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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AI 선언과 9,500억 달러 협약

한국 대통령이 실리콘밸리에서 네 가지 약속을 읽고, 국내 기업과 미국 빅테크가 여섯 건의 문서에 서명했다. 발표된 숫자는 국가 예산의 여섯 배를 넘는다. 그 숫자가 무엇을 뜻하고 무엇을 아직 뜻하지 않는지 따져본다.

2026년 7월 26일 · 산업·정책

2026년 7월 24일 오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복합 공연장 더 미드웨이(The Midway)에 한국과 미국의 인공지능(AI)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한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이다. 무대에는 이재명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이 앉았고, 그 옆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 혹 탄 브로드컴 CEO가 자리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라니 보르카르 애저 하드웨어 사장이 참석하고 사티아 나델라 CEO가 영상으로 인사를 전했다. 정부에서는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배석했다.

행사의 형식은 단순했다.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이라 이름 붙인 연설을 읽고, 기업인들이 차례로 4분씩 발언하고, 마지막에 협약 체결식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공개된 숫자는 단순하지 않았다. 국내 기업과 글로벌 기업 사이에 체결된 협약은 여섯 건, 규모는 9,500억 달러(약 1,375조 원)였다.

01선언의 네 기둥

연설의 골자는 한국의 위치를 '공급자'에서 '공급망 그 자체'로 옮겨 놓겠다는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세계 최고의 AI 모델도 첨단 반도체의 안정적인 공급 없이 작동될 수 없으며, 아무리 뛰어난 반도체라도 AI라는 거대한 수요가 있어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과 생산 역량, 데이터와 에너지, 시장과 인재가 하나의 공급망으로 엮이는 시대라는 진단이다. 그 위에 네 가지 약속이 놓였다.

첫째, 대체 불가한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 국가.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토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반도체를 공급하는 생산기지가 되겠다는 것이다. 6월에 발표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두고 그는 "국가 차원의 공급망 안전장치"라고 규정했다. 수도권 한 곳에 집중된 생산 구조를 지방까지 넓히는 다극(多極) 거점 체제가 그 수단이다.

둘째, AI를 가장 빠르게 쓰는 나라. 공급을 넘어 수요를 만들겠다는 대목이다. "연구실과 디지털 공간을 넘어 제조공장과 도시, 물류 현장 곳곳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글로벌 AI 테스트베드이자 생산 플랫폼"이라는 표현을 썼다. 올해 말부터 5천만 국민이 참여하는 '모두의 AI'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한다는 일정도 함께 제시했다. 과기정통부는 이미 국산 모델을 절반 이상 활용하는 조건으로 민간 사업자를 공모해, 전 국민이 무료로 쓸 수 있는 범용 AI 챗봇 서비스를 연내 출시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셋째, 시장을 넓히는 글로벌 허브. 선도국끼리의 협력에 머물지 않고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수평적 협력망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정부가 국제기구와 함께 추진하는 '글로벌 AI 허브 이니셔티브'가 그 틀이다.

넷째, AI 기본사회. 올해 1월 시행된 AI 기본법을 언급하며, 혜택이 특정 계층에 머물지 않도록 "새로운 분배 모델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아직 어느 나라도 완벽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고 덧붙였다. 네 기둥 가운데 유일하게 숫자가 붙지 않은 항목이자, 유일하게 국제 규범 경쟁을 겨냥한 항목이다.

비유로 보면

앞의 세 약속은 공장·시장·유통망에 관한 이야기이고, 네 번째만 그 공장이 벌어들인 돈을 어떻게 나눌지에 관한 이야기다. 앞의 셋은 상대가 기업이라 계약서로 확인되지만, 마지막 하나는 상대가 국내 사회여서 계약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날 서명된 여섯 건의 문서에 네 번째 약속과 직접 대응하는 항목이 없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02서명된 것들 — 협약 여섯 건

김용범 정책실장이 현지 프레스센터에서 밝힌 내용과 과기정통부 발표를 종합하면, 이날의 성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5년 누적 기준 반도체 공급·생산 협력이 9,500억 달러, 여기에 5기가와트(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AIDC) 구축 협력이 얹힌다.

