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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a · 신학

그리스도 뒤에 다른 하나님이 있는가

1564년 제네바에서 죽은 사람과 1968년 바젤에서 죽은 사람을 마주 앉힌다. 자연신학, 예정, 성경의 권위, 국가 앞의 교회, 세례 — 다섯 쟁점에서 두 사람이 실제로 문서에 남긴 입장만으로 말하게 했다.

2026년 8월 10일

하나404년의 간격을 두고 마주 앉히는 이유

장 칼빈은 1564년 5월 27일 제네바에서 죽었다. 카를 바르트는 1968년 12월 10일 바젤에서 죽었다. 두 사람이 일한 도시는 같은 나라 안에 있고, 두 사람의 죽음 사이에는 404년이 놓여 있다. 이 간격을 억지로 좁혀 대화를 만드는 것이 유희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바르트는 자기 신학을 개혁신학의 계승으로 제시했고, 개혁주의 진영의 상당수는 그것을 이탈로 판정했다. 그 판정 다툼은 20세기 개혁신학이 가장 오래 끌어온 분쟁이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르트가 칼빈을 처음 정면으로 읽은 것은 1922년 여름학기 괴팅겐에서였다. 칼빈 신학 강의를 준비하려고 이미 공고한 히브리서 강의를 취소하고 칼빈만 붙들었다. 그해 6월 8일 친구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기에게 이 현상을 흡수할 도구가 없다고 적었다. 감당할 수 없는 자연력을 만난 사람이 쓸 법한 표현들을 동원했고, 남은 생을 칼빈만 읽으며 보내도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 강의록은 뒷날 『칼빈 신학』으로 출간되었다.

아래 대화는 실제로 없었던 것이다. 다만 각 발언은 두 사람이 문서로 남긴 입장의 범위 안에서만 구성했고, 어느 쪽에도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 견해를 얹지 않았다. 다섯 쟁점을 차례로 다룬다.

창조를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바르트

1934년에 에밀 브루너가 『자연과 은총』을 냈습니다. 계시를 받아들일 접촉점(Anknüpfungspunkt)이 인간에게 있다는 주장이었고, 그 근거로 든 사람이 당신이었습니다. 나는 『아니다!』로 답했습니다. 답이 거칠었던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무렵 독일에서는 민족과 혈통과 역사와 총통을 하나님의 계시 통로로 삼는 신학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칼빈

브루너가 인용한 나와 내가 쓴 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강요』 제1권에서 사람의 마음에 신성에 대한 감각(sensus divinitatis)이 심겨 있다고 썼고, 우주를 하나님의 영광이 걸리는 무대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같은 책에서 곧바로, 죄가 그 시력을 망가뜨렸으므로 성경이 안경 노릇을 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안경 비유는 자연이 독립된 통로라는 말이 아닙니다. 안경 없이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르트

그 순서를 압니다. 문제는 명제의 논리가 아니라 그 명제가 무엇에 쓰이는가였습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아볼 잔재가 남았다는 문장은 그 자체로는 조심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자기를 계시로 내세우는 시대에 그 문장은 문을 여는 데 쓰입니다. 바르멘에서 우리는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사건이나 권세나 형상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그 문장은 인식론이 아니라 방어선이었습니다.

칼빈

방어선을 위해 교리를 잘라내면 방어가 끝난 뒤에 잘린 자리가 남습니다. 창조주에 대한 지식과 구속주에 대한 지식을 둘로 나눈 것은 자연에 독립 권한을 주려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신학에서 다룰 언어를 남겨두려던 것입니다. 그 언어가 없으면 시편과 잠언과 욥기는 무엇으로 읽습니까.

바르트

읽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읽습니다.

칼빈

그것은 읽기가 아니라 대입입니다.

이 논쟁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을 재고 있다. 칼빈의 문장을 문헌학적으로만 읽으면 브루너의 인용은 정확하다. 강요 제1권 3장과 5장은 창조에서의 신 인식을 분명히 인정한다. 앨리스터 맥그래스처럼 바르트가 브루너를 과장해 반박했다고 보는 독법이 계속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반대로 명제의 사용 이력까지 함께 재면 바르트의 경계가 근거를 얻는다. 1930년대 독일 교회에서 창조 질서와 민족은 실제로 계시의 자리로 밀려 들어갔다.

