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계통
전력망에 관한 질문과 답 — 발전 설비가 회전체에서 인버터로 바뀌며 달라진 것
전기가 모자라느냐는 오래된 질문이다. 지금 전력망이 마주한 질문은 다르다. 전기를 만드는 장치가 회전하는 쇳덩이에서 소프트웨어로 제어되는 인버터로 바뀌면서, 계통이 사고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계산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게 됐다.
1전기는 담아둘 수 없다 — 전력망이라는 물건이 존재하는 이유
전력망을 둘러싼 거의 모든 어려움은 한 가지 성질에서 나온다. 만든 전기를 그 상태로 쌓아둘 수 없다. 이 제약을 짚고 시작하지 않으면 뒤에 나올 이야기가 따로 노는 사실의 나열이 된다.
전기는 왜 저장이 안 됩니까? 열도 위치 에너지도 다 저장되잖아요.
저장이 안 된다기보다, 전기라는 형태 그대로는 담아둘 그릇이 없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열은 보온병에 가두면 되고 위치 에너지는 물을 높은 곳에 올려두면 된다. 그런데 전기는 도선을 따라 흐르는 전하의 움직임이다. 움직임 자체를 병에 담을 수는 없다.
그래서 배터리는 전기를 담는 장치가 아니다. 전기를 화학 반응으로 바꿔 넣어두었다가 다시 꺼내는 장치다. 양수발전소는 남는 전기로 물을 위로 퍼올렸다가 필요할 때 떨어뜨린다. 모두 다른 형태로 변환하는 과정이고,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손실이 난다.
이 한 가지 성질 때문에 전력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담아둘 수 없으니 만드는 즉시 써야 하고, 그러려면 전국이 하나로 묶여 실시간으로 맞춰져야 한다. 생산과 소비가 초 단위로 같아야 하는 산업은 전기 말고 찾기 어렵다.
전력망이 지금 건강한지 아닌지는 무엇을 보고 압니까?
숫자 하나면 된다. 주파수다.
콘센트에 들어오는 전기는 1초에 60번 방향이 바뀐다. 이것을 60헤르츠라고 부르고, 전국의 모든 발전기가 이 하나의 박자에 맞춰 돈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전기는 쌓아둘 수 없으므로, 지금 이 순간 만드는 양과 쓰는 양이 항상 같아야 한다. 그 균형이 깨지면 곧바로 박자에 나타난다. 전기가 남으면 발전기가 가벼워져 빨라지고, 모자라면 무거워져 느려진다.
그래서 주파수는 전력망의 신호등이다. 한국전력은 국내 계통의 주파수 유지율을 99.9%로, 규정전압 유지율을 99.99%로 공표하고 있다. 관리 목표는 60헤르츠에서 위아래 0.2헤르츠 안이다. 이 박자를 얼마나 흔들림 없이 지키느냐가 그 나라 전력망의 실력을 보여준다.
60헤르츠라는 숫자는 어디서 온 겁니까? 왜 하필 60인가요?
물리 법칙에서 나온 숫자가 아니다. 19세기 말 제조사들의 선택이 굳어진 결과다.
미국 웨스팅하우스는 초기 조명용 계통을 133사이클로 운영했다. 조명만 켜던 시절에는 주파수가 높아도 상관없었고, 오히려 변압기를 작게 만들 수 있어 유리했다. 그런데 니콜라 테슬라의 다상 유도전동기 특허를 1888년에 사들이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전동기는 주파수가 높으면 제대로 돌지 않는다. 조명과 전동기를 같은 전선에서 함께 쓸 수 있는 하나의 숫자를 찾다가 1891년 무렵 60사이클로 수렴했다. 등이 깜빡이지 않을 만큼 높고 전동기가 제대로 돌 만큼 낮은 지점이었을 뿐, 수학적으로 최적인 값은 아니었다.
유럽의 숫자는 독일에서 나왔다. 1890년대 초 아에게(AEG)가 50사이클을 표준으로 삼았고, 중부 유럽 전기설비 제조에서 독점에 가까운 위치였던 만큼 대륙 전체의 답이 그것으로 정해졌다. 한국은 미국식 계통을 받아들여 60헤르츠를 쓴다.
이 선택이 되돌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일본이다. 메이지 시대에 관동 지역은 독일제 50헤르츠 발전기를, 관서 지역은 미국제 60헤르츠 발전기를 들여왔고, 지금까지 한 나라 안에서 두 가지 주파수가 공존한다. 경계는 대체로 니가타현 이토이가와와 시즈오카현 후지카와를 잇는 선이다. 두 계통 사이에 전기를 주고받으려면 주파수변환소를 거쳐야 하는데, 1965년 사쿠마를 시작으로 신시나노·히가시시미즈·미나미후쿠미쓰가 지어졌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 동쪽 발전소가 대거 멈췄을 때, 서쪽에서 전기를 보내려 해도 변환 설비 용량이 병목이 되어 계획정전을 피하지 못했다. 도쿄전력과 주부전력은 2021년 히다 변환소 신설과 신시나노 증설로 동서 연계 용량을 1,200메가와트에서 2,100메가와트로 늘렸다.
스위치를 켜면 전기가 곧바로 오는데, 전기는 얼마나 빨리 흐릅니까?
불이 켜지는 것은 거의 즉시다. 그런데 전자가 그 속도로 달려간 것은 아니다.
전선 안의 전자는 느리다. 단면적 1제곱밀리미터짜리 구리 도선에 10암페어가 흐를 때 전자가 밀려가는 속도는 초당 0.5밀리미터 남짓이다. 시간으로 환산하면 두 시간에 4미터쯤 간다. 달팽이보다 느리다.
더 이상한 것은 우리가 쓰는 전기가 교류라는 점이다. 방향이 1초에 60번 바뀌므로 전자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다. 제자리에서 조금씩 떨 뿐이다. 같은 조건에서 그 떠는 폭을 계산하면 2마이크로미터 안팎이 나온다. 머리카락 굵기의 수십 분의 1이다.
그러면 발전소의 에너지는 무엇이 나르는가. 전선 안의 전자가 아니라 전선 둘레의 전자기장이 나른다. 전선은 그 장이 어디로 갈지를 잡아주는 길잡이에 가깝다. 장이 빛의 속도에 가깝게 퍼지기 때문에 스위치를 켜면 불이 바로 켜진다. 이 구분은 뒤에 나올 이야기와도 닿아 있다. 전력망에서 정작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장과 신호이고, 그래서 사고도 사람이 반응할 수 없는 시간 척도에서 벌어진다.
다른 나라는 다 110볼트를 쓰는데 한국은 왜 220볼트입니까?
질문의 전제가 반대다. 전 세계 대부분이 220에서 240볼트를 쓴다. 유럽도 중국도 그렇고, 110볼트대를 쓰는 곳은 미국과 일본 정도다.
한국도 원래 낮은 전압이었다. 한국전력은 1973년부터 승압 사업을 시작해 2005년 10월에 마무리했다. 32년이 걸렸고, 누적 투자비 1조 4천억원에 연인원 757만명이 투입됐으며, 전국 1,753만 가구의 배선과 콘센트를 바꿨다. 전압을 올리면 같은 전력을 보낼 때 전류가 절반으로 줄고, 전선에서 열로 새는 손실은 전류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4분의 1이 된다. 한국전력은 이 사업으로 사용 단계 손실을 75% 줄였고 연간 40억킬로와트시의 손실을 절감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 사업이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전압 자체보다 시점에 있다. 이미 설비가 촘촘히 깔린 나라는 이런 전환을 시도조차 하기 어렵다. 뒤에서 다룰 재생에너지 수용 문제도 성격이 같다.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깔린 것을 바꾸는 비용 때문에 어려워진다.
