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 검토
옛이야기 가운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유독 다른 대접을 받는다. 신데렐라나 빨간 모자와 달리 이 이야기에는 연도와 날짜와 인원수가 붙어 있고, 사건이 일어났다는 도시가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동화 가운데 유일하게 문서 증거가 있는 이야기"라는 평판이 굳었다.
그 평판을 떠받치는 근거로는 대개 세 가지가 함께 제시된다. 1300년 무렵 하멜른 시장교회에 설치되었다가 1660년에 없어진 스테인드글라스, 1384년 시 기록에 적혔다는 "우리 아이들이 떠난 지 100년이 되었다"라는 문장, 그리고 1440년대 뤼네부르크 사본이 전하는 1284년 6월 26일이라는 날짜다. 이 세 가지가 나란히 놓이면 사건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증거가 층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각각 사료로서 열어 보면 층이 무너진다. 연대가 가장 이르다는 두 항목은 실제로는 가장 늦거나 확인되지 않은 것이고, 사건 150년 뒤에 적힌 라틴어 방주 하나만 확실하게 남는다. 하멜른의 사료가 실제로 증명하는 것은 1284년 6월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15세기 이후 하멜른이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문서에 새겨 넣었는가다.
하멜른 아이들의 실종을 전하는 문헌 가운데 연대가 분명하면서 가장 이른 것은 뤼네부르크 시립도서관(Ratsbücherei Lüneburg)이 소장한 필사본 Theol. 2° 25의 268면에 적힌 라틴어 산문이다. 이 사본의 본체는 민덴 교구 도미니코회 수사 하인리히 폰 헤르포르트(Heinrich von Herford, 1370년 사망)의 『황금 사슬』(Catena aurea)이다. 성서 주해와 자연철학·신학 논의를 엮은 책인데, 아이들 이야기는 그 본문이 아니라 책 끝에 나중에 덧붙은 방주로 실려 있다. 기록 시점은 1430~1450년 무렵으로 잡힌다.
독일 볼펜뷔텔 헤어초크 아우구스트 도서관이 관리하는 뤼네부르크 중세 사본 목록은 이 대목을 268r면 첫째·둘째 단으로 특정하고, 표제를 "하멜른 탈출 이야기"(Fabula exodi Hamelnsis)로 적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Notandum miraculum valde rarum quod accidit in opido Hamelen Mindensis diocesis anno domini M°CC°LXXXIIII ipso die Johannis et Pauli, quidam adolescens de XXX annis pulcher et omnino bene vestitus erat. Omnes eum in persona videntes etiam vestitum eius admirabantur. Adolescens intravit per pontem et Wesere portam. Habens argenteam festulam mire forme per totum oppidum festulacere incepit. Et omnes pueri, fere in numero CXXX, illam festulam audientes eum sequebantur extra valvam origentalem quasi ad locum calvarie vel decollacionis. Recesserunt et evanuerunt, quod nullus investigare potuit, ubi unus eorum remansit. Vero matres puerorum de civitate ad civitatem cucurrerunt et nihil penitus invenerunt.
민덴 교구의 도시 하멜른에서 주님의 해 1284년, 바로 요한과 바울의 날에 일어난 매우 드문 기적을 적어 둘 것. 서른 살쯤 된 젊은이가 있었는데 용모가 준수하고 옷차림이 더없이 훌륭하여, 그를 직접 본 사람은 누구나 그 차림새에 감탄하였다. 젊은이는 다리를 건너 베저 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모양이 기이한 은피리를 들고 도시 전체를 돌며 피리를 불기 시작하였다. 그 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거의 130명에 이르도록 모두 그를 따라 동쪽 문 밖으로, 이른바 골고다 곧 처형장이라 부르는 곳까지 나갔다. 아이들은 물러가 사라졌고, 그중 하나라도 어디에 남았는지 아무도 알아낼 수 없었다.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이 도시 저 도시로 뛰어다녔으나 끝내 아무것도 찾지 못하였다.
뤼네부르크 시립도서관 필사본 Theol. 2° 25, 268r면. 첫 문장과 끝 문장은 볼펜뷔텔 헤어초크 아우구스트 도서관의 사본 목록 기재와 일치하며, 가운데 부분은 이 면의 통용 전사를 따랐다.
