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개입을 걷어낸 각색이 얻은 것과 잃은 것
놀란의 「오디세이」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신들이 하던 일을 날씨와 죄책감에, 그리고 원전에 없던 실제 역사에 넘겼다. 그 교환으로 부하들의 죽음은 신의 징벌이 아니라 지휘관의 판단이 부른 결과가 되었고, 트로이아 함락은 한 문명을 끝낸 사건이 되었다. 다만 같은 칼질에 서사시가 주인공을 주인공으로 확인하던 절차들도 함께 잘려 나갔고, 그 손실은 신을 지운 것과는 다른 종류의 손실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오디세이」는 2026년 7월 17일 북미에서, 8월 5일 한국에서 개봉했다. 러닝타임은 172분, 제작비는 약 2억 5천만 달러로 알려져 있으며, 아이맥스(IMAX) 70밀리미터 필름 카메라만으로 전편을 촬영한 첫 장편 영화다. 아이맥스 70밀리미터는 일반 극장 필름보다 훨씬 큰 면적에 화면을 담는 대형 필름 규격으로, 화면의 해상도와 세로 시야가 넓어지는 대신 카메라가 무겁고 촬영 비용이 크게 오른다. 개봉 첫 주에만 전 세계에서 2억 6,400만 달러를 벌어 놀란의 역대 최고 오프닝 기록을 세웠고, 8월 초에는 누적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원작은 호메로스에게 귀속되는 서사시 「오디세이아」다. 소설이 아니라 기원전 8세기 무렵 구술로 전해지다 문자로 정착한 운문이고, 놀란은 별도의 소설이나 후대 각색물을 거치지 않고 이 시를 직접 각본으로 옮겼다. 그가 공개적으로 언급한 판본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고전학자 에밀리 윌슨이 2017년에 낸 영어 번역이다. 영어권에 나온 완역만 예순 종이 넘는데, 놀란은 2025년 인터뷰에서 윌슨의 첫 행이 계기였다고 밝혔다. 그 행은 주인공을 "복잡한 남자"라고 부른다. 그리스어 원문의 폴리트로포스를 옮긴 말인데, 이 단어는 여러 방향으로 돌아다녔다는 뜻과 이리저리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함께 품는다. 놀란은 자신이 끌린 것이 바로 그 영리함과 책략가로서의 면모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영화의 홍보 문구는 "신에 맞서다"였다. 원전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 이 문구는 어색하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신에 맞서 이기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아테나의 후원으로 살아남고, 신들의 회의에서 귀향이 허락되어야 섬을 떠날 수 있으며, 신에게 맞선 유일한 순간은 그의 최대 실패로 기록된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고 달아나면서 굳이 배 위에서 자기 본명을 외친 대목이다. 그 자랑 한 번으로 폴리페모스는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빌 수 있게 되고, 이후 10년의 표류가 시작된다. 원전에서 신에게 맞서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재앙의 방아쇠다.
문구 하나를 트집 잡자는 것이 아니다. 이 어긋남은 영화가 원전의 어느 층을 골라 세웠는지 알려 주는 표지다. 홍보 문구가 원전과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면, 각색이 손댄 것은 삽화 몇 개가 아니라 이야기를 굴리는 동력 자체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렇다.
차이를 따지려면 원전의 구조를 먼저 짚어야 한다. 「오디세이아」는 전체 24권이고, 트로이아 전쟁이 끝난 뒤 이타케의 왕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10년과 돌아온 뒤의 일을 다룬다.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야기는 중간에서 시작하고, 앞의 일은 회상으로 끼워 넣는다.
앞의 네 권은 이타케 쪽 사정이다. 오디세우스가 떠난 지 20년이 지나 왕궁은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는 귀족들이 점거하고 있다. 아들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소식을 찾아 다른 왕들을 찾아간다. 5권에 이르러서야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는 님프 칼립소의 섬에 7년째 붙들려 있다. 뗏목을 만들어 떠나지만 포세이돈이 부수고, 그는 파이아케스인들의 나라에 떠밀려 온다.
여기가 원전 구조의 핵심이다. 널리 알려진 모험담 — 외눈박이 거인, 마녀 키르케, 세이렌의 노래, 저승 방문 — 은 9권부터 12권까지에 몰려 있는데, 이 넉 권은 전부 오디세우스가 파이아케스 궁정의 연회에서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다. 즉 서사시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들은 화자가 주인공 본인인 1인칭 회상이고, 증언을 검증해 줄 부하들은 그 시점에 모두 죽어 있다. 고대부터 이 대목을 두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묻는 독법이 있었던 이유다.
