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비평
신약 성경 스물일곱 권 가운데 저자의 됨됨이를 짐작해 볼 만한 책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저자가 자기를 드러내지 않거나, 드러내더라도 편지의 인사말 정도에 그친다. 요한복음은 사정이 다르다. 이 책은 자기가 무엇을 골라 실었는지 스스로 밝히고, 독자가 어디서 걸릴지 미리 헤아려 설명을 끼워 넣고, 같은 낱말을 수십 번 되풀이하면서 뜻을 조금씩 바꾼다. 그래서 본문만 가지고도 쓴 사람의 습관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려 낼 수 있다.
다만 그렇게 그려 낸 것이 무엇인지는 따로 따져야 한다. 아래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요한복음의 문장에서 실제로 관찰되는 서술의 습관이고, 다른 하나는 그 습관을 한 사람의 성격으로 옮겨 적을 때 어디서 근거가 끊기는지다. 결론을 미리 적으면 이렇다. 본문에서 확인되는 것은 개인의 인격이 아니라 독자를 먼저 알게 만들어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편집자의 기질이며, 그 기질이 한 사람의 것인지 여러 사람이 오래 다듬어 만든 것인지는 본문으로 판정되지 않는다.
요한복음이 이런 분석을 허용하는 첫 번째 이유는 저자가 자기 작업을 공개적으로 설명해 두었기 때문이다. 20장 30절과 31절은 예수가 행한 다른 표적이 많지만 이만큼만 기록한 것은 독자가 믿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적는다. 21장 25절은 다 기록하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곧 방대한 자료 가운데서 목적에 맞는 것만 골랐다는 선언이다. 이 정도로 노골적인 편집 의도 표명은 네 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저자가 등장인물의 말과 자기 해석을 구분해 보여 주는 대목이 있다는 점이다. 11장에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하자, 저자는 곧바로 그것이 가야바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해의 대제사장이었기에 나온 예언이라고 덧붙인다. 인물의 발언이 화자의 의도와 다른 뜻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저자가 독자에게 직접 알려 주는 장면이다. 자기 서술을 이렇게 두 겹으로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대목의 배치도 우연에 맡겼다고 보기 어렵다.
여기서부터는 관찰이다. 요한복음의 문장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습관을 넷으로 나눠 짚는다.
요한복음을 헬라어로 처음 읽는 사람은 대개 같은 인상을 받는다. 문장이 쉽다는 것이다. 접속사가 단순하고 종속절이 얕고, 무엇보다 낱말이 자꾸 되풀이된다. 이 인상은 수치로 확인된다.
분량 대비 어휘 폭이 신약에서 가장 좁다는 집계가 있다. 요한복음이 6.5퍼센트 수준, 요한계시록이 9.3퍼센트 수준으로 계산된다. 집계 기준(표제어냐 어형이냐)에 따라 수치는 달라진다.
여기서 '표제어'는 활용형을 하나로 묶은 사전 등재 형태를 뜻한다. 한국어로 치면 '갔다', '가서', '가니'를 모두 '가다' 하나로 세는 방식이다. 그 기준으로 요한복음이 쓴 낱말은 천 개 남짓이다. 스물한 장 879절을 그 정도 어휘로 썼다는 뜻이다.
좁은 어휘가 곧 빈약한 내용을 뜻하지는 않는다. 요한복음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간다. 머무르다, 보내신 이, 때, 영광, 진리, 빛, 생명 같은 낱말을 수십 번씩 다시 쓰면서 등장할 때마다 뜻을 조금씩 더한다. 1장에서 '빛'은 창조의 빛에 가깝지만 8장에서는 예수의 자기 지칭이 되고 12장에서는 심판의 기준이 된다. 낱말은 그대로인데 그 낱말이 담는 것이 계속 불어난다. 어휘를 늘려 정밀도를 얻는 방식이 아니라, 어휘를 고정하고 문맥을 쌓아 정밀도를 얻는 방식이다.
