 창조 신화와 정반대에 선 이야기

창세기의 첫 문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고대 세계에서 이미 웅장함의 표본으로 꼽혔다. 없음에서 있음이 튀어나오는 그 압도적 규모 때문이다. 그러나 이 창조 이야기의 진짜 무게는 문장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누구를 향한 반박인지를 알 때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훗날의 그리스까지. 이 제국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 실제로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신화에서 세계는 신들의 전쟁에서 태어난다. 폭력으로 승리한 자가 패배한 자를 마음대로 부리는 질서가 우주의 시작부터 정당화된다. 신화가 곧 제도가 되어, 제국이라는 체제로 굳어졌다.

바로 그 제국에 짓눌리던 사람들이 히브리인이었다. 그들이 전한 창조 이야기에는 전쟁이 없다. 싸움도, 정복도 없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것은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그 방법 또한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비유 — 하나님의 자기 축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내 자유의 일부를 기꺼이 내려놓게 된다. 상대를 위한 자리를 비우기 위해서다. 신학자들은 창조를 하나님의 자기 축소라 부른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사람이 손님을 들이려면 자기 부피를 줄여 공간을 내주어야 하듯, 하나님은 세계가 존재할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한하셨다. 창조는 힘의 과시가 아니라 자리를 내어주는 사랑의 행위였다는 뜻이다.

그렇게 지어진 세계를 성경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한다. 여기엔 파괴가 아니라 기쁨이, 분열이 아니라 연결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숨결로 이어져 서로를 떠받치는 세계. 조각나지 않은 세계다. 이 창조를 진짜로 믿는 사람은 세상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만물에 창조주의 숨결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 신앙의 본질적 태도는 아낌과 존중과 사랑이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역사든 함부로 대하면서 창조를 믿는다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인간을 두고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었다고 말한다. 여기에 인간의 근원적 소명이 담겨 있다. 누군가 나를 바라볼 때 그를 통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내가 맑아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비출 수 없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보편적 소명이다.

죄의 등장 —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그러나 인간은 악으로 굴러떨어졌고, 여기서 죄의 역사가 시작된다. 낙원 밖으로 쫓겨난 인간은 곧장 제국이 보여준 것과 같은 갈등의 소용돌이로 들어간다. 에덴 이후 첫 사람 가인이 형제를 죽인 살인자가 된 것은, 인간이 걸어갈 어두운 운명을 앞당겨 보여준 사건이다.

가인에게 하나님이 묻는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가인은 되받는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하나님은 답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 답이 있다. 그렇다, 나는 너를 네 아우를 지키는 자로 세웠다는 것. 인간은 서로에 대한 책임을 질 때 비로소 아름다워진다. 너와 내가 무관하다는 태도, 그것이 곧 죄의 본질이다.

이후 폭력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라멕은 자신에게 상처 입힌 자를 죽였다고 오히려 자랑하며 노래한다. 마침내 창세기는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고까지 적는다. 창조주가 자신이 한 일을 지워버리고 싶어질 만큼의 절망. 그 뒤로 홍수 심판이 이어지지만, 홍수 이후에도 역사는 새로워지지 않는다. 바벨탑에서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과 맞서는 쪽으로 나아간다.

창세기 12장부터 등장하는 이른바 믿음의 조상들 이야기도 실은 형제 간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삭과 이스마엘, 에서와 야곱, 요셉과 그 형제들. 하나같이 서로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는 깊은 반목에 빠져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갈등을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봉인해버리지 않는다. 모든 이야기가 끝내 화해로 마무리된다. 에덴 이후 갈등은 피할 수 없지만, 그 갈등에 머무르지 않고 화해를 통해 더 나은 공동체로 나아가려는 고심. 그것이 창세기 전체가 붙들고 있는 물음이다.

2토라 · 출애굽기 — 자유를 향한 대장정

신음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

출애굽기는 이집트라는 무대를 정면으로 내놓는다.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그 세계는 맨 밑바닥 사람들의 희생과 피 위에 세워진 제도다. 정점에 선 소수의 호사스러운 삶을 위해 바닥의 다수가 짓눌리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 그 세상이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이 스스로를 소개하는 장면은 성경 전체의 핵심에 놓인다. 나는 내 백성의 신음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았고, 그 근심을 안다. 여기서 보고 듣고 안다는 것은 객관적 정보를 파악했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으로 함께 느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하나님은 역사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오셔서, 불의한 역사를 의의 방향으로 돌려세우기로 작정하신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이다.

