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obhan.me

불교철학 입문

나가르주나 입문 — 『중론』의 공(空) 논증을 게송으로 따라 읽기

2026년 8월 18일

공(空)이라는 말을 처음 만나면 대개 같은 자리에서 걸린다. 모든 것이 공하다면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괴로움도 없고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어지지 않는가. 이 반문은 현대 독자가 처음 떠올린 것이 아니다. 나가르주나 자신이 자기 주저 『중론』 제24장 첫머리에 상대편의 말로 그대로 받아 적어 두었다.

yadi śūnyam idaṃ sarvam udayo nāsti na vyayaḥ / caturṇām āryasatyānām abhāvas te prasajyate //

이 모든 것이 공하다면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다. 그러면 그대에게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없다는 귀결이 따라붙는다.

나가르주나, 『중론』 24장 1송. 산스크리트 본문은 바이디야 교정본(P. L. Vaidya, Madhyamakaśāstra of Nāgārjuna, Mithila Institute, 1960)을 따랐다. 한국어 번역은 직접 옮겼다.

상대의 지적은 정확하다. 공을 존재하지 않음으로 읽으면 사성제도 수행도 부처도 함께 사라진다. 나가르주나는 이 반론에 40송을 들여 답하는데, 답의 요지는 공이 존재에 관한 학설이 아니라는 데 있다. 공은 상대가 이미 붙들고 있는 어떤 전제를 검사하는 절차이고, 그 절차를 마친 뒤에 남는 상태에 붙인 이름이다.

이 글의 주장은 하나다. 나가르주나가 만든 것은 세계의 구성에 관한 새 학설이 아니고, 상대가 스스로 받아들인 전제만 가지고 그 전제가 무너지는 것을 보이는 검사 절차다. 그가 남긴 게송을 실제로 한 편씩 따라 읽으면 이 점이 드러난다. 아래에서는 인과, 운동, 자아 같은 주제를 다룬 대목을 산스크리트 본문과 함께 놓고, 논증이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를 문장 단위로 좇는다.

나가르주나라는 이름 아래 몇 사람이 있는가

확실한 사실은 적다. 얀 베스터호프가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의 나가르주나 항목에서 정리한 바에 따르면, 나가르주나가 서기 150년에서 250년 사이에 살았던 불교 승려이고 주로 남인도에서 활동했다는 것 정도가 논란 없이 받아들여진다. 그 이상은 추론이다.

조지프 월서는 Nāgārjuna in Context(컬럼비아대출판부, 2005)에서 비문 자료와 미술사 자료를 모아 활동 시기와 장소를 좁혀 보려 했다. 그의 결론은 나가르주나가 175년에서 204년 사이에, 지금의 안드라프라데시에 해당하는 크리슈나강 하류의 도시 근처 대중부 계열 승원에서 저술했으리라고 본다. 서평자들은 이 재구성이 단편적 증거를 모은 것치고는 잘 짜였다고 평가하면서도, 근거의 두께에 비해 결론이 지나치게 세밀하다는 점을 함께 지적했다. 그가 사타바하나 왕조의 어느 왕에게 편지 형식의 글을 보냈다는 전승은 여러 계통의 전기에 공통으로 나오지만, 전기 자체는 신화적 요소로 가득해 사실 확인의 발판이 되지 못한다.

더 성가신 문제는 이름이 겹친다는 점이다. 후대 인도에서는 새로 지은 저작을 과거 권위자의 이름으로 돌리는 관행이 있었고, 연금술과 밀교 계통의 문헌 가운데도 나가르주나 저작으로 전하는 것이 많다. 그래서 학계는 저작 목록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대신 귀속이 다투어지지 않는 것부터 추린다. 베스터호프가 꼽는 논증 계열 저작은 여섯이다. 『중론』, 『육십송여리론』, 『칠십공성론』, 『회쟁론』, 『광파론』, 그리고 왕에게 보내는 윤리 논의를 담은 『보행왕정론』이다.

