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입문
철학 입문서를 서너 권 나란히 펼쳐 보면 곧 이상한 일을 겪는다. 물리학 개론서는 어느 것을 펴도 첫 장이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철학 입문서는 첫 장부터 갈린다. 어떤 책은 철학이 세계의 근본 원리를 캐묻는 학문이라 하고, 어떤 책은 개념을 가르고 논증을 검사하는 기술이라 하고, 어떤 책은 잘 사는 법을 몸에 익히는 훈련이라 한다. 셋은 서로 겹치지 않는다. 세계의 근본 원리를 캐묻지 않고도 논증을 검사할 수 있고, 논증을 한 번도 검사하지 않고도 잘 사는 법을 익힐 수 있다.
이 어긋남을 저자들의 취향 차이로 넘기기 쉽다. 그러나 취향이 아니다. 세 정의는 각각 서로 다른 시대에 실제로 통용되던 철학의 정의이고, 셋 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같은 낱말 아래 뒤섞여 있을 뿐이다. 철학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 학문인지에 관해 2500년 동안 답을 여러 번 갈아 치웠고, 갈아 치울 때마다 앞의 답을 버리는 대신 한쪽에 밀어 두었다. 지금 '철학'이라는 낱말은 그렇게 밀려나 쌓인 답들의 총합이다.
이 글이 좇는 것은 그 교체의 내력이다. 낱말이 언제 생겼고, 누가 그 뜻을 다시 정했고, 어떤 제도가 그 정의를 굳혔고, 무엇이 떨어져 나가면서 남은 것이 지금의 철학이 되었는가. 이것을 아는 일이 왜 입문인가 하면, 철학을 배우려는 사람이 처음 부딪히는 벽은 서로 다른 물음이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의 아래서 묻고 있는지를 모르면 무슨 책을 펼쳐도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다.
철학 이야기는 거의 언제나 어원에서 시작한다. 그리스어 필레인(φιλεῖν, 사랑하다)과 소피아(σοφία, 지혜)를 합쳐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 곧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풀이다. 틀린 설명은 아니다. 다만 이 풀이는 철학이 무엇인지를 거의 알려 주지 않는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말은 목수도 의사도 정치가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실제로 그리스인들도 그렇게 썼다.
이 낱말의 가장 이른 용례로 자주 꼽히는 것은 헤로도토스 『역사』 1권 30장이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아테네의 입법자 솔론을 맞으며 하는 말에 동사 꼴로 나온다.
ξεῖνε Ἀθηναῖε, παρ᾽ ἡμέας γὰρ περὶ σέο λόγος ἀπῖκται πολλὸς καὶ σοφίης εἵνεκεν τῆς σῆς καὶ πλάνης, ὡς φιλοσοφέων γῆν πολλὴν θεωρίης εἵνεκεν ἐπελήλυθας.
크세이네 아테나이에, … 호스 필로소페온 겐 폴렌 테오리에스 헤이네켄 에펠렐뤼타스.
아테네에서 오신 손님이여, 그대의 지혜와 여행에 관하여 우리에게도 이야기가 많이 닿았습니다. 그대는 지혜를 좇아, 보고 알기 위하여 많은 땅을 두루 다니셨다고요.
헤로도토스, 『역사』 1권 30장. 그리스어 본문은 통용 교정본에 따랐다.
여기서 '필로소페온'은 직업도 학파도 가리키지 않는다. 실용적 목적 없이 세상을 보러 다니는 사람의 태도를 가리킬 뿐이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을 철학자라 부른 것이 아니라, 쓸모를 앞세우지 않고 두루 다닌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다. 함께 쓰인 테오리에(θεωρίη)도 훗날의 '이론'과 달리 축제나 신탁소에 가서 직접 보고 오는 일을 뜻했다.
더 이른 용례로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하나가 거론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스트로마테이스』 5권 140장 6절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 단편은 그 자체가 논쟁거리다. 미로슬라프 마르코비치와 조너선 반스 같은 편집자·주석가들은 '필로소푸스 안드라스'(φιλοσόφους ἄνδρας)라는 두 낱말이 헤라클레이토스의 것이 아니라 인용자 클레멘스의 표현이라고 보아 지웠고, 찰스 칸과 칼 허프먼은 전부 헤라클레이토스의 것으로 본다. 크리스토퍼 무어는 2020년 프린스턴대학출판부에서 낸 『철학자들을 이름 지어 부르기』(Calling Philosophers Names)에서 이 단편을 헤라클레이토스가 '철학적인 사람들'을 비꼬는 대목으로 읽는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낱말의 첫 등장 자리에서 그것은 아직 존경의 호칭이 아니었다.
