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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 언어와 마음

비트겐슈타인의 반이론주의와 존 설의 ‘배경’ 개념 — 이론을 금지한 통찰이 이론의 토대가 된 경위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이론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고, 존 설은 평생 그 금지를 상대로 일반 이론을 밀어붙였다. 60년이 지난 지금 남은 것은 승패가 아닌 쟁점의 이동이다.

2026년 8월 19일

1이론을 세우지 말라는 말을 들은 철학자가 60년 동안 이론을 세웠다

2016년 12월, 학술지 Philosophy of the Social Sciences 46권 6호에 「비트겐슈타인에서의 통찰과 오류」라는 논문이 실렸다(527~547쪽). 저자는 존 설(John R. Searle)이다. 1932년 미국 덴버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J. L. 오스틴과 피터 스트로슨의 지도로 학위를 받고, 1959년부터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언어철학과 심리철학을 가르친 사람이다.

초록의 첫 문장은 학술 논문답지 않게 사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자신에게는 가장 큰 도전이며, 비트겐슈타인이 옳다면 자신이 하려는 종류의 철학은 불가능하다고 설은 적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마음, 의식과 사회에 관한 일반 철학 이론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논증했다고 설은 정리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했고 여전히 원하는 것은 바로 그 불가능한 것, 곧 언어와 마음과 의식과 사회에 관한 일반 철학 이론을 제시하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이 문장을 쓴 사람은 그때 여든넷이었다. 『언어행위(Speech Acts)』(1969)로 말이 행위가 되는 조건을 규칙 체계로 정리하고, 『지향성(Intentionality)』(1983)으로 마음이 세계를 향하는 구조를 이론화하고, 『사회적 실재의 구성』(1995)으로 화폐와 결혼과 대통령직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려 한 작업이 이미 다 끝난 뒤였다. 설은 2025년 9월 17일 플로리다에서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철학회가 부고를 냈다.

한 사람이 평생 한 일이 “자신의 작업을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상대와의 싸움”으로 요약된다면 그 싸움의 결말을 따져 볼 만하다. 그런데 결말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다. 설이 자기 이론의 밑돌로 삼은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이 이론을 금지하면서 근거로 내세운 바로 그 통찰이다. 개념의 이름은 배경(Background)이며, 설은 2011년에 「비트겐슈타인과 배경」이라는 논문을 따로 써서 그 계보를 스스로 밝혔다(American Philosophical Quarterly 48권 2호, 119~128쪽).

비트겐슈타인의 반이론주의는 이론을 봉쇄하지 못했다. 그것은 이론의 재료로 흡수되었고, 그 결과 다툼의 자리가 “일반 이론이 가능한가”에서 “이론화될 수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로 옮겨갔다.

2셀 수 없는 용법과 가족유사성 — 금지의 두 겹 근거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빈의 철강 재벌 가문에서 태어나 기계공학을 공부하다 수학의 기초 문제에 붙들려 케임브리지로 갔다. 생전에 출판한 철학 저작은 『논리철학논고』(1921) 한 권뿐이다. 후기 철학의 주저 『철학적 탐구』는 그가 죽은 뒤 1953년에 나왔다. 이 책은 번호가 붙은 짧은 단락들의 연쇄로 되어 있고, 대부분의 단락은 주장을 세우기보다 물음을 던지고 사례를 들이댄다.

후기 철학의 핵심 도구는 세 낱말이다. 언어게임(Sprachspiel)은 말과 그 말이 엮여 있는 활동을 한 덩어리로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명령을 내리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일, 물건을 묘사하는 일, 농담을 하는 일, 기도하는 일이 각각 다른 언어게임이다. 게임이라는 낱말은 언어를 가볍게 보자는 제안이 아니다. 언어를 머릿속 사건으로 그리던 습관을 깨고 규칙을 따르는 활동으로 보게 하려는 선택이다. 삶의 형식(Lebensform)은 그 활동들이 박혀 있는 생활 전체를 가리킨다. 『탐구』 §241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사람들이 언어에서 일치하는 것은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의 일치라고 적었다.