2026년 7월 24일(현지시간)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체결된 협약
국내상대내용규모
삼성전자 브로드컴 2026~2030년 첨단 메모리 반도체 공급 및 AI 칩 생산을 위한 파운드리 협력(업무협약) 2,000억 달러
(약 290조 원)
SK하이닉스
SK텔레콤
엔비디아 메모리 반도체 구매, 최대 2GW 규모 AIDC 구축·확장 지원, 차세대 그래픽처리장치(GPU) '베라루빈' 우선 할당(의향서) 5,000억 달러 이상
(약 730조 원)
SK텔레콤 앤트로픽 국내 기가와트급 AIDC 프로젝트 공동 투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로소프트 마이크로소프트 AIDC에 메모리 반도체 장기 공급
삼성SDS 앤트로픽 AI 신규 시장 공동 발굴, 응용 AI 엔지니어 양성 파트너십
네이버 엔비디아
브룩필드
글로벌 AI 팩토리 구축을 위한 지분 투자 유치 및 인프라 공급(엔비디아 10억 달러, 브룩필드 최대 90억 달러) 100억 달러
(약 14조 6,000억 원)

SK그룹은 엔비디아·마이크로소프트·앤트로픽과의 합의를 합쳐 향후 5년간 7,500억 달러(약 1,085조 원) 규모의 AI 인프라 협력에 나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브로드컴의 2,000억 달러를 더한 값이 9,500억 달러다. 지난해 울산에 AIDC를 함께 세운 아마존웹서비스(AWS)와도 별도 회동을 갖고 기가와트급 확장을 논의했다. 서밋 하루 전인 23일에는 과기정통부와 AMD가 국산 AI 반도체 협력에 합의했다.

네이버의 건은 성격이 다르다. 공급 계약이 아니라 투자 유치다. 엔비디아가 10억 달러를 전략 투자하고, 운용자산 1조 달러가 넘는 캐나다 대체자산 운용사 브룩필드가 최대 90억 달러를 조달하는 독점 자본 파트너로 들어온다. 이 돈으로 세종시 데이터센터 '각 세종'에 구축 중인 AI 팩토리 규모를 55메가와트(MW)에서 200MW로 키운다. GPU 약 10만 개 규모이며, 장기적으로 1GW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계획의 일부다.

개념 정리

AI 팩토리는 데이터센터를 AI 시대에 맞게 다시 정의한 말이다. 원료를 넣어 제품을 찍어내는 공장처럼, 전력과 데이터를 넣어 AI의 계산 단위인 '토큰'을 찍어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산업의 병목은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전기와 부지가 된다. 2GW는 대형 원전 한 기 반이 쉬지 않고 만들어내는 만큼의 전력이다.

03숫자를 읽는 방법

연설에는 두 개의 큰 숫자가 나왔다. 하나는 "지난 6월 약 4,700조 원 규모의 AI 프로젝트 투자가 발표됐다"는 대목, 다른 하나는 "기업가치 합계 2경 원이 넘는 기업들이 모였다"는 대목이다. 둘 다 사실이지만, 둘 다 액면 그대로 읽으면 오독이 된다.

4,700조 원은 6월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나온 숫자다. 정부는 반도체·피지컬 AI·AI 데이터센터를 세 축으로 묶고, 서남권 반도체 팹 4기에 800조 원, 충청권 후공정 거점에 81조 원, 전국 AI 데이터센터에 550조 원을 배정하는 인프라 계획을 제시했다. 여기에 삼성이 2,655조 원, SK가 2,100조 원의 장기 투자 청사진을 내놓았고, 두 수를 단순 합산한 4,755조 원이 언론에 '4,700조'로 정착했다.

