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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연구

존재에 대한 동의 —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의 구조와 균열

절대 주권과 거룩의 아름다움이라는 두 축이 어떻게 하나의 체계를 이루었고, 그 체계가 어디서 값을 치렀는가. 「의지의 자유」에서 노예 매매 영수증까지, 18세기 뉴잉글랜드 목사의 사유를 그 내부 논리와 파열점에서 읽는다.

2026년 8월 10일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이름은 대개 설교 한 편으로 기억된다. 1741년 7월 8일 코네티컷 엔필드에서 전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다. 신명기 32장 35절을 본문으로, 거미를 불 위에 매달아 든 손의 이미지를 써서 회중을 통곡에 이르게 한 그 설교는 곧 보스턴에서 인쇄되었고, 이후 미국 문학 선집에 반복 수록되면서 청교도 신학 전체의 초상으로 굳었다. 그러나 이 설교는 그의 저작 세계에서 대표작이 아니다. 예일대학출판부가 1957년부터 2008년까지 펴낸 비평판 전집은 스물여섯 권이고, 예일 조나단 에드워즈 센터는 여기에 활자화되지 않았던 마흔일곱 권 분량을 온라인으로 추가 공개했다. 지옥 설교는 그 방대한 자료의 얇은 한 겹이다.

01지옥 설교 한 편이 가린 스물여섯 권

수용의 왜곡은 우연이 아니다. 엔필드 설교는 짧고, 자족적이며, 인용하기 쉽고, 무엇보다 근대적 독자가 청교도에게 기대하는 그림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반면 그의 주저들은 길고, 논증이 층층이 쌓이며, 상대 저자의 문장을 인용해 조목조목 반박하는 18세기 논쟁문의 형식을 취한다. 「의지의 자유」는 원제부터 도덕적 행위성·덕과 악·상벌·칭찬과 비난에 본질적이라 여겨지는 의지의 자유에 관한 현대의 통념에 대한 세밀하고 엄정한 탐구라는 긴 제목이다. 이런 글은 선집에 실리지 않는다.

그 결과 통용되는 두 가지 상반된 요약이 함께 살아남았다. 하나는 그를 공포로 회중을 몰아붙인 지옥 설교자로 압축하고, 다른 하나는 부흥운동의 옹호자, 감정의 신학자로 세운다. 두 요약 모두 그의 논증 구조를 통과하지 않고 만들어졌으며, 둘 다 틀린 지점이 같다. 에드워즈에게 두려움도 감정도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그가 평생 씨름한 문제는 무엇이 참된 것인지 판별하는 기준이었고, 그 판별 기준을 세우기 위해 그는 형이상학·인식론·윤리학·종말론을 하나의 회로로 엮었다.

02두 축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방식

에드워즈 연구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정리는 그의 저작 전체가 두 주제의 전개라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이 지닌 아름다움이다. 첫째 주제는 신학적 결정론, 기회원인론, 그리고 물체는 감각 관념의 집합이고 유한한 정신은 지각의 연쇄일 뿐이라는 존재론으로 표현된다. 둘째 주제는 창조의 목적론과 참된 덕·참된 아름다움에 관한 이론으로 표현된다.

이 두 축을 별개의 관심사로 읽으면 그의 체계는 이해되지 않는다. 두 축은 각자 상대를 요구한다. 주권만 세우면 하나님은 임의적 권력자가 되고, 아름다움만 세우면 하나님은 취향의 대상이 된다. 에드워즈의 해법은 주권의 내용을 아름다움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주권적인 이유는 그가 존재의 총합이기 때문이고, 그 총합이 사랑받을 만한 이유는 그것이 자애(慈愛, benevolence)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결정론 논증과 미학 논증은 같은 명제의 두 면이 된다.

두 축이 하나로 접히는 문장

「참된 덕의 본질」에서 아름다움은 존재가 존재에 동의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에게 동의하고, 그 동의의 범위가 존재 전체에 미칠 때 비로소 참된 아름다움이 된다. 하나님은 존재의 으뜸 부분이므로, 존재 전체에 동의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게 된다.

이 정의 하나가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동시에 결정한다.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이 존재 일반이라는 명제가 참이 아니면, 윤리학의 결론인 사적 체계에 대한 사랑은 참된 덕이 아니다가 성립하지 않는다. 거꾸로 윤리학의 결론을 포기하면 주권 논증은 근거를 잃는다.

03의지는 최강의 동기다 — 「의지의 자유」의 논증 기계

1754년의 「의지의 자유」는 아르미니우스주의 계열 저자들, 특히 대니얼 휘트비(Daniel Whitby), 토머스 처브(Thomas Chubb), 아이작 와츠(Isaac Watts)를 표적으로 삼는다. 에드워즈가 무너뜨리려 한 것은 의지의 자기결정력이라는 개념이다. 그가 보기에 이 개념이 유지되면 개혁파 신학은 원죄·은혜의 주권·선택 교리 전체에서 방어선을 잃는다. 그는 그 점을 명시적으로 적었다. 상대가 자기결정력을 지켜내면 그것은 함락되지 않는 성채가 된다는 것이다.