열 번의 재앙, 홍해를 건너는 밤, 아말렉과의 전투를 지나 그들은 시내산 앞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언약이 맺어진 것이다.

비유 — 언약은 명령이 아니라 파트너십

과거에는 정보가 곧 권력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왕과 제사장 계급만의 특권이었다. 그런데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뜻을 모든 백성에게 알리라고 하신다. 정보의 독점이 깨지는 순간이다. 게다가 전능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명령하지 않으신다. "내 뜻은 이러한데, 그대들이 동의한다면 나는 그대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대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며 동의를 구하신다. 갑이 을에게 내리꽂는 계약이 아니라, 상대를 대등한 파트너로 존중하는 언약이다.

온 백성이 그렇게 살겠다고 응답할 때 비로소 언약이 성립한다. 그 목표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는 것이었다. 역사의 모순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역사를 대속하며,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존재. 그러기 위해서는 구별된 삶이 필요했다. 욕망의 문법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타자와 온전히 어울려 사는 삶. 성경은 그런 삶이야말로 거룩함이라고 거듭 말한다.

그들이 함께 나아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는 물산의 풍요를 뜻하기도 하지만, 더 깊게 보면 다른 사람을 적이나 경쟁자가 아니라 사랑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자리다. 그곳에 있으면 고향처럼 편안하고, 나답게 있어도 괜찮은 곳. 잃어버린 낙원을 향해 나아가는 자유의 대장정, 그것이 출애굽기의 이야기다.

토라 전체를 한마디로 줄이면 이렇다. 가난하고 소외되어 스스로 설 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세심히 돌보고, 그들의 처지에 서보고, 그들의 살 권리를 존중하며 환대하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이다.


3역사서 — 왕정의 그늘, 되풀이되는 배교

스스로 극복하려던 제국의 길을 다시 걷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결국 왕정을 세운다. 문제는 왕정의 구조가 따뜻한 형제 공동체가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가 갈리는 세계라는 데 있었다. 제국을 벗어나려던 이스라엘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제국의 길을 다시 밟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다. 사람들은 이를 솔로몬 최고의 업적으로 꼽지만, 그 이면을 보면 그림이 달라진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기 위해 백성을 대규모로 동원했고, 동원된 이들은 자유를 잃은 채 노역에 가까운 일을 감당해야 했다. 명분은 아름다웠으나, 그 실상은 이집트로의 회귀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자유를 찾아 애굽을 떠난 백성이 이제 자기 왕 아래서 다시 노예의 자리로 돌아간 셈이다.

그 결과는 분열이었다. 솔로몬이 죽은 뒤 아들 르호보암이 강압을 이어가자,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왕국은 둘로 쪼개진다. 이후 역사서가 되풀이해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뼈아픈 순환이다. 하나님의 거듭된 경고,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들, 뒤따르는 심판, 고통 속의 부르짖음, 그리고 뜻을 돌이켜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은혜를 까맣게 잊고 또다시 과거로 되돌아간다. 배교와 회복이 지치도록 반복되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우울한 무늬다.

4성문서 — 일상을 견디는 네 가지 지혜

잠언 · 욥기 · 전도서 · 시편

거대한 역사의 흥망 아래에서, 보통 사람들은 매일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 그 일상의 자리에서 태어난 것이 성문서다. 잠언, 욥기, 전도서, 시편은 각기 다른 각도에서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네 책이 서로 물음을 주고받으며 세계관을 점점 넓혀간다는 점이다.

잠언 — 지혜를 몸에 새기기

잠언의 세계관은 실용적이다.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관을 내면화하도록 돕는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의 문법이다. 잠언의 수많은 잠언을 한마디로 응축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문장으로 모인다. 한 구절 한 구절이 그 근본을 펼쳐낸 말이기에 소중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잠언의 세계관이 작동하지 않는 현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정직하고 바르게 산 사람이 복을 받고 악인이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욥기 — 이해할 수 없는 인생 앞에서

그 균열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책이 욥기다. 왜 의로운 사람이 고통받는가. 욥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은 더 날카롭다.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대로 나를 대접해주지 않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가. 욥을 찾아온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전통적 지혜를 대변한다. 죄가 있으면 벌을 받는다, 그러니 네가 고통을 겪는 것은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잠언의 인과 도식을 그대로 적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욥에게는 그럴 만한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는 인생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의 크심 앞에 어떻게 서야 하는가. 그것이 욥기의 세계다.

