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 경제
1933년에 제출된 소모 개념을 2026년 6월의 기업공개에 적용하면, 로켓과 인공지능에 쏟아붓는 자본을 숭고한 낭비로 읽는 해석은 두 군데에서 어긋난다. 개념이 요구하는 조건과 투자설명서에 적힌 숫자가 모두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스페이스X는 2026년 6월 12일 나스닥에서 SPCX라는 종목 기호로 거래를 시작했다. 전날 확정된 공모가는 주당 135달러였고 발행 주식은 5억 5,555만 5,555주였다. 발행 총액은 약 750억 달러, 인수 수수료를 뺀 회사의 순수취액은 약 744억 달러다. 초과배정 권리가 한도까지 행사되면 순수취액은 857억 달러로 늘어난다. 규모만 놓고 보면 자본시장 역사에서 전례가 없다.
기업공개(Initial Public Offering)는 비상장 회사가 주식을 일반 투자자에게 팔아 자금을 모으고 그 주식을 거래소에 올리는 절차다. 이 과정에서 회사는 투자설명서(prospectus)를 규제기관에 제출하고 공개한다. 사업 내용, 재무제표, 위험 요인, 조달 자금의 용도를 적어 두는 법정 문서다.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서류이므로 문체는 대개 건조하다.
스페이스X가 6월 11일자로 제출한 투자설명서는 첫 장에 재무 수치 대신 사명 문장을 올려 두었다. 생명을 여러 행성에 걸치게 하고, 우주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고, 의식의 빛을 별까지 확장하겠다는 문장이다. 바로 다음 문단에는 태양을 붙잡아 진리를 추구하는 인공지능에 동력을 공급하겠다는 목표가 적혀 있다. 회사의 용어집에는 카르다쇼프 2형이라는 항목이 따로 실려 있는데, 자기 항성이 내놓는 에너지 전부를 붙잡아 쓰는 문명을 가리킨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태양이라는 낱말이 증권 규제 문서에 놓이자 20세기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의 이름이 함께 불려 나왔다. 바타유는 태양을 경제의 원형으로 삼았고, 그 경제를 소모라고 불렀다. 로켓 발사와 천문학적 적자를 소모의 현대적 사례로 읽으려는 시도는 그래서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글은 그 적용이 성립하는지를 따진다. 결론을 미리 적으면, 소모 개념이 요구하는 조건을 그대로 적용할 경우 스페이스X 상장은 소모가 성립하지 않는 방식을 보여 주는 사례가 된다.
바타유는 1933년 1월 좌파 잡지 『라 크리티크 소시알』 7호에 「소비의 개념」(La notion de dépense)을 실었다. 프랑스어판 전집 1권 302–320쪽에 수록되어 있고, 영역본은 앨런 스토클이 엮은 『과잉의 비전』(Visions of Excess, 미네소타대학출판부, 1985) 116–129쪽에 실려 있다. 프랑스어 dépense는 지출이라는 뜻의 일상어다. 바타유는 이 평범한 낱말에 특수한 무게를 실었다.
글은 유용성이라는 개념을 겨눈다. 인간의 활동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무엇이 쓸모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데, 바타유가 보기에 인간 사회가 실제로 쏟는 힘의 상당 부분은 그 기준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치품, 장례 의식, 종교 제의, 기념 건축, 전쟁, 도박, 예술이 그런 항목이다. 이 지출들은 생산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며,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그것들의 사회적 기능이다. 그는 이런 지출에 비생산적 소모라는 이름을 붙였다.
논거는 인류학에서 왔다. 마르셀 모스가 1925년에 발표한 『증여론』은 북아메리카 북서해안 원주민 사회의 포틀래치를 다룬다. 포틀래치는 잔치를 열어 재물을 나눠 주거나 눈앞에서 부수는 관습이다. 물건을 잃는 쪽이 위신을 얻는다. 바타유는 여기서 부의 파괴가 사회적 서열을 만들어 내는 회로를 읽어 냈다.
1949년에 낸 『저주받은 몫』 1권에서 이 착상은 일반경제라는 이름으로 확장된다. 개별 기업이나 가계의 살림을 따지는 경제학을 제한경제라 부른다면, 일반경제는 지구 전체에 들어오는 에너지의 흐름을 따진다. 바타유의 주장은 단순하다. 지구에는 늘 쓰고 남는 에너지가 들어오고, 남는 몫은 어떤 식으로든 써 없애야 한다. 성장에 다 쓸 수 없다면 축제로든 전쟁으로든 소진된다.