6월 발표 투자 규모와 신규 투자 추정치 비교 삼성 2655조원, SK 2100조원, 신규 투자 추정 1500조원, 2026년 국가 예산 728조원을 가로 막대로 비교한 그래프. 발표된 숫자와 실제 새 돈 (단위: 조 원) 1,000 2,000 삼성 발표 총액 2,655 SK 발표 총액 2,100 이 가운데 신규 투자 추정 1,500 2026년 국가 예산(비교) 728 삼성과 SK의 발표 총액을 단순 합하면 4,755조 원이나, 기존 장기 계획이 상당 부분 포함된 수치다.
6월 발표 규모와 신규 투자 추정치. 업계에서는 발표 총액에 기존 장기 설비투자 계획이 상당 부분 포함돼 있고, 새로 확정된 몫은 1,500조 원 안팎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공시에서 2040년까지의 계획이라는 시기를 밝힌 뒤 "현재 시황에 근거한 장래 계획"이자 "이해를 돕기 위한 가이드라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고, SK하이닉스도 주요 계획은 이사회 승인을 거쳐 확정한다고 밝혔다.

9,500억 달러도 마찬가지로 층을 나눠 봐야 한다. 이 금액은 앞으로 5년간 누적될 구매·공급 협력의 규모이지, 국내에 들어오는 투자금이 아니다. 삼성·브로드컴 건은 업무협약(MOU), SK·엔비디아 건은 의향서(LOI)다. 구속력 있는 확정 계약과는 단계가 다르다.

비유로 보면

업무협약과 의향서는 혼담에 가깝고, 확정 계약은 혼인신고에 가깝다. 혼담이 오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정보이고 대개 결혼으로 이어지지만, 날짜와 조건은 아직 바뀔 수 있다. 특히 메모리 가격이 계약 기간 내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2,000억 달러어치'가 뜻하는 물량은 크게 달라진다.

다만 규모를 깎아 읽는 것만이 정확한 독해도 아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서밋 전 외신 간담회에서 4,700조 원이 "결코 과장이 아니며 미국 빅테크와의 초대형 계약으로 입증될 것"이라고 예고했고, 실제로 이날 나온 숫자가 그 주장을 어느 정도 뒷받침했다. 최태원 회장의 발언은 더 직설적이었다. 그는 발표된 규모를 "허황된 계획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한 프로젝트"라고 규정한 뒤, 젠슨 황·혹 탄·다리오 아모데이·샘 올트먼과 최근 만나 들은 수요를 근거로 "오히려 현재의 AI 수요를 감안하면 지금 발표한 규모도 부족할 수 있다"고 말했다.

04공급망 다섯 층

이 대통령이 "하나의 거대한 공급망"이라 부른 구조를 층으로 나눠 보면, 이날 협약이 어디에 몰려 있고 어디가 비어 있는지가 드러난다.

AI 공급망 5개 층과 이번 서밋 협약의 배치 전력·입지, 메모리·파운드리, AI 팩토리·데이터센터, 모델·소프트웨어, 피지컬 AI 다섯 층에 국내 기업과 글로벌 파트너를 배치한 층상 도식. AI 공급망 다섯 개 층에 놓인 협약들 국내 축 글로벌 파트너 전력 · 입지 데이터센터 18.4GW분 전력·용수·부지 (정부 계획, 국내 최대 변수) 브룩필드 등 해외 인프라 자본의 참여 메모리 · 파운드리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브로드컴 2,000억 달러 엔비디아·마이크로소프트 등 7,500억 달러 AI 팩토리 · 데이터센터 SK텔레콤, 네이버(각 세종) 엔비디아 최대 2GW, 브룩필드 90억 달러 앤트로픽·아마존웹서비스 모델 · 소프트웨어 하이퍼클로바X,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삼성SDS 앤트로픽(클로드), 오픈AI 피지컬 AI 현대차그룹, 보스턴다이내믹스 엔비디아, 웨이모, 구글 딥마인드 서밋에서 체결된 6건은 둘째~다섯째 층에 몰려 있고, 첫째 층인 전력·입지는 국내 과제로 남았다.
서밋에서 서명된 협약은 메모리부터 피지컬 AI까지의 층에 걸쳐 있다. 반면 첫째 층인 전력·용수·부지는 계약 상대가 없는 국내 과제다. 정부는 3대 메가프로젝트에서 18.4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 구축 계획을 제시했는데, 이는 대형 원전 열세 기분의 전력에 해당한다.