이 가운데 축이 되는 것이 『중론』이다. 27장에 걸쳐 448송이 실려 있고, 권두의 귀경게 2송을 함께 세면 450송이 된다. 산스크리트 본문의 전승 사정은 좋지 않다. 온전한 산스크리트 사본으로 남은 것은 7세기 짠드라끼르띠의 주석 『쁘라산나빠다』이고, 『중론』 본문은 그 주석 안에 인용된 형태로 보존되었다. 최근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예사오융(叶少勇)이 티베트에 남아 있던 산스크리트 사본을 찾아내 교정본을 냈고, 그 사본은 주석에 딸리지 않은 독립 『중론』 사본으로는 현존 최고본이다. 확인된 분량은 전체의 5분의 1가량이다.

표적은 자성(自性)이라는 개념 하나다

나가르주나의 논증을 따라가려면 표적부터 알아야 한다. 표적은 자성(自性, svabhāva)이다. 이 낱말은 문자 그대로는 '제 것인 있음'이고, 영어권에서는 고유한 성질, 내재적 존재, 실체 같은 여러 말로 옮긴다.

불교 안에서 이 말은 두 층으로 쓰였다. 하나는 본질이라는 뜻이다. 불의 자성은 뜨거움이고 물의 자성은 젖음이어서, 뜨겁지 않게 된 것은 이미 불이 아니다. 베스터호프는 이 층이 나가르주나의 표적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표적은 다른 층, 곧 실체라는 뜻의 자성이다.

이 두 번째 뜻을 이해하려면 나가르주나 이전 불교 형이상학의 구도를 알아야 한다. 아비달마 학파들은 존재를 두 등급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일차 존재(dravyasat)로, 더 쪼갤 수 없고 우리 개념 활동과 무관하게 있는 세계의 기초 부품이다. 다른 하나는 이차 존재(prajñaptisat)로, 그 부품들을 우리가 묶어 세우고 이름 붙인 결과물이다. 수레와 항아리와 사람은 이차 존재이고, 그것을 이루는 최소 요소인 법(dharma)이 일차 존재다. 자성을 가진다는 말은 이 구도에서 일차 존재의 자격을 갖춘다는 뜻이었다. 곧 의존의 사슬을 따라 내려갔을 때 더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 놓인다는 뜻이다.

자성의 두 조건 나가르주나가 쓰는 자성 개념은 두 조건을 함께 요구한다. 첫째,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akṛtrima). 둘째, 다른 것에 기대지 않을 것(nirapekṣa paratra). 이 두 조건이 논증의 뇌관이다. 조건을 상대가 먼저 내걸었으므로, 나가르주나는 자기 학설을 세울 필요 없이 이 조건에서 무엇이 따라 나오는지만 계산하면 된다.

나가르주나는 이 바닥이 없다고 본다. 베스터호프의 표현으로 하면 존재론적 토대주의의 거부다. 이 거부가 곧 허무주의라는 비판은 오래되었고 지금도 이어진다. 데이비드 버튼은 Emptiness Appraised(커즌, 1999)에서, 토머스 우드는 Nāgārjunian Disputations(하와이대출판부, 1994)에서 각기 다른 경로로 그 결론에 이른다. 반대편에는 베스터호프의 「중관 허무주의 해석에 관하여」(Journal of Indian Philosophy 44권, 2016)가 있다. 이 논쟁은 지금도 닫히지 않았고, 이 글의 뒤쪽에서 다시 다룬다.

첫 논증 — 생겨남의 네 갈래를 모두 막는다

『중론』 제1장은 인과를 다룬다. 귀경게 두 편에 이어 나오는 첫 게송이 책 전체의 어법을 미리 보여 준다.

na svato nāpi parato na dvābhyāṃ nāpy ahetutaḥ / utpannā jātu vidyante bhāvāḥ kvacana kecana //

자기로부터도 아니고 남으로부터도 아니며, 둘 다로부터도 아니고 원인 없이도 아니다. 생겨난 존재들은 어디에서도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

『중론』 1장 1송. 바이디야 교정본에서는 귀경게 2송을 함께 세어 1.3으로 매긴다. 이 대목의 마지막 낱말을 바이디야는 kkacana로 인쇄했고, 짠드라끼르띠 주석의 라 발레 푸생 교정본은 kvacana로 읽는다. 여기서는 후자를 따랐다.

