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트만은 자유주의의 역사적 예수 탐구를 거부하면서 신앙의 근거를 선포와 결단으로 옮겼다. 하나님을 서술할 언어를 포기한 그 구조는 케리그마만 예외로 남겨두는 데 근거를 주지 못했다.
1941년 4월 21일, 마르부르크 대학 신약학 교수 루돌프 불트만(1884~1976)이 독일 개신교신학회(Gesellschaft für Evangelische Theologie) 모임에서 강연했다. 제목은 「신약성서와 신화론. 신약성서 선포의 비신화화 문제」였다. 같은 해 활자로 나왔고, 전쟁이 끝난 뒤 이 강연을 둘러싼 논쟁이 여러 권의 자료집으로 묶여 나올 만큼 반향이 컸다.
강연이 던진 문제는 단순하다. 신약성서는 1세기의 세계상 안에서 쓰였다. 그 세계상은 현대인의 것과 다르다. 그러면 교회가 오늘 복음을 선포할 때, 듣는 사람에게 1세기의 세계상까지 사실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해야 하는가. 불트만의 답은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는 것이었다. 전등과 라디오를 쓰고 병이 나면 현대 의학에 의지하면서 동시에 신약성서의 영과 기적의 세계를 믿을 수는 없다고 그는 적었다. 그렇게 요구하면 신앙이 지성의 희생과 맞바뀌고, 결국 신앙이 하나의 공적(功績)으로 바뀐다는 진단이었다.
이 글에서 확인하려는 것은 하나다. 불트만은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탐구를 거부하면서 신앙의 근거를 밖에서 오는 선포와 그 앞의 결단으로 옮겼는데, 하나님을 대상으로 서술할 언어를 포기한 그 구조는 케리그마 하나만 신화에서 면제해 줄 근거를 자기 안에서 마련하지 못했고, 그 미해결 지점을 두고 제자들이 정반대 두 방향으로 갈라섰다.
불트만이 신화적 세계상이라고 부른 것은 구체적이다. 신약성서에서 세계는 세 층으로 되어 있다. 가운데 땅이 있고, 그 위에 하늘이 있으며, 그 아래 지하 세계가 있다. 하늘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사는 곳이고 지하는 지옥이며 고통의 자리다. 땅 위에서는 자연의 인과와 함께 초자연적 힘들이 작동한다. 하나님과 그 사자들, 사탄과 귀신들이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관여한다. 기적이 일어나고, 병은 귀신 들림일 수 있으며, 마지막에는 세상이 끝나고 심판이 온다.
불트만은 이 서술의 재료가 두 곳에서 왔다고 보았다. 하나는 유대 묵시문학이고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의 구속자 신화다. 유대 묵시문학은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나온 문헌군으로, 현재의 악한 세대가 곧 끝나고 하나님이 개입해 새로운 세대를 연다는 구도를 공유한다. 영지주의는 후기 고대의 종교 사상 흐름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구속자가 물질 세계에 갇힌 빛의 요소를 다시 위로 데려간다는 이야기 구조를 갖는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선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 죽고 다시 올라가 만물을 복종시킨다는 서술이 이 계열과 겹친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요소들을 잘라내자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는 제거하는 작업이 아니다. 해석하는 작업이다. 신화의 본래 의도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자기 세계 안에서 자기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표현하는 데 있다고 그는 보았다. 그러므로 신화는 우주론이 아닌 실존의 차원에서 읽어야 한다. 세 층 우주는 천문학적 주장을 담은 진술이 아니다. 인간이 자기 존재의 근거와 한계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힘 아래 있는 것으로 겪는다는 진술이다.
불트만은 자기 방식이 신약성서 안에 이미 있다고 주장했다. 요한복음이 그 예다. 요한복음에서 심판은 예수가 세상에 와서 믿음을 요구했다는 사실 자체이며, 믿는 사람은 이미 생명을 가졌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고 서술된다. 묵시적 종말론이 이미 현재의 사건으로 옮겨져 있다는 것이다. 자기는 요한이 시작한 작업을 이어받을 뿐이라는 논법이었다.