후반부는 모험이 아니라 정체를 감추고 확인받는 이야기다. 거지로 변장해 자기 집에 들어간 오디세우스는 늙은 개 아르고스에게, 발을 씻기던 유모 에우리클레이아에게, 활 시합에서 구혼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차례로 알아보아진다. 이 절차에는 고전학에서 쓰는 이름이 붙어 있다.
노스토스 — 귀향. 트로이아에서 돌아오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묶는 말이며, 「오디세이아」는 노스토스 이야기의 대표작이다.
크세니아 — 손님과 주인이 서로에게 지는 의무. 낯선 이를 먹이고 재우고 선물을 주어 보내는 관습으로, 그리스 종교에서 제우스가 직접 보증하는 규범이었다. 손님이 신의 변장일 수 있다는 관념이 여기에 붙어 있다.
아나그노리시스 — 알아봄.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쓴 용어로, 감춰져 있던 정체가 드러나 상황이 뒤집히는 순간을 가리킨다. 「오디세이아」 후반부는 이 순간들을 층층이 쌓아 올린 구조다.
이 세 낱말을 손에 쥐면 영화가 무엇을 옮기고 무엇을 잘랐는지가 선명해진다. 놀란은 노스토스는 그대로 두었고, 크세니아는 자리를 옮겼으며, 아나그노리시스는 상당 부분 덜어냈다.
영화에서 모험담은 파이아케스 궁정이 아니라 칼립소의 섬 오기기아에서 풀려 나온다. 그리고 회상을 촉발하는 장치가 완전히 다르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붙들어 두려고 기억을 흐리는 연꽃을 계속 먹여 왔고, 그는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가족이 있었는지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상태다. 칼립소가 꽃을 그만 먹으라고 하고 기억을 되살려 보라고 권하면서 트로이아 전쟁부터의 일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원전에서 부하들을 홀렸던 로토스 열매 삽화가 여기로 흡수된 셈이다.
액자 구조 자체는 살아 있다. 옮겨진 것은 청중과 장소이고, 그 이동이 이야기의 성격을 바꾼다.
파이아케스 궁정은 귀향이 사실상 확정된 지점이다. 배와 선물을 받아 실려 갈 것이 정해진 상태에서, 손님을 환대하는 자리에서 이름을 밝히고 무용담을 들려주는 것이라 회상 전체가 살아남은 자의 공식 진술에 가깝다. 청중은 왕과 귀족들, 곧 그의 명예를 인정해 줄 사람들이다. 오디세우스는 하루 넘게 정체를 감추고 있다가 궁정 가인이 목마 이야기를 노래할 때 우는 것을 들키고 나서야 "나는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라고 선언한다. 그 자기 명명이 회상의 출발점이다.
오기기아는 정반대 지점이다. 배도 부하도 다 잃고 7년째 붙들려 있는, 귀향 가망이 가장 낮은 자리다. 청중은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상대 하나뿐이고, 화자는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같은 이야기가 자랑이 아니라 자기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를 되짚는 복기가 된다. 정체를 밝히는 선언은 성립할 수 없다. 상대는 처음부터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고, 정작 모르는 쪽은 본인이다.
이 교체가 영화 전체의 성격을 정한다. 원전의 회상이 남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영화의 회상은 본인이 되찾는 기억이다. 앞의 것은 편집과 과장이 가능한 진술이고, 뒤의 것은 피하고 싶었던 것을 다시 마주하는 절차다. 놀란은 한 인터뷰에서 오디세우스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전쟁의 고통을 지우려는 심리 작용이냐는 질문을 받고, 답하면 관객의 경험을 제한한다며 대답을 거절했다. 그 거절이 회상의 지위를 열어 둔 채로 두려는 선택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대가는 크세니아 쪽에서 나온다. 파이아케스인들은 원전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작동하는 환대의 공동체다. 폴리페모스는 손님을 잡아먹고 구혼자들은 남의 집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데, 알키노오스의 궁정은 이름도 모르는 표류자를 씻기고 먹이고 선물을 얹어 돌려보낸다. 손님 대접이 이 서사시 전체의 도덕적 잣대 노릇을 하는 이상, 그 기준점이 통째로 사라지면 잣대가 흔들린다.
영화는 이 기능을 이타케 안으로 옮긴다. 텔레마코스가 낯선 손님을 맞는 장면과, 거지 차림으로 돌아온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한 채 환대하는 장면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원전에도 두 장면 다 있다. 1권에서 텔레마코스는 구혼자들이 떠드는 와중에 문간에 선 손님을 방치했다고 부끄러워하며 직접 맞아들이고, 후반부의 환대는 주로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가 맡는다. 영화는 이 역할을 아들 쪽으로 몰아 주었다.