네 갈래를 세우고 넷을 모두 막는 이 구조를 사구(四句, catuṣkoṭi)라 한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어법이다. 나가르주나는 인과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자기 견해로 제시하지 않는다. 상대가 인과를 설명하려면 넷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점을 이용해, 각 선택지가 자체로 무너지는 것을 하나씩 보인다.

자기로부터 생겨난다는 갈래는 원인과 결과가 같은 것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면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통념이 깨진다. 어떤 것도 자기 자신보다 시간상 앞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과가 원인 속에 이미 들어 있다는 완화된 형태로 바꾸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휘발유와 산소와 불꽃을 아무리 헤집어도 폭발은 그 안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남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갈래가 상식에 가깝다. 나가르주나는 여기를 겨눈다. 결과는 원인에 존재상으로 기댄다. 원인이 없었다면 결과도 없었을 테니 그렇다. 원인 쪽은 결과에 적어도 명칭상으로 기댄다. 결과가 없다면 그것을 원인이라 부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성을 갖춘다는 것은 어느 쪽으로도 기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서로 기대는 둘이 동시에 서로 기대지 않을 수는 없다. 반대로 아무 관계도 없는 두 대상을 골라 놓으면, 이번에는 어느 쪽을 원인이라 부르고 어느 쪽을 결과라 불러도 상관없어진다. 뒤바꿔도 아무 차이가 없는 관계는 인과가 아니다.

셋째 갈래는 앞의 두 어려움을 피하려는 절충이다. 대리석 덩어리가 조각상을 가능태로 품고 있고 조각가의 작업이 그것을 실현한다는 식이다. 이 설명은 그 자체로는 무리가 없다. 다만 원인이나 결과가 자성을 갖춘다는 주장을 떠받치지는 못한다. 보조 조건은 대리석 없이 있을 수 없고 조각상은 그 둘 없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넷째 갈래, 곧 인과가 없다는 주장은 우리가 세계를 아는 방식 자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자성의 정의에서 곧바로 모순이 나온다

인과를 다루는 제1장이 사례를 통한 논박이라면, 자성을 정면으로 다루는 제15장은 정의 자체를 겨눈다. 『중론』에서 가장 압축된 두 게송이 여기 있다.

na saṃbhavaḥ svabhāvasya yuktaḥ pratyayahetubhiḥ / hetupratyayasaṃbhūtaḥ svabhāvaḥ kṛtako bhavet //

자성이 원인과 조건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원인과 조건에서 생겨난 자성이라면 만들어진 것이 되고 만다.

『중론』 15장 1송(바이디야 교정본)

svabhāvaḥ kṛtako nāma bhaviṣyati punaḥ katham / akṛtrimaḥ svabhāvo hi nirapekṣaḥ paratra ca //

만들어진 자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자성이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고 다른 것에 기대지 않는 것이다.

『중론』 15장 2송(바이디야 교정본)

둘째 게송의 뒷줄이 정의다. 자성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남에게 기대지 않는다. 이 정의는 상대편이 쓰던 그대로이며 나가르주나가 새로 세운 바가 없다. 앞 게송은 그 정의를 조건 발생과 나란히 놓았을 뿐이다. 조건에서 생긴 것은 만들어진 것이고, 만들어진 것은 정의상 자성이 아니다. 따라서 조건에서 생긴 무엇에도 자성은 없다.

여기서 연기(緣起)와 공이 이어진다. 붓다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진 것이 조건에 기대어 일어난다는 연기다. 나가르주나는 이 명제를 자성의 정의와 맞대어 놓았고, 두 문장은 함께 설 수 없다. 논증에 별도의 전제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상대가 인정하는 연기와 상대가 쓰는 자성의 정의, 이 둘만으로 결론이 나온다.

제15장의 논의는 이어서 자성이 없으면 타성(parabhāva)도 없다는 데로 간다. 타성은 다른 것의 자성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자성이 무너지면 함께 무너진다. 그다음이 있음과 없음이다. 자성으로 있는 것은 없어질 수 없으니 영원론에 걸리고, 없다고 하면 앞서 있던 것이 끊겼다는 뜻이 되어 단멸론에 걸린다. 15장 10송은 이 두 극단을 모두 붙들지 말라고 맺는다.