이 체계에서 태양이 원형의 자리에 놓인다. 태양은 빛과 열을 내보내면서 아무것도 돌려받지 않는다. 대가를 청구하지 않고 계약을 맺지도 않는다. 바타유 연구자들이 그의 1920년대 말 텍스트들을 두고 태양이 ‘주기만 하고 결코 받지 않는 것’으로서 인간 소모의 이상적 모델로 제시되었다고 정리하는 것도 이 대목을 가리킨다.
여기에 개념을 쓰려는 사람이 놓치기 쉬운 조건이 하나 붙는다. 소모가 소모이려면 회수 경로가 없어야 한다. 되돌아올 길이 열려 있는 지출은 투자이고, 위신이든 이자든 무엇으로든 되돌아온다면 그것은 제한경제 안의 거래다.
이 조건 때문에 소모 개념은 자본주의 비판에 갖다 쓰기가 까다롭다. 자본주의는 낭비처럼 보이는 지출에도 대개 회수 장치를 붙여 놓기 때문이다. 판정 기준은 지출의 규모가 아니고 회수 경로의 유무다.
소모 개념을 사람에게 적용할 때 바타유가 어떤 형상을 택했는지를 보면 방향이 분명해진다. 그는 1929년에서 1930년 사이에 「낡은 두더지, 그리고 초인과 초현실주의라는 낱말의 sur 접두사」를 썼다.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고 『과잉의 비전』 32–44쪽에 영역이 실려 있다. 앙드레 브르통이 1929년에 낸 「제2차 초현실주의 선언」에 대한 반박문이다.
글은 두 마리 짐승을 세워 놓는다. 한쪽은 독수리다. 높이 날아오르는 것, 프랑스어 접두사 sur가 붙은 것들, 곧 초인(surhomme)과 초현실주의(surréalisme)와 제국의 상징이 여기 모인다. 다른 쪽은 낡은 두더지다. 땅속을 파고 다니며 경제적 사실의 층위에서 일한다.
두더지라는 형상에는 계보가 있다. 출발은 셰익스피어다. 『햄릿』 1막 5장에서 무대 아래 지하로부터 유령의 목소리가 올라오자 햄릿은 그것을 두더지라 부른다.
Well said, old mole. Canst work i’ th’ earth so fast?—A worthy pioner!
잘 말했다, 늙은 두더지야. 땅속에서 그렇게 빨리 일할 수 있느냐? 훌륭한 갱부로구나!
셰익스피어, 『햄릿』 1막 5장 (폴저 디지털 텍스트, 행 번호 FTLN 0901–0902)
마르크스가 이 구절을 가져다 혁명의 이름으로 삼았다. 1852년에 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7장에서 그는 혁명이 지하에서 조용히 진행되다가 어느 날 지표로 올라온다고 썼다.
Und wenn sie diese zweite Hälfte ihrer Vorarbeit vollbracht hat, wird Europa von seinem Sitze aufspringen und jubeln: Brav gewühlt, alter Maulwurf!
그리고 혁명이 준비 작업의 이 후반부를 마치면, 유럽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할 것이다. 잘 팠다, 늙은 두더지야!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7장 (1852)
바타유가 이어받은 것은 마르크스의 두더지다. 지하에서 파고드는 물질의 운동이 그가 편드는 쪽이고,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는 그가 겨누는 쪽이다. 접두사 sur를 제목에 올린 이유가 여기 있다. 위로 올라간다는 몸짓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카로스는 어디에 놓이는가. 바타유는 부르주아 출신 지식인의 반란이 취하는 형식을 이카로스적이라고 불렀다. 아래로 내려가 물질과 부패를 껴안는 대신 위로 솟구쳐 올라 태양에 닿으려다 떨어지는 몸짓이다. 『과잉의 비전』 영역본을 엮은 스토클은 편집자 서문에서, 바타유가 병리로 규정한 유일한 것이 바로 이 이카로스적 반란이라고 정리한다. 니체를 읽는 브르통도, 초현실주의도 그 진단 아래 놓인다.
이카로스 이야기의 표준 출전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8권이다.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면서 높이도 낮이도 아닌 가운데 길을 지키라고 이른다.
instruit et natum “medio”que “ut limite curras, / Icare,” ait “moneo, ne, si demissior ibis, / unda gravet pennas, si celsior, ignis adurat. / Inter utrumque vola.”
