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 노동 · 경제
강한 인공지능의 시대가 이미 열렸다. 그러나 일자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뀔 뿐이다. 경제학자 타일러 코웬(Tyler Cowen)이 2026년 런던에서 던진 이 진단을, 사실 확인과 함께 다시 읽는다.
좋은 소식이자 나쁜 소식이 하나 있다. 강한 인공지능(AI)이 우리 곁에 도착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일자리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종말론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안일함 사이에서, 코웬이 제시하는 그림은 제3의 길이다. 일의 총량은 유지되되, 일의 내용과 분포가 근본적으로 재편된다는 것이다.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이 주장은 낯설지 않다. 산업혁명 이전 잉글랜드에서는 인구의 약 8할이 농업에 매여 있었다. 그 시절 사람에게 “당신의 후손은 무슨 일을 하며 살겠는가”라고 물었다면, ‘팟캐스터’나 ‘강연자’ 같은 답이 나왔을 리 없다. 그런 직업은 상상의 범위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자리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형태를 갈아입는다.
200년 전 농부에게 건네는 예언. 밀밭에서 일하던 18세기의 농부에게 “당신의 증손자는 카메라 앞에서 혼자 떠들며 돈을 번다”고 말했다면 정신 나간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벌어졌다. 기술이 어떤 일을 없애는 동안, 그 기술은 이름조차 없던 새로운 일을 함께 만들어 낸다. AI를 둘러싼 오늘의 불안도 대개 이 지점을 놓친다. 없어질 일은 눈에 보이지만, 생겨날 일은 아직 이름이 없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AI에 흠뻑 젖은 세계’에서 새 일자리는 구체적으로 어디서 솟아나는가. 코웬은 여러 영역을 짚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상당수가 지금 우리가 ‘미래의 유망 직종’이라 부르는 것과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에너지다. 주요국은 예외 없이 에너지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해야 하고, 여기서 막대한 고용이 발생한다. AI는 전기를 먹고 자란다. 데이터센터가 늘수록 전력 수요는 폭증하고, 발전·송전·저장 설비를 짓고 운영할 사람이 필요해진다. 코웬의 표현을 빌리면, 오늘날 컨설팅 회사의 파트너가 될 법한 인재가 앞으로는 뉴욕이 아니라 휴스턴에 살며 에너지 회사의 임원이 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코웬은 영국을 가장 걱정했다. 그리고 그 우려는 실제 사건으로 확인된다. OpenAI는 2025년 9월 영국에 대규모 데이터센터(스타게이트 UK)를 짓겠다고 발표했지만, 2026년 4월 이 계획을 사실상 보류했다. 이유의 핵심은 전기요금이었다. 영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미국·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의 네 배를 넘는, IEA(국제에너지기구) 회원국 최고 수준이다. 100메가와트(MW)급 데이터센터를 돌릴 때, 텍사스나 버지니아보다 전기값이 네 배 비싸다는 것은 사소한 비용 항목이 아니라 사업의 성립 여부를 가르는 구조적 격차다.
강한 AI의 세계에서 일자리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대개 자초한 문제다.
여기에 코웬의 정책적 메시지가 있다. 일자리 위기는 AI 자체가 아니라 정책 실패에서 온다는 것이다.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지 못하면, 새 산업은 다른 나라로 떠난다. 반대로 에너지를 확보한 나라에는 일자리가 몰려든다.
코웬이 “정책 권고를 하나만 고르라면”이라며 강조한 것이 노동 이동성이다. 앞으로 수많은 일자리가 지역과 산업, 직종을 가로질러 재배치되어야 한다. 이때 사람들이 지역을 옮기고 업종을 바꾸는 데 유연한 나라는 번영하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혼란스럽고 소외된 노동자”만 잔뜩 떠안게 된다.
이동성에는 두 층위가 있다. 하나는 물리적·산업적 이동, 즉 텍사스로 옮겨 에너지 회사에 취업할 수 있는 유연성이다. 다른 하나는 재교육이다. 대부분의 일은 직함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그 직함 아래에서 실제로 하는 일은 달라진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핵심에는 예외 없이 “AI를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요구가 놓여 있다. 코웬은 이것을 “이 새 시대의 가장 큰 조정”이라 불렀다. 재교육에 능한 나라는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뒤처진다.