밝히지 않으면 논쟁이 헛도는 전제

자연신학 논쟁이 성립하려면 조용한 전제가 하나 필요하다. 신학 명제의 참·거짓과 그 명제의 정치적 기능을 함께 판정할 수 있다는 전제다. 바르트는 그것을 채택했고, 브루너와 칼빈 독자들은 채택하지 않았다. 이 전제를 표면에 올리지 않으면 논쟁은 서로의 문헌 인용만 주고받다 끝난다.

발화 위치도 결과에 작용했다. 1934년 바르트는 본 대학 교수였고 정권 아래 있었다. 브루너는 중립국 취리히에 있었다. 같은 명제가 두 사람에게 같은 위험도를 갖지 않았다. 두 사람의 우정은 이 논쟁 뒤 회복되지 않았고, 바르트는 이듬해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 충성 서약을 거부해 교수직을 잃고 바젤로 돌아갔다.

작정 뒤에 다른 하나님이 있는가

바르트

강요 제3권을 읽고 나는 확신의 문제로 되돌아갔습니다. 절대적 작정(decretum absolutum)을 세우면 그리스도 뒤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뜻을 가진 하나님이 한 분 더 남습니다. 알 수 없는 것은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교의학』 II/2에서 절대 작정은 없다고 썼습니다. 선택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고, 선택된 자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칼빈

그리스도가 우리의 선택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라고 쓴 사람이 나입니다. 강요 제3권 24장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도, 아들과 떼어놓은 아버지에게서도 확신을 찾지 못합니다. 그 점은 다투지 않습니다. 다투는 것은 당신이 인식의 자리와 결정의 근거를 하나로 뭉갠 대목입니다. 거울은 우리가 보는 곳이고, 작정의 근거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바르트

인식할 수 없는 근거는 신앙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학의 빈칸이고, 빈칸은 결국 채워집니다. 당신 이후 개혁파는 그 빈칸을 위해 작정의 순서를 다퉜습니다. 타락 이전의 선택인가 타락 이후의 선택인가를 놓고 한 세기를 썼습니다. 양쪽 모두 은혜의 근거와 의미가 완전히 감춰져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었습니다.

칼빈

그 논쟁이 지나쳤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 작정을 스스로 두려운 것이라 불렀습니다. 유기를 부드럽게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굳어진 마음과 버림받음을 말하는 자리를 신학이 지운다면,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은폐입니다.

바르트

지우지 않았습니다. 옮겼습니다. 그리스도가 유기를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것은 그분입니다.

칼빈

그러면 아무도 버림받지 않습니까.

바르트

그것을 교리로 선포하지는 않겠습니다. 만인의 회복을 하나님께 요구할 권한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제한할 권한도 우리에게 없습니다.

칼빈

그것은 양쪽 문을 다 열어둔 답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절대성을 없앤 것도 아닙니다. 결정은 여전히 우리 밖의 영원에서 내려졌고, 다만 그 대상이 인류 전체로 넓어졌습니다. 작정의 절대성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겨냥한 범위를 바꾼 것입니다.

바르트

차이는 범위가 아니라 이름입니다. 우리 밖에서 내려진 그 결정에 이름이 있는지 없는지가 다릅니다.

선택 교리의 두 구조칼빈의 작정 중심 구조와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 구조를 두 열로 비교한 도식 칼빈 — 작정에서 개인으로 『기독교 강요』 제3권 21~24장 (1559년 최종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알려지지 않은 선하신 뜻이 결정의 근거 선택과 유기, 두 갈래 결정 결정이 향하는 대상은 개별 인간이다 그리스도 — 선택을 비추는 거울 확신을 얻는 자리이되 결정의 근거는 아니다 바르트 — 그리스도가 곧 작정 『교회교의학』 II/2 (1942년) 예수 그리스도 — 선택하시는 하나님 이 결정 뒤에 다른 뜻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 — 선택된 인간 유기를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규정된 인류 선택의 대상은 개인 이전에 그분이다
선택 교리의 두 구조. 왼쪽은 알려지지 않은 작정에서 출발해 개별 인간에게 내려오고, 그리스도는 그 결정을 확인하는 자리에 놓인다. 오른쪽은 그리스도가 결정 자체이며, 개인은 그 안에서 규정된다.

이 대목에서 예정이라는 낱말이 두 사람에게 같은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칼빈에게 예정은 개별 인간의 구원 여부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이다. 바르트에게 예정은 하나님이 자기를 인간을 위한 하나님으로 규정한 사건이다. 재는 대상이 다르므로 “바르트는 예정을 부정했다”와 “바르트는 예정을 급진화했다”가 둘 다 문헌적으로 성립한다. 이 갈라짐을 표시하지 않은 논쟁은 대개 헛돈다.

