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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a · 성경 읽기

마가복음으로 저술자의 성격을 추론하기 — 문체의 급함과 구조의 치밀함이 어긋나는 자리

마가복음은 저자의 이름을 본문에 적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 사람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오래 이어져 왔고, 그 결론은 대개 하나로 모인다. 급하고 소박하고 충동적인 사람. 그러나 같은 열여섯 장에는 그런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설계도 함께 남아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책에서 사람을 찾는 일

네 복음서는 모두 본문 안에서 저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마가복음」이라는 제목은 본문의 일부가 아니라 2세기에 사본에 붙기 시작한 표제이고, 열여섯 장 어디에도 "내가 이것을 기록했다"는 문장이 없다. 여기서 사본이란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을 말한다. 신약의 본문은 저자가 직접 쓴 원본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남아 있는 수천 개의 필사본을 서로 비교해 복원한 것이다.

저술자를 마가라는 인물로 지목한 가장 이른 기록은 2세기 전반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었던 파피아스의 말이다. 그마저도 파피아스의 저작이 온전히 전해진 것이 아니라, 4세기 역사가 에우세비오스가 『교회사』에 옮겨 적은 인용문의 형태로만 남았다. 그 인용에 따르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였고, 들은 것을 정확하게 적었으나 순서대로 적지는 못했다. 주님을 직접 따라다니지도, 그 말씀을 직접 듣지도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짧은 증언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한다. 저술자가 목격자가 아니라 전해 들은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이 이미 2세기에 변명이 필요한 약점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이다. 순서대로 적지 못했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다. 누군가 그 점을 문제 삼았기 때문에 나온 해명이다.

그래서 익명 문서에서 성격을 추론한다는 작업은 조건을 먼저 정해 두어야 한다. 여기서 다룰 수 있는 것은 한 개인의 심리가 아니다. 기질이 명랑했는지 우울했는지, 성미가 급했는지 느긋했는지는 텍스트가 대답할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이 아니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서술 선택의 일관성이다. 무엇을 반복해 쓰고, 무엇을 굳이 설명하고, 무엇을 잘라 내고, 무엇을 불편한 채로 남겨 두었는가. 그 선택이 열여섯 장에 걸쳐 한 방향을 가리킨다면 거기까지는 저술자에게 돌릴 수 있다. 그 이상은 독자가 자기 인상을 저자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 된다.

본문에 남은 손버릇

마가복음은 네 복음서 중 가장 짧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도 족보도 없고, 첫 장에서 곧바로 공적 활동으로 들어간다. 가르침의 분량은 마태복음보다 훨씬 적고, 대신 행동과 이동이 촘촘하다. 그리고 그 촘촘함을 만드는 낱말이 눈에 띄게 반복된다.

그리스어 부사 εὐθύς(유튀스)는 "곧", "즉시"로 옮겨진다. 이 낱말이 마가복음에 마흔한 번 나온다. 세는 기준에 따라 마흔두 번으로 잡는 집계도 있다. 네 복음서 중 나머지 셋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다. 분포도 균일하지 않다. 1장에만 열 번이 몰려 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자 곧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곧 광야로 몰아내고, 부르자 곧 그물을 버리고 따르고, 회당에 들어가자 곧 귀신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른다.

시제도 같은 방향으로 작동한다. 마가복음은 지나간 사건을 서술하면서 현재시제 동사를 쓰는 이른바 역사적 현재를 백오십 번 넘게 사용한다. 한국어 번역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가셨다"가 아니라 "예수께서 가신다"에 가까운 문장이 계속 이어진다. 여기에 문장을 접속사 καί(카이, "그리고")로 잇는 습관이 겹친다. 종속절로 층을 쌓는 대신 짧은 절을 계속 붙여 나가는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문장은 단순해지고 호흡은 짧아진다.

이 그리스어는 매끄럽지 않다. 같은 시대의 헬레니즘 산문이나 누가복음의 문장과 비교하면 문법이 거칠고 어휘가 좁다.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배운 문인의 글이 아니라, 다른 언어로 들은 이야기를 그리스어로 옮겨 적은 사람의 글에 가깝다.

두 세계 사이에 선 사람 — 무엇을 굳이 설명했는가

더 구체적인 흔적은 낱말을 다루는 방식에 남아 있다. 마가복음은 아람어 표현을 그리스어 본문에 그대로 음차해 넣고, 바로 뒤에 뜻을 붙여 준다. 아람어는 당시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일상어였다.

