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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주의 인터내셔널과 ‘상황주의’라는 이름 — 예술의 폐지와 실현을 함께 요구한 조직이 미술관에 걸리기까지

1958년 기관지 창간호에서 스스로 무의미한 낱말이라고 못박은 이름이, 오늘날 미술사의 분류표가 되었다. 그 사이에 놓인 것은 조직이 자기 성원을 내보낸 기록이다.

2026년 8월 18일

기관지 창간호가 첫머리에 지운 낱말

미술사 개설서와 미술관 도록에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nternational, 이하 SI)은 대개 20세기 후반의 전위 미술운동으로 분류된다. 프랑스어 표기는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이며, 1957년부터 1972년까지 활동한 유럽의 소규모 조직을 가리킨다. 이 분류를 제도가 공인한 시점은 뚜렷하다. 1989년 2월부터 4월까지 파리 퐁피두 센터 국립근대미술관이 회고전을 열었고, 같은 해 6월 런던 현대미술연구소(ICA)로, 10월에는 보스턴 현대미술연구소로 순회했다. 영어판 도록은 1990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출판부와 현대미술연구소가 함께 냈다.

그런데 SI가 남긴 가장 이른 공식 문서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분류에 쓰이는 낱말을 미리 부정해 두고 있었다. 1958년 6월 창간한 기관지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1호의 첫 지면은 「정의」라는 제목의 용어집이었다. ‘구축된 상황’, ‘상황주의자’, ‘심리지리’, ‘표류’, ‘통일적 도시계획’, ‘전용’, ‘문화’, ‘해체’ 여덟 항목이 실렸는데, 두 번째와 세 번째 항목이 나란히 붙어 있다.

situationniste : Ce qui se rapporte à la théorie ou à l’activité pratique d’une construction des situations. Celui qui s’emploie à construire des situations. Membre de l’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situationnisme : Vocable privé de sens, abusivement forgé par dérivation du terme précédent. Il n’y a pas de situationnisme, ce qui signifierait une doctrine d’interprétation des faits existants. La notion de situationnisme est évidemment conçue par les anti-situationnistes.

상황주의자 — 상황을 구축하는 이론이나 실천 활동에 관계된 것. 상황을 구축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성원.
상황주의 — 뜻이 비어 있는 낱말로, 앞 항목에서 잘못 파생되었다. 상황주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존 사실을 해석하는 교리를 뜻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상황주의라는 개념은 명백히 반(反)상황주의자들이 지어낸 것이다.

「Définitions」,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1호(파리, 1958년 6월)

프랑스어 -isme는 한국어 ‘-주의’와 마찬가지로 명사에 붙어 사상 체계를 만드는 접미사다. 이 항목이 거부하는 것은 접미사가 만들어 내는 것, 곧 세계를 설명하는 완성된 교리다. 조직은 자신을 이론으로 정리해 놓고 그 이론에 비추어 세상을 읽는 방식이 되기를 거부했다. 앞 항목의 정의가 활동과 성원 자격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무엇을 믿는지는 그 정의 안에 들어 있지 않다.

낱말 하나에 이만한 공을 들인 이유는 그것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자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태도가 어떤 논리였는지를 보려면 조직이 만들어진 자리로 먼저 가야 한다.

1957년 여름 코시오 다로시아에서 정해진 어휘

SI는 이탈리아 북서부 산간의 작은 마을 코시오 다로시아에서 1957년 7월 말에 만들어졌다. 파리에서 활동하던 문자주의 인터내셔널(Internationale lettriste), 이탈리아와 북유럽을 잇던 상상주의 바우하우스 국제운동(Mouvement international pour un Bauhaus imaginiste), 그리고 런던 심리지리학위원회, 이 세 갈래가 합쳐진 결과였다. 창립 회의에 모인 사람은 기 드보르와 미셸 베른슈타인, 덴마크 화가 아스거 요른, 이탈리아의 주세페 피노갈리치오와 피에로 시몬도와 발테르 올모와 엘레나 베로네, 영국의 랠프 럼니 여덟이었다.

