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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 · 문헌학

길가메시의 실존 근거와 서사시가 만들어진 과정 — 수메르 왕명록의 네 줄에서 2014년에 늘어난 스무 행까지

길가메시가 실제로 살았는지를 묻는 것은 이 텍스트에 던질 수 있는 질문 가운데 얻어낼 것이 가장 적은 축에 든다. 남아 있는 증거를 순서대로 따라가면 훨씬 답하기 좋은 질문이 드러난다. 누가 언제 무엇을 이 이야기에 보탰는가.

1872년 12월 3일, 열한 번째 서판

1872년 12월 3일 저녁, 런던의 성서고고학회(Society of Biblical Archaeology)에서 조지 스미스라는 대영박물관 직원이 논문 한 편을 읽었다. 제목은 「칼데아의 홍수 이야기」였다. 스미스는 판화 조각공 출신으로 정규 학위가 없었고, 박물관에서 점토판 조각을 맞추는 수리공으로 일하다가 쐐기문자를 독학한 사람이다. 그가 맞춘 조각들에는 배가 산에 걸리고 새를 날려 보내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창세기의 노아 홍수와 뼈대가 같은데 훨씬 오래된 판본이었다. 청중 가운데 당시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이 발표의 온도를 알려 준다. 발표문은 이듬해 학회 회보에 실렸다.

이 자리에서 스미스는 자신이 읽은 것이 12장짜리 연작 가운데 11번째 서판이라는 사실도 함께 밝혔다. 다시 말해 세계가 길가메시를 처음 만난 순간은 완성된 고전을 마주한 순간이 아니었다. 조각난 점토판 더미에서 겨우 한 장을 복원해 낸 순간이었다. 이 사정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발표가 일으킨 파문의 방향은 텍스트의 상태와 무관한 쪽으로 흘렀다. 관심은 성서와의 관계,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실제로 존재했는가에 쏠렸다. 신문사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발굴 비용을 대겠다고 나섰고, 스미스는 니네베로 떠나 홍수 이야기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았다. 실존 여부를 묻는 습관은 그때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 글은 그 습관이 어디까지 근거가 있고 어디서부터 헛도는지를 증거 하나하나에 대고 확인한다.

왕명록은 길가메시의 이름 앞에 신을 뜻하는 기호를 붙였다

실존 논의의 출발점은 언제나 수메르 왕명록이다. 왕명록은 홍수 이전부터 시작해 도시에서 도시로 왕권이 옮겨 다닌 내력을 적은 목록으로, 기원전 20세기 전후 이신 왕조 무렵에 지금 형태로 정리된 문서다. 옥스퍼드 대학교의 수메르 문학 전자 텍스트 자료집(ETCSL)이 정리한 교정본에서 길가메시 항목은 네 줄로 끝난다.

ᵈgilgameš₃ / ab-ba-ni lil₂-la₂ / en kul-ab-ba-ke₄ / mu 126 i₃-ak

길가메시, 그의 아버지는 릴₂(lil₂), 쿨라바의 주인, 126년을 다스렸다.

수메르 왕명록 112~115행. ETCSL 교정본 c.2.1.1(옥스퍼드). 표기는 ETCSL의 자모 방식을 통상 전사로 옮겼다.

짧은 네 줄에 읽을 것이 여럿 들어 있다. 우선 이름 앞에 놓인 ᵈ 기호다. 쐐기문자에서 신의 이름 앞에는 딩기르(diŋir)라는 별표 모양 기호를 붙여 이것이 신의 이름임을 표시했다. 문법상 발음되지 않고 분류만 담당하는 표지여서 학계에서는 위첨자 d로 적는다. 왕명록을 필사한 서기들은 길가메시를 그 부류에 넣었다. 같은 목록에서 키시의 왕 엔메바라게시에게는 이 기호가 붙지 않는다.

둘째로 아버지에 관한 서술이 애매하다. lil₂이라는 낱말은 바람, 허공, 떠도는 혼령을 두루 가리켜서 번역자마다 갈린다. 유령으로 옮기는 판본이 있고 떠돌이나 유목민으로 옮기는 판본이 있다. 정작 서사시에서 길가메시의 아버지로 나오는 루갈반다는 여기 등장하지 않는다. 왕명록 편찬자가 가진 정보와 서사시 전통이 이미 어긋나 있었다는 뜻이다.