논증은 세 갈래로 진행된다.

첫째, 자기결정 개념의 내적 붕괴. 의지가 스스로를 결정한다는 말은 두 가지 중 하나를 뜻할 수밖에 없다. 의지 작용에 또 다른 자유 의지 작용이 선행한다는 뜻이라면 무한 후퇴에 빠진다. 의지 작용에 충분한 원인이 없다는 뜻이라면 그 작용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되고, 우연히 일어난 것은 사람을 더 낫게도 더 나쁘게도 만들지 못한다. 에드워즈는 여기서 백조나 나이팅게일이 우연히 앉았다고 그 나무가 더 나은 나무가 되지 않고, 방울뱀이 자주 기어 넘었다고 그 바위가 더 악한 바위가 되지 않는다는 비유를 쓴다.

둘째, 통속적 용법과 철학적 용법의 혼동 지적. 일상어에서 필연은 아무리 원해도 어쩔 수 없는 상태를 뜻하고, 이런 필연은 실제로 책임을 면제한다. 그러나 인과적 필연은 이와 다르다. 굳어진 습관이나 깊은 원한이 악의적 행동을 인과적으로 필연화했다 해도, 그 사람이 달리 선택했더라면 달리 행동했으리라는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자유라는 말 역시 일상어에서는 자기 선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힘과 기회만을 뜻하며, 그 선택이 어디서 왔는지는 포함하지 않는다.

셋째, 동기와 예지로부터의 논증. 의지 작용은 곧 가장 강한 성향이므로, 우세한 동기가 없는 상태에서 선택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우세한 동기가 있다면 의지는 그것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그렇지 않다면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개의 서로 반대되는 우세한 성향을 가져야 한다. 예지 논증은 더 강하다. 미래 우연 사건은 자명하지도 증명 가능하지도 않으므로 원리상 인식될 수 없다. 하나님의 미래 인식이 완전하다면, 어떤 미래 사건도 진정한 의미에서 우연이 아니다.

자연적 불능과 도덕적 불능이 갈라지는 자리

에드워즈의 실천적 무기는 이 구분이다. 손발이 결박된 사람은 자연적 불능 상태에 있고 책임이 면제된다. 반면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이 없어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도덕적 불능 상태에 있고, 그 불능 자체가 유죄의 내용이다. 오히려 악의적 습성이 굳은 사람은 더 비난받을 만하다고 판정된다. 필연이 언제나 면책한다면 죄로 기울어진 성향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면책해야 하는데, 실제 도덕 판단은 그 반대로 움직인다는 것이 그의 반박이다.

다만 이 구분에는 대가가 있다. 두 불능을 가르는 기준은 의지가 곧 최강의 동기라는 그 자신의 정의에 의존한다. 의지를 그렇게 정의하면 도덕적 불능은 정의상 의지 안쪽의 사태가 되어 면책 사유에서 자동으로 배제된다. 상대가 문제 삼은 것은 바로 그 정의였으므로, 이 대목의 논증은 상대의 전제를 반박하기보다 자기 전제로 다시 진술하는 구조에 가깝다. 20세기 이후 자유의지 논쟁에서 이 지점이 반복해서 재검토된 이유다.

예지 논증은 또 다른 값을 치른다. 그것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언제나 가장 적합하고 최선인 것을 행하며, 그 행위가 필연적이라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한 것도 필연이 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자기 충만을 유출하려는 본성적 경향이 포함되며 그 선하심의 발휘가 저지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두 명제를 결합하면 하나님은 창조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아가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결론이 따라온다. 에드워즈 본인은 이 결론을 곤란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인정한 자유는 대안을 알고, 그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으며, 외부에 강제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정확히 행하는 자유였고, 하나님은 그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그러나 이는 신적 자유를 전통적 유신론과 다른 방식으로 규정한 것이며, 이후 개혁파 정통 내부에서 그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논의가 반복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04아담과 후손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제정이다

1758년의 「원죄론」은 노리치의 존 테일러(John Taylor)를 상대한다. 테일러의 반론은 단순하고 강력했다. 도덕적 덕은 그 본성상 도덕 행위자의 선택과 동의를 함축하므로,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교리는 도덕 개념 자체와 충돌한다는 것이다. 태어나기도 전에 저지른 일에 대해 유죄일 수는 없다.

에드워즈의 응답은 전가 개념을 손보는 대신 동일성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는 것이었다. 그가 「마음에 관하여」에서 전개한 논지에 따르면, 종(種)과 부류는 우리의 분류 방식이고, 그 분류는 우리의 필요·관심과 세계의 성격에 의존한다. 하나님이 시공간 세계의 모든 특성을 결정했다면 무엇이 하나의 종으로 셈해지는지도 결정한 것이며, 사물의 동일성 기준은 그 종에 따라 정해지므로 결국 동일성 기준의 근거는 하나님이다. 한 사람이 연속하는 순간들을 통과해 같은 사람으로 남는 것도 자연의 사실이 아니라 신적 제정의 결과다.