마지막 문장은 라틴어 문법이 어긋나 있어 옮김이 갈린다. 여기서는 "그중 하나라도 어디에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로 읽었으나, 필사 과정에서 낱말이 바뀌었다고 보아 "한 명만 남았다"로 옮기는 판본도 있다. 뒷날 널리 퍼진 이야기에서 눈먼 아이와 다리 저는 아이가 뒤처져 살아남는 대목은 이 어긋난 한 구절과 무관하지 않다.
방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하멜른 사람들이 그때부터 연수를 아이들이 떠난 해로부터 세었다는 말과, 뤼데 데칸의 어머니가 아이들이 떠나는 것을 보았다는 한 줄로 닫힌다. 목록이 적어 둔 이 사본의 마지막 구절이 "아이들이 떠나는 것을 보았다"(vidit pueros recedentes)다. 여기서 말하는 데칸은 주교좌나 참사회 소속 성직자단의 우두머리로, 하멜른에서는 성 보니파티우스 참사회의 수석 성직자를 가리킨다. 하멜른 문서에는 실제로 요하네스 데 뤼데(Johannes de Lüde)라는 데칸이 나오고, 그가 1378년에 남긴 유증 문서가 전한다. 방주를 적은 사람은 이 인물의 어머니를 목격자로 끌어대어, 자기가 옮겨 적는 이야기가 사람의 기억에 닿아 있음을 밝혔다.
이 방주를 연대기의 한 조항처럼 읽으면 사료의 성격을 놓치게 된다. 사본 목록에 따르면 268r면에서 하멜른 아이들 이야기가 끝나는 자리에 곧바로 다음 항목이 이어진다. 표제는 "바실리스크 이야기"(Fabula basilisci)이고, 1347년 야고보 축일 전야에 같은 도시 하멜른의 하수 구덩이에서 벌어진 일을 적었다. 오래 갇혀 있던 공기가 썩어 사람을 해쳤다는 내용이다. 바실리스크는 눈길이나 입김만으로 목숨을 앗는다고 믿어진 중세의 상상 속 짐승이다.
두 항목의 표제가 나란히 "이야기"(fabula)로 붙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멜른 아이들의 실종은 문서 보관을 위한 관청 기록으로 적힌 것이 아니라, 어느 필사자가 책 끝의 빈 자리에 모아 둔 기이한 일 모음의 한 항목으로 적혔다. 방주가 스스로를 "매우 드문 기적"(miraculum valde rarum)이라 부르는 것도 그래서다. 이 자리는 놀라운 일을 기억에 붙들어 두는 자리였다.
그렇다고 이 방주의 값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15세기 중엽의 어느 필사자가 하멜른에서 150년 전에 일어났다는 일을 날짜와 인원수까지 갖춰 적을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전승의 오래됨을 증언한다. 다만 그 증언의 대상은 사건이 아니라 전승이다. 사건과 이 기록 사이에 놓인 150년은 어떤 문서로도 메워지지 않는다.
더 이른 증거로 늘 첫머리에 놓이는 것이 시장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다. 하멜른의 시장교회(Marktkirche)는 성 니콜라이에게 봉헌된 시민들의 교구 교회로, 성 보니파티우스 참사회 교회에 딸린 자교회였다. 1239년 문서에 처음 나오고, 제2차 세계대전 말인 1945년 4월에 파괴되었다가 1950년대에 다시 세워졌다.
이 교회의 유리 그림에 관해 가장 자세한 기술을 남긴 사람은 하멜른 라틴어 학교 교장 자무엘 에리히(Samuel Erich)다. 그는 1654년에 낸 하멜른 아이들의 실종에 관한 논고에서, 남쪽 측랑 동쪽 창에 있던 그림과 이미 여러 곳이 부서진 명문을 옮겨 적었다. 그림에는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남자와 그를 둘러싼 아이들이 있었고, 남은 글자에서는 "요한과 바울의 날에", "하멜른에서 태어난", "골고다", "코펜" 같은 조각이 읽혔다. 그리고 마지막에 연도가 하나 있었다. 1572년이다.
