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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 미술사 · 기술

AI 슬롭과 문화 쇠퇴론 — 문제는 반복이 아니라 반복을 재던 기준이다

같은 것이 끝없이 되돌아온다는 감각이 문화의 죽음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베끼기는 문화를 무너뜨린 절차가 아니라 문화를 세워 온 절차였다. 로마의 서한, 르네상스의 편지, 남조의 화론과 당의 서론은 모두 베끼기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베끼기를 규율했다. 달라진 것은 반복의 양이 아니라 반복을 재던 기준이다.

「슬롭」이 올해의 단어가 된 해

메리엄웹스터(Merriam-Webster)는 2025년 12월 그해의 단어로 slop을 발표했다. 18세기에는 무른 진흙을, 19세기에는 음식 찌꺼기를 가리키던 낱말이다. 사전이 붙인 새 뜻은 인공지능으로 대량 생산된 질 낮은 디지털 콘텐츠다. 한 달 뒤인 2026년 1월 9일 미국방언학회(American Dialect Society)도 36회 연례 투표에서 같은 낱말을 2025년의 단어로 뽑았다. 학회는 2024년 투표 때만 해도 후보가 'AI slop'이었는데 이제는 AI라는 수식 없이 slop만으로 뜻이 통한다는 점을 선정 근거로 들었다.

낱말이 굳는다는 것은 대상이 생겼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 대상을 두고 불평할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서 오가는 말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볼 것이 너무 많고, 그 많은 것이 서로 닮았으며, 닮음의 출처가 과거에 있다. 문화가 자기 복제로 질식해 가고 있다는 진단이 여기서 나온다.

양을 재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다. 검색 최적화(SEO, Search Engine Optimization) 분석 회사 그래파이트(Graphite)는 2025년 10월, 공개 웹 아카이브 커먼크롤(Common Crawl)에서 주소 4만 3천 건을 무작위로 뽑아 추이를 분석한 결과를 냈다. 표본 조건은 영어, 100단어 이상, 2020년 1월부터 2025년 5월 사이 발행이었고, 본문의 절반 이상이 기계 생성으로 판정되면 인공지능 기사로 분류했다. 2020년 1월 2.2퍼센트였던 비율이 2025년 5월 51.7퍼센트가 되었고, 사람이 쓴 기사를 처음 넘어선 시점은 2024년 11월로 추정되었다. 2026년에 나온 후속 연구도 같은 아카이브에서 무작위로 뽑은 영어 기사 표본을 쓰되, 탐지기 한 종에 의존하던 판정을 세 종(팬그램, GPT제로, 카피리크스)의 평균으로 바꾸고 관찰 구간을 2026년 1분기까지 늘렸다. 세 탐지기의 오탐률은 각각 2퍼센트 아래로 보고되었다. 곡선의 모양은 같았지만 값은 평균 3.3퍼센트포인트 낮았다. 기계 생성 여부를 탐지기로 가르는 방식 자체에 이견이 크다는 점은 연구를 낸 쪽도 밝혀 두었다.

그래파이트 후속 분석 (탐지기 3종 평균)

2025년 1분기 · 기계 생성 49.6퍼센트, 사람 작성 50.4퍼센트

2025년 4분기 · 기계 생성 50.9퍼센트

2026년 1분기 · 기계 생성 49.9퍼센트

같은 회사의 병행 조사 · 구글 검색 상위 노출 페이지의 86퍼센트, 챗봇 응답에 인용된 페이지의 82퍼센트가 사람이 쓴 글

이 수치에서 두 가지를 갈라내야 한다. 첫째로 재고 있는 것은 발행량이지 도달량이 아니다. 상위 노출과 인용의 비율은 발행 비율과 크게 어긋난다. 둘째로 발행 비율 자체가 2025년 1분기 이후 50퍼센트 언저리에서 멈췄다. 생산 능력이 바닥났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걸러 내는 쪽이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조사를 낸 곳이 검색 최적화를 팔아 수익을 내는 회사라는 점도 함께 읽어야 한다. 기계가 쓴 글이 검색에서 불리하다는 결론은 그 회사가 파는 서비스의 논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슬롭 담론이 실제로 겨누는 것은 양이 아니다. 겨누는 것은 되돌아옴이다. 새것이라고 내놓은 물건에서 낯익은 것이 먼저 보인다는 감각, 무엇이 새것이고 무엇이 옛것에서 가져온 것인지 구별이 흐려진다는 감각. 이 감각은 인공지능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미술 쪽에서는 이미 30년 치의 자료가 쌓여 있다.