셋째로 126년이라는 숫자다. 같은 목록에서 루갈반다는 1200년, 엔메바라게시는 900년, 아가는 625년을 다스렸다고 되어 있다. 그 틈에서 126년은 눈에 띄게 작다. 이 대비를 근거로 길가메시 항목이 상대적으로 현실적이라고 보는 견해가 오래 통용되었다. 그러나 작은 숫자가 참이라는 보증은 아니다. 왕명록은 여러 도시의 왕권 주장을 하나의 계보로 꿰기 위해 만든 정치 문서이고, 수치는 그 서열을 만드는 재료였다. 길가메시의 아들 우르눈갈이 30년, 손자가 15년으로 급격히 짧아지는 배열은 신화 시대에서 인간 시대로 넘어가는 눈금을 매끄럽게 만들려는 편집으로 읽힌다.

정리하면 왕명록은 길가메시의 실존을 증언하는 문서가 아니다. 편찬 시점이 상정된 재위 시기보다 900년 넘게 늦고, 편찬자는 그를 이미 신으로 분류했으며,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서사시 전통과 어긋나게 적었다. 이 문서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기원전 20세기의 서기들이 우루크의 옛 왕 목록에 길가메시라는 이름을 넣어 두었다는 사실뿐이다.

실존을 떠받치는 실물은 이웃 나라 왕의 항아리 조각 하나다

길가메시 본인이 남긴 동시대 기록은 한 점도 없다. 이름을 새긴 벽돌도, 봉헌물도, 연대 표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실존 논증은 우회로를 탄다. 서사시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이 실재했음을 보여 그 인물과 얽힌 길가메시도 실재했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방식이다.

그 다른 인물이 키시의 왕 엔메바라게시다. 키시는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도시로 우루크와 패권을 다투던 상대였다. 수메르어 시편 「길가메시와 아가」에서 우루크를 포위하는 아가가 바로 엔메바라게시의 아들로 나온다. 그런데 이 엔메바라게시의 이름이 당대에 만들어진 물건에 새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바그다드 이라크 국립박물관에 IM 030590번으로 등록된 알라바스터 용기 조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디츠 오토 에차르트가 1959년에 두 지면에 걸쳐 판독해 발표했고, 더글러스 프레인이 편찬한 초기 왕조 왕실 명문 집성에 RIME 1.07.22.02로 실렸다. 새겨진 글자는 세 줄이 전부다.

me-bara₂-si / lugal / kiš

메바라시, 키시의 왕.

이라크 국립박물관 IM 030590, 알라바스터 용기 조각. Dietz Otto Edzard, “Enmebaragesi von Kiš,” Zeitschrift für Assyriologie 53(1959), 9~26쪽 및 Sumer 15(1959); Douglas Frayne, RIME 1, 07.22.02.

이 세 줄이 논증의 물적 토대 전부다. 논리는 이렇게 이어진다. 왕명록과 투말 명문과 수메르어 시편이 모두 엔메바라게시를 아가의 아버지로, 아가를 키시 제1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적는다. 그 엔메바라게시가 실재했다면 아들 아가도 실재했을 개연성이 높고, 그 아가와 전쟁을 벌인 우루크의 왕도 실재했을 개연성이 높다. 기원전 27세기 무렵 키시와 우루크가 패권을 다투었다는 정치사의 큰 틀이 세워진다.

두 번째 우회로는 투말 명문이다. 니푸르의 엔릴 신전과 그 안의 투말 성소가 지어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한 내력을 왕들의 이름으로 정리한 짧은 문서로, 우르 제3왕조 말이나 이신 시대 초에 작성되었다. 여기에 길가메시가 나온다.

ᵈgilgameš₃-e numun₂-bur-ra e₂ ᵈen-lil₂-la₂ in-du₃ / ᵐur-lugal dumu ᵈgilgameš₃-ke₄ / tum-ma-al​ᵏⁱ-e pa bi₂-i-ed₂

길가메시는 엔릴의 신전에 누문부라를 지었다. 길가메시의 아들 우르루갈은 투말을 번성하게 하였다.

「투말의 내력」 12~14행. ETCSL 교정본 c.2.1.3(옥스퍼드).

