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3년 제네바에서 한 사람이 산 채로 불에 탔다. 그 일을 두고 장 칼빈을 잔인한 사람이라 부르는 오랜 관행이 있다. 사건의 경과를 하나씩 따라가 보면, 정당한 비판은 그의 성격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칼빈이 잔인한 사람이었다는 주장은 대개 하나의 사건에 기대고 있다. 1553년 10월 27일, 스페인 출신 의사이자 신학자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 성문 밖 샹펠 언덕에서 화형당한 일이다. 이 사건은 500년 가까이 칼빈의 이름에 붙어 다녔고, 그의 신학 전체를 불신할 근거로도 쓰였다.
그런데 "잔인했다"는 말은 두 가지 아주 다른 뜻으로 쓰인다. 하나는 그 사람의 성격이 가학적이고 남의 고통을 즐겼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사람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고 그 일을 정당하다고 여겼다는 뜻이다. 앞의 것은 인격에 대한 진단이고, 뒤의 것은 행위와 신념에 대한 판단이다. 두 뜻이 한 단어에 뭉쳐 있는 탓에 논쟁이 자꾸 헛돈다. 사료를 따라가면 앞의 혐의는 지탱되지 않고, 뒤의 혐의는 부인할 수 없으며, 정작 물어야 할 것은 세 번째 질문임이 드러난다. 그가 물려받아 다시 세운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먼저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봐야 한다. 미카엘 세르베투스(스페인 이름 미겔 세르베토, 1509 또는 1511~1553)는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 출신이다. 툴루즈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신학 논쟁에 빠져들었고, 뒤에 파리에서 의학을 배웠다. 삶의 상당 기간을 미셸 드 빌뇌브라는 가명으로 살았다. 그 이름으로 프랑스 남동부 비엔에서 대주교의 주치의 노릇을 했다.
그는 두 방향으로 이름을 남겼다. 의학에서는 피가 심장의 오른쪽에서 폐를 거쳐 다시 심장의 왼쪽으로 돌아온다는 사실, 곧 폐순환을 유럽에서 처음으로 활자에 담았다. 그때까지 유럽 의학은 고대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의 설명을 따라 피가 심장 한가운데 칸막이의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스며 건너간다고 믿었다. 세르베투스는 그 통설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다만 최초라는 말에는 단서가 붙는다. 13세기 이집트 카이로에서 활동한 의사 이븐 알나피스가 이미 같은 경로를 기술해 두었으나, 그 저작은 20세기에 재발견될 때까지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른 채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기이한 것은 이 의학적 내용이 실린 자리다. 그것은 해부학 책이 아니라 1553년에 몰래 찍어 낸 신학서 『기독교 회복』 안에 들어 있었다. 세르베투스에게 영혼은 피 속에 깃들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이었으므로, 피가 어떻게 도는지는 신학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 책이 그를 죽였고, 책도 함께 불탔다. 오늘날 남아 있는 원본은 세 부뿐이다.
신학에서 그는 스무 살 무렵에 이미 유럽 전체를 적으로 돌려놓았다. 1531년에 낸 『삼위일체의 오류에 관하여』가 그 시작이었다.
세르베투스에게 걸린 혐의는 두 가지다. 둘 다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견해 차이로 보이지만, 16세기에는 각각이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한 분 하나님이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세 위격(位格)으로 존재한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다. 세 신이 있다는 뜻도 아니고, 한 신이 세 가지 역할을 번갈아 맡는다는 뜻도 아니다. 본질은 하나이되 위격은 셋이라는, 상당히 정교한 규정이다. 이 표현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거쳐 확정되었고, 그 결과물이 니케아 신조다. 동방과 서방, 뒤에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지고도 이 교리만은 공유했다.
