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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아니라 관념이 작품을 만든다는 원칙 —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 AI 생성 이미지까지, 미술 제도와 법정이 갈라진 자리

고르는 행위가 곧 창작이라는 명제는 20세기 미술의 전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명제를 실제로 떠받친 것은 관념의 힘이 아니라 기증과 계약과 등록이라는 절차였고, 법정은 같은 명제를 여러 차례 물리쳤다.

2026년 8월 18일

1소변기 하나가 미술이 된 1917년 봄

1917년 4월, 뉴욕 그랜드센트럴 팰리스에서 독립미술가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의 첫 전시가 열렸다. 이 협회는 프랑스의 앵데팡당전을 본떠 전해에 만들어진 미술가 단체로, 심사위원을 두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회비 6달러를 낸 회원이 낸 것이면 무엇이든 걸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시험하는 물건이 하나 들어왔다. 배관 설비 회사 J. L. 모트 아이언 웍스의 뉴욕 쇼룸에서 사 온 자기 소변기였다. 옆으로 눕혀 좌대에 올렸고, 「샘(Fountain)」이라는 제목과 'R. Mutt 1917'이라는 서명이 붙어 있었다. 협회 이사회는 개막을 앞두고 이 물건을 칸막이 뒤로 치웠다. 이사였던 마르셀 뒤샹과 수집가 월터 아렌스버그는 항의하며 사임했다. 소변기를 낸 사람이 뒤샹 자신이었다.

며칠 뒤 뒤샹은 소변기를 사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화랑으로 가져가 촬영하게 했다. 그 사진은 뒤샹과 앙리피에르 로셰, 베아트리스 우드가 함께 낸 잡지 《더 블라인드 맨(The Blind Man)》 2호(1917년 5월)에 실렸고, 맞은편 면에는 무기명 사설 「리처드 머트 사건(The Richard Mutt Case)」이 실렸다. 보든칼리지 미술관은 이 사설을 뒤샹과 로셰, 우드가 무기명으로 함께 쓴 글로 소개한다.

Whether Mr. Mutt with his own hands made the fountain or not has no importance. He CHOSE it. He took an ordinary article of life, placed it so that its useful significance disappeared under the new title and point of view—created a new thought for that object.

머트 씨가 그 샘을 제 손으로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골랐다. 그는 일상의 평범한 물건 하나를 집어, 새로운 제목과 새로운 관점 아래 그 물건의 쓸모가 사라지도록 놓아 두었다. 그 물건을 위한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리처드 머트 사건」, 《더 블라인드 맨》 2호(뉴욕, 1917년 5월), 5쪽. 번역은 직접 옮김.

이 몇 문장이 20세기 미술의 전제가 되었다. 만든 사람이 아니라 고른 사람이 저작자라는 것, 손이 닿지 않아도 관점의 전환만으로 사물이 작품이 된다는 것. 뒤샹은 이런 물건들을 레디메이드(readymade), 곧 기성품이라 불렀다.

정작 그 소변기는 곧 사라졌다. 원본은 남아 있지 않고 스티글리츠의 사진만 남았다. 필라델피아미술관이 소장한 「샘」은 1950년에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의 전시를 위해 뒤샹이 재니스에게 파리에서 중고 소변기를 사도록 승인하고 처음의 서명 문구를 다시 적어 넣은 물건이다. 원본이 없는데도 정전이 된 상태 자체가 이 작품의 논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저작자성이 지정하는 행위 쪽에 붙어 있으므로 물체는 갈아 끼울 수 있다.

2관념이 실행을 지휘한다는 원칙, 그리고 그것이 닮은 문서

이 원칙을 미술가가 직접 문장으로 정리한 것은 반세기 뒤다. 솔 르윗은 1967년 6월 《아트포럼》에 실은 「개념미술에 관한 문단들(Paragraphs on Conceptual Art)」에서, 개념미술에서는 관념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계획과 결정이 미리 다 끝나고 실행은 형식적인 절차가 된다고 적었다. 관념 자체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기계 노릇을 하고, 작품은 장인으로서의 솜씨에 기대지 않는다고 했다.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라는 말이 미술가 자신의 선언 속에서 정의된 자리가 여기다.

이 서술의 구조가 산업 현장의 관리 문서와 닮았다는 지적이 곧 따라붙었다.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는 1911년 하퍼 앤드 브라더스에서 『과학적 관리의 원칙(The Principles of Scientific Management)』을 냈다. 테일러가 제안한 핵심은 계획과 실행의 분리였다. 관리자가 최선의 작업 방법을 정해 지시표로 내려보내고 노동자는 그것을 수행한다. 숙련공이 스스로 판단하던 몫을 계획실의 문서로 옮기는 설계였다.

