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본문에서 아담은 정관사가 붙은 보통명사 '그 사람'이고, 하와의 이름은 본문이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직접 푼다. 두 사람의 이름은 창세기 2장과 3장 바깥의 히브리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갈비뼈라는 선택은 히브리어로 설명되지 않고 수메르어로 설명된다. 세 가지 관찰이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아담과 하와는 서구 문화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 축에 든다. 그런데 두 사람이 등장하는 성경 본문의 분량은 창세기 2장 중반부터 4장 초반까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밖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다뤄지는지, 두 사람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두 사람을 만드는 데 쓰인 서술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면 그림이 달라진다.
이 글은 신학적 평가를 다루지 않는다. 원죄 교리나 타락의 의미는 후대에 형성된 별개의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건드리지 않는다. 다루는 것은 본문 자체의 세 층위다. 이름, 자료 구성, 그리고 다른 문헌과의 대조다.
창세기 2장 7절은 사람이 만들어지는 장면이다.
וַיִּיצֶר֩ יְהוָ֨ה אֱלֹהִ֜ים אֶת־הָֽאָדָ֗ם עָפָר֙ מִן־הָ֣אֲדָמָ֔ה
wayyitser YHWH 'elohim 'et-ha'adam 'apar min-ha'adamah
야훼 하나님이 흙에서 취한 먼지로 그 사람을 빚었다.
창세기 2장 7절 앞부분. 히브리어 본문은 웨스트민스터 레닌그라드 사본 전자판. 옮김은 필자.
여기서 볼 것이 둘이다. 첫째,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 하아담(ha-'adam)에는 정관사 하(ha-)가 붙어 있다. 히브리어에서 고유명사에는 정관사를 붙이지 않는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를 '그 아브라함'이라 쓰지 않는 것과 같다. 정관사가 붙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낱말을 보통명사로 쓰고 있음을 보여 준다. 뜻은 사람 또는 인간이다.
기원전 3세기부터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어로 옮긴 번역자들도 이렇게 읽었다. 칠십인역은 하아담을 톤 안트로폰(ton anthropon), 곧 '그 사람'으로 옮겼다. 4세기 말 라틴어로 옮긴 히에로니무스도 같은 방식을 따랐다. 고대의 번역자들에게 이 대목의 주인공은 이름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둘째, 사람과 재료의 이름이 같은 어근에서 나온다. 사람은 아담이고 흙 또는 경작지는 아다마('adamah)다. 두 낱말은 소리가 맞물리며, 문장은 아담이 아다마에서 나왔다고 적는다. 우리말로 옮기면 '흙사람을 흙에서 빚었다' 정도의 짜임이다. 이름이 기원을 설명하는 장치로 쓰인다.
하아담이 고유명사처럼 쓰이기 시작하는 것은 창세기 4장 후반부터 5장에 걸쳐서다. 5장의 족보는 아담을 사람 이름으로 놓고 그의 나이와 자손을 적는다. 보통명사에서 인명으로 넘어가는 경계가 본문 안에 있다.
하와도 마찬가지다. 창세기 3장 20절은 사람이 아내의 이름을 하와(ḥawwah)라 불렀다고 적고, 그 이유를 본문 안에서 곧바로 밝힌다. 그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 살다를 뜻하는 어근 하야(ḥ-y-y)와 연결된 이름이다. 아람어에서 뱀을 뜻하는 낱말과 연결하려는 제안도 있었으나 소수 견해로 남아 있다.
정리하면 두 인물의 이름은 각각 '사람'과 '생명'이며, 그 뜻은 본문이 직접 밝힌다. 해석자가 추론해 붙인 것이 아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사람 일반의 조건을 다루는 서술로 읽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특정 개인의 전기를 읽는 방식으로는 맞지 않는다.
창세기 앞부분을 순서대로 읽으면 창조가 두 번 서술된다는 점이 드러난다.
1장 1절부터 2장 3절까지가 첫 번째다. 엿새에 걸쳐 빛, 궁창, 뭍과 바다,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 땅짐승이 차례로 만들어지고 마지막으로 사람이 만들어진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창조되고, 곧바로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신의 호칭은 엘로힘이다.
2장 4절 이후가 두 번째다. 순서가 다르다. 아직 초목이 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만들어지고, 그다음에 동산이 심어지고 나무가 자라며, 짐승들이 만들어져 사람 앞에 끌려와 이름을 받고, 마지막에 여자가 만들어진다. 신의 호칭은 야훼 엘로힘이다.
두 기사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시점, 남녀가 만들어지는 방식, 신의 호칭, 서술의 어조에서 서로 다르다. 성서학의 표준 분석은 앞을 제사장 문서(P), 뒤를 야훼 문서(J) 또는 비제사장 자료로 구분한다.
