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 문학
묘비 세 문장으로 요약되는 작가, 파문당했다고 알려졌으나 파문되지 않은 작가, 노벨상을 한 표 차로 놓쳤다고 하는데 그 표차의 문서가 없는 작가. 카잔차키스를 둘러싼 통설 여섯 개를 확인된 사실과 맞대어 다시 세운다.
이라클리온을 둘러싼 베네치아 성벽의 가장 높은 지점, 마르티넨고 보루에 무덤 하나가 있다. 묘비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은 자유롭다는 세 문장이 새겨져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를 요약하는 문구로 세계 어디서나 인용되는 문장이다. 다만 지나치게 잘 요약되는 문장은 대개 생애의 모양을 지운다. 이 세 문장은 도착점의 선언이고, 그가 살아낸 74년은 마찰의 기록이었다.
마찰의 상대는 많았다. 오스만 지배기의 크레타, 베니젤로스의 그리스 정부, 소비에트 러시아, 그리스 정교회 성회의, 바티칸, 내전 이후의 우파와 그리스공산당, 그리고 그를 문학사에서 슬쩍 옮겨놓은 아테네의 문학사가들. 자유인의 표상으로 소비되는 이 인물은 실은 20세기 그리스의 거의 모든 제도와 부딪히면서, 그 마찰을 연료로 삼아 쓴 사람이었다. 아래는 그 이력과, 그 이력을 둘러싸고 굳어진 통설들의 검증이다.
출생지는 오스만 제국 크레타의 칸디예, 오늘날의 이라클리온이다. 크레타는 아직 그리스 국가에 속하지 않았고 반복된 봉기의 무대였다. 생년은 가족 기록을 기준으로 1883년 2월 18일(구력)이며, 이라클리온의 인구조사 기록에는 1881년으로 올라 있어 오래 혼동이 있었다. 아버지 미할리스 카잔차키스는 무장 봉기 집단을 이끈 사람이었고, 훗날 소설 「카펜단 미할리스」의 주인공 모델이 된다.
교육 경로는 크레타의 아이에게 흔한 것이 아니었다. 1897년 낙소스의 프란치스코회 계열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서유럽 문학을 익혔다.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아테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학위논문의 주제는 법과 국가의 철학에서의 프리드리히 니체였다. 1907년 파리로 건너가 앙리 베르그송의 강의를 들었고, 1909년 니체 논문을 프랑스어로 개작해 학위를 받았다. 데뷔는 1906년, 「우리 세기의 병」이라는 에세이와 소설 「뱀과 백합」이었으며 필명은 카르마 니르바미였다. 20대의 그리스 법학도가 인도·불교 어휘를 필명으로 골랐다는 사실은 이후 반복될 패턴의 첫 신호다.
귀국 후의 이력에는 문학사에서 잘 다루지 않는 대목이 있다. 사업이다. 1915년에는 아토스산의 목재를 반출하는 회사를 계획했고, 1917년에는 마니 지역 프라스토바에서 갈탄광을 열려 했다. 전시의 저열탄 수요를 노린 시도였고 둘 다 실패했다. 이때 고용한 인부의 이름이 요르기스 조르바스였다.
1919년 5월,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그를 신설 복지부의 총국장에 임명한다. 임무는 러시아 혁명 이후 캅카스에 갇힌 그리스인 약 15만 명의 귀환이었다. 파견단 명단에는 조르바스도 들어 있었다.
조르바가 소설이 되기까지 걸린 30년조르바는 문학적 발명 이전에 고용 관계의 상대였고, 실패한 사업의 동업자였으며, 국가 임무의 수행원이었다. 1917년의 광산에서 1946년의 소설까지 30년 가까이 걸렸다는 사실은 작품 구조와 직결된다. 「조르바」의 화자는 조르바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사람이며, 관찰의 우위를 끝까지 내려놓지 않는다. 이 소설은 자유인의 자서전이 아니라 자유인을 흠모한 기록자의 실패담으로 설계되어 있다.
