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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a

기독교는 종교인가

‘종교가 아니라 진리’라는 문장의 출처와 대가

2026년 8월 10일

기독교를 종교의 한 항목으로 분류하는 것을 거부하는 신자가 적지 않다. 이슬람·힌두교·불교는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진리이므로 다른 층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하나의 문장으로 제시되지만,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질문이 뭉쳐 있다. 뭉친 것을 풀면 논쟁이 실제로 존재하는 지점이 어디인지, 그리고 그 지점의 고전적인 답이 이 구호와 얼마나 다른지가 드러난다.

세 개의 질문이 한 단어에 얽혀 있다

‘종교’라는 말은 최소한 세 곳에서 서로 다른 일을 한다. 국가가 세제와 통계를 운용하는 행정 언어에서, 전통들을 비교하는 학문의 분류 언어에서, 그리고 신앙의 성격을 평가하는 신학의 언어에서 각각 다른 기능을 맡는다. 세 언어는 같은 단어를 쓰지만 같은 것을 묻지 않는다.

법·제도

국가는 기독교를 종교로 분류하는가

분류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 분류에 근거한 지위를 요청해 왔다.

학문

종교학은 기독교를 종교로 다루는가

다룬다. 이 범주가 어느 전통에도 잘 맞지 않는다는 비판까지 포함해서 같은 조건에 놓인다.

신학

신학은 기독교를 종교라 불러도 되는가

여기에만 실제 논쟁이 있다. 그리고 고전적 답은 ‘종교가 아니다’가 아니다.

앞의 두 질문은 사실과 방법의 문제이고 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 세 번째만 판단의 문제다. 구호는 세 번째 질문에서 얻은 감각을 앞의 두 질문에까지 확장하면서, 정작 세 번째 질문의 전통적 답변과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

국가는 기독교를 종교로 분류하고, 교회는 그 분류를 요구한다

대한민국 소득세법은 2018년 1월 1일부터 종교인이 소속 종교단체에서 받는 소득을 ‘종교인소득’으로 구분해 과세한다. 이 항목은 기타소득으로 분류되며, 종교활동비·사택제공이익 등 상당 범위가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고, 세무 공무원의 질문·조사권도 종교인소득 관련 부분으로 한정된다. 종교 목적 재산의 취득세·재산세 면제와 비영리법인에 대한 법인세 면제는 이 제도 도입과 별개로 유지되고 있다. 이 모든 혜택의 법적 요건은 하나다. 종교단체이고 종교인이어야 한다.

통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국가데이터처는 2025년 10월 22일부터 11월 18일까지 전국 가구의 20%를 표본으로 인구주택총조사를 실시했고, 여기에 종교 문항이 포함됐다. 선택지는 불교, 기독교(개신교), 기독교(천주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대순진리회, 대종교, 기타 순으로 제시됐다. 조사 기간에 대한불교조계종과 원불교는 신도들의 응답을 독려했고, 개신교 쪽에서도 한국교회언론회가 성실한 응답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개신교 언론은 첫 선택지가 불교로 고정된 항목 배치가 응답을 왜곡할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순서에 항의하는 것과 범주를 부정하는 것은 다르다

이 조사 결과는 향후 10년간 종교 관련 정책과 예산 배분의 근거 자료로 쓰인다. 그래서 어느 전통도 이 칸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첫 항목이 불교인 것을 문제 삼은 것은 분류 자체를 거부하는 몸짓이 아니라, 분류 안에서 자기 순위를 지키려는 요구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성립하는 세계에서는 이 항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종교 문항의 어느 칸도 기독교의 자리가 아닐 테니 순서는 무관해진다. 실제로는 그 반대로 행동한다. 구호와 실무가 어긋나는 첫 번째 자리가 여기다.

성경에는 ‘종교’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고, 한 번은 칭찬으로 쓰인다

신약 그리스어에는 θρησκεία(thrēskeia)라는 단어가 있다. 예배와 의례를 통해 표현되는 신에 대한 섬김, 즉 오늘날 ‘종교’로 옮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말이다. 영어 성경들은 대부분 이 단어를 religion으로 번역한다.

이 단어가 나오는 자리 가운데 하나가 야고보서 1장 26절과 27절이다. 26절은 이 단어를 부정적으로 쓴다. 스스로 그러하다고 여기면서 혀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은 헛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27절은 같은 단어를 긍정적으로 쓰면서 내용을 채워 넣는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그것은 환난 중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일이다. 두 절은 종교와 비종교를 가르지 않는다. 헛된 종교와 정결한 종교를 가른다.