여기서 널리 퍼진 오해를 하나 걷어낼 필요가 있다. 개설서와 온라인 백과에는 투말 명문이 길가메시의 우루크 성벽 축조를 기록한다는 서술이 자주 보인다. 실제 본문에는 그런 말이 없다. 이 문서가 길가메시에게 돌리는 것은 니푸르에 있는 엔릴 신전의 누문부라라는 구조물이며, 우루크 성벽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성벽 이야기는 서사시의 서두에서 나온다. 두 텍스트는 성격도 시대도 다르다.

더 중요한 것은 투말 명문에 길가메시의 아들로 우르루갈이 나온다는 점이다. 왕명록에서 길가메시를 이은 왕은 우르눈갈이다. 두 이름이 다르고, 왕명록의 어떤 사본은 이 자리에 우르루갈을 적는다. 후대 서기들이 서로 다른 전승을 들고 있었다는 표시다. 정리하면 두 번째 우회로 역시 길가메시를 직접 비추지 않는다. 기원전 21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의 서기들이 옛 우루크 왕가의 계보를 각자 조금씩 다르게 기억했음을 보여 줄 따름이다.

항아리에 새겨진 이름은 왕명록의 이름과 다르다

실존 논증의 무게가 항아리 조각 하나에 실려 있다면 그 조각을 자세히 볼 이유가 생긴다. 들여다보면 세 군데가 어긋난다.

첫째, 이름이 같지 않다. 명문에 새겨진 것은 me-bara₂-si, 곧 메바라시다. 왕명록이 적은 이름은 en-me-en-barag-ge-si, 곧 엔메바라게시다. 앞의 en 요소가 없다. 수메르어에서 en은 신전의 사제이자 도시의 지배자를 가리키는 칭호이고, 이런 요소가 이름 앞에 붙거나 빠지는 일은 후대의 재구성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두 이름을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것은 합리적인 추정이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둘째, 출토 지점이 없다. 이 용기 조각은 발굴 현장에서 층위와 함께 수습된 물건이 아니다. 쐐기문자 디지털 도서관 이니셔티브(CDLI)의 유물 항목은 출토지를 미상으로 기록한다. 고고학에서 출토 맥락이 없는 유물은 연대를 정하기가 어렵고 진위 판정도 까다롭다. 실존 논증의 초석이 맥락 없이 시장을 거쳐 박물관에 들어온 물건이라는 사정은 그 논증의 강도를 그만큼 낮춘다.

셋째, 연대가 확정되지 않았다. CDLI는 이 조각을 초기 왕조 3b기(기원전 2500~2340년)로 분류한다. 반면 키시 기호의 고졸한 자형을 근거로 초기 왕조 1기까지 올려 잡는 견해도 있다. 두 견해 사이에는 수백 년의 간격이 벌어진다. 하파자에서 나온 또 다른 조각을 같은 왕의 것으로 볼 수 있는지도 논쟁 대상이다. 이 인물의 정체와 위상을 정면으로 다룬 연구로 피오트르 미할로프스키의 「엔메바라게시라는 사람」(2003)이 있는데, 논쟁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기서 말하려는 요점이다.

증거의 사슬이 실제로 얼마나 긴가

동시대 실물 → 메바라시라는 이름 세 글자. 여기서 엔메바라게시로 넘어가려면 이름 요소의 차이를 넘어야 한다. 엔메바라게시에서 아들 아가로 넘어가려면 900년 뒤에 쓰인 목록과 문학 텍스트를 믿어야 한다. 아가에서 길가메시로 넘어가려면 그 문학 텍스트가 실제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고리가 세 개이고 각 고리마다 추정이 하나씩 들어간다. 이 사슬로 얻어지는 결론은 우루크에 길가메시라는 이름의 왕이 있었을 개연성이 있다 정도이며, 학계가 말할 수 있는 최대치도 그 언저리에 머문다.