아담과 하와가 등장하는 것은 둘 중 뒤엣것뿐이다. 1장의 창조 기사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없다.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만들어지고 이름은 주어지지 않는다. 성경의 첫 장을 읽은 독자가 아담과 하와를 만나려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한다.
연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린다. 21세기 들어 다수 학자는 창세기의 편집이 바빌론 포로기 이후, 주로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이루어졌다고 본다. 언어학적 근거를 들어 페르시아 시대 이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어느 쪽이든 최종 형태는 이스라엘이 메소포타미아 문화권과 직접 접촉한 뒤의 산물이다.
가장 확인하기 쉬운 관찰이 여기 있다. 창세기 2장과 3장 바깥에서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다뤄지는지 세어 보면 된다.
아담은 역대상 1장 1절의 족보에 이름만 나온다. 아담, 셋, 에노스로 시작하는 명단의 첫 항목이다. 호세아 6장 7절에도 아담이라는 낱말이 나오지만 이 대목은 번역이 갈린다. 사람으로 읽는 번역, 아담이라는 인명으로 읽는 번역, 요단강 근처의 지명으로 읽는 번역이 모두 있다. 확정된 용례로 세기 어렵다.
하와는 창세기 밖에서 히브리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이 침묵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출애굽은 예언서와 시편에서 되풀이해 언급된다. 이스라엘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명할 때 돌아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다윗도,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계속 재인용된다. 어떤 사건이 공동체의 정체성을 떠받치면 그 사건은 문헌 전체에 흔적을 남긴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에덴이라는 지명은 이사야 51장 3절, 에스겔 36장 35절, 요엘 2장 3절에 나오지만 세 곳 모두 회복이나 파괴를 묘사하는 비교 대상으로 쓰일 뿐, 거기서 일어난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다. 첫 사람의 범죄가 인류의 조건을 결정했다는 독법은 히브리 성경 안에서 전개되지 않는다. 그 독법이 자리를 잡는 것은 제2성전기 유대 문헌과 바울 서신 이후다.
에스겔 28장은 흥미로운 예외에 가깝다. 두로 왕을 향한 선언에서 그는 에덴에 있었고 온갖 보석을 덮고 있었으며 그룹이 지키는 거룩한 산에 있다가 쫓겨난다. 원초적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나는 구도는 창세기와 같지만 세부가 다르다. 보석과 산이 나오고, 죄목은 교만과 불의한 무역이며, 나무도 뱀도 여자도 없다. 두 본문이 하나의 전승을 각자 다르게 변형했다고 보는 해석이 여기서 나온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과 3장은 여러 판본 가운데 살아남은 하나가 된다.
인물 조형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대목은 여자가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창세기 2장 21절과 22절은 신이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고 갈비뼈 하나를 취해 여자를 만들었다고 적는다. 왜 하필 갈비뼈인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는다. 심장도 손도 머리도 아니고 갈비뼈여야 할 이유가 히브리어 안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수메르어 문헌으로 넘어가면 이유가 생긴다.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는 1945년에 낸 연구에서 수메르 신화 「엔키와 닌후르사그」를 분석하고 창세기와의 병행을 제시했다. 이후 그가 여러 차례 개정해 낸 『History Begins at Sumer』 143~144쪽에도 같은 논증이 실려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 물의 신 엔키가 딜문이라는 정결한 땅에서 금지된 식물을 먹고 여덟 군데 몸이 아프게 된다. 어머니 신 닌후르사그가 아픈 부위마다 그것을 고칠 신을 하나씩 낳는다. 갈비뼈를 고치려고 태어난 여신의 이름이 닌티(Nin-ti)다.
창세기에는 두 요소가 모두 있다. 갈비뼈에서 여자가 만들어지고, 그 여자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로 명명된다. 그런데 두 요소를 잇는 언어적 고리가 없다. 히브리어에서 갈비뼈는 첼라(tsela)이고 살다는 하야다. 두 낱말은 어근을 공유하지 않는다. 말놀이의 결과만 남고 말놀이의 토대는 빠져 있다.
크레이머의 이 논증이 차용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는 수메르인이 히브리인에게 직접 영향을 주지 않았고 가나안을 거친 경로를 상정해야 한다고 적었다. 차용 여부를 두고 학계의 결론은 나 있지 않다. 다만 논증의 구조는 짚어 둘 만하다. 본문 안에서 이유가 없는 요소가 바깥 문헌에서는 이유를 얻는다. 이런 형태의 관찰은 어느 방향으로든 설명을 요구한다.
갈비뼈만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 대부분이 메소포타미아 문헌에 먼저 나온다.
