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의 조건
타인의 말을 알아듣는 일이 왜 원래부터 불가능에 가까웠는지, 그리고 그 불가능을 넘기던 장치를 기계에 넘긴 지금 무엇이 어긋나기 시작했는지에 관하여.
영상을 끝까지 보는 대신 요약을 시킨다. 기사를 붙여넣고 쉽게 설명해 달라고 한다.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계산이다. 하루에 흘러드는 텍스트의 양과 그중 실제로 유익한 것의 비율을 생각하면, 전부 읽는 쪽이 오히려 비합리적이다.
규모는 이미 측정되고 있다.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성인 900명의 브라우징 기록을 추적한 조사에서, 2025년 3월 구글 검색의 18퍼센트가 인공지능 요약을 띄웠고 응답자의 58퍼센트가 그런 검색을 한 번 이상 경험했다. 요약이 뜬 페이지에서 이용자가 일반 검색 결과 링크를 누른 비율은 8퍼센트, 요약이 없던 페이지에서는 15퍼센트였다. 요약 안에 달린 출처 링크를 누른 경우는 1퍼센트에 그쳤고, 요약을 본 뒤 그대로 브라우징을 끝낸 비율은 26퍼센트로 요약이 없을 때의 16퍼센트보다 높았다.
즉 요약은 원문으로 가는 통로가 아니라 원문의 대체물로 작동한다. 여기까지는 편의의 문제다. 문제가 되는 지점은 다른 데 있다. 타인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이 원래 어떤 작업이었는지를 짚어 보면, 그 작업의 어느 부분이 기계로 넘어갔고 어느 부분이 넘어가지 않았는지가 드러난다.
20세기 중반 분석철학의 한 갈래는 이상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전혀 모르는 언어를 쓰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사전도 통역도 없이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가. 윌러드 밴 오먼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은 이 상황을 급진적 번역(radical translation)이라 불렀고, 원리상 관찰 가능한 모든 자료와 양립하는 번역이 여럿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상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립적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도널드 데이비슨(Donald Davidson, 1917~2003)은 이 문제를 낯선 부족이 아니라 이웃과의 일상 대화로 옮겨 놓았다. 옆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때에도 사정은 같다. 머릿속을 열어 볼 수 없고, 그가 쓰는 단어의 뜻과 그가 믿는 바를 따로따로 확인할 수도 없다. 뜻을 알아야 믿음을 알고, 믿음을 알아야 뜻을 안다. 순환이다.
데이비슨이 이 순환을 끊은 장치가 자비의 원리(principle of charity)다. 이름은 오해를 부른다. 착하게 봐주자는 권고가 아니다. 상대가 대체로 합리적이고 그의 믿음 대부분이 참이라고 일단 놓지 않으면 해석 작업 자체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논리적 조건이다. 상대의 말이 온통 헛소리라고 전제하는 순간, 그 헛소리가 무슨 뜻인지 특정할 방법이 사라진다.
데이비슨의 논점을 풀어 쓰면 이렇게 된다. 상대를 대체로 옳다고 쳐 주는 일은 베푸는 호의가 아니라 강제된 조건이다. 그렇게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순간 이해가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라고 부를 만한 활동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서 흔히 잘못 인용되는 대목이 있다. 데이비슨은 처음에 자비를 합의의 극대화로 정식화했다가 스스로 물렀다. 나중에는 최적화(optimize)가 더 나은 단어라고 명시했다. 이유가 중요하다. 합의를 무조건 최대로 끌어올리면 상대를 나의 복사본으로 만들어 버린다. 실제 이해에는 상대가 왜 그렇게 틀렸는지 설명 가능한 오류를 배정하는 일이 포함된다. 알아듣는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의 옳음과 틀림이 어디서 갈리는지 그릴 수 있다는 뜻이다.