세 번째가 가족유사성(Familienähnlichkeit)이다. §66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놀이’라 불리는 것들을 늘어놓는다. 판 위에서 하는 놀이, 카드놀이, 공놀이, 올림픽 경기, 혼자 하는 카드 맞추기, 노래하며 도는 원무. 모두에게 공통된 하나의 특징을 찾으려 하지 말고 그저 보라고 그는 요구한다. 승패는 혼자 하는 놀이에서 사라지고, 재미는 도박판에서 사라지고, 기술과 운은 종목마다 비중이 다르다. 남는 것은 서로 겹치고 엇갈리는 유사성의 그물이다. §67에서 그는 그 관계를 한 가족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체격과 얼굴 생김새, 눈 색깔, 걸음걸이, 성격이 겹치고 엇갈리는 방식에 견주었다. 모두가 공유하는 단 하나의 본질은 없는데도 ‘놀이’라는 낱말은 잘 작동한다.

여기서 금지의 첫째 근거가 나온다. 언어의 용법이 하나의 본질로 수렴하지 않는다면, 본질을 찾아 정의를 내리는 작업으로서의 이론은 헛일이다. 둘째 근거는 그 다양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Es gibt unzählige solcher Arten: unzählige verschiedene Arten der Verwendung alles dessen, was wir »Zeichen«, »Worte«, »Sätze«, nennen. Und diese Mannigfaltigkeit ist nichts Festes, ein für allemal Gegebenes; sondern neue Typen der Sprache, neue Sprachspiele, wie wir sagen können, entstehen und andre veralten und werden vergessen.

그런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우리가 ‘기호’, ‘낱말’, ‘문장’이라 부르는 모든 것의 사용 방식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이 다양성은 고정된 것도, 한 번에 주어진 것도 아니다. 새로운 언어 유형, 이른바 새로운 언어게임이 생겨나고 다른 것들은 낡아 잊힌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23 (주어캄프 저작집 1권 판본, 초판 1953).

‘셀 수 없이 많은’으로 옮긴 낱말은 unzählige다. 아주 많다는 뜻과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을 함께 담고 있어서, 목록이 길다는 말인지 목록 자체가 닫히지 않는다는 말인지가 갈린다. 설은 뒤의 뜻으로 읽고 그것이 체계적 이론을 가로막는 논거로 쓰였다고 보았다. 대상의 목록이 원리적으로 닫히지 않으면 그 목록을 다루는 일반 이론도 완성되지 못한다.

이 두 근거 위에 방법론적 처방이 얹힌다.

Und wir dürfen keinerlei Theorie aufstellen. Es darf nichts Hypothetisches in unsern Betrachtungen sein. Alle Erklärung muß fort, und nur Beschreibung an ihre Stelle treten.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이론도 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의 고찰에 가설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든 설명은 물러나야 하고 그 자리에 기술(記述)만이 들어서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109 (같은 판본).

마지막 낱말 Beschreibung을 ‘기술’로 옮겼다. 묘사나 서술로도 옮길 수 있지만, 여기서는 설명(Erklärung)과 짝을 이루어 대립하고 있으므로 그 대립이 보이는 말을 골랐다. 설명은 왜 그런지를 밝히고 기술은 무엇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적는다. §128의 문장은 더 도발적이다. 철학에서 논제를 세우려 한다면 그것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모두가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적었다. 철학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다툴 거리가 없을 만큼 뻔한 것뿐이라는 말이다.

3삽이 휘는 자리 — 금지의 세 번째이자 가장 강한 근거

다양성과 본질의 부재는 그 자체로는 이론을 막지 못한다. 물의 상태가 폭포와 끓는 냄비와 스케이트장으로 갈라져도 물의 물리학은 성립한다. 설이 즐겨 든 반례가 정확히 이것이었다. 다양성이 이론을 막는다면 물리학은 진작 불가능했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금지가 이 반례를 견디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는 이론이 서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았다. 이론은 근거의 연쇄 위에 선다. 어떤 주장을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물으면 근거를 대고, 그 근거를 왜 그렇게 보느냐고 물으면 다시 근거를 댄다. 그런데 이 연쇄를 실제로 끝까지 따라가면 무엇이 나오는가.

