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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요셉과 힉소스 동일시 — 요세푸스의 등식, 야쿠브-하르 인장, 아바리스 발굴이 실제로 보여주는 것

2026년 9월 11일

창세기의 야곱과 요셉이 이집트를 다스린 외래 왕조 힉소스의 일원이었다는 설명은 1세기부터 지금까지 되풀이되어 왔다. 성경은 야곱의 가족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가 정착했다고 말하고, 이집트 기록은 셈어를 쓰던 레반트 사람들이 나일강 삼각주에 들어와 살다가 왕조를 세웠다고 말한다. 두 이야기는 무대와 등장인물이 겹친다. 그래서 둘을 포개면 설명이 깔끔해진다. 그런데 실제 자료를 하나씩 확인하면 그 포개기가 성립하는 대목은 좁고, 무너지는 대목은 넓다. 무너지는 방식이 이 문제의 핵심이다. 자료가 부족해서 판정이 유보되는 상황은 아니다. 남아 있는 자료가 두 이야기의 뼈대가 서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등식을 처음 세운 사람은 고고학자가 아니라 변론가였다

야곱·요셉과 힉소스를 잇는 발상은 발굴에서 나오지 않았다. 1세기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변론서 『아피온 반박』에서 나왔다. 요세푸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문법학자 아피온이 퍼뜨린 주장, 곧 유대인은 역사가 얕은 집단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려고 이집트 사제 마네토의 저술을 끌어왔다. 마네토는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로 이집트 왕조사를 쓴 인물이다.

요세푸스가 인용한 대목에 따르면, 이집트를 차지했던 이 왕들은 '목자'라고도 불렸고, 삼각주의 요새 도시 아바리스에서 포위되었다가 합의 끝에 가족과 재산을 이끌고 광야를 거쳐 시리아 쪽으로 떠났으며, 지금의 유대 땅에 예루살렘을 세웠다. 요세푸스는 여기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였다. 그 목자들이 곧 유대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근거로 든 것은 자기 민족의 조상이 양을 치는 사람들이었다는 성경의 서술이었다.

이 논증의 구조를 보면 문제가 드러난다. 요세푸스는 이집트 기록에서 '이스라엘'이나 '히브리'라는 이름을 찾아낸 것이 아니다.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간 셈족 집단이 마네토의 책에 있다는 사실 하나를 잡고, 그 집단이 자기 조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마네토의 원본은 전하지 않고 요세푸스가 골라 옮긴 인용문으로만 남아 있으므로, 마네토가 히브리인을 언급했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다. 요세푸스의 목적은 유대 민족의 연원이 그리스보다 오래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그 목적에 이 동일시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결론이 근거를 선택한 구조다.

그럼에도 이 등식이 2000년 가까이 살아남은 이유는 따로 있다. 삼각주 동부에 레반트 사람들이 실제로 살았다는 사실이 20세기 발굴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발굴이 무엇을 확인했고 무엇을 확인하지 않았는가에 있다.

아바리스 발굴이 확인한 것 — 침입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이주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는 나일강 삼각주 동부의 유적 텔 엘다바로 확인되었다. 오스트리아 고고학자 만프레트 비타크가 1966년부터 2011년까지 75차례에 걸쳐 발굴을 이끌었고, 2010년부터는 이레네 포르스트너뮐러가 에즈베트 루슈디 구역의 발굴을 이었다.

힉소스와 아바리스 힉소스는 이집트어로 '외국 땅의 통치자들'을 뜻하는 칭호에서 온 이름이다. 셈어를 쓰던 레반트 출신 집단으로, 나일강 삼각주 동부를 근거지로 삼아 이집트 북부를 다스렸다. 이집트 왕조 구분으로는 제15왕조에 해당하고, 다스린 기간은 대략 기원전 1638년부터 1530년까지로 추정된다. 아바리스는 그 수도의 이름이며, 지중해로 나가는 뱃길과 시나이·팔레스타인으로 이어지는 육로가 만나는 자리에 있었다. 이집트 남부 테베의 왕 아흐모세 1세가 기원전 1530년 무렵 이 도시를 함락했다.