바르트는 칼빈의 그리스도론적 진술들, 특히 거울 비유를 자기 노선의 선례로 읽었다. 칼빈이 자기 체계와 어긋나는 방향으로 벗어난 대목이 오히려 옳았다는 독법이다. 데이비드 깁슨은 두 사람의 그리스도 중심성이 종류부터 다르다고 정리한다. 칼빈에게 그리스도는 구원론의 중심이고, 바르트에게 그리스도는 작정 그 자체다.

확신 문제를 풀면서 열리는 다른 문제

깁슨의 구분이 정확하다면 칼빈이 제기한 반론, 곧 절대성이 제거된 것이 아니라 이전되었다는 지적이 겨냥하는 자리가 실재한다. 바르트의 체계에서도 영원한 결정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익명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확신이라는 목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다른 문제를 만든다. 결정이 이미 인류 전체를 향해 내려졌다면, 복음 선포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초청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것에 대한 통보에 가까워진다. 바르트는 만인 회복을 교리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 거부를 자기 체계 안에서 논증으로 뒷받침하지도 않았다.

성경의 권위는 무엇의 속성인가

칼빈

성경의 권위는 교회의 결정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의 내적 증거가 이 본문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우리 안에서 확증합니다. 로마가 교회의 판단을 성경 위에 올려놓은 것에 맞서, 그 자리에 성령을 두었습니다.

바르트

그 문장이 내 출발점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 겹으로 놓았습니다. 계시된 말씀은 그리스도이고, 기록된 말씀은 성경이고, 선포된 말씀은 설교입니다. 성경은 계시를 증언하며, 성령이 그 증언을 살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축자적 무오 교리는 성경을 손에 쥘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듭니다. 그때 개혁교회는 로마가 교회에 부여한 무오를 책으로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칼빈

성령의 증거를 강조한 것은 본문의 신빙성을 대체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은 본문이 참임을 알게 하는 분이지, 본문이 참이 되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 쪽에서는 어제 하나님의 말씀이던 구절이 오늘은 아닐 수 있습니다.

바르트

어제와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소유와 사건의 문제입니다. 손에 쥔 것은 우리가 처분할 수 있고, 처분할 수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칼빈

그 구분이 강단에 서는 사람에게 무엇을 줍니까. 설교자는 본문을 들고 올라갑니다. 그 본문이 사건이 될지 아닐지 모르는 채 올라가는 사람에게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바르트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칼빈

그것은 답이지만 충분한 답은 아닙니다.

여기서 갈리는 것은 영감론이 아니라 권위라는 낱말의 소재지다. 칼빈은 권위를 텍스트의 속성으로 두고 성령을 그 속성을 인식시키는 분으로 둔다. 바르트는 권위를 사건의 성격으로 두고 텍스트를 그 사건의 도구로 둔다. 앞의 배치는 본문을 물화할 위험을 지고, 뒤의 배치는 판정 기준을 검증 불가능하게 만들 위험을 진다. 20세기 후반의 무오 논쟁과 정경비평 논쟁은 이 두 위험 사이에서 진행되었고, 어느 쪽도 상대의 위험을 논증으로 제거하지 못했다.

다섯국가의 칼과 교회의 발언

바르트

1553년 10월 27일 제네바 성문 밖 샹펠에서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화형되었습니다. 전날 시의회가 선고했습니다. 당신은 시민권도 없는 목사였고 판결 권한이 없었으며, 화형 대신 참수를 요청했다가 거부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정황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1554년 2월 당신은 『정통 신앙의 변호』를 냈습니다. 이단을 칼로 다스리는 것이 통치자의 의무라고 논증한 문서입니다.

칼빈

16세기 유럽 전역에서 삼위일체 부정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습니다. 세르베투스는 비엔에서 가톨릭 재판으로 이미 사형 선고를 받고 도주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변명이고, 변명이라는 것을 압니다. 같은 해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가 나를 반박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에도 반대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르트

권한의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신학이 국가의 칼을 교리 집행에 쓰도록 승인했는가가 문제입니다. 당신은 그 승인을 문서로 남겼습니다.