그리고 아들을 채비시키며 말한다. “이카루스야, 가운데 길로 달리라고 나는 이르는 것이다. 너무 낮게 가면 물결이 날개를 무겁게 하고, 너무 높이 가면 불이 태울 것이다. 그 둘 사이로 날아라.”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8권 203–206행 (후고 마그누스 교정본, 1892)
라틴어 limes는 길이자 경계다. 다이달로스의 경고는 중간을 지키라는 처세훈이면서 동시에 경계를 넘지 말라는 금지다. 이카로스가 어긴 것은 그 경계이고, 바타유가 부르주아의 아들에게서 본 것도 같은 위반이다. 다만 그는 그 위반을 해방으로 읽지 않았다. 떨어지는 것은 결말일 뿐 방법이 아니며, 그가 요구한 것은 하강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자기 계급을 태워 없애는 이카로스적 자기파괴야말로 유일하게 진정한 배반이라는 독해는 방향이 뒤집혀 있다. 바타유의 문장에서 그 몸짓은 배반에 실패하는 방식이다. 이 뒤집힘은 사소한 오독으로 끝나지 않는다. 뒤집힌 채로 현재의 인물에게 적용하면, 비판하려던 대상이 비극의 주인공 자리로 올라간다.
태양에 관한 바타유의 다른 글도 함께 짚어 둘 만하다. 「썩은 태양」(Soleil pourri)은 1930년 잡지 『도퀴망』 3호의 피카소 특집에 실렸고, 논의 대상은 피카소의 그림에서 일어나는 형태의 해체다. 여기서 태양은 두 얼굴로 갈라진다. 정오의 관념으로서 가장 높은 개념인 태양과, 눈을 들어 직접 바라보면 시력을 앗아 가는 태양이다. 앞의 태양은 플라톤 이래 이성과 질서의 표상이었고, 뒤의 태양은 그 표상을 무너뜨린다.
개념의 방향을 바로잡았으니 숫자를 볼 차례다. 투자설명서에 실린 2025년 연결 실적은 매출 186억 7,400만 달러, 영업손실 25억 8,900만 달러다. 적자 기업이 사상 최대 규모로 상장했다는 인상은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부문별로 나누면 그림이 달라진다.
손실은 한 곳에서 나온다. 인공지능 부문의 영업손실 63억 5,500만 달러가 스타링크의 영업이익 44억 2,300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전체가 적자로 돌아섰다. 스페이스X는 2026년 2월 머스크가 세운 인공지능 회사 xAI를 주식 교환 방식으로 합병했고, 그 부문의 지출이 그대로 연결 재무제표에 들어왔다. 2025년 인공지능 부문 자본지출 127억 2,700만 달러는 우주와 커넥티비티를 합친 것보다 크다.
자본지출이라는 항목이 여기서 중요하다. 자본지출은 소모가 아니다. 데이터센터를 짓고 반도체를 사들이는 데 쓴 돈은 회계상 자산으로 남고 여러 해에 걸쳐 비용으로 나뉘어 인식된다. 조달한 자금의 용도로 투자설명서가 적어 둔 것도 인공지능 연산 설비 확장, 발사 설비와 발사체 개선, 위성망 확대다. 쓰이는 즉시 설비로 바뀌는 지출이다.
회수 경로는 이미 가동되고 있다. 투자설명서는 2026년 5월 앤스로픽과 맺은 클라우드 서비스 계약을 밝히고 있는데,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 약 32만 5,000개 규모의 연산 능력을 제공하고 2029년 5월까지 월 12억 5,000만 달러를 받는 조건이다. 인공지능 설비에 쏟아붓는 자금은 그 자체로 매출을 만드는 자산이 된다.
지배 구조는 손실의 귀속을 한 번 더 갈라놓는다. 스페이스X는 두 종류의 주식을 둔다. 일반 투자자가 사는 클래스A는 1주에 1표, 창업자가 쥔 클래스B는 1주에 10표다. 클래스B 주주는 회사의 등기임원 과반을 따로 뽑을 권한도 갖는다. 공모가 135달러 기준으로 머스크의 의결권 비중은 약 82.4퍼센트이고, 회사는 나스닥 상장 규정상 지배회사로 분류되어 사외이사 과반 요건 같은 일부 지배구조 규정을 면제받는다고 스스로 적어 두었다.
