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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은 실재했는가 — 에테메난키 유적이 확인해 주는 것과 확인해 주지 못하는 것

바벨탑의 모델이 된 건축물은 실재한다. 바빌론의 지구라트 에테메난키는 발굴되었고 치수가 적힌 점토판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건물이 있었다는 것과 그 공사가 언어 혼란으로 중단되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고고학 자료와 쐐기문자 기록과 비교언어학이 각각 어디까지 말해 주는지를 정리한다.

2026년 9월 12일

“바벨탑은 실제로 있었느냐”는 질문은 하나처럼 보이지만 둘이다. 하나는 창세기 11장이 묘사한 것과 같은 거대 건축물이 실재했느냐는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 공사가 언어의 혼란으로 중단되고 사람들이 흩어진 일이 실제로 일어났느냐는 물음이다. 두 물음은 확인 방법이 다르고, 결론도 다르다.

첫 번째 물음에는 답이 있다. 두 번째 물음에는 없다. 이 글은 그 차이가 어디서 생기는지를 자료별로 따라간다.

바빌론의 지구라트 에테메난키

창세기 11장의 탑에 해당하는 건축물로 대부분의 학자가 지목하는 것은 바빌론 시내의 대지구라트 에테메난키다. 이름은 수메르어로 ‘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이라는 뜻이고,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에게 바쳐진 구조물이었다. 마르둑의 신전 에사길라 바로 옆에 서 있었으며, 이슈타르 문에서 이어지는 행렬 대로와 함께 도시의 의례 공간을 이루었다.

지구라트 메소포타미아의 계단식 신전탑이다. 진흙 벽돌로 속을 채우고 겉면을 구운 벽돌로 감싼 뒤 층마다 크기를 줄여 가며 쌓아 올렸고, 꼭대기에는 신전을 두었다. 도시마다 주신을 위해 하나씩 두는 것이 관례여서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서른 곳 남짓 남아 있다. 에테메난키가 가장 유명하지만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은 오늘날 이라크 남부의 우르 지구라트다.

이 건물의 규모를 알려 주는 자료는 두 종류다. 하나는 문헌이고 하나는 발굴이다.

에사길라 서판 기원전 229년에 필사된 쐐기문자 점토판으로,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우루크에서 나온 이 서판은 더 오래된 원본을 옮겨 적은 것이며, 에테메난키의 각 층 치수를 규빗 단위로 적어 놓았다. 서판이 언제 처음 작성되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앤드루 조지는 서판에 쓰인 긴 규빗의 실사용 시기를 근거로 기원전 7세기 초의 에사르하돈 시대를 유력하게 보면서도, 이 문서의 성격이 서기 교육용 자료였다면 특정 재건 사업과 연결할 필요가 없다는 단서를 붙인다.

에사길라 서판이 전하는 에테메난키는 일곱 층이고, 총 높이와 한 변의 길이가 모두 91미터 안팎이다. 정사각형 기단 위에 층이 줄어들며 올라가고 꼭대기에 신전이 놓인 형태다.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이끈 독일 오리엔트 협회의 바빌론 발굴은 1899년에 시작되어 1917년 무렵까지 이어졌는데, 이 발굴이 서판의 치수를 확인해 주었다. 발굴된 기단의 한 변은 91미터를 조금 넘는다. 남쪽 면에는 계단 셋이 붙어 첫 층으로 올라갔다.

흥미로운 것은 기단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발굴 구역에서 한 변이 65미터인 것, 73미터인 것, 91미터인 것까지 서로 다른 기단 셋이 확인되었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 허물어졌다가 그때마다 더 큰 규모로 다시 올라갔다.

재건의 역사는 왕실 비문으로 추적할 수 있다. 에테메난키라는 이름이 왕실 비문에 처음 나오는 것은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재위 기원전 681~669년)의 재건 기록이다. 그 직전인 기원전 689년, 에사르하돈의 아버지 산헤립이 바빌론을 함락하면서 도시와 함께 지구라트도 크게 손상되었다. 에사르하돈은 재건에 착수했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뒤이어 아슈르바니팔도 이 사업에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7세기 말, 신바빌로니아의 첫 왕 나보폴라사르(재위 기원전 626~605년)는 자기가 이 탑을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발견해 다시 세웠다고 기록했고, 그의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재위 기원전 605~562년)는 제국 각지에서 동원한 인력으로 구운 벽돌을 쌓아 꼭대기까지 완성했다고 적었다. 꼭대기 신전의 외벽은 푸른 유약 벽돌로 마감했다고 한다.