비신화화는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그 앞에 20년에 걸친 본문 연구가 있다. 불트만은 브레슬라우 시절이던 1921년에 『공관복음 전승사』(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를 냈다. 공관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를 가리키는 말로, 서로 겹치는 내용이 많아 나란히 놓고 볼 수 있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 책의 방법을 양식비평(Formgeschichte)이라 부른다. 구약학자 헤르만 궁켈이 창세기 연구에 적용한 방법을 신약에 옮긴 것이고, 마르틴 디벨리우스가 먼저 같은 방향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복음서를 한 저자가 앉아서 쓴 전기로 보지 않고, 문서로 기록되기 전에 입으로 전해지던 짧은 단위들의 모음으로 본다. 각 단위는 그 형식이 정해져 있다. 논쟁 이야기, 기적 이야기, 어록, 비유 같은 유형이 있고, 유형마다 그것이 실제로 쓰이던 자리가 있다. 설교, 교리 교육, 예배, 변증이 그 자리다.
불트만이 이 작업에서 끌어낸 결론은 역사적 예수의 생애와 인격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복음서의 각 단위가 교회의 필요에 따라 형성되었다면, 그 뒤에 있는 실제 사건을 복원하는 일은 방법상 불가능에 가깝다. 1926년에 낸 『예수』는 그래서 전기 대신 예수의 말씀에 담긴 요구를 다루는 책이 되었다.
여기서 그가 의지한 선행 연구가 있다. 할레의 신학자 마르틴 켈러(1835~1912)는 1892년 부퍼탈 목사 수련회 강연을 『이른바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인 성서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냈다. 독일어에서 historisch는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과거를, geschichtlich는 지금 우리에게 작용하는 역사를 가리키는데, 켈러는 이 구분을 신학의 논점으로 만들었다.
Der sogenannte historische Jesus ist für die Wissenschaft nach dem Maßstabe moderner Biographie ein unlösbares Problem; denn die vorhandenen Quellen reichen nicht aus und die ersetzende Kunst ist diesem Probleme nicht gewachsen. Der geschichtliche Christus ist der geglaubte und gepredigte Christus, das Fleisch gewordene Wort.
이른바 역사적 예수는 근대 전기의 기준으로 볼 때 학문이 풀 수 없는 문제다. 남아 있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고, 그 빈자리를 메우는 기술은 이 문제를 감당하지 못한다. 역사 안에서 작용하는 그리스도는 믿어지고 선포된 그리스도, 곧 육신이 된 말씀이다.
마르틴 켈러, 『이른바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인 성서의 그리스도』(1892) 명제 1·2. 한국어는 직접 옮김.
켈러가 근대 전기라고 옮긴 moderne Biographie는 19세기에 쏟아진 예수 전기들을 겨눈 말이다. 그는 그런 저술들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가 저자 자신의 정신을 비춘 상이라고 판정했다. 불트만은 이 판정을 받아들였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근거가 신앙에 필요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1921년 마르부르크로 돌아와 1951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가르쳤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마르틴 하이데거가 같은 대학 철학과에 있었고, 두 사람은 가깝게 교류했다. 하이데거가 1927년에 낸 『존재와 시간』이 불트만의 해석 도구가 된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두 방식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하나는 비본래적 실존이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사는 방식, 자기 존재를 자기가 떠맡지 않고 익명의 세인에게 맡기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본래적 실존이다. 자기 죽음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존재를 떠맡는 방식이다. 사이에 결단이 있다.
불트만은 이 분석 틀로 바울과 요한을 읽었다. 바울이 육체라고 옮기는 σάρξ는 몸이나 감각을 뜻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잴 수 있는 것 전체, 곧 사라지는 것의 영역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 영역에 자기 존재의 근거를 두는 것이 죄이며, 그것을 놓고 밖에서 오는 선포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 믿음이다. 죄와 믿음이 자기 이해의 두 방식으로 규정된다. 도덕 규칙의 준수 여부라는 기준이 여기서 빠진다.
불트만 자신은 철학이 인간 실존의 형식적 구조만 밝혀 줄 뿐이고 내용은 복음이 채운다고 주장했다. 철학은 본래적 실존이 무엇인지 기술할 수 있지만 그리로 옮겨 갈 힘을 주지는 못하며, 그 힘은 선포에서만 온다는 것이다.
이 체계는 종교개혁 전통의 정통 고백과 다섯 자리에서 어긋난다. 여기서 개혁 신학이라 함은 벨직 신앙고백(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도르트 신조(1618~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6)을 기준으로 삼는 전통을 가리킨다.
