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심리학 · 소통의 심리학
김정운의 소통의 심리학
우리는 소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이 새 책 『말하지 않고 말하기』에서 던지는 명제다. 인공지능(AI)이 유창하게 문장을 뱉어 내는 시대에, 정작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롭고 자주 관계에 실패한다. 왜일까. 말이 소통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정운은 30년 전 독일에서 발달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 곧바로 이 이야기를 책으로 쓰려 했지만, 교수 임용에 여러 번 미끄러지고 방송으로 방향을 틀면서 원고는 30년을 묵었다. 그 사이 그의 이론을 채워 줄 연구가 쏟아졌고, 예순을 넘긴 지금에야 그는 오래 벼려 온 주제를 한 권으로 묶어 냈다. 소통이란 무엇인가라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인간 존재의 조건을 건드리는 질문이다.
비고츠키의 주장은 근대 철학의 출발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비고츠키는 순서를 바꾼다. 우리는 먼저 소통하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고, 소통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갓난아기는 홀로 사고하는 개체로 태어나 나중에 사회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엄마와 뒤엉킨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 관계가 먼저 있고, 그 관계에서 한 개체가 서서히 떨어져 나온다. 사고란 개인의 발명품이 아니라 사회적 소통이 안으로 접혀 들어간 결과라는 것이다.
01AI를 무서워할 이유는 없다
김정운은 심리학자의 자리에서 지금의 AI 담론이 과장돼 있다고 본다. 인간성이 사라진다느니, 모든 것이 뒤집힌다느니 하는 공포가 그렇다. 수십만 년의 진화가 우리 유전자에 새겨 놓은 것들을 기계가 한순간에 뒤엎을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는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를 끌어온다. 19세기 영국은 이른바 ‘붉은 깃발법’으로 자동차 앞에 사람을 붉은 깃발을 들고 걷게 하며 마차보다 느리게 다니도록 규제했다. 낯선 기계에 대한 공포를 달래려고 자동차 앞머리에 말 모양 장식을 붙이기도 했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흉내 내는 로봇이 주는 섬뜩함도 그 계보에 있다. 새로운 기술은 늘 이렇게 두려움을 부른다.
말 머리를 단 자동차. 초창기 자동차는 겁먹은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익숙한 ‘말’의 형상을 빌렸다. 오늘날 사람 얼굴을 한 AI도 마찬가지다. 본질은 엔진(계산)에 있는데, 우리는 자꾸 겉모습(사람다움)에 놀란다. 겉모습을 걷어 내고 본질을 보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흥미로운 각주가 하나 있다. 1956년 다트머스 회의에서 존 매카시가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말을 만들었을 때, 마우스를 발명한 더글러스 엥겔바트는 다른 이름을 내밀었다. IA, 즉 지능 확장(Intelligence Augmentation)이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능을 넓혀 주는 도구라는 관점이다. 김정운이 보기에 AI의 본질은 바로 이 ‘인터페이스 혁명’에 가깝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접점에서 일어나는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 자신이 AI의 직격탄을 맞은 사람이라고 그는 말한다. 영어·독일어·일본어 등으로 된 2만 권의 장서가 그의 자부심이었다. 남보다 다양한 자료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의 근거였다. 그런데 AI가 등장하자 그 방대한 자료를 뒤집어 찾는 일이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수십 년 쌓은 지적 자산이 하루아침에 장식이 되는 경험.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는 이 도구 덕분에 30년 묵힌 책을 마침내 쓸 수 있었다. 자료를 찾는 고통은 사라지고, 쓰는 즐거움만 남았다.
그럼에도 AI가 넘지 못하는 선이 있다. AI는 결코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물론 먼저 말하도록 프로그래밍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내가 시킨 것이지 기계가 자발적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다. 소통의 문제로 들어서는 순간, AI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02우리는 소통 모델부터 틀렸다
우리 머릿속의 소통 모델은 단순하다. 발신자가 메시지를 만들어 수신자에게 보낸다. 소통이 어긋나면 메시지가 잘못됐거나 그것을 보낸 내 탓이라고 여긴다. 김정운은 이 모델 자체가 인간 소통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모델 역시 다트머스 회의의 두 거인에게서 나왔다고 지적한다.
한 사람은 존 매카시다. 그는 기계를 인간처럼 사고하게 만들면 된다고 믿었는데, 그때 인간이 ‘문장으로’ 사고한다고 전제했다. 명제적 지식을 모두 집어넣으면 컴퓨터도 인간처럼 생각하리라는 것이다.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이 방향으로 밀어붙였지만 좀처럼 성과가 나지 않았다. 이른바 ‘AI의 겨울’이다. 규칙을 하나하나 집어넣는 초기 자율주행이 벽에 부딪힌 것과 같은 이야기다. 반면 카메라 한 대로 시각적으로 보고 반응하게 만든 접근이 오히려 길을 열었다.