이 연도의 해석이 이 항목의 전부다. 독일 금석문 총서 제28권 『하멜른 시의 명문』을 편찬한 크리스티네 불프(Christine Wulf)는 1572년을 기증 연도로 읽고, 유리 그림 자체가 1300년이 아니라 1572년에 만들어졌을 공산이 크다고 판단한다. 기증자는 하멜른 시장 프리드리히 포펜디크였다. 요하네스 레츠너가 힐데스하임 연대기에서 포펜디크가 자기 비용으로 시장교회의 큰 창에 아이들의 실종 장면을 "만들어 넣게 했다"고 적은 문장도 수리보다 신작 쪽을 가리킨다. 다만 기증 한 해 전인 1571년에 뤼네부르크 라틴어 학교 교장 루카스 로시우스가 하멜른의 어느 교회에 그 장면을 담은 유리 그림이 있다고 적었으므로, 포펜디크 이전에 무언가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1300년까지 올라가느냐다.
1660년이라는 연도도 파괴의 해라기보다 교체의 해다. 포펜디크의 창은 1660년에 새 창으로 바뀌었고, 그 뒤로 실물은 남지 않았다. 오늘날 이 그림을 볼 수 있는 것은 알자스 사람 아우구스틴 폰 뫼르스페르크가 1592년 여행기에 남긴 수채 모사 덕분이다. 그 모사에는 위쪽에 아이들의 행렬이, 아래쪽에 배에 선 피리꾼과 그를 따르는 쥐 떼가 함께 그려져 있다.
"우리 아이들이 떠난 지 100년이 되었다"라는 문장은 영어와 독일어와 한국어 대중 서술에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고, 출처는 언제나 "1384년 하멜른 시 기록"으로만 적힌다. 그런데 이 전설의 사료를 연대순으로 모아 놓은 한스 도베르틴(Hans Dobbertin)의 사료집에서 뤼네부르크 사본보다 앞선 항목으로 꼽힌 것은 세 가지이며, 그 가운데 이런 문장을 담은 시 기록은 없다.
세 번째 항목이 대중 서술의 "1384년 기록"에 가장 가깝다. 뒷날 자주 인용되는 뤼데 데칸의 성가집 라틴어 시구도 이 계열이다. 다만 그 성가집은 실물이 남아 있지 않고, 17세기 학자의 기록을 통해 14세기의 무엇인가를 역추정한 결과다. 사건에서 100년 뒤에 하멜른 사람이 직접 적은 문장을 오늘 손에 든 사람은 없다.
1384년에 하멜른에서 실제로 붓을 든 사람이 있기는 하다. 참사회 성직자 요한 폰 폴레가 그해에 하멜른 교회의 연대기를 썼다. 그 책에는 아이들의 실종이 나오지 않는다. 도시의 기억에 그토록 깊이 새겨졌다는 사건이, 100주기에 쓰인 그 도시 교회의 연대기에는 자리를 얻지 못했다.
1284년 6월 26일이라는 날짜는 정밀해 보인다. 그러나 그 정밀함은 사료 전체의 정밀함이 아니라 뤼네부르크 방주 한 편의 정밀함이다. 근세 하멜른 사람들이 남긴 다른 기록들은 서로 다른 해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것이 신문(新門, Neues Tor)에 박혀 있던 두 부분짜리 석판이다. 위쪽에는 1531년이, 아래쪽에는 1556년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라틴어 2행시가 붙어 있다.
Centum ter denos cum magus ab urbe puellos duxerat ante annos CCLXXII condita porta fuit.
마술사가 백에 열의 세 배를 더한 사내아이들을 도시에서 데려간 지 272년이 되던 해에 이 문이 세워졌다.
하멜른 신문 석판의 명문. 독일 금석문 총서 제28권 『하멜른 시의 명문』 45번
시구는 인원수를 숫자로 적지 않고 "백에 열의 세 배"라는 계산으로 풀어 130명을 만든다. 문제는 272를 어느 해에서 세느냐다. 1284년을 전제하면 1284에 272를 더해 1556년이 나오고, 이는 아래쪽 연도와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파인은 위쪽 연도 1531에서 272를 빼서 1259년을 얻었고, 그 해를 사건의 진짜 연도로 보았다. 1259년 또는 1260년은 하멜른 시민군이 민덴 주교의 군대에 참패한 제데뮌더 전투의 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민덴으로 끌려갔다.