2재생에너지가 바꾼 것은 발전량이 아니라 전기의 성질이다
재생에너지의 문제라고 하면 대개 날씨 이야기가 먼저 나온다. 발전량이 들쭉날쭉하다는 지적이다. 맞는 말이지만 계통 쪽에서 더 무겁게 보는 것은 따로 있다. 같은 1메가와트라도 그것을 만들어 내보내는 장치가 무엇이냐에 따라 전기의 성질이 다르다.
재생에너지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한국은 어디에 몰려 있습니까?
크게 태양광, 풍력, 수력, 바이오, 지열, 그리고 바다를 쓰는 조력과 파력으로 나눈다. 한국은 이 가운데 태양광과 풍력이 대부분이다. 땅이 좁고 화산지대가 아니어서 지열을 크게 쓰기 어렵고, 큰 강에 댐을 더 짓기도 어렵다. 해와 바람 두 가지에 기대고 있다.
규모를 감으로 잡아 보면 이렇다. 한국에너지공단 재생에너지 클라우드플랫폼 집계로, 신재생에너지 공급의무화 제도에 등록된 태양광 발전소는 2025년까지 누적 193,548개소다. 전북이 36,324개소로 가장 많고 경북 30,880개소, 전남 26,643개소가 뒤를 잇는다. 서울은 547개소뿐이다. 발전소가 어디에 몰려 있는지, 전기를 쓰는 곳이 어디인지가 이 숫자에 그대로 드러난다.
재생에너지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널리 알려진 것,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바뀐다는 점이다.
둘째는 전기의 품질이다. 화력이나 원자력 발전소 안에서는 수십 톤짜리 회전체가 돌고 있다. 사고가 나면 이 쇳덩이가 자기 회전 에너지를 내놓으면서 계통이 무너지는 속도를 늦춘다. 자전거 바퀴가 빨리 돌 때 옆에서 툭 쳐도 넘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태양광에는 도는 부품이 없다.
셋째는 위치다. 태양광과 풍력은 땅이 넓은 지방에 몰려 있는데 전기를 많이 쓰는 곳은 수도권이다. 한국전력 자료를 인용한 2024년 국회 자료를 보면 2023년 기준 서울의 발전량은 5.1테라와트시인데 소비량은 49.2테라와트시로, 전력자급률이 10%다. 경기도는 62%, 인천은 186%다. 발전소는 몇 년이면 짓지만 송전선은 훨씬 오래 걸린다.
전력망 연구자가 가장 싫어하는 날씨는 언제입니까?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는 날도 반갑지 않다. 태양광 출력이 몇 분 사이에 오르내린다. 그런데 정작 까다로운 날은 따로 있다. 봄가을의 맑고 선선한 휴일 낮이다.
날이 맑으니 태양광은 최대로 쏟아지는데, 덥지도 춥지도 않으니 냉난방을 쓰지 않는다. 휴일이라 공장도 쉰다. 만드는 것은 많고 쓸 데가 없다.
전기가 모자랄 때는 손쓸 방법이 여럿이다. 발전기를 더 돌리고, 정 안 되면 지역별로 순번을 정해 잠깐씩 끊는 방법까지 있다. 그런데 남을 때는 내릴 것이 마땅치 않다. 원자력이나 석탄은 출력을 함부로 낮추지 못하고, 한번 낮추면 다시 올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결국 멀쩡히 발전하는 태양광을 강제로 끄게 된다. 주파수가 신호등이라고 했는데, 이런 날이 바로 그 박자가 위로 뜨는 날이다.
태양광이 발전하지 못하는 밤에는 어디서 전기를 얻습니까?
세 가지로 메운다. 원자력이나 가스처럼 밤에도 도는 발전소, 낮에 배터리에 담아둔 전기, 그리고 수요 자체를 옮기는 방법이다.
다만 요즘 계통 운영에서 가장 까다로운 시간은 밤이 아니라 해질녘이다. 태양광은 빠르게 줄어드는데 사람들은 퇴근해 집에 오면서 냉난방을 켠다. 공급이 내려가는 것과 수요가 올라가는 것이 동시에 벌어진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2025년 12월 겨울철 전력수급 대책에서 최대 수요를 88.8기가와트에서 94.5기가와트 사이로 잡으면서 두 시나리오를 나눈 기준도 태양광 이용률이었다. 21%로 볼 때가 낮은 쪽, 서해안에 눈이 내려 14%로 떨어질 때가 높은 쪽이다. 수요 예측이 이미 날씨 예측의 일부가 되어 있다.
태양이 사라지면 전력망은 어떻게 됩니까?
전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인류가 끝난다. 8분 뒤 어두워지고, 며칠 만에 기온이 영하 수십 도로 떨어지고, 광합성이 멈추면서 먹이사슬이 무너진다.
전력망만 놓고 보면 태양광은 즉시 0이 되고 풍력도 오래 가지 못한다. 바람은 태양이 지구를 고르지 않게 데워서 생기는 것이라, 온도차가 사라지면 바람도 멈춘다. 수력도 마찬가지다. 물이 증발해 비가 되어야 강이 흐르는데 그 순환을 태양이 돌린다. 남는 것은 원자력과 지열뿐이다. 둘 다 태양과 무관한 에너지원이다.
부질없어 보이는 가정이지만 정리해 보면 한 가지가 드러난다. 지금 재생에너지라고 부르는 것의 대부분은 태양 에너지를 다른 경로로 받아 쓰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3관성이 줄어드는 것과 계통이 위험해지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회전체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는 재생에너지 논의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기술적 우려다. 그런데 이 우려가 성립하려면 조용히 전제되는 것이 하나 있다. 계통에 필요한 관성의 양이 정해져 있다는 전제다. 그 전제가 흔들리는 지점이 이 절의 내용이다.
회전체가 사라지면 왜 그렇게 위험합니까?
시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회전체가 있는 계통에서는 사고가 나도 물리 법칙이 몇 초를 벌어준다. 쇳덩이가 자기 회전 에너지를 내놓으면서 천천히 느려진다. 미국 국립재생에너지연구소가 2020년에 낸 보고서 『Inertia and the Power Grid: A Guide Without the Spin』(NREL/TP-6A20-73856, 폴 덴홀름 외)은 이 몇 초를, 발전소의 기계식 제어 장치가 고장을 감지하고 반응할 시간을 벌어주는 임시 응답으로 설명한다. 그 몇 초 안에 보호장치가 동작하고 사람이 판단할 수 있었다.
인버터로 바뀌면 그 완충재가 없다. 태양광 패널이 만든 직류를 반도체 스위치가 초당 수천 번 켰다 끄면서 교류 파형을 만드는데, 이 과정 어디에도 회전하는 질량이 없다.
인버터가 소프트웨어로 관성을 흉내 낼 수는 없습니까?
할 수 있다. 계통추종형(grid-following)이 아니라 계통형성형(grid-forming) 제어를 쓰면 인버터가 스스로 전압 위상을 세우고, 주파수가 흔들릴 때 관성처럼 반응한다. 북미전력신뢰도협의회(NERC)가 낸 계통형성형 인버터 백서와 미국 에너지부가 2023년에 낸 사양 문서는 이 기술이 배터리 저장장치와 풍력·태양광에서 이미 시험되고 있고, 계통 강도가 약한 곳에서의 안정 운전과 블랙스타트까지 실증됐다고 정리한다.