어휘가 좁다는 수치는 흔히 저자의 헬라어 실력이 낮았다는 근거로 인용된다. 그러나 통계가 재는 것은 낱말의 종류 수이지 문장을 다루는 솜씨가 아니다. 요한복음은 단순한 낱말로 이중 의미를 만드는 데 특히 능하며(다음 절), 이는 어휘를 많이 아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능력이다.
반대 방향의 과장도 경계할 만하다. 반복이 모두 의도된 나선 구조라고 보기도 어렵다. 구술 전승을 문서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오는 상투적 반복과, 뜻을 쌓아 가는 반복은 본문에서 늘 명확히 갈리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결과다. 이 책은 적은 낱말로 오래 끌고 가는 방식을 택했다.
어휘를 고정하는 습관은 다음 특징과 맞물린다. 낱말이 적으면 같은 낱말에 두 뜻을 겹쳐 놓기 쉬워진다.
요한복음의 서두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첫 열여덟 절에서 전부 밝혀 버린다. 태초부터 있었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겼고, 육신이 되어 왔다는 것까지 다 말한다. 마가복음이 예수의 정체를 이야기 끝까지 감추는 방식(연구자들이 '메시아 비밀'이라 부르는 서술 전략)과 정반대의 선택이다.
이 배치의 효과는 독자의 자리에서 나타난다. 독자는 등장인물이 모르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이야기에 들어간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와 노인이 어떻게 다시 태어나느냐고 되물을 때, 독자는 그가 무엇을 놓쳤는지 안다. 아이러니는 독자가 먼저 알아야만 작동하므로, 서두의 정보 공개는 계산된 배치다.
같은 계산이 낱말 층위에서도 확인된다. 요한복음은 두 뜻으로 읽히는 낱말을 골라 놓고 등장인물이 한쪽으로만 알아듣게 만든다.
3장의 아노텐(ἄνωθεν)은 '다시'와 '위로부터'를 함께 뜻한다. 니고데모는 앞의 뜻으로 알아듣는다.
같은 장의 프뉴마(πνεῦμα)는 바람과 영을 함께 가리킨다.
휴프소테나이(ὑψωθῆναι)는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는 일과 높여지는 일을 겹친다.
4장의 '생수'는 흐르는 물과 생명을 주는 물 사이에서 갈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우물물로 알아듣는다.
2장의 '성전'은 건물과 예수의 몸 사이에서 갈리고, 듣던 이들은 건물로 알아듣는다.
이 대목들에서 인물의 오해는 실패가 아니라 안내판이다. 독자는 인물이 걸려 넘어지는 지점에서 낱말에 두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저자는 독자를 이야기의 상대가 아니라 자기 편에 세워 두고 쓴다. 어휘를 좁게 고정한 선택이 여기서 값을 한다. 같은 낱말이 반복되어야 두 번째 뜻이 쌓일 자리가 생긴다.
그런데 아이러니를 작동시키려면 독자가 배경 지식을 갖춰야 한다. 저자는 그 부분도 직접 챙긴다.
요한복음에는 서술을 멈추고 저자가 끼어드는 문장이 유독 많다. 유월절이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알려 주고, 실로암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풀어 주고, 골고다가 '해골의 곳'이라는 뜻이라고 덧붙인다. 랍비는 선생이라는 뜻이고 메시아는 그리스도이며 게바는 베드로라고, 1장에서 연달아 세 번 옮겨 준다.
이 습관에서 두 가지가 드러난다. 첫째, 저자가 상정한 독자는 유대 지리와 아람어에 익숙하지 않다. 예루살렘 사람에게 실로암의 뜻을 설명할 이유가 없다. 둘째, 저자는 독자가 어디서 막힐지 미리 짚어 보는 사람이다. 설명이 필요한 지점을 골라내는 감각은 이야기를 잘 하는 능력과는 별개의 능력이다.