합병의 토대가 된 문서는 드보르가 그해 6월 벨기에에서 찍어 돌린 소책자 「상황 구축에 관한 보고, 그리고 국제 상황주의 경향의 조직과 행동의 조건에 관한 보고」였다. 표지 뒷면에는 이 문서가 세 단체의 토론 발판이자 선전 자료이며 어떤 경우에도 판매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이듬해 창간호의 용어집은 그 회의에서 정리된 어휘를 공개했다. 몇 가지는 지금도 널리 쓰이므로 뜻을 짚어 둘 필요가 있다. 심리지리(psychogéographie)는 도시 환경이 개인의 정서와 행동에 미치는 구체적인 효과를 연구하는 일로 정의되었다. 표류(dérive)는 도시 사회의 조건에 결부된 실험적 행동 양식이며, 서로 다른 분위기를 빠르게 통과하는 기법이다. 목적지와 경로를 미리 정하지 않고 도시를 걷되, 그 걷기를 관찰과 기록의 절차로 삼는다. 통일적 도시계획(urbanisme unitaire)은 예술과 기술을 결합해 행동 실험과 맞물리는 환경을 짓는 이론을 가리켰다.

네 번째 항목인 전용(détournement)의 정의는 조금 더 길고, 마지막 문장에서 예술 문제가 곧바로 튀어나온다.

détournement : S’emploie par abréviation de la formule : détournement d’éléments esthétiques préfabriqués. Intégration de productions actuelles ou passées des arts dans une construction supérieure du milieu. Dans ce sens il ne peut y avoir de peinture ou de musique situationniste, mais un usage situationniste de ces moyens.

전용 — ‘기성 미학 요소의 전용’이라는 표현을 줄여 쓴 것. 현재나 과거의 예술 생산물을 환경의 더 높은 구축물 안으로 통합하는 일. 이런 뜻에서 상황주의 회화나 상황주의 음악은 있을 수 없고, 그 수단들을 상황주의적으로 사용하는 일만이 있을 수 있다.

「Définitions」,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1호(파리, 1958년 6월)

이름을 거부한 문장과 예술 작품을 거부한 문장이 같은 지면, 같은 형식의 사전 항목 안에 있다. 두 거부는 하나의 문법에서 갈라져 나왔다. ‘상황주의 회화’가 성립하지 않는 것은 ‘상황주의’가 성립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회화 앞에 붙는 수식어든 사상 체계를 만드는 접미사든, 활동을 하나의 분리된 영역 안에 가두어 이름표를 붙이는 순간 그것은 이미 SI가 공격하려던 대상이 된다.

여기서 통용되는 요약이 하나 갈라진다. SI를 소개하는 글은 이 대목을 ‘예술을 거부한 예술운동’이라는 역설로 정리한다. 그러나 위 정의는 예술을 만들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술의 수단을 사용하라고 말하되 그 사용의 결과가 예술 작품이라는 범주로 회수되는 것을 금한다. 만들지 않는 것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다른 요구이며, 이 차이가 그다음 십 년의 조직 운영 전체를 좌우한다.

폐지와 실현은 한 동작의 두 얼굴이다

드보르가 1967년에 낸 『스펙터클의 사회』는 221개의 짧은 테제로 이루어져 있다. 8장은 문화 안에서의 부정과 소비를 다루는데, 191번 테제가 SI의 예술관을 가장 압축된 형태로 진술한다. 요지는 이렇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근대 예술의 끝을 표시한 두 흐름이지만, 각자 비판을 한쪽으로만 밀고 나갔기 때문에 예술의 장 안에 갇혔다. 다다이즘은 예술을 실현하지 않은 채 폐지하려 했고, 초현실주의는 예술을 폐지하지 않은 채 실현하려 했다. SI가 세운 입장은 폐지와 실현이 하나의 지양(dépassement)에서 떼어 낼 수 없는 두 측면이라는 것이었다.

지양이라는 낱말은 헤겔에게서 왔다. 어떤 것을 없애면서 동시에 그 알맹이를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 보존한다는 뜻이다. 드보르의 사유가 헤겔과 초기 마르크스, 그리고 루카치를 경유한 계보 위에 있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는 독법이다. 이 계보에서 예술의 지양은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한다. 하나는 예술이 사회의 다른 활동과 분리된 전문 영역으로 남기를 그쳐야 한다. 다른 하나는 예술이 약속했던 것, 곧 삶의 형태를 스스로 짓는 능력이 일상생활 전체로 옮겨가 실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요구를 알고 나면 두 종류의 흔한 요약이 함께 부정확해진다. 첫째, SI가 예술을 반대했다는 요약은 절반이다. 그들은 예술이 부족하다고 보았지 과하다고 보지 않았다. 둘째, SI가 예술을 삶으로 확장하려 했다는 요약도 절반이다. 그것만 하면 초현실주의가 된다. 두 절반을 붙여야 SI의 요구가 되고, 붙는 순간 요구는 실행하기가 까다로워진다. 그림을 그리면 초현실주의 쪽으로, 그림을 그만두면 다다 쪽으로 기운다.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를 판정할 기준이 필요해지는데, 그 기준을 조직 안에서 누군가는 집행해야 한다.