1922년부터 빈과 베를린에 머물며 공산주의를 접했고 레닌에 경도되었다. 1925년부터 1929년까지 세 차례 소련을 방문해 좌익 반대파 작가 빅토르 세르주의 집에 머물렀고, 스탈린 체제가 굳어지는 과정을 보며 환멸했다. 1927년에는 루마니아 태생 작가 파나이트 이스트라티를 만났고, 1928년 1월 아테네 알람브라 극장에서 소련을 옹호하는 연설을 한 뒤 기소되었다. 1930년에는 저작 「금욕」을 이유로 무신론 재판에 부치겠다는 위협을 받고 파리와 니스에 머물렀다. 생계는 프랑스 아동서 번역과 두 권짜리 러시아 문학사 집필로 이었다.
같은 시기 그는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1926년 스페인 총리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인터뷰했고, 1936년에는 일간 카티메리니의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며 프랑코를 만났다. 2차 대전 기간에는 아이기나섬에 머물며 문헌학자 요아니스 카크리디스와 「일리아스」를 현대 그리스어로 옮겼다.
정치적 평가는 양쪽에서 동시에 부정적이었다. 우파는 그를 부도덕한 볼셰비키이자 러시아의 첩자로 몰았고, 그리스공산당과 소련은 그를 부르주아 사상가로 취급해 신뢰하지 않았다. 1956년 빈에서 국제평화상을 받았을 때 그리스 정부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1957년 그가 죽자 중국공산당은 위대한 작가이자 평화의 벗으로 애도했다.
양 진영에서 동시에 배척된 이력은 흔히 정신적 독립의 증거로 인용된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절충주의자도, 양쪽 모두에게 쓸모없는 사람도 같은 결과를 얻는다. 카잔차키스의 경우가 특별한 것은 어느 진영의 언어로도 번역되지 않는 어휘를 썼다는 점이며, 그 어휘의 출처는 1927년에 나온 얇은 책 한 권이다.
1927년에 발표한 「금욕」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영신수련」의 형식을 빌린 소책자다. 골자는 신의 지위를 뒤집는 데 있다. 신은 완결된 전능자가 아니라 위태로운 존재이고, 자비롭거나 전지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투쟁을 통해 구원되어야 한다. 물질이 정신으로 변형되는 과정 자체가 신의 구원 과정이다. 베르그송의 창조적 지속과 니체의 자기 극복을 결합한 착상이며, 그는 이 책을 1923년 베를린에서 독일·폴란드·러시아 공산주의자 서클의 영적 곤경을 표현하려 썼고 후공산주의 신조의 첫 외침으로 읽어달라고 적었다.
이 발명이 이후 모든 소설의 엔진이다. 「그리스도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의 마놀리오스, 「최후의 유혹」의 예수, 「신의 가난뱅이」의 아시시 프란치스코는 완결된 신을 예배하는 인물이 아니라 신을 만드는 노동에 동원된 인물이다. 신정론의 난제를 신의 미완성으로 해소하는 구조는 20세기 과정신학의 문제 설정과 겹치며, 카잔차키스를 화이트헤드 계열 신학과 나란히 놓는 연구가 이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완의 신이 치르는 대가신이 미완이라면 악의 문제는 설명되지만 구원의 확실성도 함께 사라진다. 카잔차키스의 인물들이 반복해서 도달하는 지점이 승리가 아니라 소진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스도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에서 그는 올바른 길을 위로 오르는 길이라고 정식화하는데, 이 정식은 방향만 지시하고 목적지를 말하지 않는다. 신비주의 전통의 깊이로 읽을 수도 있고, 논증이 끝나지 않은 자리로 읽을 수도 있다. 그의 소설이 종교 독자와 무신론 독자에게 동시에 인용되는 것은 이 미결 상태 덕분이다.
「최후의 유혹」의 서지는 그의 명성이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원고는 1951년에 완성되었고, 베르너 크렙스가 옮긴 독일어판이 1952년 베를린 헤르비히에서, 뵈리에 크뇌스가 옮긴 스웨덴어판이 같은 해 스톡홀름에서 나왔다. 그리스어 초판은 1955년 아테네의 디프로스 출판사에서 나왔다. 원어판이 번역판보다 3년 늦은 것이다.
바티칸이 이 소설을 금서목록에 올린 시점은 1954년이다. 즉 그리스어 초판이 나오기 전이다. 카잔차키스는 교황 비오 12세에게 전보를 보내 테르툴리아누스의 라틴어 문구를 인용했다. 주님, 당신의 법정에 상소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리스 국내에서 성회의가 그의 저작 전면 금지를 시도한 것은 그보다 뒤인 1955년 2월이며, 그 직전에는 1953년의 「카펜단 미할리스」가 함께 문제가 되었다.