해설은 뜻풀이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었던 것을 앞당겨 알려 준다. 6장에서 예수가 넘겨줄 자를 언급하자 저자는 그것이 가룟 유다를 가리킨 말이라고 적고, 2장에서 성전을 허물라는 말에는 그것이 예수의 몸을 가리킨 것이라고 적으며, 7장에서는 그때까지 성령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사정을 밝힌다. 사건의 시점에는 아무도 몰랐던 사실을 뒤늦게 얻은 관점에서 적어 넣는 방식이다.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그 이야기의 주석을 붙이는 셈이다.
이런 개입이 잦다는 것은 저자가 자기 서술을 계속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같은 사람이 전혀 다른 종류의 문장을 남긴다.
요한복음에는 논지에 필요하지 않은 세부가 불규칙하게 박혀 있다. 베다니에서 향유를 부었을 때 그 냄새가 집에 가득했다고 적고, 부활한 이를 알아본 아침에 베드로가 겉옷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고 적는다. 사마리아 우물가의 시각을 여섯 시쯤이라 밝히고, 첫 제자들이 예수와 머문 시각을 열 시쯤이라 하고, 가나 혼인집의 항아리 수를 여섯 개, 그 용량을 두세 통이라 적는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153마리다.
이 가운데 하나는 성격이 다르다. 숯불이다. 헬라어 안트라키아(ἀνθρακιά)는 신약 전체에서 두 번만 나오고, 두 번 다 요한복음이며, 두 번 다 베드로가 그 앞에 서 있다. 한 번은 대제사장 집 마당에서 예수를 부인할 때이고(18장 18절), 한 번은 부활 후 갈릴리 해변에서 세 번의 물음을 받을 때다(21장 9절).
같은 희귀 낱말이 서로 대응하는 두 장면에만 쓰였다면, 그 배치는 저자의 손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다. 세 번의 부인에 세 번의 물음이 대응하고, 그 두 장면의 배경에 같은 낱말이 놓인다. 부인의 현장을 재현해 놓고 회복의 문답을 배치한 구성이다.
반면 물고기 153마리에는 이런 대응이 없다. 삼각수라는 설명, 당시 알려진 어종의 수라는 설명, 히브리어 글자값 계산에 근거한 설명이 오래 제시되었지만 어느 것도 정착하지 못했다. 판별 기준은 하나다. 같은 저자의 다른 대목에서 같은 패턴이 뜻을 지고 되풀이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가. 숯불은 그 검증을 통과하고 153은 통과하지 못한다. 저자의 다른 대목에서 확인되지 않는 상징은 독자의 창작이 된다.
이런 세부의 성격을 무엇으로 볼지에 따라 저자상은 갈린다. 목격자의 기억이 남긴 흔적으로 읽는 견해가 있고,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서술 기법으로 읽는 견해가 있다. 이 갈림은 뒤에서 다시 다룰 문제다.
여기까지의 관찰을 모으면 하나의 초상이 나온다. 적은 낱말로 오래 끌고 가고, 독자를 미리 무장시켜 아이러니를 작동시키고, 필요한 지점마다 설명을 끼워 넣고, 논지와 무관한 세부를 불쑥 남기는 사람. 그런데 이 초상을 '저자의 성격'이라 부르는 순간 세 곳에서 근거가 끊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익명 인물이 다섯 차례 등장한다. 이 인물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 옆자리에 있고, 십자가 아래 남아 예수의 어머니를 부탁받고, 무덤에 베드로보다 먼저 달려가고, 부활한 이를 먼저 알아본다. 이름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흔한 독법은 이 익명을 겸양으로 읽는다. 자기를 지우면서도 자기가 어디 있었는지는 빠뜨리지 않았으니, 겸손과 자기 확보가 함께 작동하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물을 서술의 부품으로 놓고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문학비평의 관점에서 요한복음을 분석한 앨런 컬페퍼는 사랑받는 제자가 이 복음서의 등장인물 가운데 오해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니고데모도, 사마리아 여인도, 마르다도, 빌립도, 도마도, 베드로도 한 번씩 어긋난 이해를 드러낸다. 사랑받는 제자만 그런 대목이 없다.