여기서 소모 개념의 조건이 무너진다. 포틀래치에서 재물을 부수는 자와 위신을 얻는 자는 같은 사람이다. 상실을 자기가 감당하기 때문에 그 상실이 지위로 바뀐다. 상장은 이 구조를 분해한다. 손실은 750억 달러어치의 지분을 사들인 사람들에게 나뉘어 넘어가고, 결정 권한은 한 사람에게 남는다. 위신을 만드는 서사는 집중되고 비용은 분산된다.
분산의 마지막 단계는 지수다. 나스닥100은 나스닥에 상장한 비금융 기업 가운데 시가총액 상위 100개를 담는 지수다. 기술주 지수로 불리기도 하지만 코스트코나 펩시코 같은 회사도 들어 있다. 이 지수를 따라 사고파는 상장지수펀드와 연금 계좌는 종목을 고르지 않고 지수 구성만 따라간다. 나스닥은 신규 상장사의 지수 편입 규정을 손질했고, 스페이스X는 상장 한 달 만인 2026년 7월 나스닥100에 들어갔다. 편입과 함께 지수를 추종하는 자금이 이 종목으로 흘러들었다.
주가는 그 뒤 공모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8월 초에 회복했다. 이 구간에서 손실을 실제로 떠안은 쪽은 지수를 통해 자동으로 편입된 계좌들이다. 개별 판단 없이 손실을 나눠 진 사람이 수백만 명이라는 사실은 소모라는 낱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소모는 주권적 상실이고, 주권적이라는 말은 상실을 자기가 떠안는다는 뜻이다.
투자설명서의 태양 대목은 사업 계획으로 적혀 있다. 문서는 태양이 태양계 에너지의 약 99.8퍼센트를 담고 있으므로 인공지능 시대의 지상 에너지 제약을 풀 유일하게 확장 가능한 해법이라고 적는다. 우주 공간의 태양광 패널은 대기의 방해가 없고 조사 각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어 단위 면적당 지상의 다섯 배가 넘는 에너지를 얻는다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궤도 인공지능 연산 위성은 2028년부터 배치를 시작할 계획이고, 연간 100기가와트 규모의 연산 능력을 궤도에 올리겠다는 목표가 위험 요인 항목에 함께 적혀 있다.
여기 쓰인 동사가 harness다. 마구를 채워 부린다는 뜻이고, 말이나 물살처럼 제멋대로 움직이는 힘을 붙들어 일을 시킨다는 어감이 있다. 회사의 용어집이 카르다쇼프 2형을 항성 에너지 산출 전부를 붙잡아 쓰는 문명으로 정의한 것도 같은 방향이다.
바타유의 태양이 증여의 원형이었던 이유는 그것이 회수되지 않기 때문이다. 붙잡히는 순간 태양은 자원이 되고, 자원은 감가상각 대상이 되며 계약의 목적물이 된다. 같은 천체가 정반대 방향의 논증에 동원된다. 한쪽에서 태양은 경제의 바깥을 가리키는 형상이고, 다른 쪽에서 태양은 경제 안으로 끌어들일 마지막 미개척지다.
바타유의 태양을 태양광 발전과 곧바로 겹쳐 놓을 수는 없다. 그의 태양은 경제 모델을 세우기 위해 동원한 형상이었고, 20세기 중반의 그가 궤도 태양광 발전을 두고 무슨 말을 남겼을 리도 없다.
겹치는 것은 태도다. 대가 없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볼 것인가, 아직 계상되지 않은 자산으로 볼 것인가. 두 태도 사이에서는 같은 낱말이 반대 방향으로 쓰인다.
발사 장면을 숭고로 읽는 감각에는 내력이 있다. 미국 화가 로버트 라우셴버그(1925–2008)는 1969년 7월 미국항공우주국의 초청을 받아 플로리다 케이프커내버럴에서 아폴로 11호 발사를 지켜봤다. 대중의 관심을 넓히려고 마련한 예술가 초청 사업이었고, 초대받은 작가는 일곱 명이었다. 그는 돌아온 뒤 로스앤젤레스의 판화 공방 제미니 G.E.L.에서 석판화 34점을 찍었다. 연작의 제목이 <Stoned Moon>이고 제작 기간은 1969년에서 1970년까지다. 가장 큰 <Sky Garden>은 높이 89인치로, 당시 손으로 찍은 석판화 가운데 가장 컸다.
