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는 한국 미술시장에서 값이 가장 높은 축에 드는 그림들의 이름이다. 이 그림들에는 백색의 정신성, 자연과의 합일, 인내의 미학 같은 설명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그 설명은 그림을 국제 무대에 내놓기 위해 뒤늦게 붙인 것이고, '단색화'라는 이름 자체는 그림보다 서른 해 가까이 늦게 생겼다. 이름이 붙는 순서를 따라가면, 지금 통용되는 설명이 여러 갈래 가운데 시장이 고른 하나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미술품 경매에서 낙찰총액이란 일정 기간 팔린 작품 값을 모두 더한 값이다. 국내 경매사 열 곳 남짓의 거래를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5년 사이 이우환의 작품은 556억 원, 정상화는 357억 원, 박서보는 347억 원어치가 팔렸다. 세 사람 모두 단색화 화가로 분류된다. 박서보의 국내 최고가는 2016년 9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11억 원에 낙찰된 1981년작 〈묘법 No.1-81〉이었다. 같은 기간 국내 경매 전체 낙찰총액은 2017년에 약 1900억 원까지 뛰었다.
이 그림들을 소개할 때 거의 예외 없이 따라붙는 말이 있다. 중간색을 통한 자연과 전통의 합일, 서양 모노크롬과 구별되는 동양의 정신성, 반복 노동에 축적된 시간. 모노크롬(monochrome)이란 한 가지 색조로만 화면을 채우는 회화를 가리키는 서양 미술 용어다. 단색화는 그 서양 용어의 번역어처럼 쓰이다가 어느 시점부터 번역하지 않는 고유명사 'Dansaekhwa'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명확하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2000년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한일 현대미술의 단면》 도록 서문에서 '한국의 모노크롬'이라는 기존 표기를 버리고 '단색화'를 택했다고 밝혔다. 모노크롬이라는 말이 중립적으로 들려서 이 회화를 구별짓는 성질이 사라질 것을 우려했고, 동시에 국제적 현상에 지역색만 얹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이 명칭이 제도적으로 굳은 것은 그가 기획한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한국의 단색화》전이었다.
그림은 1960년대 후반부터 그려졌다. 이름은 2000년에 붙었고 2012년에 확정됐다. 설명은 그 사이 어디쯤에서 만들어졌다.
설명을 걷어내고 그림 자체가 무엇을 했는지부터 보는 편이 낫다.
박서보(1931~2023)는 1967년 무렵부터 〈묘법〉 연작을 시작했다. 묘법의 프랑스어 제목은 에크리튀르(Écriture), 곧 '쓰기'다. 마르지 않은 유화 물감 위에 연필로 선을 끝없이 그어 나가는 방식이다. 연필이 지나가면 그 자리의 물감이 밀려나면서 골이 생기고, 밀려난 물감이 선 옆으로 쌓인다. 선을 그은 것이면서 동시에 물감을 지운 것이고, 그 결과로 캔버스 천의 재질이 드러난다. 1980년대부터는 한지, 곧 닥나무 껍질로 뜬 한국 전통 종이를 물에 풀어 화면에 올린 뒤 도구로 밀어내는 방식으로 바뀐다.
정상화(1932~)는 캔버스에 고령토를 두껍게 바른다. 고령토는 도자기의 흙으로 쓰이는 흰 점토다. 마른 뒤 캔버스를 틀에서 벗겨 격자로 접으면 그 선을 따라 흙이 갈라져 떨어져 나간다. 떨어진 자리를 물감으로 메우고, 다시 바르고 접고 뜯어내고 메우기를 반복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21년 회고전에서 이 방법을 "들어내고 메우기"로 정리했다. 하종현은 성기게 짠 마대의 뒤쪽에서 두꺼운 유화 물감을 밀어 넣어 앞면으로 배어 나오게 한다. 배압법(背押法)이라 불리는 방식이다. 윤형근은 짙은 갈색과 청색 안료를 묽게 풀어 거친 무명천에 스미게 했다. 권영우는 종이를 뚫고 찢었다.
서로 다른 작업이다.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재료를 그대로 두지 않고 붙이거나 떼어내면서 화면 자체의 물성을 드러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했다는 점이다. 조앤 기(Joan Kee)는 이 작가들이 공유한 것은 표시·선·틀·표면·공간이라는 회화의 구성 요소를 집요하게 다시 생각한 태도였다고 정리한다. 기는 뉴욕대 미술연구소(Institute of Fine Arts) 소장을 맡고 있는 미술사학자로, 2013년 이 회화를 다룬 영어권 최초의 본격 연구서 《Contemporary Korean Art: Tan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를 냈다.