비타크가 정리한 유적의 층위는 제12왕조부터 시작한다. 처음 들어선 것은 이집트인의 계획 취락이었다. 제12왕조 후반에 그 취락 가장자리를 가나안 사람들의 주거지가 잠식했다. 이들의 집은 시리아 계열의 평면을 따랐고, 무기를 지닌 사람들과 고위 인사들의 묘지가 함께 조성되었다. 무덤에서는 당나귀와 염소를 함께 묻는 관습, 근동 계열의 고급 무기가 나왔는데, 이 둘은 묻힌 사람이 서아시아 출신임을 가리키는 표지로 쓰인다.

같은 구역에서 실물보다 큰 고위 인사의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버섯 모양 머리 모양을 한 서아시아계 인물의 조각으로, 현재 뮌헨 이집트미술관에 있다(유물번호 ÄS 7171). 또 '레체누의 지배자'라는 칭호가 새겨진 인장이 나왔다. 레체누는 이집트인이 가나안 거의 전역을 부르던 이름이다. 비타크는 이 칭호가 이집트 왕실이 삼각주에 거주하던 아시아계 공동체의 최고위 인사에게 준 직함이었으리라고 보았고, 그 직무는 레반트와의 교역 및 시나이 원정을 조직하고 감독하는 일이었으리라고 추정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처음부터 지배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집트 왕실의 필요에 따라 교역을 맡던 외국인 공동체가 여러 세대에 걸쳐 삼각주에 자리를 잡았고, 중앙 권력이 약해진 뒤에야 그 자리에서 왕조가 나왔다. 힉소스 통치가 시작되면서 도시는 약 240에이커에서 620에이커로 커졌다. 건축 자재가 모래벽돌에서 물에 강한 진흙벽돌로 바뀌었고, 토기 생산이 대부분 현지 공방으로 넘어갔다.

2020년에 발표된 화학 분석이 이 그림을 뒷받침했다. 본머스대학의 크리스 스탠티스를 비롯한 연구진은 텔 엘다바에 묻힌 75명의 치아 법랑질에서 스트론튬 동위원소 비율을 측정했다.

스트론튬 동위원소 분석 스트론튬은 암석에 들어 있는 원소로, 지역마다 동위원소 비율이 다르다. 어린 시절 마신 물과 먹은 음식을 통해 그 비율이 치아 법랑질에 갇히고, 법랑질은 형성된 뒤에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묻힌 사람의 치아 비율을 그 지역 토양·물의 비율과 대조하면 그 사람이 어디서 자랐는지를 추정할 수 있다. 사람이 남긴 글 대신 몸에 남은 화학 흔적을 읽는 방법이므로, 기록이 편향되었거나 아예 없는 경우에도 쓸 수 있다.

결과는 통념과 어긋났다. 외지에서 태어난 사람의 비율은 힉소스 통치 이전, 곧 제12·제13왕조 시기에 더 높았고, 힉소스 통치기에는 삼각주에서 태어난 사람의 비율이 더 높았다. 외지 출신 가운데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연구진은 남성이 무리 지어 들어오는 정복의 양상이 나타나지 않으며, 외지 여성의 유입은 유력 가문 사이의 혼인 동맹으로 설명하는 편이 낫다고 보았다. 요약하면 힉소스는 밖에서 쳐들어온 군대가 아니었다. 여러 세대 동안 그 땅에 살던 집단이 안에서 권력을 잡았다.

여기까지는 창세기의 설정과 잘 맞는 것처럼 보인다. 가나안에서 삼각주로 내려온 셈족 가족, 그곳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인물. 등식이 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 자료에서 그 매력이 한 번 더 커진다.