다만 흉내와 진짜는 성격이 다르다. 회전체의 관성은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나오는 물리 현상이고 반응 시간이 0이다. 소프트웨어는 감지하고 계산하고 명령해야 하므로 아무리 빨라도 시간이 걸리고, 설정값이 어긋나면 오히려 계통을 더 흔들 수 있다. 인버터는 또 전압원처럼 동작하기 때문에 사고 전류를 직접 제한하지 못한다는 문제도 남는다.
그러면 관성이 줄어드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고 봐야 합니까?
여기서 통념이 한 번 뒤집힌다. 앞의 NREL 보고서는 인버터 기반 자원이 계통에 두 가지 상반된 효과를 동시에 낸다고 정리한다. 하나는 알려진 대로 계통에 있는 관성의 양을 줄이는 효과다. 다른 하나는 필요한 관성의 양 자체를 줄이는 효과다. 인버터는 주파수 변화에 밀리초 단위로 반응할 수 있으므로, 애초에 몇 초를 벌어줄 필요가 그만큼 적어진다. 보고서는 관성 감소가 미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풍력·태양광·저장장치를 지금보다 훨씬 크게 늘리는 데 의미 있는 기술적·경제적 장벽이 되지는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실제 사례도 있다. 같은 보고서는 미국 3대 계통 가운데 가장 작고 풍력 비중이 높은 텍사스 전력망(ERCOT)이 주파수에 반응하는 부하를 활용하는 등 비용이 낮은 방법으로 관성 감소에 대응해, 순간 풍력 비중 58%를 기록했다고 적는다.
그래서 정확한 문장은 이렇게 된다. 관성이 줄어드는 것이 곧 위험은 아니다. 위험한 것은 어디에 무엇을 얼마나 넣어야 그 계통이 버티는지를 모른 채 설비만 늘리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답은 계통마다 다르고, 계산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4이베리아 정전의 원인은 재생에너지가 아니라 전압 제어였다
앞 절이 계산해 보기 전에는 모른다는 말로 끝났다면, 실제로 계산이 못 따라간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 사건이 2025년 봄 유럽에서 있었다.
서울의 주요 변전소 한 곳이 멈추면 어떻게 됩니까?
한 곳 멈추는 것으로는 꺼지지 않는다. 그렇게 설계해 두었기 때문이다.
전력망은 어느 한 곳이 고장 나도 나머지가 그 몫을 받아내도록 만든다. 변전소 한 곳이 멈추면 주변으로 전기가 돌아서 간다. 대부분의 시민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문제는 여러 곳이 동시에, 그것도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시간에 멈출 때다. 그때는 돌아갈 길이 없어진다. 미리 계산해 두는 것이 그래서다.
도시 전체가 정전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납니까?
일어난다. 2025년 4월 28일 정오 무렵 스페인과 포르투갈 본토 전역이 통째로 정전됐다. 이베리아 계통은 유럽 대륙 계통에서 분리됐고, 복구에는 12시간에서 16시간이 걸렸다. 2003년에는 미국 동북부와 캐나다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은 드물게 일어나도록 설계하고 관리한다. 확률을 0으로 만들 수는 없으므로, 대신 얼마나 빨리 되살리느냐를 같이 준비한다.
이베리아 정전의 원인은 결국 무엇으로 밝혀졌습니까?
유럽 송전계통운영자연합회(ENTSO-E)는 2026년 3월 20일 전문가 패널의 최종 보고서를 공개했다. 송전계통운영자, 지역조정센터, 유럽에너지규제협력청(ACER), 각국 규제기관에서 온 49명이 참여했고, 사고와 무관한 두 나라 운영자의 전문가가 의장을 맡았다.
보고서는 여러 요인이 서로 작용한 결과라고 결론지었다. 진동, 전압과 무효전력 제어의 공백, 나라마다 다른 전압 규제 관행, 스페인 쪽의 급격한 출력 감소와 발전기 탈락, 고르지 않은 안정화 능력이 겹쳤다. 이 요인들이 빠른 전압 상승을 낳았고, 발전기가 연쇄적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계통이 무너졌다. 국제 전력계통 운영자 협의체 GO15가 정리한 바로는 국지 진동은 0.63헤르츠, 지역 간 진동은 0.2헤르츠 대역이었다.
사고 원인을 재생에너지로 돌리는 해석에 대해 ENTSO-E 의장 다미안 코르티나스는 최종 보고서 발표 자리에서 문제는 발전원의 종류가 아니라 전압 제어이며, 이는 발전원과 무관하게 성립한다는 취지로 답했다. 다만 보고서는 태양광 인버터 제조사에서 받은 자료에서 4월 28일 특정 구간에 다수의 인버터가 과전압으로 탈락했다는 사실도 확인했고, 계통 운영자가 관측하지 못하는 태양광 설비의 재접속 시간이 발전 손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적었다. 패널은 이 부분을 깊이 조사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제조사에서 받은 자료가 전체 설비 가운데 어느 범위를 덮는지는 보고서에 명시돼 있지 않고, 패널은 배전계통운영자·인버터 제조사와의 정보 교환을 이어가겠다고 적었다.
이 자기 고백이 사고 보고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계통 운영자가 관측하지 못하는 설비가 이미 계통 거동을 좌우할 만큼 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2025년 6월 12일 운영절차 7.4를 개정해 재생에너지가 전압 제어에 기여하도록 했고, 전면 시행은 2026년 3월 17일에 마무리됐다.
"관측되지 않는 설비"가 왜 문제인가 계통 운영자의 감시 체계는 송전망에 붙은 대형 설비를 보도록 설계됐다. 배전망 말단에 붙은 옥상 태양광 수만 대는 개별로 보이지 않는다. 평소에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사고가 나서 전압이 흔들리면, 보이지 않던 설비가 각자의 보호 설정에 따라 한꺼번에 떨어져 나간다. 운영자 입장에서는 원인 모를 발전 손실이 갑자기 생긴다. 재접속 시간도 마찬가지다. 언제 얼마나 돌아올지 모르는 발전량은 복구 계획을 세우기 어렵게 만든다.
재생에너지가 늘면서 예전에 없던 문제가 생겼다면 무엇입니까?
현장에서는 세 가지를 든다.
첫째는 진동이다. 인버터는 저마다 계통 상태를 읽고 반응하는데, 수천 대가 서로의 반응을 다시 읽으면서 주고받다가 흔들림이 점점 커진다. 사람이 많은 다리에서 발걸음이 우연히 맞아떨어지면 다리가 출렁이는 것과 비슷하다. 이베리아 사고에서 관측된 0.63헤르츠 진동이 이 범주다.
둘째는 고조파다. 인버터는 반도체를 아주 빠르게 켰다 껐다 해서 교류를 만들기 때문에 파형이 완전히 매끈하지 않다. 이 찌꺼기가 수만 대분 모이면 설비를 뜨겁게 하고 수명을 깎는다.
셋째가 전압 제어 실패이고, 이것이 이베리아 정전에서 확인된 바로 그 문제다.
세 가지의 공통점은 시간 척도다. 모두 100만분의 1초에서 1000분의 1초 사이에 벌어진다. 발전기의 회전 속도만 따라가는 기존 해석 방식으로는 아예 보이지 않는 구간이다. 그래서 전력계통 해석 도구가 다시 문제가 된다.