이 습관에는 두 가지 정보가 들어 있다. 저술자는 아람어를 알고 있고, 독자는 모른다는 것이다. 원어를 남긴 것은 그 소리가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뜻을 붙인 것은 붙이지 않으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 방향의 흔적도 있다. 마가복음에는 라틴어에서 온 낱말이 여럿 들어와 있다. 백부장을 가리키는 낱말로 그리스어 헤카톤타르케스 대신 라틴어 centurio를 음차한 켄튀리온을 쓰는데, 신약에서 이 낱말은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처형하러 보낸 사람을 가리킬 때도 라틴어 speculator에서 온 낱말을 쓴다(6:27). 총독 관저를 부르는 프라이토리온(15:16)도 그렇다.

화폐 환산은 더 노골적이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돈을 마가복음은 "두 렙돈"이라고 적고, 곧바로 "곧 한 고드란트"라고 덧붙인다(12:42). 렙돈은 그리스식 소액 동전이고 고드란트는 로마 화폐 콰드란스다. 그리스 화폐 단위로 말한 뒤 로마 화폐 단위로 다시 알려 주는 것은, 듣는 사람이 후자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유대 관습도 설명 대상이 된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비난이 나오는 대목에서, 마가복음은 서술을 멈추고 유대인이 어떤 식으로 손을 씻고 그릇을 씻는지를 두 절에 걸쳐 풀어 놓는다(7:3~4). 안식일 전날을 가리키는 "예비일"도 그것이 안식일 전날이라고 알려 준다(15:42). 사두개인을 처음 등장시킬 때는 그들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라고 미리 밝힌다(12:18). 유대인 독자에게는 필요 없는 설명이다.

여기까지의 흔적을 모으면 저술자의 자리가 좁혀진다. 아람어를 알고 유대 관습을 안에서 아는 사람이, 그 둘을 모르는 비유대인 독자를 위해 쓰고 있다. 그리고 그 독자는 로마 화폐와 로마 군 편제에 익숙하다. 저술자는 두 세계의 경계에 서서 한쪽을 다른 쪽에 번역해 주는 위치에 있다.

공관복음 — 마태·마가·누가복음 세 권을 함께 놓고 나란히 볼 수 있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같은 사건을 같은 순서로 다루는 대목이 많아 문장 단위로 비교가 가능하다. 요한복음은 구성과 어법이 크게 달라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다.

마가 우선설 — 세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고 마태·누가가 그것을 자료로 삼았다는 견해. 현재 신약학계의 다수 견해이며, 아래에서 마태·누가가 마가의 문장을 "손댔다"고 서술하는 대목은 모두 이 전제 위에 있다. 소수 견해는 다른 순서를 주장하는데, 그 경우 손댄 방향도 반대가 된다.

여기까지 읽으면 나오는 결론, 그리고 그 결론의 문제

거친 그리스어, 마흔한 번의 "즉시", 짧게 이어 붙인 문장, 눈에 남은 자잘한 사물. 마가복음에는 상황을 목격한 사람만 기억할 것 같은 세부가 유난히 많다. 폭풍 속에서 예수가 잠들어 있던 자리는 "배 뒤쪽 베개"라고 적혀 있고(4:38), 오천 명을 앉힌 자리는 "푸른 풀"이며(6:39), 사람들은 "백 명씩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는다(6:40).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계산도 나온다(6:37). 예수는 말하기 전에 사람들을 "둘러본다"(3:5, 10:23). 체포 장면에서는 아무 설명 없이 등장하는 젊은이가 아마포를 버리고 벗은 몸으로 달아난다(14:51~52).

이 재료를 파피아스의 증언과 겹치면 결론은 거의 자동으로 나온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역하며 옆에서 들은 사람이, 들은 대로 서둘러 적었다. 그래서 문장이 거칠고, 그래서 "즉시"가 반복되고, 그래서 쓸데없어 보이는 세부가 남았다. 성격은 충동적이고 활기 있고 소박하다. 베드로의 기질이 그 문체에 비쳐 있다는 설명까지 흔히 덧붙는다.

