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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신학은 근대에 어떻게 응답했는가 — 바빙크의 유기적 서술과 멀러가 뒤집은 정통주의 통설

개혁 신학이 예정론에서 전체를 연역한 메마른 체계라는 설명은 19세기에 만들어졌다. 그 설명을 만든 사람은 슐라이어마허의 제자였고, 원전 조사가 그 상(像)을 무너뜨리는 데 150년이 걸렸다.

2026년 9월 12일

1844년 취리히, 예정론을 중앙 교리로 지목한 신학자

1844년 취리히 대학의 알렉산더 슈바이처(1808~1888)가 『개혁교회의 신앙론』 제1권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개혁파 신학과 루터파 신학이 서로 다른 근본 방향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루터파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문제에 집중해 율법주의를 극복하려 했고, 개혁파는 피조물을 신격화하는 이교화의 문제에 집중했다고 그는 보았다. 이 차이에서 개혁파의 근본 교리가 도출되는데, 그것이 예정론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는 1854년부터 1856년까지 『개혁교회 안에서 전개된 개신교의 중앙 교리들』을 내어 이 주장을 확장했다.

슈바이처가 누구인지가 이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그는 1832년부터 1833년까지 베를린에서 공부하며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를 만났고, 그 만남이 자기 신학의 방향을 결정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개혁 신학을 하나의 중앙 교리에서 연역된 체계로 보는 설명은 슐라이어마허 학파 안에서 만들어졌다.

중앙 교리 독일어 Zentraldogma. 한 신학 체계 전체가 하나의 핵심 교리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된다고 보는 설명 방식이다. 개혁 신학의 경우 그 핵심 교리가 예정론이라는 것이 19세기 이래의 통설이었다. 근거로 자주 제시된 것이 서술 순서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예정을 구원론을 다루는 3권에 두었는데, 후대 개혁파 교의학은 이를 하나님론 쪽으로 옮겨 앞에 배치했다. 위치가 앞으로 간 것은 그것이 체계 전체를 떠받치는 자리로 올라갔다는 뜻이라는 해석이다.

이 글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하나다. 개혁 신학은 근대에 방어만 하지 않고 두 방향으로 응답했다. 헤르만 바빙크는 고백의 내용을 유지한 채 서술 방식과 적용 범위를 근대 학문의 조건에 맞춰 다시 세웠고, 리처드 멀러는 개혁파 정통주의에 대한 통설의 출처를 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것이 19세기 관념론의 체계 개념을 17세기에 소급한 구성물임을 보였다.

중앙 교리 논제가 20세기에 굳어진 경로

슈바이처의 설명은 19세기 후반에 확산되었다. 여기에 다른 계열의 서술이 겹친다. 마르부르크의 하인리히 헤페(1820~1879)는 1861년 『개혁교회의 교의학』을 내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개혁파 신학자들의 원문을 주제별로 뽑아 엮었다. 이 책은 나중에 바르트가 서문을 붙여 재간행할 만큼 널리 쓰였는데, 개혁파 정통주의를 인용문의 모음으로 접하게 만든 효과도 함께 남겼다. 한 신학자의 논증 전체 대신 주제별로 잘린 문장을 읽으면, 그 문장이 어떤 본문 주해에서 나왔는지가 보이지 않는다.

20세기에 이 설명이 굳어진 데는 두 가지가 작용했다. 하나는 문헌 배치를 근거로 삼는 습관이다. 예정론이 책의 어느 자리에 놓였는지를 체계 구성의 증거로 읽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신학적 동기다. 바르트와 그 계열의 연구자들에게 개혁파 스콜라주의는 이성에서 출발한 신학의 사례였고, 이 판정은 자기 신학의 필요를 설명해 주었다. 1966년 영국의 바질 홀이 낸 논문 「칼뱅에 맞선 칼뱅주의자들」이 이 구도에 이름을 주었다.