거짓말을 판정하려면 먼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한다. 뜻을 알려면 화자가 나와 상당 부분 같은 세계를 보고 있다고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기만 탐지는 자비의 원리를 폐기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서만 가능하다. 상대의 주장을 가장 강한 형태로 재구성했는데도 설명되지 않고 남는 잔여, 그것이 조작의 지표다. 처음부터 허수아비로 깎아 놓으면 판별의 좌표가 사라진다.
같은 구조를 독일 해석학은 다른 어휘로 발견했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는 1960년 『진리와 방법』에서 완전성의 선취(Vorgriff der Vollkommenheit)를 말한다. 어떤 글을 읽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것이 앞뒤가 맞는 하나의 의미 단위라고 미리 가정한다. 이 가정은 수정될 수 있지만 없앨 수는 없다. 처음부터 뒤죽박죽이라고 놓고 읽으면 읽히지 않는다.
가다머가 데이비슨과 갈리는 지점은 시간이다. 데이비슨의 해석은 논리적 조건이라 순간에 성립하지만, 가다머의 이해는 과정이다. 독자는 자기가 이미 가진 물음과 편견을 들고 텍스트에 들어가고, 텍스트가 되묻고, 물음이 바뀌고, 다시 읽는다. 그가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이라 부른 이 왕복에서 바뀌는 것은 텍스트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읽는 사람 자신이다. 가다머가 적용(Anwendung)이라 부른 국면이 그것이다. 이해는 정보를 얻는 일이 아니라 그 정보 앞에서 자기 상황이 재규정되는 일이다.
이 관점에서 요약본의 손실은 분명하다. 요약은 왕복이 끝난 뒤의 결과물만 전달한다. 정보는 남고 적용은 남지 않는다. 다만 가다머의 전제 자체가 지금은 취약점이기도 하다. 텍스트가 정합적이고 참되리라는 선취는, 광고와 선전이 정확히 겨냥하는 지점이다.
그 취약점을 파고든 사람이 폴 리쾨르(Paul Ricœur, 1913~2005)다. 그는 1965년 프로이트 연구서에서 해석을 두 갈래로 갈랐다. 하나는 텍스트가 건네는 의미를 받아 회복하려는 신뢰의 해석학이고, 다른 하나는 텍스트 배후의 이해관계·동기·무의식을 캐내려는 의심의 해석학(herméneutique du soupçon)이다. 후자의 전형으로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들며 의심의 대가들이라 불렀다.
리쾨르의 주장은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 아니었다. 두 태도가 순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심만 남으면 모든 텍스트가 배후 동기로 환원되고, 읽을 내용은 사라지고 폭로할 정체만 남는다. 지금 미디어 환경은 그 한쪽이 기본값이 된 환경이다. 그리고 이 조건 아래에서는 요약이 오히려 합리적 대응이 된다. 어차피 관건이 내용이 아니라 의도라면, 내용은 압축해도 손해가 없기 때문이다.
이 계보를 칸트와 무관하다고 잘라 내면 놓치는 것이 있다. 흔히 인용되는 정언명령, 곧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정식은 여기서 별 소용이 없다. 정작 관련 있는 대목은 1790년 『판단력비판』 40절이다. 칸트는 거기서 공통감(sensus communis)을 논하며 세 준칙을 든다. 스스로 생각할 것, 모든 타인의 자리에서 생각할 것, 일관되게 생각할 것. 두 번째가 확장된 사유방식(erweiterte Denkungsart)이다.
주목할 점은 이것이 실제로 타인을 만나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에게 이 작업은 상상 속에서 수행된다. 내 판단을 타인의 가능한 판단에 비추어 검사하는 반성 절차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 대목을 칸트 미학이 아니라 칸트의 미출간 정치철학으로 읽었고, 판단이란 남의 자리에서 생각해 보는 능력이라는 명제를 여기서 끌어냈다.