우루크 성벽을 놓고 보면 어긋남이 한 번 더 나온다. 서사시는 성벽 축조를 길가메시의 업적으로 못 박는다. 오늘날 와르카라 불리는 우루크 유적에서 독일 조사단이 확인한 성벽은 둘레가 9킬로미터 남짓이다. 지표를 파지 않고 지자기 이상을 측정하는 자기 탐사 방식으로 도시 전역을 훑은 근래의 조사는 555헥타르의 시가지를 두께 8미터에서 25미터의 성벽이 둘렀다고 보고했다. 탐사 범위와 판독 기준에 따라 둘레 추정치는 11킬로미터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이 방식은 구조물의 평면 배치를 알려 줄 뿐 축조 시점까지 알려 주지는 않으므로, 연대는 별도의 층위 발굴에 기댄다. 문제는 연대다. 발굴자들은 이 성벽의 축조를 기원전 3000년 무렵으로 잡는다. 초기 왕조 시대 초입으로 보는 견해까지 고려해도 길가메시의 전통적 재위 시기보다 앞선다. 서사시가 그의 업적으로 기록한 구조물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서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억이 전해진 흔적이라기보다 사후의 귀속에 가깝다.

지금 우리가 읽는 길가메시는 우르 제3왕조가 만들었다

실물 증거가 이 정도라면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편이 생산적이다. 길가메시가 살았는지 묻던 자리에 길가메시 이야기가 언제 왜 대량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놓아 본다. 이 질문에는 답이 분명하게 나온다.

기원전 21세기, 우르를 수도로 삼은 우르 제3왕조가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통일했다. 이 왕조의 두 번째 왕 슐기는 재위 기간에 대규모 문학 사업을 벌였다. 그가 스스로를 찬양하도록 지은 왕실 찬가가 수십 편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슐기 O로 분류되는 작품은 길가메시를 슐기의 형제로 부른다. 야코브 클라인이 1976년에 이 찬가 한 편을 판독해 발표하면서 붙인 제목이 「슐기와 길가메시, 두 형제 동료」였다. 이 찬가는 우르의 달신 신전 에키쉬누갈에 길가메시 상을 세우는 행사에 맞추어 지어졌으리라고 추정된다.

이유는 간명하다. 우르 왕가는 남쪽의 신흥 세력이었고, 우루크는 수메르 문명의 오래된 권위를 상징하는 도시였다.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을 조상이자 형제로 끌어들이면 왕권의 정통성이 단숨에 확보된다. 우르남마와 슐기가 루갈반다와 닌순을 자기 부모로 부르는 것도 같은 계산이다. 우리가 길가메시 이야기라고 부르는 수메르어 시편 다섯 편, 즉 「길가메시와 아가」, 「길가메시와 후와와」, 「길가메시와 하늘의 황소」, 「길가메시와 엔키두와 저승」, 「길가메시의 죽음」이 모두 이 시기의 필사본으로 전해진다.

정치적 필요가 낳은 문학이라고 해서 내용이 얄팍하지는 않다. 「길가메시의 죽음」은 이 전통에서 가장 무거운 진술을 담고 있다. 죽어 가는 길가메시가 신들의 회의를 꿈으로 보는 장면에서 다음 구절이 나온다.

kur gal ᵈen-lil₂-le a-a diŋir-re-e-ne-ke₄ … ᵈgilgameš₂ nam-zu nam-lugal-še₃ mu-de₆ , til₃ da-ri₂-še₃ nu-mu-un-de₆

위대한 산 엔릴, 신들의 아버지가 … 길가메시여, 그대의 몫을 왕권으로 정하였으나 영원한 삶으로는 정하지 않았다.

「길가메시의 죽음」 니푸르본 단락 E 12·14행. ETCSL 교정본 c.1.8.1.3(옥스퍼드).

수메르어 nam은 몫, 정해진 자리, 운명을 함께 가리키는 낱말이고 nam-lugal은 왕권을 뜻한다. 같은 동사 de₆를 두 번 써서 한 번은 긍정으로 한 번은 부정으로 배치한 대구가 이 구절의 뼈대다. 몫으로 준 것이 왕권이고, 같은 방식으로 주지 않은 것이 영생이다. 여기서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카드어 서사시에서 길가메시가 불사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은 수메르어 전통이 첫머리에 못 박아 둔 이 판결을 뒤늦게 확인하는 절차에 가깝다.

같은 작품의 메투란 사본에는 그 판결의 나머지 절반이 붙어 있다.

ᵈgilgameš₂ gidim-bi-ta ki-ta ug₅-ga / šagina kur-ra ḫe₂-ak-e palil gidim ḫe₂-nam

죽어 아래 세상의 혼이 된 길가메시, 그를 저승의 총독으로 삼고 혼령들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라.