이 헐거운 낱말을 좁혀 붙들어 맨 사람이 플라톤이다. 『파이드로스』 마지막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글 쓰는 사람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τὸ μὲν σοφόν, ὦ Φαῖδρε, καλεῖν ἔμοιγε μέγα εἶναι δοκεῖ καὶ θεῷ μόνῳ πρέπειν· τὸ δὲ ἢ φιλόσοφον ἢ τοιοῦτόν τι μᾶλλόν τε ἂν αὐτῷ καὶ ἁρμόττοι καὶ ἐμμελεστέρως ἔχοι.
토 멘 소폰, 오 파이드레, 칼레인 에모이게 메가 에이나이 도케이 카이 테오 모노 프레페인; 토 데 에 필로소폰 …
파이드로스여, 그를 지혜롭다고 부르는 것은 내가 보기에 너무 큰 말이고 신에게나 어울립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든가 그와 비슷한 무엇이라고 부르는 편이 그에게 더 맞고 더 어울릴 것입니다.
플라톤, 『파이드로스』 278d. 스테파누스 쪽수 표기이며, 그리스어 본문은 통용 교정본에 따랐다.
이 짧은 대목에 정의의 뼈대가 다 들어 있다. 철학자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지혜에 못 미치는 사람이다. 지혜는 신의 몫이고 사람에게 남은 것은 그것을 향한 결핍과 운동뿐이다. 이 규정이 중요한 이유는 겸손해서가 아니라 경쟁자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당시 아테네에서 지식을 팔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소피스테스(σοφιστής), 곧 지혜를 갖춘 자라 불렀다. 플라톤은 지혜의 소유를 신에게 넘겨 버림으로써 그 호칭 자체를 무효로 만들고, 자기 쪽에는 결핍을 자인하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 철학이라는 낱말의 첫 번째 정의는 학문 강령이기 이전에 직업 논쟁의 산물이다.
이 낱말을 처음 만든 사람으로는 피타고라스가 오래 지목되어 왔다. 근거는 키케로의 『투스쿨룸 대화』 5권이다. 플라톤의 제자 폰토스의 헤라클레이데스가 전한 이야기라며, 피타고라스가 플리우스의 통치자 레온과 나눈 대화를 옮긴다.
Cuius ingenium et eloquentiam cum admiratus esset Leon, quaesivisse ex eo, qua maxime arte confideret; at illum artem quidem se scire nullam, sed esse philosophum.
레온은 그의 재능과 언변에 감탄하여, 무슨 기술을 가장 자신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 기술도 알지 못하며 다만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답하였다.
키케로, 『투스쿨룸 대화』 5권 3장 8절. 라틴어 본문은 통용 교정본에 따랐고, philosophum은 낱말이 처음 만들어지는 대목이므로 풀어 옮겼다.
이야기는 이어진다. 피타고라스는 사람의 삶을 그리스 전역이 모이는 큰 경기 대회에 견주며, 거기에는 상을 노리고 몸을 단련한 자와 사고팔아 이문을 남기려는 자가 있고, 그 밖에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다만 보러 온 부류가 있는데 자기가 그 세 번째 부류라고 답한다. 지식을 파는 자도 아니고 명예를 좇는 자도 아닌, 구경하러 온 자라는 자기 규정이다.
다만 이 일화의 사실성은 오래전에 무너졌다. 발터 부르케르트가 1960년 학술지 『헤르메스』 88권에 실은 논문 「플라톤이냐 피타고라스냐」는 이 전승의 어휘와 구도가 플라톤 이후의 것임을 논증했고, 이후 연구는 대체로 이야기를 후대의 창작으로 본다. 낱말을 만든 사람을 특정하는 대신 지금 남는 것은 이런 사정이다. 기원전 5세기에 이미 쓰이던 헐거운 낱말이 있었고, 플라톤과 그 주변이 그것을 좁혀 자기 활동의 이름으로 삼았고, 그 좁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려고 더 오래된 기원 설화가 나중에 지어졌다.
같은 키케로의 5권에는 이 낱말의 내용이 한 번 크게 바뀐 순간도 적혀 있다.
Socrates autem primus philosophiam devocavit e caelo et in urbibus conlocavit et in domus etiam introduxit et coëgit de vita et moribus rebusque bonis et malis quaerere.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불러 내려 도시에 자리 잡게 하고 집 안에까지 들여놓았으며, 삶과 품행에 관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에 관하여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키케로, 『투스쿨룸 대화』 5권 4장 10절. 라틴어 본문은 통용 교정본에 따랐다.
키케로가 그리는 그림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천체와 원소와 만물의 생성을 다루는 활동이었고, 소크라테스 이후로 삶과 품행을 다루는 활동이 되었다. 실제 역사가 이렇게 깔끔하게 접히지는 않았겠지만, 로마 시대 사람이 철학의 정의가 한 번 바뀌었다고 여겼다는 사실 자체가 이 글의 출발점이다. 정의가 바뀌었다는 인식은 근대의 발명이 아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활동을 전혀 다른 자리에 놓는다. 『형이상학』 1권에서 그는 철학이 무엇에서 비롯하는지 이렇게 적는다.