순서가 중요하다. 그리스 국내 검열 논쟁이 시작되기 전에 그의 소설은 이미 북유럽과 독일 독자에게 도착해 있었다. 명성이 국외에서 먼저 만들어졌다는 통상적 서술은 은유가 아니라 서지적 사실이다. 그리고 이 구조는 검열의 효과를 뒤집었다. 금서 지정은 유통을 차단하는 대신, 이미 여러 언어권에서 팔리고 있던 책에 국제적 쟁점의 지위를 부여했다. 1954년의 등재가 이 작가를 세계적으로 알린 계기였다는 독일어권의 평가는 과장이 아니다.
규탄의 논거를 보면 판단의 성격도 드러난다. 성회의는 이 소설이 프로이트와 역사적 유물론의 착상에서 나왔으며 복음의 분별과 그리스도의 신인적 형상을 조야하고 저속하게 훼손한다고 규정했다. 1954년 당시 널리 읽힌 교회 신문은 그의 공산주의 이력을 근거로 규탄을 정당화했다. 내전이 끝난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은 그리스에서 신학적 이단과 정치적 불충은 사실상 같은 혐의로 취급되었고, 문학 판단의 형식을 띤 문서가 실제로 재던 것은 진영이었다.
가장 널리 퍼진 오류가 여기 있다. 파문 운동은 실제로 있었다. 다수의 정교회 성직자가 그의 저작을 규탄했고 파문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리스 교회 성회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청도 그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파문은 발효되지 않았고, 카잔차키스는 정교회에서 파문된 적이 없다.
그가 성직자들에게 보낸 답은 저주에 축복으로 답하는 형식이었다. 성직자들의 양심이 자신의 양심만큼 깨끗하기를, 그들이 자신만큼 도덕적이고 신앙적이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1957년 10월 26일 프라이부르크에서 그가 죽은 뒤 아테네에서 정식 장례 전례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시신은 이라클리온으로 옮겨져 성 미나스 대성당에 공개 안치되었고 11월 초 마르티넨고 보루에 매장되었다. 관을 따라간 인파는 도시의 규모에 비해 대단히 많았다.
틀린 문장이 살아남는 이유교회가 파문한 작가라는 문장은 책 표지와 영화 홍보 문구, 백과사전 항목, 국내 해설에 반복 등재되며 사실처럼 굳었다. 정정이 어려운 이유는 이 문장이 서로 다른 여러 당사자에게 유용했기 때문이다. 출판사에는 판매 문구였고, 반교권 독자에게는 교회의 야만을 입증하는 사례였고, 보수 성직자에게는 자기 진영의 단호함을 확인하는 서사였다. 각자 다른 이유로 같은 오류를 보존했다.
그런데 실제로 벌어진 일이 더 많은 정보를 준다. 교회는 파문에 이르지 못했고, 대성당은 그의 시신을 받았고, 저작 금지 시도는 관철되지 않았다. 제도의 규탄과 제도의 능력은 별개였으며, 1950년대 그리스 교회는 전자에는 능했으나 후자에는 그렇지 않았다.
노벨 문학상 관련 서술은 거의 모든 소개문에 같은 형태로 등장한다. 1957년 알베르 카뮈에게 한 표 차로 졌고, 카뮈가 카잔차키스야말로 자기보다 백 배 더 자격이 있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두 진술의 지위는 전혀 다르다.
먼저 확인되는 사실들. 노벨 재단의 지명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47년과 1950년부터 1957년까지 모두 아홉 개 연도에 후보로 지명되었고, 지명 건수는 14건이며 그중 두 번은 시인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와 함께였다. 1946년에는 그리스작가협회가 두 사람을 함께 추천했다. 1957년 수상자는 카뮈였다. 프라이부르크 병상에 있던 카잔차키스는 카뮈에게 축전을 보냈고, 카뮈는 그가 죽은 뒤 미망인 엘레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받은 영예가 카잔차키스에게 백 배 더 어울렸다고 적었다.
확인되지 않는 것은 표차다. 스웨덴 아카데미는 심사 표결의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다. 50년이 지나 열리는 것은 지명 기록과 심사위원회 문서이며, 최종 투표의 득표 수가 아니다. 한 표라는 숫자는 어떤 문서에도 근거를 두고 있지 않고, 같은 이야기가 1956년 후안 라몬 히메네스 수상 연도에도 몇 표 차라는 형태로 붙어 돌아다닌다.