여기서 결론이 나온다. 아담과 그 후손이 상벌의 목적상 하나로 셈해지도록 하나님이 배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담의 죄는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죄다. B. B. 워필드는 이 논지를 정리하면서, 에드워즈에게 인류가 하나인 방식은 한 개인의 생애가 연속하는 순간들 속에서 하나인 방식과 같은 종류의 신적 제정에 의한 것이라고 요약했다. 즉 전통적 개혁파의 즉각적 전가론보다 더 강한 주장이며, 동시에 그 통일성이 사물의 본성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임의적 제정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훨씬 위험한 주장이다.

임의적 제정이 값을 치르는 자리

이 해법은 두 방향에서 압박을 받는다. 첫째, 동일성이 신적 제정의 산물이라면 심판과 보상의 대상이 되는 인격의 견고함도 같은 근거 위에 놓인다. 원죄 문제를 풀기 위해 동일성을 유연하게 만들면, 종말론적 심판에서 요구되는 동일성의 강도가 함께 약해진다.

둘째, 이 논증은 뒤에서 볼 기회원인론과 지속적 창조에 의존한다. 각 순간의 존재가 하나님의 직접적 산출이라면, 죄의 저작자 문제는 완화되기는커녕 첨예해진다. 앨버트 앨런 하지 이후 프린스턴 계열은 이 대목에서 임의적 제정에 근거를 두는 설명 방식을 정면으로 문제 삼았고, 현대 연구에서도 에드워즈의 혁신적 논증이 테일러의 합리주의적 전제를 너무 많이 수용한 결과 실패했다는 평가가 제출되어 있다.

05원인도 실체도 하나뿐이라는 결론

에드워즈의 형이상학은 주권 교리를 존재론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는 참된 원인과 일상적 의미의 원인을 구분한다. 일상적 원인은 그것이 있고 나서 다른 것이 따라 나오는 무엇이다. 이런 원인은 참된 원인이 아니다. 이유는 세 가지다. 이차 원인은 결과와 시간적·공간적으로 떨어져 있고, 참된 원인은 자기가 없는 시간과 장소에 결과를 산출할 수 없다. 참된 원인은 결과를 필연화하지만 이차 원인은 그렇지 않다. 이전 순간에 색이나 저항이나 사유가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다음 순간에도 같은 것이 있으리라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차 원인이 참된 원인이라면 결과를 산출하기에 충분해야 하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활동은 잉여가 된다.

하나님은 이 세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시공간 안에 있지 않으므로 활동과 결과 사이에 간격이 없고, 전능하므로 그의 의지는 필연적으로 효력을 가지며, 다른 인과적 능력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참된 원인은 하나뿐이고, 물을 끓이는 일 같은 통상적 인과는 하나님이 자기 관행적 방식을 표현하는 법칙에 따라 결과를 산출하는 계기일 뿐이다.

실체에 대해서도 같은 논법이 적용된다. 초기 논고 「원자에 관하여」에서 그는 물질적 실체 개념이 스스로 존립하며 고형성과 여타 물리적 성질을 아래에서 받쳐 주는 무엇의 개념이라고 정리한 뒤, 그 조건을 충족하는 것은 하나님뿐이라고 결론한다. 물체의 관념은 색과 저항의 관념으로 분해되고, 색이 정신 안에만 있다는 것은 당대에 이미 합의된 바였으며, 저항은 저항의 사례이거나 저항하는 성향이다. 사례는 관념의 성질이고 성향은 하나님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하겠다는 안정적 의도다. 그러므로 세계는 관념적이다. 정신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영이라 부르는 것은 법칙에 의해 연결된 지각들의 구성과 연쇄에 지나지 않는다.

만유내재신론 혐의와 세 갈래 해석

하나님이 사물의 유일한 실체라는 명제는 곧바로 범신론 혐의를 불렀다. 에드워즈 연구자들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분이 그의 텍스트에 실재한다고 응답해 왔으나, 이 응답만으로는 혐의가 해소되지 않는다. 역사적 범신론들도 신을 자연 그 자체와 동일시하지 않고 자연의 실체·본질·내적 존재·힘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이 세계의 실체라고 말할 때 그가 뜻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 어떤 존재자의 존재와 성격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것이며, 그의 모형은 전체와 부분이나 실체와 속성이 아니라 행위자 인과다.

이 해석 문제는 최근 수십 년 연구의 중심 쟁점이었다. 이상현(Sang Hyun Lee)은 1988년 저작에서 에드워즈의 존재론을 실체가 아니라 성향(disposition)을 기본 범주로 삼는 체계로 읽어 냈고, 이 독해는 오랫동안 표준이 되었다. 스티븐 홈스(Stephen R. Holmes)는 2003년 응답에서 이상현이 성향 존재론의 증거로 든 자료들이 신적 단순성과 순수 활동(actus purus) 교리, 삼위일체의 심리학적 유비,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와 경세적 행위의 강한 구분으로 더 잘 설명된다고 반박했다. 올리버 크리스프(Oliver D. Crisp)는 2010년 논문에서 이상현 해석이 여러 핵심 지점에서 결함이 있다고 논증하고, 에드워즈를 순수한 성향 존재론자가 아니라 관념론적 기회원인론자로 규정했다.