διὰ γὰρ τὸ θαυμάζειν οἱ ἄνθρωποι καὶ νῦν καὶ τὸ πρῶτον ἤρξαντο φιλοσοφεῖν, ἐξ ἀρχῆς μὲν τὰ πρόχειρα τῶν ἀτόπων θαυμάσαντες, εἶτα κατὰ μικρὸν οὕτω προϊόντες καὶ περὶ τῶν μειζόνων διαπορήσαντες.
디아 가르 토 타우마제인 호이 안트로포이 카이 뉜 카이 토 프로톤 에륵산토 필로소페인 …
사람들이 지금도 처음에도 지혜를 좇기 시작한 것은 놀라움 때문이다. 처음에는 눈앞의 기이한 것에 놀라고, 그다음에는 조금씩 나아가 더 큰 것들에 관하여 막막함에 부딪힌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982b12–15. 벡커 쪽수 표기이며, 그리스어 본문은 통용 교정본에 따랐다.
타우마제인(θαυμάζειν)은 감탄이 아니라 설명이 막혔을 때의 당혹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의 출발점은 잘 살고 싶다는 요구가 아니라 설명의 실패다. 같은 세기 안에서 이미 두 갈래가 갈라져 있다. 하나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시작하고, 다른 하나는 왜 이렇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데서 시작한다. 오늘날 입문서들이 서로 다른 첫 장을 쓰는 이유의 절반은 여기서 이미 정해졌다.
고대 철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20세기 후반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프랑스의 고대철학 연구자 피에르 아도(Pierre Hadot, 1922~2010)가 1981년 『영적 수련과 고대 철학』(Exercices spirituels et philosophie antique)을, 1995년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antique?)를 내면서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고대의 철학 학파는 명제 체계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을 훈련시키는 곳이었고, 남아 있는 텍스트는 그 훈련을 위한 도구였다. 스토아 학파의 아침 점검, 에피쿠로스 학파의 죽음에 관한 반복 명상, 플라톤주의의 위에서 내려다보기 같은 것을 그는 영적 수련(exercices spirituels)이라 불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자기 자신에게』가 왜 같은 말을 지겹도록 되풀이하는지, 아도의 틀에서는 명쾌해진다. 그 책은 독자에게 무엇을 알리려는 책이 아니라 자기에게 되뇌는 연습 노트이기 때문이다.
이 해석은 널리 받아들여졌지만 반론도 뚜렷하다. 프린스턴대학의 고대철학 연구자 존 쿠퍼(John M. Cooper, 1939~2022)는 2012년 『지혜의 추구』(Pursuits of Wisdom)에서, 고대 철학이 삶의 방식이었다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그 삶을 이끄는 것이 수련이 아니라 논증이었다고 못 박는다. 소크라테스에서 플로티노스까지 여섯 갈래의 삶의 방식을 다루면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각 학파가 제시한 삶이 그 학파의 이론적 논증에서 도출된 결론이라는 점이다. 쿠퍼의 비판을 요약하면, 아도의 그림은 철학과 종교의 경계를 흐린다.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실뱅 루는 2024년 파리의 벨 레트르 출판사에서 낸 『고대 철학은 영적 수련인가? 물음에 부친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아도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이 틀을 소급 적용한 것이 무리라고 반박한다. 매슈 샤프는 2023년 학술지 『릴리전스』(Religions) 14권 998호에 실은 논문에서 쿠퍼 계열의 비판에 아도 쪽에서 답할 수 있는 논거를 정리한다.
이 논쟁이 입문자에게 실질적인 이유. 고대 철학서를 펼쳐 읽는 방식이 여기서 갈리기 때문이다. 아도를 따르면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은 실행 지침서이므로 논증의 빈틈을 따지는 일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독법이 된다. 쿠퍼를 따르면 그 지침이 어떤 전제에서 나왔는지 따져 묻지 않고 실행만 하는 것은 철학이 아니라 순응이 된다. 같은 책을 놓고 어느 쪽 독법을 택하느냐가 곧 철학을 무엇으로 보느냐다.
오늘날 서점의 자기계발 서가에 놓인 스토아 철학 책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아도 쪽 그림을 단순화한 것이다. 그 그림 자체가 학계에서 다투는 해석이고 그것과 경쟁하는 해석이 있다는 사실은 대개 옮겨지지 않는다. 고대인이 실제로 철학을 무엇으로 여겼는가는 지금도 열려 있는 물음이다.
중세로 넘어가면 어느 개설서에나 같은 표어가 나온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다는 것이다. 라틴어 필로소피아 안킬라 테올로기아이(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로 인용되고, 대개 페트루스 다미아니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로 돌려진다. 그런데 원전을 찾아 내려가면 이 문장은 어디에도 없다.