왕이 이 건물 앞에 선 모습을 새긴 석비도 전한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계단식 탑을 배경으로 서 있고 그 아래에 쐐기문자가 새겨진 부조인데, 1990년대 초 바빌론의 에사길라 북쪽 약 20미터 지점의 발굴 구덩이 바닥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되었다. 다만 반출 경위가 정상적이지 않아 학계의 취급이 조심스럽다.

이 구조물의 마지막에 관해서는 바빌로니아 연대기가 단편적으로 전한다. 재건을 시도할 때마다 먼저 옛 지구라트의 잔해를 치워야 했다는 것, 그리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가 재건을 결심하고 제사를 드리러 갔다가 잔해에 걸려 넘어진 뒤 분노해 코끼리 부대에게 남은 부분을 마저 헐어 버리게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에테메난키는 고대 기록에서 사라진다. 현재 유적지에는 기초의 윤곽과 지하수가 찬 웅덩이만 남아 있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이다. 창세기 11장의 탑에 해당할 만한 건축물은 실재했고, 그 규모와 재건의 내력이 문헌과 발굴 양쪽에서 확인된다.

본문의 세부 묘사도 현지 사정과 맞는다

본문의 서술 자체도 메소포타미아를 정확히 반영한다. 창세기 11장 3절은 돌 대신 구운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접착제로 썼다고 적는다. 석재가 나지 않는 충적평야에서 실제로 쓰던 공법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구운 벽돌은 중요한 공공 건축에 쓰였고 햇볕에 말린 벽돌은 그보다 덜 중요한 건물과 살림집에 쓰였다. 2절의 ‘시날’은 바빌로니아, 곧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이런 세부가 이스라엘 저자에게는 낯선 것이었다는 점이 오히려 중요하다. 구운 벽돌과 역청은 고대 이스라엘의 건축 관행이 아니었다. 곧 저자는 자기 지역의 관행이 아닌 것을 알고 적었다.

다만 본문의 ‘탑’을 곧바로 지구라트와 동일시하는 데 반대하는 견해도 있다. 히브리어 מִגְדָּל(미그달)은 성벽에 딸린 망루를 비롯해 온갖 종류의 탑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이고, 성서 안에서 이 낱말은 주로 방어 시설의 탑에 쓰인다. “성읍과 탑”이라는 표현이 도시와 그 성채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무대가 바빌론으로 명시되어 있으므로 에테메난키와 연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데는 의견이 모인다.

문헌 증거와 고고학 증거를 함께 놓고 볼 때 이런 이야기를 쓸 만한 저자의 시대는 포로기 이후로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는 것이 성서학 쪽의 정리다. 이 시기 판단은 두 번째 물음과 직접 연결된다. 이야기가 사건으로부터 수천 년 뒤에 쓰였다면, 본문이 전하는 것은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저자 시대의 바빌론에 대한 서술이 된다.

사건 쪽으로 넘어가면 자료가 끊긴다

두 번째 물음, 곧 언어가 한 시점에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이 흩어진 일이 실제로 있었느냐는 물음에는 뒷받침할 자료가 없다. 네 방향에서 확인된다.

메소포타미아 문헌에 대응하는 이야기가 없다

바빌론이 무대인 이야기라면 바빌로니아 문헌에 비슷한 것이 남아 있을 법하다. 그러나 시어도어 히버트는 메소포타미아 문학에 창세기 11장에 견줄 만한 이야기가 없다고 정리한다. 그가 지목하는 유일한 후보가 다음 항목이다.

‘누딤무드의 주문’은 번역이 확정되지 않았다

수메르 서사시 「엔메르카르와 아라타의 군주」는 우루크의 왕 엔메르카르가 아라타에 사신을 보내 귀금속을 요구하는 이야기다. 우르 3기(대략 기원전 21~18세기)의 서기 학교에서 전승된 작품으로 니푸르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사본이 나왔다. 그 앞부분에 이른바 ‘누딤무드의 주문’(134~155행)이 들어 있다. 누딤무드는 지혜의 신 엔키의 다른 이름이다.