이 그림은 오래되었고 널리 쓰인다. 문제는 근거의 구조다. 급한 문체를 보고 급한 성격을 추론한 다음, 급한 성격으로 급한 문체를 설명한다. 같은 자리를 두 번 돌고 있을 뿐 새로 확인된 것이 없다. 더 큰 문제는, 이 그림으로 설명되지 않는 층이 같은 본문에 나란히 있다는 사실이다.

잘라 끼운 이야기들 — 급한 사람이 만들 수 없는 형태

마가복음에는 이야기 하나를 시작해 놓고 중간에서 끊은 뒤, 다른 이야기를 끼워 넣고, 그것이 끝난 다음에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구성이 반복된다. 연구자들은 이 형태를 삽입 구조라고 부르고, 흔히 샌드위치 구조라고도 한다. 가장 알아보기 쉬운 예가 5장이다.

마가복음 5:21~43의 배치

5:21~24 — 회당장 야이로가 죽어 가는 딸을 살려 달라고 청한다. 예수가 그 집을 향해 출발한다.
5:25~34 — 가는 길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뒤에서 옷에 손을 댄다. 예수는 걸음을 멈추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묻는다. 여인을 찾아내 이렇게 말한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5:35~43 — 그 지체 중에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이 온다. 예수가 야이로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소녀에게 "탈리타 쿰"이라고 말한다.

끼워 넣은 이야기의 마지막 대사가 감싼 이야기의 다음 장면을 해석한다.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한 직후에, 야이로에게 "믿기만 하라"고 말한다.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면 나오지 않고, 하나를 다른 하나 속에 넣어야 나오는 효과다.

같은 형태가 여섯 곳 넘게 반복된다. 가족이 예수를 붙잡으러 나온 장면 사이에 서기관들과의 논쟁이 들어가고(3:20~35), 열두 제자를 파송한 대목과 그들이 돌아온 대목 사이에 세례 요한의 처형이 들어간다(6:7~30).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장면과 그 나무가 말라 죽은 장면 사이에 성전에서 상을 뒤엎는 장면이 들어가고(11:12~25),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대제사장들의 모의와 유다의 배신 사이에 끼워진다(14:1~11). 예수가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는 장면 안에는 베드로가 마당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14:53~72).

이 형태를 만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야기 두 개를 붙여 쓰는 것과, 하나를 잘라 다른 하나를 그 틈에 끼우는 것은 다른 작업이다. 뒤엣것은 두 이야기의 길이와 분위기를 함께 재고, 끊을 자리를 고르고, 돌아왔을 때 독자가 앞의 상황을 기억하도록 실마리를 남기고, 안쪽 이야기의 결말이 바깥쪽 이야기의 다음 대사를 물들이도록 순서를 맞춰야 한다. 들은 것을 순서대로 받아 적는 사람은 이런 형태에 도달할 수 없다.

여기서 어긋남이 드러난다. 문장은 거칠고 접속사는 단조롭지만, 문장 위의 층인 배치는 계산되어 있다. 거친 문체를 저술자의 기질로 읽으면 이 층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문체의 결함으로 성격을 추론하는 방식은, 성격을 정말 보여 주는 자리를 지나쳐 버린다.

무화과나무와 성전을 겹친 배치는 특히 그렇다. 열매 없는 나무를 저주한 뒤 성전에 들어가 상을 뒤엎고, 나오면서 마른 나무를 본다. 이 순서에서 성전은 열매 없는 나무의 자리에 놓인다. 두 사건이 실제로 그 순서로 일어났는지와는 별개로, 그렇게 배치하기로 한 사람의 판단이 여기에 남아 있다. 파피아스가 "순서대로 적지 못했다"고 해명한 그 순서 문제는, 무능의 흔적이 아니라 다른 기준으로 배열한 결과일 수 있다.

눈먼 사람 둘이 감싸고 있는 것

더 긴 범위에서도 같은 계산이 확인된다. 마가복음 8장 후반부터 10장까지는 예수가 세 번에 걸쳐 자기 죽음을 예고하는 구간이고, 그 사이사이에 제자들이 매번 엉뚱한 반응을 보인다. 이 구간의 양쪽 끝에 눈먼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가 하나씩 놓여 있다.

앞쪽 이야기(8:22~26)는 복음서 전체에서 유일하게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치유다. 예수가 손을 얹자 그 사람은 "사람들이 보이나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을 본다"고 말한다. 절반만 보인다는 뜻이다. 예수가 다시 손을 얹은 뒤에야 온전히 보게 된다.