페트루스 다미아니(1007년 무렵~1072년)는 라벤나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도자이자 추기경으로, 교회 개혁 운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그가 『신의 전능에 관하여』(De divina omnipotentia)에서 실제로 쓴 문장은 이렇다.
non debet ius magisterii sibimet arroganter suscipere, sed velut ancilla dominae quodam famulatus obsequio subservire.
가르치는 권한을 스스로 오만하게 떠맡아서는 안 되고, 여종이 안주인을 섬기듯 시중드는 순종으로 받들어야 한다.
페트루스 다미아니, 『신의 전능에 관하여』 5장. 라틴어 본문은 이 대목의 통용 인용에 따랐다.
여기에는 '신학'도 없고 '철학의 시녀'라는 명사구도 없다. 여종처럼 섬기라는 비유가 있을 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찬가지다. 『신학대전』 1부 1문 5항의 두 번째 반론에 대한 답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Et ideo non accipit ab aliis scientiis tanquam a superioribus, sed utitur eis tanquam inferioribus et ancillis; sicut architectonicae utuntur subministrantibus, ut civilis militari.
그러므로 이 학문은 다른 학문들에서 윗것에게 받듯 받는 것이 아니라, 아랫것과 여종을 쓰듯 그것들을 쓴다. 총괄하는 기술이 아래 기술들을 쓰는 것과 같으니, 정치술이 병술을 쓰는 것과 같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부 1문 5항 제2반론 답변. 라틴어 본문은 레오 13세 판을 따르는 통용 전자본에 따랐다.
토마스가 쓴 낱말은 복수형 '아랫것들과 여종들'이고, 그 앞뒤 문맥은 철학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신학이 자기 원리를 다른 학문에서 빌리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 있다. 같은 항목에서 그는 신학이 철학을 쓰는 이유가 신학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 지성의 결함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자연 이성으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그 위의 것으로 손잡아 이끌리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녀에게 짐을 지우는 논리가 아니라 초심자의 사다리에 관한 논리다.
정작 이 표어를 지금 우리가 아는 냉소적인 모양으로 벼려 낸 사람은 칸트다. 1798년의 『학부들의 다툼』에서 그는 신학부·법학부·의학부를 '상위 학부', 철학부를 '하위 학부'로 나누는 당시 대학의 서열을 옮겨 적은 뒤 이렇게 비튼다.
Auch kann man allenfalls der theologischen Fakultät den stolzen Anspruch, daß die philosophische ihre Magd sei, einräumen (wobei doch noch immer die Frage bleibt: ob diese ihrer gnädigen Frau die Fackel vorträgt oder die Schleppe nachträgt), wenn man sie nur nicht verjagt, oder ihr den Mund zubindet.
철학부가 자기 시녀라는 신학부의 자랑스러운 주장도 웬만하면 인정해 줄 수 있다. 다만 그 시녀가 마님 앞에서 횃불을 들고 가는지 뒤에서 치맛자락을 받쳐 드는지는 여전히 물음으로 남는다. 물론 그 시녀를 쫓아내지도 않고 입을 틀어막지도 않는다는 조건에서다.
칸트, 『학부들의 다툼』 1부. 독일어 본문은 클라우스 라이히가 엮은 1959년 함부르크 판에 따른 인용이다.
표어의 계보를 이렇게 펼쳐 놓으면 통설이 뒤집힌다. 중세가 철학을 신학에 종속시켰다는 문장은 중세의 자기 진술이 아니라 계몽기의 회고적 명명에 가깝다. 그리고 이 명명은 칸트에게 조롱 이상의 것이었다. 그는 같은 글에서 하위 학부만이 법령과 규정에 매이지 않으므로 유일하게 이성의 자유로운 검토가 가능한 자리라고 주장한다. 철학의 정의를 바꾸려는 사람은 언제나 남이 붙인 이름을 먼저 되받아 쓴다.
제도의 사실관계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중세 대학에서 철학은 학예학부(facultas artium)의 일이었고, 학예학부는 상위 세 학부로 올라가기 전에 거치는 예비 과정이었다. 즉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기 이전에 학부생의 교과였다. 오늘날 철학과가 대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두고 벌어지는 논의는 이 배치의 먼 후손이다.
근대 초의 철학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얼마나 넓었는지는 데카르트가 1647년 『철학의 원리』 프랑스어판에 붙인 편지 서문의 유명한 비유가 잘 보여 준다.
Ainsi toute la philosophie est comme un arbre, dont les racines sont la métaphysique, le tronc est la physique, et les branches qui sortent de ce tronc sont toutes les autres sciences, qui se réduisent à trois principales, à savoir la médecine, la mécanique et la morale.