버벌 싱킹과 비주얼 싱킹. 게슈탈트 심리학은 우리 사고의 대부분이 문장이 아니라 ‘그림’이라고 본다. 멍하니 있을 때 생각이 튀어 오르는데, 그 순간은 문장이 아니라 이미지로 날아간다. 문장(버벌 싱킹)은 연역·귀납 같은 순환 구조여서 새로운 것이 태어나기 어렵다. 창조는 이미지가 툭 튀어나온 뒤, 그것을 언어가 뒤늦게 수습하는 데서 온다. AI가 처음부터 “인간은 그림으로 사고한다”에서 출발했다면 60년의 헤맴을 줄였을지 모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또 한 사람은 정보이론을 세운 클로드 섀넌이다. 그는 소통을 ‘정보의 전달’로 규정했다.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신호에서 잡음을 걸러 내기 위해 비트·바이트 같은 정보의 기본 단위를 세웠고, 그 결과가 발신자–메시지–수신자라는 전송 모델이다. 통신 공학으로는 탁월하지만, 인간의 소통을 여기에 가두면 핵심을 놓친다.
인간의 소통은 상호주관성에서 출발한다. 이 개념은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이 벼려 낸 것이다. 후설은 물었다. 자연과학이 말하는 ‘객관성’은 정말 어디에 있는가. 양자물리학에 들어가면 관찰자와 무관한 순수한 객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떠올리는 컵과 당신이 떠올리는 컵이 같은 뜻이라는 보장은 어디서 오는가. 후설은 그래서 주관들이 함께 공유하는 의미 체계, 곧 상호주관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선천적으로 주어진다”며 서둘러 넘어갔다. 김정운의 문제의식은 정확히 그 빈칸에 있다. 무엇을 타고나는가가 아니라, 타고난 것이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03인간은 ‘미완성’으로 태어난다
왜 인간만이 상호주관적 존재인가. 김정운은 그 열쇠를 인간의 독특한 출생에서 찾는다. 스위스 생물학자 아돌프 포트만은 인간이 ‘생리적 조산’ 상태로 태어난다고 보았다. 다른 동물은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걷고 움직이며 한 개체로 완성된 채 세상에 나온다. 오직 인간만이 미완성으로, 사실상 한 해쯤 일찍 세상에 나온다.
일찍 나온 대가로 인간은 특별한 것을 얻는다. 태어난 뒤 약 9개월 동안, 다른 어떤 동물도 갖지 못한 엄마와 아기 사이의 독특한 상호작용이 펼쳐진다. 그리고 9개월 무렵 아기가 스스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전환점이 온다. 진화인류학자 마이클 토마셀로가 ‘9개월 혁명’이라 부른 순간이다. 이 기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 김정운이 박사과정에서 파고든 물음이자, 이 책 전체를 떠받치는 골격이다.
그 답이 상호주관성의 여섯 원형이다. 처음 넷은 나와 너 사이의 이항(二項) 경험이고, 여기에 ‘대상’이 끼어들면서 삼항(三項) 경험 둘이 더해진다. 이 여섯 가지를 다 갖출 때 비로소 인간은 독립된 소통의 주체가 된다.
04몸으로 통한다 — 여섯 원형
① 터치 — 피부는 드러난 뇌
아기는 말을 못 해도 소통한다. 무엇으로? 접촉이다. 엄마가 아기를 만지는 그 순간, 손이 닿은 공간은 엄마의 것도 아기의 것도 아닌 공동의 영역이 된다. 아기도 동시에 엄마를 만지기 때문이다. 소통은 여기서 출발한다. 피부는 드러난 뇌라는 말이 있다. 발생 초기에 뇌로 들어가는 세포와 피부를 이루는 세포는 본래 같은 뿌리(외배엽)에서 갈라진다. 그래서 아기를 많이 만져 줄수록 발달에 도움이 된다.
만지면 아픔이 덜해지는 것도 같은 원리다. 통증생리학의 ‘관문 통제 이론’에 따르면, 피부에는 압각과 통각을 전하는 통로가 따로 있어 만지는 감각이 빠르게 전달되면 통증 신호가 관문에서 억제된다. “엄마 손은 약손”이 과학적으로 맞는 셈이다. 심리적 아픔도 다르지 않다. 슬픈 사람을 우리는 토닥이고 껴안는다. 위로해 줄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를 감싸 안는다. 나이 들고 지위가 오를수록 남자들이 팔짱을 자주 끼는 것도, 폼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아무도 안아 주지 않아 스스로를 만지는 몸짓이라고 김정운은 읽는다.
터치의 힘은 실험으로도 나타난다. 미국의 한 연구에서 종업원이 계산할 때 손님의 손이나 어깨를 살짝 스치기만 해도 팁이 눈에 띄게 늘었다. 손님은 접촉을 의식조차 못 했는데도 그랬다. 프로 농구에서도 하이파이브·포옹 같은 팀 내 접촉이 많은 팀이 더 좋은 성적을 냈다는 분석이 있다. 접촉 그 자체가 이미 소통인 것이다.