세르베투스는 이 교리가 성경에 없는 철학적 조작이라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삼위일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교회가 제국과 결합하면서 타락한 흔적이었다. 참 하나님은 성부뿐이고,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있던 제2의 위격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낸 방식이 육신을 입은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런 입장을 반삼위일체론이라 부른다. 그는 삼위일체를 믿는다면서 세 위격을 말하는 것은 결국 넷을 상상하는 셈이라고 비꼬았고, 이 표현은 뒷날 그의 기소장에 그대로 인용된다.
두 번째 혐의는 유아세례 거부였다. 그는 갓난아이에게 세례를 주는 관행이 성경에 근거가 없으며 사탄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썼다. 오늘날 이 문제는 교단마다 다르게 정리된 실천의 차이로 취급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16세기 유럽에서 세례는 단지 종교 의례가 아니라 사회의 성원권을 부여하는 절차였다. 아이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의 일원이 되는 동시에 그 도시의 구성원이 되었다. 세례 기록이 곧 출생 기록이었고, 교회 명부가 곧 주민 명부였다.
따라서 유아세례를 부정한다는 것은 교회와 도시가 겹쳐 있던 질서 전체를 흔드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 주장을 편 집단이 재세례파(어른이 되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본 사람들)였고, 이들은 가톨릭·루터파·츠빙글리파 모두에게 쫓기며 수천 명이 처형됐다. 신성로마제국 법에서 재세례파로 분류되는 것은 그 자체로 사형 사유였다.
세속 권력에는 이쪽이 더 위협적이었다. 삼위일체 부정이 신학자들의 분노를 샀다면, 유아세례 거부는 행정관들의 공포를 건드렸다.
세르베투스는 1546년 무렵부터 칼빈에게 편지와 원고를 보내 논쟁을 걸었다. 칼빈의 주저 『기독교강요』에 반박을 잔뜩 적어 돌려보내기도 했다. 칼빈은 처음에는 응답하다가 곧 왕래를 끊었다. 그러나 받은 문서들은 보관해 두었다. 이 문서들이 뒷날 증거가 된다.
1553년 2월, 제네바로 피신해 있던 상인 기욤 트리가 프랑스 비엔의 가톨릭 당국에 세르베투스의 정체를 고발했다. 고발을 뒷받침하는 문서는 칼빈 쪽에서 나왔다. 세르베투스는 비엔의 종교재판에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았고, 탈옥했다. 궐석 상태에서 그의 인형과 책이 대신 불태워졌다.
여기서 그의 선택이 오래 수수께끼로 남았다. 탈옥한 그는 이탈리아로 향하던 길에 하필 제네바를 지났고, 1553년 8월 13일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가 알아보는 사람이 생겨 체포됐다. 왜 하필 자신을 가장 위험하게 여길 도시에 들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여기가 사실관계를 가장 조심해서 봐야 할 대목이다. 칼빈을 옹호하는 쪽과 고발하는 쪽이 각각 절반씩만 말하기 때문이다.
먼저 칼빈이 하지 않은 일이다. 그는 판사가 아니었다. 제네바에서 재판과 판결을 맡은 기구는 소의회(Petit Conseil)라는 세속 행정기구였고, 칼빈은 그 구성원이 아니었다. 그는 시민도 아니었다. 제네바는 주민을 시민·부르주아·거주민·토착민으로 나누어 권리를 달리 주었는데, 프랑스에서 건너온 칼빈은 오랫동안 투표권조차 없는 거주민 신분이었다. 그가 부르주아 신분을 받은 것은 세르베투스가 죽고 6년이 지난 1559년, 사망 5년 전의 일이다. 게다가 1538년에는 반대파에 밀려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가 1541년에야 돌아왔고, 1553년 당시에는 아미 페랭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이 시정을 장악하고 있어서 그의 입지는 오히려 위태로웠다. 재판 바로 전해인 1552년에는 반대파에 밀려 사임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다음은 칼빈이 한 일이다. 그는 고발 논거를 작성했다. 형식상 고발인은 칼빈의 비서였던 니콜라 드 라 퐁텐이었고, 그가 38개 조항의 고발장을 제출했다. 재판이 열리자 칼빈은 검찰 측 증인으로 나서 신학 감정을 맡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7년 전에 이미 이렇게 써 놓았다.