1961년 8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5차 총회의 기록은 그 판정 기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두었다. 이 발언은 이듬해 4월 기관지 7호에 실렸다.

Il ne s’agit pas d’élaborer le spectacle du refus mais bien de refuser le spectacle. […] Notre position est celle de combattants entre deux mondes : l’un que nous ne reconnaissons pas, l’autre qui n’existe pas encore.

거부의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스펙터클을 거부하는 일이 문제다. […] 우리의 자리는 두 세계 사이에서 싸우는 자의 자리다. 하나는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제5차 총회(예테보리, 1961년 8월) 기록,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7호(1962년 4월)

앞 절과 뒤 절이 같은 두 낱말을 순서만 바꿔 놓았다는 점이 이 문장의 전부다. 거부를 작품으로 만들면 그것은 거부의 스펙터클, 곧 관객이 바라보는 대상이 된다. 저항이 볼거리가 되는 순간 저항은 그것이 공격하려던 구조에 재료를 대 주는 셈이 된다. 이 기준은 명료하지만, 조직 안에서 실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곧바로 인사 문제가 되었다.

남은 물건이 적은 것은 이념의 결과가 아니라 1962년의 결과다

SI를 다루는 글에는 이 조직이 남긴 물리적 산출물이 없다시피 하다는 서술이 자주 등장한다. 요른의 회화를 빼면 남은 것이 없다는 식이다. 남은 기록과 맞춰 보면 이 서술은 유지되기 어렵다.

네덜란드 화가 콘스탄트 니우엔하위스는 1956년부터 1974년까지 「뉴 바빌론」이라는 도시 구상을 만들었다. 유목적 놀이를 위해 설계된 가상 도시로, 플렉시글라스와 금속으로 짠 모형 연작과 드로잉, 에칭, 콜라주, 그리고 여러 편의 글과 강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콘스탄트 재단이 정리한 연보에 따르면 그가 SI에 속했던 기간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이며, 「뉴 바빌론」은 가입 이전에 시작해 탈퇴 이후까지 이어졌다. 드보르는 콘스탄트의 모형과 시각적 재현물이 정치적 긴장을 미학적 대상으로 바꿔 버릴 위험을 지적했고, 콘스탄트는 가능성에 형태를 주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맞섰다.

드보르 자신도 물건을 만들었다. 1957년 요른과 함께 『Fin de Copenhague』를, 1959년 『Mémoires』를 냈다. 두 권 모두 기성 인쇄물에서 오려 낸 활자와 도판을 요른의 물감 자국 위에 배치한 콜라주 책이다. 기관지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는 1958년부터 1969년까지 12호가 나왔고, 피노갈리치오는 두루마리로 판매하는 이른바 산업회화를 만들었으며, 드보르는 영화를 여러 편 찍었다. 1959년 작 「어느 짧은 시간 단위를 통과하는 몇 사람에 관하여」도 그중 하나다.

그러니까 물건은 있었다. 사라진 쪽은 물건을 만들던 사람들이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연표 1957~1989 창립부터 퐁피두 회고전까지 일곱 시점을 세로로 늘어놓은 연표. 1962년 예술가 분파 축출 항목이 강조되어 있다. 1957. 7 코시오 다로시아 세 단체가 합쳐 창립 1960~61 콘스탄트·요른 이탈 조형 작업 진영 축소 1962. 2~3 슈푸어·나슈 제명 예술가 분파 축출 1966. 11 스트라스부르 소책자 「학생 생활의 빈곤」 1968. 5 파리 오월 구호가 거리의 벽으로 1972. 4 자진 해산 「진짜 분열」 발표 1989. 2 퐁피두 회고전 런던·보스턴 순회
1962년 두 차례의 제명을 기점으로 조직의 구성이 바뀐다. 이후 남은 산출물은 잡지와 소책자, 그리고 영화로 좁혀진다.

분기점은 1960년 12월 런던에서 열린 4차 총회였다. 아틸라 코타니의 보고를 놓고 SI가 어느 정도까지 정치 운동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었고, 드보르는 사회 안에 SI가 기댈 만한 세력이 있는지를 묻는 설문지를 참석자 전원에게 돌렸다. 독일 뮌헨에서 온 슈푸어 그룹(Gruppe SPUR)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기대를 거는 노선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듬해 4월 요른이 사퇴했고, 콘스탄트는 이미 조직을 떠난 뒤였다. 1961년 8월 예테보리 총회에서 두 경향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한쪽은 노동자 평의회 노선의 혁명론으로 옮겨 가 있었고, 다른 한쪽은 당장 힘이 미치는 미술계에서 활동을 이어 가자고 주장했다.