칼빈

그러면 이제 내가 묻겠습니다. 1934년 당신은 국가에 맞섰습니다. 바르멘 선언을 썼고, 총통에 대한 무조건 충성 서약을 거부해 교수직을 잃었습니다. 그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런데 1945년 이후 당신은 동쪽 체제에 대해 같은 강도로 말하기를 거부했습니다. 1956년 헝가리에 소련군이 들어왔을 때 당신은 침묵했고, 라인홀드 니부어는 이듬해 당신의 신학이 정치적 선택에 아무 지침을 주지 못한다고 썼습니다.

바르트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상황이 반복된 것이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교회의 발언은 원칙을 대칭으로 적용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이 실제로 위험한지에 대한 구체적 판단입니다. 서방에서 반공은 이미 국가가 요구하는 신념이었습니다. 교회가 그것을 다시 외치는 것은 저항이 아니라 순응입니다.

칼빈

그 논리는 판단을 상황에 맡깁니다. 그러면 교회가 언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는 누가 정합니까. 당신은 나에게서 국가가 신학의 집행자가 된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신학의 발언 시점이 신학자 한 사람의 상황 판단에 걸리게 된 것을 문제 삼습니다.

바르트

그것은 정당한 지적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문제의 반대편 끝에서 무너졌다. 칼빈은 교회가 국가의 강제력을 교리 집행에 쓰도록 신학적으로 승인한 지점에서, 바르트는 국가에 대한 판단을 원칙에서 상황으로 옮겨 사후적으로만 평가되게 만든 지점에서 무너졌다.

형식만 보면 두 사람의 국가론은 비슷하다. 강요 제4권 20장은 시민 정부를 하나님이 세운 질서로 다루며 통치자의 의무에 참된 예배의 보호를 포함시킨다. 바르트는 1938년 『의인과 정의』, 1946년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에서 국가를 그리스도의 통치를 둘러싼 바깥 원으로 놓았다. 두 구조 모두 국가를 교회에 종속시키지 않으면서 교회가 아는 중심으로 규정한다. 갈라지는 것은 그 규정에서 무엇이 도출되는가다. 칼빈에게서는 통치자의 의무가 나오고 바르트에게서는 교회의 발언권이 나온다. 의무는 목록으로 쓸 수 있고, 발언권은 그럴 수 없다.

여섯세례는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바르트

1943년 세례에 관한 강연에서 유아세례를 문제 삼았고, 1967년 교의학 IV/4에서 그 문제를 교의학의 자리에 넣었습니다. 세례는 성례가 아닙니다. 성령의 세례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제자도는 상속되지 않습니다.

칼빈

강요 제4권 16장에서 세례를 언약의 표징으로 다뤘습니다. 할례는 여드레 된 아이에게 주어졌습니다. 아이의 결단을 조건으로 삼는 순간 은혜가 인간의 응답에 매달립니다.

바르트

매달리지 않습니다. 응답은 은혜의 조건이 아니라 은혜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내가 본 것은 다른 것입니다. 국민교회에서 유아세례는 교회의 경계를 인구의 경계와 같게 만듭니다. 그러면 세례는 아무것도 구별하지 않습니다. 1930년대 독일에서 세례받은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나는 보았습니다.

칼빈

그것은 관행에 대한 비판이지 교리 논증이 아닙니다. 표징이 남용되었다면 남용을 고치는 것이 순서이지 표징을 없애는 것이 순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의 선택 교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 전체를 규정했다면서, 그 규정의 표징은 개인의 고백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십니까.

바르트

그 긴장은 내 체계 안에 남아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반대편으로 간 대목

여기서 위치가 뒤집힌다. 선택을 보편으로 놓은 바르트가 세례는 좁혔고, 선택을 개별로 놓은 칼빈이 세례는 넓혔다. 각자 자기 교리에서 자연스럽게 따라 나올 방향의 반대쪽으로 갔다.

이 역전을 설명하는 것은 교리의 내적 논리가 아니라 각자가 무엇을 위협으로 봤는가다. 칼빈은 재세례파가 교회를 자발적 결사로 바꾸는 것을 위협으로 보고 언약 공동체의 연속성을 지키는 쪽으로 움직였다. 바르트는 세례가 국민 전체에 자동으로 부여되어 교회와 국가의 경계가 지워지는 것을 위협으로 보고 구별을 회복하는 쪽으로 움직였다. 체계가 아니라 체계가 놓인 교회 상황이 결론을 결정한 사례다. 바르트의 세례론은 개혁교단의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아들 마르쿠스 바르트가 1951년에 낸 세례 연구가 아버지보다 먼저 같은 방향을 밀었다는 지적이 따라붙는다.

