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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는 왜 자연신학을 거부했는가 — 1934년의 결정이 불트만과의 결별과 선택 교리 재구성으로 이어진 경로

신학의 출발점을 인간에게서 계시로 되돌린다는 하나의 결정이 자연신학 거부와 불트만과의 결별과 예정론 재구성을 함께 낳았다. 그 되돌림은 고백의 복원이 아닌 재구성이었다.

2026년 9월 12일

1934년 5월 바르멘, 그리고 같은 해의 소책자

1934년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독일 부퍼탈의 바르멘에서 개신교 총회가 열렸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지 1년 남짓 지난 시점이었고, 나치 이념에 동조하는 '독일 기독교인' 운동이 교회 안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이 운동은 민족과 혈통과 역사 속의 지도자를 하나님이 독일 민족에게 주신 질서로 보고, 그 질서를 교회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회는 이에 맞서 선언문을 채택했다. 초안을 쓴 사람은 본 대학 신학 교수였던 스위스인 카를 바르트(1886~1968)다.

선언의 첫 명제는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듣고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라고 밝히고, 그 밖의 사건이나 세력이나 인물이나 진리를 교회 선포의 원천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겨냥한 것은 창조 질서와 민족성과 역사를 하나님을 아는 통로로 내세우는 논법 전체다.

같은 해 바르트는 취리히의 신학자 에밀 브루너(1889~1966)가 낸 『자연과 은혜. 카를 바르트와의 대화』에 『아니오! 에밀 브루너에게 답함』이라는 소책자로 응답했다. 두 사람은 10여 년 동안 같은 신학 운동의 동료였다. 바르트는 브루너가 독일의 교회 투쟁에서 자신을 뒤에서 무너뜨린다고 보았다. 브루너의 글에 '독일 기독교인' 쪽에서 박수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하나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자연신학 거부, 불트만과의 결별, 선택 교리의 재구성은 신학의 출발점을 인간에게서 계시로 되돌린다는 하나의 결정이 세 자리에서 나타난 결과이며, 그 되돌림은 개혁파 고백을 복원한 작업이 아니라 개혁파 전통 안에서 다시 구성한 작업이었다.

함께 출발한 사람들 — 변증법적 신학의 공유 전제

바르트는 1919년에 『로마서 주석』을 냈고 1922년에 전면 개정판을 냈다. 스위스 자펜빌의 시골 목사로 일하던 시절에 쓴 책이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질적 단절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와 도덕과 문화의 연장선 위에 있지 않고 그것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변증법적 신학 1920년대 독일어권에서 바르트, 불트만, 프리드리히 고가르텐, 에밀 브루너,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등이 공유한 신학 운동이다. 위기의 신학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이 공유한 전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하나님을 인간 문화의 한 요소로 만들었다는 진단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 쪽에서 건널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판단이다. 변증법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어떤 진술도 그대로 성립하지 않고 반대 진술과 함께 놓여야 한다는 뜻에서 붙었다. 운동은 1930년대에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진다.

불트만은 1922년에 『로마서 주석』 2판을 서평하면서 이 운동에 합류했다. 두 사람이 공유한 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전제였다. 갈라진 것은 그 단절이 건너진 뒤에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였다.

브루너와의 결별 — 접촉점이라는 낱말 하나

브루너의 주장은 온건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해 온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인간이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고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형식적 능력이 남아 있다고 보았다. 이 남은 능력을 그는 접촉점(Anknüpfungspunkt)이라 불렀다. 짐승은 복음을 들어도 아무 반응이 없지만 사람은 듣고 반응한다는 사실 자체를 그는 그 능력의 증거로 들었다.

접촉점 독일어 Anknüpfungspunkt.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에게 닿을 때 인간 쪽에 있어야 하는 최소한의 수용 능력을 가리킨다. 선교 현장에서 낯선 문화권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문화 안에 이미 있는 종교적 물음이나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는 실천도 이 개념에 기대어 정당화되었다. 브루너는 이 능력이 구원을 만들어내지는 않는 형식적인 것이라고 한정했고, 바르트는 그 한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바르트의 답은 전면 거부였다. 은혜 없는 이성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이며 진지하게 다룰 만한 신학적 인식을 산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 쪽에 접점이 있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 접점이 계시의 조건이 되고, 결국 인간이 무엇을 계시로 받아들일지 판정하게 된다는 논리였다.