통설의 내용은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칼뱅은 성경에 충실하고 그리스도 중심이며 목회적인 신학을 했는데, 그의 후계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중세 스콜라적 방법을 끌어들여 신학을 논리 체계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 체계는 예정이라는 하나의 원리에서 나머지를 연역하며, 그 과정에서 종교개혁의 생동하는 신앙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라이덴에서 캄펀으로 — 바빙크가 놓인 자리

같은 시기 네덜란드에서 다른 종류의 응답이 나왔다. 헤르만 바빙크(1854~1921)는 분리파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분리파는 1834년 네덜란드 국가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보수 개혁파 집단이다. 그는 캄펀의 교단 신학교에서 한 해를 보낸 뒤 1874년 라이덴 대학으로 옮겼다. 더 학문적인 신학 훈련을 받겠다는 이유였다.

라이덴은 당시 네덜란드 근대주의 신학의 본거지였다. 요하네스 스홀턴, 아브라함 퀴넌, 로데베이크 라우언호프가 그곳에서 가르쳤다. 네덜란드어권에서 '근대주의'라는 말이 신학 진영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도 1858년부터다. 바빙크는 이 교수들의 학문적 방법에 감탄했고 전제와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았다고 기록을 남겼다. 라이덴 시절에 그는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의 영향을 받았고, 그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가 그를 카이퍼의 반혁명당에 소개했다.

1880년 라이덴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882년 캄펀 신학교의 교의학 강사가 되었고, 1902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로 옮겼다. 자유대학교는 카이퍼가 1880년에 세운 학교다. 바빙크는 상원의원으로도 일했고 교육 문제에 관여했다.

그의 주저 『개혁교의학』(Gereformeerde Dogmatiek) 네 권은 1895년부터 1901년까지 캄펀에서 나왔다. 제1권이 서론과 원리, 제2권이 하나님론과 창조, 제3권이 죄와 그리스도, 제4권이 구원과 교회와 종말을 다룬다. 서술 방식은 일정하다. 각 교리마다 교부와 중세와 종교개혁과 그 이후를 훑고, 로마 가톨릭과 루터파와 재세례파와 근대주의의 입장을 정리한 다음 개혁파 입장을 제시한다. 논쟁보다 역사 서술로 설득하는 방식이다.

유기적 영감 — 성경을 받아쓰기로 보지 않는 방식

바빙크가 가장 크게 손을 댄 곳은 성경론이다. 17세기 개혁파 정통 가운데 일부는 영감을 하나님이 저자에게 단어를 불러주고 저자가 받아 적는 과정처럼 서술했다. 이런 설명을 기계적 영감이라 부른다. 이 설명은 성경 안에 문체와 어휘와 관심사의 차이가 뚜렷하다는 사실 앞에서 유지되기 어렵다. 19세기 성서학이 그 차이들을 상세히 밝히면서 문제가 커졌다.

바빙크의 답이 유기적 영감이다. 하나님이 저자의 인격과 언어와 시대와 경험을 그대로 사용하셨고, 그 사용을 통해 기록된 것이 성경이라는 것이다.

De organische inspiratie doet alleen aan de Schrift recht wedervaren. Zij is in de leer der Schrift de uitwerking en toepassing van het centrale feit der openbaring, de vleeschwording des woords. De Λογος is σαρξ geworden, en het woord is Schrift geworden; het zijn twee feiten, die parallel loopen niet alleen, maar ook ten innigste verbonden zijn.

유기적 영감만이 성경에 정당한 대우를 한다. 이것은 성경론에서 계시의 중심 사실인 말씀의 성육신을 전개하고 적용한 것이다.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고, 말씀이 성경이 되었다. 이 두 사실은 나란히 갈 뿐 아니라 가장 깊이 연결되어 있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제1권(캄펀, 1895). 한국어는 직접 옮김.

이 대목에서 그는 성육신과 성경을 같은 구조로 다룬다. 그리스도가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자리까지 내려갔듯, 하나님의 계시도 피조물의 영역으로, 사람과 민족의 삶과 역사로, 꿈과 환상과 탐구와 숙고라는 인간적 형태 전부로, 인간적으로 약하고 천대받는 것에까지 들어갔다는 서술이다. 성경이 인간의 글이 가진 조건을 그대로 겪는다는 사실을 그는 성경론의 결함으로 보지 않고 계시의 방식으로 본다.