미드센추리 모던이라는 이름표가 하는 일

모더니즘 건축은 20세기 전반에 자리 잡은 건축 흐름으로, 장식을 걷어 내고 강철과 유리와 콘크리트 같은 산업 재료를 그대로 드러내며 직선 기하로 공간을 짜는 방식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대개 삶의 방식에 관한 설계가 함께 붙어 있었다. 노동자에게 햇빛과 위생을 어떻게 나눠 줄 것인가, 도시를 어떤 단위로 끊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도면 안에 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미드센추리 모던'은 그 흐름 가운데 대략 19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의 가구와 실내 디자인을 묶어 부르는 시장 용어다. 두 낱말은 자주 뒤섞여 쓰이지만, 앞의 것은 사회 기획의 이름이고 뒤의 것은 상품 범주의 이름이다. 이 어긋남에서 뒤의 논의가 시작된다.

뉴욕시립대 대학원센터의 미술사 교수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은 2024년 버소(Verso)에서 낸 『무질서한 주의』(Disordered Attention: How We Look at Art and Performance Today)에서 199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네 갈래 경향을 다뤘다. 네 번째가 모더니즘 건축과 디자인의 '호출'(invocation)이며, 책에서는 「데자뷔」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비숍의 정리에 따르면 1980년대 작가들은 모더니즘을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의심했다. 1990년대 초까지도 비판적 심문이 남아 있었다. 샘 듀런트(Sam Durant)의 「버려진 집들」(Abandoned Houses, 1994–95)은 캘리포니아 케이스 스터디 하우스 여섯 채를 폼코어와 골판지로 축소해 짓고는 태우고 구멍 내고 낙서로 덮은 작업이었다. 함께 낸 콜라주 연작이 밝히듯 논점은 캘리포니아 모더니즘이 계급을 구성적으로 배제했다는 데 있었다. 값싸게 지어 널리 보급하려던 주택이 수집가의 소장품이 되어 버린 경위가 그 배제의 증거였다.

전환은 곧 왔다. 1996년 런던에서 창간된 실내·건축·패션 월간지 『월페이퍼』(Wallpaper*)가 미드센추리 모던을 생활양식 상표로 굳혔다는 것이 비숍의 서술이다. 잡지가 유행을 만들어 냈다기보다, 가구점과 뮤직비디오와 광고에 이미 퍼져 있던 것을 하나의 이름 아래 묶어 냈다. 임스 의자와 사리넨 테이블과 르코르뷔지에 셰즈롱을 사들이는 젊은 전문직 계층이 그 잡지의 독자였고, 1998년 『뉴욕 타임스』 기사는 그들을 '월페이퍼 세대'라고 불렀다. 이 시기를 지나며 유토피아라는 낱말도 함께 상표가 되었다. 소비에트 전위를 가리키던 말이 어느 정치적 소속에도 매이지 않은 채 어떤 맥락에나 붙는 서술어가 되었다.

2000년 이후에는 조롱도 냉소도 드물어졌다. 남은 것은 존경과 향수다. 이 태도를 비숍은 호출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작업이 옛 모더니즘 참조물로 향하고 그 평판에서 권위를 얻어 온다. 증거는 고유명사에 대한 열광이다.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데어로에, 오스카르 니마이어가 불균형하게 중심을 차지했고, 뒤에 아일린 그레이, 샤를로트 페리앙, 리나 보 바르디, 그리고 엑사트 51과 오스카르 한센 같은 동유럽 모더니스트가 회수되었다. 잊혔던 이름을 되살린다는 점에서 이 회수는 값이 있지만, 이름에 매달리는 방식은 앞과 같다. 배역이 바뀌었을 뿐 줄거리는 그대로라는 것이 비숍의 판단이다.