숫자가 붙으면 문장은 검증된 것처럼 보인다. 이 착시가 그리스 국가와 교회가 그의 수상을 방해했다는 주장과 결합하면 국내적 순교 서사가 완성된다. 방해가 있었다는 주장 자체는 정황과 어긋나지 않는다. 1956년 빈 시상식에 정부가 불참한 것은 확인된 사실이고, 그를 공적 위험으로 규정한 국내 언론도 있었다. 그러나 정황과 표차는 다른 층위의 진술이며, 앞의 것으로 뒤의 것을 지탱할 수는 없다.
수상이 무엇을 바꿨을지도 따져볼 만하다. 그의 국제적 판매는 상 없이 확보되었고, 이후의 수용을 결정한 것은 1964년의 영화였다. 노벨상 이야기가 60년 넘게 반복되는 것은 상의 부재가 그의 위치를 위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독자층이 문학 제도의 인정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는 신호에 가깝다.
그가 쓴 언어는 그 자체로 입장 표명이었다. 20세기 전반 그리스에서 진지한 문학의 표준은 고전 그리스어에 가깝게 정제한 카타레부사였고, 민중의 구어인 데모티키는 격이 낮은 언어로 취급되었다. 카잔차키스는 데모티키를 택했고, 거기에 크레타 방언의 어휘와 여행 중 들은 농민의 비유를 대량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편지에서 민중의 정신을 담기 위해, 그리고 구어로도 예술이 가능함을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썼다고 밝혔다. 당시 언어 문제는 미학이 아니라 정치였고, 그의 선택은 문단의 절반을 적으로 만들었다.
그가 스스로 대표작으로 여긴 것은 소설이 아니라 서사시였다. 1924년에 시작해 1938년에 완성한 「오디세이아」는 24개 랍소디아, 33,333행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귀향 이후에 다시 떠나는 이야기이며, 그의 철학 전체를 담으려 한 기획이었다. 비평은 갈라졌다. 전례 없는 서사시라는 평가와, 오만한 기획이라는 평가가 동시에 나왔고 그 분열은 지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가장 자주 반복되는 비판은 과잉이다. 화려한 수사, 난해한 은유, 초인적 주인공. 이에 대한 반론도 오래되었다. 그의 연구자 피터 비엔은 그 은유들이 카잔차키스가 그리스를 돌며 실제로 들은 농민의 말이고, 사라질 표현을 보존하려는 의도가 개입했다고 본다.
양쪽이 동시에 맞다. 어휘의 보존과 산문의 가독성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지 않으며, 카잔차키스는 전자를 선택했다. 결과는 번역에서 뒤집힌다. 그리스어 원전의 저항적 질감은 번역에서 대개 매끄러워지고, 그래서 국외 독자가 만난 카잔차키스는 아테네의 비평가가 다툰 카잔차키스와 다른 작가였다. 그의 국외 명성과 국내 냉대를 동시에 설명하는 것은 사상의 급진성보다 이 번역상의 손실이다. 번역은 그의 약점을 걸러내고 강점만 통과시켰다.
국내 평가의 결정적 장면은 1949년에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디마라스의 「그리스 문학사」는 오랫동안 표준으로 쓰인 책인데, 여기서 카잔차키스의 작업은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그 자신은 민족의 교육자로 분류된다. 즉 교육학의 영역으로 이송된다.
이 처리 방식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교육학으로 옮기는 것은 부정이 아니라 격하이며, 논쟁의 면제이기도 하다. 문학적으로 논할 대상이 아니라고 선언하면 그의 야심과 실패를 문학의 척도로 따질 의무가 사라진다. 국가의 문학 정전을 정비하던 시기의 문학사가에게 이는 가장 경제적인 처리였다.