해석 논쟁이 실제로 겨루는 것

표면상 이 논쟁은 문헌학적이다. 그러나 실질적 쟁점은 에드워즈를 현대 신학에 이식 가능한 자원으로 쓸 수 있는지 여부다. 성향 존재론으로 읽으면 그는 과정신학·관계신학과 대화할 수 있는 근대 이후의 사상가가 된다. 관념론적 기회원인론자로 읽으면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플라톤주의 전통의 후기 국면에 속한 인물이 되고, 그의 난점들은 그 전통 전체가 공유하는 난점으로 재배치된다.

같은 텍스트가 두 방향으로 읽히는 이유는 에드워즈 자신이 이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통합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잡록」(Miscellanies)의 수천 항목은 노트이며 출판을 전제한 정리가 아니다. 인용 가능한 문장이 양쪽에 다 있다는 사실은 해석자의 실력 문제가 아니라 자료의 성격 문제다.

06아름다움은 존재가 존재에 동의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미학은 취향론이 아니라 존재론이다. 「마음에 관하여」의 첫 항목은 뛰어남(excellency)이 한 존재가 다른 존재와 닮음에 있다고 규정한다. 단순한 균등이나 비례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닮음이며, 이것이 뛰어남의 보편적 정의로 제시된다. 타인을 사랑하거나 그 복지를 능동적으로 원하는 자는 그에게 동의하는 것이다.

여기서 1차 아름다움과 2차 아름다움이 갈린다. 동의가 존재 일반을 향할 때만 그것은 포괄적·보편적이며, 따라서 참된 자애만이 참으로 아름답다. 2차 아름다움은 이 참된 아름다움의 상(像)이자 유사물로, 대칭·조화·비례, 즉 규칙성에 있다. 잘 정돈된 사회의 아름다움, 여러 사유와 개별 의지들이 하나의 목적으로 수렴하는 지혜의 아름다움, 약속을 하고 지키는 행위와 정황의 자연적 적합성, 건물과 꽃과 무지개의 아름다움이 그 예다.

이 구분이 윤리학으로 넘어가면 강한 결론이 나온다. 참된 덕은 본질적으로 존재에 대한 자애이며, 나아가 그 자애 자체의 내재적 뛰어남을 즐거워하는 만족(complacence)까지 포함한다. 하나님이 존재 중 가장 큰 자이며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자이므로, 참된 덕은 원리상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에 있다. 따라서 특정한 사람이나 사적 체계—자기 자신, 가족, 국가, 심지어 인류 전체—에 대한 결심과 자애는, 그것이 존재 일반에 대한 자애에 의존하거나 종속되지 않는 한 참된 덕의 본성을 갖지 않는다.

동정심이 참된 덕에서 배제되는 논리

에드워즈는 양심·자기애·부모의 애정·연민을 차례로 검토하고, 이들이 대체로 자기애의 변형이거나 적어도 존재 일반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정한다. 연민은 과도하거나 부당해 보이는 고통을 겪는 자를 향하므로 그 대상이 존재 일반의 일부에 국한되고, 일반적 자애에 의존하지 않으므로 그것과 충돌할 수 있다. 연민이 재판관을 부정의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예시다.

그가 이들을 악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류의 보존과 안락한 존속에 기여하므로 없는 편보다 훨씬 낫다. 논점은 그 선함이 참으로 도덕적인 선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은 뚜렷하다. 자연적 덕들은 자기애에 오염되어 있거나 존재 일반에 미치지 못하므로 참된 덕의 위조품이며, 참된 덕은 초자연적 선물이다.

이 대목은 그의 체계에서 가장 논쟁적인 자리다. 프랜시스 허치슨과 섀프츠베리로 대표되는 당대 도덕감각론은 모든 행위가 자기애에서 나온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데 힘을 쏟았다. 에드워즈는 그들의 결론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결정적 지점에서 갈라진다. 양심적이고 타인 지향적인 행동 대부분이 실제로 자기애의 한 형태이며, 설령 아니라 해도 그런 동기에서 나온 행위는 진정으로 유덕하지 않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도덕감각론의 어휘를 쓰면서 그 실천적 낙관을 제거했다. 애국심과 가족애를 덕의 목록에서 격하시키는 논증은 18세기 뉴잉글랜드에서도 불편하게 읽혔고, 이후 그의 제자들이 이 논증을 사회 개혁의 동력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변형이 일어난다.

07창조는 충만의 유출이며 피조물의 행복은 그 일부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두 개의 명제를 조화시키는 작업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잡록」 초기 항목이 이미 말한 대로 행복이 창조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두 명제를 대립시키면 하나님의 자기영광 추구는 피조물의 이익과 경쟁 관계에 놓인다.