그 결과가 데자뷔다. 호출은 참조물의 중요성을 굳히고 참조하는 작가를 정당화하면서, 동시에 그 참조물에서 이념적 내용을 비워 낸다. 서로 다른 나라의 역사와 미학이 하나의 탈역사적 모더니즘 수프로 뒤섞이고, 근대는 모든 순간이 동시에 존재하며 재조합을 기다리는 창고처럼 다뤄진다. 비숍이 덧붙인 단서가 중요하다. 지적의 과녁은 현대미술이 전하는 모더니즘 역사의 정확성에 있지 않다. 호출이 역사를 변화와 전개가 아닌 동시성과 집적의 문법으로 생산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 인터넷이 겹친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국제양식이 퍼진 경로부터가 실물 경험이 아니라 건축 사진집과 잡지였다. 유럽 건축가들이 북미의 곡물 저장고와 공장을 사진으로만 보고 배운 일이 그 흐름의 출발이었다. 복제 기술의 기본 단위는 직사각형이고, 직사각형 화면이 지배하는 지금의 인터페이스는 그 기하를 다시 강화한다. 모더니즘 건물은 사진과 화면 안에서 지나치게 잘 자리 잡는다. 잘 자리 잡는 만큼 어긋남과 모순이 생길 여지가 줄어든다.

베끼는 법을 규정해 두었던 전통들

여기까지가 진단이다. 진단에는 조용한 전제가 하나 깔려 있다. 반복이 새로움의 반대편에 있다는 전제다. 이 전제는 문화사의 큰 부분과 어긋난다.

세네카(기원전 4년경–기원후 65년)는 네로의 스승이자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였고, 말년에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서한 묶음을 남겼다. 그 가운데 84번 편지는 읽기와 쓰기의 관계를 다룬다. 여러 꽃을 돌며 채집하는 벌이 비유로 등장하는데, 세네카가 요구한 것은 채집 다음의 변형이다.

Nos quoque has apes debemus imitari et quaecumque ex diversa lectione congessimus separare, deinde adhibita ingenii nostri cura et facultate in unum saporem varia illa libamenta confundere, ut etiam si apparuerit unde sumptum sit, aliud tamen esse quam unde sumptum est appareat.

우리도 저 벌들을 본받아야 한다. 여러 책에서 그러모은 것을 따로 갈라 두었다가, 우리 재능의 정성과 힘을 들여 그 갖가지 채집물을 하나의 맛으로 녹여야 한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드러나더라도, 가져온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도덕 서한』 84권 5절. 라틴어 본문은 뢰브 고전총서판(1917)과 일치한다.

출처가 드러나는 것 자체는 금지가 아니다. 조건은 결과물이 출처와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쪽에 걸려 있다. 같은 편지에서 세네카는 그 조건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Similem esse te volo quomodo filium, non quomodo imaginem: imago res mortua est.

그대가 닮되 아들이 닮듯 닮기를 바라지, 초상이 닮듯 닮기를 바라지 않는다. 초상은 죽은 것이다.

세네카,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도덕 서한』 84권 8절.

아들과 초상의 대비는 1,300년 뒤 페트라르카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보카치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트라르카는 고전 시구를 기계적으로 자기 시에 끼워 넣던 제자를 문제 삼았다. 그가 요구한 것은 닮음의 은폐다. 닮음이 눈에 띄지 않아 마음의 조용한 탐색으로만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말로 지목되기보다 감지되는 데 그쳐야 한다.

Utendum igitur ingenio alieno utendumque coloribus, abstinendum verbis; illa enim similitudo latet, hec eminet; illa poetas facit, hec simias.

그러므로 남의 재능을 쓰고 남의 색채를 쓰되, 남의 말은 삼가야 한다. 앞의 닮음은 숨고 뒤의 닮음은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앞의 닮음은 시인을 만들고 뒤의 닮음은 원숭이를 만든다.