야쿠브-하르 인장 — '야곱'이라는 이름은 있었고, 그 이름의 주인은 특정되지 않는다

이집트와 가나안 여러 곳에서 같은 이름이 새겨진 풍뎅이 모양 인장이 나왔다. 스카라베라고 부르는 이 인장은 원래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봉인하는 데 쓰였고 장신구나 부적으로도 쓰였다. 새겨진 이름은 야쿠브-하르다. 앞부분 야쿠브는 셈어 어근 y-'-q-b에서 온 이름으로, 히브리어 야아콥, 곧 야곱과 같은 계열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1969년 하이파 인근 쉬크모나의 암굴 무덤에서 나온 인장이다. 중기 청동기 IIA에서 IIB로 넘어가는 층에서 발견되었고, 기원전 1730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1930년에 처음 공개되어 지금 베를린에 있는 또 하나의 인장은 쉬크모나 것과 거의 같은데, 이름이 카르투슈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만 다르다. 카르투슈는 왕의 이름을 표시하는 타원형 테두리다. 이스라엘 고고학자 아하론 켐핀스키는 1988년 『Biblical Archaeology Review』 14권 1호에 실은 논문에서 두 인장이 양식과 도안으로 보아 기원전 18세기에 같은 가나안 장인의 손에서 나왔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인장이 성립시키는 명제는 생각보다 좁다. 켐핀스키 자신이 이 야쿠브를 성경의 야곱과 같은 인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이 인물을 기원전 18세기 가나안의 왕으로 보았고, 그 이름이 뒤에 힉소스 왕조에서 다시 쓰였다고 설명했다. 성경의 야곱은 기원전 8세기의 편집자가 가나안의 옛 야곱에 얽힌 전설과 같은 이름의 후대 왕을 합쳐 만들어 낸 인물일 수 있다는 이론을 소개하는 데 그쳤다.

야쿠브-하르가 어느 왕조에 속했는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덴마크 이집트학자 킴 리홀트는 1997년 저작과 2010년 논문에서 셰시와 야쿠브하르를 제15왕조가 아니라 그 앞의 제14왕조에 두었다. 근거 가운데 하나는 이 왕들이 힉소스의 칭호인 헤카 카수트를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반면 이스라엘 박물관의 다프나 벤토르는 야쿠브하르의 인장이 잘 알려진 힉소스 왕 캬안의 인장과 양식상 가깝고 두 왕의 즉위명에 쓰인 부호 형태도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야쿠브하르를 제15왕조에 속하거나 캬안 아래의 봉신 통치자로 보았다. 리홀트의 배치에는 반대했다.

이 논쟁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야쿠브-하르라는 이름이 삼각주와 가나안에서 통용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 이름이 언제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야곱형 이름이 기원전 2천년기 전반 서아시아에서 흔한 이름 유형이었다는 점이다. 어느 지역에서 흔한 이름을 가진 인물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인물과 그를 잇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오늘날 어느 문서에서 '김철수'라는 이름을 찾았다고 해서 특정한 김철수를 찾은 것이 아닌 것과 같은 구조다.

성경이 제시한 숫자를 그대로 쓰면 등식이 먼저 깨진다

동일시를 옹호하는 쪽은 대개 성경을 역사 기록으로 읽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성경의 연대 수치를 그대로 계산하면 등식이 가장 먼저 무너지는 자리가 바로 그 수치다.

열왕기상 6장 1절은 출애굽에서 솔로몬 성전 착공까지를 480년으로 적는다. 출애굽기 12장 40절은 이집트 체류 기간을 430년으로 적는다. 성전 착공을 기원전 960년대로 잡고 거슬러 올라가면 출애굽은 기원전 1440년대, 야곱 가족이 이집트로 내려간 때는 기원전 1870년대가 된다. 이 계산에서 야곱이 내려간 때는 힉소스 왕조가 들어서기 230년쯤 전이 되고, 출애굽은 힉소스가 축출되고 90년쯤 지난 뒤가 된다. 야곱도 요셉도 힉소스 시대에 들어오지 않는다.

수치를 버리고 유물 쪽에서 접근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출애굽기 1장 11절은 히브리인이 비돔과 라암셋 두 성을 지었다고 적는다. 라암셋은 람세스 2세의 이름을 딴 도시 피라메세로, 아바리스 유적 위와 그 북쪽에 걸쳐 조성되었다. 람세스 2세의 재위는 기원전 13세기다. 이 실마리를 따르면 출애굽은 힉소스 축출보다 300년가량 늦어진다. 성경 안의 두 실마리가 서로 다른 시점을 가리키고, 어느 쪽을 택하든 힉소스 시대와 만나지 않는다.

여기에 창세기 본문 자체의 시대착오가 겹친다. 시대착오란 이야기의 배경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이야기 안에 들어와 있는 현상이다. 창세기 21장과 26장에는 블레셋 사람이 나오는데, 블레셋 사람이 가나안 해안에 정착한 시기는 기원전 12세기다. 아브라함의 출신지로 적힌 '갈대아 우르'의 갈대아인은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 기록에 처음 나타난다.