»Wie kann ich einer Regel folgen?« – wenn das nicht eine Frage nach den Ursachen ist, so ist es eine nach der Rechtfertigung dafür, daß ich so nach ihr handle. Habe ich die Begründungen erschöpft, so bin ich nun auf dem harten Felsen angelangt, und mein Spaten biegt sich zurück. Ich bin dann geneigt zu sagen: »So handle ich eben.«

“규칙을 따르는 일이 나에게 어떻게 가능한가?” — 이것이 원인을 묻는 물음이 아니라면, 내가 규칙에 따라 그렇게 행위하는 것에 대한 정당화를 묻는 물음이다. 근거를 다 써 버렸다면 나는 이제 단단한 암반에 다다랐고 내 삽은 뒤로 휜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나는 그저 그렇게 행위한다.”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217 (같은 판본).

비트겐슈타인은 이 그림을 죽기 직전까지 쓴 마지막 원고에서 되풀이한다. 앤스컴과 폰 브릭트가 1969년에 『확실성에 관하여』로 묶어 낸 그 원고에서, 정당화의 끝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가 반복해서 확정된다. §110에서 그는 끝이 근거 없는 전제가 아니라 근거 없는 행위 방식이라고 적는다. 전제라면 참인지 물을 수 있지만 행위 방식에는 그 물음이 붙지 않는다.

Die Begründung aber, die Rechtfertigung der Evidenz kommt zu einem Ende; – das Ende aber ist nicht, daß uns gewisse Sätze unmittelbar als wahr einleuchten, also eine Art Sehen unsrerseits, sondern unser Handeln, welches am Grunde des Sprachspiels liegt.

근거를 대는 일, 곧 증거를 정당화하는 일은 끝에 이른다. 그런데 그 끝은 어떤 문장들이 우리에게 곧바로 참으로 밝아 오는 것, 그러니까 우리 쪽의 일종의 봄이 아니다. 그 끝은 우리의 행위이며, 그 행위가 언어게임의 밑바닥에 놓여 있다.

비트겐슈타인, 『확실성에 관하여』 §204 (주어캄프판, 초판 1969).

같은 원고 §148에서 그는 의자에서 일어설 때 발이 아직 둘 있는지 확인하지 않는 이유를 묻고, 왜냐가 없다고 답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며, 그것이 자신의 행위 방식이라고 그는 답한다. §253에서는 근거 있는 믿음의 밑바닥에 근거 없는 믿음이 놓여 있다고 적는다. 그리고 §287의 다람쥐가 나온다.

Das Eichhörnchen schließt nicht durch Induktion, daß es auch im nächsten Winter Vorräte brauchen wird. Und ebensowenig brauchen wir ein Gesetz der Induktion, um unsre Handlungen und Vorhersagen zu rechtfertigen.

다람쥐는 다음 겨울에도 저장한 먹이가 필요할 것이라고 귀납으로 추론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의 행위와 예측을 정당화하기 위해 귀납의 법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 『확실성에 관하여』 §287 (같은 판본, 1950년 9월 23일 기록).

다람쥐 비유의 힘은 규모에 있다. 도토리를 묻는 행동은 귀납의 정당성이라는 이론적 문제가 풀렸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다. 불에 손을 넣지 않는 이유는 귀납을 정당화했기 때문이 아니다.

여기서 금지의 세 번째 근거가 완성된다. 이론은 명제로 되어 있고 명제는 정당화를 요구한다. 그런데 정당화의 연쇄가 실제로 끝나는 자리에 있는 것은 명제가 아니라 행위다. 그러므로 명제로 된 이론은 자기 발밑을 자기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기술만 남는다.