페트라르카, 『친근서간집』 23권 19편 13절. 로시·보스코 교정본(Sansoni, 1926–42) 기준.

이 논의를 학술적으로 정리한 것이 조지 피그먼(G. W. Pigman III)이 1980년 『르네상스 계간』(Renaissance Quarterly) 33권에 실은 「르네상스의 모방 유형들」이다. 피그먼은 당대의 용법을 세 갈래로 갈랐다. 그대로 따라가는 것(sequi), 재료를 변형하는 모방(imitatio), 그리고 본보기와 겨루는 모방(aemulatio)이다. 셋째를 앞의 둘과 가르는 표지는 본보기에 대한 비판이나 교정이며, 그 비판은 대개 현재와 과거 사이의 역사적 거리를 의식하는 데서 나온다. 토머스 그린(Thomas M. Greene)이 1982년 『트로이의 빛』(The Light in Troy)에서 같은 시기의 모방 전략을 네 갈래로 나누며 시대착오 감각의 성장과 묶은 것도 같은 지형을 다른 각도에서 그린 작업이다.

같은 구조가 동아시아에도 있다. 남조 제나라의 화가이자 이론가 사혁(謝赫)은 6세기에 『고화품록(古畫品錄)』을 써서 화가들을 여섯 등급으로 나누어 평했고, 그 서문에서 그림을 재는 여섯 기준을 제시했다.

六法者何?一,氣韻生動是也;二,骨法用筆是也;三,應物象形是也;四,隨類賦彩是也;五,經營位置是也;六,傳移模寫是也。

여섯 법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기운생동이고, 둘째는 골법용필이며, 셋째는 응물상형이고, 넷째는 수류부채이며, 다섯째는 경영위치이고, 여섯째는 전이모사이다.

사혁, 『고화품록』 서(序).

여섯째 항목 전이모사(傳移模寫)가 곧 옮겨 베끼는 일이다. 베끼기는 배제되지 않고 그림을 평가하는 여섯 기준 가운데 하나로 명시되었다. 동시에 그 위에 다섯 항목이 놓였고 맨 앞자리는 기운생동, 곧 그린 대상의 기운이 살아 움직이는가 하는 물음이 차지했다. 베끼기는 허용되었으나 베끼기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등급이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서예 쪽에서는 당의 손과정(孫過庭)이 687년경에 쓴 『서보(書譜)』가 배움의 순서를 세 단계로 못 박았다. 법첩을 그대로 옮겨 쓰는 임서(臨書)가 그 첫 단계다.

至如初學分布,但求平正;既知平正,務追險絕;既能險絕,復歸平正。初謂未及,中則過之,後乃通會。通會之際,人書俱老。

처음 짜임을 배울 때는 오직 평정을 구하고, 평정을 알고 나면 힘써 험절을 좇으며, 험절에 능해지면 다시 평정으로 돌아온다. 처음은 미치지 못함이요 중간은 지나침이며 나중에야 두루 통한다. 두루 통할 즈음에 사람과 글씨가 함께 원숙해진다.

손과정, 『서보』.

여기서 평정은 규범을 그대로 지키는 단계이고, 험절은 규범을 알고 난 뒤에 일부러 어긋나게 밀고 나가는 단계이며, 마지막 평정은 어긋남을 겪은 자리에서 다시 얻는 균형이다. 순서를 어기면 실패로 규정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베끼기를 건너뛰는 것도 실패이고, 베끼기에 머무르는 것도 실패다.

지금의 참조에는 알아보게 하는 것 말고 요구가 없다

세 전통을 겹쳐 놓으면 같은 골격이 나온다. 셋 다 무엇을 본으로 삼을지를 지정했고, 어디까지 닮아도 되는지 한계를 두었으며, 어디서 본을 넘어서야 하는지를 요구했다. 세네카는 출처가 보이는 것을 허용하되 결과물이 출처와 달라야 한다고 못 박았다. 페트라르카는 닮음이 도드라지는 순간을 원숭이짓으로 규정했다. 피그먼의 정리에서 겨루는 모방을 나머지와 가른 표지는 본보기를 비판할 수 있는가였다. 사혁은 베끼기를 여섯 기준의 맨 끝에 두었고, 손과정은 베끼기 다음에 반드시 어긋남이 와야 한다고 순서를 정했다.