낙타의 경우는 연대 측정으로 확인되었다. 텔아비브대학의 리다르 사피르헨과 에레즈 벤요세프는 2013년 학술지 『Tel Aviv』 40권 2호에 실은 논문에서, 이스라엘 남부 아라바 계곡의 팀나와 와디 파이난 구리 제련 유적에서 나온 동물 뼈를 분석했다. 가축화된 낙타의 뼈가 처음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는 시점은 기원전 10세기 마지막 3분의 1보다 이르지 않았다. 이 유적들은 구리를 제련하고 실어 나르던 같은 성격의 장소였으므로, 낙타 뼈의 출현은 짐 나르는 짐승이 도입된 시점을 가리킨다고 연구진은 판단했다. 창세기의 족장들은 낙타를 일상적인 가축으로 부린다.

반대편 논증도 있다. 영국의 이집트학자 케네스 키친은 1995년 『Biblical Archaeology Review』 21권 2호에 실은 논문에서 노예 가격을 근거로 삼았다. 창세기 37장 28절에서 요셉은 은 20세겔에 팔린다. 우르 제3왕조 시기에 노예값은 대개 10세겔이었고, 함무라비 법전이 나온 기원전 18세기 무렵에는 20세겔이었으며, 누지와 우가리트 문서가 보여주는 기원전 15~14세기에는 30세겔,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에서는 50~60세겔, 페르시아 제국 시기에는 90세겔을 넘었다. 키친은 요셉 이야기의 20세겔이 기원전 18세기의 시세와 정확히 맞는다는 점에서 이 대목이 그 시대의 기억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논증의 형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족장 시대의 실재를 지지하던 논거들이 정확히 같은 형태였다. 미국 고고학자 윌리엄 올브라이트를 따르는 학자들은 메소포타미아 누지 문서에 나오는 관습이 창세기의 혼인·상속 관행과 닮았다는 점을 들어 족장 이야기가 기원전 2천년기 전반의 사회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토머스 톰프슨이 1974년에 낸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과 존 반 세터스가 1975년에 낸 『역사와 전승 속의 아브라함』이 이 논거를 해체했다. 톰프슨은 인용된 고고학 자료 가운데 족장 이야기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어느 전승도 역사적일 개연성이 높다고 밝혀진 바 없다고 정리했다. 문제는 누지 문서가 가짜라는 데 있지 않았다. 그 관습들이 기원전 2천년기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기원전 1천년기 문서에서도 확인된다는 데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있던 것으로 특정 시대를 지목할 수는 없다.

노예값 논증도 같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후대의 저자가 옛 시세를 알고 적었을 가능성, 20이라는 수가 관용적으로 쓰였을 가능성, 출애굽기 21장 32절이 30세겔을 규정하듯 본문마다 다른 숫자가 다른 사정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남는다. 한 숫자가 한 시대와 맞는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기억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게 해 주지만, 그 가설을 확정하지는 못한다.

지배자와 이주민 — 두 이야기는 줄거리의 방향이 반대다

연대를 제쳐 두고 이야기의 뼈대만 견주어도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힉소스는 이집트를 다스린 지배층이었다. 아바리스에는 근동식 평면을 따른 1만 600제곱미터 규모의 궁전이 섰고, 그 궁전 안뜰 담장 아래에서는 잘린 오른손을 모아 묻은 구덩이 셋이 발굴되었다. 적의 오른손을 잘라 전공을 헤아리는 관습은 신왕국 아흐모세 1세 이후의 기록과 도상에 나오는데, 아바리스의 구덩이가 그 관습의 첫 고고학 증거다. 비타크는 이 관습이 힉소스에게서 들어왔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궁전의 우물 메움층에서는 바빌로니아 설형문자 편지 조각이 나왔다. 힉소스가 아마르나 시대보다 150년 앞서 장거리 외교 서신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뜻이다.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그리는 집단은 이런 위치에 있지 않다. 야곱 가족은 기근을 피해 내려온 이주민이고, 파라오가 내준 땅에 얹혀 산다. 요셉은 왕이 아니라 파라오를 섬기는 관리이며, 그의 권한은 파라오의 임명에서 나온다. 출애굽기의 히브리인은 강제 노역에 동원된 예속민이고, 그들이 떠나는 방식은 왕조의 붕괴가 아니라 탈출이다. 반면 힉소스는 테베 세력과의 전쟁에서 패해 도시를 잃었다.