가는 자와 감을 떼어 놓으면 감이 둘이 된다

제2장은 운동을 다룬다. 25송에 걸친 이 장은 『중론』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평을 받는다. 첫 게송은 이렇다.

gataṃ na gamyate tāvad agataṃ naiva gamyate / gatāgatavinirmuktaṃ gamyamānaṃ na gamyate //

이미 간 것은 가지지 않는다. 아직 가지 않은 것도 가지지 않는다. 간 것과 가지 않은 것을 떠난 지금 가고 있는 것도 가지지 않는다.

『중론』 2장 1송(바이디야 교정본)

마크 시더리츠와 오브라이언은 1976년 Philosophy East and West에 실은 논문에서 이 장을 제논의 역설과 나란히 놓고 읽었다. 시간과 공간의 구조에 관한 특정 견해를 반박하려는 논증으로 보았다. 베스터호프는 다른 목표를 지목한다. 하나는 불교 교리의 핵심 개념들이 실체로 다루어지는 것을 막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개체와 속성의 관계에 관한 견해를 세우는 일이다. 뒤엣것이 뒤이어 나오는 게송에서 분명해진다.

gamyamānasya gamane prasaktaṃ gamanadvayam / yena tad gamyamānaṃ ca yac cātra gamanaṃ punaḥ //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하면 감이 둘이 되고 만다. 그것을 지금 가고 있는 것이게 하는 감이 하나요, 거기에 다시 있다는 감이 또 하나다.

『중론』 2장 5송(바이디야 교정본)

논증은 이렇게 돌아간다. 어떤 것을 '가는 자'라고 부를 때, 그 이름을 성립시키는 것은 감이다. 그 가는 자가 간다고 말하면, 이름을 성립시킨 감 위에 새로 하나가 얹힌다. 감이 둘이 된다. 그런데 실제 상황에는 감이 하나뿐이다.

파란 항아리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항아리는 파랗지 않아도 항아리이므로, 항아리라는 개체와 파랑이라는 속성을 따로 떼어 말할 수 있다. 가는 자에게는 그 분리가 통하지 않는다. 나가르주나는 여기서 개체와 속성의 구분이 세계에 새겨진 눈금이 아니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우리는 파랗고 둥근 항아리 모양의 무엇을 두고 항아리를 개체로 삼고 파랑을 속성으로 삼는데, 그 선택은 관심의 문제이지 대상의 성질이 아니다. 세계가 미리 개체와 속성으로 잘려 있지 않다는 것, 이것이 제2장이 겨눈 자리다.

이 결론은 곧바로 자아 문제로 이어진다. 제18장에서 상대는 자아가 없다면 자아의 속성들이 어디에 붙느냐고 묻는다. 보고 듣고 느끼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므로 그것을 담을 기체가 있어야 한다는 논법이다. 앞 장의 결론을 여기에 대면 이 추론은 힘을 잃는다. 성질을 개체에 귀속시키는 우리의 어법 자체가 관심에 따른 편성이므로, 어법에서 기체의 존재로 건너가는 발걸음이 보장되지 않는다.

네 갈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 모순이 아닌 까닭

여기서 논리 문제가 생긴다. 있다와 없다를 함께 부정하고, 둘 다임과 둘 다 아님까지 부정하면 배중률을 어기는 것 아닌가. 서양 학계에서 이 물음은 100년 가까이 논쟁거리였다. 스타니스와프 샤예르가 1933년에 형식화를 시도한 이래 리처드 로빈슨, 그레이엄 프리스트와 제이 가필드, 톰 틸레만스가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베스터호프가 「나가르주나의 사구」(Journal of Indian Philosophy 34권 4호, 2006)에서 제시한 해법은 부정이 한 종류가 아니라는 데 있다. 산스크리트 문법 전통은 두 부정을 구별한다.

파리유다사 (paryudāsa)명사적 부정. 'A가 아니다'가 'A와 다른 무엇이다'를 함축한다. 부정하면서 대안을 남긴다.
프라사쟈 프라티셰다 (prasajya-pratiṣedha)동사적 부정. 함축을 남기지 않는다. 명제뿐 아니라 그 명제가 딛고 선 전제까지 함께 취소한다.