지금의 호출에는 뒤의 두 항목이 없다. 성공 조건이 하나로 줄었다. 보는 사람이 참조물을 알아보면 된다. 비숍이 짚은 고유명사 집착이 바로 그 증거다. 어떤 건축을 참조했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참조했는가가 작업의 내용이 되면, 알아봄 자체가 완성이다. 알아본 관객은 자기가 그 이름을 안다는 사실로 보상을 받고, 작가는 그 이름의 평판을 자기 작업 안으로 들여온다. 이 거래에서 넘어섬은 요구되지 않는다. 넘어섬을 판정할 기준이 아예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중고 거래 게시판에 올라온 원목 탁자가 'MCM' 세 글자를 달고 값이 뛰는 장면이 같은 구조다. 그 세 글자는 재료도 제작 연도도 설계자도 알려 주지 않는다. 알려 주는 것은 이 물건이 알려진 범주 안에 있다는 사실뿐이다. 값을 만드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이름표이고, 이름표의 기능은 알아보게 하는 것 하나다.

같은 구조가 훨씬 큰 규모로 벌어진 사례가 워싱턴의 케네디센터다. 이 건물은 에드워드 듀렐 스톤(Edward Durell Stone)이 설계해 1971년 문을 열었고, 연방법이 존 F. 케네디의 살아 있는 기념관으로 지정한 시설이다. 2025년 12월 18일 이사회는 명칭을 「도널드 J. 트럼프 및 존 F. 케네디 공연예술기념센터」로 바꾸기로 의결했고, 이튿날 파사드에 이름이 붙었다. 2026년 5월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의 쿠퍼(Cooper) 판사는 명칭 지정 권한이 의회에 있으므로 이사회의 결정이 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했고, 표기는 6월에 철거되었다. 2026년 8월 13일 이사회는 다시 의결했다. 이번 의결은 명칭 변경을 피해 갔다. 기존 표지 아래 「Restored and Renovated by President Donald J. Trump」라는 명문을 새기고 부지의 이름을 「President Donald J. Trump Plaza」로 바꾸는 방식이다.

여기서 참조되는 것은 1971년 미국 근대 건축이 내걸었던 공적 기념의 형식이다. 참조의 내용은 그 형식이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는가와 무관하다. 필요한 것은 그 형식이 권위를 갖는다는 사실이 알아보이는 것뿐이고, 그래서 법이 정한 명칭을 못 바꾸게 되자 명문과 부지 이름으로 경로가 옮겨 갔다. 무엇을 계승하는지, 어디서 그것을 넘어서는지는 애초에 물음이 아니다.

참조의 의미가 참조 대상에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지리를 바꿔 보면 분명해진다. 비숍이 관찰한 대로 동아시아 미술에서 근대 건축은 정치적 외상이나 자연 재난의 현장으로 다뤄지지 역사적 성찰과 문화적 향수의 자리로 다뤄지지 않는다. 2000년대 중국 현대미술의 초점은 근대화 자체였고, 차오페이는 「누구의 유토피아인가?」(2006)에서 하청 공장 노동을, 「연무와 안개」(2013)에서 도시 확장 속의 소외를 다뤘다. 첸치에젠은 폐공장과 철거를 앞둔 주거 블록과 냉전기 군사 기지를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함께 화면에 올렸다. 일본 작가들은 지진 이후의 건축을 다뤘고, 후쿠시마 이후에는 사회적 실천 형식의 작업이 늘었다.