고대 왕조의 계보를 다루는 이야기에서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어떤 집단이 자기 조상을 이집트의 왕으로 기억하다가 노예로 바꾸어 기억하게 될 이유를 찾기 어렵다. 굴욕을 영광으로 바꾸는 개작은 흔하지만 그 반대 방향은 드물다. 요세푸스가 마네토를 인용하면서 목자들이 자기 조상이라고 주장할 때, 그 역시 '왕'이라는 대목은 물려받고 싶어 했지 노예라는 대목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계보가 연표가 아니라는 신호는 성경 안에 있다

동일시 논쟁이 계속 헛도는 이유는 질문이 잘못 놓였기 때문이다. '야곱은 어느 해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창세기의 계보가 연표라는 전제를 이미 깔고 있다. 그 전제부터 검증해야 한다.

시조(名祖) 집단의 이름이 곧 사람의 이름으로 쓰이는 조상을 가리킨다. 어떤 민족이나 부족의 이름을 한 개인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고, 그를 그 집단의 조상으로 세우는 방식이다. 고대 서아시아에서 계보는 혈연을 기록하는 수단이자 집단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이런 계보에서 '형'과 '아우', '아버지'와 '아들'은 출생 관계보다 집단 사이의 서열·친소·영토 관계를 나타낸다.

창세기의 계보는 이 형식을 그대로 따른다. 야곱은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고, 그의 열두 아들 이름은 열두 지파의 이름과 같다. 에서는 곧 에돔이고, 이스마엘은 이스마엘 족속의 조상이며, 롯의 두 아들은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다. 이웃 민족 전체가 한 가문의 족보 안에 배치되어 있다. 형인 에서가 아우 야곱에게 장자권을 넘기는 이야기는 개인의 일화로 읽을 수도 있지만, 에돔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치로도 읽힌다.

세 족장의 활동 무대가 서로 다르다는 점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헤브론과 마므레, 곧 유다 남부에 결부되어 있다. 이삭은 브엘세바와 네게브 사막 지대에 결부되어 있다. 야곱은 벧엘, 세겜, 요단강 동쪽 길르앗, 곧 북이스라엘 지역에 결부되어 있다. 세 사람이 원래 서로 다른 지역 성소의 조상 전승이었다고 보면, 이들을 삼대로 잇는 계보는 남과 북의 전승을 하나의 가족사로 통합한 결과가 된다. 이 구성에서 유다 쪽 인물인 아브라함이 북쪽 인물인 야곱보다 윗세대에 선다.

초기 문헌의 분포가 이 추정을 받친다. 기원전 8세기 북왕국 예언자 호세아는 12장에서 야곱 이야기를 상세히 끌어온다. 태에서 형의 발꿈치를 잡은 일, 하나님과 겨룬 일, 벧엘에서 만난 일, 아람 들로 도망해 아내를 얻으려 일하고 양을 지킨 일이 차례로 나온다. 아브라함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기원을 고백하는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꼽히는 신명기 26장 5절도 같다.

אֲרַמִּי אֹבֵד אָבִי

아람미 오베드 아비

내 조상은 떠돌던 아람 사람이었다

신명기 26장 5절, 마소라 본문(BHS, 레닌그라드 사본)

가운데 낱말 오베드(אֹבֵד)는 어근 아바드(אבד)의 능동 분사형이다. 이 어근은 '없어지다', '길을 잃다', '망하다'를 함께 뜻한다. 그래서 번역이 두 가지로 나뉜다. '방랑하는', '떠돌던'으로 옮기면 정착지 없이 옮겨 다니는 처지를 가리키고, '망해 가는', '스러져 가는'으로 옮기면 몰락의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뒤 문장이 이집트로 내려가 나그네로 살았다는 이동을 말하므로 '떠돌던'으로 옮겼다. 어느 쪽으로 옮기든 이 고백문에 등장하는 조상은 아람과 결부된 인물, 곧 야곱이다. 아브라함은 여기에도 없다.