미술사에서 이 겹침을 정면으로 다룬 것은 벤저민 부홀로다. 그는 1990년 학술지 《옥토버》 55호에 「개념미술 1962–1969: 행정의 미학에서 제도 비판으로」를 실어, 전후에 생산하는 대신 노동과 생산을 관리하는 계층으로 권력이 몰린 사정이 1960년대 이후 개념미술가들의 작업 모델이 되었다고 논했다. 헬렌 몰스워스는 2003년 볼티모어미술관 전시와 그 도록 『워크 에식(Work Ethic)』에서 이 논의를 전시로 옮겼다. 몰스워스는 개념미술가들이 제작을 남에게 넘기면서 관리노동의 논리를 그대로 복제했다고 지적하고, 르윗의 벽 드로잉을 실제로 그린 것은 기계가 아니라 조수였다는 사실을 짚는다. 존 로버츠는 2007년 『형식의 비물질성: 레디메이드 이후 미술에서의 숙련과 탈숙련(The Intangibilities of Form)』에서 레디메이드 이후의 탈숙련을 노동가치론으로 다시 짰다.

그러므로 개념미술을 관리자의 미학으로 읽는 독법은 새로 발견된 착상이 아니라 30년 넘게 쌓인 정통 계보다. 남는 물음은 이 비판이 겨눈 자리가 맞느냐다. 관념이 손보다 높다는 위계가 문제의 본체라면 표적은 개념미술이라는 형식 자체가 된다. 그런데 그 원칙이 실제로 작동한 경로를 따라가 보면 다른 것이 나온다.

3뒤샹을 정전으로 만든 것은 1950년 12월의 기증 문서다

월터와 루이즈 아렌스버그 부부는 1913년 아모리쇼에서 세잔과 고갱의 석판화, 뒤샹의 형 자크 비용의 소품을 사면서 수집을 시작했다. 이듬해 뉴욕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모았고, 1919년에는 뒤샹을 아모리쇼의 화제작으로 만든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손에 넣었다. 1921년 할리우드로 옮긴 뒤에도 파리에 있던 뒤샹의 조언을 받아 수집을 이어 갔다. 「샘」이 나온 1917년의 독립미술가협회 자체가 이 부부의 아파트에서 열린 모임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1940년대에 부부는 수집품을 넘길 기관을 찾았다. 시카고미술관, 덴버미술관, 하버드대학교, 호놀룰루미술아카데미, 멕시코시티의 국립미술원, 내셔널갤러리, 필라델피아미술관, 샌프란시스코미술관, 스탠퍼드대학교,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미네소타대학교와 두루 협상했다. 필라델피아미술관 관장 피스크 킴벌 부부가 여러 차례 찾아왔고, 뒤샹도 그 미술관을 둘러본 소감을 부부에게 전했다. 1950년 12월 27일, 부부는 1000점이 넘는 소장품을 필라델피아미술관에 넘겼다. 이 미술관은 그날로 세계에서 가장 큰 뒤샹 소장처가 되었고, 지금도 뒤샹 작품 200점 이상과 유족이 정리한 개인 문서를 보관한다.

여기서 초점이 옮겨 간다. 뒤샹의 위치를 굳힌 것은 소변기를 고른 1917년의 판단이 아니라, 그 판단의 산물을 한꺼번에 공공 기관으로 옮긴 1950년의 기증이었다. 김은송(Eunsong Kim)이 2024년 듀크대학교 출판부에서 낸 『수집의 정치학: 인종과 재산의 미학화(The Politics of Collecting: Race and the Aestheticization of Property)』가 서 있는 자리가 여기다. 노스이스턴대학교 영문학 부교수인 저자는 능력이나 안목이 아니라 수탈의 체제가 형식 혁신과 예술적 천재라는 관념을 만들어 냈다고 보고, 뒤샹의 정전화도 작품의 질보다 후원자의 미술관 기증에 더 크게 빚졌다고 논한다. 미국 미술관 수집의 역사를 19세기 말 산업 자본가들의 자선 구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다루는 책이다.