그렇다면 AI와 우리는 서로 만질 수 있는가. 없다. 우리 피부는 압력·진동·온도·통증·미끄러짐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느낀다. 기술이 이를 하나씩 구현할 수는 있어도, 게슈탈트 심리학의 말대로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다. 게다가 인간의 피부는 끊임없이 재생된다. 그것까지 복제하는 기술이 있다면 우리는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AI는 소통의 가장 기본인 터치조차 나눌 수 없는 존재다.
재미있는 것은, 인간이 기계를 대하는 방식이 어느 순간 ‘때리기’에서 ‘만지기’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자판은 두들기고 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의 터치 인터페이스가 등장하면서 우리는 기계를 사랑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전에 클릭으로 화면을 조작하게 해 준 마우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AI 혁명의 본질이 인터페이스 혁명이라는 말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다만 이제 우리가 만질 것이 스마트폰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금 쓸쓸하다. 상호주관성의 가장 기본 토대인 터치가 기계에 갇히면서, 무언가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② 눈맞춤 — 흰자위의 비밀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친다. 동물에게 눈맞춤은 대개 공격 신호여서, 원숭이 우리 앞에서는 짙은 색안경을 써 시선을 감추는 편이 안전하다. 오직 인간에게만 눈맞춤이 소통 행위다. 그 비밀은 흰자위, 곧 공막에 있다. 인간의 눈은 흰 공막이 유독 넓어서 내가 어디를 보는지가 훤히 드러난다. 시선의 방향을 보여 준다는 것은 곧 나의 의도를 보여 준다는 뜻이고, 그래야 협업이 가능하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여우를 온순한 개체끼리만 골라 번식시켰더니 성격만 순해진 게 아니라 생김새까지 귀여워졌다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진화인류학자 브라이언 헤어는 이를 ‘자기 가축화’라 부르며, 강한 것이 아니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고 정리했다. 인간도 그렇게 스스로를 온순하게 길들여 왔다. 눈맞춤과 미소가 무기가 아니라 협력의 신호가 된 것이 그 증거다.
이 원리는 문화의 여러 곳에 흔적을 남긴다. 초창기 미키마우스의 눈은 그냥 까만 점이었고 인기가 없었다. 1930년대 말 흰자위가 생기자 비로소 사랑받기 시작했다. 사람 같다고, 마음이 통한다고 느낀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커다란 눈도 같은 계보다. 인류의 진화 자체도 이 방향으로 흘렀다. 고대 인류의 튀어나온 눈썹뼈는 현생 인류에 오면서 안으로 들어갔는데, 눈의 움직임과 표정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공격이 아니라 협력을 위한 얼굴로 바뀐 것이다.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이런 흐름을 ‘문명화 과정’이라 불렀다. 문명이란 날것의 감정을 억제하고 온순하게 다듬는 일이며, 그 결과로 예절과 상호작용의 규칙이 태어난다. 중세 초기의 식사 풍경은 그릇도 없이 칼로 찍어 먹고 뒤엉켜 다투는 아수라장이었지만, 궁정에서 식탁 예절이 생겨나며 감정이 순화됐다. 그 예절의 핵심에 눈을 마주치며 짓는 부드러운 미소가 있다.
흥미롭게도 시선을 두는 곳에는 문화 차이가 있다. 시선 추적 연구를 보면 서양인은 상대의 눈과 입을 보는 반면, 동아시아인은 코 언저리를 보는 경향이 있다.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겨 온 문화적 습관 탓이다. 어려서 서양에서 자란 아이들이 유독 잘 웃는 것도, 상대가 내 입과 눈을 본다는 것을 알기에 웃어 주는 것이 기본 예절로 몸에 뱄기 때문이라고 김정운은 설명한다.
③ 정서 조율 — 거울뉴런과 미소
세 번째 원형은 정서 조율이다. 기타 줄을 서로 맞추듯, 두 사람이 정서를 공유하며 조율해 간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20세기의 큰 발견이 얽혀 있다. 1990년대 초 이탈리아 파르마대학의 자코모 리촐라티 연구팀은 원숭이가 손으로 무언가를 잡을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를 찾다가 우연을 마주쳤다. 연구원이 먹이를 집는 모습을 보기만 한 원숭이의 뇌에서도 같은 부위가 켜졌던 것이다. 여기서 ‘거울뉴런’이 발견됐다. 타인의 행동·감정·의도를 보기만 해도 내 안에서 같은 회로가 작동한다.
쉽게 말하면, 웃는 얼굴을 보면 따라 웃고 찡그린 얼굴을 보면 따라 찡그린다. 상대의 표정이 곧 내 표정이 되면서 그 감정이 전해진다. 그런데 남자들은 이 거울이 무뎌지도록 길들여진다. 딸이 울면 달래지만 아들이 울면 “남자가 왜 우느냐”고 억누른다. 정서 경험을 억압당한 아이는 자라서 소통이 점점 어려워진다.