논증의 이음새

이 논증은 강하지만 결론을 하나만 허용하지는 않는다. “발밑에 명제가 아닌 것이 있다”에서 “그 발밑에 대해 어떤 이론도 세울 수 없다”로 넘어가려면 전제가 하나 더 필요하다. 이론은 오직 명제적 정당화의 형태로만 가능하다는 전제다. 그 전제를 놓지 않으면, 발밑의 비명제적 층은 이론이 멈추는 벽이 아니라 이론이 다뤄야 할 대상이 된다. 설이 파고든 자리가 정확히 여기다.

4설은 그 자리에 이름을 붙였다 — ‘배경’의 계보

설의 이론 작업에는 처음부터 구멍이 하나 있었다. 그는 문장의 뜻을 규칙으로 정리하려 했는데, 규칙만으로는 실제 이해가 설명되지 않는다. “빵을 자르라”와 “케이크를 자르라”는 문장 구조가 같지만, 앞의 지시를 받은 사람은 빵칼을 집고 뒤의 지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칼을 집는다. 어느 문장에도 어떤 칼을 쓰라는 말은 없다. “풀을 자르라”는 지시를 칼로 수행하는 사람도 없다. 규칙을 아무리 정교하게 적어도 이 차이는 규칙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설이 이 층에 이름을 붙인 것이 배경(Background)이다. 『지향성』(1983)에서 도입되었다. 지향성(Intentionality)은 마음의 상태가 무언가를 ‘향해 있음’을 가리키는 용어다. 믿음은 무언가에 대한 믿음이고, 욕구는 무언가에 대한 욕구이며, 지각은 무언가의 지각이다. 설은 이런 지향적 상태가 작동하려면 그 자체는 지향적이지 않은 능력과 습관과 실천의 층이 깔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경은 믿음이 아니고 규칙도 아니다. 명제로 적히지 않으며, 적어 놓아도 그것을 적용하는 데 다시 배경이 필요하다.

이 개념은 설의 체계에서 점점 무거워진다. 『마음의 재발견』(1992)의 8장 제목이 「의식, 지향성, 그리고 배경」이고, 『사회적 실재의 구성』(1995)에는 제도적 사실과 배경 능력을 다루는 절과 「배경 능력과 사회 현상의 설명」이라는 장이 들어 있다. 설이 크립키의 규칙 회의론에 답한 논문 「규칙과 지향성에 관한 회의론」도 같은 자원을 쓴다. 솔 크립키는 1982년 『비트겐슈타인의 규칙과 사적 언어』에서, 규칙이 스스로를 해석해 주지 않으므로 어떤 행동도 어떤 규칙과 부합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회의적 역설을 제시했다. 설의 응답은 규칙 해석의 폭을 좁히는 것이 배경이라는 것이었다. 이 논문은 1980년대 초에 쓰였으나 2002년 『의식과 언어』 14장으로 뒤늦게 출판되었고, 마르틴 쿠슈가 2007년 케임브리지대학출판부의 『존 설의 언어철학』에서 그 논증을 검토했다.

계보는 설 자신이 밝혔다. 2011년 논문의 제목이 「비트겐슈타인과 배경」이다. 그리고 어휘가 겹친다.

Aber mein Weltbild habe ich nicht, weil ich mich von seiner Richtigkeit überzeugt habe; auch nicht, weil ich von seiner Richtigkeit überzeugt bin. Sondern es ist der überkommene Hintergrund, auf welchem ich zwischen wahr und falsch unterscheide.

그러나 내가 내 세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옳다고 확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물려받은 배경이며, 그 위에서 나는 참과 거짓을 구별한다.

비트겐슈타인, 『확실성에 관하여』 §94 (주어캄프판, 초판 1969).

‘배경’으로 옮긴 낱말이 Hintergrund다. 영어 background에 그대로 대응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낱말을 전문 용어로 벼려 쓴 것은 아니다. 같은 원고 §350에서는 발언의 맥락을 가리키는 일상적인 뜻으로도 쓴다. 그러나 §94의 용법은 설의 것과 기능이 같다. 판단이 참과 거짓으로 갈리기 위해 이미 자리 잡고 있어야 하는 층, 그 자체는 참도 거짓도 아닌 층이다.