이 논지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위계를 지적하는 논법과 결이 다르다. 앞의 논법은 관념을 떠받드는 태도를 문제 삼고, 뒤의 논법은 관념에 소유권을 붙이고 그 소유권을 옮기는 절차를 문제 삼는다. 둘을 하나로 묶으면 편해 보이지만 다투는 대상이 달라진다. 소변기의 저작자성은 누가 위험한 노동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만든 노동은 이미 배관 공장에서 임금을 받고 끝난 노동이었다.

4관념을 팔려면 계약서를 새로 써야 했다

고르는 행위가 곧 창작이라는 명제가 자명한 원리였다면, 그 명제는 따로 문서를 만들지 않아도 작동했을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1971년 3월, 뉴욕의 독립 인쇄소에서 접지 포스터 한 장이 나왔다. 제목은 「미술가 유보 권리 양도·매매 계약서(The Artist's Reserved Rights Transfer and Sale Agreement)」였다. 앞면에는 개념미술 기획자이자 화상이던 세스 지겔라우프의 취지문이, 뒷면에는 변호사 로버트 프로얀스키가 쓴 19개 조문이 실렸다. 지겔라우프는 미술가, 화상, 변호사, 수집가, 미술관 관계자, 비평가 등 500명이 넘는 사람과 논의하고 서신을 주고받은 끝에 초안을 잡았다고 밝혔다. 겨눈 문제는 하나였다. 미술가는 작품을 판 뒤에는 그 작품이 어떻게 쓰이는지, 그 값이 어떻게 오르는지에 관여할 길이 없었다. 제2조는 되팔 때 오른 값의 15퍼센트를 미술가에게 주도록 정했다.

지겔라우프는 칼 안드레, 로버트 배리, 더글러스 휴블러, 조지프 코수스, 솔 르윗, 로런스 위너 같은 개념미술가들과 오래 일한 사람이다. 그가 뉴욕현대미술관에 남긴 문서철에는 이 계약서의 초안과 교정지가 함께 들어 있다. 로런 판하프턴시크는 옥스퍼드 핸드북에 실은 「미술가의 권리를 개념화하기」에서 이 계약서와 초기 개념미술의 증서를 함께 놓고, 물질이 없는 작품을 거래하려면 어떤 법 문서가 필요했는지를 다룬다.

계약서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증거다. 관념에 저작자성과 재산권을 붙이는 일은 저절로 되지 않았고, 새 법 문서를 발명해야 했다. 미술계 안에서 통용되던 원칙과 그 바깥에서 통용되는 규칙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5강판이 떨어졌을 때 법원이 나눈 것은 책임의 위치였다

1971년 11월 18일, 미니애폴리스 워커아트센터에서 리처드 세라의 「조각 3번(Sculpture No. 3)」을 조립하던 리거 레이먼드 존슨이 숨졌다. 리거는 크레인과 밧줄로 무거운 물체를 옮기고 세우는 기능공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한 변 8피트(약 2.4m), 두께 5.7cm의 강판 두 장으로 이뤄져 있었고, 강판 한 장의 무게는 5212파운드(약 2364kg)였다. 판 하나가 지지대에서 빠져나와 존슨을 덮쳤다.

이후의 소송 기록이 이 사건의 구조를 보여 준다. 미국 제8순회항소법원 판결문 Johnson v. Serra, 521 F.2d 1289(8th Cir. 1975)에 따르면 세라가 낸 것은 설계였고, 구조 계산은 바이들링거 엔지니어링이, 강판 제작은 밀고 인더스트리얼이, 조립은 프랫스 익스프레스 컴퍼니가 맡았다. 존슨은 프랫스 소속이었다. 바이들링거의 조립 지시서는 판을 세우는 동안 버팀대를 대고 지지 슬롯에 심을 끼워 두 판이 서로 닿을 때까지 고정하라고 정했다. 같은 작업조가 6개월 전 「조각 1번」을 무사히 세울 때도 버팀대를 쓰지 않았고, 사고가 난 날에는 두 판을 맞닿게 하기가 어렵자 한쪽 슬롯의 심까지 빼냈다. 배심은 50만 5092달러의 배상을 평결하면서 세라에게는 과실이 없다고 보았다.

이 사건은 대개 작가의 도덕적 책임을 묻는 일화로 불려 나온다. 그러나 기록이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은 책임이 놓이는 자리다. 관념과 서명은 한 사람에게 귀속되고, 그것을 물체로 만드는 위험은 설계·제작·운송·조립으로 이어지는 계약 사슬을 따라 내려간다. 법은 그 사슬의 마디마다 다른 종류의 의무를 지우며, 저작자성이 있는 곳과 위험이 있는 곳은 일치하지 않는다. 정신노동이 육체노동을 착취한다는 도식보다 이쪽이 더 정확하고 더 다루기 어렵다. 착취라면 고칠 사람이 특정되지만, 배분이라면 고칠 것은 계약 구조 자체다.