아브라함이 백성 전체의 조상으로 뚜렷이 불리는 본문은 바빌론 포로기, 곧 기원전 6세기 문헌에서 나타난다. 에스겔 33장 24절과 이사야 51장 2절이 그렇다. 여기서 나오는 추론은 이렇다. 야곱 전승이 먼저 있었고, 아브라함이 계보의 맨 앞자리에 선 것은 나중이다. 기원전 722년 북왕국이 아시리아에 멸망한 뒤 유다가 북쪽 전승을 자기 역사로 편입하면서 이 계보가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결합 시점을 왕국 후기로 보느냐 페르시아 시대로 보느냐는 학자마다 다르다.

이삭의 자리도 이 구도와 맞는다. 이삭이 주인공인 장은 창세기 26장 하나뿐이다. 그 내용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 그랄 왕 아비멜렉과의 관계, 우물을 둘러싼 분쟁, 브엘세바에서의 맹약인데, 12장과 20~21장의 아브라함 이야기와 거의 같다. 독자적 전승이 적은 인물이 두 큰 전승 사이의 중간 세대로 배치되어 있는 모양이다.

신의 호칭도 조상마다 다르다. 창세기 31장 42절과 53절은 '이삭이 두려워하는 이'를, 49장 24절은 '야곱의 전능자'를 말한다. 독일 구약학자 알브레히트 알트는 1929년에 낸 『조상들의 신』에서, 이런 호칭들이 원래 각 씨족이 자기 조상의 이름을 붙여 섬기던 별개의 신이었고 뒤에 야훼와 같은 신으로 여겨졌다는 가설을 세웠다. 세부 논증은 여러 비판을 받았으나, 족장 전승이 원래 분리되어 있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지금도 인용된다.

계보가 여러 지역 전승을 통합한 구성이라면, 그 계보 안의 한 인물을 이집트 왕조 연표의 한 칸에 맞춰 넣으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맞지 않는 작업이다. 성경 안의 야곱은 한 세대의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북이스라엘 전체의 이름이다. 이집트의 야쿠브-하르는 한 세대의 한 사람이다. 둘을 등호로 잇는 순간 한쪽의 성격이 지워진다.

축출 이후 삼각주에 남은 사람들 — 전승이 자랄 수 있는 자리

등식을 버린다고 해서 이집트 체류 전승 전체가 허공에 뜨는 것은 아니다. 아바리스 발굴은 동일시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다른 종류의 설명이 설 자리를 마련한다.

아흐모세 1세가 아바리스를 함락한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비타크는 이렇게 정리한다. 도시 대부분은 버려졌으나 폭풍신 성소 구역과 나일강 동쪽 지류 가까운 서쪽 구역에서는 거주가 이어졌고, 힉소스 시기에 발달한 삼각주 동부 특유의 혼합 양식 토기 생산도 끊기지 않았다. 이는 아바리스에 살던 레반트계 주민이 실제로 추방된 것이 아니라 수가 줄어든 채 제18왕조의 신민으로 계속 살았음을 뜻한다고 그는 본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집트 각지로 보내져 예속 노동자와 신전 노예가 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이 서술은 앞의 두 항목과 나란히 놓고 볼 필요가 있다. 첫째, 레반트에서 삼각주로 들어와 여러 세대 살다가 떠나거나 예속되는 양상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반복된 양상이었다. 스트론튬 분석이 보여준 대로 그 유입은 힉소스 이전부터 있었다. 둘째, 제18왕조가 가나안을 수백 년 지배하는 동안 가나안 사람들은 이집트의 통치를 자기 땅에서 겪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외부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기원전 1208년 무렵 메르넵타 석비이고, 거기서 이스라엘은 도시국가가 아니라 특정 지역에 매이지 않은 사람들의 집단으로 표기된다.

여기서 나오는 가설은 개인의 동일시를 다루지 않고 기억의 형성을 다룬다.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의 로널드 헨델은 2001년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20권 4호에 실은 논문 「성경 기억 속의 출애굽」에서, 출애굽 전승을 역사적 기억과 민족 정체성 형성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다루었고, 가나안에서 겪은 이집트 제국 지배의 기억이 변형되어 이 전승에 들어갔다고 보았다. 이 설명에서 출애굽 이야기는 한 사건의 보고서가 아니라, 여러 경험이 하나의 기원 서사로 응축된 결과가 된다.