이 대목의 내용은 이렇게 요약된다. 뱀도 전갈도 하이에나도 사자도 없어 두려움이 없던 시절, 슈부르와 하마지와 수메르와 아카드와 마르투 땅이, 곧 온 세계가 한 언어로 엔릴에게 말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엔키가 사람들의 입에 있는 말에 개입한다.

문제는 그 개입의 방향이다. 사무엘 크레이머는 1943년과 1968년의 논문에서 엔키가 하나였던 언어를 흩었다고 읽었고, 그 독법에서 이 대목은 창세기 11장의 수메르판이 된다. 소르킬 야콥센도 1992년의 논문과 1997년의 번역에서 같은 방향으로 읽는다. 반면 헤르만 판스티푸트는 1994년의 논문과 2003년의 번역에서 정반대로 읽는다. 이 주문이 여러 언어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기원이며, 엔메르카르가 이 주문을 외운 덕분에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알아듣게 된다고 본다. 옥스퍼드의 수메르 문학 전자 코퍼스가 싣는 번역도 “모두가 한 언어로 엔릴에게 함께 아뢰기를”이라는 쪽을 따른다. 야콥 클라인은 2000년에 이 대목을 다시 검토하는 논문을 따로 냈다.

두 독법의 차이는 결정적이다. 크레이머와 야콥센이 옳다면 창세기와 계보가 이어질 가능성이 열리고, 판스티푸트가 옳다면 이 대목은 언어 혼란 이야기가 아니라 언어 통일에 대한 기원이 된다. 판정은 아직 나지 않았다. 히버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크레이머의 해석 자체가 창세기 11장을 교만과 형벌의 이야기로 보는 전통적 독법을 전제한 데서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다른 문화권의 유사 전승은 기록 시기가 늦다

바벨탑과 닮은 이야기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것이 멕시코 촐룰라의 대피라미드 전승이다. 도미니크회 수사 디에고 두란(약 1537~1588년)이 『신에스파냐 인디아스의 역사』를 비롯한 저작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촐룰라의 늙은 사제가 전한 이야기에서는 해가 처음 떠올랐을 때 거인들이 땅에 있었고 그들이 해에 닿는 탑을 세우기로 했다가, 창조신이 노하여 하늘의 거주자들에게 탑을 부수고 거인들을 흩게 했다. 다른 판본에서는 홍수에서 살아남은 일곱 거인, 그중에서도 셀루아가 다시 그런 재앙을 막을 인공 산을 쌓다가 신들이 불을 내려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구조는 분명히 닮았다. 그러나 이 전승은 16세기 에스파냐 수사들이 기록한 것이다. 성서를 잘 아는 선교사가 현지 이야기를 듣고 옮기는 과정에서 성서의 틀이 섞여 들어갔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 이야기가 온전히 콜럼버스 이전의 전승인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 있다.

언어학은 그런 사건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대에 닿지 못한다

비교 방법 친족 관계에 있는 언어들의 낱말을 대응시켜 규칙적인 소리 대응을 찾아내고, 그것을 근거로 사라진 공통 조상 언어를 재구하는 역사언어학의 기본 절차다. 인도유럽조어와 셈조어가 이 방법으로 재구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응의 흔적이 소실되므로 이 방법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깊이에는 한계가 있다.

비교 방법이 닿는 최대 깊이는 대체로 6천~8천 년으로 잡힌다. 조해나 니컬스의 1997년 정리가 이 수치의 표준 출처로 인용된다. 아프로아시아어족의 추정 연대를 근거로 1만 년 언저리까지 상한을 잡는 견해도 있다. 하버드의 역사언어학자 제이 야산오프도 확실하게 식별되는 가장 깊은 어족들의 나이를 6천~8천 년으로 적는다.

이 한계가 뜻하는 바는 단순하다. 인류 언어의 분화는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걸쳐 진행되었고, 언어학이 재구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모든 언어가 하나로 수렴하는 지점은 확인되지 않는다. 특정 시점에 단일 언어가 갑자기 여러 갈래로 나뉜 흔적도 나오지 않는다.