이 구조는 매개를 원리상 허용한다. 상상 속의 타인은 어차피 표상이므로, 그 표상이 어디서 왔는지는 열려 있다. 문제는 표상의 출처가 통계적 평균일 때 생긴다. 대표적 타인의 자리에는 설 수 있어도, 지금 내 앞에서 말하고 있는 이 특정한 타인의 자리에는 서지 못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이 계보 전체에 반대편에서 서 있다. 그가 보기에 서구 철학의 기본 동작은 타자를 내 인식 틀 안의 항목으로 만드는 것, 곧 주제화이자 전체화였다. 타자의 타자성은 이해되는 순간 사라진다. 그에게 윤리는 이해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이해에 앞서며, 타자의 얼굴은 파악의 대상이 아니라 응답의 요구다.
요약이라는 행위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내놓을 사람이 그다. 요약은 타자의 말을 나의 처리 가능한 규격으로 축소하는 작업의 순수한 형태다. 동시에 그는 이 시대에 가장 무력하기도 하다. 상대가 나를 속이려 들 때 무엇을 하라는 지침이 레비나스에게는 없다. 무조건적 응답 책임이 출발점인 사유에서 방어는 주제가 되지 못한다.
이제 재해석의 자리다. 요약을 시키는 행위는 이해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자비의 원리는 끄고 켤 수 있는 스위치가 아니므로, 그것을 안 쓰는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바뀌는 것은 수행 주체다.
영상을 모델에 넣으면 화자의 말이 대체로 합리적이라고 전제하고 정합적 의미 단위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모델이 한다. 이용자가 해석하는 대상은 화자가 아니라 모델의 출력이다. 이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대상이 한 칸 옮겨 간 것이다. 그리고 그 새 대상은 원본보다 훨씬 매끄럽고 정합적이다. 애초에 정합적으로 만들어진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자비의 원리가 옮겨 간 자리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측정된 자료가 있다.
우터 페터르스(Uwe Peters, 위트레흐트 대학)와 벤저민 친이(Benjamin Chin-Yee, 웨스턴 대학·케임브리지 대학)는 2025년 4월 『로열 소사이어티 오픈 사이언스』에 대규모 측정을 발표했다. 열 개 주요 모델이 생성한 4,900건의 과학 논문 요약을 원문과 대조한 연구다.
연구진이 든 전형적 변형은 이런 것이다. 이 연구의 조건 아래에서 이 치료가 효과가 있었다는 서술이, 이 치료는 효과가 있다는 서술로 바뀐다. 사실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는데 주장의 적용 범위가 넓어졌다.
원인 진단도 나와 있다. 하나는 학습 자료인 과학 저널리즘 자체가 과일반화를 안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용자가 널리 적용 가능하고 도움이 되어 보이는 답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후자가 구조적이다. 단서를 잔뜩 단 요약은 덜 유용해 보이고, 덜 유용해 보이는 출력은 선호되지 않는다. 정밀함을 깎아 내는 압력이 상호작용에서 계속 작동한다.
완전성의 선취란 텍스트가 정합적이라는 수정 가능한 전제였다. 요약 모델은 이 전제를 수정 불가능한 출력 규격으로 바꾼다. 원문이 흔들리고 유보하고 자기모순을 안고 있어도 출력은 매끄러운 단일 의미로 나온다. 텍스트의 균열은 해석의 실패가 아니라 해석의 재료였는데, 그 재료가 산출물에서 사라진다.
유럽방송연맹(EBU)이 조율하고 BBC가 주도한 2025년 10월 조사는 18개국 22개 공영방송이 참여해 챗지피티·코파일럿·제미나이·퍼플렉시티의 뉴스 응답 3,000여 건을 14개 언어로 평가했다. 응답의 45퍼센트에 중대한 문제가 하나 이상 있었고,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있는 응답은 81퍼센트였다. 가장 큰 원인은 출처 처리로 31퍼센트를 차지했고, 사실 정확성 문제는 20퍼센트였다.