둘째 층(메모리·파운드리)이 이날의 주역이었다. 셋째 층에서는 SK텔레콤과 네이버가 각각 앤트로픽·엔비디아·브룩필드와 짝을 이뤘다. 넷째 층에서 삼성SDS가 앤트로픽과 손을 잡았고, 다섯째 층은 현대차그룹이 채웠다. 첫째 층만 상대가 없다. 전력망과 용수, 부지는 외국 기업이 대신 지어줄 수 있는 항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05무대에서 나온 말들

젠슨 황은 25년에 걸친 한국과의 인연을 언급하며 "지금이 한국의 황금기"라고 표현했다. 고대역폭 메모리(HBM)의 혁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슈퍼컴퓨터도 없었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SK그룹과의 파트너십 규모를 5,000억 달러로 키운다고 밝혔고, 네이버 지원, 삼성과의 차세대 칩 제조, 현대차그룹과의 로봇·디지털 트윈 협력을 차례로 열거했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AI 원천 기술과 플랫폼, 뛰어난 인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반도체와 디바이스, 첨단 제조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두 나라의 강점이 결합한다면 더 빠르게 혁신하고 더 많은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 회장은 "AI 시대는 어느 한 기업이나 국가의 힘만으로는 열어갈 수 없다"며 모델·반도체·데이터센터·전력을 아우르는 생태계와 국경을 넘는 협력을 강조했다. 발언 끝에 그는 대통령의 자서전에 나오는 장면, 초등학생 때 운동장에 내린 헬리콥터를 만져보며 미래를 꿈꿨다는 일화를 인용했다.

혹 탄 브로드컴 CEO는 자신을 "기술 전문가가 아니라 사업가"라고 소개한 뒤, 한국의 '소버린 AI' 구상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맞춤형 AI 가속기 개발, 메모리 업체와의 협력, 소버린 AI 인프라 구축을 세 갈래로 제시하고 이날 삼성전자와의 협약을 예고했다.

최태원 회장은 세 가지 과제를 내놓았다. 국민 한 사람이 최소 하나의 AI 에이전트를 쓰는 'AI 네이티브 국가'로 전환해 한국을 세계의 시험장으로 만들 것, 메모리 생산과 데이터센터 확충으로 토큰 비용을 낮출 것, 그리고 AI 거버넌스를 세우고 AI가 없애는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며 환경 부담을 줄일 것. 마지막 항목은 이 자리에서 나온 발언 가운데 부작용을 정면으로 다룬 드문 대목이었다.

샘 올트먼은 몇 년 안에 AI가 질병을 치료하고 과학적 발견을 이끌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될 때 벌어지는 일을 다룬 공상과학 영화들을 언급하며 안전성의 중요성을 짚었다. 그는 다른 나라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보려면 한국을 보라고 말했다. 수용 속도가 그만큼 빠르다는 뜻이다.