덧붙여, 언어 혼란과 사람들의 흩어짐은 그 성격상 유물을 남기지 않는다. 건물은 기초가 남고 벽돌이 남지만, 말이 통하지 않게 된 사건은 발굴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두 번째 물음이 첫 번째 물음과 달리 결말이 나지 않는 것은 자료가 아직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종류의 사건에 맞는 자료가 애초에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성을 주장하는 쪽의 논거와 그 한계

학계 전체가 한 방향으로 모여 있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 복음주의 성서학 진영에는 창세기 11장 1~9절이 실제로 일어난 초기 인류사의 사건을 반영한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2019년 미국 남침례신학교에 제출된 한 석사 논문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바벨탑 사건을 노아와 그 뒤 세 세대의 시대에 놓고 고고학 발견과 고대 자료와 톨레도트 구조를 근거로 역사성을 논증하려 한다. 이런 연구들이 드는 근거는 대체로 셋이다. 지구라트 건축 전통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갑자기 나타난다는 점, 창세기 10장의 민족 목록이 실제 지리와 맞아떨어진다는 점, 그리고 창세기 편집 구조가 이 대목을 역사 서술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반대편의 지적은 이렇다. 지구라트는 우루크 시대 이래의 신전 기단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한 형태이고, 민족 목록이 실제 지명을 쓴다는 것은 저자가 자기 시대의 세계를 알았다는 뜻이지 홍수 직후의 세계를 기록했다는 뜻이 아니며, 편집 구조는 편집자의 의도를 보여 줄 뿐 사건의 실재를 보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대로 창세기 10장과 11장은 시간 순서조차 맞물리지 않는다. 10장에서 이미 각 족속이 저마다의 언어를 쓰고 있는데 11장은 온 땅의 말이 하나였다고 시작한다.

결국 이 논쟁은 자료의 문제라기보다 전제의 문제다. 역사적 사실 여부와 종교적 권위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이 다르면 같은 자료를 놓고도 결론이 달라진다.

결론 — 건물은 확인되고 사건은 확인되지 않으며, 그 구분이 이 이야기를 읽는 출발점이다

지금까지 확인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창세기 11장의 탑에 해당하는 건축물은 실재했다. 바빌론의 에테메난키는 일곱 층에 높이와 한 변이 모두 91미터 안팎이었고, 기원전 229년에 필사된 에사길라 서판이 그 치수를 전하며 콜데바이의 발굴이 기단의 규모를 확인해 주었다. 산헤립의 파괴와 에사르하돈·나보폴라사르·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재건, 안티오코스 1세 때의 잔해 철거까지 그 내력도 추적된다. 본문의 세부 묘사, 곧 구운 벽돌과 역청과 시날이라는 지명도 현지 사정과 맞는다.

그러나 언어 혼란과 흩어짐이라는 사건 쪽에서는 자료가 끊긴다. 메소포타미아 문헌에 대응하는 이야기가 없고, 유일한 후보인 ‘누딤무드의 주문’은 언어를 흩는 내용인지 통일하는 내용인지조차 확정되지 않았으며, 촐룰라 전승은 16세기 선교사의 기록이어서 독립성을 보증하기 어렵고, 비교언어학이 닿는 6천~8천 년의 범위 안에는 모든 언어가 하나로 모이는 지점이 없다.

이 구분을 세워 두는 일이 실용적인 이유는, 두 물음을 섞으면 양쪽 모두 답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건물이 실재하므로 사건도 실재했다는 추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건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본문이 허구라는 결론도 본문이 하는 일을 놓친다. 창세기 11장은 실재하는 도시와 실재하는 건축 관행을 재료로 삼아 무언가를 말하려 한 글이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는 고고학이 아니라 본문 읽기로 답해야 하는 문제다.

남는 물음은 저작 시기다. 이 이야기가 언제 쓰였는지가 정해지면 저자가 실제로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곧 완성된 지구라트를 보고 있었는지 방치된 잔해를 보고 있었는지가 달라진다. 에테메난키가 여러 차례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졌으며 결국 미완성으로 남았다는 사실은 그 물음을 더 흥미롭게 만든다. 그러나 창세기 11장의 저작 연대를 좁힐 결정적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