세라를 손을 대지 않는 관리자로 그리는 서술도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는 코르텐 강판 작업 이전에 녹인 납을 벽과 바닥의 이음매에 직접 뿌려 「스플래시」 연작을 만들었다.

6법정은 미술계의 승인을 인정했고, 의미의 추가는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이 미술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적도 있고 물리친 적도 있다. 한 세기를 사이에 둔 두 판결이 그 폭을 보여 준다.

1926년,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공간 속의 새(Bird in Space)」를 미국으로 들여왔다. 1922년 관세법은 전문 조각가가 만든 원작 조각을 무관세로 통과시켰으나, 세관은 이 매끈한 청동 기둥이 새를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각으로 보지 않고 금속 가공품으로 분류해 판매가의 40퍼센트를 물렸다. 스타이컨이 불복해 관세법원에서 다투었다. 1927년 10월 심리에서는 문제의 조각이 법정 한가운데에 증거물로 놓였고, 조각가 제이컵 엡스타인과 브루클린미술관 관장 윌리엄 헨리 폭스 같은 미술계 인사들이 증언했다. 1928년 조지 영 판사와 바이런 웨이트 판사는 이것이 무관세 대상인 원작 조각이라고 판단했다.

판단의 근거가 중요하다. 법원이 든 것은 브랑쿠시가 전문 조각가라는 점, 작품에 실용 목적이 없다는 점, 그리고 자연물을 모방하는 대신 추상적 관념을 표현하려는 새로운 유파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판단의 재료는 물건의 생김새가 아니라 미술계의 승인이었다. 브랑쿠시의 뉴욕 전시를 브루머 갤러리에 제안한 사람이 뒤샹이었다는 사실을 함께 놓으면, 1917년에 협회가 물리친 논리가 1928년 관세 재판에서는 통과한 것이 된다.

2023년의 판단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앤디 워홀 재단 대 골드스미스(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 v. Goldsmith, 598 U.S. 508) 사건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은 5월 18일 7 대 2로 재단의 주장을 물리쳤다. 사진가 린 골드스미스가 1981년 찍은 가수 프린스의 사진을 《배니티 페어》가 1984년에 삽화용 참고 자료로 한 차례 쓰기로 허락받았고, 워홀은 허락된 삽화 외에 열다섯 점을 더 만들었다. 프린스가 세상을 떠난 뒤 콩데나스트는 그중 「오렌지 프린스」를 추모호에 쓰려고 재단에 1만 달러를 냈다.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쓴 다수 의견은 두 이미지가 모두 프린스를 다룬 잡지 기사를 꾸미는 데 쓰였고 그 사용이 상업적이라는 점을 들어, 공정이용의 첫 번째 요소가 골드스미스에게 유리하다고 보았다. 새로운 표현이나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변형적 이용이 되지 않는다. 「리처드 머트 사건」이 내세운 논리, 곧 새로운 제목과 관점을 씌워 그 물건을 위한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냈다는 논리가 법정에서 그대로 통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법원은 판단 범위를 재단이 콩데나스트에 상업적 사용을 허락한 행위로 한정했고, 프린스 연작 원작을 만들고 전시하고 파는 일에 대해서는 견해를 밝히지 않았다.

7프롬프트로 고르는 것만으로는 저자가 되지 않는다

같은 물음이 생성형 인공지능(AI)에서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답이 문서로 정리되어 있다.

컴퓨터 과학자 스티븐 세일러는 자신이 만든 시스템 '크리에이티비티 머신'을 저작자로, 자신을 권리자로 적어 이미지 「A Recent Entrance to Paradise」의 저작권 등록을 신청했다. 미국 저작권청이 거부했고, 2023년 베릴 하월 판사는 인간의 저작이 저작권의 기반이라며 그 거부를 유지했다. 2025년 3월 18일 컬럼비아특별구 연방항소법원은 저작권법이 말하는 '저작자'가 사람만을 가리킨다고 판단해 원심을 확정했다. 2026년 3월 연방대법원이 상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 사건은 끝났다.