같은 조사에서 함께 발표된 영국 성인 대상 설문이 더 중요하다. 3분의 1이 조금 넘는 응답자가 인공지능이 만든 요약의 정확성을 완전히 신뢰한다고 답했고, 35세 미만에서는 그 비율이 절반에 가까웠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의 2025년 디지털 뉴스 리포트에 따르면 온라인 뉴스 이용자의 7퍼센트, 25세 미만에서는 15퍼센트가 이미 인공지능 어시스턴트로 뉴스를 접한다.
여기서 리쾨르의 순환이 어긋난 모양이 드러난다. 의심은 원본에 집중되고 신뢰는 요약에 집중된다. 기사와 영상은 의도를 의심하며 보면서, 그 의도를 걷어 낸다고 여겨지는 중간 계층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간 계층은 중립적 통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해석이다.
마이크로소프트 리서치와 카네기멜런 대학 연구진이 2025년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학회(CHI)에서 발표한 조사는 주 1회 이상 생성형 도구를 쓰는 지식 노동자 319명에게 936건의 실제 사용 사례를 받았다. 결과는 두 방향의 상관이었다. 도구에 대한 신뢰가 높을수록 비판적 검토를 덜 했고,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높을수록 더 했다. 후자는 인지적 비용이 더 든다는 응답과 함께였다.
같은 조사는 비판적 사고의 성격 자체가 옮겨 갔다고 보고한다. 정보를 모으는 일에서 정보를 검증하는 일로, 문제를 푸는 일에서 산출물을 통합하는 일로, 직접 수행에서 감독으로. 데이비슨식으로 옮기면 해석 노동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 원저자에서 산출물로 바뀐 것이다. 문제는 그 산출물이 검증을 유도하지 않는 형태로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매끄럽고 자신 있고 단서가 적은 텍스트는 자비의 원리를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
조작을 걱정하는 사람에게 요약이 특히 어긋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음 두 문장을 보자.
예산을 30퍼센트 늘렸는데도 사망자는 줄지 않았다.
사망자가 더 늘지 않은 것은 예산을 30퍼센트 늘린 덕분이다.
사실 관계는 동일하다. 요약하면 둘 다 예산 30퍼센트 증액, 사망자 변화 없음으로 수렴한다. 조작은 요약 과정에서 증발하고 무해한 사실만 남는다. 프레이밍, 어휘의 온도, 생략된 반론, 배열 순서. 이 층위가 정확히 요약이 걷어 내는 층위이며, 정확히 설득 기술이 작동하는 층위다.
그 설득 기술의 현재 수준도 측정되어 있다. 프란체스코 살비(Francesco Salvi) 연구진이 2025년 5월 『네이처 휴먼 비헤이비어』에 발표한 실험은 미국 성인 900명을 사람 또는 GPT-4와 짝지어 사회정치 쟁점을 토론하게 했다. 상대의 기초 인구통계 정보를 쥔 모델은 양쪽 설득력이 같지 않았던 대결에서 64.4퍼센트의 경우 인간보다 설득력이 높았고, 토론 후 동의도가 올라갈 승산은 사람끼리 붙었을 때보다 81.2퍼센트 높았다. 같은 정보가 없을 때는 인간과 구별되지 않았다.
주목할 것은 개인화의 흔적이 언어에 남지 않았다는 대목이다. 연구진은 개인 정보 접근 여부에 따른 뚜렷한 문체 변화를 찾지 못했다. 조작이 문면에 지문을 남기지 않는다면, 문면을 압축한 요약에서는 더더욱 남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고 묻는 대신 물을 것이 따로 있다. 이 서술이 일부러 빼놓은 반대 근거는 무엇인가. 같은 사실을 반대로 읽는 쪽은 어떤 해석을 내놓는가. 근거를 댄 대목과 그냥 단정한 대목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 서술이 참일 때 이득을 보는 쪽은 누구인가. 원문의 조건절과 유보 표현을 그대로 남겨 다시 정리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같은 도구가 같은 자료를 놓고도 전혀 다른 층위의 답을 내놓는다.