여기서 개혁 전통 안의 문제가 드러난다. 바르트가 거부한 것에는 브루너 개인의 주장과 함께 개혁파 고백서에 명시된 조항도 들어 있었다. 1561년 기 드 브레가 작성한 벨직 신앙고백 제2조가 그것이다.

Wij kennen Hem door twee middelen. Ten eerste door de schepping, onderhouding, en regering der gehele wereld; overmits deze voor onze ogen is als een schoon boek, in hetwelk alle schepselen, grote en kleine, gelijk als letteren zijn, die ons de onzienlijke dingen Gods geven te aanschouwen, namelijk Zijn eeuwige kracht en Goddelijkheid, als de apostel Paulus zegt, Rom. 1:20; welke dingen alle genoegzaam zijn om de mensen te overtuigen, en hun alle onschuld te benemen. Ten tweede geeft Hij Zichzelven ons nog klaarder en volkomener te kennen door Zijn heilig en Goddelijk Woord.

우리는 두 가지 수단으로 그분을 안다. 첫째는 온 세계의 창조와 보존과 통치다. 이것이 우리 눈앞에 아름다운 책과 같아서, 그 안의 모든 피조물이 크든 작든 글자와 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보여 준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20절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하며 그들에게서 모든 변명을 빼앗는다. 둘째로 그분은 자신의 거룩하고 신적인 말씀을 통해 자신을 더 밝고 더 온전하게 알려 주신다.

벨직 신앙고백(1561) 제2조, 고전 네덜란드어판. 한국어는 직접 옮김.

이 조항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구분하고 앞의 것을 실재로 인정한다. 바르트의 거부는 브루너를 겨눈 동시에 자기 전통의 이 조항을 겨눈 것이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간 이유를 1934년이라는 시점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창조 질서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논법이 실제 정치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그는 같은 해에 보고 있었다.

종교는 불신앙이다 — 『교회교의학』 제17절

바르트는 1932년부터 『교회교의학』(Die Kirchliche Dogmatik)을 내기 시작했다. 1967년까지 이어진 이 연작은 원래 열넷으로 나뉜 권에 9천 쪽 분량이다. 제목에 기독교 대신 교회라는 말을 쓴 이유를 그는 첫 권 머리말에서 밝혔다. 교의학은 교회 안에서만 학문으로 성립한다는 것이다.

1938년에 나온 I/2권의 제17절 제목은 「종교의 지양으로서의 하나님의 계시」다. 독일어 Aufhebung은 없애는 것과 들어 올리는 것을 함께 뜻하는 말이고, 바르트는 그 두 뜻을 다 쓴다. 절의 앞부분에서 그는 종교를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붙잡으려는 시도로 규정하고 그것을 불신앙이라고 부른다. 기독교도 종교인 한 예외가 아니다. 계시의 빛에서 보면 기독교라는 종교는 다른 종교들이 놓인 일반의 영역 안에 있는 특수한 것이며, 독특하지만 유일하지는 않다는 서술이 같은 절에 있다.

그러나 절의 뒷부분에서 그는 참된 종교가 있다고 말한다. 의롭다 함을 받은 죄인이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죄인은 스스로 의로워서 의롭다 함을 받지 않는다.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가 참된 종교인 것은 계시가 그것을 붙들어 의롭다 하기 때문이며 그 내용이 우월해서가 아니라는 논법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종교 간 우열 비교라는 물음의 틀 자체를 폐기한다. 슐라이어마허가 발전 단계와 순도로 답하려 했던 물음이 여기서는 잘못 설정된 물음이 된다.

제17절이 1938년에 나왔다는 사실이 내용과 무관하지 않다. 절의 앞부분에서 그는 당시 독일에서 벌어지던 자연종교의 부상과 '독일 기독교인' 운동을 직접 언급한다. 종교 비판의 대상에 자기 교회가 포함되어 있다.