이 그림들에 처음으로 하나의 주제어가 붙은 자리는 서울이 아니라 도쿄였다.
1975년 5월 6일부터 24일까지 도쿄 긴자의 도쿄화랑(東京畵廊)에서 《한국·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이 열렸다. 초대된 작가는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이동엽, 허황이었다. 화랑주 야마모토 다카시가 1972년 한국을 찾아 작업실을 돌며 흰색 계열 작업을 하던 화가들을 골랐고,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中原佑介, 1931~2011)가 기획에 함께했다. 전시 도록에는 나카하라와 한국의 평론가 이일(李逸, 1932~1997)이 각각 글을 실었다. 두 글은 흰색이 한국인에게 단순한 색이 아니라 정신이자 자연관이라는 취지로 전개된다. 백색을 민족의 정신성과 연결하는 논법이 이 전시를 계기로 한일 양국에서 반복되기 시작한다.
여기서 짚을 것은 순서다. 그림이 먼저 있었고, 그 그림들을 '흰색'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묶은 것은 일본 화랑의 기획이었으며, 묶인 것에 정신성이라는 내용을 채운 것은 두 나라의 평론가였다. 기는 이 회화에 '한국 모노크롬'이라는 관념을 처음 논한 사람이 작가가 아니라 이일과 나카하라 같은 비평가였다는 점을 명시한다. 작가들이 강령을 내걸고 모인 적은 없다.
단색화가 공식 운동이 아니었고 선언문도 없었다는 서술은 기와 윤진섭이 모두 동의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조직적 추진체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박서보는 1971년부터 한국미술협회 국제담당 부이사장을 맡아 해외 교류전과 국제전 출품을 조직했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이사장을 지냈다. 그가 만든 《앙데팡당》(1972), 《에콜 드 서울》(1975), 《현대미술제》(1975)는 이 계열의 작가들이 반복해 함께 걸린 무대였다. 도쿄에서는 나카하라가 기획한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1977, 도쿄 센트럴미술관)이 이어졌고, 1978~79년에는 파리 그랑팔레의 국제 현대미술전에도 나갔다. 이름이 없었던 것과 결속이 없었던 것은 같지 않다.
흰옷과 흰 그릇을 한국인의 정신과 연결하는 논법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된 전례가 있다.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1922년 잡지 《신초(新潮)》 1월호에 실은 글을 손봐 같은 해 3월 소책자 《조선의 미술》을 냈다. 여기서 그는 중국의 형태, 일본의 색에 대비해 조선 미술의 특질을 '선'으로 규정하고, 식민지라는 처지와 반도라는 지리를 근거로 조선의 미를 '비애의 미'라 불렀다. 조선인의 흰옷을 상복에 견주며 그 민족이 겪은 고통의 표현으로 읽은 것도 그였다.
그러므로 1975년의 백색 담론이 야나기가 만든 식민기의 틀을 물려받은 것 아니냐는 의심이 뒤따랐다. 이 의심은 지금도 학계에서 정리되지 않았다. 구진경은 2016년 8월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에 실은 논문 〈1970년대 한국 단색화 담론과 백색 미학 형성의 주체 고찰〉에서 이 통설을 정면으로 검증한다. 도쿄 전시 이전에 국내에서 이미 백색 관련 전시와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 국전에서 흰색 그림이 유행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백색 미학이 일본인에 의해 발굴돼 퍼졌다는 서술에 반증 사례를 제시한다.
이 갈림 자체가 사실관계의 일부다. 백색 담론의 발원지가 국내인지 일본인지는 확정되지 않았고, 확정되지 않은 채로 이 담론은 40년 뒤 상품 설명이 됐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도쿄에서 백색이 주제어가 되던 무렵 국내에서는 이미 야나기의 조선 미술론에 대한 비판이 진행 중이었다. 시인 김지하가 1969년에 문제를 제기했고, 1974년에는 최하림이 야나기의 비애의 미를 정면으로 겨냥한 글을 발표했다. 야나기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가 거세게 일었던 시기가 바로 1970년대다. 백색을 민족 정신으로 설명하는 언어와 그 언어의 원류를 식민사관으로 지목하는 언어가 같은 화단에서 동시에 굴러가고 있었다.