이렇게 철학 전체는 한 그루 나무와 같다. 뿌리는 형이상학이고 줄기는 자연학이며, 그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은 다른 모든 학문인데, 이는 셋으로 추릴 수 있으니 곧 의학과 기계학과 도덕학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프랑스어판(1647) 편지 서문. 프랑스어 본문은 통용 판본에 따랐다.
이 그림에서 의학과 공학과 윤리학은 철학의 바깥에 있는 이웃 분야가 아니라 철학의 가지다. 오늘날 감각으로는 낯설지만 당대에는 자연스러운 배치였다. 뉴턴이 1687년에 낸 책의 제목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인 것도 같은 이유다. 지금 우리가 물리학이라 부르는 것이 그때는 자연철학이었다.
가지가 잘려 나가는 과정은 낱말의 역사에 그대로 남아 있다. '과학자'를 뜻하는 영어 낱말 scientist가 인쇄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34년이다. 케임브리지의 윌리엄 휴얼이 메리 소머빌의 『물리 과학의 연관에 관하여』를 『쿼털리 리뷰』 51권에 익명으로 서평하면서, 물질세계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통틀어 부를 이름이 없다는 문제를 짚고 영국과학진흥협회 모임에서 나온 제안을 소개하는 대목이다. 화가를 artist라 하듯 scientist라 부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반쯤 농담으로 던져진 이 낱말이 필요했다는 사실이 사태를 말해 준다. 그전까지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자연철학자였고, 이제 그 이름으로는 부족해진 것이다.
심리학의 분가는 더 늦고 더 극적이다. 1879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빌헬름 분트가 심리 실험만을 위한 연구실을 열었다. 분트 자신은 그 대학의 철학 교수였고 그가 창간한 학술지 이름도 『철학 연구』(Philosophische Studien)였다. 그러니까 실험심리학은 철학과 안에서 태어나 철학의 방법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을 다루기 시작했고, 그 결과 철학에서 떨어져 나갔다. 오늘날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심리학과와 철학과 양쪽에 걸쳐 있고 양쪽이 서로 다른 것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줄어듦을 쇠퇴로 읽는 것은 성급하다. 갈라져 나간 분야들은 대개 경험적으로 검사할 방법을 갖추었을 때 나갔다. 별의 운동은 관측과 계산으로 결판이 나므로 천문학이 되었고, 반응 시간은 측정으로 결판이 나므로 심리학이 되었다. 남은 것은 그런 방법이 아직 없거나 원리적으로 없는 물음들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과란 무엇인가. 여기서 20세기의 큰 물음이 생긴다. 방법으로 결판이 나지 않는 물음만 남은 활동을 학문이라 부를 수 있는가.
칸트는 이 문제를 이미 보고 있었다. 그가 1765년부터 해 온 논리학 강의를 제자 예셰가 정리해 1800년에 낸 『논리학』 서론에는 철학의 정의가 하나가 아니라 둘로 적혀 있다.
하나는 학교 개념(Schulbegriff)이다. 개념에서 나오는 이성 인식들의 체계, 곧 잘 짜인 지식의 묶음으로서의 철학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 개념(Weltbegriff)이다. 모든 인식과 이성 사용이 인간 이성의 궁극 목적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다. 두 번째 뜻에서의 철학이 다루는 영역을 칸트는 네 물음으로 정리한다.
Das Feld der Philosophie in dieser weltbürgerlichen Bedeutung läßt sich auf folgende Fragen bringen: 1) Was kann ich wissen? 2) Was soll ich thun? 3) Was darf ich hoffen? 4) Was ist der Mensch?
세계시민적 뜻에서 철학이 다루는 영역은 다음 물음들로 정리된다. 첫째,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넷째, 인간이란 무엇인가.
칸트, 『논리학』 서론 3절. 학술원판 전집 9권 25면. 원문의 thun은 당대 철자다. 원문은 1인칭 단수로 묻지만, 물음의 주어가 특정 개인이 아니므로 주어를 세우지 않고 옮겼다.
이 구분이 결정적인 이유는, 이후 200년 동안 철학이 겪은 분열이 정확히 이 선을 따라 갈라지기 때문이다. 학교 개념을 극단까지 밀면 철학은 개념과 논증을 다루는 전문 기술이 되고, 세계 개념을 극단까지 밀면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활동이 된다. 두 갈래가 한 학과 안에 공존하는 것이 지금의 사정이다.
20세기 초에는 학교 개념 쪽이 세계 개념 쪽을 아예 잘라 내려는 시도가 나왔다. 비트겐슈타인이 1921년 발표한 『논리철학논고』의 한 대목이 그 강령을 가장 짧게 적었다.