「길가메시의 죽음」 메투란본 단락 F 38~39행. ETCSL 교정본 c.1.8.1.3(옥스퍼드).

šagina는 우르 제3왕조의 실제 행정 용어로 군사와 행정을 겸한 지방 총독을 가리킨다. 저승의 관직 이름에 당대 관료제의 직함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이 대목은 길가메시 숭배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도 알려 준다. 그는 죽은 자들을 재판하는 저승의 관리로 모셔졌고, 장례 의식과 혼령을 다루는 주문에 불려 나왔다. 인간이 죽은 뒤에 관직을 받아 신의 목록으로 편입되는 순서였다. 왕명록의 서기가 그의 이름 앞에 딩기르 기호를 붙인 배경이 여기에 있다.

표준판에는 편집자의 이름이 붙어 있고 마지막 서판은 부록이다

수메르어 시편들은 독립된 짧은 작품이었다. 이것들이 하나의 긴 아카드어 서사시로 묶인 것은 기원전 18세기 무렵의 고바빌로니아 시대이며, 그 판본은 첫 행을 따서 šūtur eli šarrī, 곧 「모든 왕을 능가하는 이」라고 불렸다. 기원전 2천년기 후반에는 다시 손질을 거쳐 우리가 표준 바빌로니아 판이라 부르는 형태가 자리를 잡았고, 이 판본의 제목은 첫 행 ša naqba īmuru, 곧 「심연을 본 이」다. 아카드어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어를 밀어내고 공용어가 된 셈족 계열 언어다.

이 표준판에는 특이하게도 편집자의 이름이 전해진다. 니네베에서 나온 「텍스트와 저자 목록」이라는 문서가 주요 작품마다 저자를 배정하는데, 길가메시 서사시에 배정된 인물이 신레키운닌니라는 이름의 아시푸, 곧 축귀와 치유를 담당한 사제다. 이 목록은 윌프레드 램버트가 1962년에 판독해 발표했다. 이름의 뜻은 달신 신이 내 기도를 들어 주었다는 정도다. 활동 시기는 기원전 1300년에서 1000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를 저자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가 한 일은 여기저기 흩어진 판본과 삽화를 하나의 12서판 연작으로 정리하고 앞뒤를 맞추는 작업이었다. 현대적 의미의 창작보다 편집과 정본화에 가깝다. 앤드루 조지가 2003년에 낸 두 권짜리 비평 정본이 이 판본의 표준 참조본인데, 사본마다 붙은 기호와 이본 대조표를 보면 하나의 확정된 텍스트라는 관념이 얼마나 사후적인지 드러난다.

편집의 흔적이 가장 노골적으로 남은 자리가 제12서판이다. 제11서판에서 길가메시는 불사의 풀을 잃고 우루크로 돌아와 뱃사공 우르샤나비에게 성벽을 보여 주며 이야기를 닫는다. 서사가 완결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제12서판이 뒤에 더 붙어 있고, 거기서는 제7서판에서 이미 죽은 엔키두가 멀쩡히 살아 있다. 조지는 이 서판이 수메르어 시 「길가메시와 엔키두와 저승」의 뒷부분을 거의 낱말 단위로 옮긴 번역이라고 정리했다. 앞의 11서판이 원전을 자유롭게 재구성한 데 비해 이 서판만 축자역이다. 조지의 정본 제2권 첫머리에는 그 수메르어 원문 100여 행의 판본이 함께 실려 있다.

이 사실은 감상의 방향을 바꾼다. 제12서판은 길가메시를 저승의 재판관으로 모시던 숭배 전통이 문학 텍스트 안으로 밀고 들어온 자국에 해당한다. 죽은 자들의 처지를 하나하나 열거하는 그 서판의 내용은 장례 의식에서 쓰였을 법한 지식이다. 서사시의 완결성을 기준 삼으면 이물질이지만, 텍스트가 어떤 사회적 기능 속에서 굴러다녔는지를 기준 삼으면 가장 정직한 증거에 해당한다.