미소를 둘러싼 권력의 심리도 여기서 나온다. 남자들은 자기가 먼저 웃으면 권력 관계에서 밑에 들어간다고 여겨 좀처럼 웃지 않는다. 명함을 주고받은 뒤 낮은 쪽이 먼저 웃는 광경을 김정운은 자주 봤다고 말한다. 그가 꼽는, 입꼬리가 처지도록 웃지 않는 세 집단이 있다. 사장, 교수, 고위 공무원이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이들이 정작 긍정적 정서를 나누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 전체의 손실이다.
진짜 미소와 가짜 미소도 구분된다. 입만 움직이는 억지 미소를 ‘팬암 미소’라 부른다. 과거 팬암 항공 승무원들의 매뉴얼화된 미소에서 나온 말이다. 반면 눈가 근육까지 함께 움직이는 진짜 미소를 ‘뒤센 미소’라 한다. 입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도 눈 근육은 정말 즐거울 때만 움직이기에, 눈을 보면 진심이 드러난다. 코로나 이후에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이들이 있는 것은, 감정이 읽히는 것이 불편해서라고 김정운은 본다.
그는 이것을 ‘감정 불편 사회’라 부른다. 온라인에서 이모티콘만 주고받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정서를 나눠야 할 때 어색함을 느낀다. 그 어색함이 만들어 내는 대표적 말투가 이른바 ‘비행기 사무장 말투’다. 문장 끝을 올리며 상냥한 듯 유아를 대하듯 말하는 방식으로, 심리학에서는 ‘베이비 토크(모성어)’라 부른다. 서비스는 하되 정서는 공유하지 않겠다는 ‘정서적 거리 두기’다. 요즘은 편의점 계산대에서도 흔히 들린다.
정서를 나누지 못하는 사회는 무서운 결과로 이어진다. 온라인에서는 상호작용의 규칙이 무너지고 원시적 반응이 되살아난다. 사이버 공간이 ‘어그로(공격성, aggression)의 세상’이 되는 이유다. 진화의 관점에서 나쁜 정보는 좋은 정보보다 훨씬 중요했다. 호랑이가 쫓아온다는 신호가 바나나가 있다는 신호보다 생존에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부정성 우선’이라 부르는 이 성향이, 상호주관성이 성립할 여지가 없는 온라인에서 날것 그대로 튀어나온다. 김정운은 이 흐름을 탈문명화 과정이라 이름 붙인다.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문명화의 예절이 거꾸로 무너지고, 그 무너진 규칙이 오프라인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④ 순서 바꾸기 — 대화의 가장 오래된 규칙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순서를 주고받는 일, 곧 ‘턴테이킹’이다. 지금 누구도 순서를 정해 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는다. 상호주관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 순서 주고받기는 작동하지 않는다.
전 세계 엄마들이 아기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누가 그랬어?”라며 반응을 기다리고, 까꿍 놀이로 “이제 네가 웃을 차례”임을 익히게 한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인간이 언어 능력을 타고난다(언어 습득 장치, LAD)고 보았지만, 심리학자 제롬 브루너는 그 타고난 능력이 발현되도록 돕는 인간만의 장치(언어 습득 지원 체계, LASS)가 있다고 반박했다. 그 장치의 하나가 순서 주고받기다.
이것이 인간만의 것이라는 증거는 동물 실험에서 나온다. 대화 분석을 창시한 사회학자 하비 색스는 자살예방센터의 통화를 분석하다가, 보이지 않는 전화선 너머에서도 사람들이 엄격한 순서 규칙을 지킨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안타깝게도 마흔 무렵 세상을 떠났다. 한편 촘스키를 패러디해 ‘님 침스키’라 이름 붙인 침팬지에게 수화를 가르치는 실험이 있었는데, 침팬지는 상당한 표현을 익혔지만 끝내 순서 주고받기만은 배우지 못했다. 상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끼어든 것이다.
사람 중에도 그런 이가 있다. 남의 말을 자르고 끼어드는 것이다.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뻔한 이야기”라며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다. 김정운은 이를 대화의 가장 기본 원칙을 어기는 ‘폭력’이자, 조직의 ‘암적 존재’라 부른다. 말을 잘라먹힌 사람은 단순히 대화가 끊긴 게 아니라 존재가 무시당한 깊은 상처를 받는다. 좋은 리더는 반대로 상대에게 말할 기회, 곧 폼날 기회를 준다. 사람은 돈이 아니라 인정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0.2초의 미스터리. 무언가를 보고 단어를 떠올려 입 밖에 내기까지 최소 0.6초가 걸린다. 그렇다면 상대의 말을 다 듣고 대답하려면 0.6초 넘게 걸려야 한다. 그런데 실제 대화에서 말차례가 바뀌는 간격은 평균 0.2초, 일본어는 0.08초까지 내려간다.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이미 함께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서 주고받기란 한 사람씩 번갈아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같이 생각하고 같이 느끼는(코씽킹) 과정이다. AI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창조적 협업이 이 짧은 침묵 안에 들어 있다.