1546년 2월 기욤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칼빈은,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온다면 자기 권한이 통하는 한 그를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적었다. 재판이 진행되던 1553년에도 파렐에게 사형 판결이 나오기를 바란다고 썼다.
흔히 변호 논거로 제시되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칼빈이 화형 대신 참수를 요청했으나 의회가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지만 변호가 되지 못한다. 형벌의 잔혹성만 문제 삼았다는 것은 처형 자체에는 동의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요청은 그가 결과를 미리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의회는 판결 전에 베른·취리히·바젤·샤프하우젠 등 스위스의 다른 개신교 도시들에 의견을 물었고, 모두 유죄와 처형에 찬성했다. 이 자문 절차는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해 준다. 하나는 결정이 칼빈 한 사람의 손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결정이 개신교 세계 전체의 합의였다는 것이다. 뒤의 함의가 더 무겁다.
"당대 기준으로는 평범했다"는 변호는 자주 나온다. 사실관계만 놓고 보면 근거가 있다.
세르베투스는 이미 가톨릭 종교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도망친 상태였다. 붙잡혔다면 비엔에서 화형당했을 것이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에서는 메리 1세 치하 3년여 동안 약 280~300명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다.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토머스 크랜머를 비롯한 성직자부터 이름 없는 장인과 부녀자까지 포함된 숫자다. 저지대(오늘날의 네덜란드·벨기에)에서는 카를 5세가 1550년 이른바 '피의 칙령'을 내려 이단 색출을 제도화했다. 이단 처형은 16세기 유럽의 예외가 아니라 표준 법률이었다.
그러나 이 변호는 결정적인 지점에서 흔들린다. 그 시대에도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1515~1563. 프랑스 출신 인문학자이자 성경 번역자로, 한때 제네바에서 칼빈과 함께 일했으나 1544년 갈등 끝에 쫓겨나 바젤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세르베투스 처형 직후 가명으로 『이단자들에 관하여 — 그들을 박해해야 하는가』를 펴냈다. 이 책은 관용을 옹호한 고대와 당대 저자 스물다섯 명의 글을 모은 것이었는데, 그중에는 젊은 시절의 루터와 칼빈 자신의 글도 들어 있었다.
이듬해 그는 칼빈의 반박에 다시 응수하며 한 문장을 남겼다.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것은 교리를 지키는 일이 아니라 그저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문장은 뒷날 종교적 관용 논쟁의 출발점으로 인용된다.
그러므로 "당대 기준"이라는 잣대는 그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다. 카스텔리오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시대에 다른 판단이 불가능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칼빈을 당대 평균에 놓으면 평범해 보이고, 카스텔리오 옆에 놓으면 유죄가 된다. 어느 잣대를 쓸지가 이 논쟁의 실질이다.
오늘날 널리 퍼진 잔혹한 칼빈의 이미지는 사료보다 후대의 서술에 더 많이 빚지고 있다. 계몽주의 논객들의 반교권 서술이 한 층을 이루었고, 결정적인 것은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1936년에 낸 『카스텔리오와 칼빈』이었다.
이 책의 위치를 알면 서술의 성격이 보인다. 츠바이크는 유대인이었고, 나치가 부상하던 시기에 오스트리아를 떠나야 했던 사람이다. 그는 칼빈을 독재자의 원형으로, 카스텔리오를 펜 하나로 폭력에 맞선 지식인으로 그렸다. 곧 이 책은 16세기를 빌려 20세기를 겨눈 정치적 알레고리다. 문학적으로 강력한 만큼 역사 서술로서는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각주도 출처도 거의 없다.
그 결과 사실과 어긋나는 그림이 널리 퍼졌다. 칼빈은 제네바를 장악한 지배자가 아니라, 1555년까지 반대파에게 계속 밀리던 투표권 없는 외국인 목사였다. 여기에 그의 예정론에 대한 신학적 거부감이 인격에 대한 평가로 옮겨붙은 면도 크다. 교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을 말한 사람의 성품을 의심하게 되는 흔한 경로다.