사구의 앞 세 갈래와 마지막 갈래에 서로 다른 부정이 쓰인다는 것이 베스터호프의 독법이다. 크리스 랄웨스는 「나가르주나의 부정」(Journal of Indian Philosophy 50권 2호, 2022)에서 이 구별을 산스크리트·티베트 주석 전통과 문법 분석으로 이어받아 부정의 작용 범위를 더 세분한다.

마지막 갈래의 부정을 프라사쟈로 읽으면 논리적 곤란이 풀린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다섯째 선택지를 새로 세우는 문장이 아니라, 앞의 네 갈래를 낳은 물음 자체를 취소하는 문장이 된다. 물음의 전제가 취소되면 답이 필요 없다. 왕의 아들이 없는 나라에서 왕자가 대머리인지 아닌지를 물으면,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답할 수 없고 물음을 물러야 한다.

“나에게는 주장이 없다”는 문장의 뜻

이 어법을 끝까지 밀면 이상한 자리에 닿는다. 나가르주나는 『회쟁론』에서 이렇게 적는다.

yadi kācana pratijñā syān me tata eṣa bhaved doṣaḥ / nāsti ca mama pratijñā tasmān naivāsti me doṣaḥ //

나에게 어떤 주장이 있다면 방금 말한 허물이 나에게 따라붙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주장이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허물이 없다.

『회쟁론』 29송. 산스크리트 본문은 존스턴·쿤스트 교정본 61쪽에 따랐다. 요네자와 요시야스가 2008년 『成田山佛教研究所紀要』 31호에 낸 판독에는 부분 복원된 다른 읽기가 실려 있다.

『회쟁론』은 70송에 저자 자신의 산문 주석이 붙은 저작으로, 『중론』에 쏟아진 반론에 답하려고 나중에 쓰인 것으로 본다. 상대의 첫 공격은 이렇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그대의 주장이 공하지 않다면 자기 주장과 어긋나고, 공하다면 아무것도 반박하지 못한다. 없는 불로는 태울 수 없고 없는 물로는 적실 수 없듯, 없는 말로는 사물의 자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22송에서 둘째 뿔을 받는다. 자기 주장도 공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면서 공한 말이 일을 못 한다는 결론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고 답한다. 그다음이 29송이다. 주장이 아예 없다는 이 문장은 오랫동안 회의주의나 신비주의의 근거로 쓰였다.

베스터호프는 「무주장론」에서 이 구절의 해석을 셋으로 나눈다. 의미론적 해석, 논증법적 해석, 초월적 해석이다. 셋 다 티베트 주석 전통에 선례가 있다. 쫑카빠와 케둡제는 앞의 둘을, 고람빠와 겐뒨 최펠은 셋째를 대표한다. 베스터호프 자신은 의미론적 해석을 택한다. 나가르주나가 물리는 대상을 문장 일반이 아닌 특정 의미론을 걸친 문장으로 좁혀 읽는 독법이다.

이 독법에서 상대가 전제하는 그림은 이렇다. 세계는 우리와 무관하게 개체와 성질로 이미 잘려 있고, 우리 문장은 구조의 닮음을 통해 그 세계에 걸린다. 가필드가 지적했듯 나가르주나가 상대한 니야야 계통의 의미론이 그 그림에 가깝다. 나가르주나가 거부하는 것은 이 그림을 함께 짊어진 문장, 곧 견해(dṛṣṭi)다. 그런 짐을 지지 않은 문장은 얼마든지 쓴다. 실제로 짠드라끼르띠는 『중론』의 어떤 문장들을 주장(pratijñā)이라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다.

같은 구별이 다음 게송에도 나타난다.

śūnyatā sarvadṛṣṭīnāṃ proktā niḥsaraṇaṃ jinaiḥ / yeṣāṃ tu śūnyatā dṛṣṭis tān asādhyān babhāṣire //

승리자들은 공성이 모든 견해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성을 견해로 삼는 자들은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중론』 13장 8송(바이디야 교정본)

짠드라끼르띠는 이 게송을 설명하며 상인의 비유를 든다. 팔 물건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들은 손님이 그 없음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없음이라는 낱말을 물건 이름처럼 다루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공을 견해로 삼는다는 것도 이와 같다. 이 대목은 이 글의 논지가 나가르주나 자신의 문장에서 확인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공은 견해의 목록에 오르는 항목이 아니고 그 목록에서 빠져나오는 통로다.