가장 헌신적인 제자였던 판델리스 프레벨라키스조차 애증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는 스승을 사랑했고 부인했고 다시 사랑했다고 적었으며, 소설 삼부작에서는 카잔차키스를 모델로 한 인물이 몸속에서부터 썩어 죽는다. 프레벨라키스가 스승에게 물은 혐의는 그리스 전통에 낯선 시간성을 들여왔다는 것이었다. 세페리스를 포함한 보수 진영도 논쟁을 같은 자리로 좁혔다. 다윈과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베르그송을 붓다와 수피 신비주의, 카발라와 함께 들여온 사람을 초월적 헬레니즘의 건축 안에 배치할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국외의 혹평도 있었다. 나보코프는 그를 이류이자 과대포장된 한때의 이름으로 일축했고, 고어 비달은 「최후의 유혹」을 잡초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죽은 풍경에 비유했다. 반대편에는 해럴드 블룸이 있다. 「서양의 정경」 목록에 실린 유일한 현대 그리스 산문은 카잔차키스의 소설이다.
두 척도는 화해하지 않는다이 분열은 취향의 차이가 아니라 척도의 차이다. 형식 혁신을 기준으로 삼으면 카잔차키스는 모더니즘의 문턱을 넘지 못한 작가다. 자유간접화법과 파편화된 서술이 표준이 되던 시기에 그는 설교를 삽입했고, 서사의 긴장을 스스로 끊었다. 반면 서사의 발명력과 사상적 야심을 기준으로 삼으면 20세기 그리스에서 비교 대상이 없다. 완결된 인물을 하나라도 만들어낸 그리스 소설가는 드물고, 조르바만큼 국경 밖에서 살아남은 인물은 없다.
두 척도가 화해하지 않으므로 그의 정경 내 위치는 지금도 고정되지 않는다. 학위논문과 연구서는 계속 나오고, 독자는 계속 늘고, 비평가는 계속 유보한다.
1946년 초판의 그리스어 제목은 「비오스 카이 폴리테이아 투 알렉시 조르바」, 옮기면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이다. 비오스 카이 폴리테이아는 임의로 고른 표현이 아니다. 성인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하는 정교회 성인전의 관습적 표제 형식이다. 제목 자체가 이 소설이 어떤 장르를 차용하고 있는지 밝히고 있었다.
영어 제목은 Zorba the Greek이 되었다. 성인전의 형식이 종족 라벨로 치환된 것이다. 1952년 칼 와일드먼의 영역이 이 제목으로 나왔고, 2014년 피터 비엔이 그리스어에서 직접 옮긴 완역본은 부제에 성인전 형식을 복원해 넣었다. 60년 넘게 걸린 복원이었다.
그 사이에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1964년 미할리스 카코야니스의 영화다. 앤서니 퀸의 연기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음악은 아카데미 3개 부문 수상과 함께 현대 그리스의 이미지를 새로 만들었다. 시르타키 선율은 비공식 국가처럼 쓰이게 되었고, 세계 어느 도시에나 조르바라는 이름의 식당이 생겼다. 카잔차키스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소설이 아니라 이 영화를 통해서였다.
제목의 변경은 사소한 편의가 아니라 해석의 방향 전환이다. 성인전으로 읽으면 조르바는 화자가 흠모하는 성인이고, 소설은 흠모가 어떻게 실패하는지를 기록하는 글이 된다. 종족 라벨로 읽으면 조르바는 그리스인의 전형이 되고, 소설은 민족지가 된다. 오늘날 널리 유통되는 독법 — 삶을 즐기는 자유인과 머리만 큰 지식인의 대립 — 은 두 번째 독법의 산물이다.
소설의 실제 어조는 그 독법과 어긋난다. 지배적인 정조는 향락이 아니라 회상과 인내, 그리고 화자의 자기 아이러니다. 독일 점령기에 쓰인 글이라는 사실도 함께 놓아야 한다. 영화가 그것을 에피쿠로스적 해방으로 재해석했고, 전후 유럽이 프랑스 실존주의의 침울함에 지쳐 있던 시점이 그 해석을 반겼다. 카잔차키스가 전후 출판 산업의 발명품이라는 비판까지 나온 배경이 여기 있다. 그 비판은 지나치지만, 조르바 수용의 절반이 텍스트 밖에서 결정되었다는 지적은 남는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75년이다. 그 뒤 40여 년 동안 유통된 한국어판은 영어판을 옮긴 중역이거나, 그리스어에서 프랑스어와 영어를 거쳐 들어온 삼중역이었다. 널리 읽힌 이윤기 역본이 후자에 해당한다. 그리스어 원전에서 직접 옮긴 번역은 2018년 5월에야 나왔다. 한국외국어대 그리스·불가리아학과 명예교수 유재원이 옮기고 문학과지성사가 펴낸 판본이다.