첫째는 성경관이다. 개혁 고백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본다. 양식비평은 본문을 초대 교회 공동체의 신앙이 형성한 산물로 다룬다. 두 전제는 같은 본문을 두고 서로 다른 질문을 하게 만든다.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서술 가능성이다. 개혁 신학은 하나님이 자신과 자신의 구원 계획을 알려주셨으므로 그것을 조직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고 본다. 불트만은 하나님을 관찰하고 서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놓는 태도 자체를 거부한다.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하시는가뿐이다. 이 제한 아래에서는 삼위일체론이나 예정론 같은 교리 체계를 구성하는 작업이 성립하지 않는다.
셋째는 역사적 예수다. 개혁 전통에서 복음서는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신뢰할 만한 증언이다. 불트만은 그 복원이 불가능하며 신앙에 필요하지도 않다고 본다.
넷째는 부활이다. 불트만은 십자가 처형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 부활은 다르게 다룬다. 그에게 부활은 십자가의 구원 의미를 깨달은 제자들의 신앙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며 지금은 설교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이다. 무덤에서 시신이 되살아난 사건이라는 서술은 여기서 빠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포함한 개혁 고백이 몸의 부활을 실제 사건으로 고백하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다섯째는 종말론이다. 개혁 고백은 재림과 최후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래에 실제로 일어날 사건으로 본다. 불트만에게 종말은 선포를 듣고 결단하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불트만 본인은 자기 작업이 종교개혁을 끝까지 밀고 간 결과라고 주장했다. 논법은 이렇다. 루터의 이신칭의는 인간이 자기 행위로 구원의 근거를 마련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역사 연구로 복음서의 신뢰성을 확보한 다음 그 위에서 믿겠다고 하는 태도는, 인간이 자기 손으로 확보한 것에 신앙을 세우겠다는 태도다. 이것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시도와 구조가 같다는 것이다. 신앙은 아무 안전장치 없이 선포 앞에 서는 일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논리 자체는 종교개혁 전통 안에서 나온 것이다. 불트만은 아버지가 자유주의 신학으로 기운 개신교 목사였고 어머니는 평생 경건주의 신앙을 지킨 집안에서 자랐다. 스승은 마르부르크의 빌헬름 헤르만(1846~1922)이었는데, 헤르만은 리츨을 거쳐 슐라이어마허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계열이면서도 신앙을 교리 지식으로 환원하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 두려 한 신학자였다. 불트만은 19세기 자유주의가 신약의 메시지를 몇 가지 종교적·도덕적 기본 사상으로 축소해 버렸다고 보고 그 노선을 강하게 거부했다. 자유주의에는 하나님의 차원이 빠져 있고, 성경 문자를 그대로 받는 성경주의에는 역사의 차원이 빠져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그가 나치 시기에 취한 태도도 이 자기 이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고백교회에 가담했고 설교에서 나치 이념과 기독교 신앙의 충돌을 지적했다. 공개적 저항으로 나아가지는 않았고 1951년 은퇴할 때까지 교수직을 유지했다. 1934년 바르멘 선언의 제1명제, 곧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이라는 선언을 그는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으로 여겼다. 이 사실은 그를 계시의 유일성을 부정한 사람으로 단순화할 수 없게 만든다.
불트만의 체계에 반복해서 제기된 물음이 있다. 하나님에 대해 실존적 만남 바깥에서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면, 인간과의 만남을 떠난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불트만 본인은 이 물음을 잘못 설정된 물음으로 본다. 그가 거부한 것은 하나님을 대상화하는 태도이고 하나님의 실재 자체는 아니며, 만남에서 주도권은 하나님 쪽에 있다는 것이 그의 서술이다. 그러나 그의 체계는 이 물음에 답할 언어를 갖고 있지 않다. 답하려면 만남 바깥에서 하나님에 대해 진술해야 하는데, 그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자 가운데 이 방향으로 끝까지 간 사람이 헤르베르트 브라운(1903~1991)이다. 마인츠 대학 신약학 교수였고 쿰란 문서 연구로도 알려졌다. 브라운은 하나님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형태의 관계를 가리키는 부호로 규정했다. 하나의 실체라는 지위를 거기서 지웠다. 인간의 세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독자적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고, 자기 신학에 무신론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도 받아들였다. 1964년 2월 13일 마인츠 대학에서 헬무트 골비처와 하나님의 존재를 주제로 벌인 공개 논쟁이 이 문제를 학계 전면에 올렸다.