같은 단어의 다른 용례도 방향이 일정하지 않다. 골로새서 2장 18절은 천사를 섬기는 행위를 이 단어로 지목해 배격한다. 사도행전 26장 5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이전에 속했던 유대교의 가장 엄격한 분파를 설명하면서 이 단어를 쓴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이 청중에게 던진 첫마디는 다른 계열의 단어이지만, 개역개정은 그 대목을 “종교심이 많도다”로 옮긴다.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의 종교성이 복음 설명의 출발점이 됐다. 신약은 이 어휘를 폐기하지 않았다.

한국어 성경이 야고보서의 이 단어를 ‘경건’으로 옮긴 것은 번역으로서 부당하지 않다. 다만 결과가 있다. 영어권 신자는 자기 성경에서 religion이라는 단어가 칭찬받는 자리를 직접 본다. 한국 신자는 그 자리를 보지 못한다. ‘종교’와 ‘경건’이 다른 단어로 갈라진 언어 환경에서는, 종교라는 말을 부정어로 밀어내는 구호가 성경과 충돌한다는 감각이 생기기 어렵다. 이 구호가 한국 교회에서 유독 저항 없이 통용되는 이유의 일부는 신학이 아니라 번역에 있다.

개혁자들은 자기 신앙을 ‘종교’라고 불렀다

라틴어 religio의 어원은 고대부터 두 갈래로 설명됐다. 키케로는 거듭 살펴 읽는다는 뜻의 relegere에서 왔다고 보았고, 락탄티우스는 다시 묶는다는 뜻의 religare에서 왔다고 보았으며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설명을 다뤘다. 어느 쪽이든 뜻은 인간이 신에게 매이는 방식이다. 기독교가 이 단어를 피할 이유가 없었고, 실제로 피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90년 무렵 『참된 종교에 관하여』(De vera religione)를 썼다. 제목 자체가 종교라는 유(類) 안에서 참과 거짓을 가르는 구조다. 칼뱅의 대표작 제목은 『기독교 강요』로 번역되지만 원제는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곧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교육이다. 1536년 초판부터 이 제목이었다. 칼뱅은 모든 사람 안에 심긴 종교의 씨(semen religionis)를 말했고, 헤르만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에서 종교를 신학의 정식 주제로 다루면서 기독교를 절대적이고 참된 종교로 위치시켰다.

고전적 구분선은 종교와 비종교 사이가 아니었다. 참 종교와 거짓 종교 사이, 그리고 계시종교와 자연종교 사이였다. 이 구분선은 기독교를 범주 밖으로 빼내지 않는다. 범주 안에서 기독교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말하게 한다.

그러면 ‘종교가 아니라 관계’라는 문장은 어디서 왔는가. 성경도 신조도 종교개혁 문헌도 아니다. 20세기 미국 복음주의다. 예수와의 개인적 관계를 신앙의 핵심으로 제시한 대중 전도 집회의 어법이 뿌리이고, 1970년대에 정형화된 구호로 굳어졌다. 대중적 정점은 2012년 1월 제퍼슨 베스키가 공개한 「Why I Hate Religion, But Love Jesus」였다. 예수가 종교를 폐지하러 왔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베스키의 낭송은 공개 몇 달 만에 재생 수천만 회에 이르렀고 영어권 복음주의 안에서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 문장의 나이는 반세기 정도이고, 태어난 곳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교회 문화다. 그것 자체가 문장을 틀리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이 문장이 전통을 지키는 문장이라는 인식은 사실과 다르다. 전통은 이 문장을 쓰지 않았다.

거의 모든 전통이 같은 문장을 말한다

자기를 종교 범주에서 빼내는 문장은 기독교의 특징이 아니다. 비교해 보면 이 동작이 얼마나 흔한지 드러난다.

전통자기를 무엇이라 부르는가근거로 드는 것
기독교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이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계시다
이슬람 종교가 아니라 삶의 질서, 곧 딘(dīn) 꾸란은 사람의 글이 아니라 내려진 계시다
힌두교 종교가 아니라 삶의 방식,
곧 사나타나 다르마
기원이 인간 역사 밖에 있고 창시자가 없다
불교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자 수행 믿음이 아니라 각자 검증하는 실천이다
유대교 종교가 아니라 민족이자 언약 믿음 체계가 아니라 태생과 계약의 문제다
힌두교의 경우는 사법 판단에도 등장한다. 2023년 인도 대법원 재판부는 지명 변경을 요구하는 공익 소송을 각하하는 심리에서 힌두교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라고 언급했다.