에드워즈의 해법은 영광의 내용을 분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내적 영광과 충만의 외적 표현이자 유출이며, 여기에는 네 요소가 포함된다. 하나님의 완전함이 발휘되어 결과를 산출함, 그 내적 영광이 피조된 이해력에 나타남, 무한한 충만이 피조물에게 전달됨, 그리고 피조물이 하나님을 높이 여기고 사랑하며 그 안에서 만족하고 기뻐함이다. 그런데 첫째와 셋째 사이에는 존재론적 구분이 없다. 완전함을 발휘한 주된 결과가 곧 충만의 전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는 둘째와 넷째를 포함한다. 결국 네 요소는 하나의 사태를 여러 관점에서 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추구할 때 피조물의 선은 그 목적의 수단이 아니라 부분이다. 피조물의 행복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 안에서 기뻐하는 데 있고, 그것이 궁극 목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궁극 목적, 곧 내적 영광의 외적 전달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유출(emanation)과 환류(remanation)의 회로로 자주 요약된다. 충만이 흘러나가 피조물에게 이르고, 피조물의 인식과 사랑과 기쁨이 되어 다시 하나님께 돌아간다.

08감정론은 부흥의 옹호가 아니라 부흥의 심사 기준이었다

1746년의 「신앙감정론」은 통상 부흥운동의 변증서로 소개되지만, 그 기능은 오히려 심사에 가깝다. 세 부분 구조가 이를 보여 준다. 1부는 감정의 본성과 신앙에서의 중요성을 다루고, 2부는 신앙감정이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 열두 가지를 열거하며, 3부에서 비로소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을 구별해 주는 열두 표지를 제시한다. 즉 책의 절반은 부흥 현장에서 회심의 증거로 통용되던 것들을 자격 미달로 판정하는 데 쓰인다.

여기서 번역과 개념의 문제가 발생한다. 에드워즈의 affections는 감정이나 정서가 아니다. 그는 영혼의 두 기능을 구분한다. 지각하고 사변하는 이해력과, 기울거나 물러서며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성향 내지 의지다. affections는 후자에 속하며, 성향과 의지의 더 활발하고 감각 가능한 발휘로 정의된다. 성향이 행동을 결정할 때 그것은 의지라 불리고, 정신이 성향에 의해 움직여질 때 그것은 마음이라 불린다.

감정과 정념이 갈라지는 자리

정념(passions)은 동물적 기운에 미치는 효과가 더 격렬하고 정신이 더 압도되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다. 감정은 강한 성향이지만 정신을 지휘권 아래 남겨 둔다. 정념이 의지를 노예로 만드는 반면, 감정은 의지의 발휘라는 정리가 이 구분을 압축한다.

이 구분을 놓치면 결론이 정반대로 뒤집힌다. 에드워즈를 종교에서 감정을 복권시킨 사람으로 요약하는 서술이 흔한데, 그의 실제 논지는 신체적 격동·눈물·환상·성경 구절의 갑작스러운 떠오름·말의 유창함 같은 것들이 어느 쪽 증거도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열두 표지의 마지막이자 가장 긴 항목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이다. 최종 판별 기준은 경험의 강도가 아니라 지속되는 삶의 방향이다.

인식론적 근거는 마음의 감각 이론이다. 성령이 내주해 마음이 새로워진 자는 존재 일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새로운 영적 감각의 토대가 된다. 이 감각의 직접적 대상은 거룩의 아름다움이며, 이때 생기는 것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관념들을 확대·변형·합성해서는 산출될 수 없는 새로운 단순 관념이다. 그가 이것을 감각이라 부른 이유는 네 가지다. 영적 아름다움의 파악은 추론을 거치지 않고 비자발적이며, 만족과 즐김을 포함하고, 새로운 단순 관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로크와 허치슨의 어휘가 여기서 신학적 목적에 동원된다.

이 이론에는 자기지시적 위험이 있다. 참된 아름다움을 분별하려면 참된 자애가 있어야 하고, 참된 자애가 있는지 알려면 그 아름다움을 분별할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에드워즈는 이 순환을 네 단계 논증으로 끊으려 한다. 자애는 사물의 본성에 부합하고, 자애는 자애를 기뻐하며, 자애를 기뻐함이 곧 그 영적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이므로, 구속된 자의 영적 지각은 자기 마음 안의 것 이상을 표상하는 참된 지각이다. 논증의 첫 전제, 곧 세계가 무한하고 전능한 사랑을 유일한 실체이자 원인으로 갖는 정신과 관념의 체계라는 명제는 앞 절의 형이상학에서 온다. 미학이 인식론을 지지하고 인식론이 형이상학에 의존하며 형이상학이 다시 미학의 정의에 기대는 구조다. 이 회로가 그 체계의 강함이자 취약함이다.