세일러 사건은 기계를 유일한 저작자로 적은 극단적인 사례여서 쉬운 축에 든다. 어려운 것은 사람이 도구로 쓴 경우다. 저작권청은 2023년 2월 21일 그래픽노블 「Zarya of the Dawn」에 대해, 사람이 쓴 글과 글·그림을 고르고 짜 맞춘 부분은 보호하되 미드저니가 생성한 개별 그림은 등록에서 제외했다. 2025년 1월에 낸 보고서 『저작권과 인공지능, 제2부: 저작물성』은 그 기준을 문장으로 정리했다.

Prompts alone do not provide sufficient human control to make users of an AI system the authors of the output.

프롬프트만으로는 인공지능 시스템의 이용자를 그 산출물의 저작자로 만들 만큼의 인간적 통제가 확보되지 않는다.

미국 저작권청, 『저작권과 인공지능, 제2부: 저작물성』(2025년 1월), 18쪽. 현재 일반에 보급된 기술 수준을 전제로 한 판단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번역은 직접 옮김.

같은 달 저작권청은 인페인팅 도구로 35차례 되풀이해 고친 이미지 「A Single Piece of American Cheese」를 등록해 주었다. 등록의 근거는 프롬프트가 정교했다는 것이 아니라 생성된 요소들을 고르고 조정하고 배열한 데에 사람의 저작이 있다는 것이었다. 프롬프트 600회 이상으로 만든 「Théâtre D'opéra Spatial」의 등록 거부를 다투는 앨런 대 펄머터(Allen v. Perlmutter) 사건은 콜로라도 연방지방법원에 계류 중이다.

두 문장이 마주치는 자리

1917년의 문장은 손으로 만들었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골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했다. 2025년의 문장은 프롬프트로 고르는 행위만으로는 저작자가 되기에 모자란다고 했다. 두 문장의 차이는 미술과 법의 차이가 아니라, 어느 제도가 그 지정 행위를 승인해 주느냐의 차이다. 뒤샹의 지정은 미술관과 수집가와 비평이 받아들여 저작이 되었고, 프롬프트 입력은 저작권 등록 제도가 받아들이지 않아 저작이 되지 못했다.

8결론 — 관념의 권위는 관념에서 나오지 않았다

레디메이드 이후의 미술은 손이 아니라 관념이 작품을 만든다는 원칙 위에 섰다. 르윗이 1967년에 그것을 문장으로 정리했고, 그 원칙이 테일러가 1911년에 계획과 실행을 갈라놓은 설계와 닮았다는 지적은 부홀로 이래 30년 넘게 축적됐다. 여기까지는 정설이다.

그러나 이 원칙이 실제로 작동한 근거를 따라가면 관념의 우월성은 나오지 않는다. 뒤샹의 위치를 굳힌 것은 1950년 12월에 1000점이 넘는 소장품을 필라델피아미술관으로 옮긴 아렌스버그 부부의 기증이었다. 물질 없는 작품을 거래하기 위해 개념미술은 1971년에 계약서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워커아트센터에서 강판이 떨어졌을 때 법원이 한 일은 관념과 위험을 서로 다른 주체에게 배분한 계약 사슬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법정은 미술계의 승인을 근거로 브랑쿠시를 조각으로 인정했고(1928년), 새 의미를 더했다는 주장만으로는 변형적 이용을 인정하지 않았으며(2023년), 프롬프트만으로 저작자를 인정하지 않았다(2025~2026년).

그러니 고르는 것이 곧 창작이라는 명제는 자명한 미학 원리가 아니라 특정한 제도가 특정한 시기에 승인한 배치다. 무엇을 본체로 보느냐에 따라 비판의 표적이 달라진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위계를 본체로 보면 표적은 개념미술이라는 형식 자체가 되고, 저작자성을 배분하는 절차를 본체로 보면 표적은 후원과 기증과 계약과 등록이 된다. 김은송의 책이 서 있는 자리는 뒤쪽이며, 그 자리에서 보면 소변기를 옹호하느냐 조롱하느냐는 부차적인 물음이 된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사람의 개입이 어느 정도여야 저작이 되느냐다. 저작권청이 그은 선은 선택과 조정과 배열은 인정하고 프롬프트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판단에는 현재 일반에 보급된 기술 수준을 전제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앨런 대 펄머터 사건이 다투는 것이 바로 그 선의 위치다. 단서가 풀리거나 선이 옮겨지면, 손으로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적은 1917년의 문장은 미술사의 명제가 아니라 다시 검토해야 할 법적 쟁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