Der Zweck der Philosophie ist die logische Klärung der Gedanken. Die Philosophie ist keine Lehre, sondern eine Tätigkeit. Ein philosophisches Werk besteht wesentlich aus Erläuterungen. Das Resultat der Philosophie sind nicht »philosophische Sätze«, sondern das Klarwerden von Sätzen.
철학의 목적은 생각을 논리적으로 밝히는 일이다. 철학은 학설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 저작은 본질적으로 해명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의 결과는 '철학적 명제들'이 아니라 명제들이 밝아지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4.112. 독일어 본문은 1922년 오그던·램지 판에 실린 원문에 따랐다.
학설(Lehre)과 활동(Tätigkeit)의 대비가 핵심이다. 철학은 세계에 관한 참인 문장들을 보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는 문장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또는 무엇도 말하지 않는지를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이 규정이 옳다면 철학에는 고유한 주장이 없다. 자기 학설을 가지지 않는 것이 철학의 본분이 된다.
루돌프 카르납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1931년 학술지 『에르켄트니스』 2권에 실린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한 형이상학의 극복」에서 그는, 형이상학의 문장들이 거짓인 것이 아니라 뜻이 없다고 주장한다. 검사할 방법이 원리적으로 없는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니며, 그래서 인식으로서의 값이 영이라는 것이다. 다만 카르납은 형이상학을 쓸모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삶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라면 예술과 같은 값을 지니되, 학문인 척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칸트의 세계 개념에 속하던 물음들을 통째로 학문 바깥으로 밀어낸 셈이다.
이 강령은 오래가지 못했다. 검사 가능성이라는 기준 자체가 자기 자신을 검사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곧 드러났고, 형이상학은 20세기 후반에 분석철학 안에서 되살아났다. 그러나 되살아난 형이상학은 예전 것과 달랐다. 그것은 세계의 궁극 구조에 관한 체계가 아니라 개별 물음을 논증으로 다투는 전문 분야가 되었다. 학교 개념이 세계 개념을 잘라 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자기 방식은 관철한 것이다.
같은 세기 중반에 나온 다른 정의도 있다. 윌프리드 셀라스는 1962년 논문 「철학과 인간의 과학적 상」에서 철학의 목표를 이렇게 적는다. 가장 넓은 뜻에서의 것들이 가장 넓은 뜻에서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라고. 이어서 그는 여기 들어가는 '것들'에 배추와 왕뿐 아니라 수와 의무, 가능성과 손가락 튀기기, 미적 경험과 죽음도 포함된다고 덧붙인다. 개별 분과가 각자 자기 조각을 정확히 다루는 시대에, 조각들이 서로 어긋나는 자리를 다루는 일을 철학의 몫으로 남겨 둔 정의다.
| 시기 | 철학이 하는 일 | 그 규정을 적은 자리 |
|---|---|---|
| 기원전 5세기 | 쓸모를 앞세우지 않고 두루 보고 다니는 태도 | 헤로도토스 『역사』 1권 30장 |
| 기원전 4세기 | 지혜를 갖추지 못했음을 자인하고 그것을 향해 가는 일 | 플라톤 『파이드로스』 278d |
| 기원전 4세기 | 설명이 막힌 자리에서 원인과 원리를 찾는 일 |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82b |
| 13세기 | 계시로 주어진 것을 사람의 지성에 맞게 풀어 주는 보조 학문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부 1문 5항 |
| 17세기 | 형이상학을 뿌리로 삼아 자연학과 실용 학문까지 뻗은 지식 전체 |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편지 서문 |
| 18세기 | 인간 이성의 궁극 목적에 모든 인식을 관계 짓는 일 | 칸트 『논리학』 서론 |
| 20세기 초 | 학설을 세우는 대신 생각을 논리적으로 밝히는 활동 |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4.112 |
| 20세기 중반 | 여러 분과가 그린 상들이 서로 어떻게 맞물리는지 살피는 일 | 셀라스 「철학과 인간의 과학적 상」 |
여기까지는 저명한 이름들이 내놓은 규정을 따라왔다. 그런데 어느 시대든 철학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를 정한 것은 규정보다 제도였다. 누가 봉급을 받고 철학을 했는지, 무엇을 써야 그 자리에 남을 수 있었는지가 정의를 만들었다.
고대에는 학파가 그 자리였다. 아카데메이아와 뤼케이온과 스토아와 정원은 강의실이자 공동생활의 장이었고, 학파에 든다는 것은 특정한 생활 규범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중세에는 대학의 학예학부가 그 자리였고, 다루어야 할 텍스트가 교과 규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근대 초에는 궁정과 서신 공화국이 그 자리였다. 데카르트도 스피노자도 대학교수가 아니었다.