이것은 성격 묘사로 설명되지 않는 특징이다. 실제 인물이라면 오해의 기록이 하나쯤 남는 편이 자연스럽다. 오해가 전혀 없다는 것은 이 인물이 이야기 안에서 이상적 제자의 자리, 곧 독자가 서야 할 자리를 표시하는 기능을 맡았다는 뜻에 가깝다. 앞에서 본 아이러니 구조와도 맞물린다. 독자가 미리 알고 있어야 작동하는 구조에서, 사랑받는 제자는 이야기 안에 들어간 독자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
더 강한 주장도 제시되어 있다. 우고 멘데스는 2020년 『신약 연구 저널』(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에 실은 논문에서 이 인물이 실재 인물이 아니라 문학적 창작이며, 그 창작된 목격자를 앞세운 요한복음은 저자를 위조한 문서라고 주장했다. 사랑받는 제자를 특정 인물과 동일시하려는 모든 시도가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는 점, 다른 초기 문헌에 이 인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 공관복음의 대응 장면 어디에도 그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멘데스는 2025년에 요한 서신을 같은 관점에서 다룬 단행본을 냈다.
멘데스의 결론에는 반대가 많다. 마이클 버드는 요한복음이 익명 문서이지 위명 문서는 아니라고 본다. 본문 안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주장한 적이 없으므로, 이름을 도용한 2세기 문서들과 같은 범주로 묶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리처드 보컴은 목격 증언설을 옹호하며 사랑받는 제자를 사도 요한이 아닌 '장로 요한'으로 본다.
그러나 이 논쟁의 결과가 어느 쪽으로 나든, 성격 추론에는 이미 제약이 걸린다. 사랑받는 제자의 익명이 서술 기능을 가진 장치라는 점은 위명 여부와 무관하게 성립한다. 그렇다면 그 익명에서 겸양이라는 인격 특성을 읽어내는 것은 기법을 성격으로 옮겨 적은 것이 된다. 익명은 관찰된 사실이고, 겸손은 그 사실에 붙인 해석이다.
같은 문제가 이 복음서의 마지막 대목에서 한 번 더 나타난다.
21장 24절은 '이 일을 증언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고 적는다. 본인이 쓴 문장으로 읽기에는 어색한 3인칭이다. 바로 앞 23절은 그 제자가 죽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밝히며 그 소문을 정정한다. 소문이 돌 만한 상황, 곧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떠날 시점에 가까웠던 정황을 전제한 문장이다.
이 두 절 때문에 요한복음의 최종 형태에 다른 손이 개입했다고 보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 21장 전체를 뒤에 붙은 부록으로 보는 독법도 오래되었다. 20장 30절과 31절이 이미 마무리 형식을 갖췄는데 그 뒤에 한 장이 더 붙어 있고, 그 장의 끝에서 다시 25절로 마무리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앞선 관찰들이 곤란해진다. 숯불의 배치는 18장과 21장을 잇는 장치인데, 21장이 다른 손의 것이라면 그 장치를 만든 사람은 앞부분을 쓴 사람이 아닐 수 있다. 물론 그 경우에도 장치는 여전히 의도된 것이다. 부록을 붙인 사람이 앞의 낱말을 골라 되받았다는 뜻이 되므로 오히려 편집 솜씨의 증거가 된다. 달라지는 것은 그 솜씨의 주인이다.