있음과 없음을 함께 물리치는 어법은 아함에서 왔다

나가르주나가 이 어법을 스스로 지어냈다면 그의 작업은 불교 안에서 설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근거를 밝혀 둔다. 제15장 7송이다.

kātyāyanāvavāde cāstīti nāstīti cobhayam / pratiṣiddhaṃ bhagavatā bhāvābhāvavibhāvinā //

있음과 없음을 꿰뚫어 아신 세존께서는 『가전연에게 주신 가르침』에서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둘 다를 물리치셨다.

『중론』 15장 7송(바이디야 교정본)

여기 나오는 경은 실재한다. 팔리 경전에서는 『상윳따 니까야』 12상윳따 15경 『깟짜나곳따 숫따』이고, 한역으로는 『잡아함경』 301경이 대응한다. 붓다가 제자 깟짜나에게 바른 견해가 무엇인지 답하는 짧은 경이다.

Dvayanissito khvāyaṃ, kaccāna, loko yebhuyyena—atthitañceva natthitañca. […] ‘Sabbam atthī’ti kho, kaccāna, ayameko anto. ‘Sabbaṃ natthī’ti ayaṃ dutiyo anto. Ete te, kaccāna,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깟짜나여, 이 세상은 대개 둘에 기대어 있다.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다. […] 깟짜나여,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이 한쪽 끝이고,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이 다른 쪽 끝이다. 여래는 이 두 끝에 다가가지 않고 가운데로 법을 설한다.

『상윳따 니까야』 12.15. 팔리 본문은 마하상기띠 판을 따랐다.

대응하는 산스크리트본과 한역본은 서로 거의 같고 팔리본과는 조금 다르다. 팔리가 asti 계열의 atthitā를 쓰는 자리에서 나가르주나의 인용은 bhāva와 abhāva를 쓴다. 어근이 다르지만 문맥에서 가리키는 바는 같다. 비구 수자토는 이 대목의 주석에서, 있음과 없음이 각각 영원론과 단멸론을 가리킨다는 독법이 나가르주나와 상좌부 전통에서 함께 확인된다고 적는다.

이 연결이 논지에 보태는 바가 있다. 사구의 어법은 나가르주나의 발명품이 아니고 그가 물려받은 경전의 어법이다. 그가 새로 한 일은 그 어법을 인과, 운동, 시간, 자아, 열반 같은 항목에 빠짐없이 적용하고, 왜 그 어법이 성립하는지를 자성 개념의 정의로 밝힌 데 있다.

두 진리를 나누지 못하면 공은 허무론이 된다

글머리에 인용한 반론으로 돌아갈 차례다. 공이 사성제를 지운다는 항의에 나가르주나가 내놓는 첫 응답은 구별이다.

dve satye samupāśritya buddhānāṃ dharmadeśanā / lokasaṃvṛtisatyaṃ ca satyaṃ ca paramārthataḥ //

부처들의 법 설함은 두 진리에 의지한다. 세간의 통용에 따른 진리와 궁극의 뜻에서의 진리다.

『중론』 24장 8송(바이디야 교정본)

세속제(saṃvṛtisatya)는 언어와 관습이 작동하는 층위이고, 승의제(paramārthasatya)는 자성을 찾는 분석이 도달하는 층위다. 이어지는 9송은 둘을 가르지 못하는 자가 붓다의 가르침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한다고 하고, 10송은 통용에 기대지 않고는 궁극의 뜻을 설할 수 없으며 궁극의 뜻에 이르지 않고는 열반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두 층위 사이의 왕래가 끊기지 않는다는 것이 요점이다.