이 가설의 강점과 한계는 같은 자리에 있다. 강점은 자료와 충돌하지 않는 데 있다. 삼각주에 레반트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도, 그들이 축출과 예속을 겪었다는 것도, 이집트가 가나안을 지배했다는 것도 각각 독립적으로 확인된다. 한계는 검증 가능한 예측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데 있다. 기억의 변형을 상정하면 어떤 불일치든 설명할 수 있게 되고, 설명할 수 없는 자료가 없는 이론은 반증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이 가설은 야곱과 요셉을 특정 인물로 확인해 주지 않으며, 확인해 줄 수 있는 종류의 가설도 아니다.

결론 — 두 질문을 갈라놓아야 각각의 답이 선다

야곱과 요셉이 힉소스 집단의 일원이었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근거로 쓰이는 세 축이 모두 다른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요세푸스의 증언은 사료가 아니라 변론이며, 그가 인용한 마네토의 원본이 히브리인을 언급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야쿠브-하르 인장은 삼각주와 가나안에 야곱형 이름이 통용되었음을 보여줄 뿐이고, 그 인물이 어느 왕조에 속했는지는 리홀트와 벤토르 사이에서 지금도 견해가 나뉜다. 아바리스 발굴은 이 등식에 가장 가까이 간 자료이지만, 정작 그 발굴이 보여준 것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들어와 자리 잡은 양상이다. 여기에 성경 자체의 연대 수치와 서사 구조가 등식을 두 방향에서 막는다. 수치를 그대로 쓰면 야곱의 이주도 출애굽도 힉소스 시대 밖으로 나가고, 줄거리를 보면 이집트를 다스리다 전쟁에 패해 쫓겨난 왕조와 얹혀살다 노역에 동원되어 탈출한 집단은 서로 반대 방향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집트 체류 전승이 통째로 무너지지도 않는다. 무너지는 것은 계보를 연표로 읽고 그 연표를 이집트 왕조표에 겹치는 독법이다. 창세기의 족장 계보는 여러 지역의 조상 전승을 하나의 가족사로 통합한 구성이며, 그 신호는 발굴이 아니라 성경 본문 안에 있다. 호세아와 신명기의 고백에는 야곱만 있고 아브라함이 없다. 이삭에게는 독자적인 이야기가 거의 없다. 신의 호칭은 조상마다 다르다. 열두 아들의 이름은 열두 지파의 이름이다. 이 구성을 인정하면 '야곱은 몇 년 사람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는 질문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이름 뒤에 실제 인물이나 씨족의 기억이 있었는가이고, 이것은 지금도 열려 있다. 유목하던 씨족의 개인이 왕실 비문에 기록될 가능성은 원래 낮으므로, 외부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실존의 반증이 되지는 않는다. 다른 하나는 아브라함·이삭·야곱이 실제로 삼대였는가이고, 이 질문에 대해서는 계보 연결 자체가 후대의 구성이라는 견해가 비평 학계에서 우세하다. 첫째 질문의 불확실성이 둘째 질문의 답을 흔들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앞으로 이 문제에서 움직일 수 있는 자리는 아바리스와 그 주변의 인골 분석이다. 2020년의 스트론튬 연구는 표본이 75명이었고, 비타크 자신이 힉소스 시기 인구 유입을 두고 물질문화 증거와 동위원소 증거가 어긋나는 대목을 표본 수가 적은 탓으로 남겨 두었다. 표본이 늘어나고 고대 DNA 분석이 더해지면 삼각주 주민의 출신지 분포는 더 좁혀질 것이다. 다만 그 결과가 좁혀 주는 것은 어떤 집단이 어디서 왔는가이지 누가 야곱이었는가가 아니다. 개인을 확인해 주는 자료는 이름이 새겨진 문서인데, 야곱과 요셉의 경우 그런 문서가 나올 가능성은 이름의 흔함 때문에 오히려 더 낮다. 같은 이름이 많을수록 하나를 지목하기는 어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