앞의 수치들은 그 자체가 과일반화의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26~73퍼센트는 단일 값이 아니라 세 모델의 조건별 범위이고, 열 개 모델 전체의 평균이 아니다. 같은 연구에서 클로드 3.7 소네트는 일반화 정확도가 가장 높은 축이었다. 과일반화 판정은 원문의 결론 문장과 요약의 결론 문장을 대조한 코딩 결과이므로, 무엇을 결론 문장으로 볼지에 대한 조작적 정의에 의존한다.
45퍼센트도 마찬가지다. 이 수치는 참가 방송사 평가자들이 공통 뉴스 질문 30개 세트에 대한 응답을 자체 기준으로 채점한 결과이며, 중대한 문제의 정의에 출처 표기 미비가 포함된다. 출처를 빠뜨린 정확한 답변과 사실을 지어낸 답변이 같은 통에 들어간다. 모델별 편차도 크다. 제미나이의 출처 관련 중대 문제는 72퍼센트였고 나머지는 모두 25퍼센트 아래였다. 이 분포를 지우고 인공지능이 절반은 틀린다로 옮기는 순간, 조건을 떼고 결론을 넓히는 바로 그 동작이 재현된다.
퓨의 8퍼센트 대 15퍼센트도 인과가 아니라 상관이다. 요약이 뜨는 질의와 뜨지 않는 질의는 성격이 다르다. 단순 사실 확인일수록 요약이 붙기 쉽고, 그런 질의는 원래 클릭률이 낮다. 구글은 이 조사의 질의 표본이 대표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방향은 여러 조사에서 반복되지만 절반이라는 배율은 표본에 따라 움직인다.
측정 주체의 위치도 결과의 강조점에 작용한다. 유럽방송연맹은 회원사의 뉴스 트래픽과 저작물 이용을 둘러싸고 인공지능 플랫폼과 이해가 충돌하는 당사자다. 조사가 사실 오류보다 출처 표기와 귀속 오류를 중대 문제의 최대 항목으로 잡은 것은 이 위치와 무관하지 않다. 언론사가 잘못 인용되는 것은 언론사에게 가장 절박한 손해다.
퓨의 조사는 클릭이라는 지표를 택했다. 클릭은 광고와 구독 모형에서 가치의 단위지만 이해의 단위는 아니다. 요약만 읽고 궁금증이 해소된 이용자와 요약에 속은 이용자가 같은 8퍼센트 안에 들어간다. 페터르스와 친이는 과학 커뮤니케이션 연구자이며, 이들의 관심은 대중의 오독보다 연구 결과의 적용 범위 왜곡에 있다. 그래서 사실 오류보다 조건 소실을 지표로 삼았다. 세 조사가 서로 다른 것을 재고 있고, 그 차이가 각자의 이해관계와 겹친다.
이 철학들이 무효가 된 것은 아니다. 비용 구조가 뒤집혔을 뿐이다. 데이비슨과 가다머가 쓰던 시기에는 이해가 비싸고 신뢰가 기본값이었다. 알아듣는 데 시간이 들었고, 상대가 속이려 든다는 가정은 예외였다. 지금은 반대다. 이해는 초 단위로 싸졌고 신뢰가 희소해졌다.
자비의 원리는 이 조건에서도 폐기되지 않는다. 폐기가 불가능한 종류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옮겨 갔을 뿐이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받는 쪽이 말한 사람에서 요약한 기계로 바뀌었고, 그 기계는 말한 사람보다 훨씬 알아듣기 쉽게 말한다. 알아듣기 쉽다는 것이 신뢰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정작 알아듣기 쉬운 문장 앞에서 가장 떠올리기 어렵다.
Peters, U. & Chin-Yee, B. (2025). Generalization bias in large language model summarization of scientific research. Royal Society Open Science 12(4), 241776.
EBU/BBC (2025). News Integrity in AI Assistants: An International PSM Study.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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