결말은 제명이었다. 1962년 2월 10일 중앙위원회가 슈푸어 그룹 성원 전원을 내보냈다. 사유로는 예술 생산을 계속 앞세우는 태도가 개량주의이며 반예술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 상황주의 테제를 체계적으로 오해했다는 점, 성원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은 미술 시장에서의 성공을 위해 SI를 이용했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3월 15일에는 요른의 동생 예르겐 나슈와 스웨덴의 안스가르 엘데가 제명되었다. 두 사람은 앞선 제명에 반대한 쪽이었다. 이들은 스웨덴 스코네의 드라카뷔게트 농장을 근거지로 제2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세웠고, 자클린 드 용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네덜란드 성원 상당수가 그리로 옮겨 갔다.

앤서니 헤이스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에 제출한 박사논문은 1960년부터 1963년까지를 SI의 결정적 시기로 잡고, 1962년의 분열을 예술에서 정치로의 관심 이동이 아니라 ‘예술의 지양’이라는 명제가 조직 운영으로 번역된 사건으로 읽는다. 이 독법에서 제명은 앞 절의 논리가 산출한 절차다. 상황주의 회화가 있을 수 없다고 사전에 적어 두었다면, 회화를 계속하는 성원은 언젠가 정의와 충돌한다.

이 순서를 보면 SI가 남긴 작품이 없다시피 하다는 서술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것은 운동의 본성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1962년 두 차례 제명이 남긴 통계다. 조직에 남은 것이 잡지와 소책자와 영화뿐이었던 이유는, 다른 것을 만들던 사람들이 그 시점에 조직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간 사람들은 밖에서 계속 만들었다.

회수라는 낱말은 결국 그들 자신에게 돌아왔다

SI가 만들어 쓴 개념 가운데 오늘 가장 쓸모가 큰 것은 회수(récupération)다. 프랑스어 동사 récupérer는 잃었던 것을 되찾는다는 뜻이며, SI의 어법에서는 지배 질서가 자신을 공격하던 것을 흡수해 무해한 상품이나 볼거리로 되돌려 놓는 과정을 가리킨다. 기관지 8호(1963년 1월)는 예술적 부정이 통합에 저항하려 해도 이 지대를 스치지 않기가 어렵다고 적었고, 자유로운 놀이가 예술적 해소의 영역에만 고립될 때 그것을 회수라고 부른다고 밝혔다. 10호(1966년)에 실린 무스타파 하야티의 「사로잡힌 말들 — 상황주의 사전 서문」은 ‘해체와 회수’를 한 절의 제목으로 삼았다.

회수는 SI가 다른 이들에게 던진 진단이었지만, 조직의 후반기는 그 진단이 자기에게 적용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66년 11월 스트라스부르에서 학생 조직의 인쇄 설비를 이용해 「경제·정치·심리·성·특히 지적 측면에서 고찰한 학생 생활의 빈곤, 그리고 그것을 고치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하여」라는 47쪽짜리 익명 소책자가 나왔다. 제목은 드보르가 붙였고 본문은 튀니지 출신 하야티가 썼다. 마지막 문장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축제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이며, 놀이가 그 축제의 궁극적 합리성이고, 죽은 시간 없이 살고 거리낌 없이 누리는 것이 놀이가 인정할 유일한 규칙이라고 선언한다. 1968년 5월 파리 곳곳의 벽에 적힌 “죽은 시간 없이 살라”는 구호는 이 문장에서 왔다.

그로부터 몇 해 지나지 않아 하야티는 이 소책자의 재출간에 반대하며 저작권을 내세웠다. 1966년에는 혁명적 가치를 지녔던 문서가 급진 이론의 기성 출판사에게는 상품 가치만을 지닌다는 것이 이유였다. 반(反)저작권을 표방하던 진영의 인물이 저작권이라는 자본주의 법 장치를 방어 수단으로 집어 든 장면인데, 회수라는 개념이 실제 사건으로 나타났을 때 대응할 도구가 그것밖에 없었다는 사정이 여기서 드러난다. 참고로 기관지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자체는 수록 글을 출처 표시 없이도 자유롭게 복제·번역·각색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1972년 4월 드보르와 잔프랑코 상귀네티는 『인터내셔널의 진짜 분열』을 내고 조직을 해산했다. 1968년 이후 SI의 테제는 밀라노의 공장에서 코임브라의 대학까지 퍼져 나갔지만, 그 확산이 만들어 낸 것은 대개 추종자였다. 드보르는 이들을 ‘프로시튀’(pro-situ)라 부르며 조롱했다. 성공이 곧 회수의 조건이라는 것이 해산의 논거였다. 이론이 널리 인정받는 순간, 이론은 사람들이 실천 대신 소지하고 다니는 물건이 된다.