정의선 회장은 현대차그룹을 "피지컬 AI 솔루션 기업"으로 규정했다. 개별 기기의 지능화에서 AI 팩토리 같은 공간의 지능화로, 최종적으로는 도시 단위의 통합 지능화로 가는 3단계 구상이다. 웨이모와는 자율주행 파운드리 사업을 진행해 조지아주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에서 조향·제동·전력 계통을 이중화한 아이오닉 5를 생산해 로보택시에 투입한다. 보스턴다이내믹스는 구글 딥마인드와 협력해 휴머노이드 '아틀라스'의 AI 역량을 높이고, 2028년까지 미국에 연 3만 대 규모의 로봇 생산 체계를 구축한다. 국내에서는 전북 새만금에 약 9조 원을 투입해 로봇 제조 클러스터와 수전해 플랜트를 아우르는 '새만금 AI 밸리'를, 영남권에 10년간 42조 원을 들여 AI 제조 허브와 도심항공모빌리티(AAM)·우주·소형모듈원자로(SMR) 거점을 조성한다. 엔비디아와는 대학·스타트업이 표준화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로봇을 개발·검증할 수 있는 '로봇 레퍼런스 플랫폼'을 공동 구축한다.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는 변화 속도를 시간축으로 설명했다. 6년 전에는 기본적인 대화도 못 했고 4년 전에는 코드 한 줄을 썼던 AI가, 지금은 다수 기술 기업에서 코드의 대부분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앤트로픽이 최근 한국에 사무소를 열었고 네이버·넥슨·LG·삼성·SK와 협력하고 있으며, 과기정통부와 업무협약을 맺고 국내 AI 안전 연구기관과 함께 연구를 진행한다고 소개했다. 발언의 마무리는 진영론에 가까웠다. 민주주의 국가들이 힘을 모아 공동의 가치에 기반한 AI 발전을 이끌고, 적대국이 압도적 우위를 갖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네이버가 꿈꾸는 인터넷 세상은 인터넷과 AI가 한두 집단에 의해 지배되고 조종되는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다양성이 지켜지려면 각 국가와 집단, 개인마다 여러 AI가 나타나 활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

이 의장은 30년간 미국과 중국 빅테크 사이에서 서비스를 운영하며 데이터센터를 직접 설계·구축해 왔지만 그 노하우를 확장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100억 달러 투자 유치를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계기"로 평가한 이유다.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는 영상 메시지에서 35년 넘는 한국 사업 이력을 언급하며 향후 수년간 한국의 AI 인프라에 지속 투자하겠다고 밝혔고, SK와 메모리 칩을 공동 설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06같은 날, 시장은 반대로 움직였다

서밋이 열린 그 시각 한국 증시는 폭락했다. 7월 24일 코스피는 406.27포인트(5.72%) 내린 6,690.62로 마감했다. 전날 4% 넘게 올라 되찾은 7,000선을 하루 만에 내주고 6,700선마저 잃었다. 오전 11시 23분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됐다. 삼성전자는 7.59% 하락한 24만 9,500원, SK하이닉스는 8.34% 떨어진 175만 9,0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외국인은 하루에 SK하이닉스 1조 7,568억 원, 삼성전자 8,730억 원을 팔았다. 전기·전자 업종지수는 7.86% 내려 전 업종 중 낙폭이 가장 컸다.

원인은 두 갈래로 지목됐다. 중동 긴장 재점화로 국제 유가와 미국 국채 금리가 오른 것, 그리고 뉴욕 증시에서 빅테크 실적 발표 뒤 AI 관련 설비투자 대비 현금흐름 우려가 번진 것이다. 코스피는 6월 고점 대비 약 30% 낮은 수준까지 밀려 있었다.

같은 날 무대 위에서는 5년간 9,500억 달러의 메모리 수요가 발표되고, 시장에서는 그 수요를 지탱할 AI 투자의 지속 가능성이 의심받았다. 두 장면은 모순이 아니라 같은 사안의 두 측면이다. 메모리 슈퍼사이클을 전제로 짜인 국가 전략은, 그 사이클이 꺾일 때 무엇이 남는지를 함께 답해야 한다.