배치를 옮기면 대조의 구도가 좁아진다. 원전에서 파이아케스는 이타케 바깥의 이상적 사례이므로 대조가 바깥과 안으로 서고, 오디세우스가 남의 나라에서 받은 대접을 자기 집에서는 받지 못한다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환대를 전부 이타케 안에 두면 대조는 같은 집 안의 아들과 구혼자들 사이로 줄어든다. 낯선 왕국 하나를 잃는 대신 부자 관계에 무게가 실리는 교환이다.
영화에서 올림포스의 신들은 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아테나만 예외적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원전처럼 계략을 짜고 전장을 휘젓는 전쟁의 여신이라기보다 전쟁의 피해자에 가깝게 그려진다. 포세이돈도, 헤르메스도, 태양신도 화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칼립소와 키르케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오되 소박한 차림과 생활을 하고 다른 신들과 교류하는 장면이 없어서, 여신이라기보다 능력과 지식을 가진 마녀 쪽으로 읽힌다.
대신 신들이 하던 일은 자연 현상이 맡는다. 태양신의 소를 잡아먹은 부하들의 최후가 대표적이다. 원전에서는 제우스가 배에 벼락을 내리치고 오디세우스만 부서진 용골에 매달려 살아남는다. 영화에서는 섬을 떠난 배가 거대한 폭풍에 부서지고 선원 전원이 죽는데, 그 폭풍이 제우스가 보낸 것이라는 판단은 인물들의 입에서 나온다. 사건의 순서는 같고 초자연적 원인만 해석의 자리로 물러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 교체가 인과의 방향을 바꾼다는 점이다. 벼락이 폭풍이 되면 부하들이 죽은 이유는 신의 징벌이 아니라 지휘관이 자기 선단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사실이 된다. 영화의 오디세우스는 실제로 그렇게 조형되어 있다. 목마 계략으로 트로이아를 함락시키면서 손님과 주인의 규범을 짓밟았다는 죄책감, 그리고 자기 자만이 부하들을 죽였다는 자책이 인물의 축이다. 심지어 그는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고향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저승 장면이 그 축을 떠받친다. 영화의 저승에서 오디세우스는 아가멤논을 만나고, 목마 계략의 미끼로 쓰여 트로이아인들에게 죽은 시논을 만난다. 시논은 자기도 모르게 트로이아인들을 속이게 만들어 제우스의 법을 어기게 했다며 오디세우스를 몰아세운다. 시논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다. 트로이아 함락을 다룬 다른 전승과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온 인물로, 놀란이 바깥에서 데려와 심은 것이다. 원전의 저승이 앞일을 듣는 곳이라면, 영화의 저승은 지나간 일을 마주하는 곳으로 기울어 있다.
다만 예언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영화에도 등장해 태양신의 소에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고, 구혼자들의 존재와 이타케를 되찾은 뒤의 여정까지 일러 준다. 정보를 얻으러 가는 장면과 죄책감을 대면하는 장면이 한자리에 겹쳐 있는 셈이다.
이 처리를 두고 가장 날카로운 반론을 낸 사람이 하필 놀란이 이름을 댄 번역가였다. 에밀리 윌슨은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실은 비평에서, 영화가 신들을 빼면서도 파멸은 여전히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고 태양신의 소를 먹은 일의 필연적 결과로 제시된다는 점을 짚었다. 신이 없는데 신을 거스른 대가는 그대로라는 것이다. 제우스의 법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처럼 다뤄지는 것도 같은 모순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각본의 어느 부분도 자기가 썼다면 부끄러웠을 것이라고까지 썼고, 이 글은 공개 직후 해당 매체 웹사이트를 잠시 마비시킬 만큼 읽혔다.
윌슨이 짚은 또 하나는 환대 규범의 이중잣대다. 속임수와 기술과 무기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그리스인이 트로이아인을 죽일 때는 나쁘고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죽일 때는 좋은 일로 그려지며, 주인 없는 것을 차지하는 일도 트로이아인이 목마를 끌고 갈 때는 자연스럽고 구혼자들이 궁을 차지할 때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론도 즉시 나왔다. 신을 원소적인 힘으로 — 천둥의 울림이나 바다의 폭풍으로 — 그린 것을 두고 신을 뺐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문자적인 독해라는 지적이다. 아테나를 제외하면 보이지 않을 뿐 실재한다는 것이고, 다만 그 신학이 호메로스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기독교 쪽에 가까워졌다는 불평은 별도로 제기되었다. 이 대목은 실제로 그렇게 읽힌다. 자기 죄를 자각하고 그 대가를 스스로 감당하는 구조는 그리스 신들의 변덕과 편애보다 죄와 회개의 문법에 가깝다.