5제주 출력제어 181회가 0회가 된 이유, 그리고 그 0이 뜻하지 않는 것
재생에너지가 늘어나면 무조건 좋은 것 아닙니까?
방향은 맞다. 반대하는 전력 엔지니어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발전소를 짓는 속도와 계통이 그것을 받아낼 준비가 되는 속도가 같이 가야 한다. 태양광 발전소는 몇 년이면 짓는데 송전선은 훨씬 오래 걸린다. 그러면 만들어 놓고도 못 쓰는 전기가 생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제주가 그랬다. 계통이 받아내지 못해 발전을 강제로 멈추는 것을 출력제어라고 하는데, 제주에서 2015년 풍력을 대상으로 3회 발생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2018년 15회, 2019년 46회, 2020년 77회로 늘었고, 2021년부터는 태양광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2022년 132회, 2023년에는 181회로 최고치를 찍었다. 2023년 내역은 풍력 117회, 태양광 64회였고 출력제어율은 3.04%였다.
여기까지가 널리 인용되는 숫자다. 그런데 그 뒤가 다르다. 2024년에는 83회로 줄었고, 2025년에는 0회였다. 제주도 집계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된 겁니까?
제도가 바뀌었다. 2024년 6월부터 제주에서 전력시장 제도개선 시범사업이 시작되면서, 기존의 하루 전 현물시장에 더해 15분 단위 실시간 시장이 함께 돌아가게 됐다. 전날 짜둔 계획보다 많이 생산된 전력을 당일 실시간 시장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강제로 발전을 멈출 일이 그만큼 줄었다.
다만 0이라는 숫자를 그대로 받기는 어렵다. 도내 환경단체 등은 실시간 시장 도입으로 사업자가 입찰로 전력을 파는 구조가 됐고, 입찰에서 떨어진 사업자는 팔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발전을 멈춘다고 지적한다. 전력거래소의 강제 지시가 없을 뿐 결과는 같은데 통계에는 0으로 잡힌다고 본다. 낮은 가격으로 입찰에 나서면서 개별 사업자의 부담이 커진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여기서 숫자 하나가 무엇을 재는지가 드러난다. 출력제어 횟수는 계통이 얼마나 여유로운지를 재는 지표가 아니라 운영자가 강제 지시를 몇 번 내렸는지를 재는 지표다. 제도를 바꾸면 같은 물리적 상황에서도 숫자가 0이 될 수 있다. 3회에서 181회로 늘어난 곡선을 인용하는 자리라면 그 뒤의 0도 함께 인용해야 하고, 0을 인용하는 자리라면 그것이 무엇을 세는 숫자인지도 같이 말해야 한다.
우리 지역에 태양광을 얼마나 더 지어도 되느냐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합니까?
현장에서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고, 생각보다 답하기 어렵다. 도로에 비유하면 차선이 몇 개니까 차 몇 대까지 들어가도 된다는 식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어느 시간대인지, 어디에 몰리는지, 사고가 났을 때 우회로가 있는지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이 수용 능력을 전문 용어로 호스팅 캐패시티(hosting capacity)라고 부른다. 어느 지역이 몇 메가와트까지 더 받아줄 수 있는지, 지금 출력제어가 걸리는 이유가 선로가 좁아서인지 계통이 흔들려서인지, 무엇을 손보면 얼마나 더 받을 수 있는지를 숫자로 내놓는 작업이다. 무작정 짓지도 무작정 막지도 않으려면 그 숫자가 있어야 한다.
요즘은 여기에 전기차까지 넣고 본다. 전기차 배터리에서 전력망으로 전기를 되돌려 보내는 기술이 몇 퍼센트나 참여하느냐에 따라 그 지역이 받아줄 수 있는 태양광의 양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가 늘면 전기요금은 오릅니까, 내립니까?
영향은 있는데 방향이 하나가 아니다.
태양광 패널 자체는 지난 10여 년 사이 크게 싸졌다. 그 부분만 보면 내려가는 요인이다. 반대로 날씨에 따라 들쭉날쭉한 발전을 받아내려면 송전선을 더 깔아야 하고, 배터리도 필요하고, 안 나올 때 대신 돌 발전소도 세워둬야 한다. 이것은 추가 비용이다. 어느 쪽이 큰지는 나라마다 시기마다 달라서, 한마디로 오른다 내린다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지역 문제가 얹힌다. 전력자급률이 지역마다 크게 다르다 보니 자급률에 따라 요금을 다르게 매기자는 논의가 이어져 왔다. 어떤 형태로 정리되든, 요금 논쟁의 밑바닥에는 앞에서 본 발전소와 소비지의 거리 문제가 깔려 있다.
6문이 몇 개에서 19만 개로 늘었다 — 전력망 사이버보안
인버터로 바뀌면서 생긴 변화는 물리적 성질만이 아니다. 인버터는 소프트웨어로 제어되고, 소프트웨어는 대개 통신에 연결돼 있다. 앞 절에서 본 관측되지 않는 설비 수만 대는 계통 운영자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제조사 서버에는 대체로 보인다.
해킹으로 정전이 날 수 있습니까?
이미 있었다. 2015년 12월 23일 우크라이나에서 배전회사 세 곳이 원격 침투를 당해 정전이 발생했다. 미국 사이버보안·인프라보안국(CISA)이 낸 경보 IR-ALERT-H-16-056-01은 약 22만 5천 고객이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미국 정부는 2021년 7월 이 활동을 러시아 국가 배후 행위자의 소행으로 공식 판단했다.
차단기가 내려간 변전소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전력정보공유분석센터(E-ISAC)와 SANS가 2016년에 낸 공동 보고서를 인용한 자료들은 27곳에서 30곳 안팎으로 적었고, 미국 아이다호국립연구소(INL)가 2022년에 낸 사후 분석 보고서는 50곳이 넘는다고 적었다. 어느 쪽이든 운영자들이 원격 제어권을 되찾지 못해 기술자를 변전소로 보내 손으로 복구해야 했다는 점은 같다. 복구까지 최대 6시간가량 걸렸다.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INL 보고서는 2014년 5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표적형 피싱 메일이 초기 침투 경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공격자는 그 뒤 몇 달에 걸쳐 자격 증명을 모으고 권한을 높여 제어망까지 들어갔다.
10년 전 전력망과 지금 전력망은 무엇이 다릅니까?
그때는 지켜야 할 곳이 변전소 몇십 곳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10년 전 전력망은 성벽 안의 도시에 가까웠다. 외부와 끊긴 전용 통신망으로만 묶여 있어서 들어올 수 있는 문이 몇 개뿐이었다. 지금은 옥상 태양광, 아파트 배터리, 골목 전기차 충전기가 전력망과 실시간으로 대화한다. 앞에서 본 태양광 발전소 193,548개소는 신재생에너지 공급의무화 제도에 잡힌 사업용 설비만 센 것이고, 자가용 설비와 전기차 충전기를 더하면 접점은 그보다 훨씬 많다.
비유에는 한계가 있다. 문이 늘었다는 표현은 각각의 문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실제로 위험한 것은 그 반대다. 같은 제품 수만 대가 같은 방식으로 관리될 때 문 하나를 여는 열쇠가 나머지 전부를 여는 열쇠가 된다. 문의 개수보다 열쇠의 종류가 몇 가지인지가 실제 위험을 결정한다.
국내에는 어떤 대비가 있습니까?