사람이 흙에서 만들어졌다는 서술은 아카드어 서사시 『아트라하시스』에 있다. 이 작품에서 하급 신들이 운하를 파는 노역에 반발하자, 신들은 그 노동을 대신할 존재로 사람을 만든다. 재료는 진흙과 죽임을 당한 신의 살과 피다. 사람이 만들어진 목적이 노동이라는 점, 그리고 재료가 흙이라는 점이 창세기와 겹친다.
영생을 놓치는 이야기는 「아다파 신화」에 있다. 에리두에서 에아 신을 섬기던 아다파가 하늘로 불려 올라가는데, 에아는 그곳에서 주는 음식과 물을 먹지 말라고 조언한다. 아다파가 그 조언을 따르자, 실은 그것이 생명의 음식과 물이었다. 신이 되어 죽지 않을 기회를 놓친다. 명령과 음식과 영생의 상실이 한 자리에 묶인다.
지식을 얻는 대가로 원래 상태를 잃는 이야기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엔키두에게서 나오고, 뱀이 영생의 수단을 가로채는 장면은 같은 작품의 후반부에서 길가메시가 얻은 불로초를 뱀이 물고 가는 대목에 나온다.
흙에서의 창조, 노동의 부과, 금지된 음식, 영생의 상실, 지식의 획득, 뱀의 개입이 하나도 빠짐없이 선행 문헌에 있다. 창세기가 이 요소들을 처음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창세기가 앞선 이야기의 요약본인 것은 아니다. 조합 방식이 다르고, 그 차이가 이 본문의 성격을 드러낸다.
첫째, 인간 창조의 목적이 바뀐다. 아트라하시스에서 사람은 신들의 노동을 대신하려고 만들어진다. 창세기에서 사람은 신의 노동을 대신하지 않는다. 동산을 가꾸는 일이 주어지기는 하지만 그것은 신이 하던 일을 넘겨받는 구도가 아니고, 노동이 고역이 되는 것은 3장의 선고 이후다.
둘째, 신들 사이의 갈등이 사라진다. 아다파 이야기에서 아다파가 영생을 놓친 이유는 에아의 조언이 잘못되었거나 의도적으로 오도했기 때문이며, 신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린다. 창세기에서는 금지한 쪽과 벌하는 쪽이 같은 신이고, 영생의 상실은 사람의 선택에 귀속된다.
셋째, 여자의 위치가 다르다. 엔키두를 바꾸는 샴하트는 도시가 보낸 전문가이고, 그 전환은 문명으로의 상승으로 서술된다. 창세기의 하와는 사람에게서 나온 인물이고 밖에서 오지 않았으며, 그의 선택은 상승이 아니라 상실로 서술된다.
이 세 가지 변경은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사건의 책임을 신들의 사정에서 사람의 선택으로 옮긴다. 창세기 2장과 3장의 저자가 공들인 부분이 여기라는 점은 본문의 구성에서 읽힌다.
세 갈래 관찰이 모인다. 이름 층위에서 아담은 정관사가 붙은 보통명사 '그 사람'이고 하와의 이름은 본문이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직접 푼다. 두 이름 모두 개인을 식별하는 대신 그 인물이 무엇을 대표하는지를 알린다. 등장 범위 층위에서 두 사람은 창세기 2장과 3장을 벗어나면 히브리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으며, 하와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다른 기억들은 문헌 전체에 흔적을 남겼다. 조형 재료 층위에서 흙에서의 창조, 노동의 부과, 금지된 음식, 영생의 상실, 뱀의 개입이 모두 선행 문헌에 있고, 갈비뼈라는 선택은 히브리어로 설명되지 않는 대신 수메르어 낱말의 두 뜻으로 설명된다.
세 관찰이 함께 가리키는 것은 이 인물들이 개인의 전기를 전하려고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람이 왜 죽는가, 노동은 왜 힘든가, 남자와 여자는 왜 이런 관계에 있는가를 설명하는 서술이며, 그 설명을 위해 그 지역에 유통되던 재료를 가져다 다시 배열했다.
남는 문제가 둘이다. 하나는 차용의 경로다. 창세기와 수메르·아카드 문헌 사이의 유사성 목록은 길지만, 목록은 인과관계의 증명이 아니다. 직접 차용인지, 공통 문화권에서 각자 발전한 유사 모티프인지는 학계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고, 창세기 2장과 3장 전체와 구조가 일치하는 단일 원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 후자를 지지하는 근거로 쓰인다. 다른 하나는 이 판단이 이 인물들의 역사성에 대해 무엇을 결정하는가다. 문학적 조형이 확인된다는 것과 그 뒤에 실존 인물이 없었다는 것은 같은 명제가 아니다. 앞의 것은 본문 분석으로 확인되고, 뒤의 것은 본문 분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뒤의 질문에 자료를 대는 쪽은 문헌학이 아니라 집단유전학이며, 그 자료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는 따로 확인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