2014년에 삼나무 숲은 황무지가 되었다

2011년 말,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 관할의 술라이마니야 박물관이 점토판 80점 남짓을 한꺼번에 사들였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 유적의 도굴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이 박물관은 밀수업자가 국외로 넘기기 전에 값을 치르고 유물을 가로채는 방침을 세워 두고 있었다. 출처를 묻지 않는 조건이었다. 그 더미에 섞여 있던 조각 하나를 파루크 알라위가 확인했고, 앤드루 조지와 함께 닷새에 걸쳐 판독한 결과를 2014년 『쐐기문자 연구지』에 실었다. 유물 번호는 T.1447, 높이 11센티미터, 폭 9.5센티미터의 신바빌로니아 시대 필사본이다.

이 조각은 표준판 제5서판의 결락을 메웠다. 제5서판은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삼나무 숲에 들어가 수호자 훔바바를 죽이고 나무를 베어 머리를 전리품으로 들고 돌아오는 대목이다. 새 사본으로 복원된 본문은 이전보다 약 20행이 길어졌고, 늘어난 부분이 이야기의 무게중심을 옮겼다.

먼저 숲의 묘사가 달라졌다. 고요한 성역으로 상상되던 삼나무 숲이 원숭이가 떠들고 매미가 합창하고 온갖 새가 울어 대는 밀림으로 나타난다. 훔바바도 달라졌다. 이국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즐기는 궁정의 통치자에 가깝게 그려진다. 그리고 살해와 벌목이 끝난 뒤 엔키두가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ana] tušār ništakan qišta

우리는 숲을 황무지로 만들어 놓았다.

표준 바빌로니아 판 제5서판 303행. Farouk N. H. Al-Rawi & Andrew R. George, “Back to the Cedar Forest,” Journal of Cuneiform Studies 66(2014), 74쪽.

이어 엔키두는 고향에 돌아갔을 때 엔릴이 던질 질문을 미리 그려 본다. 너희의 그 분노가 무엇이기에 숲을 짓밟았느냐고 묻는 목소리다. 조지는 고대 시가에서 이런 종류의 자각이 드물다고 짚었다. 논문 한 편으로 오래된 텍스트의 윤리적 무게중심이 옮겨졌다.

다만 이 대목을 현대적 환경 서사로 곧장 옮겨 읽는 데는 제동이 필요하다. 텍스트가 말하는 잘못은 엔릴이 지정한 영역을 침범한 오만이다. 숲의 수호자를 세워 인간을 두렵게 만든 것이 엔릴의 조치였다는 설정이 앞에 깔려 있다. 결과적으로 오늘의 독자에게 익숙한 후회처럼 읽히지만, 그 후회를 떠받치는 논리는 신의 질서에 대한 침범이다. 두 논리가 겹쳐 보이는 지점에서 겹침의 폭을 정확히 재는 일이 해석의 몫으로 남는다.

텍스트가 계속 자라는 추세는 그 뒤로도 이어진다.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의 엔리케 히메네스가 이끄는 전자 바빌로니아 도서관(eBL) 사업은 흩어진 쐐기문자 조각을 디지털로 촬영해 문자열 정렬 알고리즘으로 짝을 찾아 준다. 2023년 공개 시점에 데이터베이스에 쌓인 조각이 2만 2000점을 넘었고, 새로 확인된 길가메시 사본 가운데는 기원전 130년에 필사된 것도 들어 있다. 셀레우코스 시대 사람들이 여전히 이 시를 베끼고 있었다는 뜻이다.

복원의 재료가 약탈품이라는 문제

여기서 불편한 사실을 하나 짚어야 한다. 지난 20년간 길가메시 텍스트를 늘린 두 건의 사례가 모두 도굴과 밀거래의 경로를 거쳐 나왔다는 점이다.