1989년 퐁피두 전시는 이 논리의 마지막 항이다. 전시 제목 「어느 짧은 시간 단위를 통과하는 몇 사람에 관하여 —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1957~1972에 관하여」는 드보르가 1959년에 찍은 영화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기성 요소를 새 구축물 안으로 통합하는 절차, 곧 전용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하는 조작을 미술관이 SI를 대상으로 수행한 셈이다. 은박 표지의 도록에는 요른의 서문과 함께 1957년의 「상황 구축에 관한 보고」가 실렸다. 예술의 지양을 요구하며 판매를 금한다고 뒷면에 적어 두었던 창립 문서가, 32년 뒤 미술관 매점의 전시 도록 지면이 되었다.

큐레이터의 자리를 감안하면 이 배치는 자연스럽다. 미술관이 어떤 대상을 다루는 방법은 전시하는 것이고, 미술관의 서술 문법 안에서 SI는 다다와 초현실주의를 잇는 마지막 전위로 놓일 때 가장 잘 설명된다. 조직이 거부한 것은 바로 그 계보 안의 자리였지만, 거부를 기록으로 남기려면 문서를 만들어야 했고 문서는 전시 가능한 물건이다. 안나 트레스푀슈베르톨로가 2015년 프랑스 대학출판부에서 낸 568쪽짜리 연구서의 부제가 ‘역사에서 신화로’인 것은 이 경로를 겨냥한다.

결론 — 이름표를 거부한 조직에 이름표가 붙는 과정이 그 조직의 이론을 증명했다

SI를 ‘예술을 거부한 예술운동’이라는 역설로 요약하면 세 가지가 함께 흐려진다. 첫째, 그들의 요구는 거부가 아니라 지양이었다. 예술을 분리된 전문 영역에서 폐지하는 일과 예술이 약속한 것을 일상생활에서 실현하는 일을 한 동작으로 묶으라는 요구였고, 다다와 초현실주의가 각각 절반씩만 했다는 진단이 그 요구의 근거였다. 둘째, 이름 거부와 작품 거부는 같은 문법에서 나왔다. 1958년 용어집은 ‘상황주의’라는 낱말과 ‘상황주의 회화’라는 범주를 같은 지면에서 지웠고, 둘 다 활동을 분리된 영역에 가두는 장치라는 점에서 동일하게 다루어졌다. 셋째, 산출물이 적다는 인상은 1962년 두 차례 제명이 남긴 결과다. 콘스탄트의 「뉴 바빌론」, 요른과 드보르의 콜라주 책, 12호까지 나온 기관지, 피노갈리치오의 산업회화는 모두 실재했고, 그중 상당수를 만든 사람들이 그해 조직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이어 붙이면 마지막 항이 따라 나온다. 그들이 남긴 가장 정확한 예측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었다. 회수는 저항이 볼거리로 흡수되는 과정을 가리키는 그들의 낱말이었는데, 1972년의 자진 해산은 확산이 곧 회수라는 판단에서 나왔고, 1989년 회고전은 예술의 지양을 요구한 창립 문서를 도록의 본문으로 만들었으며, 소책자의 저자는 자기 글의 상품화를 막기 위해 저작권을 들어야 했다. 이름을 거부하는 데 성공한 조직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그 이름 거부가 옳았다는 증거로 읽히는 구조다.

다만 이 구조는 한 가지를 정리하지 않은 채 남긴다. 어떤 수용이든 회수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개념은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설명하게 되고, 그때 회수는 반증할 수 없는 서술이 된다. SI가 만든 어휘 가운데 심리지리와 표류는 도시 연구에, 전용은 미디어 비평과 디자인에, 스펙터클은 문화 이론 전반에 이미 통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 어휘들이 원래의 정치적 요구와 분리되어 쓰이는 사정을 회수의 사례로 볼 것인지, 아니면 개념이 만들어진 자리를 떠나 살아남는 정상적인 경로로 볼 것인지에 따라 SI의 결말에 대한 평가가 갈린다. 판단이 갈리는 자리는 여기이며, 1958년의 용어집은 그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