국가정보원과 국가보안기술연구소는 2026년 3월 11일 기후에너지환경부·한국전력·전력거래소 등과 함께 마련한 「지능형 전력망 사이버보안 가이드라인」을 국가사이버안보센터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총 171쪽이고, 지능형 전력망을 이루는 요소 사이의 연계 모델을 제시한 뒤 11가지 세부 연계유형별로 보안위협과 보안대책을 담았다. 정보와 인프라가 부족한 민간 사업자도 현장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가이드라인이 분류한 주요 공격 시나리오는 네 가지다. 태양광·에너지저장장치 같은 소규모 발전 자원을 장악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분산자원 활용 공격, 제어 네트워크에 침투해 감시제어시스템을 마비시켜 실제 정전을 유발하는 배전·송변전 시스템 공격, 수개월간 잠복하며 정보를 모은 뒤 타격하는 지능형 지속 위협 캠페인, 수천만 개의 스마트미터 단말을 오작동시키거나 제어망 침투 경로로 삼는 계량 인프라 공격이다.
네 가지를 관통하는 판단은 보호 대상을 단일 시스템이 아니라 생태계로 정의했다는 점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2025년 4월 보고서 『Energy and AI』에서 인공지능이 동원된 전력회사 대상 공격이 최근 4년 사이 세 배로 늘었다고 지적했다. 집계 대상 기업의 범위와 사건 판정 기준은 함께 공개되지 않아, 절대 건수보다 증가 방향을 읽는 근거로 보는 편이 안전하다.
이런 연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계산합니까?
질문은 하나로 좁혀진다. 태양광 인버터의 몇 퍼센트가 동시에 조작되면 계통이 무너지는가. 10%면 버티는가, 30%면 어떻게 되는가.
이 숫자가 필요한 이유는 보안 예산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부터 지킬지 정하려면 어디가 뚫렸을 때 얼마나 아픈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앞의 가이드라인이 침입을 완전히 막는 대신 뚫려도 무너지지 않는 구조를 강조한 것도 같은 발상이다. 지진을 막을 수 없으니 무너지지 않는 건물을 짓는 내진 설계와 성격이 같다.
실제로 해킹해 볼 수는 없는데 어떻게 알아냅니까?
그래서 시뮬레이터가 필요하다. 컴퓨터 안에 복제해 둔 전력망에서는 인버터 수천 대를 한꺼번에 꺼봐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 자동차 회사가 안전성을 확인할 때 고객이 모는 차를 벽에 박아보지 않고 똑같은 차를 따로 만들어 수백 번 부수는 것과 같다. 전력망은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지을 수 없으니 컴퓨터 안에 짓는다.
우리 집 태양광이나 전기차 충전기도 위험합니까?
개인 집이 표적이 되는 일은 드물다. 한 집을 뚫어서 얻을 것이 없다. 문제는 같은 제품 수만 대가 같은 방식으로 관리될 때다. 개별 집이 아니라 무리가 표적이다.
그래서 사용자가 할 수 있는 일도 단순하다. 전기차 충전기나 태양광 인버터를 고를 때 보안 인증을 확인하고, 펌웨어 업데이트 알림이 오면 미루지 않으며, 기본 비밀번호를 바꿔둔다. 이 세 가지가 시시해 보이는 이유는 개별 가구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수만 대가 같은 기본 비밀번호를 쓰고 있다는 조건이야말로 앞에서 말한 열쇠 하나로 전부를 여는 상황을 만든다.
이런 연구는 한국만 합니까?
재생에너지를 늘리는 나라는 모두 같은 문제를 겪는다. 접점이 늘어나는 것은 기술의 성질이지 특정 국가의 사정이 아니다.
다만 한국은 조건이 다르다. 유럽처럼 이웃 나라와 계통이 연결돼 있지 않아서 문제가 생겨도 밖에서 전기를 빌려올 수 없다. 섬이나 다름없는 계통이다. 이베리아 정전 때 스페인과 연결된 프랑스가 경미한 정전만 겪었다는 사실이 이 차이를 보여준다. 연결이 있으면 사고가 번지기도 하지만 완충도 된다. 한국에는 번질 곳도 없고 기댈 곳도 없다.
7계산이 빨라지면 답이 아니라 질문의 개수가 달라진다
전력계통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란 무엇입니까?
전국의 전력망을 컴퓨터 안에 똑같이 만들어 놓고 일부러 사고를 내볼 수 있게 하는 도구다. 프로그램을 쓰는 일과 프로그램 자체를 만드는 일은 다른 작업이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후자다.
해석 방식은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발전기 회전자의 움직임처럼 비교적 느린 현상을 다루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전자기 과도현상(electromagnetic transient, EMT) 해석이라 부르는 방식으로 파형 자체를 100만분의 1초 단위로 따라간다. 인버터가 늘기 전에는 앞의 방식으로 충분했다. 4절에서 본 진동·고조파·전압 제어 문제가 모두 뒤의 시간 척도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지금은 뒤의 방식이 필요해졌다.
그러면 왜 그렇게 느립니까?
100만분의 1초 단위로 쪼개서 계산한다는 말은 1초를 보려고 계산을 100만 번 한다는 뜻이다. 대규모 태양광 단지처럼 인버터가 수십, 수백 대 들어간 계통이면 한 번 돌리는 데 하루가 걸리기도 한다. 그런데 필요한 것은 사고 하나가 아니다. 수천 가지 경우의 수다.
속도를 끌어올리는 방법은 여러 갈래로 연구되고 있다. 미국 오크리지국립연구소는 대규모 태양광 단지를 인버터 하나 단위까지 세밀하게 모델링하면서 행렬 분할과 슈어 보수(Schur complement) 기법으로 속도와 수치 안정성을 함께 확보하는 연구를 발표했다. 물리 모델의 계산이 가장 무거운 부분을 신경망으로 대체하는 접근도 있다. 어느 쪽이든 목표는 같다. 같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경우의 수를 물어보려는 것.
한국전기연구원 전력ICT연구센터에서도 대규모 인버터 기반 자원 해석을 겨냥한 고속 전자기 과도해석기 HSEMT를 개발하고 있다. 접근은 빠른 컴퓨터를 사는 것이 아니라 계산 구조를 바꾸는 쪽이다. 손님이 올 때마다 장을 새로 보고 재료를 손질하면 한 시간이 걸리지만, 미리 손질해 냉장고에 넣어두면 5분이면 나온다. 시뮬레이션도 매 순간 같은 계산을 처음부터 다시 하고 있었고, 그것을 한 번만 해두고 계속 쓰도록 구조를 바꾸는 식이다. 이후 단계는 여러 코어를 동시에 쓰는 병렬화, 그래픽처리장치 활용, 그리고 계산 결과를 학습한 인공지능을 얹는 순서로 잡혀 있다. 노리는 대상은 송전망에 통째로 붙기 시작한 수백 메가와트급 태양광·배터리 단지다. 사고가 나기 전에 위험한 조건을 미리 찾아내고, 사고가 난 뒤에는 원인을 되짚는 용도다.
속도 수치를 읽을 때 붙는 조건 전자기 과도해석기의 성능 배수는 조건을 함께 보지 않으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떤 계통을, 시간 간격 얼마로, 몇 초 동안, 몇 개의 코어로 돌렸는지가 모두 배수를 바꾼다. 코어 하나만 쓴 결과와 여러 코어를 쓴 결과, 그래픽처리장치를 붙인 결과는 서로 다른 축의 이야기다. 개발 단계의 도구가 내놓는 수치는 그래서 조건 명세와 함께 읽어야 하고, 다른 도구와 비교하려면 같은 계통·같은 시간 간격에서 재야 한다.