이 배치가 바르트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가 중요하다. 바르트도 성경을 인간의 글로 본다. 다만 바르트에게 그 글은 계시를 증언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 말씀이 된다. 바빙크에게 그 글은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적 조건은 그 말씀이 주어진 방식이다. 두 사람 다 기계적 영감을 거부하되 거부한 뒤의 결론이 다르다.

은혜는 자연을 회복한다 — 문화에 대한 신학적 긍정

바빙크의 두 번째 기여는 은혜와 자연의 관계를 정식화한 것이다. 그는 이를 짧은 명제로 여러 차례 반복한다.

Natuur en genade werden ook op dit punt door de Gereformeerden niet uit elkander gerukt, noch vijandig tegenover elkander gesteld, want de genade herstelt de natuur en het evangelie is de vervulling der wet.

개혁파는 이 문제에서도 자연과 은혜를 서로 떼어놓지 않았고 서로 적대하는 것으로 세우지도 않았다. 은혜가 자연을 회복하며, 복음은 율법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제4권(캄펀, 1901), 교회론. 한국어는 직접 옮김.

은혜가 자연을 폐지하지 않고 회복한다는 명제에서 문화에 대한 긍정이 나온다. 창조 세계의 질서가 죄로 손상되었으나 없어지지 않았고, 구원은 그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므로, 가정과 국가와 학문과 예술은 각기 고유한 자리를 가진다. 카이퍼가 영역주권이라고 부른 사상이 이 전제 위에 선다.

일반은총 하나님이 신자와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가리킨다. 비를 내리고 해를 비추는 일, 인간 사회에 질서와 법과 양심이 작동하는 일, 불신자가 학문과 예술에서 참되고 아름다운 것을 산출하는 일이 여기 해당한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특별은총과 구분된다. 칼뱅에게 이미 이 발상이 있으나 이를 문화 활동 전반에 대한 신학적 근거로 확장한 것은 카이퍼와 바빙크다. 이 확장은 개혁 전통 안에서도 논쟁을 낳았고, 1944년 네덜란드에서 클라스 스힐더가 일반은총 개념을 비판하며 교단이 분열하는 데까지 갔다.

여기서 바빙크와 바르트의 거리가 가장 벌어진다. 바르트는 창조 질서를 독립된 규범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국가와 문화의 질서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만 판단된다고 보았다. 1930년대 독일에서 창조 질서를 근거로 민족과 혈통을 신학화한 사례를 그는 그 논법의 귀결로 읽었다. 네덜란드 개혁파는 바빙크 쪽에 남았다. 자연계시와 일반은총을 부정하면 창조 교리와 문화 활동의 근거가 함께 무너진다는 이유였다.

두 바빙크 논제와 그 붕괴

바빙크 해석에는 오랫동안 하나의 틀이 있었다. 그의 저작 안에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분리파 교회에서 자란 정통 개혁파 신학자와 라이덴에서 훈련받은 근대적 학자가 한 사람 안에 공존하며 끝내 통합되지 않았다는 논제다. 이 틀에서 보면 유기라는 개념은 19세기 독일 관념론에서 온 것이고, 그것이 붙은 교리 서술은 정통 신학과 어긋나는 이물질이 된다.

이 논제를 대표한 연구가 얀 베인호프의 1968년 저작 『계시와 영감』이다. 반세기 가까이 바빙크 연구의 표준 해석이었다.