정당화가 끝나는 자리를 두고 갈라지는 두 결론 같은 바닥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위에서 내려와 설명을 멈추고, 설은 그 바닥을 배경이라 명명한 뒤 위로 이론을 쌓는다. 정당화가 끝나는 자리 — 같은 바닥, 반대 방향 비트겐슈타인 존 설 일반 이론을 세우지 말라 『철학적 탐구』 §109 · §128 언어와 마음의 일반 이론 『언어행위』1969 · 『지향성』1983 ‘배경(Background)’ 정당화의 연쇄가 끝나는 자리: 명제가 아니라 행위 『확실성에 관하여』 §110 · §204 · 『철학적 탐구』 §217 비트겐슈타인: 설명을 멈추고 기술한다 설: 명명하고 그 위에 쌓는다 같은 관찰이 한쪽에서는 금지의 근거가, 다른 쪽에서는 이론의 토대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근거를 캐 내려가다 암반에 닿아 삽을 멈춘다. 설은 같은 암반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딛고 올라간다. 두 사람이 가리키는 지점은 같고 진행 방향이 반대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된다. 비트겐슈타인이 “여기서 삽이 휜다”고 적은 자리에 설은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자기 체계의 밑돌로 놓았다. 이론화를 막던 관찰이 이론의 공리 자리로 옮겨 앉았다.

5쟁점은 이론의 가능성에서 배경의 성격으로 옮겨갔다

흡수가 논쟁을 끝내지는 않았다. 논쟁은 자리를 옮겼다. 오늘 이 분야에서 사람들이 다투는 것은 배경 같은 층이 있느냐가 아니다. 그 층이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다.

설의 답은 분명하다. 배경은 뇌의 능력이다. 그가 생물학적 자연주의라 부른 입장에 따르면, 의식과 지향성은 신경생리 과정에 의해 야기되고 뇌의 구조 안에서 실현되는 상위 수준의 특징이다. 배경도 마찬가지로 신경 수준에서 실현된 비지향적 역량이다. 이 답이 맞다면 배경은 원리적으로 경험과학의 대상이 되고, 비트겐슈타인의 금지는 시기의 문제로 축소된다. 아직 신경과학이 거기까지 가지 못했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논증이 얇아진다. 매슈 랫클리프는 2004년 Philosophical Explorations에 실린 「실재론, 생물학주의, 그리고 배경」에서 그 얇음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설이 배경의 존재를 입증하려고 동원한 논거들은 자연주의적 해석을 함축하지 않는다. 배경이 있어야 한다는 논증과 배경이 뉴런으로 되어 있다는 주장 사이에는 연결이 없고, 자연주의는 논증된 것이 아니라 선언된 것이라고 랫클리프는 정리한다. 그는 여기에 더해, 설이 외적 실재론을 배경 능력의 산물로 다루는 방식이 오히려 과학적 개념화보다 앞서는 이해를 함축한다고 지적하며, 그 긴장을 자연주의를 버리는 쪽으로 풀면 설의 입장이 하이데거 현상학 쪽으로 크게 움직인다고 결론짓는다.

실제로 그 방향에서 압박이 왔다.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1999년 Philosophical Topics 27권 2호에 「논리적 분석에 대한 현상학의 우위: 설에 대한 비판」(3~24쪽)을 실었다. 표상을 거치지 않는 지향성, 곧 몸에 익은 대응 능력이 지향성의 원초적 형태라는 주장이었다. 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2000년 드레이퍼스 기념 논문집에 「현상학의 한계」를 썼으며 2001년 Revue Internationale de Philosophie 217호에 「현상학적 기술도 합리적 재구성도 아니다: 드레이퍼스에 대한 답변」을 실었다.