불프는 이 석판을 두고 1531년이 신문의 건축 연도일 수 없다고 지적한다. 신문은 1470~1480년 무렵의 십일조 명세서에 이미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쪽 명문은 문을 세운 일을 특정해 말하지 않아서, 석판이 전혀 다른 자리에서 옮겨 왔을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 하나의 돌 안에서 두 연도의 관계가 확정되지 않는다.
어긋남은 이 돌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멜른의 라틴어 교본 도나트에 기록된 추기는 "아이들이 떠난 뒤 283년"이라고 적었는데, 이 숫자를 통상의 연대로 환산하면 신문 석판과 맞지 않는다. 도시 바깥으로 나가면 격차는 더 벌어진다. 리처드 베르스테간은 1605년 안트베르펜에서 낸 『쇠퇴한 지식의 회복』 85~87쪽에서 이 이야기를 영어로는 처음 소개하면서 날짜를 1376년 7월 22일로 적었다. 로버트 버턴은 1621년 『우울의 해부』에서 한 줄로 언급하며 1484년 6월 20일이라고 썼다.
가장 널리 알려진 판본에서 이야기는 두 막으로 되어 있다. 쥐 떼에 시달리던 도시가 피리꾼을 고용하고, 삯을 떼먹고, 피리꾼이 아이들로 갚음한다. 그런데 이른 사료에는 앞의 한 막이 통째로 없다.
하멜른 현지의 명문부터 그렇다. 불프의 집계로 이 사건을 새긴 하멜른의 역사 성구 명문은 모두 여섯 건이고, 가장 이른 것은 마르크트 1번지 집의 1525년 명문이다. 여섯 건 모두 아이들의 실종만 전한다. 날짜, 인원수, 사라진 장소를 적을 뿐 쥐는 나오지 않는다. 오늘날 관광객이 사진을 찍는 이른바 쥐잡이집(Rattenfängerhaus)의 석조 정면도 1602년의 것이고, 거기 새겨진 문장 역시 아이들 이야기다. 그림 형제가 1816년 『독일 전설집』 245번에서 옮겨 적은 하멜른의 집 명문도 같은 계열이다.
anno 1284 am dage Johannis et Pauli war der 26. junii dorch einen piper mit allerlei farve bekledet gewesen 130 kinder verledet binnen Hameln geborn to calvarie bi den koppen verloren
1284년 요한과 바울의 날 곧 6월 26일에 온갖 색으로 차려입은 피리꾼에게 홀려, 하멜른에서 태어난 아이 130명이 코펜 곁 골고다에서 사라졌다.
야코프·빌헬름 그림, 『독일 전설집』(1816) 245번 「하멜른의 아이들」에 실린 하멜른 집 명문
여기 나오는 코펜(koppen)은 표준 독일어 쿠페(Kuppe)에 해당하는 저지 독일어로, 둥근 봉우리나 언덕을 뜻한다. 하멜른 둘레의 어느 언덕인지는 특정되지 않는다. 뒷날 코펜브뤼게 근처의 코펜베르크를 지목하는 견해가 나왔지만, 명문의 낱말이 복수형이어서 특정 지명으로 읽기 어렵다는 반론이 따라붙는다.
쥐 이야기가 처음 문자로 나타나는 곳은 하멜른이 아니라 남부 독일이다. 슈바벤 메스키르히의 귀족 프로벤 크리스토프 폰 침머른이 1559년에서 1565년 사이에 쓴 『침머른 연대기』가 쥐 쫓기와 아이들 실종을 하나로 이은 첫 기록이다. 침머른은 사건 시점을 "몇백 년 전"이라고만 적어서 연도 논쟁에는 아무 도움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는 하멜른의 독특한 관행 하나를 전한다.