두 판본을 나란히 놓으면 경로의 차이가 문장 단위로 드러난다. 첫 문장에서 지명에 설명을 붙일지, 조르바의 이름을 먼저 노출할지, 술집인지 카페인지, 하숙집인지 집인지가 갈린다. 원전 번역은 오르탕스 부인의 어긋난 그리스어 발음을 살리고, 조르바의 거친 비유를 완충 없이 옮긴다. 중역본은 읽기가 매끄러운 대신 그 거칠기를 상당 부분 흡수했다.
한국에서 조르바가 자유의 교사로 읽힌 데에는 이 경로가 작용했다. 세 언어를 거치는 동안 크레타 방언의 마찰음과 화자의 자기 아이러니는 깎여나가고, 남는 것은 격언으로 잘라내기 좋은 문장들이다. 강연과 자기계발 서적이 인용하는 카잔차키스는 대개 이 잔여물이며, 원전 번역이 나온 뒤에도 인터넷에 유통되는 인용문의 출처는 여전히 중역본인 경우가 많다.
파문 이야기 역시 국내 해설에 오래 남아 있었다. 두 오류가 같은 경로로 들어왔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작품 밖의 서사는 작품보다 옮기기 쉽고, 검증 비용도 들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서 여성 인물은 반복해서 살해되거나 제거된다. 「조르바」의 과부와 오르탕스 부인, 「카펜단 미할리스」에서 남성들 사이에 놓인 여성들이 그렇다. 여성 혐오라는 지적은 오래되었고 근거가 없지 않다.
다른 독법도 제시되어 있다. 가부장제가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한 감정들 — 공감, 애정, 연민 — 이 남성 주인공의 상승 과정에서 제거되는 구조를 소설이 그려 보인다는 해석이다. 「카펜단 미할리스」를 애국 서사가 아니라 가부장제의 내부 붕괴로 읽는 시각도 여기서 나온다.
두 독법은 배타적이지 않다. 쟁점은 텍스트가 그 제거를 비판적으로 다루는가, 수행하는가다. 카잔차키스의 문장은 대체로 후자에 가깝다. 서술이 인물의 폭력에 거리를 두지 않고 상승의 수사로 감싸기 때문이며, 이는 그의 신학이 요구하는 형식과도 맞물린다. 신을 만드는 노동에 인물을 동원하는 서술 구조에서 연민은 지체이자 유혹으로 배치된다. 「최후의 유혹」의 마지막 유혹이 평범한 가정생활이라는 설정 자체가 그 배치의 가장 선명한 사례다.
1957년, 백혈병을 안고 중국과 일본을 여행한 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코펜하겐을 거쳐 프라이부르크 대학병원으로 옮겨졌고 10월 26일 사망했다. 74세였다. 사인에 관해서는 중국에서 접종한 백신의 합병증과 유행성 독감이 함께 거론된다.
70년이 지난 지금, 그가 남긴 것 가운데 오히려 커진 것은 문체가 아니라 신학적 착상이다. 구원되어야 하는 신, 신성의 훼손이 아니라 신성의 조건으로 다루어지는 인간 예수 — 1955년에 금서 사유였던 이 발상은 20세기 후반 기독교 문학과 신학의 익숙한 어휘가 되었다. 규탄받던 자리가 표준이 된 셈이다. 정교회 연구자들이 그를 신학자가 아니라 소설가로, 교리가 아니라 개인의 투쟁을 쓴 사람으로 재평가한 것도 같은 흐름이다.
반대로 시간이 깎아낸 것은 그의 확신이다. 33,333행의 서사시는 학위논문 밖에서 거의 읽히지 않고, 후공산주의 신조라는 자기 규정은 그 시대의 문서로 남았다. 그는 지금도 가장 많이 번역된 그리스 작가이지만, 그 목록의 무게는 네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자서전에 거의 다 걸려 있다.
정경 안의 위치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실패의 증거로도 지속의 조건으로도 읽힌다. 아테네의 문학사는 그를 교육학으로 옮겼고, 모더니즘의 척도를 든 비평가들은 그의 수사를 문제 삼았고, 국외의 대가들은 이류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책은 계속 새로 번역된다. 2014년의 영어 완역과 2018년의 한국어 원전 번역이 60년 뒤에 나온 것은 논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번역이 갱신되는 작가는 여전히 읽을 것이 남아 있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