지금의 자리는 대학 철학과와 심사를 거치는 학술지다. 이 배치가 만들어 내는 정의는 대략 이렇다. 철학이란 다른 철학 연구자들이 읽고 심사할 수 있는 형식의 글로 다루어지는 물음이다. 이 정의는 아무도 명시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데도 실제로 작동한다. 심사 통과가 어려운 종류의 작업은 그 물음이 하찮아서가 아니라 형식에 맞지 않아서 밀려난다.
이 제도가 실제로 어떤 사람들의 어떤 견해로 채워져 있는지는 측정된 적이 있다. 데이비드 부르제와 데이비드 차머스가 2020년 10월 15일부터 11월 16일까지 실시한 필페이퍼스 설문이다. 영어로 발표하는 전 세계 학사 학위 수여 학과의 철학 연구자 7600명 이상에게 참여를 요청했고 1785명이 답했으며, 문항은 100개였다. 결과는 2023년 4월 학술지 『필로소퍼스 임프린트』 23권 11호에 실렸다.
이 설문에서 눈여겨볼 것은 개별 문항의 분포보다 설문이 성립했다는 사실 자체다. 100개 문항의 절반가량이 형이상학과 인식론에서, 30개가 가치론에서 나왔고, 철학사에서 나온 문항은 6개였다. 목록을 짜는 순간 이미 철학의 정의가 정해진다. 이 설문에서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는 문항이 되기 어렵다. 선택지를 놓고 찬반을 물을 수 있는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칸트가 철학의 네 물음 가운데 세 번째로 꼽은 것이 오늘날의 조사 도구에 담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도구의 결함이라기보다 정의가 바뀌었다는 표시다.
제도가 정의를 정한다는 사정은 다른 방향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2016년 5월 11일 제이 가필드와 브라이언 반 노든은 『뉴욕 타임스』의 철학 지면 '더 스톤'에 「철학이 다양해지지 않겠다면 그것을 실제 이름으로 부르자」를 실었다. 요지는 이렇다. 북미의 철학과 교과 과정이 사실상 유럽과 영어권의 저자들로만 짜여 있으면서 학과 이름은 '철학과'를 쓰고 있으니, 교과를 넓히지 않을 작정이라면 이름을 '유럽·미국 철학과'로 바꾸는 편이 정직하다는 것이다. 인문학의 다른 분과 가운데 자기 영역의 대부분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빼놓는 곳은 없다는 지적이 함께 붙었다.
반론도 즉각 나왔다. 브라이언 라이터는 영어권 학과들이 비서양 철학을 배제하는 것이 지역 때문이 아니라 그 텍스트들이 현재 통용되는 논증 형식과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반박이 가필드와 반 노든의 진단을 사실상 확인해 준다는 점이다. 무엇이 철학인지를 가르는 기준이 물음의 내용이 아니라 글의 형식이라는 것이니, 제도가 정의를 만든다는 말과 같다.
한국어로 철학을 배우는 사람에게는 여기에 한 겹이 더 있다. 우리가 쓰는 '철학'이라는 낱말은 나이가 15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이 번역어를 정착시킨 사람은 메이지 초기 일본의 계몽 사상가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다. 그는 1870년 무렵의 강의록 『백학연환』(百學連環)에서 philosophy의 번역어로 '이학'(理學), '궁리학'(窮理學), '희철학'(希哲學), '희현학'(希賢學) 등을 놓고 견주다가, 1874년에 펴낸 『백일신론』(百一新論)에서 '철학'으로 굳혔다.
주목할 것은 그가 참고한 자리다. '희철학'은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가 『통서』(通書)에 적은 사희현(士希賢), 곧 선비는 현인이 되기를 바란다는 구절에서 왔다. 여기서 '현'(賢)을 '철'(哲)로 바꾸어 '희철학'을 만들고, 다시 '희'를 덜어 '철학'이 되었다는 것이 통용되는 설명이다. 즉 이 낱말은 그리스어를 옮기려고 유학의 어휘를 빌려 왔다. 이 번역어는 1877년 도쿄대학의 학과 이름에 채택되고 1881년 『철학자휘』(哲學字彙)에 실리면서 굳었다.
한국에서 이 낱말을 본격적으로 쓴 초기 사례는 경북 고령 출신의 유학자 이인재(李寅梓, 1870~1929)가 1912년에 낸 한문 저술 『철학고변』(哲學攷辨)이다. 그는 이진상과 곽종석으로 이어지는 주리론의 계보에 선 성리학자였다. 서양의 발전이 철학에 토대를 두었다는 판단에서 이노우에 엔료의 『철학요령』 한역본과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 등을 읽고 그리스 철학사를 정리한 것이다. 그는 필로소피아를 '飛龍小飛阿'로 음차한 뒤, 본래 그리스어로 예지를 좋아한다는 뜻이며 이제는 '철학'으로 옮긴다고 적었다. 탈레스를 '廷禮'로, 소크라테스를 '瑣格拉底'로, 플라톤을 '栢來圖'로 적어 소개하고 유학의 관점에서 비판을 덧붙였다. 한말 유학자 이정직이 남긴 『강씨철학설대략』(康氏哲學說大略)과 함께 국내 초기의 서양철학 연구로 꼽힌다.