2012년 제임스 에글린턴이 『삼위일체와 유기체. 헤르만 바빙크의 유기적 모티프에 대한 새로운 독해』에서 이 틀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의 논지는 유기라는 개념이 바빙크의 하나님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면 창조 세계는 기계보다 유기체를 닮아야 하고, 하나이면서 여럿인 구조가 창조 전체에 반영된다는 것이 바빙크의 논법이다. 유기 개념의 출처가 삼위일체론과 개혁파 전통에 있다는 결론이다. 에글린턴은 바빙크의 유기적 사고가 네 가지 요소로 정리된다고 본다. 창조 질서가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 통일성이 다양성에 앞선다는 것, 유기체의 공유된 생명이 하나의 이념에 따라 조율된다는 것, 그리고 그 전체가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반박 이후 두 바빙크 논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지지를 잃었다. 후속 연구들은 바빙크를 개혁파 정통의 기반 위에서 두 환경의 일관된 종합을 시도한 한 사람으로 다룬다. 다만 이 재해석을 바빙크에게 긴장이 없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가 근대 학문의 성과를 교의학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감당한 조정의 폭은 여전히 연구 대상이다.

멀러가 원전에서 확인한 것

다른 방향의 응답은 미국에서 나왔다. 리처드 멀러(1948~ )는 듀크 대학에서 종교개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풀러 신학교를 거쳐 칼빈 신학교에서 가르친 역사신학자다. 그는 1987년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의학』 제1권을 냈고, 1993년에 제2권, 2003년에 제3·4권을 내면서 동시에 앞의 두 권도 개정했다. 제1권이 서론과 방법, 제2권이 성경론, 제3권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제4권이 삼위일체론을 다룬다.

이 연작의 방법은 단순하다.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초까지 개혁파 신학자들이 라틴어로 쓴 원전을 대량으로 읽고, 각 저자가 실제로 무엇을 썼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통설 지지자들이 원전 대신 2차 문헌과 선별된 인용에 의존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스콜라주의 중세 대학에서 발전한 학문 서술 방식이다. 하나의 물음을 세우고, 그에 대한 반대 견해들을 정리하고, 개념을 나누어 구분한 다음 답을 제시하는 형식을 갖는다. 라틴어로 강의하고 논쟁하던 학교의 문체이며, 특정한 철학적 입장이나 교리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개신교 스콜라주의는 16세기 후반부터 개신교 대학과 신학교에서 같은 서술 방식이 쓰인 현상을 가리킨다.

멀러의 결론은 다섯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 스콜라주의는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같은 저자가 설교에서는 목회적으로 말하고 교실에서는 스콜라적으로 서술했다. 서술 형식이 딱딱하다는 이유로 내용이 왜곡되었다고 판정하는 것은 장르의 차이를 신학의 차이로 오해한 것이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 사용은 도구이지 원리가 아니다.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은 논리학과 인과 개념 같은 도구를 빌려 썼지만 그 형이상학적 결론까지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성을 신학의 도구로 규정했고 원천이나 원리의 자리에 두지 않았다. 이들의 철학적 배경도 아리스토텔레스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여러 계열이 섞여 있었다. 종교개혁자들 자신도 중세 대학의 학문 훈련을 받았고 같은 도구를 썼다.

셋째, 하나의 중앙 교리에서 전체를 연역한 체계는 없었다. 멀러는 중앙 교리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와 20세기의 범주이며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의 사고에 없던 것이라고 본다. 원전을 보면 개혁파 교의학은 성경 주해와 교리 논쟁이 쌓인 결과물이고, 예정을 하나님의 작정을 다루는 대목에 배치한 것도 서술 순서의 문제였을 뿐 논리적 연역의 결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넷째, 칼뱅을 기준으로 놓는 설정 자체가 잘못되었다. 개혁 전통은 칼뱅 한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마르틴 부처, 하인리히 불링거, 볼프강 무스쿨루스, 피터 마터 베르밀리, 히에로니무스 잔키우스 같은 여러 흐름이 합류했고 칼뱅은 그중 중요한 한 사람이다. 후대 개혁파를 칼뱅과 대조해 평가하는 방식은 전통의 실제 모습을 왜곡한다.

다섯째,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사이에는 연속이 있다. 정통주의자들은 종교개혁의 신학을 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해 다듬고 체계화했다는 것이다. 나중의 연구들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 개혁파 스콜라주의의 저작 자체가 깊이 주해적이었으며, 스콜라적 방법은 주해의 결과를 정리하고 설명하는 데 쓰였다는 것이다.