일곱계승이냐 이탈이냐는 질문이 잘못 놓인 자리

다섯 쟁점을 지나고 나면 애초의 질문이 어긋나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바르트는 칼빈의 결론을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고, 칼빈을 버린 사람도 아니다. 그는 칼빈이 쓰던 방법 하나를 끝까지 밀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술은 하나님이 자기를 내어준 자리에서만 가져온다는 원칙이다.

칼빈에게 그 자리는 성경 전체였다. 창조 기사, 율법, 지혜문학, 예언서, 복음서가 모두 그 자리에 포함되었고, 그래서 그의 신학은 넓은 대신 균질하지 않다. 바르트에게 그 자리는 그리스도 사건 한 점으로 수축했다. 그래서 그의 신학은 칼빈보다 일관되고 동시에 좁다. 일관성의 대가는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로 곧장 환원되지 않는 대목들, 곧 지혜문학의 경험 관찰이나 창조 질서에 대한 진술이나 이스라엘 역사의 정치적 세부를 다룰 언어가 얇아지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성향 차이로 보이는 것 상당 부분은 과업의 차이에서 나온다. 칼빈은 교회를 세우는 자리에서 썼다. 1541년 제네바 교회 법령, 학교, 목사회, 시의회와의 협상이 그의 일이었다. 세우는 신학은 질서와 목록을 필요로 하고, 목록은 세부에서 타협한다. 바르트는 교회가 국가에 흡수되는 것을 막는 자리에서 썼다. 막는 신학은 단 하나의 기준선을 필요로 하고, 기준선은 세부를 희생한다. 계승과 이탈이라는 이분법은 각 진영이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는 쓰이지만, 두 신학의 실제 관계를 서술하지는 못한다.

여덟이 논쟁이 앞으로 놓일 자리

아래는 앞으로 12~36개월 범위의 예측이며, 각각에 무엇이 확인되면 예측이 깨지는지를 함께 적는다.

자연신학 쟁점은 바르트의 전면 부정보다 칼빈-브루너 쪽 노선으로 계속 기운다

분석철학 계열 종교인식론은 신성에 대한 감각을 신 믿음의 정당화 요소로 다루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고, 생태·창조 신학은 창조 질서를 규범 자원으로 다시 요구하고 있다. 두 흐름 모두 계시 이전의 인식 지반을 필요로 하므로 접촉점을 전면 부정하는 노선과 맞지 않는다.

반증 조건 — 개혁주의 인식론 계열의 주요 단행본이 신 인식의 정당화 조건에 그리스도론적 제약을 명시적으로 도입하거나, 생태신학 주류 논의가 창조 질서 대신 화해론만으로 규범을 구성하는 쪽으로 수렴하는 경우.

바르트의 세례론은 개혁·장로 교단의 실천으로 편입되지 않은 채 남는다

1967년 이후 60년 가까이 이 주장은 신학 논의에서만 살아 있었고 교단 예식으로 옮겨간 사례가 없다. 언약 신학과 교인 관리 체계 전체를 다시 짜야 하는 비용이 논증의 설득력보다 크게 작용한다.

반증 조건 — 주요 개혁·장로 교단이 헌법이나 예식서에서 신앙고백 이후의 세례를 표준 절차로 채택하는 경우.

바르트가 보편구원론자인가에 대한 해석 합의는 형성되지 않는다

그가 만인 회복을 교리로 선포하기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그 가능성을 배제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양쪽 해석의 근거로 계속 쓰인다. 텍스트가 결론을 강제하지 않는 한 논쟁은 진영의 문제로 남는다.

반증 조건 — 바르트 전집(Gesamtausgabe) 미간행 자료에서 만인 회복을 교리로 긍정하거나 명시적으로 배제한 진술이 확인되는 경우.

세르베투스 사건 연구의 무게중심은 인물 책임에서 제도 문제로 계속 이동한다

칼빈의 개인 개입 범위를 다투는 논의는 사료가 거의 소진되었다. 남은 쟁점은 종교개혁 신학이 국가의 강제력을 교리 집행에 동원한 구조이며, 이는 오늘의 종교와 공권력 문제와 직접 연결되므로 다뤄질 유인이 크다.

반증 조건 — 새 사료가 칼빈의 개인 개입 범위를 지금까지의 추정과 크게 다르게 확정하는 경우.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그 거리가 개혁신학이 20세기에 자기 문제를 발견한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