⑤ 함께 보기 — 손가락에서 시작된 문명
지금까지의 넷은 나와 너 사이의 일이었다. 이제 ‘대상’이 끼어든다. 나와 너가 같은 것을 함께 바라보는 것, 곧 조인트 어텐션이다. 시선은 마음이다. 상대의 시선을 따라가면 그의 마음이 보인다. 무엇을 쳐다보는지가 곧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다.
이 시선이 확장된 것이 ‘가리키기’다. 토마셀로는 가리키기를 둘로 나눈다. 원숭이도 하는 ‘명령적 가리키기’는 “저것 줘”라는 요구다. 그러나 인간만의 ‘진술적 가리키기’는 다르다. “엄마, 저기 무지개!” 하며 함께 보자고 청하는 것이다. 이는 요구가 아니라 관심과 의도의 공유다. 상대를 도구가 아니라 소통의 상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며, 여기서 인간은 비로소 독립된 개체가 된다.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노년에 파고든 물음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합리성에 도구적 합리성만 있는 게 아니라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있으며, 후자가 문명을 가능케 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심리적 기초는 오래 빈칸으로 남아 있었다. 그 빈칸을 토마셀로가 진술적 가리키기라는 단순한 현상에서부터 촘촘히 메웠다. 실제로 토마셀로는 2009년 헤겔상을 받았고, 하버마스가 직접 축사를 맡았다. 하버마스가 토마셀로의 책에 부친 서평의 제목은 “그것은 집게손가락에서 시작된다”였다. 가리키는 손가락 하나에 인간 소통의 비밀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말한 ‘인지 혁명’의 심리학적 뿌리도 여기 있다. 하라리에 따르면 인간은 없는 것을 함께 믿을 수 있게 되면서 도약했다. 밤하늘의 별을 함께 가리키며 “저 별은 네 것, 이 별은 내 것, 우린 사랑해야 해”라고 믿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지만, 바로 그 가상의 공유가 법과 문명을 만들어 냈다. 그 시작이 “엄마, 저건 뭐야?” 하고 함께 보자며 내미는 손가락이다.
함께 보기에는 그림자도 있다. 낯선 상황에 놓이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핀다. 발달심리학에서 ‘사회적 참조’라 부르는 이 성향이 SNS에서는 감정 전염으로 나타난다. 누군가 부정적 감정을 퍼뜨리면 우리는 그 감정에 딸려 들어간다. 스탠리 밀그램의 유명한 실험이 이를 보여 준다. 뉴욕 거리에서 한 명이 하늘을 올려다볼 땐 아무도 따라 하지 않지만, 세 명이 올려다보면 절반이, 다섯 명이면 대다수가 함께 올려다봤다. 그렇다면 맨 처음 올려다본 사람은 누구인가. 리더다. 사람들은 불안할 때 남이 보는 곳을 따라보기에, 리더가 엉뚱한 곳을 보면 조직 전체가 그리로 끌려간다.
⑥ 관점 바꾸기 — 마음 이론과 메타인지
마지막 원형은 상대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함께 보기가 전제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발달심리학의 고전적 실험이 그 능력의 출현을 보여 준다. 맥시라는 아이가 초콜릿을 초록 찬장에 넣고 나간 사이, 엄마가 그것을 파란 찬장으로 옮긴다. 다시 들어온 맥시는 어느 찬장을 열까? 이야기를 다 지켜본 아이라도, 맥시는 옮겨진 사실을 모르니 초록 찬장을 열 것이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앎과 맥시의 앎을 구별하는 이 능력, 곧 ‘마음 이론’은 대략 네 살 무렵 생긴다.
같은 구조가 나를 향할 때 그것을 ‘메타인지’라 부른다.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나다. 은행 비밀번호를 정할 때 “생일로 하면 잘 기억하겠지” 하고 미래의 나를 헤아리는 그 순간, 나는 나를 객관화한다. 타인의 마음을 추측하는 일과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같은 심리적 구조로 작동한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 이 문장이 참이면 거짓이고, 거짓이면 참이 되는 유명한 역설이다. 논리학자 알프레트 타르스키는 이 모순을 문장의 층위를 나눠 풀었다. 어떤 것을 말하는 문장(대상 언어)과 그 문장에 대해 말하는 문장(메타 언어)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의 메타인지도 정확히 같다. 생각하는 나가 있고, 그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가 있다.
문제는 이 관점 바꾸기 능력이 나이가 들고 지위가 오를수록 흐려진다는 점이다. 자기 성공에 취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확신하기에 상대의 관점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성공한 경영자들이 회의 끝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를 붙이는 것은, 상호주관성이 무너져 상대가 못 알아들을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미 공유가 안 됐다는 것을 느끼면 다른 방식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그 감각(메타인지)이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망해 가는 회사일수록 회의가 길어진다.