비평의 무게를 재려면 발화 위치도 함께 보아야 한다. 윌슨은 자신의 번역이 영화의 출발점으로 지목된 당사자이고, 그 인연 때문에 대형 지면을 얻었으며, 현재 같은 시를 다시 번역하고 있다. 그가 신들의 부재를 문제 삼는 것은 취향이 아니라 직업적 판단의 연장이다. 동시에 그 위치는 강조점을 만든다. 번역가에게 이 시의 본체는 신들이 인간사에 개입하는 방식이므로, 그 층을 걷어낸 각색은 원리적으로 실패로 보일 수밖에 없다. 논쟁이 갈리는 지점은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라 「오디세이아」의 본체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삽화 단위의 삭제는 상영 시간 탓으로 돌리기 쉽다. 172분에 24권을 담으려면 무엇이든 잘라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무엇을 잘랐는지 늘어놓으면 시간과 무관한 규칙성이 보인다.
| 대목 | 호메로스 원전 | 놀란 영화 |
|---|---|---|
| 회상의 자리 | 파이아케스 궁정 연회에서 오디세우스가 직접 들려준다 |
칼립소의 섬에서 기억을 되찾는 형태로 풀려 나온다 |
| 파이아케스 | 왕녀 나우시카와 알키노오스 궁정이 표류자를 환대한다 |
나라 전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
| '아무도 아니다' | 폴리페모스에게 이름을 속여 추격을 따돌린다 |
이름을 속이는 말장난이 등장하지 않는다 |
| 바람 자루 | 아이올로스가 준 자루를 부하가 열어 고향 앞에서 되밀린다 |
삽화 전체가 빠졌다 |
| 로토스 열매 | 먹으면 귀향을 잊는 열매를 부하들이 먹는다 |
칼립소가 오디세우스에게 먹이는 꽃으로 옮겨 갔다 |
| 배의 파괴 | 제우스가 벼락을 내리쳐 배를 쪼갠다 |
폭풍이 배를 부수고, 신의 소행이라는 판단만 남는다 |
| 알아봄의 마지막 | 옮길 수 없는 올리브 나무 침대로 페넬로페가 남편을 시험한다 |
전쟁터에 가져갔던 핀을 돌려주는 것으로 대신한다 |
| 마지막 권 | 유족과의 유혈 충돌을 아테나가 가로막아 화해를 강제한다 |
24권을 통째로 덜어내고 배 위의 장면으로 끝맺는다 |
목록을 관통하는 규칙이 둘 있다. 하나는 신이 직접 손을 대는 장면이 예외 없이 빠지거나 자연 현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벼락, 아테나가 강제하는 화해, 헤르메스의 등장이 모두 그렇다. 다른 하나는 말재간으로 위기를 넘기는 장면이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규칙이 더 중요하다. '아무도 아니다'는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을 한 장면에 압축한 삽화다. 거인이 동료 거인들에게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는다"고 소리치게 만들어 구조 요청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언어의 함정이고, 힘이 아니라 말로 이기는 방식의 표본이다. 이 삽화가 빠지면 동굴 탈출은 기지가 아니라 완력과 운의 문제가 된다.
바람 자루도 마찬가지다. 이 삽화의 요점은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자루의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정보를 감춘 대가로 고향을 눈앞에서 놓치는 구조이고, 감추기와 속이기가 그의 강점이자 약점이라는 사실을 한 번에 보여 준다. 영화는 이 삽화 대신 부하들이 예언의 내용을 알려 달라고 몰아붙이는 장면을 두었다. 정보 은닉이라는 주제는 남기고 삽화는 갈아 끼운 셈인데, 남은 것은 꾀의 실패이지 꾀 자체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놀란은 자기가 이 이야기에 끌린 이유로 꼽은 바로 그 자질 — 영리함, 발명, 책략 — 을 보여 줄 장면들을 상당수 덜어냈다. 윌슨이 영화의 주인공을 두고 복잡하지 않은 남자라고 비꼰 것도 이 지점을 겨눈 것이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죄책감과 견딤이다. 인물의 무게중심이 꾀에서 버티기로 옮겨 갔다.
가장 논란이 된 삭제는 올리브 나무 침대다. 원전 23권에서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이 모두 죽은 뒤에도 남편을 믿지 않는다. 그는 유모에게 부부의 침대를 침실 밖으로 내오라고 시킨다. 오디세우스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답한다. 뿌리박은 올리브 나무를 기둥 삼아 자기 손으로 짜 넣은 침대이므로 옮기려면 나무를 베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부만 아는 표징이 확인되고, 그제야 페넬로페가 그를 받아들인다.