그 바로 다음 장면에서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다(8:29). 그리고 몇 절 뒤, 예수가 자기 죽음을 말하자 베드로는 그를 붙들고 항의하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을 듣는다(8:33). 절반만 보이는 상태다. 명칭은 맞혔지만 그 명칭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못 본다.

구간의 끝(10:46~52)에는 눈먼 바디매오가 있다. 그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소리치고, 고쳐진 뒤 "길에서 예수를 따른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길이다. 사이에 놓인 제자들은 누가 크냐를 다투고(9:34), 야고보와 요한은 영광의 자리를 미리 예약해 달라고 청한다(10:37).

눈이 두 단계로 열리는 사람과, 이름을 부르며 따라나서는 사람. 그 사이에 눈을 뜨지 못하는 제자들이 배치된다. 이 순서를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런 배치는 문장을 다듬을 여유가 없어서 급하게 쓴 사람의 작업이 아니다.

"즉시"가 사라지고 시각이 등장하는 구간

마흔한 번이라는 숫자로 되돌아가 보면, 그 숫자가 무엇을 재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만약 저술자의 성미가 급해서 나온 낱말이라면 분포가 고를 것이다. 그렇지 않다.

1장에 열 번이 몰린다. 그 뒤로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체포와 재판 구간에서 다시 몇 차례 나타난다(14:43, 14:45, 14:72, 15:1). 그리고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간 다음부터 서술의 시간 단위가 바뀐다. 갈릴리 구간에서는 장소가 계속 옮겨 가며 사건이 몰아치는데, 마지막 주간은 날짜별로 끊어지고 십자가 장면에 이르면 시각 단위로 쪼개진다. 제삼시에 못 박고(15:25), 제육시에 온 땅이 어두워지고(15:33), 제구시에 예수가 크게 소리 지른다(15:34).

가장 짧은 복음서가 전체의 삼분의 일 넘는 분량을 마지막 한 주에 쓴다. 앞은 빠르고 뒤는 느리다. 이것은 기질이 아니라 속도의 배분이다. "즉시"는 서두르는 사람의 말버릇이기도 하지만, 앞을 빠르게 지나가 독자를 끌고 온 다음 결정적인 구간에서 발을 멈추게 하려는 장치로도 기능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낱말의 총량으로 판정할 수 없고, 낱말이 어디에 몰려 있는지로만 판정할 수 있다.

널리 인용되는 숫자는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마흔한 번이라는 집계는 문체의 특징을 잡아내는 데는 유용하지만, 성격의 증거로 쓰이는 순간 그 숫자가 담지 않은 정보—분포—를 숨긴다. 통계를 성격의 지표로 옮기려면 균일성을 먼저 확인해야 하는데, 이 낱말은 균일하지 않다.

불리한 문장을 지우지 않은 사람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두 가지다. 문장은 거칠고 배치는 정밀하다. 그러면 이 둘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성격이 있는가. 세 번째 재료가 필요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같은 사건을 다시 쓸 때 마가복음의 어떤 문장을 손댔는지를 보면, 마가복음의 저술자가 무엇을 남겨 두기로 했는지가 역으로 드러난다.

고향에서 아무 권능도 행할 수 없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고, 다만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 고치실 뿐이었다.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 6:5~6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마태 13:58). 할 수 없었다가 많이 하지 않았다로 바뀐다. 능력의 한계가 선택의 문제로 옮겨진다.

가족이 그를 미쳤다고 여겼다

친척들이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 사람들이 "그가 미쳤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3:21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오는 장면 자체는 남기지만, 붙잡으러 나섰다는 문장과 미쳤다는 말은 없다(마태 12:46~50, 누가 8:19~21).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치유

한 번 손을 얹었을 때는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으로 보였고, 다시 손을 얹은 뒤에 온전히 보게 되었다. 8:22~26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이 이야기는 없다. 두 책 모두 마가복음의 치유 이야기를 대부분 살리고 종종 더 극적으로 만드는데, 두 단계로 진행된 이 하나만 사라진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것을 알고 돌이켜 묻는다. 무리 가운데 누구인지 모른다. 5:30

마태복음에서는 돌이켜 여인을 보고 곧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한다. 능력이 빠져나갔다는 서술도, 모른다는 물음도 없다(마태 9:22).