비슷한 이야기가 스포츠에도 있다. 뛰어난 선수가 반드시 뛰어난 감독이 되지는 않는다. 최고의 투수였던 이는 후배에게 “세게 던져”라는 말밖에 못 할 수 있다. 자기는 그냥 됐기 때문에, 안 되는 사람의 입장을 상상하지 못한다. 반대로 선수 시절 그리 빛나지 못하고 벤치를 지킨 이가 훌륭한 감독이 되기도 한다. 밀려나 본 사람의 슬픔을 알기에 선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05정서 조율 속에 숨은 창조의 비밀
여섯 원형 가운데 세 번째, 정서 조율에는 김정운이 가장 아끼는 통찰이 숨어 있다. 정신의학자 대니얼 스턴은 엄마와 아기가 정서를 조율할 때 공유하는 것이 ‘기쁨·슬픔’ 같은 범주가 아니라, 그 아래 깔린 생리적 결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움직임의 강도, 리듬, 윤곽 같은 것들이다. 그는 이를 ‘활력 정서(vitality affect)’라 불렀다.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의 걸음걸이나 손짓만 보고도 “저 사람 건방지네”, “차분하네” 하고 판단하는 것은 바로 이 결을 읽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다. 엄마는 아기의 정서를 흉내 내되,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다르게 표현한다. 아기가 입으로 웃으면 엄마는 목소리로 화답한다. 감각의 양식은 다르지만 강도와 리듬은 같다. 아기는 “나와 같은 느낌인데, 표현이 다르네”를 경험하며 “나는 다른 존재구나”를 깨닫는다. 상호주관성에서 한 개체가 떨어져 나오는 순간이다. 김정운은 이 과정을 감각의 교차 편집이라 명명한다.
그가 이 개념을 처음 길어 올린 곳은 예술의 역사였다. 사진기가 등장하자 화가들은 대상을 똑같이 재현하는 자리에서 밀려났다. 인상파도 피카소도 다양한 실험을 했지만 여전히 대상의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마저 지운 최초의 추상화가가 바실리 칸딘스키다. 그는 음악회에서 결정적 영감을 얻었다. 음악은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다. 음표라는 요소만으로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회화도 점·선·면·색채라는 기본 요소로 ‘작곡’하듯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추상화의 출발이었다.
색깔을 듣고 소리를 본다.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색깔을 듣고, 소리를 보라”고 가르쳤다. 네모난 도형에서 어떤 감정이 느껴지는지, 어떤 질감을 만졌을 때의 느낌을 화폭에 어떻게 옮길지를 훈련시켰다.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옮겨 짓는 이 훈련의 결과물이 바로 ‘디자인’이다. 회화 시장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디자인 산업이 여기서 태어났다.
바우하우스의 감각 교차 편집이 한 개인의 창조 능력이었다면, 엄마와 아기 사이의 그것은 상호주관적이다. 서로 흉내 내고 조금씩 어긋내며 함께 만들어 간다. 김정운이 무릎을 친 지점이 여기다. 예술적 창조의 방법론이라 여겼던 감각의 교차 편집이, 사실은 인간의 자아가 태어나는 바로 그 과정이었던 것이다. 창조란 곧 상호주관성에서 하나의 주관성이 분화되어 나오는 프로세스다. 어떤 그림 앞에서 까닭 모를 뭉클함을 느낄 때, 우리는 표현은 달라졌으되 그 안에 숨은 공통의 감정을 읽어 낸 것이다. 그는 이 창조론을 앞선 책에서 ‘에디톨로지(창조는 편집이다)’라는 개념으로 벼려 냈다.
06불안, 취향, 그리고 억울함
이 여섯 원형이 흔들리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김정운은 화제를 인간의 불안으로 옮긴다. ‘개인(individual)’이라는 말은 본래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을 뜻한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이 단독자가 되면서, 사람들은 처음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 설명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봉건 사회에서는 누구의 아들, 어느 왕의 신하처럼 이름에 이미 정체성이 박혀 있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존재가 확인되지 않을 때 인간은 가장 불안하다.
그 불안의 흔적이 한 장의 그래프에 있다. 지난 10년간 성격 유형 검사(MBTI)를 검색한 빈도를 보면 한국이 압도적이고, 특히 팬데믹이 시작된 2019년부터 치솟는다. 사람을 만나지 못해 내가 누구인지 확인할 길이 막히자, 검사로라도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답을 얻으려 한 것이다. 한국인이 유독 존재 불안이 크다는 방증이다. 존재를 확인하는 손쉬운 다른 방법이 명함이고 ‘하차감’이다. 60세를 넘겨 명함이 사라진 대기업 임원들이 새 사람 앞에서 자기를 설명하지 못해 뒤로 물러서는 광경을, 김정운은 안타깝게 지켜본다.
서양은 이 불안을 다른 방식으로 넘어섰다. 취향이다. 근대에 ‘개인’이라는 말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단어가 ‘취향(Geschmack)’이었다. 여기서 취향은 만년필을 모으는 취미가 아니라, 미적·지적·도덕적 안목 전체를 가리킨다. 각 문화는 그 취향을 담아낼 이상적 인물을 하나씩 빚어냈다. 독일은 홀로 산으로 떠나는 ‘방랑자’를, 프랑스는 군중 속으로 들어가 혼자가 되는 ‘산책자(flâneur)’를, 영국은 세련된 매너의 ‘신사’를 만들어 냈다.