단색화로 분류되는 작가들이 이 작업을 본격적으로 공개하기 시작한 해는 1973년이다. 그 열 달쯤 전인 1972년 10월, 박정희는 계엄을 선포하고 유신 체제로 들어갔다. 기는 이 시간 순서를 강조한다. 노골적인 독재의 자의성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무엇을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게 된 사회의 불안정이었고, 현대와 동시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가 무너진 자리에서 다양한 작업이 쏟아졌다고 본다.
큐레이터 샘 바르다우일과 틸 펠라트는 여기에 냉전의 구도를 겹친다. 미국이 추상표현주의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서는 '순수한 예술'로 밀어 올리던 시기, 미 국무부 산하 기구가 1957년 미네소타대학에서 《현대 한국미술》전을 열었고 같은 정부가 박정희 정권에 군사·경제 원조를 주며 베트남 파병을 받았다. 이 구도에서 형상을 버린 그림은 정권이 선전물로 끌어 쓰기 어려운 물건이 된다. 두 사람은 그것이 안에서 이루어진 조용한 저항일 수 있는지 되물으며, 더 조사가 필요한 대목이라고 단서를 단다.
이 해석에는 같은 시기 같은 화단에서 나온 정반대의 증언이 맞선다. 평론가 원동석은 1975년 《원광문화》 제2집에 〈민족주의와 예술의 이념〉을 발표해 민중예술론을 제기했고, 1979년 9월 4·19 혁명 20주년 기념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의 발의로 '현실과 발언'이 결성됐다. 평론가 성완경·윤범모·원동석·최민과 김정헌·노원희·민정기·오윤·임옥상·주재환 등 미술가 열두 명이 창립 회원이었고, 1980년 10월 첫 전시를 열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리고 민중미술의 출발점에 있던 비판의 표적이 바로 화단 주류였던 단색조 추상이었다. 사회 변화에 무관심한 형식주의라는 것, 그리고 그 화가들이 미술계의 요직을 겸하면서 정권에 대한 침묵을 관행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박서보가 1977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었고 1979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 비판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추상이 정권의 요구를 비켜 갔다는 해석을 곤란하게 만든다. 형상을 버림으로써 선전에 동원되기 어려워진 것은 맞을지 모르나,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에서 화단 권력이 형성됐다면 '비켜 갔다'는 말의 뜻은 달라진다. 두 서술은 같은 사실의 서로 다른 면이고, 어느 한쪽으로 통합되지 않았다.
정신성 설명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것은 노동에 관한 대목이다. 여섯 달에서 한 해가 걸리는 반복 작업을 한국인의 인내 문화나 한(恨)과 연결하는 독법이 그렇다. 이 독법은 작가의 이동 경로 앞에서 걸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2021년 회고전에서 정리한 정상화의 연보를 보면, 그는 1967년 파리로 갔다가 1년 만에 돌아온 뒤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일본 고베에 거주하며 작업했고, 1978년부터 1992년 말까지는 파리에 있었다. 미술관은 그를 대변하는 단색조 격자 화면이 확립된 시기와 장소를 1970~80년대의 고베와 파리로 특정한다. 그가 한국에 완전히 돌아온 것은 1992년 11월이다. 이우환은 1956년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후 파리와 가마쿠라를 오갔다. 기는 정상화와 권영우가 1970년대 후반 파리의 같은 건물에 작업실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든다.
격자를 뜯어내고 메우는 노동이 국내의 문화적 기질에서 나왔다고 말하려면, 그 노동이 고베와 파리에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함께 설명해야 한다. 기가 이 노동에 붙인 설명은 다르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초 사이에 태어난 이 세대는 전쟁이 남긴 파괴를 겪었고, 영속·내구·시간에 대한 감각이 다음 세대와 뚜렷이 다르며, 그들의 표시 행위는 작품이 완성되는 것을 자신이 보지 못할까 염려하는 듯한 자기 기념에 가깝다고 쓴다. 이 설명에는 민족이 들어가지 않는다.
기는 또한 자연주의, 한국성, 미니멀리즘 같은 용어가 이 회화에 자주 동원되지만 작품 자체는 그런 언어적 기술의 한계를 드러낸다고 본다. 박서보나 하종현의 작업이 '단색화'로 정의된 것은 한국 현대미술의 홍보와 수용 방식이 바뀌었다는 뜻이며 이 명칭이 일종의 브랜딩 도구가 됐음을 가리킨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브랜딩이라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국제 시장에서 이 회화가 값을 얻은 과정은 3년 남짓에 압축돼 있다.