09성찬 자격 논쟁 — 신학이 강단을 잃게 한 자리

1749년의 「겸손한 탐구」는 이 인식론을 교회 실무에 적용한 결과다. 외조부 스토더드는 성찬 참여 자격을 넓게 열어 두는 관행을 확립했다. 에드워즈는 그 기준을 거부하고, 지원자의 신앙 경험에 근거한 구원 신앙의 공적 고백을 성찬뿐 아니라 교회 회원 자격의 요건으로 요구했다. 감정론의 논리적 귀결이었지만 실무적으로는 회중의 상당 부분을 심사 대상으로 만드는 조치였다.

1750년, 그는 한 표 차이로 해임된다. 북미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청빙을 거절한 뒤 1751년 스톡브리지 원주민 선교지로 물러났고, 다루기 어려운 두 회중을 맡고 원주민 소년 기숙학교를 관리하면서 「의지의 자유」·「원죄론」·「두 편의 논고」를 썼다. 그의 최대 저작들이 변방의 선교 초소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목회 현장과 정치적 방어의 부담에서 벗어난 시간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배치는 저작의 형식을 규정했다. 그는 만날 수도 즉시 응답을 받을 수도 없는 영국의 저자들을 상대로 글을 썼고, 그 결과 상대 문장을 길게 인용해 조목조목 논파하는 형식이 굳어졌다. 「의지의 자유」의 난해함은 사유의 난해함만이 아니라 일방적 원거리 논쟁이라는 조건의 산물이다.

10기도 합주회에서 침례교 선교회까지

에드워즈의 종말론은 그의 신학에서 가장 시대 제약적인 부분이면서 실천적 영향은 가장 넓었다. 그는 후천년설을 취했다.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복음이 세계로 확산되고 교회의 영광스러운 날이 지상에서 실현된다는 견해다. 이 입장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같은 청교도 신조에 근거가 없고, 오히려 18세기 영국의 주석 전통에서 유통되던 견해였다. 그 계열의 대표 인물이 대니얼 휘트비인데, 에드워즈는 「의지의 자유」에서 바로 그 휘트비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로 지목해 반박했다. 의지론에서 논파한 상대의 종말론을 자기 체계의 추진력으로 채택한 것이다.

1747년의 「겸손한 시도」는 스코틀랜드 목사들이 1744년 10월에 조직한 분기별 기도 모임에 관한 소식을 받은 뒤 나온 저작이다. 스가랴 8장 20~22절을 본문으로, 많은 백성과 강한 나라들이 참 하나님을 찾는 일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고 논증하고, 흩어진 교회의 지체들이 공동의 관심사에서 하나로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저자 생전에 이 책은 널리 읽히지 않았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만큼 팔리지 않았고, 「의지의 자유」만큼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신앙감정론」처럼 참된 신앙 경험의 규준이 되지도 못했다.

전파 경로는 우회적이었다. 1784년 4월, 스코틀랜드의 존 어스킨이 잉글랜드의 존 라일런드 2세에게 이 책 한 부를 보냈다. 라일런드는 그것을 존 서트클리프와 앤드루 풀러에게 돌렸다. 서트클리프는 노샘프턴셔 침례교 연합의 다음 모임에서 매달 첫 월요일 저녁을 성령의 부으심과 신앙의 부흥을 위한 기도에 떼어 놓자고 제안했고, 스무 곳가량의 교회 대표들이 이를 채택했다. 서트클리프는 1789년 서문을 붙여 영국판을 재출간했다. 1792년 침례교 선교회가 설립되고 윌리엄 캐리가 인도로 떠난다. 풀러는 그 재출간이 선교회 창립으로 이어진 분위기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종말론이 조직을 만드는 회로

이 경로에서 작동한 것은 예언 해석의 세부 내용이 아니라 기대의 구조다. 세계의 회심이 재림 이전에 일어난다면, 선교는 종말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종말을 향해 일하는 일이 된다. 여기에 「의지의 자유」의 자연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 구분이 결합되면, 회심하지 않은 자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 논리적으로 정당화된다. 당시 영국 침례교 일부를 지배했던 고등 칼뱅주의는 바로 그 촉구의 정당성을 부정했고, 풀러가 1780년대에 그것을 반박할 때 쓴 도구가 에드워즈의 구분이었다.

다만 이 낙관에는 반증이 예정되어 있었다. 후천년설이 상정한 역사의 상승 곡선은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을 통과하며 개신교 주류에서 설득력을 잃었다. 남은 것은 종말론이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 낸 조직 형태, 곧 자발적 협회와 선교회라는 제도였다.

11자기 윤리학이 겨누지 못한 지점

에드워즈는 노예를 소유했다. 1731년 뉴포트에서 열네 살 무렵의 소녀 비너스(Venus)를 산 매매 영수증이 남아 있고, 예일 조나단 에드워즈 센터의 정리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취득한 사람은 1756년의 아이 타이터스(Titus)다. 그 외에 조지프, 리, 리아, 로즈, 수 등의 이름이 확인된다. 뉴포트는 북미 노예무역의 중심 항구였고 판매자는 노예선 선장이었다.