불트만 자신은 브라운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브라운이 성서의 실존론적 해석을 가장 일관되게 수행했다고 평가했다. 이 두 진술이 함께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성격을 보여준다. 브라운의 결론은 스승의 전제를 끝까지 적용한 결과였고, 불트만의 체계 안에는 그 적용을 막을 장치가 없었다.
1953년 10월 20일, 불트만 문하생 모임인 '옛 마르부르크 사람들'의 회합에서 에른스트 케제만(1906~1998)이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불트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케제만은 1931년 불트만 밑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제자였고, 당시 괴팅겐 대학 신약학 교수였다. 강연은 이듬해 활자로 나왔다.
케제만의 논지는 신앙이 지상의 예수와 완전히 무관하다면 복음이 신화나 이념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가 든 근거는 초대 교회 자체에 있었다. 초기 기독교는 영지주의와 맞서면서 예수의 인간됨을 일관되게 붙들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 나사렛 사람과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했다. 복음서라는 문학 형식이 예수의 지상 활동을 서술하는 형태로 생겨난 이유가 여기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앙을 지상 예수의 역사에 다시 묶어 두는 일은 신학적으로 정당하며, 그렇게 해야 신앙이 신화화와 자의적 해석에서 보호된다.
여기서 이른바 새로운 탐구(New Quest)가 시작된다. 19세기처럼 예수 전기를 복원하자는 요구는 아니다. 부활 이후 교회가 선포한 그리스도와 지상의 예수 사이에 최소한의 연속성을 확보하자는 요구다. 케제만은 공관복음 전승을 걸러낼 기준으로 이중 상이성 기준을 제시했다. 어떤 예수 어록이 당시 유대교 환경에서도 설명되지 않고 초기 기독교의 삶과 가르침에서도 설명되지 않으면 그것은 진짜로 볼 수 있다는 규칙이다. 이 기준은 나중에 이른바 제3의 탐구가 예수를 유대교 안에 놓기 시작하면서 비판을 받게 된다. 예수가 유대교에 속한다는 전제를 세우면 유대교와의 차이를 진위 기준으로 삼는 방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케제만이 스승과 갈라선 자리가 하나 더 있다. 1960년 논문 「기독교 신학의 시작」에서 그는 묵시문학이 모든 기독교 신학의 어머니였다고 적었다. 예수의 선포 자체를 신학이라 부를 수는 없으므로 그렇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불트만이 종말을 실존의 현재 순간으로 옮겨 놓은 자리에, 케제만은 초기 기독교가 실제로 임박한 우주적 종말을 기대했다는 사실을 되돌려 놓았다. 다만 케제만은 예수 자신을 묵시론자로 보지 않았고, 묵시적 기대를 부활절 이후 공동체의 현상으로 규정했다. 스승의 개인주의적 해석이 놓친 공동체와 역사의 차원이 이 주장으로 복구된다.
케제만의 요구를 실제 저술로 옮긴 사람은 귄터 보른캄(1905~1990)이다. 1956년의 『나사렛 예수』는 불트만 진영에서 나온 첫 예수 연구서다. 예수의 생애를 연대기로 재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예수의 선포와 권위 주장의 윤곽은 복음서에서 추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한스 콘첼만(1915~1989)은 방법 자체를 한 단계 옮겼다. 1954년의 『시간의 중심. 누가 신학 연구』에서 그는 누가복음 저자를 신학적 의도를 가진 편집자로 다루었다. 전승의 수집자라는 규정을 여기서 버렸다. 누가가 마가복음과 이른바 Q자료를 어떻게 고쳐 썼는지를 대조해, 이스라엘의 시대와 예수의 시대와 교회의 시대라는 세 시기 구원사 도식이 누가의 설계임을 보였다. 여기서 편집비평(Redaktionsgeschichte)이 출발한다. 양식비평이 본문 뒤의 구전 단위를 향해 거슬러 올라갔다면, 편집비평은 저자가 그 단위들을 배열하며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본다. 콘첼만 자신은 이 구원사 도식을 재림 지연에 대한 타협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방법에서는 새로웠지만 판단에서는 스승 쪽에 있었다.