다만 이 정정이 면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츠바이크가 과장했다는 것과 칼빈이 결백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변호가 가장 크게 무너지는 자리는 재판이 아니라 그 이후에 있다.
처형 넉 달 뒤인 1554년 2월, 칼빈은 『삼위일체 정통 신앙 변호』를 펴냈다. 세르베투스의 오류를 반박하는 동시에, 이단을 세속 권력이 처벌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원리를 옹호한 책이다. 같은 해 그의 후계자 테오도르 베자도 『세속 위정자에 의한 이단 처벌론』을 내어 같은 주장을 폈다. 베자는 양심의 자유라는 요구를 악마의 교리라 부르고, 이단을 태우는 것을 늑대를 잡는 일에 비유했다.
이 사실이 앞의 변호 구도를 바꾼다. 만약 칼빈이 시대의 관행에 떠밀려 마지못해 동의했을 뿐이라면, 처형 이후에 그 원리를 이론으로 정리해 출판할 이유가 없다. 그는 사후에 그것을 자기 신학으로 세웠다. 관행의 피고인이 아니라 원리의 저자가 된 것이다.
여기서 논쟁의 성격이 달라진다. 이제 문제는 한 사건에서의 처신이 아니라, 그 처신을 낳은 사고 구조가 그의 신학 안에 있느냐로 옮겨 간다.
세르베투스 사건을 칼빈 신학의 결함을 보여 주는 증거로 쓰는 논법은 크게 세 갈래다. 셋의 설득력은 서로 크게 다르므로 뭉뚱그리면 안 된다.
"이런 일에 가담한 사람의 신학이 온전할 리 없다"는 형태다. 논리학에서 발생론적 오류라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어떤 주장의 참과 거짓은 그 주장을 한 사람의 행실과 별개로 결정된다. 이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를 강제로 진압하는 데 찬성했고, 루터는 말년에 유대인에 대한 폭력적 저술을 남겼으며, 츠빙글리는 재세례파 처형에 관여했다. 이 논법은 칼빈만 겨눌 수 없다.
이것은 인신공격이 아니라 정합성에 대한 비판이라 반박하기 어렵다. 핵심 고리는 『기독교강요』 마지막 권의 시민정부론이다.
십계명은 흔히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넷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다른 신을 두지 말 것, 우상을 만들지 말 것,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 것, 안식일을 지킬 것)이고, 뒤의 여섯은 사람에 대한 의무(살인·간음·도둑질 금지 등)다. 이를 각각 첫 돌판, 둘째 돌판이라 부른다.
근대 국가는 둘째 돌판에 해당하는 영역만 법으로 다룬다. 신을 어떻게 섬기는지는 개인의 문제로 남겨 둔다. 칼빈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는 시민정부의 임무가 공공질서 유지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예배를 보호하고 건전한 교리를 지키는 데까지 미친다고 규정했다. 우상숭배와 공적 신성모독을 막는 것이 통치자의 직무라는 것이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면 결론은 자동으로 따라 나온다. 이단은 사적인 견해가 아니라 공적 범죄가 되고, 그것을 처벌하는 일은 국가의 종교적 의무가 된다. 세르베투스 처형은 이 구조의 우발적 일탈이 아니라 논리적 귀결이라는 것이 이 논법의 요지다. 1554년의 저술은 이 해석을 크게 뒷받침한다.
이 갈래에서 세 개의 세부 논거가 파생된다.
"버림받기로 정해진 자는 어차피 회심할 수 없으니 제거해도 무방하다"는 추론이 칼빈의 예정론에서 나온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누구를 구원할지 정해 두었다는 교리를 예정론이라 한다. 칼빈은 여기에 반대편도 함께 두었다. 구원으로 택함받은 자가 있듯 버려진 자도 있다는 것으로, 이를 유기(遺棄)라 하고 둘을 묶어 이중예정이라 부른다.