여기서 오해를 하나 걷어내야 한다. AI가 강해진다고 해서 ‘움직이는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로 가서 회의를 하고, 동료를 설득하고, 등을 두드려 주고, 고객을 만나러 이동하는 일 — 물리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런 일의 대부분은 남는다. 다만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AI를 다루는 법을 새로 익혀야 한다.
대신 자동화가 먼저 삼키는 것은 일의 지루하고 반복적인 부분이다. 이는 오래된 추세의 연장선이다. 그 결과 남는 일들은 점점 더 고유하고, 독창적이며, 한마디로 “기술(記述)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공장 조립 라인처럼 규칙을 명확히 적을 수 있는 일은 로봇과 AI에게 넘어가고, 하루에 일곱 가지 서로 다른 일을 뒤섞어 하는 사람의 일은 오히려 견고해진다.
그런데 이 “기술하기 어렵다”는 성질이 곧 비관의 원천이기도 하다. 미래의 일이 무엇인지 명확히 그려지지 않으니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그러나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일이 쉽게 자동화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덜 떠오르지만 규모가 큰 성장 영역이 둘 있다. 첫째는 데이터 수집·정제다. 오늘의 거대 AI 모델들은 인터넷을 사실상 다 읽었다. 그러나 정부·대학·기업·문서고 안에는 아직 AI에게 먹여지지 않은 데이터가 방대하게 잠들어 있다. 이 데이터를 기계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 모델에 공급하는 일 자체가 가까운 미래의 큰 산업이 된다. AI는 데이터를 갈망하는데, 세상의 데이터 대부분은 어딘가에 방치된 채 낭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실험을 돌리는 일이다. AI는 이미 신약, 의료기기, 새로운 시술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쏟아 낸다. 문제는 그 아이디어들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부는 시뮬레이션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실제 실험을 거쳐야 한다. 코웬은 특히 생의학 분야에서 실험 수요가 20~30%가 아니라 열 배 수준으로 뛸 수 있다고 봤다. 여기서 관건은 규제 환경이다. 자국이 축적한 보건 데이터로 민간이 실제 실험을 돌릴 수 있게 허용하는 제도를 갖췄는가가 성패를 가른다.
아이디어는 넘치고, 검증할 손은 모자란다. AI를 아이디어를 무한히 뽑아내는 발명 공장이라고 해 보자. 공장은 하루에 설계도 수천 장을 찍어 낸다. 그러나 설계도가 실제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려면 시제품을 만들고 시험대에 올려야 한다. 발명이 값싸지고 빨라질수록, 병목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검증’으로 옮겨 간다. 실험을 설계하고 돌리고 판독하는 사람의 몸값이 오르는 이유다.
부가 늘고 여가가 생기면 사람들은 더 즐기려 한다. 그러면 엔터테인먼트가 커진다. 음악도 AI가 작곡하고 그림도 AI가 그리는데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코웬의 답은 단순하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감정을 담아 만든 것을 소비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설령 AI의 결과물에 만족하더라도, 미래의 테일러 스위프트나 오아시스에는 여전히 사람 얼굴이 필요하다. 카리스마 있고, 매력적이고, 기억에 남는 인간이 AI 창작물(혹은 인간과 AI의 공동 창작물)의 ‘앞얼굴’ 역할을 한다. 강한 AI의 세계에서 카리스마의 값어치는 오히려 치솟는다.
같은 논리로 장인적 생산이 대량생산 대비 몸값을 올린다. 사람들은 ‘AI 슬롭(slop, 기계가 쏟아낸 저품질 양산물)’에서는 나올 수 없는, 특별하고 독창적인 것을 원하게 된다. 여기에 코웬이 “이상한 서비스직”이라 부른 영역이 더해진다. 당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 개인 비서, 식당 입구에서 맞아 주는 사람 같은 일이다. 부유한 사람이 늘수록 그들 곁에서 온갖 시중을 드는 사람들의 무리도 늘어난다. 그중 일부는 AI 에이전트가 맡겠지만, 상당수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고령 인구를 돌보는 일 역시 AI와 무관하게 계속 커진다.
구조적으로는 아주 작은 회사와 스타트업이 훨씬 많아진다. 이미 미국에서는 소수 인원의 스타트업이 매출을 빠르게 키우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서너 명에서 열 명 남짓한 팀이 AI에 상당한 업무를 맡기면, 회사를 키우기가 한결 쉬워진다. 겉보기엔 작아도 매출은 큰 회사들이다. 그 결과 기업의 ‘최적 규모’가 줄어든다. 회사는 더 아늑해지고, 형제자매나 절친이 함께 꾸리는 조직이 늘며, “누구를 아는가”가 더 중요해진다.