영광의 자리를 청한 사람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나아와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한다. 10:35~37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의 어머니가 대신 청한다(마태 20:20).

나병 환자를 대하는 감정

고치기 전에 예수가 어떤 감정 상태였는지가 명시된다. 대다수 사본은 "불쌍히 여겨"로 읽고, 소수 사본은 "노하여"로 읽는다. 1:41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같은 장면에는 감정을 가리키는 낱말이 아예 없다(마태 8:2~4, 누가 5:12~14). 어느 독법이 원래 본문이든, 이 자리의 감정 서술이 뒤이은 두 저자에게 다루기 곤란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여기에 마가복음이 제자들을 서술하는 방식이 겹친다. 제자들은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고(4:13), 빵의 기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며 마음이 둔해져 있고(6:52), 두 번째 기적 뒤에도 예수로부터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는 질책을 연달아 듣는다(8:17~21). 예수는 화를 내고(3:5) 탄식하고(7:34, 8:12) 겟세마네에서는 심히 놀라며 슬퍼한다(14:33). 체포되자 제자들은 모두 달아난다(14:50).

이 문장들은 후대 저자들이 부담스러워한 문장들이다. 그리고 그 부담은 후대에 생긴 것이 아니다. 마가복음을 쓴 사람이 같은 문장을 앞에 놓고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능력을 행할 수 없었다고 쓰지 않고 행하지 않았다고 쓸 수 있었고, 가족이 미쳤다고 여겼다는 문장을 빼고 방문 장면만 남길 수 있었고, 한 번에 낫지 않은 치유를 생략할 수 있었다. 남겨 두는 데는 이유가 필요하다.

베드로의 증언에 기댄 책이 베드로를 가장 가혹하게 적었다면

전승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 선택은 한층 더 이상해진다. 이 책이 베드로의 회상에 기대고 있다면,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장면을 가장 길고 가장 냉혹하게 적은 책이 바로 이 책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야 한다.

마가복음에서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하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며 맹세한다(14:71). 그 장면은 앞서 본 삽입 구조에 따라 예수가 대제사장 앞에서 자기 정체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심문 장면 속에 끼워져 있다. 안에서는 예수가 "내가 그니라"고 말하고, 밖에서는 베드로가 "나는 그를 모른다"고 말한다. 두 진술이 같은 시간에 같은 건물에서 이루어지도록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장면 이후 마가복음은 베드로에게 회복의 자리를 주지 않는다. 요한복음이 부활 후 세 번 묻는 장면으로 부인 세 번을 되감아 주는 것과 달리, 마가복음에는 그런 대응이 없다. 빈 무덤에서 청년이 "베드로에게 전하라"고 말할 뿐이고(16:7), 그 전달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증언자의 자리와 서술의 방향

발언자의 위치는 보통 서술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기울인다. 회상에 기댄 기록이라면 회상한 사람의 명예가 조금씩 보정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마가복음에서는 그 보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기울어 있다.

이 사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뜻한다. 전승이 말하는 관계가 실제와 다르거나, 아니면 이 책을 쓴 사람이 자기 편에 유리한 이야기를 만들 기회를 반복해서 거절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성격을 묻는 질문에는 두 번째가 더 많은 것을 알려 준다.

γάρ로 끊긴 마지막 문장

마지막 재료는 결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 사본들—4세기의 시나이 사본과 바티칸 사본—에서 마가복음은 16장 8절로 끝난다. 여인들이 무덤에서 나와 달아나고,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부활한 예수가 나타나는 장면이 없고, 제자들에게 무엇을 하라는 지시도 없다.