왜 독일 가곡은 그토록 슬픈가. 독일 방랑자 문화의 뿌리에는 도제 제도가 있다. 장인 밑에서 기술을 익힌 직인은 법으로 정해진 몇 해 동안 다른 도시를 떠돌며 기술을 나누고 새 기술을 배워야 정식 장인이 됐다. ‘방랑 기능공’ 제도다. 헤어질 것이 정해진 사랑, 떠나야만 하는 이별 —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같은 독일 가곡이 사무치게 슬픈 것은 이 방랑의 정서에서 나온다.
독일의 방랑과 취향은 ‘빌둥(Bildung)’, 곧 내면을 성숙하게 세워 가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 말을 일본이 ‘교양’으로 번역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일본은 서구의 근대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교양을 표준화해 버렸다. ‘세계 문학 전집 100권’ 같은 목록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갖춰 읽어야 교양인이 되는 ‘리스트 교양’이 자리 잡았다. 수집과 소유의 강박이 장인 문화와 결합하며 훗날 ‘오타쿠’로도 이어졌다는 것이 김정운의 해석이다. 흥미롭게도 ‘세계 문학’이라는 말 자체는 괴테가 “우리는 국민 문학이 아니라 세계 문학을 해야 한다”며 만든 것이었다.
한국은 더 불행했다고 그는 본다. 식민지와 전쟁이 전통을 리셋해 버리자, 자기를 입증할 다른 기준이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시험이다. 한국의 교양은 곧 입학시험이 됐다. 시험에 합격해야, 그리고 일상의 온갖 테스트 — 나이 오십에 서른 평대 아파트, 부장 직함 — 를 통과해야 교양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이 테스트에 실패했을 때 한국인에게 유독 생기는 정서가 ‘억울함’이다.
07다섯 가지 처방
진단이 이렇다면 처방은 무엇인가. 김정운은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관건은 하나로 이어진다. 타인의 관점으로 넘어가려면 먼저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첫째,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라
주체적 삶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삶이다. 회사가 힘든 것은 그 일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어서다. 존재는 좋아하는 일로 확인된다. “저 사람 누구야?”라는 물음에 “저 사람은 풀과 나무에 대해 모르는 게 없어”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좋아하다 보면 잘하게 되고, 잘하다 보면 좋아하게 된다. 둘은 결국 하나다.
왜 우리는 남의 취향을 훔쳐보며 SNS에 빠져드는가. 내 취향이 없어서다.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우울로 미끄러진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 끊임없이 파고들 때,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flow)’이 온다. 물이 흐르듯 빠져드는 경험이다.
학교(school)의 뿌리는 여가. ‘스쿨’의 어원인 그리스어 ‘스콜레(scholē)’는 본래 여가를 뜻했다. 노동은 노예가 하고, 자유인은 학교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즐기는 법 — 예술·체육·문학·역사 — 을 배웠다. 학교란 존재를 확인하는 기술을 익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학교는 ‘남의 돈 따먹는 방법’을 배우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김정운은 꼬집는다.
둘째, 잘 쉬어라
한국인은 쉴 줄을 모른다. 김정운은 ‘셀프 리플렉션(자기 성찰)’을 일본이 ‘자기 반성’으로 옮긴 것이 화근이라고 본다. 그 번역 탓에 우리는 쉬면서도 자꾸 자신과 싸우고 스스로를 괴롭힌다. 그는 이 말을 차라리 ‘휴식(休息)’으로 옮기자고 제안한다. 쉴 휴(休)는 사람(人)이 나무(木)에 기댄 모습이고, 쉴 식(息)은 스스로(自)의 마음(心)이다. 나무에 기대어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 곧 나와 대화하는 것이 휴식이다.
또한 한국인은 노는 것과 쉬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심리학의 ‘적정 각성 이론’에 따르면, 각성 수준이 너무 낮으면 끌어올리는 것이 놀이이고, 너무 높으면 내리는 것이 휴식이다. 자극이 넘치는 도시의 삶은 각성을 한껏 끌어올린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각성을 낮추는 진짜 휴식이다. 하루에 한 시간쯤은 SNS를 끄고 음악을 들으며 홀로 걸어 나와 대화해야 한다. 그래야 메타인지가 살아난다. 나와 대화가 되어야 타인과의 대화도 된다.
셋째, 책을 더럽게 읽어라
책에 줄을 긋고 낙서를 하며 읽으라는 뜻이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스스로 판단해 표시하는 순간, 내 안의 메타인지가 켜진다. 책에 줄을 긋는 일은 저자와의 대화인 동시에 나와의 대화다. 관점 바꾸기를 이중으로 하는 것이다. 동영상처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중간에 멈춰 메모하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기억에 남는다.