학계에는 요한복음의 문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놀랄 만큼 일관된다는 관찰과, 여러 손이 오래 다듬었다는 관찰이 함께 있다. 두 관찰이 모순은 아니다. 한 사람이 만든 문체를 후속 편집자가 익히고 이어 쓰는 경우, 결과물은 일관되면서 단일 저자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읽어낸 기질은 개인의 인격이 아니라 한 학파가 유지한 서술 규약일 수 있다.
요한복음의 세계는 두 진영으로 갈려 있다. 빛과 어둠, 위와 아래, 진리와 거짓, 육과 영, 생명과 사망이 계속 짝을 이루고 중간항이 거의 없다. 인물들은 믿는 쪽과 믿지 않는 쪽으로 갈리며 판단이 유보되는 경우가 드물다. 시간 표시조차 대립축에 배치된다. 니고데모는 밤에 찾아오고 유다는 밤으로 나간다.
이 화법을 개인의 기질로 읽으면, 세계를 흑백으로 나누어 보는 완고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나온다. 그런데 본문에는 그 인상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낱말이 하나 있다.
아포쉬나고고스(ἀποσυνάγωγος), 곧 '회당에서 쫓겨난 자'라는 뜻의 형용사다. 이 낱말은 신약 전체에서 세 번 나오고, 세 번 다 요한복음이다(9장 22절, 12장 42절, 16장 2절). 헬라 문헌에서 앞선 용례가 확인되지 않아 이 시기에 새로 만들어진 말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회당에서 내쫓기로 이미 합의가 되어 있었다는 9장의 서술은 예수 당시 제도로 확인되지 않으며, 12장에서는 관리들이 그 처분을 두려워해 고백을 미루고, 16장에서는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고로 나온다.
J. 루이스 마틴은 이 낱말을 근거로 요한복음이 두 층으로 서술된 문서라고 보았다. 예수 시대의 이야기 위에 저자 공동체가 1세기 말에 겪던 상황이 겹쳐 있으며, 회당에서의 축출은 뒤쪽 층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 독법은 오랫동안 요한복음 연구의 기본 틀로 쓰였다.
마틴의 틀이 맞다면 요한복음의 이분법은 성격이 아니라 상황의 문법이다. 소속 집단에서 밀려난 소수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 할 때 흔히 나타나는 화법이며, 그 화법을 쓴 사람이 원래 완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판단의 대상이 개인에서 집단의 처지로 옮겨 간다.
다만 마틴의 틀 자체도 논쟁 중이다. 축출의 시점을 유대교 기도문 개정과 연결하는 대목은 그 개정의 연대 근거가 약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아델 라인하르츠는 이것이 실제 축출의 기록이 아니라 저자 쪽의 회당 공격 수사라고 본다. 그렇게 보면 이분법은 처지의 반영이 아니라 선택된 전략이 되고, 다시 저자 쪽의 판단 문제로 돌아온다.
어느 쪽이든 남는 사실은 하나다. 이 낱말은 요한복음에만 있다. 배제의 경험이 서술에 흔적을 남겼든 배제의 수사가 동원되었든, 저자는 그 상황을 가리킬 낱말을 새로 만들어 세 번 썼다. 관찰되는 것은 그 선택이고, 그 뒤의 심리는 관찰되지 않는다.
같은 구조가 세부 묘사를 두고도 반복된다.
요한복음의 지리 정보는 정확한 편이다. 베데스다에 다섯 행각이 있었다고 적고, 실로암 못과 기드론 골짜기와 돌을 깐 재판 장소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 가운데 일부는 발굴로 뒷받침되었다. 예루살렘 북쪽에서 19세기부터 진행된 발굴은 가운데 담으로 나뉜 두 저수조와 그 주위 및 담 위의 주랑 배치를 드러냈고, 이는 다섯 주랑이라는 서술과 맞아떨어진다. 2004년에는 예루살렘 남쪽 다윗의 도시 구역에서 하수관 공사 중 계단이 발견되어, 제2성전기의 대형 계단식 못이 확인되었다.