화면에는 발사탑과 우주복과 배관도가 플로리다의 지도와 오렌지 상자 상표와 겹쳐 놓여 있다. 라우셴버그 재단은 작가의 상태를 이렇게 정리해 두었다. 베트남전과 사회적 혼란으로 여러 해 환멸에 잠겨 있던 그가 이 여행에서 낙관을 되찾았다.
같은 달 같은 장소에 다른 장면이 있었다. 발사 전날인 7월 15일, 케네디우주센터 서쪽 문 밖 빈 들판에서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의장 랠프 애버내시가 스물다섯 가구를 이끌고 노새 네 마리와 낡은 수레 두 대와 함께 섰다. 마틴 루서 킹이 암살당한 뒤 그가 물려받은 빈민운동의 방식이었다. 맞은편에는 미국항공우주국 국장 토머스 페인이 있었다.
당시 UPI 통신 보도에 따르면, 애버내시는 달에 사람을 보내는 데 쓰는 돈이 굶는 사람을 먹이는 데 쓰이는 편이 낫다고 말했고, 페인은 내일 아침 그 버튼을 누르지 않아서 당신이 말하는 문제를 풀 수 있다면 누르지 않겠다고 답했다. 페인은 발사 참관용 귀빈 출입증 열 장을 그 자리에서 내주었다. 역사학자 닐 마허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애버내시는 발사 자체를 반대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국가가 우선순위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러 왔다고 밝혔고, 미국항공우주국의 과학 역량이 사회 문제로도 향하기를 요구했다.
아폴로 11호는 냉전 경쟁 속에서 연방 예산으로 굴러간 국가 사업이었다. 발사대 아래에서 그 비용을 누가 대고 누가 혜택을 보는가라는 물음이 이미 제기되어 있었고, 신문과 방송이 그 장면을 함께 실었다. 그러므로 과거의 발사는 모두의 것이었는데 지금의 발사는 소수의 것이 되었다는 대비는 성립하기 어렵다. 라우셴버그가 되찾았다는 낙관은 시대의 합의로 넓혀지지 않는다. 들판 건너편에는 그 낙관을 공유하지 않는 스물다섯 가구가 서 있었다.
이 장면이 앞의 논의와 이어지는 지점은 하나다. 거대한 지출을 숭고로 읽는 순간 시선은 발사체로 올라가고 비용을 대는 쪽은 화면 밖으로 나간다. 1969년에는 노새와 수레가 그 시선을 끌어내렸다. 2026년의 상장에서 같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지수를 따라 자동으로 편입된 계좌들인데, 이 쪽은 들판에 서서 보이지 않는다.
바타유의 소모 개념을 2026년 6월의 기업공개에 적용하면 두 군데에서 어긋난다. 개념 쪽에서 한 번, 장부 쪽에서 한 번이다.
개념 쪽의 어긋남은 형상의 방향에서 온다. 바타유가 편든 것은 지하를 파는 두더지였고 높이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이카로스는 그가 병리로 지목한 몸짓이었다. 자기 자본을 태우며 태양으로 향하는 자를 진정한 계급 배반자로 읽으면, 비판의 어휘가 찬사의 어휘로 바뀐다. 소모가 소모이기 위한 조건도 함께 무너진다. 회수 경로가 없어야 소모인데, 이 조건은 규모로 대체되지 않는다.
장부 쪽의 어긋남은 더 구체적이다. 750억 달러는 태워 없어지지 않고 데이터센터와 위성과 발사 설비로 바뀐다. 인공지능 부문의 적자는 스타링크의 이익과 외부 연산 판매로 상쇄되는 구조 안에 있다. 의결권은 창업자에게 82퍼센트 넘게 남고, 손실은 지수를 따라 수백만 개의 계좌로 나뉘어 간다. 포틀래치는 상실을 감당하는 자가 위신을 얻는 회로였는데, 여기서는 상실과 위신이 서로 다른 주체에게 배정된다. 소모라는 낱말은 이 배정을 가려 준다.
남는 물음은 어휘 쪽에 있다. 회수 경로가 붙은 거대 지출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바타유의 어휘는 그 경우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고, 투자와 낭비라는 두 낱말도 이 규모의 지출이 만들어 내는 위신 효과를 담지 못한다. 숭고라는 미학 용어가 그 빈자리로 자꾸 불려 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만 그 낱말은 시선을 위로 끌어올리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비용의 귀속을 따지는 데는 쓰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