이 장면이 특별한 이유는 세 가지가 겹치기 때문이다. 첫째, 옮길 수 없는 침대라는 사물 자체가 결혼의 부동성을 그대로 상징한다. 둘째, 그 침대는 그가 주변에서 구한 재료로 만들어 낸 기술의 산물이며, 자기 집을 자기 손으로 지었다는 증거다. 셋째, 서사시 전체에서 오디세우스가 시험당하는 유일한 대목이다. 다른 모든 알아봄은 그가 정체를 드러내거나 남이 알아채는 방식인데, 여기서는 아내가 함정을 놓고 남편이 걸려든다. 주도권이 여자 쪽에 있다.
영화는 이 시험을 전쟁터로 가져갔던 핀을 돌려주는 것으로 대체했다. 앤 해서웨이는 침대 장면이 빠진 이유를 두고, 그 시점에서 영화의 추진력은 오디세우스가 살아남을지에 쏠려 있으므로 침실로 우회하면 흐름이 끊긴다는 판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화면에 나오지 않았을 뿐 페넬로페가 남편을 시험하지 않았다고 볼 이유는 없다고 덧붙였다.
연출 논리로는 성립한다. 그러나 교체된 두 물건의 성격이 다르다. 침대는 둘이 함께 만든 삶의 구조물이고 아내가 내미는 함정이다. 핀은 남편이 지니고 떠났던 물건이고 남편이 내미는 증거다. 확인의 주도권이 아내에게서 남편에게로 넘어간다. 원전의 페넬로페가 기다린 사람인 동시에 판정하는 사람이라면, 이 교환 뒤의 페넬로페는 주로 기다린 사람으로 남는다. 영화의 여성 인물들이 서사의 중심에서 밀려나 주인공의 성장에 기능적으로 쓰였다는 비평이 나온 것도 이 흐름과 이어진다.
알아봄의 다른 층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늙은 개 아르고스와 유모가 발을 씻기다 흉터를 발견하는 대목은 영화에도 남아 있다. 다만 비중이 크지 않고, 층층이 쌓여 마지막에 아내에게서 완결되던 구조는 끝이 잘린 채로 남는다.
원전의 24권은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구혼자들을 몰살한 뒤 그 유족들이 무장하고 몰려오고, 오디세우스 부자는 다시 싸울 태세를 갖춘다. 유혈이 재개되기 직전 아테나가 개입해 양쪽에 화해를 강제하면서 시가 끝난다. 사적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부르는 연쇄를 신이 위에서 끊어 주는 구조이고, 인간끼리는 이 매듭을 풀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영화는 이 권을 통째로 덜어냈다. 활 시합과 구혼자 살해는 남기되, 그 뒤에 아테나가 강제하는 화해도 늙은 아버지와의 재회도 놓지 않았다. 대신 텔레마코스가 왕위에 오르고, 오디세우스는 학살에 대한 속죄로 자발적 망명길에 오른다. 그가 페넬로페와 함께 배에 오르는 장면이 마지막이다.
교환의 논리는 앞선 모든 변경과 같다. 신이 위에서 끊어 주던 매듭을 인간이 스스로 감당하는 형태로 옮긴 것이다. 원전에서 오디세우스는 왕위를 되찾고 남고, 매듭은 아테나가 끊는다. 영화에서 그는 왕위를 넘기고 떠나며, 매듭은 스스로 자리를 비우는 방식으로 끊는다. 신을 지운 각색이 결말에서 치러야 할 계산을 정직하게 치른 셈이다.
다만 이 결말은 원전의 한 축을 포기한다. 「오디세이아」의 노스토스는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자기 집에서 자기 자리를 되찾는 것, 곧 왕이자 남편이자 아들로 복귀하는 것이 귀향의 완성이다. 도착한 뒤 다시 떠나는 결말은 노스토스를 절반만 완성하고 접는다. 신을 걷어낸 대가가 여기서 가장 크게 드러난다. 신이 보증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학살을 저지른 자가 자기 집에 그대로 눌러앉을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둘 만한 각색이 하나 더 있다. 헬레네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한 배우가 함께 연기한다. 신화에서 두 사람은 자매이고, 한쪽은 남편을 떠나 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다른 쪽은 돌아온 남편을 죽였다. 같은 얼굴을 두 인물에 겹쳐 놓으면 귀향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다는 긴장이 페넬로페 위에 얹힌다. 원전이 아가멤논의 최후를 반복해 언급하며 만들어 내던 불안을 배우 한 명으로 압축한 처리다. 잘라낸 것만 있는 각색은 아니다.