술라이마니야 서판은 앞서 본 대로 박물관이 밀수업자에게 값을 치르고 확보했다. 출처를 묻지 않는 대가로 국외 유출을 막았고, 그 덕에 20행이 학계에 돌아왔다. 어느 유적의 어느 층에서 나왔는지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길가메시 꿈 서판이다. 길가메시가 어머니에게 꿈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적힌 15센티미터 남짓한 고바빌로니아 시대 점토판으로, 미국 법무부의 설명에 따르면 이라크에서 반출된 뒤 2003년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불법 반입되었다. 흙에 덮여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가 세척 과정에서 정체가 드러났다. 2007년에는 1981년 경매에서 청동 파편 상자와 함께 구입했다는 허위 출처 증명서가 붙었고, 여러 손을 거쳐 런던의 경매사로 돌아간 뒤 2014년 공예용품 유통업체 하비 라비가 160만 달러 이상을 치르고 사들였다. 워싱턴의 성서박물관에 전시되던 이 유물을 미국 국토안보수사국이 2019년 압수했고, 뉴욕 동부지법이 2021년 7월 몰수를 승인했다. 같은 해 9월 워싱턴에서 반환식이 열렸고 12월 바그다드 외무부에서 이라크 정부에 정식으로 인계되었다.

두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구조가 보인다. 학문적 진보와 약탈 시장이 같은 통로를 쓴다. 도굴이 없었다면 술라이마니야 서판은 지금도 땅속에 남아 판독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도굴이 없었다면 그 서판의 출토 맥락도 훼손되지 않았다. 앞에서 본 엔메바라게시의 알라바스터 조각도 출토지 미상이었다는 사실을 여기에 겹쳐 두면, 실존 논증과 텍스트 복원이라는 두 축이 모두 맥락을 잃은 유물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음이 드러난다. 메소포타미아 연구가 다루는 재료의 상당수는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들어온다.

결론 — 실존 여부보다 편집의 이력이 이 텍스트를 읽는 열쇠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을 논지 기준으로 다시 묶으면 세 갈래가 된다.

첫째, 실존을 묻는 질문은 답이 나오되 얻는 것이 적다. 동시대 기록은 한 점도 없고, 논증은 이름 세 글자가 새겨진 출토지 미상의 항아리 조각에서 출발해 세 단계의 추정을 거친다. 도달점은 개연성이 있다는 진술이고 그 이상으로 나아갈 재료가 지금은 없다. 서사시가 그의 업적으로 적은 우루크 성벽은 연대상 그보다 이르다.

둘째, 답이 분명히 나오는 질문이 따로 있다. 이 이야기가 언제 왜 만들어졌는가를 물으면 기원전 21세기 우르 제3왕조의 정통성 사업이라는 구체적인 답이 나온다. 슐기는 우루크의 옛 왕을 형제로 삼아 왕권을 정당화했고, 그 사업의 산물로 수메르어 시편들이 필사되었다. 죽음을 다루는 이 전통의 핵심 명제는 그때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왕권은 주되 영생은 주지 않는다는 판결, 그리고 죽은 자를 재판하는 저승 관리라는 사후의 직책이 그 명제를 이룬다.

셋째, 이 텍스트는 닫힌 적이 없다. 수메르어 시편에서 고바빌로니아 통합본으로, 다시 신레키운닌니의 12서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문헌은 계속 재편되었다. 마지막 서판은 축자 번역 부록으로 붙었고, 2014년에는 20행이 더해지면서 벌목 장면의 윤리적 색채가 바뀌었으며, 디지털 조각 대조 사업은 지금도 새 사본을 붙이고 있다. 판본이 확정되지 않은 작품을 두고 원본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묻는 일은 성립하기 어렵다.

남는 물음은 판본의 유동성을 감수하고도 이 시가 2000년 가까이 아카드어와 후르리어와 히타이트어로 옮겨지며 살아남은 이유다. 여기에 대해서는 텍스트 자체가 한 가지 실마리를 준다. 이 작품은 왕의 실패를 기록한다. 주인공은 친구를 잃고, 불사를 구하러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며, 마지막에 남는 것은 성벽뿐이다. 그 성벽조차 실제로는 그가 쌓은 것이 아닐 공산이 크다. 자기 이름으로 남은 유일한 물건마저 실은 물려받은 것이었다는 사정은, 이 시가 처음부터 다루려 한 주제와 우연히도 정확히 겹친다.

앞으로 확인될 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디지털 대조 사업이 어디까지 텍스트를 늘릴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 남부의 발굴이 재개되어 초기 왕조 시대의 우루크에서 동시대 명문이 나올 것인가다. 두 번째가 실현되면 실존 논의의 지형이 처음으로 바뀐다. 그때까지 길가메시는 실재했을지도 모르는 이름 하나와 그 이름 위에 2000년 가까이 쌓인 문서 더미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