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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HEW 6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인가, 위로인가

마태복음 6장의 염려 본문을 문맥 안에 되돌려 놓고 다시 읽는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 많은 신자가 이중의 짐을 진다. 하나는 삶이 실제로 지우는 짐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짐 때문에 염려하고 있는 자신을 향한 죄책감이다. 걱정이 곧 불신앙의 증거처럼 여겨지는 순간, 본문은 위로가 아니라 또 하나의 율법이 된다.

이 글은 그 지점을 다시 살핀다. 마태복음 6장 25절부터 34절까지의 염려 본문이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를 먼저 정리하고, 본문이 놓인 자리에서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겨냥하는지를 확인한다.

오독 하나 — 성경에서 비결을 찾는 습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주 노하우를 찾는다. 히스기야가 병에서 낫는 장면(열왕기하 20장)을 읽으면 어떻게 하면 질병에서 고침을 받는지를 묻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장면(여호수아 6장)을 읽으면 어떻게 하면 성이 무너지는지를 묻는다. 하루 한 바퀴씩 엿새를 돌고 이레째 일곱 바퀴를 돌았다는 사실이 곧 승리의 공식으로 읽힌다.

그러나 여리고성 이후로 그런 방식의 전투는 성경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능력을 과시하려 하셨다면 백성을 성 둘레로 걷게 하실 이유가 없었다. 그냥 무너뜨리시면 될 일이었다. 여리고성 서사가 반복 없는 단회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전쟁의 매뉴얼이 아니라 순종의 서술이었음을 가리킨다. 곧이어 나오는 아이성의 패배(여호수아 7장)는 같은 전제를 뒷면에서 확인해 준다. 성벽을 도는 횟수가 아니라 언약에 대한 신실함이 문제였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도 같은 방식으로 소비되곤 한다. 앞의 조건을 채우면 뒤의 결과가 자동으로 산출되는 계약식으로 읽히는 것이다. 어느 부흥회에서 가게를 얻으려 모아둔 돈을 전부 건축헌금으로 드린 사람이 있고, 그가 뒤에 뜻밖의 유산을 받았다는 간증이 이어진다고 하자. 그 사람의 결단 자체를 우리가 판단할 자리에 있지는 않다. 다만 그런 간증이 공적으로 유통될 때 거의 언제나 따라붙는 두 가지 위험은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공식화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은혜의 경험이 「나는 이렇게 해서 응답받았으니 당신도 이렇게 하면 된다」는 보편 명제로 승격된다. 둘째는 성속(聖俗)의 분할이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가 「먼저 헌금하라, 먼저 봉사하라」로 번역되고, 나머지 삶은 하나님이 사후에 정산해 주시는 잉여 영역이 된다.

오독 둘 — 교회와 직장 사이의 이원화

한 청년이 자기 교회 장로가 운영하는 회사에 다닌다. 그의 불평은 이렇다. 그 장로는 회사에서는 인색하고 무정한데 교회에서는 친절하고 자비롭다. 청년이 보기에 그것은 위선이다.

그런데 이 현상을 위선으로만 규정하면 문제의 뿌리를 놓치기 쉽다. 그 장로는 교회에서 진심으로 온유하고, 직장에서 진심으로 무례할 수 있다. 두 태도가 모순 없이 공존하는 이유는 그의 신학적 지도(地圖)가 세계를 두 구역으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가 작동하는 구역이고, 시장은 다른 규칙이 지배하는 구역이다. 위선이 아니라 세계관의 분열이다.

이것이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1880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개교 연설에서 겨냥한 지점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놓이지 않은 인간 실존의 영역은 한 뼘도 없다고 선언했다. 이 문장은 흔히 문화 참여의 구호로 인용되지만, 원래 맥락은 학문의 각 분과가 신앙과 무관한 중립 지대로 봉인될 수 있다는 전제를 향한 반박이었다. 예배당 안과 밖에 다른 하나님을 두는 지도(地圖) 자체가 표적이었다.

비유

두 개의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왼손 시계는 교회에서, 오른손 시계는 회사에서 본다. 두 시계가 서로 다른 시각을 가리켜도 그는 불편하지 않다. 각 구역에 각 시계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데 있지 않다. 그의 세계에 표준시가 없다는 데 있다.