영화 내내 인물들이 불안하게 되뇌는 소문이 하나 있다. 바다에서 오는 사람들이다. 이타케에서 빈 왕좌를 지키는 페넬로페도, 전쟁이 끝난 스파르타에서 지루해하는 메넬라오스도, 아버지 소식만 기다리는 텔레마코스도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트로이아를 떠나 처음 닿은 마을에서는 오디세우스 일행이 오히려 그 무리로 오해받는다. 그리고 후반부에 오디세우스가 아내에게 털어놓는 말이 이 소문의 정체를 뒤집는다. 바다에서 온 사람들은 바로 자기들이라는 것이다.
이 소재는 「오디세이아」에 없다. 호메로스의 시에는 트로이아, 크레테, 이집트, 여러 아카이아 왕국 같은 지중해의 지역 세력이 나오지만 바다 민족이라는 집단은 언급되지 않는다. 세계가 끝나 간다는 감각도 없다. 놀란이 호메로스가 아니라 역사에서 가져온 것이고, 지금까지 짚은 삭제들과 달리 이쪽은 순수한 추가다.
기원전 1200년을 전후한 수십 년 사이 동지중해와 근동의 강국들이 잇달아 무너졌다.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제국이 사라졌고,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궁전 문명이 파괴의 물결 속에 끝났으며, 오늘날 시리아 해안의 부유한 항구도시 우가리트는 기원전 1190년에서 1180년 사이에 불타고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이집트 신왕국은 살아남았지만 예전의 힘을 잃었다. 청동을 만들려면 먼 곳의 구리와 주석을 함께 들여와야 했으므로, 이 시대의 왕국들은 교역망 하나로 묶여 있었고 그 망이 끊기자 함께 주저앉았다. 이것을 후기 청동기 붕괴라 부른다.
붕괴의 범인으로 오래 지목된 것이 바다 민족이다. 그런데 이 이름부터가 근대의 산물이다. 19세기 프랑스 이집트학자 에마뉘엘 드 루제가 이집트 신전 명문에 나오는 여러 집단을 묶어 부르려고 만든 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이 표현을 입에 올리는 것은 그래서 시대착오다. 고고학자가 극장에서 듣기에 어색했다고 적을 만한 대목이다.
바다 민족에 관한 주된 1차 사료는 이집트 상부의 메디네트 하부에 있는 람세스 3세 장제전의 명문과 부조다. 재위 8년, 계산에 따라 기원전 1177년 무렵으로 잡히는 시점의 기록이며, 에릭 클라인의 대중 역사서 「1177 B.C.」의 제목이 여기서 나왔다.
명문은 여러 무리가 바다와 육지로 몰려와 히타이트를 비롯한 왕국들을 무너뜨린 뒤 이집트로 향했고 파라오가 이를 물리쳤다고 적는다. 펠레세트, 체케르, 셰켈레시, 다누나, 웨셰시 같은 이름이 열거되고, 다른 기록에는 셰르덴이 더해진다.
문제는 이것이 왕의 선전물이라는 점이다. 이집트 왕실 명문의 관례상 파라오는 유일한 주역이어야 했고, 적은 최대한 위협적으로 묘사해야 업적이 커진다. 게다가 이 이름들은 다른 맥락에 거의 나오지 않아 어디에 살던 누구인지 특정하기 어렵다. 지금 비교적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펠레세트가 성경의 블레셋 사람들이라는 정도다.
흥미로운 것은 다누나다. 이 이름이 호메로스가 그리스인을 부르는 여러 호칭 가운데 하나인 다나오이와 겹칠 수 있다는 추정이 있다. 그렇다면 명문의 시점은 미케네 궁전들이 이미 파괴된 뒤이므로, 그 무리에 섞인 그리스인들은 정복자가 아니라 쫓겨난 자들이거나 해적이었다는 그림이 나온다. 놀란이 결말에 놓은 반전이 이 가설과 정확히 겹친다. 다만 학문적으로는 조심스러운 이야기다. 소리가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같은 집단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이 그림을 받아들이면 다누나를 떠돌게 만든 더 이른 교란을 또 상정해야 하므로 붕괴 전체를 설명하는 열쇠는 되지 못한다.
오늘날의 다수 견해는 바다 민족을 붕괴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로 본다. 가뭄과 기후 변동, 교역망 단절, 궁전 경제의 경직성, 내부 반란이 겹친 복합적 실패이고, 그 과정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남의 땅을 덮쳤다는 것이다. 단일 침략자가 문명을 끝냈다는 설명은 학계에서 이미 물러났다.