동유럽의 궤적은 또 다르다. 1990년대 초에는 소비에트 과거를 향한 도덕적 양가감정이 우세했고, 2000년대 중반에 향수와 재평가로 기울었다. 비숍은 그 전환을 이끈 작가들 가운데 서유럽 미술학교를 거친 사람이 많았다는 점을 함께 적어 두었다. 다비드 말코비치가 유고슬라비아 모더니즘의 실험 건축을 다루며 취한 태도는 비판도 애도도 아니었고, 기존의 폐허 위에 새 발판을 만드는 쪽, 곧 기념물에서 이념을 씻어 내고 조각 유산으로 승인하는 쪽이었다.

같은 콘크리트 덩어리가 어디서는 낙관의 유산이고 어디서는 결핍의 기호다. 그러므로 참조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참조 대상이 정하지 못한다. 정하는 것은 그것을 재는 공동체의 기준이다. 기준을 공유하는 집단이 있으면 같은 인용이 계승이 되거나 표절이 되거나 도전이 되고, 그 집단이 흩어지면 인용은 알아봄으로만 남는다.

미래가 닫혔다는 진단이 실제로 가리키는 것

반복이 늘어난 이유로 가장 널리 쓰이는 설명은 미래가 닫혔다는 진단이다. 앞이 막혀 있으니 뒤를 재활용한다는 인과다. 이 설명의 출처는 또렷하다.

프랑코 베라르디(Franco Berardi)는 1970년대 볼로냐의 라디오 알리체를 세운 이탈리아 아우토노미아 운동 출신의 미디어 이론가다. 2011년 AK 프레스에서 낸 『미래 이후』(After the Future)에서 그는 미래의 느린 취소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썼다. 그런데 그 표현을 쓰자마자 스스로 범위를 좁혔다. 자기가 말하는 미래란 시간의 방향을 가리키지 않는다. 진보적 근대라는 문화적 상황에서 생겨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정점에 이른 심리적 지각이자 문화적 기대를 가리킨다. 헤겔·마르크스주의의 지양, 부르주아의 선형적 복지와 민주주의, 과학 지식의 전능함을 믿는 기술관료제의 신화가 그 기대를 빚은 틀로 열거된다.

즉 베라르디의 미래는 특정 시기 특정 문명이 만들어 낸 기대의 이름이다. 그것이 소진되었다는 진단은 그 기대를 공유했던 집단에 대한 진단이지 시간 자체에 대한 진단이 아니다. 이 단서는 본인의 문장 안에 명시되어 있다.

단서가 흐려진 것은 그다음이다. 마크 피셔(Mark Fisher)는 2014년 『내 삶의 유령들』(Ghosts of My Life) 첫 장의 제목으로 그 표현을 가져오면서, 특정 기대의 소진이었던 것을 21세기 문화 전체의 조건으로 확장했다. 새로움의 표면적 소란 아래 정체가 묻혀 있고, 여러 시대를 몽타주하는 일이 너무 흔해져 이제는 언급거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책의 진단이다. 베라르디 자신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사건들을 따라간 e-플럭스 기고를 2024년 미네소타대학출판부에서 『혼돈과 자동장치』(Chaos and the Automaton)로 묶어 냈고, 멸종과 미래 없음이라는 어휘가 그 책의 표제어로 쓰였다.

확장이 어디서 무리해지는지는 육후이(Yuk Hui)의 논의가 보여 준다. 헨리 키신저는 2018년 6월 『애틀랜틱』에 「계몽은 어떻게 끝나는가」를 실어, 인간 창조자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계가 등장한 사태를 계몽의 종말로 규정했다. 육후이는 2019년 1월 e-flux journal 96호에 실은 「계몽의 끝 이후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인가」에서 다르게 읽었다. 그의 독법에서 키신저식 종말 선언은 모든 역사적 시간이 유럽 근대의 동기화 척도로 수렴하는 단일한 지구적 시간 축이 완전히 실현된 국면을 표시한다. 그가 대안으로 내놓은 개념이 기술다양성(technodiversity)이며, 2016년 『중국의 기술에 관한 물음』에서 시작한 우주기술(cosmotechnics) 논의의 연장선에 있다. 기술을 하나의 보편 궤도로 놓지 말고 서로 다른 우주론 안에서 자란 복수의 기술 개념으로 보자는 제안이다.