구조가 같다. 자기 전통은 내려온 것이고 남의 전통은 만들어진 것이라는 대비, 그리고 그 대비를 근거로 자기를 분류에서 제외하는 결론. 어떤 전통을 구별해 주지 못하는 문장은 구별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이슬람 신자가 같은 논법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 논법은 이슬람에 대해 아무것도 반박하지 못하고 기독교에 대해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남는 기능은 하나다. 밖을 향해서는 정보를 전달하지 않고, 안을 향해서는 결속을 만든다. 이것이 이 구호가 논증이 아니라 표지(標識)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표지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표지를 논증으로 착각한 공동체는 밖에서 논증을 요구받았을 때 대응할 것이 없다.

‘진리이므로 종교가 아니다’가 무너지는 자리

이 주장을 논증 꼴로 펼치면 세 줄이다. 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기독교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첫 줄이 결론을 이미 품고 있다. 종교를 ‘사람이 만든 것’ 또는 ‘거짓’으로 정의해 놓으면, 자기 신앙이 참이라고 믿는 어떤 전통도 같은 결론을 자동으로 얻는다. 앞 절의 표가 그 결과다. 전제에 결론을 넣고 결론을 꺼낸 것이므로 얻은 것이 없다.

범주의 층위도 어긋난다. 종교는 실천·공동체·주장의 묶음을 가리키는 유(類)이고, 참과 거짓은 명제의 속성이다. 유에 속하는 것이 참일 수 있다. 어떤 도형이 사각형이라는 사실은 그것이 직사각형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참되므로 종교가 아니다’는 사각형이 참되므로 사각형이 아니라고 말하는 꼴이다. 필요한 문장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종교인지를 말하는 문장이다.

세 번째 문제가 가장 결정적이다. 범주에서 자기를 빼려면 먼저 범주를 승인해야 한다. “이슬람·힌두교·불교는 종교이고 기독교는 아니다”라는 문장은 종교라는 분류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한 뒤 자기만 예외로 놓는 구조다. 분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분류를 사용해 자기를 특별 취급하는 것이다.

범주 자체를 의심하는 학문적 논의는 반대편으로 간다

‘종교’라는 범주가 보편적이지 않다는 주장은 실제로 존재한다.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1962년 『종교의 의미와 종말』에서 종교를 실체처럼 다루는 어법의 역사를 추적했고, 브렌트 농브리는 2013년 『종교 이전』에서 정치·경제·학문과 구분되는 별개 영역으로서의 종교는 근대 서구의 산물이며 고대인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고 논증했다. 타랄 아사드와 도모코 마스자와의 작업도 같은 계열이다.

이 논의의 결론은 기독교의 면제가 아니다. 근대적 종교 범주가 어느 전통에도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 지적은 이슬람·불교·유교에 똑같이 적용된다. 여기서 기독교만 빠져나오는 경로는 나오지 않는다. 학문이 범주를 의심하는 방식과 구호가 범주를 회피하는 방식은 겉으로만 비슷하다.

바르트를 인용하려면 끝까지 인용해야 한다

이 구호를 신학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가장 자주 호출되는 이름이 칼 바르트다. 『교회교의학』 I권 2부 17절의 제목이 「종교의 아우프헤붕(Aufhebung)으로서의 하나님의 계시」이고, 그 안에 “종교는 불신앙”이라는 문장이 있다.

그런데 이 절은 영어권에서 오랫동안 잘못 읽혔다. 초기 영역이 Aufhebung을 abolition, 즉 폐지로 옮긴 탓에 계시가 종교를 없앤다는 뜻으로 통용됐다. 개럿 그린과 존 웹스터를 비롯한 후속 작업 이후로는 이 단어를 지양 또는 승화로 읽는 것이 표준이 됐다. 폐기하는 동시에 긍정하는 이중 운동이라는 뜻이다.

더 중요한 것은 비판의 대상이다. 17절에서 바르트가 겨눈 것은 다른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 자신이었다. 배경은 1930년대 독일 교회가 국가 권력에 순응하던 상황이다. 인간의 종교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라는 진단은 먼저 기독교에 떨어진다.

그리고 이 절은 「참된 종교」로 끝난다. 바르트는 참된 종교가 있다고 말하고, 그 방식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죄인에 견준다. 죄인이 자기 안의 무엇 때문에 의로운 것이 아니듯, 기독교라는 종교도 자기 안의 우월함 때문에 참된 것이 아니다. 바르트의 결론은 기독교가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종교이고, 그러므로 심판 아래 있으며, 오직 계시와 은혜에 의해 참되다고 선언된다는 것이다.