본문의 자리 — 마태복음 6장은 '외식'을 다루는 장이다

염려 본문을 따로 떼어 읽으면 그것은 감정에 대한 금지 명령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 전체는 하나의 주제로 묶여 있다. 이 장은 유대인의 대표적 경건 행위 세 가지를 차례로 다룬다. 구제(6:1~4), 기도(6:5~15), 금식(6:16~18)이다.

세 단락의 구조는 동일하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 하라. 구제할 때 나팔을 불지 말라는 말씀은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뜻이 아니다.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씀도 골방이 최적의 장소라는 지리적 처방이 아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의 반대말은 「사람에게 안 보이려고」가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려고」다. 세 경건 행위가 병들었던 지점은 행위의 종류가 아니라 시선의 방향이었다.

마태복음 6장의 구조 은밀한 경건 세 단락과 일상의 삶 두 단락이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하는 구조도 마태복음 6장의 구조 — 다섯 단락, 하나의 질문 은밀한 경건 — 누구에게 보이려 하는가 구제 마 6:1–4 기도 마 6:5–15 금식 마 6:16–18 일상의 삶 — 누구를 신뢰하는가 재물과 두 주인 마 6:19–24 먹고 입는 염려 마 6:25–34 하나의 질문 너는 지금 사람을 의식하는가, 하나님을 의식하는가
마태복음 6장은 경건 행위 셋과 일상의 삶 둘을 나란히 놓는다. 다섯 단락이 겨냥하는 질문은 하나다.
개념

외식(外飾)으로 번역된 헬라어 ὑποκριτής(휘포크리테스)는 본래 그리스 연극의 배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 배역을 연기하는 사람이다. 배우의 문제는 대사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대상이 관객이라는 데 있다.

마태복음 6장이 지적하는 경건의 병리는 정확히 이 구조다. 기도의 내용이 틀린 것이 아니라, 기도의 수신자가 객석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염려는 이 장에서 무엇인가. 마태복음 6장은 세 가지 경건 행위를 다룬 뒤 곧바로 재물(6:19~24)과 염려(6:25~34)로 넘어간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는 선언이 두 단락을 잇는 경첩이다. 앞의 셋이 종교적 무대에서의 시선을 다뤘다면, 뒤의 둘은 일상의 무대에서의 시선을 다룬다.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노래하면서, 문을 나서는 순간 먹고 입는 문제만큼은 자기 손에 쥐고 있으려는 태도. 그것이 이 문맥에서 염려가 놓인 자리다. 찬양이 거짓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찬양은 진심일 수 있다. 문제는 그 진심이 예배당 문턱을 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경우 염려는 감정의 실패이기 이전에 주권 인식의 실패이며, 앞선 세 단락이 고발한 외식의 또 다른 판본이다.

번역이 만든 오해

본문이 명령으로 들리는 데에는 번역의 몫도 있다. 1611년 흠정역(King James Version)은 마태복음 6장 25절을 「take no thought for your life」로 옮겼다. 17세기 영어에서 take thought는 「불안해하다, 애태우다」에 가까웠지만, 현대 영어 독자에게 이 표현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로 읽힌다. 이 오독을 막기 위해 현대 역본들은 「do not be anxious」 또는 「do not worry」로 고쳐 옮겼다.

흔히 이 본문과 함께 인용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는 실은 마태복음이 아니라 빌립보서 4장 6절이다. 다만 두 본문은 같은 동사(μεριμνάω, 메림나오)를 쓰며, 빌립보서는 그 대안까지 명시한다.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의 반대는 무념(無念)이 아니라 아뢰는 행위다. 마음의 스위치를 끄라는 요구가 아니라, 마음이 향할 곳을 바꾸라는 요청이다.

명령이 아니라 위로 — 사슬에 묶인 사자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1678)에서 순례자 크리스천은 「아름다운 궁전」으로 오르는 좁은 길목에서 사자 두 마리와 마주친다. 그는 얼어붙는다. 그때 문지기 Watchful이 소리친다. 사자들은 사슬에 매여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길 한복판으로만 걸어오라고. 실제로 사자는 묶여 있었다.