다른 쪽 압박은 비트겐슈타인 진영에서 왔다. 다니엘 모얄샤록은 2013년 논문 「실재론이되 경험주의는 아니다: 비트겐슈타인 대 설」에서 두 사람의 거리를 정확히 재려 했다. 그의 정리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도 사실이 개념을 조건 짓는다고 본다. 『탐구』 §142 뒤의 방주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한 개념의 의미 곧 그 중요성을 설명하려면 극히 일반적인 자연의 사실들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런 사실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고 적었다. 『확실성에 관하여』 §617에서는 언어게임의 가능성이 어떤 사실들에 조건 지어져 있다는 것이 자명하지 않으냐고 되묻는다. 차이는 사실의 층위다. 비트겐슈타인이 드는 사실은 사람이 잠을 자고 아파하고 죽는다는 종류이고, 설이 드는 사실은 분자와 뉴런이다. 모얄샤록은 물의 예로 응수한다. 해변에서 몸을 담그는 것도, 위스키에 타는 것도, 그림에서 보는 것도 화학식으로 환원되어 다뤄지지 않는다. 얼음과 증기도 같은 화학식을 갖는다. 물조차 한정된 맥락 밖에서는 분자 배열로 환원되지 않는데, 뜻과 감정과 행동을 그렇게 다뤄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는 본다.

세 비판의 방향은 서로 다르지만 형태가 같다. 세 비판 가운데 배경 같은 층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없다. 다툼은 그 층이 신경인지 몸에 익은 능력인지 문법인지에 걸려 있다. 이 물음에는 기술이 답을 주지 못한다. 설명이 있어야 하고, 그 점에서 이미 이론적 물음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금지는 이 물음이 제기되는 것 자체를 막지 못했다.

동시에 설의 야심도 절반만 성공했다. 그가 실제로 체계를 세운 대상은 배경 위에 서는 지향 구조와 언어행위였고, 배경 자체는 아니었다. 배경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약속만 있고 이론이 없다. 랫클리프의 지적이 겨눈 지점이 바로 그 공백이다.

6금지는 자기 자신에게 적용될 때 이론적 결정을 요구한다

금지가 실제로 무엇을 낳았는지는 그것을 적용해 본 두 자리에서 드러난다.

첫째는 종교 언어다. 기술만 하고 평가하지 말라는 방침을 종교 담론에 적용하면, 철학자가 할 일은 신앙의 언어게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적는 것이 되고 그 게임의 성공이나 실패를 판정하는 일은 과제에서 빠진다. 카이 닐센은 1967년 학술지 Philosophy 42권 161호에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191~209쪽)를 실어 그 귀결을 문제 삼았다. 종교 담론을 자족적이고 내적으로 정합적이며 과학 같은 다른 담론의 비판에 열려 있지 않은 언어게임으로 기술하면, 그 담론의 비합리성과 비정합성을 비판할 길이 원리적으로 막힌다고 닐센은 논증했다. 닐센이 만든 이 이름표를 D. Z. 필립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의 종교 담론 이해는 외부 비판을 허용한다는 것이 필립스의 반론이었다. 두 사람의 공방은 40년 가까이 이어져 2005년 『비트겐슈타인적 신앙주의?』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였다.

그 논쟁의 쟁점이 무엇이었는지가 요점이다. 다툼의 초점은 그런 입장이 과연 비트겐슈타인의 것인지에 놓여 있었다. 그 입장이 옳은지는 오히려 뒷전이었다. 기술만 하겠다는 방침은 무엇을 기술로 볼지, 어디까지가 게임 내부인지에 대한 실질적 판단을 이미 요구한다.

둘째는 『논리철학논고』 해석이다. 코라 다이아몬드는 1988년 Philosophy 63권에 「사다리를 던져 버리기」(5~27쪽)를 실었다. 통설은 『논고』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고 읽는다. 다이아몬드와 제임스 코넌트가 밀어붙인 이른바 단호한 독해는 그 읽기를 거부한다. 그들이 보기에 무의미는 그냥 무의미이고, 말할 수 없는 진리를 간접적으로 전달한다는 해석은 사다리를 던져 버린다고 말하면서 사다리 위에 굳게 서 있는 자기모순이다. P. M. S. 해커는 2000년 앨리스 크레리와 루퍼트 리드가 엮은 『새로운 비트겐슈타인』에 「그는 그것을 휘파람으로 불려 했는가?」(353~388쪽)를 실어 반박했다. 단호한 독해가 추방했다던 ‘중요한 무의미’를 뒷문으로 다시 들여온다는 것이었다.