궁전이 불타면서 함께 사라진 것이 문자다. 미케네 시대의 그리스인은 선문자 B라는 음절 문자를 썼다. 1952년 영국의 건축가 마이클 벤트리스가 해독해 그 언어가 고형 그리스어임을 밝혀낸 문자인데, 남아 있는 것은 문학이 아니라 장부다. 대장장이에게 지급한 청동의 양, 창고에 있는 전차 바퀴의 수와 상태, 왕실 향유에 넣는 고수와 세이지의 배합 같은 것이 적혀 있다. 궁전 관료제를 굴리기 위한 회계 도구였기 때문에, 궁전이 사라지자 쓸 데가 없어져 함께 사라졌다.
여기에 뒤틀린 우연이 하나 있다. 이 점토판들이 오늘날까지 남은 이유는 궁전을 태운 불에 구워져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기록을 없앤 화재가 동시에 기록을 보존했다.
이후 그리스는 대략 기원전 1100년부터 800년까지 글자 없는 시기를 지난다. 인구가 줄고 교역이 위축되고 큰 건물이 서지 않으며 남긴 문서가 없다. 이 공백 때문에 붙은 이름이 암흑기다. 어두웠다기보다 후대가 들여다볼 기록이 없다는 뜻에 가깝다. 문자는 기원전 8세기에 페니키아 문자를 빌려 알파벳으로 다시 들어온다. 호메로스는 바로 그 문턱에 서 있는 사람이고, 그 400년 동안 미케네 세계의 기억을 실어 나른 것은 문서가 아니라 노래하는 사람들이었다.
영화가 짚는 지점이 여기다. 앞으로는 노래만 남을 것이고, 기록하던 자들을 기억할 방법도 그것뿐이라는 취지의 대사가 나온다. 선문자 B의 소멸을 가리키는 말이다. 서사시의 존재 조건 자체를 등장인물의 입으로 예고하게 만든 셈인데, 잘 짜인 만큼 무리도 크다. 자기 문명의 종말과 그 종말이 남길 매체까지 내다보는 인물은 원전에 없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다음 날 무엇이 올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그리스 시인들이 청동기 붕괴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사실상 없다. 전승이 끊긴 자리가 그것을 보여 준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에 관한 이야기는 여럿 남았지만 그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기억이 거기서 멈춘 것이다.
그렇다고 종말의 감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헤시오도스는 「일과 날」에서 인간의 시대를 나누며 반신이라 불리는 영웅들의 종족이 테바이와 트로이아에서 죽어 사라진다고 적었다. 「일리아스」 첫머리에는 제우스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구절이 있고, 후대 주석은 이것을 인구가 너무 불어난 땅의 부담을 덜려고 제우스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다른 전승과 연결한다. 트로이아 전쟁이 무언가의 끝이라는 관념은 있었던 셈이다.
귀향의 저주도 이미 있었다. 에우리피데스는 기원전 415년의 「트로이아 여인들」에서 아테나가 옛 총애를 거두는 장면을 썼다. 아이아스가 카산드라를 범했는데도 그리스인들이 벌하지 않자, 아테나는 바다와 하늘이 그들의 배를 치게 하겠다고 선언한다. 포세이돈이 여기에 답하며 남의 도시와 신전과 무덤을 부순 자는 스스로도 그 폐허 속에서 망한다고 말한다. 놀란의 해석과 거의 겹치는 대목이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에우리피데스에서 처벌은 개인적이다. 아테나는 돌아가는 그리스 남자들을 벌하지 문명 전체에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다. 트로이아 함락을 세계를 끝낸 사건으로 묶은 것은 놀란이다. 사료가 남긴 붕괴의 연대와 문학이 남긴 함락의 죄책을 하나로 포갠 것인데, 그리스 전승 어디에도 없던 조합이다.
이 추가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앞선 절들과 겹쳐 보아야 드러난다. 신을 걷어낸 각색은 대가를 청구할 주체를 잃는다. 벼락도 없고 아테나의 판결도 없는데 목마 계략의 값은 누가 받아 내는가. 바다 민족과 청동기 붕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신이 아니라 무너지는 세계 체제가 청구서를 내미는 구조다. 윌슨이 짚은 모순 — 신은 없는데 신을 거스른 대가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지적 — 도 이 층을 넣고 보면 절반은 봉합된다. 대가를 물리는 것이 신이 아니라 역사라면 신 없이도 인과가 성립한다.
봉합되지 않는 절반은 남는다. 무너지는 세계 체제가 왜 하필 손님과 주인의 규범이 깨진 일에 반응하는가. 교역망이 끊기고 가뭄이 들고 궁전 경제가 경직되는 과정은 도덕과 무관하게 굴러간다. 영화는 붕괴의 연대를 역사에서 빌려 오되 붕괴의 이유는 크세니아 위반에서 찾는데, 이 둘은 서로 다른 종류의 설명이다. 신을 지운 자리에 역사를 놓았지만, 그 역사에 신이 하던 역할 — 도덕적 위반을 감지하고 응징하는 기능 — 을 그대로 맡긴 셈이다.