07남은 변수 네 가지

전기와 땅

정부 계획의 AI 데이터센터 규모는 18.4GW, 이날 협약으로 확인된 신규 AIDC 협력만 5GW다. 대형 원전 한 기가 1.4GW 남짓이니, 18.4GW는 원전 열세 기분의 상시 전력이다.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는 완공 시점을 7~12년 앞당기는 일정이 잡혀 있어, 초기 전력 공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투자 일정 전체가 뒤로 밀린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해상풍력·태양광·양수발전·에너지저장장치(ESS)·탄소 포집활용저장(CCUS)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겠다며 "저탄소 관점에서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를 통합 접근한다"고 밝혔다.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와 전력 수요 급증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경로는 아직 문서로 존재하지 않는다.

돈을 어디서 조달하는가

4,755조 원은 2026년 국가 예산 728조 원의 6.5배다. 기업 스스로 조달해야 하는 몫이 대부분이다. SK하이닉스가 7월 10일 나스닥에 미국주식예탁증서(ADR)를 상장해 40조 원대를 확보한 것은 그 신호탄에 가깝다. 외국 기업의 미국 증시 신규 자금 조달로는 역대 최대 규모였고, 자금은 용인 팹 건설과 청주 후공정 증설, 노광 장비 구매에 배정됐다. 그러나 이 규모의 장기 자금을 뒷받침할 금융 설계는 아직 윤곽이 흐리다. 정부가 미래대응기금 신설 방침을 밝혔을 뿐 실행 체계는 제시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금융권에서 나온다.

문서의 구속력

이날의 문서 대부분은 업무협약과 의향서다. 삼성전자는 6월 투자 공시에 "장래 계획"이라는 단서를 달았고, SK하이닉스는 주요 계획을 이사회 승인 뒤 확정한다고 밝혔다. 계약의 실체는 앞으로 몇 분기에 걸쳐 확정 계약과 착공, 장비 발주로 확인될 것이다. 확인 가능한 지표는 분명하다. 부지 확정 여부, 전력 계통 접속 승인, 장비 발주 공시, 그리고 실제 출하량이다.

메모리 편중

이날 협약의 무게중심은 압도적으로 메모리와 파운드리에 있다. 모델과 소프트웨어 층에서 한국이 내놓은 것은 하이퍼클로바X와 정부의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 그리고 앤트로픽·오픈AI의 모델을 국내 산업에 얹는 파트너십이다. 과기정통부는 하반기까지 세계 10위권 성능을 확보하고 내년에 최상위급 모델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으며, 연내 보안 특화 모델도 만들겠다고 밝혔다. 목표와 현재 위치의 간격이 이 전략의 가장 취약한 지점이다. 반도체 공급자로서의 지위는 확인됐지만, 모델 층에서의 자립은 아직 계획서 단계다.

08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확실히 달라진 것이 있다. 미국의 주요 AI 기업 최고경영자 네 명과 한국 4대 그룹 총수가 한 무대에 앉았고, 그들이 향후 5년의 메모리 수요를 공개된 숫자로 약속했다. 한국이 AI 공급망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는 사실은 이 자리에서 문서로 확인됐다. 엔비디아가 네이버에 직접 지분을 투자하고 브룩필드가 90억 달러를 대는 구조는, 한국 기업이 부품 공급자에서 인프라 사업자로 이동할 수 있다는 신호다.

아직 달라지지 않은 것도 분명하다. 전기와 땅, 물은 계약서로 만들 수 없다. 4,700조 원 가운데 새 돈이 얼마인지는 앞으로 몇 년의 공시가 답할 문제다. 그리고 대통령이 네 번째로 약속한 'AI 기본사회', 즉 이 투자의 성과를 누가 얼마나 나눠 갖는지에 대해서는 이날 어떤 문서도 서명되지 않았다. 최태원 회장이 "AI가 없애는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그 공백을 가리키는 유일한 언급이었다.

이 대통령은 폐회 발언에서 인공지능을 "인류가 새로 불을 발견한 것"에 비유했다. 불의 문제는 발견이 아니라 관리였다. 이날 샌프란시스코에서 확인된 것은 한국이 그 불을 지피는 데 필요한 재료를 세계에 공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 불로 무엇을 데울지는 아직 국내에서 답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