두 사례가 겹치는 지점은 이렇다. 철학에서 논제를 세우려 해도 모두가 동의할 테니 논쟁이 벌어질 일이 없다고 적은 사람의 텍스트를 두고,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를 놓고 30년 넘게 합의가 없다. 반이론주의는 자기 자신에게 적용될 때 이론적 결정을 요구한다. 무엇이 기술이고 무엇이 설명인지, 무엇이 무의미이고 무엇이 스스로 드러나는 것인지를 정해야 하는데 그 결정은 기술로 내려지지 않는다.

7결론 — 금지는 이론을 막지 못하고 이론이 설명해야 할 것을 바꾸었다

비트겐슈타인의 금지는 세 겹의 근거 위에 서 있었다. 낱말의 용법이 하나의 본질로 수렴하지 않는다는 것(가족유사성), 용법의 목록이 원리적으로 닫히지 않는다는 것(『탐구』 §23), 그리고 정당화의 연쇄가 끝나는 자리에 명제가 아니라 행위가 있다는 것(§217, 『확실성에 관하여』 §110·§204). 앞의 둘은 설이 물의 예로 되받은 대로 이론을 막기에 부족하다. 다양한 현상이 하나의 이론으로 묶인 사례가 과학에 흔하다. 금지의 무게는 셋째 근거에 실려 있다.

그런데 그 셋째 근거가 설에게서 이름을 얻었다. 규칙만으로는 이해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관찰, 곧 규칙을 적용하는 데 다시 규칙 아닌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관찰은 비트겐슈타인이 삽이 휘는 자리를 가리킬 때 쓴 바로 그 관찰이다. 설은 거기에 ‘배경’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지향성 이론의 밑돌로 놓았으며, 『확실성에 관하여』 §94의 ‘물려받은 배경’과 어휘까지 겹친다. 금지의 근거가 이론의 재료가 된 것이다.

그 결과 다툼의 자리가 옮겨갔다. 오늘 이 문제에서 쟁점은 그 층이 어떤 종류의 것이냐로 좁혀졌다. 설은 뇌의 비지향적 역량이라 답했고, 랫클리프는 그 답이 논증된 것이 아니라 선언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며, 드레이퍼스는 몸에 익은 대응 능력을 내세웠고, 모얄샤록은 문법적·규범적인 것이라고 맞섰다. 어느 쪽도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설의 신경 환원은 약속 단계에 머물러 있고, 문법적 독해는 자기 자신에게 적용될 때 갈라진다. 신앙주의 논쟁에서 40년, 『논고』 해석 논쟁에서 30년 넘게 이어진 불일치가 그 증거다.

무엇을 본체로 보느냐에 따라 판정이 달라진다. §109를 방법론적 처방으로 읽으면 설은 규칙을 어긴 사람이다. 같은 문장을 정당화의 한계에 대한 진단으로 읽으면 설은 그 진단을 확인하고 이름을 붙인 사람이 된다. 두 독법 가운데 어느 쪽이 비트겐슈타인의 것인지는 텍스트만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바로 그 미결정이 지난 반세기의 논쟁을 지탱해 왔다.

남는 물음은 하나로 압축된다. 배경은 기술의 대상인가 설명의 대상인가. 이 물음에는 ‘행위가 밑바닥에 있다’는 관찰만으로 답할 수 없다. 그 관찰은 참이면서 동시에 이론의 출발점일 수 있다. 둘을 배타적으로 만든 쪽은 관찰 자체가 한 일이 아니라 그것을 강령으로 읽은 독법이 한 일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다. “이론을 세우지 말라”는 문장이 실제로 한 일은 이론이 설명해야 할 것의 목록을 바꾼 일이다. 그 목록의 맨 아래 항목에는 여전히 답이 붙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