여기서 뒤집히는 것이 있다. 근대 이전 한국의 지식 체계에는 '철학'이라는 낱말도 개념도 없었다. 그런데 이 번역어가 들어오자 곧 소급 적용이 일어났다. 성리학과 실학과 불교 교학이 '동양철학'으로 다시 분류되었고, 그렇게 분류되고 나자 그것들이 서양 철학과 같은 종류의 물음을 다루었는지 아닌지가 문제로 떠올랐다. 이인재의 저술이 그리스 철학을 소개하면서 곧바로 유학의 잣대로 재는 구조를 취한 것도 이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번역어가 만드는 착시. 한국어 '철학'과 영어 philosophy와 그리스어 φιλοσοφία가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전제하면, 세 낱말이 각각 다른 계보에서 다른 문제를 안고 왔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철'(哲)에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결핍의 뜻이 없다. 밝고 슬기롭다는 뜻이다. 플라톤이 소포스와 필로소포스를 갈라 세운 그 긴장이 한자어에서는 사라진다.
이것은 번역의 실패가 아니라 번역이 원래 하는 일이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낱말로 사유할 때 무엇이 빠졌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좇아온 내력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철학 바깥에서 던지는 예비 질문이 아니라 철학 안에서 계속 답이 바뀌어 온 물음이며, 그 답들은 쌓여 하나로 수렴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밀어내며 교체되었다.
교체의 갈래는 몇 가닥으로 묶인다. 첫째, 낱말의 범위가 바뀌었다. 기원전 5세기에 두루 보고 다니는 태도를 가리키던 말을 플라톤이 좁혀 자기 활동의 이름으로 삼았고, 데카르트의 시대에 학문 전체로 다시 넓어졌다가, 19세기 이후 분과들이 갈라져 나가면서 크게 줄었다. 둘째, 활동의 성격이 바뀌었다. 살아가는 방식이었는지 논증의 체계였는지는 고대 철학에 관해서조차 아직 다투는 중이고, 20세기에는 학설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밝히는 활동이라는 규정까지 나왔다. 셋째, 정의의 주체가 바뀌었다. 학파와 대학 학예학부와 궁정과 오늘의 학술지가 차례로 무엇이 철학인지를 실질적으로 정해 왔고, 철학자 개인의 규정은 대개 그 제도와 다투는 자리에서 나왔다. 넷째, 낱말 자체가 옮겨 다녔다.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다시 한자어로 옮겨지는 동안 애초의 긴장이 빠지고 다른 긴장이 붙었다.
그래서 입문에서 먼저 익힐 것은 어느 정의도 아니고 지금 읽고 있는 텍스트가 어느 정의 아래 있는지를 알아보는 눈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카르납은 같은 이름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앞의 책은 자기에게 되뇌는 연습이고 뒤의 논문은 문장의 뜻을 검사하는 작업이다. 둘을 같은 기준으로 재면 앞의 것은 논증이 허술해 보이고 뒤의 것은 삶에 무관해 보인다. 실제로는 둘 다 자기 기준에서 정밀하다.
인생을 사유하는 데 철학이 쓸모가 있느냐는 물음도 이 지도 위에서만 제대로 놓인다. 그 물음은 칸트가 세계 개념이라 부른 쪽, 키케로가 소크라테스의 공로로 돌린 쪽, 아도가 영적 수련이라 부른 쪽을 향한 것이다. 그쪽 갈래는 2500년 동안 끊긴 적이 없고, 지금도 대학 밖에서 더 활발하다. 다만 그 갈래를 택하는 것과 다른 갈래가 없는 척하는 것은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의 막힘에서 시작한 물음들과, 셀라스가 조각들이 어긋나는 자리라 부른 문제들은 삶의 태도로 환원되지 않는다.
남는 물음은 이 여러 갈래가 계속 한 이름 아래 묶여 있을 이유가 있느냐다. 물리학과 심리학이 나갈 때는 자기 방법을 갖추었다는 명분이 있었다. 지금 철학 안에 남은 갈래들은 서로 방법도 다르고 무엇을 성취로 치는지도 다르다. 그런데도 한 학과에 묶여 있는 것은 방법의 공통성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 관성 때문에 가깝다. 이 관성이 언제까지 갈지는 열려 있다. 확실한 것은, 지난 2500년 동안 철학의 정의가 바뀔 때마다 그 변화를 먼저 알아본 쪽이 정의를 내리는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본문에 인용한 그리스어·라틴어·프랑스어·독일어 구절은 각 항목에 밝힌 판본에 따랐고, 한국어 번역은 직접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