에른스트 푹스(1903~1983)와 게르하르트 에벨링(1912~2001)은 신해석학으로 갔다. 불트만은 현대인이 성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물었는데, 이들은 방향을 뒤집어 본문이 독자를 해석한다고 보았다. 푹스는 언어사건(Sprachereignis), 에벨링은 말씀사건(Wortgeschehen)이라는 용어를 썼다. 예수의 비유를 교훈의 전달 수단으로 보지 않고, 듣는 순간 청중의 존재가 바뀌는 사건으로 읽는 방식이다. 에벨링은 루터 연구자였기 때문에 종교개혁 전통과의 접점이 학파 안에서 가장 넓다.
반대 방향으로 간 사람이 스위스 바젤의 프리츠 부리(1907~1995)다. 그는 1952년 자료집 『케리그마와 신화』 제2권에 실은 논문에서 불트만이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신화적 요소는 걷어내면서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케리그마 하나만 남겨둔 것은 자의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비신화화는 좋은 출발이지만 비케리그마화(Entkerygmatisierung)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남는 것은 실존철학이 된다. 같은 취지의 비판을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도 제기했다.
영어권으로도 이어진다. 제임스 로빈슨(1924~2016)은 새로운 탐구를 영어권에 소개했고, 존 맥쿼리(1919~2019)는 『존재와 시간』 영역 공역자로서 불트만의 실존론적 틀을 성공회 신학 안으로 옮겼다. 슈베르트 오그던(1928~2019)은 1961년 『신화 없는 그리스도』에서, 불트만이 구원의 계기를 예수라는 한 인물에게만 국한한 것은 자기 전제와 모순된다고 지적하고 화이트헤드 계열 과정철학과 결합시켰다.
불트만이 한 일은 신앙의 근거를 두 번 옮긴 것이다. 자유주의가 붙들던 역사적 예수의 도덕적 인격에서 그것을 떼어냈고, 정통이 붙들던 성경 기록의 사실성에서도 떼어냈다. 남은 자리는 밖에서 오는 선포와 그 앞의 결단이었다. 그 배치에는 일관된 동기가 있다. 인간이 자기 손으로 확보한 어떤 것도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종교개혁의 명제를 역사 연구에까지 적용한 것이다. 신약성서의 세계상을 신앙의 조건으로 요구하면 복음이 현대인에게 들리지 않게 된다는 그의 진단도 그 자체로는 반박하기 어렵다.
대가는 두 곳에서 나타났다. 하나님에 대해 만남 바깥에서 말할 수 없다는 제한은 삼위일체, 창조, 예정 같은 교리를 서술할 언어를 없앴고, 그 결과 하나님이 인간과의 만남을 떠나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 답 없이 남았다. 브라운이 도달한 자리가 그 물음의 한쪽 끝이다. 동시에 신화적 요소를 실존의 진술로 옮기는 절차에는 멈추는 규칙이 없었다. 세 층 우주와 귀신과 승천을 실존의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면,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선포만 그 절차에서 면제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그의 체계는 말해 주지 못했다. 부리가 찌른 자리가 그 물음의 다른 쪽 끝이다.
제자들의 분화는 이 두 미해결 지점을 각각 붙든 결과다. 케제만과 보른캄은 선포가 신화와 구별되려면 지상의 예수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보아 역사 쪽으로 돌아갔고, 브라운과 부리는 남겨둔 것마저 걷어내는 쪽으로 갔다. 케제만이 묵시론을 되살린 일은 그 가운데 가장 넓은 파장을 남겼다. 종말을 현재의 결단으로 축소한 자리에 미래와 공동체와 역사가 다시 들어왔고,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처럼 부활을 역사적 탐구의 대상으로 놓는 노선이 그 뒤를 이었다.
정리하면 불트만의 체계는 자기가 세운 제한을 자기에게도 적용하는 순간 케리그마를 지킬 수 없었다. 그 제한을 유지한 채 하나님에 대해 다시 말하려면 제한 자체를 다른 곳에서 근거 지어야 하는데, 그 시도가 같은 시기에 다른 사람에게서 나왔다. 계시에서 출발하면 하나님에 대해 말할 자격이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두 사람은 1920년대에 같은 운동에서 출발해 30년 뒤 공개 논쟁으로 갈라섰고, 그 논쟁은 합의 없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