이 성과들은 요한복음이 70년 성전 파괴 이전 예루살렘의 지형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오래 통용되던 견해, 곧 이 책이 팔레스타인과 무관한 곳에서 늦게 쓰인 순수 신학 저작이라는 견해는 이 지점에서 힘을 잃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나가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지형 지식이 확인되었다는 것과 저자가 목격자라는 것은 다른 명제다. 2004년에 확인된 못을 요한복음의 실로암 못으로 동일시하는 문제도 최근 발굴로 다시 논의되고 있다. 지형을 아는 사람은 그곳에서 자란 사람일 수도 있고, 그곳 사정에 밝은 전승을 물려받은 사람일 수도 있다.
향유 냄새, 겉옷을 걸치지 않은 베드로, 여섯 시라는 시각 같은 세부도 사정이 같다. 목격의 흔적으로 읽는 견해는 이런 세부가 논지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굳이 지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서술 기법으로 읽는 견해는 정반대의 근거를 든다. 고대 서사에서 불필요한 세부는 사실성을 만드는 표준 장치이며, 요한복음처럼 상징 배치에 능한 저자라면 그 효과를 알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같은 증거가 두 방향으로 읽히는 이런 상황에서는 증거를 더 모으는 것으로 판정이 나지 않는다. 갈리는 것은 자료가 아니라 전제다. 목격 증언을 기본값으로 두느냐, 문학적 구성을 기본값으로 두느냐에 따라 같은 세부가 다르게 배정된다.
세 곳에서 근거가 끊긴다고 했다. 사랑받는 제자의 익명이 성격이 아니라 서술 장치일 수 있다는 것, 최종 형태에 다른 손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이분법과 세부 묘사가 각각 두 방향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이 셋을 통과한 뒤에도 남는 것이 있다.
남는 것은 서술의 규약이다. 좁게 고정된 어휘, 서두에서 정보를 전부 공개하는 배치, 이중 의미어를 통한 오해의 설계, 독자가 막힐 지점을 미리 짚는 해설, 사건 이후의 관점을 앞당겨 적어 넣는 개입, 그리고 논지에 필요하지 않은 세부의 존속. 이 여섯 가지는 요한복음 21장 전체에서 확인되며 서로 맞물려 작동한다. 어휘가 좁아야 이중 의미가 쌓이고, 독자가 미리 알아야 오해가 아이러니로 읽히고, 해설이 있어야 독자가 알 수 있다.
이것을 한 사람의 성격이라 부르면 과잉이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확인되는 것은 이 여섯 가지를 일관되게 지킨 서술 주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주체가 한 사람인지 한 학파인지는 본문으로 판정되지 않지만, 규약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은 어느 쪽 견해에서도 인정된다.
성경 저자의 성격을 읽어내는 작업이 대개 어디서 실패하는지도 여기서 드러난다. 실패는 자료 부족에서 오지 않는다. 텍스트의 특징을 인격 어휘로 바꿔 적는 단계에서 온다. 익명은 겸손이 되고, 이분법은 완고함이 되고, 세부는 성실함이 된다. 그 번역은 대개 근거 없이 이루어지며, 한 번 이루어지면 그 인격상이 다시 본문 해석의 전제로 되돌아온다. 사랑의 동사 두 개가 갈리는 21장의 문답을 두고 베드로의 심경을 길게 재구성하는 독법이 오래 유지된 것도 같은 경로를 거쳤다.
요한복음에서 확실하게 읽히는 저자상은 결국 하나다. 자기가 무엇을 골랐는지 밝히고, 독자가 무엇을 모를지 계산하고, 낱말 하나를 두 장면에 배치할 만큼 자기 문서를 통제한 사람. 사변적인 서두와 물고기 153마리가 한 책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그 통제의 폭을 보여 준다. 그 이상을 말하려면 본문 밖의 전제를 끌어와야 하고, 그 전제는 밝혀 두는 편이 정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