그가 남긴 노예제 관련 문서는 사실상 하나다. 노예 소유를 이유로 비판받던 동료 성직자를 변호하기 위해 준비한 초고이며, 독해가 쉽지 않은 상태로 남았다. 케네스 민케마의 해석에 따르면 그는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통용되던 견해, 곧 인도적으로 대우하고 기독교로 이끄는 한 노예 소유가 허용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동시에 그는 아프리카 노예무역 자체는 비판했고, 이웃의 범위를 좁게 정의해 동등한 배려의 의무를 회피하는 논법을 성경적 이웃 개념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욥기 31장 15절에 붙인 1730년대 초의 노트는 주인이 종을 학대하지 못할 가장 강력한 이유가 두 사람의 창조자가 같고 그 창조자가 둘을 같은 본성으로 지었다는 데 있다고 적는다. 그의 교회에서 흑인은 정회원으로 받아들여졌고, 1734~35년 부흥기에 그는 자기 집에서 노예로 있던 사람을 포함해 여섯 명의 흑인을 입교시켰다.

이 자료들을 그의 윤리학과 나란히 놓으면 불일치가 선명해진다. 「참된 덕의 본질」의 핵심 논증은 사적 체계에 대한 애착이 참된 덕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존재 일반에 대한 자애를 규준으로 삼는 체계에서 특정 인종·지역·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람을 소유하는 관행이 살아남을 여지는 원리상 없다. 실제로 그 귀결을 끌어낸 것은 다음 세대였다. 아들 조나단 에드워즈 2세(1745~1801)와 제자 새뮤얼 홉킨스(1721~1803)는 존재에 대한 자애라는 개념을 무관심적 자애(disinterested benevolence)로 재정식화하고, 그것을 근거로 어떤 형태의 노예제든 즉각적이고 전면적으로 폐지하라는 요구를 신생 합중국에 제출했다. 홉킨스는 대륙회의를 향해 직접 설교했다.

논리와 삶이 갈라진 구조

이 간극을 개인의 위선으로 정리하면 설명이 멈춘다. 더 설명력 있는 서술은 발화 위치다. 그는 뉴잉글랜드 회중교회 목사 집단의 일원이었고, 민케마의 정리에 따르면 1700년 이후 15년가량 사이 뉴잉글랜드의 노예 수는 400명 수준에서 4,000명 수준으로 급증했으며 노예 구매는 매사추세츠 성직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관행이 되어 있었다. 그가 문서를 남긴 유일한 계기가 동료 성직자 변호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 위치를 보여 준다. 그의 개념은 자기 집단의 관행을 향해 겨눠지지 않았고, 그 방향 전환은 스톡브리지 이후 세대, 곧 목회 기반과 이해관계가 달라진 사람들이 수행했다.

스톡브리지 선교 경험이 그의 온정주의적 전제 일부를 재검토하게 만들고 있었다는 관측도 제출되어 있다. 다만 이는 정황 판단이고, 그가 반노예제로 이동을 완료할 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남는다.

12무관심적 자애로 번역된 유산

에드워즈의 직계 후속인 신신학파(New Divinity)는 대개 예일 출신의 코네티컷 밸리 회중교회 목사들이었다. 조지프 벨러미(1719~1790), 새뮤얼 홉킨스, 스티븐 웨스트, 조나단 에드워즈 2세가 그 축을 이룬다. 이들이 스승에게서 가져간 것과 바꾼 것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

가져간 것은 하나님의 주권, 부흥 강단의 촉구를 정당화하는 의지 이론, 그리고 중생이 이기심 없는 자애를 산출한다는 확신이다. 바꾼 것은 세 가지다. 첫째, 도덕성을 자발적 발휘에만 귀속시켜 모든 거룩과 죄가 선택과 선호의 행위에 있다고 보는 원리가 강화되었다. 이 원리는 에드워즈 자신이 「원죄론」에서 테일러를 상대로 반박했던 바로 그 명제와 겹치는데, 후대 신신학파는 칼뱅주의자를 자칭하면서 이 원리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이후 프린스턴 계열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둘째, 속죄론이 형벌 대속에서 도덕 통치설로 이동했다. 조나단 에드워즈 2세가 벨러미와 웨스트의 작업을 이어 그 가장 완성된 형태를 제출했다. 셋째, 존재에 대한 자애가 무관심적 자애라는 사회 윤리로 번역되어, 시장 경제의 확산 속에서 자기 이익 추구를 죄로 규정하는 언어가 되었다.

이 번역은 대규모 조직화를 낳았다. 19세기 전반 미국에서 수백 개의 자발적 협회와 자선 단체가 세워지는 흐름에 이 언어가 동력을 제공했다. 동시에 신학적으로는 손실이 있었다.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의지론이 조정되면서, 뉴헤이븐 신학을 거쳐 결단 중심의 회심 이해로 이어지는 경로가 열렸다. 스승이 자연적 능력과 도덕적 능력을 구분해 확보하려 한 것은 촉구의 정당성이었지 인간의 자력이 아니었다.