그다음이 반격이다. 나가르주나는 허무론이라는 혐의를 상대에게 되돌린다.

sarvaṃ ca yujyate tasya śūnyatā yasya yujyate / sarvaṃ na yujyate tasya śūnyaṃ yasya na yujyate //

공성이 성립하는 자에게는 일체가 성립한다. 공성이 성립하지 않는 자에게는 일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중론』 24장 14송(바이디야 교정본)

논증은 이렇다. 괴로움이 자성으로 있다면 그것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괴로움은 일어날 수도 없고 소멸할 수도 없다. 그러면 집제와 멸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수행의 길도 마찬가지다. 자성으로 갖춘 것은 닦여서 달라질 수 없으므로 도제가 무너진다. 24장 20송부터 40송까지가 이 계산을 항목별로 밟아 간다. 공을 부정하는 쪽이야말로 사성제를 지운다는 것이 결론이다.

같은 장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게송이 18송이다.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 / sā prajñaptir upādāya pratipat saiva madhyamā //

조건에 기대어 일어남, 그것을 우리는 공성이라 부른다. 그것은 기대어 이루어진 개념 설정이며, 그것이 곧 중도다.

『중론』 24장 18송(바이디야 교정본)

세 번째 줄의 prajñaptir upādāya를 어떻게 옮기느냐가 오래된 쟁점이다. 통설은 짠드라끼르띠를 따라 '기대어 이루어진 개념 설정'으로 읽는다. 티베트 역경가들이 이 구절을 옮긴 brten nas gdags pa도 같은 방향이다. 더글러스 버거는 「공을 획득함」(Philosophy East and West 60권 1호, 2010, 40~64쪽)에서 이 독법이 짠드라끼르띠에게서 비롯한 오독이며, 원래 뜻은 '일단 획득된 이 개념'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가필드와 베스터호프는 같은 학술지에 실은 반론에서, 버거가 근거로 든 다른 용례들에는 문제의 어구가 함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어휘 논증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 대목에 산스크리트 본문을 나란히 실은 이유가 여기 있다. 번역만 보면 어느 쪽 독법을 택했는지가 보이지 않고, 그 선택에 따라 나가르주나가 공을 존재의 이름으로 쓰는지 개념 설정의 이름으로 쓰는지가 갈린다.

제25장은 열반을 같은 절차에 넣는다. 열반이 있는 것이라면 만들어진 것이 되고, 없는 것이라면 붙잡을 대상이 없다. 사구를 다 통과시킨 뒤 남는 문장이 이것이다.

na saṃsārasya nirvāṇāt kiṃcid asti viśeṣaṇam / na nirvāṇasya saṃsārāt kiṃcid asti viśeṣaṇam //

윤회에는 열반과 구별되는 어떤 것도 없다. 열반에는 윤회와 구별되는 어떤 것도 없다.

『중론』 25장 19송(바이디야 교정본)

이 문장을 윤회와 열반이 같은 것이라는 형이상학적 동일성 주장으로 읽으면 다시 견해가 된다. 앞의 절차를 밟아 온 독자에게 이 문장은 다른 뜻이다. 자성의 층위에서 두 항목을 갈라 줄 표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는 보고다. 그래서 24장 11송은 공을 잘못 잡으면 사람을 망친다고 경고하면서 뱀을 잘못 잡는 것과 주술을 잘못 부리는 것에 견준다.

같은 게송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나가르주나

절차를 학설로 굳히려는 시도는 전승의 각 갈래에서 서로 다른 결과를 낳았다. 이 사실 자체가 이 글의 논지를 뒷받침한다.

한문권의 사정을 보자. 구마라집(344~413)이 409년에 『중론』을 한역했다. 이 한역본은 나가르주나의 게송에 청목(靑目, *Piṅgala)의 주석이 붙은 형태인데, 그 주석은 산스크리트본에도 티베트본에도 남아 있지 않다. 중국 주석가들은 게송과 주석을 한 덩어리로 다루었다. 곧 동아시아가 읽은 나가르주나는 3세기 주석가 한 사람의 해석을 통과한 나가르주나였다. 구마라집이 함께 옮긴 『십이문론』과 제바의 『백론』을 더해 삼론(三論)이 되고, 여기서 삼론종이 나온다. 고구려 출신 승랑이 승조 계통의 삼론학을 이어받아 이제(二諦)를 진리의 층위가 아닌 가르치는 방편으로 읽는 이교의(理敎義)를 세웠고, 이 독법이 길장(549~623)에게 전해졌다. 삼론종의 어법은 천태와 화엄과 선의 밑돌이 되었다.