이 논법이 약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칼빈 자신이 누가 유기되었는지는 감추어진 작정이어서 인간이 식별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판별 불가능한 범주는 처형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둘째, 역사적 상관관계가 없다. 예정론을 그대로 물려받은 로저 윌리엄스는 17세기 아메리카에서 정교분리와 관용을 주장한 선구자였고, 반대로 예정론을 거부한 가톨릭·루터파·츠빙글리파는 모두 이단을 처형했다. 셋째, 이단 처형론의 실제 뿌리가 다른 곳에 있다. 이것이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이단을 죽이는 제도는 종교개혁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개혁보다 천 년 이상 앞서 완성되어 있었다. 다만 법적 뿌리와 신학적 뿌리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
출발점은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칙령이다. 이 칙령은 니케아 신앙을 제국의 유일한 정통으로 규정했고, 그 밖의 사람들을 정신 나간 자로 부르며 처벌을 예고했다. 법적 개념으로서의 '이단'이 이때 생겼다. 그 전까지 교회는 자기 판단을 국가의 물리력으로 집행할 통로를 갖고 있지 않았다.
불과 5년 뒤인 385년, 스페인 아빌라의 주교 프리스킬리아누스가 트리어에서 여섯 명과 함께 참수됐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 혐의로 사람이 죽은 첫 사례로 꼽힌다. 주목할 것은 당대의 반응이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투르의 마르티누스, 교황 시리키우스가 모두 이 처형에 반대했다. 교회 재판에 속할 사안을 세속 법정이 처리했다는 이유가 컸다. 다시 말해 이 제도는 처음부터 만장일치로 출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흐름은 굳어졌다. 로마법 전통은 5세기 테오도시우스 법전과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거쳐 중세로 넘어갔고, 형벌의 형태를 확정한 것은 세속 군주였다. 1224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교회 법정에서 유죄가 확정된 이단을 화형에 처한다고 제국법으로 규정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이 입법을 승인하되 누구를 이단으로 볼지 판정하는 권한은 교회가 갖는다고 정리했다. 판정은 교회가, 집행은 국가가 맡는 분업이 이렇게 완성됐다. 세르베투스를 태운 불의 법적 계보는 여기까지 곧장 이어진다.
법이 있어도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따로 필요했다. 그 논리를 서방 교회에 물려준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는 원래 강제 개종에 반대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에서 도나투스파와 오래 싸우며 입장을 바꾸었다. 도나투스파는 박해 시기에 신앙을 저버렸던 성직자가 집전한 성례를 무효로 보고 재세례를 요구한 집단으로, 아프리카 교회를 둘로 갈라놓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 권력을 동원한 진압을 지지하면서 누가복음 14장 23절의 한 구절을 근거로 삼았다. 잔치에 사람이 차지 않자 주인이 종에게 억지로라도 데려와 집을 채우라고 명한 대목이다. 이 구절은 이후 천 년 동안 강제의 근거로 인용된다.
그의 논리는 두 가지였다. 이단은 영혼을 죽이므로 육신을 죽이는 살인보다 무겁다는 것, 그리고 강제는 증오가 아니라 사랑의 징계라는 것이다. 다만 그 자신은 사형에는 일관되게 반대해 벌금·태형·유배까지만 인정했다.
사형까지 밀고 나간 사람은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다. 그는 『신학대전』에서 이렇게 논증했다. 화폐를 위조한 자를 세속 권력이 곧바로 사형에 처한다면, 화폐보다 훨씬 중요한 신앙을 위조한 자는 더욱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일시적 삶을 지탱하는 화폐와 영혼을 살리는 신앙을 비교하는 이 논법은 중세 서방의 표준 논거가 되었다.
여기서 앞의 세 번째 갈래로 돌아가 보면 답이 분명해진다. 이단 처형론의 신학적 뿌리는 예정론이 아니라 이 논증들이다. 칼빈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물려받아 자기 언어로 다시 확인한 사람이다.