그런데 크리스천은 곧바로 걷지 못한다. 사자가 묶여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 알면서도,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발이 뒤로 물러선다. 한 걸음 내딛고 다시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그가 결국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문지기가 계속해서 「사자는 묶여 있다」고 상기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번연의 장면에서 사자의 사슬은 순례자의 담대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가 출발하기 전부터 이미 매여 있던 사실이다. 문지기의 말은 「무서워하지 말라」는 요구이기 전에 「사자는 이미 묶였다」는 통보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 장면에 겹쳐 놓으면 그 어조가 달라진다. 이것이 명령이라면,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마다 계명을 어긴 셈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통보이자 위로라면, 요구되는 것은 감정의 소거가 아니라 사실의 기억이다. 파도가 실제로 거세다는 것도, 눈앞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도 부정되지 않는다. 다만 그 상황에서 누가 사슬을 쥐고 있는지가 상기된다.

새와 백합의 논증 구조

예수께서 근거로 드시는 것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이다.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며(6:26), 백합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한다」(6:28). 이 대목이 태만의 옹호로 읽힌다면 본문은 무책임한 삶의 권장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새는 노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새는 하루 종일 먹이를 찾는다. 본문이 부정하는 것은 새의 노동이 아니라 창고에 쌓는 행위, 즉 미래를 스스로 담보하려는 축적의 논리다. 백합 역시 길쌈이라는 인간적 생산 공정을 거치지 않았을 뿐, 자라남 자체를 그친 것은 아니다.

개념

이 단락의 논증은 a fortiori(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형식이다. 유대 랍비 전통에서는 קל וחומר(칼 바호메르), 곧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이라 부른다. 30절의 「하물며 너희일까보냐」가 이 구조의 표지다.

전제는 「하나님이 새를 먹이시고 들풀을 입히신다」이고, 결론은 「하물며 그의 자녀를 돌보지 않으시겠는가」다. 논증의 무게중심은 새의 게으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성실에 있다.

실제로 사람들의 염려 대부분은 게으름이 아니라 책임감에서 나온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고,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 감당해야 할 몫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본문이 그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27절의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는 책임을 내려놓으라는 말이 아니라, 염려라는 수단으로는 그 책임을 완수할 수 없다는 사실의 확인이다. 32절은 그 위에 한 문장을 더 얹는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필요 자체가 부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 필요를 이미 아시는 분이 계신다는 사실이 앞에 놓인다.

내일의 몫은 내일에게

단락은 이렇게 닫힌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6:34). 여기서 하루의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전제된다. 부인되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날의 괴로움까지 오늘 끌어와 지는 일이다.

염려의 구조적 특징이 여기서 드러난다. 염려는 대체로 미래 시제로 작동한다. 오늘 감당할 수 있는 짐에 내일과 모레의 짐을 미리 합산해 얹을 때, 총량은 어느 인간의 어깨로도 감당할 수 없는 크기가 된다. 하루치 은혜는 하루치 짐에 맞추어 주어진다. 만나가 하루분씩만 거두어지고 이튿날까지 남겨두면 상했다는 광야의 규례(출애굽기 16장)도 같은 문법 위에 서 있다.

믿음은 제자리에 놓고 보는 것

손가락 두 개면 세상을 가릴 수 있다. 눈앞으로 바짝 끌어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손가락만 보이고 그 너머는 전부 사라진다. 손가락이 커진 것이 아니다. 거리가 사라진 것이다.

믿음은 그 손가락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다. 문제는 여전히 거기 있고, 손가락은 여전히 손에 붙어 있다. 믿음은 그것을 제자리로 끌어내려 놓고 보는 시각의 회복이다. 손가락이 제 자리로 돌아가면 그 너머의 길이 보이고, 하나님이 보인다. 크기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비례가 회복된 것이다.

신앙을 가지면 불안이 사라지리라 기대했다가, 여전한 불안 앞에서 신앙까지 의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이 약속하는 것은 염려 없는 인생이 아니다. 약속되는 것은, 염려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도 그 자리가 아버지의 통치 바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가족이 아프면 염려된다. 자녀가 방향을 잃고 헤매면 걱정된다. 그 무게를 부인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무시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위로가 되는 것은 그 무게를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무게를 아는 분이 함께 걷고 계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자는 으르렁거린다. 그리고 사자는 묶여 있다. 두 문장은 모두 참이고, 발걸음을 결정하는 것은 두 번째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