성경은 계시의 증언이다 — 세 형태의 말씀

바르트의 성경관은 개혁파 정통과 어긋나는 자리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성육신하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첫째이고,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둘째이며, 선포된 말씀인 설교가 셋째다.

이 배열에서 성경은 계시를 증언하는 인간의 글이며, 그 자체로 계시인 것은 아니다. 예언자와 사도들이 계시를 받고 그것을 자기 시대의 언어와 세계상으로 증언한 기록이며,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실 때 우리에게 말씀이 된다. 성경에 역사적·과학적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여지를 그는 닫지 않았다.

개혁파 정통에서 바르트를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지점이 여기다. 성경의 권위가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시는 사건에 걸리면, 어느 부분이 지금 말씀인지를 판정하는 주체가 결국 읽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바르트 쪽의 답은 그 판정이 성령의 몫이며, 본문을 그 자체로 계시와 동일시하는 태도야말로 하나님을 인간이 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1952년, 불트만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

바르트와 불트만의 결별은 1930년대부터 분명해졌고 1952년에 공개 논쟁이 되었다. 그해 바르트는 『루돌프 불트만.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글을 냈다.

바르트가 문제 삼은 것은 번역이라는 과제가 불트만에게 첫째 관심사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복음을 현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옮기는 일이 신학의 첫 과제가 되면, 현대인이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기준이 신학의 내용을 규정하게 된다. 그러면 자유주의가 형태만 바꿔 돌아온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불트만이 말한 선이해, 곧 본문을 이해하려면 해석자가 자기 실존에 대한 물음을 이미 품고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바르트에게는 인간학이 신학의 조건이 되는 자리로 보였다.

같은 글에서 바르트는 자기 이야기도 한다. 자기에게는 번역 문제가 애초의 동기가 아닌 결과였고, 불트만이 고가르텐과 가까운 만큼 자기보다 더 루터적인 사람일 것이라고 적었다. 1952년 성탄 전야에 불트만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이 점점 더 친첸도르프 쪽 사람이 되어 간다고 썼다. 신약성서에서 중심 인물 자체에만, 또는 모든 것을 그 중심 인물의 빛 아래에서만 다루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불트만 쪽의 반론은 바르트가 해석학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성경이 현대인에게 어떻게 이해되는가라는 물음을 회피하면 신학은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언어로 남는다는 지적이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했지만 합의하지 못했다. 다만 두 사람 다 바르멘 선언 제1명제를 자기 신학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남는다. 갈라진 것은 그 유일성을 받아들인 다음 무엇을 할 수 있는가였다.

선택 교리를 다시 짜다 — 『교회교의학』 II/2

1942년에 나온 II/2권은 바르트가 개혁파 전통 안에서 가장 크게 손을 댄 곳이다.

이중예정 하나님이 영원 전에 어떤 사람을 구원으로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두어 멸망에 이르게 하신다는 교리다. 선택과 유기가 각각 대상을 가진다는 점에서 이중이라 부른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 3권 21~24장에서 이를 다루었고, 도르트 신조(1618~19)가 개혁파의 공식 입장으로 정리했다. 이 교리의 목적은 구원이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음을 밝히는 데 있었으나, 하나님이 누구를 버리기로 미리 정하셨다는 진술 때문에 가장 많은 반발을 받아 온 조항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이 구도를 그리스도론 안으로 옮겼다. 제32절의 명제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밝힌다. 선택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죄인인 인간을 위해 정하시고 죄인인 인간을 자기를 위해 정하시는 일이다. 수많은 개인 가운데 일부를 골라내고 나머지를 간접적으로 버리는 절차가 여기서 사라진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돌아갈 버림받음을 그 결과까지 자기가 떠맡으신다. 아들로서 하나님이 자기 몫으로 택한 것이 배척과 배신과 사형 판결과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는 이 교리를 복음의 총화라고 불렀다. 예정론이 복음으로 들리도록 서술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요구였다.