법과 신학 아래에 한 층이 더 깔려 있다. 교회와 사회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전제다.
세례가 시민권이고 정통 신앙이 공동체의 결속 자체였던 구조에서, 이단은 개인의 견해 차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를 해체하는 반역이자, 신의 진노를 불러 역병과 흉년과 전쟁을 초래하는 공적 위험으로 이해됐다. 오늘날 전염병 방역에 견줄 만한 위기 인식이 여기에 있었다. 도시 하나가 이단을 방치했다는 소문이 돌면 주변 도시들이 그 도시 전체를 위험 요소로 취급했다. 제네바 의회가 판결 전에 다른 스위스 도시들에 의견을 구한 것도 이 압력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권위 구조와 구원론을 뒤집었지만 이 전제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오히려 각 영방과 도시가 하나의 신앙을 갖는다는 원칙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통치자가 자기 영토의 종교를 정한다는 규칙으로 제도화됐다. 개신교 도시들이 가톨릭과 똑같은 일을 반복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므로 처형의 실제 동력은 특정 교파의 교리가 아니라 이 사회 구조였다. 관용이 자리 잡은 것도 어느 쪽이 신학 논쟁에서 이겼기 때문이 아니다. 종교전쟁이 양측을 소진시키고, 근대 국가가 종교적 소속과 정치적 소속을 분리한 뒤에야 가능해졌다. 카스텔리오의 문장이 옳았다는 것이 판명되기까지 150년이 넘게 걸렸다.
정리하면 이렇다.
성격적 가학성이나 개인적 폭정이라는 의미의 잔인함은 사료가 뒷받침하지 않는다. 칼빈은 제네바를 손에 쥔 지배자가 아니었고, 그 그림은 상당 부분 20세기의 정치적 알레고리와 계몽주의의 반교권 서술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결백한 것도 아니다. 그는 고발 논거를 썼고, 검찰 측 증인으로 나섰으며, 7년 전에 이미 살려 두지 않겠다고 적었고, 처형 이듬해에는 그 원리를 신학으로 옹호했다. 화형 대신 참수를 요청한 것은 방식을 문제 삼았을 뿐 처형 자체에는 동의했음을 드러낼 뿐이다.
다만 이 책임의 성격을 정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그가 대표한 것은 개인의 잔인함이 아니라 시대 전체가 공유한 관용의 부재였다. 380년의 칙령, 아우구스티누스의 성경 해석, 아퀴나스의 논증, 1224년의 제국법, 그리고 세례가 곧 시민권이던 사회 구조가 그 앞에 있었다. 그는 그 유산을 물려받아 실행하고 정당화했다.
그러므로 물어야 할 질문은 칼빈이 잔인한 사람이었느냐가 아니다. 첫 돌판을 국가의 손에 맡긴 정치신학이 그의 체계에 고유한 것인가, 아니면 시대 전체가 공유한 전제인가 하는 물음이다. 답은 후자에 가깝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명시적으로 이론화하고 문서로 변호했다는 점에서, 그는 시대의 단순한 피고인으로 남지도 않는다. 종교적 확신이 사람의 목숨보다 앞설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 그 믿음을 자기 신학의 일부로 세웠다는 것. 비판이 겨눌 곳은 그 자리다.
그리고 이 결론에는 조건이 하나 붙는다. 카스텔리오라는 반례가 있었기에 이 비판이 성립한다는 점이다. 그가 없었다면 "누구도 달리 생각할 수 없던 시대였다"는 변호가 통했을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이, 나머지 모두를 시대의 포로에서 판단의 주체로 되돌려 놓는다.
본문의 사실관계는 사건 연표, 재판 기록에 관한 연구, 그리고 관련 저작의 서지 정보를 교차 확인해 정리했다. 저지대에서 카를 5세 치하에 처형된 인원의 총수는 추정치가 연구마다 크게 갈려 수치를 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