그리고 2015년 2월, 이 전시들의 기획자 네 사람이 영국 미술지 《프리즈》 169호에 나란히 글을 실었다. 윤진섭, 조앤 기, 그리고 뉴욕 전시를 맡은 바르다우일과 펠라트다. 같은 지면에서 두 갈래의 설명이 정면으로 갈린다.
윤진섭은 김기린의 검은 화면을 한국 시골집의 그을린 굴뚝에, 하종현의 배압법을 흙집을 짓던 옛 기법에 견주고, 이 방법들이 한국 고유의 문화적 전통에서 비롯한다고 쓴다. 기는 정확히 그 어휘를 경계한다. 한국성이라는 말이 자주 동원되지만 작품은 그런 기술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것, 이 회화가 운동이었다면 그것은 추상이나 회화와는 거의 상관없는 여러 목적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운동이었다는 것이 그의 서술이다.
시장은 이 갈림을 중재하지 않았다. 팔리는 쪽을 골랐을 뿐이다. 정신성과 인내와 자연관은 짧은 문단으로 옮길 수 있고 도록과 경매 도판에 실을 수 있는 반면, 표시·선·틀·표면·공간을 다시 생각한 태도라는 설명은 그 자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2014년 하반기부터 값이 뛰었고, 2017년 국내 경매 낙찰총액은 약 1900억 원에 이르렀다. 김환기의 뉴욕 시대 점화가 2017년 4월 케이옥션에서 65억 5000만 원에 낙찰되며 국내 최고가를 세운 것도 같은 물결 안에서였다.
여기에 마지막 뒤틀림이 있다. 본질주의적 설명을 가장 분명하게 경계한 연구자가 그 설명을 앞세운 시장의 도화선이 된 전시를 직접 기획했다. 미시간대학은 2014년 블럼앤포 전시를 알리며 이 회화가 권위주의 체제의 한국에서 관객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게 만든 효과를 지녔다고 소개했다. 그 뉘앙스는 경매 도판의 캡션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정리하면 세 갈래다. 첫째, 이름이 늦다. 그림은 1967년 무렵부터 그려졌고, '흰색'이라는 주제어는 1975년 도쿄 화랑의 기획에서 붙었으며, '단색화'라는 고유명은 2000년의 도록 서문에서 제안돼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굳었다. 작가들이 강령을 내걸고 모인 적은 없다는 점에서는 기와 윤진섭이 일치한다.
둘째, 설명의 족보가 확정돼 있지 않다. 백색을 민족 정신으로 읽는 논법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식민기 조선 미술론과 겹치지만, 도쿄 전시 이전에 국내에서 백색 논의가 자생하고 있었다는 실증적 반론도 제기돼 있다. 그리고 그 논법이 만들어지던 1970년대에 국내에서는 야나기에 대한 비판이 이미 거세게 일고 있었다.
셋째, 정치적 위치가 두 방향으로 읽힌다. 계엄 이듬해에 공개된 이 그림들이 형상을 버림으로써 선전 동원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해석과, 같은 화가들이 화단 권력을 쥐고 정권에 침묵했다는 민중미술 쪽 비판이 맞선다. 두 서술은 같은 사실의 다른 면이며, 어느 쪽을 본체로 보느냐에 따라 이 회화가 유신기에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답이 갈린다. 다만 노동을 한국적 인내로 설명하는 대목만큼은 사실관계가 한쪽으로 기운다. 정상화의 격자는 고베와 파리에서 확립됐고, 이우환은 1956년에 이미 일본에 있었다.
남는 물음은 미술사가 시장과 맺는 관계다. 2013년의 연구서와 2014년의 전시가 없었다면 이 그림들은 지금의 값을 얻지 못했을 것이고, 값이 붙지 않았다면 국립현대미술관의 2021년 정상화 회고전 같은 뒤늦은 학술적 정리도 그만큼 늦어졌을 것이다. 연구가 시장을 만들고 시장이 다시 연구를 부르는 순환에서, 연구자가 세운 유보 조건은 순환의 첫 바퀴에서 대개 떨어져 나간다. 단색화의 경우 떨어져 나간 것은 이 회화를 하나의 정신으로 요약하지 말라는 경고였고, 남은 것은 요약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