Diser wunderbarlichen geschicht zu ewiger gedechtnuß schreibt iezermelte stat in allen iren briefen am datum nach Christi gepurt die rechte jarzall, daran henken sie aber und nach verlierung unserer Kinder in dem oder dem jar.
이 놀라운 일을 길이 기억하고자, 앞서 말한 도시는 모든 문서의 날짜에 그리스도 탄생 이후의 정식 연수를 적고, 거기에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잃은 지 몇 년"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침머른 연대기』. 불프가 도베르틴 사료집 12번에서 인용한 대목
하멜른에서 정말 이런 이중 연호를 썼는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불프의 지적에 따르면, 추기가 실제로 붙은 몇 안 되는 문서들은 아이들이 떠난 해를 통상의 달력으로 적을 뿐 "떠난 뒤 몇 년"이라는 형식을 쓰지 않는다. 그 형식을 실제로 쓴 것은 앞에서 본 신문 석판 하나다. 1748년 다니엘 에버하르트 바링은 아예 이 특수 연호의 존재를 의심하며, 도나트에서도 옛 문서에서도 그런 것을 찾지 못했다고 반박했다.
현지 텍스트에 쥐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589년 요프스트 요한 바크하우스의 운문 연대기이고, 그다음은 1654년 에리히의 논고다. 그사이 뫼르스페르크의 1592년 수채화처럼 그림으로는 쥐가 이미 돌아다녔다. 이 시차를 두고 불프는 삯을 떼먹은 시의회 이야기가 도시로서는 자랑스럽지 않게 여겨졌으리라고 추정한다. 명문은 집 정면과 성문에 새겨 공개하는 글이다. 무엇을 새기고 무엇을 새기지 않느냐는 도시가 자기 얼굴로 삼고 싶은 기억이 무엇이냐의 문제였다.
사료가 이렇게 얇으면 설명은 사료 바깥에서 올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제시된 가설은 크게 네 갈래다.
가장 논증이 촘촘한 것은 동방식민(Ostsiedlung) 가설이다.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 서부·북부 독일 인구가 엘베강 동쪽으로 대규모 이주한 흐름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주민들은 새 정착지에 옛 고향의 지명을 옮겨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지명학자 위르겐 우돌프는 1997년 『니더작센 향토사 연보』 69권에 실은 논문에서 이 습관을 추적해, 베저 지역 지명이 오늘날의 브란덴부르크, 특히 프리크니츠와 우커마르크에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였다. 하멜강의 발원지를 뜻하는 하멜스프링에(Hamelspringe)가 우커마르크에서 함멜스프링(Hammelspring)으로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그런 이름을 붙일 하천이 없고, 베저강가의 베베룽엔(Beverungen)에는 프리츠발크 인근의 베베링엔(Beveringen)이 대응한다. 슈피겔베르크 백작령의 이름은 파제발크 근처 그로스 슈피겔베르크에 남았다. 같은 논문에서 우돌프는 종래 유력했던 모라비아 이주설의 근거인 하믈리코프(Hamlíkov)라는 지명이 하멜른에서 온 것이 아님을 보이고, 이 방면의 선행 연구들이 인명과 지명을 다루면서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이 가설의 힘과 한계는 같은 자리에 있다. 지명 대응은 13세기 베저 지역에서 동쪽으로 사람이 대규모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단단하게 증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증명하는 것은 이주이지 실종이 아니다. 우돌프의 자료 어디에도 1284년이라는 해나 130이라는 숫자를 지목하는 것은 없다. 이주는 수십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일어났고, 하루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 가설이 설명하는 것은 "왜 하멜른 사람들이 젊은이들의 집단 이탈을 겪었는가"이지 "왜 그 이탈이 한 날짜에 붙박였는가"가 아니다.