상징적인 사례가 이미지 생성 AI 미드저니(Midjourney)다. 이 회사는 외부 투자 없이, 마케팅 부서도 없이, 디스코드 봇 하나로 연 수억 달러 매출을 만들어 냈다. 창업기의 핵심 인력은 창업자를 포함해 대략 열 명 안팎에 불과했다. 락 밴드도 아닌 회사가 열 명 남짓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것이다. 앞으로 이런 사례가 훨씬 흔해진다.
그렇다면 이 재편에서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 코웬의 구분은 통념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가장 크게 이기는 쪽을 그는 “AI 마니아(AI maniacs)”라 부른다. AI에 관해 닥치는 대로 익히는 사람들이다. 반드시 모델을 만드는 기술자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AI를 어떻게 쓰는지, 에이전트를 어떻게 부리는지, 업무 프로세스를 어떻게 자동화하는지, 사람 중심의 기존 절차에 AI를 어떻게 접목하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사실 이걸 제대로 하는 법은 아직 아무도 잘 모른다. 앞으로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풀려다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잘 해내는 소수가 새로운 부자 계층이 된다. 이들은 모델을 만드는 사람이라기보다 AI를 지휘하는 ‘오케스트레이터’다.
지휘자는 악기를 직접 연주하지 않는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바이올린도 트럼펫도 직접 켜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은 수십 명의 연주자를 조율해 흩어진 소리를 하나의 음악으로 묶는 것이다. AI 오케스트레이터도 마찬가지다. 모델을 직접 만들지 않아도, 여러 AI 도구와 사람을 엮어 결과를 만들어 낸다. 강한 AI 시대의 희소 능력은 ‘직접 연주하는 손’이 아니라 ‘전체를 지휘하는 귀’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쪽은, 뜻밖에도 “규칙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똑똑하고, 좋은 집안 출신에, 명문대를 나오고, 시키는 대로 성실히 해내며, 언젠가 어느 조직의 파트너가 되어 높은 연봉을 받고 세금을 많이 내는 삶을 당연하게 기대하던 계층이다. 이들은 굶지 않는다. 여전히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러나 좋은 배경과 훌륭한 훈련, 성실성에서 오던 그들의 상대적 우위는 값이 크게 떨어진다. 스스로 ‘AI 네이티브’로 거듭나지 못하는 한, 이들은 평범한 노동자로 수렴한다.
AI 활용·에이전트·프로세스 자동화를 파고드는 사람. 기술자가 아니어도 된다. 실패율은 높지만, 해내는 소수가 새 부유층이 된다. 핵심은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지휘하는 능력’.
명문대·성실·모범 경로로 파트너 트랙을 기대하던 계층. 굶지는 않지만, 학벌과 성실성에서 오던 우위의 값이 급락한다. AI 네이티브로 전환하지 못하면 평범해진다.
코웬은 여기에 정치적 경고를 덧붙인다. 밀려나는 이 집단이 사회적으로 매우 영향력 있는 계층이라는 점이다. 능력과 노력에 대한 보상이 기대만큼 오지 않는다고 느끼는 엘리트가 대량으로 생겨나면, 그 좌절은 정치적 불안정으로 번질 수 있다.
강연의 결론은 하나의 역설이다. 장기적으로는 여가가 늘어난다. 부가 늘고, AI가 많은 일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기적으로는 정반대다. 지금 당장은 모두가 훨씬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최소한 AI를 익히는 일만큼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가 배당은 대체 언제 오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이 역설이다. 여가는 결국 온다. 다만 앞으로 약 5년 동안 사람들은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를 통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긴 여유로 가는 길목에 놓인 것이 짧고 강한 격무다.
정리하면 코웬의 그림은 종말론도 낙관론도 아니다. 일자리는 남되 그 형태가 바뀌고, 그 전환의 성패는 기술 자체보다 에너지·이동성·재교육·규제라는 정책 변수와, 개인이 얼마나 빨리 ‘AI를 부리는 법’을 익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없어질 일을 세는 대신, 아직 이름 없는 일이 어디서 자라는지를 보는 편이 미래에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