이 도구를 미래 소멸론에 되돌리면 같은 문제가 잡힌다. 미래가 끝났다는 서술 역시 하나의 시간 축을 유일한 축으로 놓는다. 베라르디가 자기 문장에 붙여 둔 단서가 그 점을 이미 인정하고 있었고, 앞 절에서 확인한 지리적 비대칭이 그 단서를 뒷받침한다. 근대 건축이 낙관의 유산으로 보존되는 곳과 결핍의 기호로 남은 곳에서 미래라는 낱말의 잔고가 같을 수 없다.

인과의 방향도 다시 볼 수 있다. 세 전통에서 확인한 대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본보기를 넘어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넘어섬은 무엇이 넘어섬인지 판정할 기준이 공유될 때만 성립한다. 험절이 험절로 인정되려면 평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가 먼저 있어야 하고, 겨루는 모방이 겨룸이 되려면 무엇을 이겨야 하는지가 정해져 있어야 한다. 기준을 나눠 갖던 집단이 흩어지면 넘어설 지점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알아볼 수 있는 것을 다시 내놓는 일이다. 이 상태를 시간의 소멸로 옮겨 적으면 결과가 원인의 자리에 놓인다.

비숍이 책의 해당 장을 닫는 방식도 반복 금지가 아니었다. 그가 요구한 것은 호출이라는 담요를 넘어서는 과거 사용법이었다. 예외로 든 사례들이 그 요구의 내용을 보여 준다. 케리 제임스 마셜은 1990년대 중반 시카고 공공주택 단지를 그리면서 쇠락이 아니라 그곳이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를 화면에 올렸고, 토마스 히르슈호른이 2013년 브롱크스 포리스트하우스에 세운 「그람시 기념비」는 이름난 건축 대신 익명의 사회주택을 배경으로 삼아 임시 공동체를 불러 모았다. 어느 쪽도 참조를 끊지 않았다. 참조에 통과해야 할 조건을 다시 붙였을 뿐이다.

결론 — 반복이 아니라 반복을 재던 기준이 사라졌다

정리하면 네 갈래다. 첫째, 생산량은 문제의 본체가 아니다. 웹에 새로 올라오는 글에서 기계 생성분의 비율은 2025년 1분기 이후 50퍼센트 언저리에 머물러 있고, 검색과 챗봇이 실제로 끌어 쓰는 몫은 그보다 훨씬 낮다. 걸러 내는 장치가 이미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 반복은 문화를 무너뜨린 절차가 아니라 문화를 세운 절차였다. 세네카와 페트라르카, 사혁과 손과정은 모두 베끼기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베끼기의 한계와 넘어섬의 지점을 함께 지정했다. 셋째, 지금의 참조에는 그 두 항목이 빠져 있다. 남은 요구는 알아보게 하는 것 하나이며, 고유명사에 매달리는 방식과 이름표가 값을 만드는 시장, 그리고 명칭과 명문으로 권위를 흡수하려는 시도가 같은 구조에서 나온다. 넷째, 미래가 닫혔다는 진단은 기준 공동체의 해체를 시간의 문제로 옮겨 적은 것이다. 베라르디 본인이 미래라는 낱말의 범위를 특정 문명의 기대로 좁혀 두었고, 같은 건축이 지역에 따라 정반대로 읽히는 사실이 그 좁힘을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쟁점은 반복의 양이 아니라 반복을 재는 자리다. 지금 그 자리를 실제로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검색 순위와 추천 배열이며, 그것들이 묻는 것은 완성도가 아니라 도달 가능성이다.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잘 도달하고 잘 도달하는 것이 다시 본보기가 되는 회로에서는, 험절에 해당하는 단계가 아예 발생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이 회로를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채집과 재조합의 비용을 거의 0으로 낮추어, 기준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가릴 수 없게 만들었다.

세네카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드러나도 좋다고 했다. 조건은 가져온 것과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는 쪽에 있었다. 그 조건을 누가 어떤 자격으로 판정하는가 하는 물음이, 슬롭이라는 네 글자짜리 낱말이 열어 놓은 실제 공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