둘째는 전투 참사 가설이다. 파인이 신문 석판에서 끌어낸 1259년은 제데뮌더 전투의 해와 겹친다. 하멜른 시민들이 몰살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포로로 끌려간 이 사건은 도시의 기억에 남을 만한 규모였다. 다만 이 가설은 왜 전승이 하필 그보다 25년 뒤인 1284년으로, 그것도 6월의 특정 축일로 굳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셋째는 역병과 죽음의 무도 가설이다. 아이들이 어딘가로 떠난 것이 아니라 죽어 성문 밖 집단 매장지에 묻혔고, 알록달록한 옷의 피리꾼은 죽음의 의인화라고 본다. 중세 후기 미술에서 죽음은 곧잘 악기를 들고 산 자를 이끈다. 무도병 곧 춤 열병을 끌어들이는 변형도 있다. 이 가설은 방주가 아이들이 나간 곳을 "처형장 곧 골고다"라고 적은 대목과 잘 맞는다. 반면 그런 규모의 죽음이라면 도시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는데, 정작 이른 기록에는 병이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 없다.
넷째는 소년십자군 가설이다. 1212년 유럽 각지에서 아이와 젊은이가 무리 지어 성지로 향했다가 흩어진 사건에서 유형을 빌려 온 설명인데, 연대가 70년 넘게 벌어지는 것이 부담이다. 이 밖에 코펜베르크 부근에서 젊은이들이 살해당했다고 보는 향토사 연구자의 주장처럼 국지적인 가설도 나와 있으나, 근거로 드는 것이 1592년의 수채 모사여서 사료의 무게가 다르다.
네 가설은 서로 배타적이지도 않다. 젊은이들이 동쪽으로 떠난 일과 전투에서 사람을 잃은 일과 역병이 지나간 일은 한 세대 안에 모두 일어날 수 있다. 전승은 그런 일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압축하는 데 능하다. 사료가 얇을수록 가설은 늘어나는데, 늘어난 가설들이 겨루는 대상은 사건이 아니라 그 압축의 재료다.
세 가지 증거를 하나씩 열어 본 결과는 처음의 인상과 반대다. 가장 이르다고 알려진 시장교회 유리창은 1572년 하멜른 시장이 기증한 것이고, 1384년의 시 기록이라는 문장은 사료 계보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그 자리에 실제로 있는 것은 17세기 학자의 기록에서 역추정한 성구다. 손에 남는 것은 뤼네부르크 사본 268면의 라틴어 방주 하나이고, 그것도 사건에서 150년 뒤에, 바실리스크 이야기와 나란히, "이야기"라는 표제를 달고 적혔다.
그렇다고 이 도시의 기록이 빈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멜른은 사건에 관해서는 침묵하지만 기억에 관해서는 유난히 수다스럽다. 1525년부터 집 정면에 같은 문장을 새겼고, 1531년과 1556년의 성문 석판에 연수를 계산해 넣었으며, 1572년에 시장이 사비로 유리창을 세웠고, 1589년에 운문 연대기를 지었고, 1654년에 교장이 논고를 냈다. 실증할 수 있는 것은 1284년 6월 26일이 아니라 이 계열이다. 하멜른의 사료가 촘촘한 지점은 사건 쪽이 아니라 기념 쪽이다.
연도들이 어긋나는 방식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272와 283, 1376과 1484가 서로 맞지 않는 것은 기록자들이 부주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각자 손에 든 전승에서 연수를 역산했기 때문이다. 역산은 기억의 작업이지 기록의 작업이 아니다. 침머른이 전한 이중 연호가 실제 관행이었는지 미심쩍은 것도 마찬가지다. 하멜른이 정말 모든 문서를 그렇게 적었는지보다, 16세기 사람들이 하멜른을 그런 도시로 상상했다는 사실이 더 확실하다.
남은 물음은 사건의 정체보다 앞선 자리에 있다. 150년의 공백을 건너 한 필사자에게 날짜와 인원수를 그대로 전한 통로가 무엇이었는지, 그 통로에서 숫자 130과 6월 26일이 언제 붙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성 요한과 성 바울 축일은 하지 무렵의 축일이고, 유럽 여러 곳에서 젊은이들이 모여 불을 피우고 춤추던 시기와 겹친다. 날짜가 사건에서 온 것인지 축일에서 온 것인지를 가릴 사료는 지금 없다. 하멜른의 자료가 답할 수 있는 범위는 거기까지이고, 그 범위 안에서 이 도시가 700년 넘게 지켜 온 것은 사라진 아이들이 아니라 사라졌다는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