계산이 빨라지면 무엇이 달라집니까?
몇 배 빨라졌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던질 수 있는 질문의 수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대표적인 사고 몇 개만 계산했다면, 이제는 수천 가지를 다 물어볼 수 있다.
기상청이 태풍 경로를 예보할 때 계산을 한 번만 하지 않는 것과 같은 발상이다. 조건을 조금씩 바꾼 수십 개를 동시에 돌려서, 그 결과가 흩어지는 범위가 뉴스에 나오는 부채꼴이 된다. 전력망 해석도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답 하나를 찍는 대신 답이 흩어지는 범위를 내놓는 쪽이다.
컴퓨터로 만든 전력망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습니까?
시뮬레이션에서 가장 아픈 질문이다.
모형은 현실이 아니다. 전력망을 수식으로 옮긴 것이고, 현실에는 수식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늘 남는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는 검증 절차를 무겁게 본다. 실제로 사고가 났던 기록을 넣어 시뮬레이터가 같은 결과를 내는지 맞춰보고, 다른 곳에서 만든 프로그램과 같은 조건으로 돌려 답이 일치하는지도 본다.
그래도 완전히 같아지지는 않는다. 논문에서는 어느 항목이 몇 퍼센트 차이 났는지를 적어두는 것이 규칙이다. 맞았다고만 쓰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안 맞았는지도 같이 쓴다. 앞서 본 이베리아 사고 보고서가 조사하지 못한 대목을 스스로 밝힌 것도 같은 규범이다.
그래서 시뮬레이션은 정답을 준다고 말하지 않는 편이 정확하다. 어떤 조건에서 위험해지는지 방향을 알려준다고 말하는 편이 맞다. 그것만으로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
인공지능이 계산을 대신하면 물리 모델은 필요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순서가 반대다. 물리 모델이 있어야 인공지능을 쓸 수 있다.
인공지능은 배운 것에서 답을 짐작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전력망 사고는 흔하지 않다. 대정전은 수십 년에 몇 번이고, 그마저도 매번 조건이 다르다. 배울 데이터가 없다.
그래서 물리 모델로 수천 가지 상황을 계산해 데이터를 만들고, 그것을 인공지능에게 학습시킨다. 그러면 비슷한 상황에서 답을 즉시 짐작한다. 일기예보가 슈퍼컴퓨터 계산 위에 인공지능을 얹어 빨라진 것과 같은 구조다. 그리고 인공지능이 내놓은 답이 이상해 보일 때 확인하려면 결국 물리 모델로 다시 돌려봐야 한다.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 얹는 것이다.
이 판단이 흔들리려면 조건이 있다. 사고 사례 데이터가 지금보다 훨씬 풍부해지거나, 물리 방정식을 학습 구조 안에 직접 넣은 모델이 검증 절차를 통과할 만큼 정확해지는 경우다. 후자는 이미 연구가 진행 중이다. 물리 정보 신경망으로 위상고정루프 계산을 대체해 4배에서 6배의 속도 향상을 얻었다는 결과가 보고돼 있는데, 풍력 발전기 한 종을 대상으로 특정 계산 구획만 바꾼 조건에서 나온 수치다. 계통 전체를 대체한 결과가 아니라는 뜻이므로, 몇 년 안에 이 답의 무게중심이 옮겨갈 여지는 있어도 지금 옮겨간 것은 아니다.
8수요 쪽에서 오는 변화 — 최대전력, 전기차, 데이터센터
지금까지는 전기를 만드는 쪽 이야기였다. 쓰는 쪽에서도 성격이 바뀌고 있고, 여기서도 널리 인용되는 숫자가 실제로 무엇을 재는지 따져볼 자리가 나온다.
대한민국이 전기를 가장 많이 쓰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한여름 평일 오후, 대체로 4시에서 6시 사이다. 역대 최고 기록은 2024년 8월 20일의 97.1기가와트다. 대형 원자력 발전기 한 기가 1기가와트쯤 되니 그런 발전기 97대분이 동시에 돌아간 셈이다.
겨울에도 봉우리가 한 번 더 있다. 난방 때문이다. 2022년 12월 23일의 94.5기가와트가 겨울철 역대 최고 기록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2026년 여름 최대 수요를 94.1기가와트에서 98.8기가와트로 전망하고 8월 3주차에 107기가와트의 공급능력을 확보했다. 8월 7일 기준 최대 수요는 95.3기가와트였다. 이 글을 쓰는 시점까지 2024년 기록이 깨졌다는 발표는 확인되지 않았다.
한국 전력망의 강점과 약점은 무엇입니까?
강점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잘 꺼지지 않는다. 한국전력이 공표하는 연간 호당 정전시간은 9.05분이고, 2023년 기준으로는 9.29분이다. 한국전력이 제시한 국제 비교로는 미국 44분, 프랑스 49분, 영국 38분이다. 선진국과 견줘 서너 배에서 다섯 배 차이가 난다.
둘째는 주파수다. 60헤르츠에서 위아래 0.2헤르츠 안으로 관리하는데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좁게 움직이고, 주파수 유지율은 99.9%다. 정전이 나지 않는 것보다 이쪽이 더 어렵다. 송배전 손실률 3.53%도 함께 공표된다.
약점은 앞에서 두 번 나왔다. 섬처럼 고립된 계통이라 전기가 모자라도 이웃 나라에서 빌려올 수 없고, 발전지와 소비지가 멀다.
서울은 하루에 전기를 얼마나 씁니까?
한국전력 자료를 인용한 2024년 국회 자료 기준으로 서울의 2023년 연간 소비량은 49.2테라와트시다. 하루 평균으로 나누면 1억 3천만킬로와트시 안팎이다. 대형 원자력 발전기 한 기가 하루에 2400만킬로와트시쯤 만드니, 원전 다섯 기가 하루 종일 돌아야 나오는 양이다.
같은 자료에서 서울의 발전량은 5.1테라와트시로, 자급률이 10%다. 나머지 44.1테라와트시는 다른 지역에서 끌어온다. 앞서 본 서울의 태양광 발전소 547개소라는 숫자와 이 자급률은 같은 이야기의 두 면이다.
전기차가 이렇게 늘어나는데 전력망이 감당이 됩니까?
총량으로 보면 아직 걱정할 수준은 아니다. 문제는 시간이다. 다들 퇴근하고 저녁 7시에 동시에 꽂으면 그때만 수요가 몰린다. 반대로 새벽에는 남아돈다. 그래서 충전 시간을 분산시키는 쪽을 본다.
더 흥미로운 것은 전기차가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주차된 차의 배터리에서 전기를 잠깐 빌려 쓰는 기술을 V2G(vehicle-to-grid, 전기차-전력망 연계)라고 부른다. 한국전력의 분석으로는 10킬로와트급 양방향 충전이 가능한 전기차 10만 대가 동시에 1시간 방전하면 최대 1기가와트 규모의 양수발전이나 대용량 저장장치에 맞먹는 공급 효과가 난다. 대형 발전 설비 한 기에 가까운 규모다.
실증도 시작됐다. 현대자동차그룹은 2026년 7월, 제주에서 아이오닉 9과 기아 EV9을 보유한 일반 고객 40명의 가정에 양방향 충전 인프라 구축을 마치고 시범 서비스를 운영 중이라고 밝혔다. 연구시설이 아닌 실제 고객의 생활 환경에서 전기차와 전력망 사이의 충·방전을 구현한 사례다.