티베트의 사정은 다르다. 티베트 전통은 중관을 자립논증파(rang rgyud pa)와 귀류논증파(thal 'gyur ba)로 나누고, 후자를 최고의 견해로 삼는다. 그런데 이 구분 자체는 인도에 대응물이 없다. 조르주 드레퓌스와 세라 매클린톡이 엮은 The Svātantrika-Prāsaṅgika Distinction(위즈덤, 2003)의 서두가 이 점을 짚는다. 인도 후기 중관 전통에도 분류는 있었지만, 그 분류는 바바비베카와 짠드라끼르띠를 같은 편에 놓는 방식이었고 11세기 아띠샤까지도 그렇게 썼다. 자립·귀류 구분은 12세기 티베트에서 자리 잡았다. 제임스 애플이 카담파 문헌에서 찾아낸 쿠 로짜와의 논서가 그 초기 정착 과정을 보여 준다.

같은 27장 448송에서 어떻게 이렇게 다른 체계가 나왔는가. 절차만 남기고 학설을 세우지 않은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절차는 그것을 물려받은 쪽이 무엇을 표적으로 삼느냐에 따라 다른 형태로 굳는다. 중국의 상대는 『성실론』 계열의 유(有) 사상이었고, 티베트의 쟁점은 논증 형식을 자립적으로 세울 수 있느냐였다. 표적이 다르니 굳은 모양도 달랐다.

현대 학계도 같은 자리에서 허무주의 논쟁을 되풀이한다. 버튼과 우드는 자성의 부정이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으로 귀착한다고 읽었다. 베스터호프의 반론은 두 갈래다. 존재론적 허무주의가 일관된 입장인지부터 의심스럽다는 것이 하나이고, 중관 논사들 자신이 자성 긍정과 그 반대편 극단을 함께 피한다고 거듭 밝혔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텍스트가 절차를 남겼으므로, 그 절차의 결과를 어떤 학설로 옮겨 적을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진다.

결론 — 공은 세계에 관한 학설이 아니라 학설을 검사하는 절차다

지금까지 따라온 게송들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제15장은 자성의 정의와 연기를 맞대어 놓아 둘이 함께 설 수 없음을 보였고, 제1장과 제2장은 인과와 운동에서 그 충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사례로 밟았다. 제13장과 『회쟁론』 29송은 이 작업의 결과물이 다시 견해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장치이고, 제24장은 두 진리를 갈라 세속의 작동을 지켜 냈다. 나가르주나가 어디에서도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 게송들의 공통점이다. 그가 한 일은 상대가 이미 인정한 것들만 가지고 계산해 결과를 보인 것이다.

공이 계속 오해받는 까닭도 같은 구조에서 나온다. 절차의 산물은 이름을 얻으면 학설처럼 보인다. 공이라는 낱말이 생기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어지고, 그 물음에 답하려는 순간 공은 다시 견해의 목록에 올라간다. 짠드라끼르띠의 상인 비유가 겨눈 것이 이 되돌이다. 나가르주나의 상대가 24장 첫머리에서 던진 반론과 오늘 독자가 처음 떠올리는 반문이 같은 이유도 여기 있다.

남는 물음은 이 절차가 어디까지 적용되느냐다. 베스터호프가 정리하듯 중관은 자성의 덧씌움이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에나 적용되는 해독제로 자처하므로, 나가르주나의 저작에 담긴 논증은 표본이지 목록이 아니다. 지금의 형이상학 논쟁에서 근거 관계에 바닥이 있느냐를 묻는 자리, 언어와 세계를 이어 주는 구조적 대응이 있느냐를 묻는 자리가 그 표본이 겨눈 곳과 겹친다. 2세기의 게송을 읽는 일이 고전 연구에 머물지 않는 대목이 거기다.

본문에 인용한 산스크리트·팔리 구절은 각 항목에 밝힌 교정본에 따랐고, 한국어 번역은 직접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