넷째, 다양한 정서적 경험을 하라
정서에 민감해야 타인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아랫사람과 대화가 안 되는 것은 스스로 정서가 메말라서다. 김정운은 그 회복의 수단으로 음악과 미술을 든다. 음악은 배신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에게는 저마다의 리듬이 있고, 음악은 그 리듬을 즐거운 것으로 되살린다. 특히 함께 듣는 음악은 정서 공유이자 조인트 어텐션의 경험이 된다. 미술관은 ‘관점의 노래’다. 모든 그림에는 프레임(창)이 있어, 그 화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경험을 하게 한다.
왜 우리는 불멍을 하는가. 캠핑에 가서 불을 피우고 멍하니 바라보는 것, 이른바 ‘불멍’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조인트 어텐션이다. 모든 종교 의식이 불을 피우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인간이 처음 ‘함께 보기’를 경험한 것이 바로 모닥불을 둘러앉아 함께 불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마을의 대소사를 나누고, 음악과 춤으로 의미를 공유하는 ‘의례’가 태어났다.
다섯째, 삶의 맥락을 바꿔라
공간을 바꾸면 시선이 바뀌고, 시선이 바뀌면 관점이 바뀌고, 만나는 사람이 바뀌고, 끝내 나 자신이 바뀐다. 흥미롭게도 자리를 옮겨 공간을 바꾸는 일과, 심리적으로 상대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일은 뇌의 같은 부위를 활성화한다. 그래서 장소를 바꾸는 경험이 소통 능력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은퇴 후에도 20~30년을 더 산다. 한 곳에만 머무를 이유가 없다. 특히 혼자 하는 여행을 권한다. 혼자 떠나면 두고 온 장면들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자기 삶을 성찰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고르는 일은, 그 사람과의 기억을 되살리며 오랫동안 그를 생각하는 고귀한 행위다. 맥락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 — 김정운이 강조하는 주체적 삶의 핵심이다.
08결론 — 우리는 감탄하려고 산다
왜 사는가. 김정운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감탄받고 감탄하려고 산다. 이 명제는 비고츠키에게서 나온다.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은, 아이가 처음부터 혼자 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잘하는 어른이나 친구와 함께 있을 때 잘하게 되고, 그것이 내면화되어 나중에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된다는 개념이다.
김정운이 아기의 발달 과정을 오래 분석한 끝에 한 단어로 요약한 것이 ‘감탄’이었다. 좋은 엄마, 좋은 선생은 아이의 사소한 변화에도 끊임없이 감탄한다. 그 감탄이 아이를 자라게 한다. 아기는 엄마의 감탄을 먹고 자란다. 감탄해 주던 엄마와 선생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내면화된 감탄자’가 되고, 그 존재가 나의 변화를 기뻐해 주기에 우리는 성장한다. 시설에서 잘 먹이고 잘 입혀도 아이의 발달이 더딘 것은, 그 변화에 감탄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정말 중요한 것은 타인의 인정만이 아니라, 내 안의 또 다른 나에게 받는 감탄이다. 타인의 감탄에 굶주리면 삶이 왜곡된다. 김정운이 쉰 살에 교수를 그만두고 낯선 섬으로 떠난 것도, 어느 순간 자신이 타인의 시선에만 예민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홀로 감탄하는 법을 익히는 데 10여 년이 걸렸다고 그는 고백한다. 내가 그린 그림이 팔릴 것도 아닌데, 잘 그렸다 못 그렸다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내가 그리고 행복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감탄에는 선순환이 있다. 스스로에 대한 감탄이 무르익으면 타인에게도 감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가 감탄의 표정을 지으면, 그 감탄은 메아리처럼 되돌아온다. 심리학에는 슬퍼서 울기도 하지만 울면 슬퍼진다는 이론이 있다. 마찬가지로, 감탄할 일이 없어도 감탄하면 감탄할 일이 생긴다. 감탄의 표정 하나가 상대의 마음을 연다.
감탄을 받은 사람이 느끼는 심리는 ‘존중(리스펙트)’이다. 김정운은 한국 사회에 가장 결핍된 것이 바로 이 존중이라고 본다. ‘갑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존중받지 못한다는 감각에서다. 존중은 돈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상호작용 속에서 짓는 감탄의 표정만으로도 상대는 자기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엄마의 감탄으로 우리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우리는 아기가 눈만 깜빡여도 신기해하다가,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가늠할 수 없이 높은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한다. 테스트가 시작되는 것이다. 부모에게 감탄받지 못한 아이가 어디 가서 감탄을 받겠는가. 어릴 적 나의 변화를 기뻐하던 엄마의 그 마음이, 평생 나를 지탱한다.
소통이란 결국 창조적 삶이다. 내 삶을 살려면 재미있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이 타인과의 소통 속에서 가능하려면 내 안의 나와의 소통도 열려 있어야 한다. 터치에서 시작해 감탄으로 끝나는 이 긴 여정은, 말이 소통의 전부가 아니라는 오래된 진실을 다시 일깨운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들 — 몸과 눈빛과 리듬, 그리고 서로를 향한 감탄. AI가 아무리 유창해져도 그것만은 대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