여인들이 몹시 놀라 떨며 무덤에서 나와 달아나고, 무서워하므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마가복음 16:8

그리스어 본문은 이 문장을 접속사 γάρ(가르)로 끝낸다. "왜냐하면"에 해당하는 낱말이고, 그리스어에서는 문장 안 두 번째 자리에 놓여 뒤에 이유가 따라 나온다. 문장을 이 낱말로 닫는 것은 그리스어 산문에서 매우 드물고, 신약 안에서는 이 자리 말고 예가 없다. 마가복음 자신도 이 낱말을 예순 번 넘게 쓰면서 한 번도 문장 끝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이 결말을 두고 견해가 갈린다. 마지막 장이 이른 시기에 훼손되어 유실되었다는 견해가 있고, 저술자가 의도적으로 여기서 멈추었다는 견해가 있다. 현재는 8절이 원래 결말이라고 보는 쪽이 다수지만 논쟁은 종결되지 않았다. 사본 증거가 확실히 말해 주는 것은 따로 있다. 현존 사본에는 서로 다른 결말이 여럿 붙어 있다. 한 절만 덧붙인 짧은 결말이 있고, 오늘날 대부분의 성경이 9절 이후로 인쇄하는 긴 결말이 있고, 두 결말을 나란히 옮겨 놓고 "어떤 사본에는 이것도 있다"는 주석을 곁들인 사본도 있다.

결말을 붙이려는 시도가 여러 갈래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 책이 독자를 견디기 어려운 자리에 남겨 두었다는 뜻이다. 유실이었든 의도였든, 마가복음을 물려받은 사람들은 그 상태로 두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그 참기 어려움은 앞에서 본 다른 문장들에서 마태와 누가가 보인 반응과 같은 종류다.

성격이 아니라 편집 원칙

흔적을 다시 모으면 이렇다. 문장은 거칠다. 그러나 이야기의 배치는 정교하고, 속도는 계산되어 있고, 자기 진영에 불리한 문장은 남아 있고, 결말은 닫히지 않는다. 이 넷을 함께 설명하는 것은 기질이 아니다. 기질로는 첫 항목만 설명된다.

함께 설명되는 것은 하나의 편집 원칙이다. 독자를 편안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 능력이 미치지 않은 자리를 지우지 않고, 제자들의 무지를 끝까지 고쳐 주지 않고, 증언의 출처가 가장 부끄러웠을 장면을 가장 길게 적고, 마지막에 안심할 문장을 놓아 주지 않는다.

이 원칙은 심리가 아니라 판단이다. 그리고 그 판단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십자가 장면에 적혀 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람의 입으로 처음 고백하는 인물은 제자가 아니라 처형을 집행한 로마 군인이고, 그 고백은 기적을 보고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가 숨을 거두는 것을 보고 나온다(15:39). 이해는 능력의 목격에서 오지 않고 죽음의 목격에서 온다는 구조다.

이 구조를 세우려면 제자들이 못 깨달아야 한다. 기적을 보고도 모르는 사람들이 없으면, 십자가를 보고 아는 사람의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제자들의 둔함은 실패담이 아니라 논증의 부품이다. 고향에서 권능을 행할 수 없었다는 문장도, 두 번 만져야 열린 눈도 같은 자리에 속한다. 능력이 신원을 증명한다는 노선을 이 책은 처음부터 막아 둔다.

그렇게 보면 닫히지 않은 결말도 부품이다. 여인들이 두려워 침묵한 채로 책이 끝나면, 그 뒤를 이어 말해야 하는 사람은 읽는 사람 자신이 된다. 결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결말의 자리가 비어 있다.

추론이 닿는 한계는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여기서 확인된 것은 한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한 문서의 일관성이다. 이 문서를 만든 것이 한 사람인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전승인지도 텍스트만으로는 정해지지 않는다. 급한 성격이니 소박한 성격이니 하는 서술이 그동안 쉽게 통용된 것은, 그것이 확인된 사실이어서가 아니라 문체에서 받은 인상을 사람의 형태로 되돌려 놓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의 일관성만큼은 텍스트에 남는다. 그 일관성이 가리키는 사람은 서두르는 사람도 소박한 사람도 아니다. 자기 이야기를 유리하게 다듬을 기회를 여러 번 받고 여러 번 거절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점은 마가복음을 읽는 방식을 바꾼다. 이 책의 불친절함은 손이 거칠어서 생긴 흠이 아니라, 독자에게 넘겨진 몫이다.

본문의 절 표기는 개역개정 장절 구분을 따랐다. 원어 낱말의 한글 표기는 통용되는 음차를 썼다. εὐθύς의 출현 횟수는 집계 기준에 따라 마흔한 번과 마흔두 번으로 갈리며, 역사적 현재의 횟수도 동사 분류 방식에 따라 편차가 있다. 마가복음 1장 41절의 두 독법 가운데 어느 것이 원래 본문인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