구호와 이 문장은 방향이 반대다. 구호는 심판을 면제받는 데 쓰이고, 바르트의 문장은 심판을 자기에게 돌리는 데 쓰인다. 같은 어휘를 쓰면서 정반대로 기능한다. 본회퍼의 ‘종교 없는 기독교’도 비슷하게 전용된다. 옥중에서 그가 던진 물음은 종교라는 후견 구조가 걷힌 세계에서도 남을 신앙이 무엇인지였고, 자기 전통을 다른 전통 위에 올려놓는 도구가 아니었다.

이 문장이 지키려던 것과 함께 부수는 것

구호가 지키려는 내용은 옳다. 구원은 공로가 아니라 은혜라는 것, 사람이 신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사람을 향해 내려왔다는 방향, 내용 없이 형식만 남은 경건에 대한 경고. 이것은 개혁 전통의 핵심이고 야고보서 1장 26절이 이미 말한 것이다.

문제는 이름이다. 그 내용의 정확한 이름은 종교가 아니라 율법주의, 공로주의, 형식주의다. 표적을 잘못 부르면 표적 옆에 있던 것까지 함께 부서진다. 부서지는 것이 셋이다.

첫째, 자기 진단의 언어가 사라진다. 교회에서 반복되는 문제들 가운데 상당수는 종교 제도의 문제로 설명될 때 가장 정확하게 설명된다. 성직 권위의 신성화, 내부자 보호, 재정의 불투명, 담임직 세습. 이것들은 신학적 오류이기 전에 신성함을 두른 조직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종교가 아니다’는 이 설명 도구를 미리 폐기한다. 종교가 아니면 종교사회학적 진단의 대상도 아니게 되고, 남는 설명은 개인의 타락이나 외부의 공격뿐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2026년 2월 27일 발표한 여덟 번째 사회적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9.0%,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5.4%였다. 2023년 일곱 번째 조사의 21.0%보다 낮아진 값이다. 같은 조사에서 목회자의 정치 참여에 반대한다는 응답은 88.5%였고, 기독교인 응답자 안에서도 83.0%였다. 2023년 조사에서는 한국교회가 교회 밖 비판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응답이 80%였다. 불신의 원인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 행위로 지목되고 있으며, 그 지목을 받아들일 언어를 미리 없앤 상태다.

둘째, 제도가 함께 약해진다. 종교라는 말이 부정어가 되면 그 말이 실제로 가리키는 것들이 동반 의심 대상이 된다. 예배의 형식, 성례, 신조, 교회 정치, 치리, 목회 훈련. 이것들은 정의상 종교적 장치다. 남는 것은 개인의 내면이고, 관계가 건강한지 판정하는 기준은 각자의 느낌이 된다. 느낌이 기준인 신앙은 느낌이 식을 때 근거를 잃는다.

셋째, 반대하려던 세속성과 형태가 같아진다. “종교는 싫지만 영성은 좋다”는 세속의 정식과 “종교가 아니라 관계다”라는 신자의 정식은 구조가 동일하다. 둘 다 제도를 걷어내고 개인의 진정성을 남긴다. 제도에 대한 불신과 내면의 진실성에 대한 신뢰는 후기 근대 서구가 종교를 대하는 표준 태도이고, 이 구호는 그 태도의 신자 버전이다. 가장 반세속적으로 들리는 문장이 실은 가장 근대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이 이 구호가 탈종교화 국면에서 오히려 자주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통계상 후퇴를 범주 자체의 무효를 주장해 상쇄하려는 반응이다.

그래서 답은 무엇인가

세 질문에 각각 답할 수 있다. 법·제도에서 기독교는 종교이고, 교회는 그 지위를 스스로 요청해 왔다. 학문에서 기독교는 종교이며, 그 범주가 어느 전통에도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다는 비판까지 포함해 다른 전통과 동일한 조건에 놓인다. 신학에서도 기독교는 종교다. 다만 자기 안의 우월함으로 참된 종교가 아니라, 계시에 의해 참되다고 선언되는 종교다.

진리 주장은 범주를 이탈해서 확보되지 않는다. 기독교의 배타적 주장들, 곧 성육신과 대속과 부활의 역사성은 종교라는 범주 안에서 검증되거나 반박된다. 범주 밖으로 나가는 문장은 그 주장을 강화하지 않고 논의에서 이탈시킨다. 이탈은 승리가 아니다. 다른 전통과 같은 테이블에 앉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테이블 밖의 자리뿐이다.

앞으로 12~36개월

종교라는 말을 내주는 것보다 되찾는 편이 얻는 것이 많다. 야고보서의 정의로 돌아가면 그 말은 환난 중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일을 가리킨다. 그 정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기독교가 종교인지를 다툴 이유가 없어지고, 대신 답해야 할 질문이 남는다. 그 종교는 정결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