다만 이 기술이 자원이 되려면 수백만 대가 전력망과 통신해야 한다. 6절에서 본 접점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제도도 아직 비어 있다. 전기차가 독립적인 전력시장 참여 자원으로 규정되지 않았고, 누가 전력을 거래하고 정산할지, 배터리 열화 비용을 어떻게 보상할지, 차량과 충전기 사이의 통신·안전 기준을 어떻게 통일할지가 남아 있다.
인공지능 데이터센터가 전기를 엄청나게 먹는다던데 사실입니까?
전력 분야에서 가장 빠르게 커지는 변수인 것은 맞다. 국제에너지기구가 2025년 4월에 낸 『Energy and AI』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를 2024년 약 415테라와트시로 추정하고, 2030년에는 945테라와트시로 두 배 넘게 늘어난다고 전망했다. 945테라와트시는 오늘날 일본 전체 전력 소비량보다 조금 많은 양이다.
데이터센터는 공장과 성격이 다르다. 24시간 거의 일정하게 쓰고, 한 곳에 몰려 있고, 한번 들어서면 수백 메가와트를 한 지점에서 끌어쓴다. 웬만한 도시 하나가 갑자기 생기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어디에 짓느냐가 중요해진다. 전기가 남는 지역에 지으면 송전 부담이 줄고, 수도권에 몰리면 이미 부족한 송전선에 더 얹힌다.
그런데 널리 인용되는 945테라와트시라는 숫자가 무엇을 재는지는 따로 볼 필요가 있다. 같은 보고서를 정리한 카본브리프의 분석에 따르면, 2030년까지 데이터센터가 늘리는 530테라와트시는 같은 기간 전 세계 전력 수요 증가분의 8%에 해당한다. 전기차가 늘리는 838테라와트시, 에어컨이 늘리는 651테라와트시보다 적고, 산업 부문이 늘리는 1,936테라와트시에는 크게 못 미친다. 국제에너지기구도 2030년 데이터센터의 비중을 전 세계 전력 소비의 3% 미만으로 본다.
그러니 데이터센터를 두고 전력 수요 증가의 주범이라고 말하는 것은 총량 기준으로는 정확하지 않다. 계통 쪽에서 데이터센터가 어려운 이유는 총량이 아니라 한 지점에 몰린다는 것이다. 전국 합계에서 8%인 부하가 특정 변전소 한 곳에 500메가와트로 붙으면 그 지역에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총량 논쟁과 입지 논쟁을 섞으면 어느 쪽 대책도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다.
2050년의 전기는 지금과 무엇이 가장 다를까요?
지금은 큰 발전소 몇십 곳이 전국에 전기를 보내는 구조다. 2050년에는 발전 지점이 수백만 곳이 될 것으로 본다. 집집마다 옥상에 태양광이 있고, 지하에 배터리가 있고, 주차장의 전기차도 전기를 넣었다 뺐다 한다. 지금 기름으로 하는 일들도 대부분 전기로 넘어온다. 자동차도 난방도 공장의 열도 그렇다.
한마디로 하면 전력망이 하나의 거대한 기계에서 수백만 개의 작은 장치가 서로 대화하는 네트워크로 바뀐다. 이 글에서 다룬 세 가지 어려움이 모두 여기서 나온다. 대화하는 장치가 늘면 진동이 생기고, 소프트웨어로 제어되니 설정이 문제가 되고, 통신으로 연결되니 공격 표면이 넓어진다.
9전압만으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들
번개나 전기뱀장어로 발전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재미로 나오지만, 답은 하나로 모인다. 전압이라는 숫자 하나로는 아무것도 계산되지 않는다. 계통 해석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가장 쉬운 예이기도 하다.
번개로 에너지를 만들 수 없습니까? 번개는 몇 볼트입니까?
미국 국립기상청은 전형적인 낙뢰를 약 3억 볼트, 약 3만 암페어로 소개한다. 미국 해양대기청은 상층에서 시작하는 양극성 낙뢰의 경우 최대 30만 암페어, 10억 볼트에 이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콘센트가 220볼트이니 100만 배가 넘는다.
그런데 쓸 수 없다. 첫째, 너무 짧다. 낙뢰 한 번의 섬광이 0.2초 정도이고 그 안의 개별 방전은 수 밀리초에 그친다. 둘째, 어디에 칠지 모른다. 발전소는 정해진 자리에 짓는데 번개는 주소가 없다. 셋째, 그만큼 큰 에너지를 그 짧은 순간에 받아낼 장치가 없다.
전압과 전류를 곱한 순간 출력은 테라와트급이 나온다. 그런데 발전은 순간 출력이 아니라 출력과 시간의 곱으로 계산되고, 그 시간이 1000분의 몇 초다. 게다가 그 에너지의 대부분은 전기로 뽑히기 전에 빛과 열과 충격파로 흩어진다. 전압은 세계 최고인데 쓸 수 있는 에너지는 대수롭지 않다.
번개는 왜 지그재그로 칩니까?
공기는 원래 전기가 통하지 않는 물질이다. 그래서 번개는 공기를 억지로 뚫고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공기가 균일하지 않다. 뚫기 쉬운 자리와 어려운 자리가 섞여 있다. 미국 해양대기청의 설명대로 낙뢰는 한 번에 쭉 내려오지 않고 여러 차례 끊어서 나아간다. 앞서 나가는 방전 경로는 수십 미터씩 뻗다가 멈추고, 주변에서 가장 뚫기 쉬운 쪽으로 방향을 틀고, 다시 나아간다. 이것을 반복하니 꺾인 선이 된다. 물이 산에서 내려올 때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것과 같다.
전기뱀장어나 정전기로 발전할 수 있습니까?
전기뱀장어는 오랫동안 한 종으로 알려져 있었다. 2019년 9월 카를로스 다비드 지 산타나가 이끈 연구진이 『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한 논문(DOI 10.1038/s41467-019-11690-z)은 아마존 유역에서 모은 표본 100여 마리를 분석해 세 종으로 나뉜다는 것을 밝혔고, 그중 새로 기재된 Electrophorus voltai에서 860볼트 방전을 현장 측정했다. 그전까지 알려진 최고치는 650볼트였다. 지금까지 측정된 생물 가운데 가장 강한 발전 기록이다.
그런데 볼트만 높고 흐르는 전류가 작으며 지속 시간도 1000분의 몇 초다. 에너지로 따지면 휴대폰 충전도 어렵다. 게다가 먹이를 줘야 한다. 넣은 에너지보다 뽑아내는 전기가 훨씬 적다.
정전기도 사정이 같다. 전압은 수천에서 수만 볼트까지 올라가지만 전하량이 적어 에너지가 거의 없다. 그래서 따끔한 데서 끝난다. 마찰로 전기를 만드는 연구는 있지만 작은 센서를 돌리는 수준이지 집에 불을 켜는 수준은 아니다. 참고로 정전기가 잘 생기는 조건은 사람보다 환경 쪽이 크다. 습도가 높으면 몸에 쌓인 전하가 공기 중 물기를 타고 빠져나가는데, 건조하면 그것이 안 되니 계속 쌓인다.
만화에 나오는 100만 볼트로 도시 전력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질문에 함정이 있다. 볼트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볼트는 전기를 밀어내는 세기다. 수압에 가깝다. 실제로 얼마나 나오는지 알려면 수압에 물줄기 굵기를 곱해야 하고, 거기에 시간을 다시 곱해야 에너지가 된다. 정전기가 수만 볼트인데도 사람이 죽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굳이 규모를 맞춰보면 이렇다. 서울이 하루에 쓰는 전기가 1억 3천만킬로와트시쯤이다. 열 마리로 나누면 한 마리가 1300만킬로와트시를 내야 한다. 대형 원자력 발전기 한 기가 하루에 2400만킬로와트시를 만드니, 한 마리가 원전 반 기 노릇을 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기서도 필요한 것은 전압이 아니라 전력과 시간의 곱이다.