전도서 — 삶의 통제권을 내려놓기

전도서 하면 떠오르는 후렴이 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여기서 '헛됨'으로 옮겨진 히브리어 헤벨은 원래 바람, 입김이라는 뜻이다. 얼핏 세상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는 허무주의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비유 — 헤벨,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

부, 명예, 지식처럼 인간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다. 꽉 쥐려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간다. 시간이 흐르면 결국 붙잡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결코 항구적으로 내 통제 아래 있지 않다. 전도자의 통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 삶을 내가 완전히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일종의 불신이라는 것.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기회를 살아낼 뿐이다. 그러니 오늘 누리는 이 평범한 하루가 실은 선물이며, 그 선물을 한껏 살아내는 것이 잘 사는 인생이다.

그래서 허무를 말하는 듯한 전도서도 끝에 이르러 젊은이들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권한다. 경외하는 삶이란, 때때로 일상이 버겁게 느껴질지라도 그 일상 속에 하나님의 빛나는 세계가 숨어 있음을 절감하며 사는 것이다.

시편 — 찬양과 탄식, 그 둘로 짜인 인생

150편으로 이루어진 시편이 보여주는 세계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 듯해 행복하고 삶이 한없이 깊게 느껴질 때 저절로 터져 나오는 찬양이다. 다른 하나는 가장 가까이 계셔야 할 하나님이 너무 멀리, 때로는 부재하시는 듯 느껴져 속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다. 이 둘이 함께 있어 하나의 인생을 이룬다.

시편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읽는 사람마다 "이건 내 이야기"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시편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방향은 분명하다. 인생의 고달픔 속에서 어쩔 줄 모르는 순간조차, 그 고통이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들어오는 통로일 수 있음을 깨닫는 것. 그렇게 탄식을 찬양으로 바꾸어가는 것이 시편 세계의 핵심이다.


5예언서 —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하나님의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

구약의 마지막 자리에 예언서가 있다. 예언자가 등장한 이유는 분명하다. 종교와 정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땅히 할 일이란 무엇인가. 시내산 언약에서 약속했듯,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귀히 여기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왕들은 그 직무를 저버렸고, 종교인들조차 약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이 뒤틀린 현실을 향해 하나님은 당신의 스피커로 예언자를 보내신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파토스, 곧 하나님의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이라 불린다.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이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출애굽 정신에 비추어 오늘의 현실을 읽는다. 그러나 현실은 늘 그 정신을 배반한다. 지배하는 자들은 여전히 호의호식하며 고통받는 이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못한다. 예언자들은 정치 권력이든 종교 권력이든 가리지 않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사뭇 날카롭다. 때로는 굳어진 마음을 내리치는 망치처럼, 때로는 마음을 쪼개는 빛처럼. 예언자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한 이유다.

그러나 예언자는 비난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백성이 비전을 잃고 자기가 누구인지조차 잊었을 때, 그들을 위로하고 하나님이 꿈꾸시는 회복을 일깨워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또한 예언자의 몫이었다. 날카로운 심판과 따뜻한 위로, 이 둘이 예언서를 관통한다.


6신약으로 — 하나님의 꿈이 몸을 입다

구약의 실이 매듭지어지는 자리

이제 처음의 뼈대로 돌아가 전체를 다시 꿰어보자. 하나님이 사랑으로 아름답게 지으신 세계, 그 형상대로 빚어진 인간이 점점 죄를 향해 기울고, 죄가 개인의 일탈을 넘어 제도가 되었을 때 제국이 등장한다. 제국이 사람을 소모품처럼 다룰 때,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려 하셨다. 그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출애굽과 언약, 왕정과 분열, 배교와 회복, 예언자의 외침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행착오가 쌓였다.

그리고 그 오랜 여정 끝에서 우리는 신약에 이른다. 구약 내내 애타게 인간을 뒤쫓던 하나님의 마음,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향한 그 애정이 마침내 한 인격으로, 한 몸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꿈이 몸을 입고 나타난 존재, 예수 그리스도다. 달아나는 인간을 찾아오시던 하나님이, 이제 직접 사람이 되어 그 숨바꼭질의 끝으로 걸어 들어오신 것이다.

구약을 하나로 꿰는 실은 결국 이것이다. 창조의 사랑에서 시작해, 죄와 제국의 어둠을 통과하고, 언약과 예언을 거쳐,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이 사람이 되기까지. 인간이 아무리 달아나도 끝내 찾아오시는 그 발걸음이 39권 전체를 관통한다.

달아나는 인간, 찾아오시는 하나님. 이 한 문장을 붙들면 흩어진 구약의 장면들이 하나의 방향을 향해 정렬된다. 창조의 "좋았더라"에서 예언자의 마지막 외침까지,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