이 작업의 결과로 바르트 계열의 개혁파 정통주의 비판은 상당 부분 근거를 잃었다. 바르트는 개혁파 스콜라주의를 이성에서 출발한 신학으로 보았는데, 멀러의 논지대로라면 그 판정은 19세기 연구자들이 만든 상(像)을 겨눈 것이 된다. 멀러 자신은 개혁파 정통주의를 무조건 옹호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은 비판하려면 실제로 쓰인 것을 근거로 해야 한다는 데 있다.

남는 쟁점 — 형식과 내용을 그렇게 나눌 수 있는가

멀러의 논제가 학계에서 모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반론은 첫째 항목을 겨눈다.

형식과 내용을 그렇게 깔끔하게 나눌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어떤 물음을 세우고 어떤 구분을 도입할지를 정하는 일 자체가 이미 내용에 관여한다. 질문의 형식이 답의 범위를 정하기 때문이다. 방법이 바뀌었는데 신학의 중심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고 말하려면 그 근거가 따로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다른 반론은 연속성 주장의 범위를 문제 삼는다. 중세와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사이에 연속이 있다는 확인만으로 그 사이에 발전이나 변화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별 교리에서 무엇이 실제로 달라졌는지는 여전히 사례별로 확인해야 할 문제다.

그럼에도 칼뱅과 칼뱅주의자들을 대립시키는 단순한 구도는 1980년대 이후 학계에서 거의 유지되지 않는다. 논쟁의 자리가 옮겨 갔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단절이냐 연속이냐를 다투던 자리에서, 연속 안에서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따지는 자리로 옮겼다.

결론 — 통설의 출처를 확인하는 일이 논쟁의 본체가 되기도 한다

개혁 신학이 근대에 내놓은 응답은 두 종류였다. 바빙크는 고백의 내용을 바꾸지 않은 채 서술 방식을 다시 세웠다. 기계적 영감이라는 설명이 성경 자체의 다양성 앞에서 유지되지 못하자 유기적 영감으로 바꾸었고, 은혜가 자연을 회복한다는 명제로 학문과 문화에 신학적 자리를 주었다. 그가 교리를 재구성하지 않고도 근대 학문과 논쟁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바르트가 감수한 대가가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바빙크의 자연계시 인정은 시대의 가치관이 계시의 이름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열어 둔다는 반대편의 비판을 계속 받는다.

멀러의 응답은 성격이 다르다. 그는 개혁파 정통주의를 변호하는 대신 그것을 비판하는 설명이 어디서 왔는지를 추적했다. 예정론을 중앙 교리로 지목한 최초의 강한 주장은 1844년 슐라이어마허의 제자에게서 나왔고, 체계를 하나의 원리에서 연역된 구조로 보는 발상은 19세기 독일 관념론의 것이었으며, 20세기에 이 구도를 확산시킨 데는 신학적 동기가 함께 작용했다. 통설의 출처가 생각보다 얕다는 확인이 논쟁의 본체가 된 사례다.

두 응답을 함께 놓으면 하나가 드러난다. 개혁 신학과 근대의 관계를 다룰 때 판단은 사실 확인에 달려 있다. 개혁파 정통주의가 메마른 연역 체계였는지는 원전을 읽으면 확인되는 문제이고, 바빙크가 두 인격으로 나뉘어 있었는지도 그의 저작 전체를 읽으면 확인되는 문제다. 두 물음 모두 한 세기 넘게 확인 없이 통설로 통용되었고, 확인된 뒤 답이 뒤집혔다.

남는 물음은 방법의 변화가 신학의 내용을 어디까지 건드리는가다. 멀러의 논지를 받아들이더라도, 질문을 세우고 구분을 도입하는 방식이 답의 범위를 정한다는 지적은 그대로 남는다. 이것은 개혁파 정통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존 분석을 해석 도구로 쓰면 그 도구가 내용을 규정하게 되는가, 계시에서 출발한다고 선언하면 그 선언만으로 인간학의 개입이 차단되는가 하는 물음도 같은 종류다. 신학이 자기 언어를 어디서 가져오는지를 묻는 일은, 19세기에도 20세기에도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