이 절의 질문들이 시시해 보여도 짚고 갈 값어치가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전력망의 어려운 문제도 성격이 같다. 태양광 설비용량이 몇 기가와트라는 숫자 하나로는 그 계통이 버티는지 알 수 없다. 언제, 어디에, 어떤 제어 설정으로 붙어 있는지를 함께 넣고 계산해야 답이 나온다.
가정에서 전기요금을 가장 확실하게 줄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멀티탭을 끄는 것은 효과가 크지 않다. 대기전력은 전체 사용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가정에서 전기를 많이 쓰는 것은 결국 열을 다루는 기기다. 냉난방, 온수, 건조기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조금만 줄여도 멀티탭 100개를 끄는 것보다 낫다. 냉방기기는 껐다 켰다 하는 것이 오히려 손해인 경우가 많다. 인버터 방식은 목표 온도를 맞춘 다음에는 약하게 돌면서 유지하는데, 껐다가 다시 켜면 처음부터 세게 돌려야 한다.
여기서도 앞의 이야기가 반복된다. 요금을 만드는 것은 순간의 세기가 아니라 시간에 걸친 곱이다.
10어디까지 갈 것인가는 계산이 아니라 사회가 정한다
지금까지 나온 질문들은 대부분 계산으로 답이 좁혀지는 것들이었다. 마지막 두 질문은 성격이 다르다. 계산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려줄 뿐, 어디까지 갈지는 정해주지 않는다.
재생에너지 100%는 물리적으로 가능합니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지금 쓰는 방식 그대로는 안 된다.
해가 뜨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며칠씩 이어질 때를 버텨야 하는데, 그만큼을 배터리로 채우려면 양이 감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형태로 저장하거나, 수소처럼 다른 물질로 바꿔놓거나, 이웃 나라와 계통을 연결해 서로 메워주는 방법을 쓴다.
유럽은 세 번째를 쓴다. 나라끼리 연결돼 있어서 독일에 바람이 불지 않으면 프랑스나 노르웨이의 전기를 끌어온다. 한국에는 그 선택지가 없다. 다만 이 대비를 낙관도 비관도 없이 읽으려면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한다. 4절에서 본 대로, 연결돼 있던 이베리아 계통도 전압 제어가 듣지 않자 몇 초 사이에 연쇄 탈락이 진행되며 대륙 계통에서 떨어져 나갔다. 연결은 완충재이지 보험이 아니다.
그러니 몇 퍼센트가 가능하냐보다, 그 비율에서 계통이 실제로 버티는지를 먼저 계산해야 한다는 쪽이 정확한 순서다. 목표 숫자를 정하는 것은 사회가 할 일이고, 그 숫자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알려주는 것이 계통 해석이 할 일이다.
정전이 아예 없는 사회도 가능합니까?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다. 다만 값이 붙는다.
전력망의 신뢰도는 돈으로 산다. 예비 설비를 더 두고, 선로를 이중 삼중으로 깔고, 점검을 더 자주 하면 정전은 줄어든다. 문제는 마지막 1%를 없애는 데 드는 비용이 앞의 99%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다.
지금 한국의 호당 연간 정전시간이 9분대다. 이것을 1분으로 줄이는 데 드는 돈이면 다른 곳에서 훨씬 큰 효용을 만들 수 있다. 어느 선까지 갈지는 사회가 정하는 문제다. 병원 수술실이나 반도체 공장처럼 절대 끊기면 안 되는 곳은 이미 자체 발전기를 따로 갖추고 있다. 사회 전체의 신뢰도 목표와 개별 시설의 신뢰도 목표를 구분하는 것이 이 문제를 다루는 실무적인 방식이다.
이 분야를 공부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전기공학이 가장 곧은 길이지만 전자공학과 컴퓨터공학 출신도 섞여 일한다. 하나만 꼽으라면 프로그래밍이다. 이 글에서 본 대로 지금의 계통 연구는 손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코드를 짜서 돌린다. 수학에서는 미분방정식과 수치해석이 실제로 계속 쓰인다.
분야의 성격도 10년 사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발전소 짓고 전선 깔면 되는 다 끝난 분야라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반대다. 재생에너지가 들어오고, 전기차가 들어오고, 데이터센터가 전기를 대량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오래된 규칙이 다시 쓰이고 있다. 10년 전에는 전력망 연구자가 해킹을 걱정하는 그림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11결론 — 답은 계통마다 다르고, 계산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이 글의 질문들은 하나로 모인다. 전기는 담아둘 수 없고, 그래서 만드는 즉시 써야 하며, 그 균형을 실시간으로 잡아주던 장치가 바뀌었다.
바뀐 내용은 세 갈래다. 첫째, 균형을 잡아주던 것이 수십 톤짜리 회전체에서 소프트웨어로 제어되는 인버터로 옮겨갔다. 물리 현상은 설정값이 없지만 소프트웨어는 있다. 둘째, 그 인버터가 수십만 대 단위로 흩어져 있고 서로 반응을 주고받는다. 이베리아 정전이 진동과 전압 제어의 문제였다는 ENTSO-E의 결론, 그리고 계통 운영자가 관측하지 못하는 설비의 재접속 시간이 발전 손실에 크게 작용했다는 확인이 이 갈래에 속한다. 셋째, 그 수십만 대가 통신에 연결돼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변전소 몇십 곳을 지키면 되던 시절이 끝났다는 것, 국내 가이드라인이 분산자원 장악을 첫 번째 공격 시나리오로 올린 것이 같은 이야기다.
세 갈래가 함께 만드는 결과가 이 글의 논지다. 어떤 계통이 무엇을 얼마나 받아낼 수 있는지, 어디가 뚫렸을 때 얼마나 아픈지, 관성이 얼마나 줄어도 되는지에 일반해가 없어졌다. 미국 국립재생에너지연구소가 관성 감소를 두고 필요한 양 자체가 함께 줄어든다고 정리한 것도, 제주 출력제어가 181회에서 0회가 되었으면서도 문제는 남아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답이 조건에 붙어 있다는 같은 사실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이 분야의 정직한 답은 계산해 보기 전에는 모른다는 것이 되었고, 계산 속도를 끌어올리는 일이 안전을 만드는 일이 되었다.
남는 물음은 계산의 바깥에 있다. 시뮬레이션은 어떤 조건에서 위험해지는지 방향을 알려줄 뿐 정답을 주지 않고, 검증을 아무리 해도 모형과 현실은 완전히 같아지지 않는다. 재생에너지를 몇 퍼센트까지 갈지, 정전 시간을 몇 분까지 줄일지는 그 방향 위에서 사회가 고르는 문제다. 계산이 넓어질수록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늘어나지만, 고르는 일 자체가 계산으로 대체되지는 않는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일이 잘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 하루 전기가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성적표다.
본문의 수치는 한국전력공사, 전력거래소, 기후에너지환경부, 한국에너지공단, 국가정보원, 유럽 송전계통운영자연합회, 미국 사이버보안·인프라보안국, 미국 국립재생에너지연구소, 국제에너지기구의 공개 자료와 학술 논문에서 확인했다. 통계는 기준 연도를 함께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