연구사와 한국어 수용

20세기 중반 이후의 재평가는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페리 밀러의 1949년 전기가 에드워즈를 미국 지성사의 중심 인물로 재배치했고, 1957년부터 시작된 예일 비평판 전집이 자료 기반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노트와 설교 초고, 잡록이 활자화되면서 출판 저작만으로 구성된 초상이 해체되었다. 조지 마스든의 2003년 전기는 그 축적 위에서 쓰인 표준 전기다. 최근 연구의 무게중심은 형이상학 해석 논쟁에서 스톡브리지 선교, 노예제 관련 문서, 대서양 부흥의 초국적 회로 쪽으로 이동하는 추세다.

한국어 수용은 부흥과개혁사의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기획을 축으로 진행되었다. 2005년 정성욱 번역의 「신앙감정론」이 전집 1권으로 나왔고, 2016년 김찬영 번역의 「원죄론」이 4권으로 이어졌다. 다만 국내 유통은 여전히 부흥·목회·영성 쪽에 편중되어 있다. 「참된 덕의 본질」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처럼 그의 체계를 지탱하는 형이상학·윤리학 저작이 상대적으로 덜 읽히고, 그 결과 그의 감정론이 앞서 지적한 오역—affections를 정서로 읽는 독법—과 함께 소비되는 경향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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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해석 논쟁은 무엇으로 결판나는가

에드워즈에 관한 남은 쟁점 대부분은 자료가 부족해서 미결인 것이 아니라, 자료의 성격 때문에 미결이다. 세 가지를 판별 조건과 함께 정리한다.

첫째, 정통성 문제. 기회원인론·관념론·지속적 창조가 개혁파 정통의 범위 안에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크리스프는 에드워즈의 만유내재신론이 고전적 유신론과 양립 가능하며 잔여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플라톤주의 전통 전체가 동등하게 안고 있다고 판정한다. 이 판정이 유지되려면 에드워즈의 신적 단순성 이해가 개혁파 스콜라 전통과 실제로 연속적임이 텍스트로 확인되어야 한다. 최근 연구 일부가 「삼위일체 논고」를 논쟁적 맥락에서 읽어 그 연속성을 논증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반증 조건 — 「잡록」과 삼위일체 관련 미출판 자료에서 신적 단순성을 명시적으로 제한하거나 유보하는 진술이 다수 확인될 경우.

둘째, 성향 존재론 논쟁. 이상현 해석과 홈스·크리스프의 반론은 동일 텍스트에 대한 두 정합적 독해로 남아 있다. 결판의 조건은 문헌학적이다. 성향 어휘가 등장하는 대목들이 창조론 맥락에 국한되는지, 아니면 피조물의 존재 구성 자체를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일관되게 쓰이는지가 갈림길이다. 전자라면 성향은 신적 본성의 경향을 서술하는 국지적 어휘이고, 후자라면 존재론의 기본 범주다. 반증 조건 — 잡록 전체에 대한 어휘 분포 분석에서 성향 어휘가 창조·유출 맥락 밖으로 유의하게 확산되어 나타날 경우 이상현 쪽으로, 그 반대일 경우 크리스프 쪽으로 기운다.

셋째, 윤리학과 실천의 간극. 그의 윤리학이 노예제 폐지를 함축했다면 왜 본인은 그 귀결에 이르지 않았는가라는 문제다. 두 설명이 경쟁한다. 하나는 개념과 적용 사이의 시간차로 보는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사회적 위치가 적용의 방향을 차단했다고 보는 설명이다. 후자가 더 설명력이 있다고 판단할 근거는, 같은 개념을 물려받은 다음 세대가 목회 기반과 이해관계가 달라진 조건에서 즉각 폐지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반증 조건 — 스톡브리지 시기 미출판 설교·노트에서 노예제 자체를 문제 삼는 진술이 발견될 경우 첫째 설명이 힘을 얻는다.

향후 12~36개월 범위에서 예상되는 흐름은 두 갈래다. 하나는 관념론 논쟁이 분석적 신학의 하위 주제로 흡수되면서 에드워즈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논증 자원으로 인용되는 빈도가 늘어나는 것이다. 반증 조건 — 해당 계열 논문의 인용 지표가 정체하거나 감소할 경우. 다른 하나는 예일 온라인 자료의 접근성 덕분에 선교·노예제·원주민 관계 자료를 다루는 연구 비중이 계속 커지는 것이다. 반증 조건 — 신규 단행본과 학술지 특집이 여전히 「의지의 자유」 중심 형이상학 해석에 집중될 경우.

어느 쪽으로 가든 하나는 남는다. 에드워즈의 체계는 한 지점만 건드려도 전체가 움직이는 구조로 짜여 있다. 아름다움을 존재의 동의로 정의한 문장을 빼면 윤리학이 무너지고, 원인은 하나뿐이라는 결론을 빼면 원죄론이 무너지며, 감정을 성향으로 규정한 정의를 빼면 부흥 판별 기준이 무너진다. 그가 지옥 설교자로만 기억되는 것이 부정확한 이유는 그 설교가 그의 사유의 결론이 아니라 한 회로의 국지적 출력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