지금까지 짚은 변경 사항은 흩어져 있지 않다. 벼락이 폭풍이 되고, 헤르메스가 사라지고, 아테나가 강제하던 화해가 자발적 망명으로 바뀌고, 저승이 예언을 듣는 곳에서 죽은 부하를 마주하는 곳으로 기울었다. 회상의 자리는 파이아케스 궁정에서 칼립소의 섬으로 옮겨 남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본인이 되찾는 기억이 되었고, 환대의 잣대는 사라진 왕국 대신 아들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신이 비운 자리를 후기 청동기 붕괴라는 실제 역사가 채웠다. 신들이 관리하던 인과를 인간의 책임과 세계 체제의 붕괴가 대신 맡는 한 방향으로 모인다.
상영 시간 제약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예언 장면은 몇 분이면 되고, 벼락은 폭풍보다 찍기 쉽다. 무엇보다 놀란은 시간을 아끼기는커녕 원전에 없던 층을 새로 들여왔다. 바다 민족과 암흑기는 잘라 낸 자리를 메우려고 넣은 것이 아니라, 신 없는 세계에서 목마 계략의 대가를 청구할 주체가 필요해서 놓은 장치다. 삭제와 추가가 같은 설계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이것을 원작 훼손이라 부를지는 「오디세이아」의 본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달렸다. 신의 질서 아래 놓인 인간의 운명이 핵심이라면 훼손이다. 그러나 서사시 자체가 신의 개입을 이미 이중으로 다룬다. 태양신의 소 사건에서 오디세우스는 잠들어 있었고, 부하들은 굶주려 있었으며, 그 섬에 발이 묶인 것은 역풍 때문이었다. 벼락을 지우면 그대로 자업자득의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이 사건 전부가 부하를 전멸시킨 지휘관 본인의 입에서 나온 진술이다. 신을 걷어내는 것은 원전에 없던 층을 씌우는 일이 아니라 이미 깔려 있던 층 하나를 골라 전면에 세우는 일에 가깝다.
남는 손실은 다른 자리에 있다. 올리브 나무 침대와 이름을 밝히는 선언, '아무도 아니다'와 바람 자루가 함께 빠졌다.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확인 절차이고 말로 이기는 방식인데, 사실적 해석이라는 방침과 아무 상관 없이 없어졌다. 놀란이 이 이야기에 끌린 계기라고 밝힌 것이 하필 그 영리함이었으므로 인용한 첫 행과 완성된 인물이 어긋난 셈이다. 얻은 것은 일관된 심리와 무너지는 세계의 감각이고, 잃은 것은 3천 년을 살아남은 인물의 얼굴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봉합되지 않은 자리다. 영화는 붕괴의 연대를 역사에서 빌려 오되 붕괴의 이유는 손님과 주인의 규범이 깨진 데서 찾는다. 그러나 가뭄과 교역망 단절과 궁전 경제의 경직은 도덕과 무관하게 굴러가는 과정이다. 신을 치우고 역사를 앉혔지만 그 역사에 신이 하던 일 — 위반을 감지하고 응징하는 기능 — 을 그대로 맡긴 셈이다. 고전을 현대에 옮길 때마다 반복되는 교체이기도 하다. 운명이 심리가 되고, 신탁이 트라우마가 되고, 신이 끊어 주던 매듭이 개인의 결단이 된다. 그 교체가 어디까지 성립하고 어디서 삐걱거리는지는 이 영화 하나로 끝날 물음이 아니다.
바다 민족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계속 움직이고 있다. 이 집단에 관한 주된 사료가 신전 벽 하나이고 그마저 왕의 선전물이라는 사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기후 자료와 발굴 성과가 쌓이면서 침략자 한 무리가 문명을 끝냈다는 그림은 계속 흐려지는 중이다. 학계가 단일 원인론에서 물러난 자리에 대중문화가 다시 선명한 원인을 그려 넣는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다. 「오디세이아」가 3천 년을 살아남은 방식이 원래 그러했다. 판본이 늘고 해석이 갈리는 동안에도 이야기는 남았고, 남는 과정에서 매번 그 시대가 두려워하는 것을 하나씩 덧입었다. 이번 각색이 덧입힌 것은 무너지는 세계이며, 다음 번역과 다음 영화가 무엇을 집어 오는지를 보면 그때의 두려움도 함께 읽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