즉시 제기된 비판은 이것이 만인구원론이라는 것이었다. 유기가 그리스도에게서 이미 소진되었다면 남는 사람이 없다는 논리다. 만인구원론은 교회사에서 여러 차례 신약과 어긋나는 이설로 배척된 주장이다. 바르트는 구원받는 사람의 범위와 수에 관해 진술하기를 계속 거부했다. 모든 사람이 끝내 하나님께 응답하리라고 예언할 수도 없고 그 반대를 예언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II/2권 529쪽에서 그는 교회가 만인구원을 설교해서는 안 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무력하다거나 인간의 악의가 그 은혜보다 강하다고 설교해서도 안 된다고 적는다.

비판은 이 거부가 체계상의 결과를 되돌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선택의 대상이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개인이 최종적으로 배제될 근거가 그 체계 안에 남지 않는다. 바르트가 답을 유보한 것은 개인의 신중함이지 교리 자체가 요구한 결과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개혁 신학이 바르트에게 제기하는 청구서

개혁 신학 진영의 평가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자유주의에 맞서 하나님의 객관적 실재와 계시의 우선성을 회복한 공은 인정한다. 동시에 세 자리에서 고백의 경계를 넘었다고 본다.

첫째는 성경관이다. 성경이 사용될 때 말씀이 된다는 규정은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과 다르다.

둘째는 선택 교리다. 유기의 대상이 그리스도 한 분으로 수렴되면 최후 심판을 말할 언어가 약해진다.

셋째는 자연계시와 일반은총이다. 창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통로를 전면 부정하면, 신자가 아닌 사람이 만든 학문과 예술과 제도를 신학적으로 긍정할 근거가 사라진다. 네덜란드 개혁파가 특히 이 대목에서 바르트를 따르지 않았다. 창조 질서를 인정해야 학문과 정치와 예술이 각기 하나님 아래 고유한 영역을 갖는다는 주장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반대편의 답도 분명하다. 자연계시를 인정하면 그것을 판정하는 기준이 인간 쪽에 놓이고, 그 기준은 시대의 지배적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1930년대 독일에서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바르트 쪽의 증거다.

여기서 두 입장이 서로 다른 위험을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자연계시를 인정하는 쪽은 창조 교리와 문화 활동의 근거를 잃는 것을 더 큰 위험으로 보고, 거부하는 쪽은 시대의 가치관이 계시의 이름으로 들어오는 것을 더 큰 위험으로 본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교리 논증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각자가 실제로 겪은 역사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결론 — 출발점을 되돌린 일과 고백을 복원한 일은 같지 않다

바르트가 한 일은 신학의 출발점을 인간 쪽에서 계시 쪽으로 되돌린 것이다. 그 하나의 결정에서 세 가지가 함께 나왔다. 인간 안에 계시를 받아들일 접점이 있다는 주장을 거부한 것, 복음을 현대인의 이해 가능성에 맞춰 번역하는 일을 신학의 첫 과제로 삼는 태도를 거부한 것, 그리고 선택을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 내린 결정으로 다시 서술한 것이다. 세 가지는 같은 원칙의 세 적용이다. 어느 하나를 떼어내어 평가하면 바르트의 판단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그 결정의 정치적 배경도 분리되지 않는다. 1934년에 그는 창조 질서와 민족성을 계시의 원천으로 내세우는 논법이 어디까지 가는지를 보고 있었고, 자연신학 거부는 그 논법을 원천에서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이 사실은 그가 무엇을 가장 큰 위험으로 계산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의 신학이 상황의 산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동시에 출발점을 되돌린 일이 개혁파 고백을 복원한 일은 아니었다. 벨직 신앙고백 제2조는 창조를 통한 하나님 인식을 실재로 인정하고, 도르트 신조는 선택과 유기를 각각 대상을 가진 것으로 서술하며, 개혁파 정통은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 바르트는 세 자리 모두에서 다른 서술을 내놓았다. 그가 회복한 것은 하나님이 신학의 대상이라는 원칙이었고,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는 전통의 여러 조항을 다시 썼다.

남는 물음은 그 재작성이 필요했는가다. 자유주의에 맞서면서 고백의 내용을 유지하는 길이 있었다면, 바르트가 감수한 대가는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바르트보다 한 세대 앞서 그 길을 시도한 사람이 네덜란드에 있었고, 20세기 후반에는 바르트가 비판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상(像) 자체가 19세기 연구자들의 구성물이었다는 반론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