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가 1950년에 묶어 놓은 열 가지 기준 이래 도시와 국가는 한 사건으로 다뤄졌다. 차탈회윅과 트리필랴와 인더스의 자료는 그 묶음이 필연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고고학에서 ‘도시가 생겼다’는 말과 ‘국가가 생겼다’는 말은 오랫동안 같은 사건을 가리켰다. 이 묶음을 만든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다.
차일드는 1936년 『인간은 스스로를 만든다』에서 신석기 혁명과 도시 혁명이라는 두 용어를 썼고, 1950년 『타운 플래닝 리뷰』 21권 3~17쪽에 실은 논문에서 최초의 도시를 가려내는 열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목록은 이렇다. 이전 어떤 취락보다 넓고 인구가 조밀할 것, 전업 장인과 운송업자와 상인과 관리와 사제가 있을 것, 생산자가 잉여를 신이나 왕에게 바쳐 그것이 한곳에 모일 것, 기념 건축이 있을 것, 잉여를 받는 지배 계급이 있을 것, 문자가 있을 것, 산술과 기하와 천문이 있을 것, 양식화된 예술이 있을 것, 원거리 교역이 있을 것, 혈연 대신 거주지에 근거한 소속이 있을 것.
목록을 보면 성격이 다른 두 가지가 섞여 있다. 규모·밀도·분업·교역은 취락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관한 항목이다. 잉여의 집중, 지배 계급, 왕이나 신에게 바치는 조세는 권력이 어떻게 짜였는지에 관한 항목이다. 차일드는 이 둘이 함께 나타난다고 보았고, 근거는 메소포타미아였다. 우루크에서는 도시가 커지는 것과 신전이 서고 회계 기록이 생기고 계급이 갈라지는 것이 실제로 함께 일어났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한 사례에서 함께 나타났다고 해서 두 가지가 늘 붙어 다니는 것은 아니다. 지난 30년의 발굴은 규모는 도시급인데 권력의 흔적이 없는 취락을 여러 곳에서 확인했다.
루마니아 동부, 몰도바, 우크라이나 중서부에 걸친 쿠쿠테니-트리필랴 문화는 기원전 5100년 무렵부터 2800년 무렵까지 이어졌다. 밀과 보리와 콩을 재배했고 채색 토기와 초기 야금술을 가졌다. 이 문화의 중기, 곧 기원전 4100년에서 3400년 사이에 유럽에서 가장 큰 취락들이 나타난다.
규모부터 보면 이렇다. 탈리안키는 320헥타르가 넘고, 마이다네츠케는 200헥타르를 넘으며, 네벨리우카는 238헥타르다. 같은 시기 메소포타미아의 우루크가 대략 100헥타르에서 시작해 기원전 3000년 무렵 400헥타르에 이르렀으므로, 면적만 놓고 보면 트리필랴 거대 취락은 세계에서 가장 큰 취락에 속했다.
2010년대의 자력계 탐사로 평면도가 드러났다. 영국과 우크라이나 공동 조사단이 네벨리우카에서 얻은 완전한 평면도는 얕은 둘레 도랑 안에 238헥타르가 들어가는 형태다. 가옥은 여러 겹의 동심원을 이루며 늘어서고, 원과 원 사이에는 넓은 빈 공간이 있다. 안쪽으로는 방사형 도로가 뻗어 가운데의 열린 공간에 닿는다. 확인된 구조물은 1천 채가 넘고, 네벨리우카에서만 가옥으로 보이는 자기 이상이 1천 500개 잡혔다. 헥타르당 가옥 밀도는 10~20채로, 조밀하게 붙여 지은 형태가 아니다.
여기까지는 계획된 큰 취락의 모습이다. 그런데 없는 것이 있다. 궁전이 없고, 신전으로 분류할 만한 별도 건물이 없으며, 부장품이 두드러지는 무덤이 없다. 가옥의 크기와 구조는 균일한 편이고, 다른 집을 압도하는 건물이 나오지 않는다. 2025년까지의 연구들은 이 유적들의 재산 불평등이 낮았다고 정리한다.
인구 추정은 크게 갈린다. 탈리안키는 1만 5천 명으로 추정되고, 네벨리우카는 점유 모형에 따라 1천 명에서 4만 6천 명까지 나온다. 최근 연구는 낮은 쪽, 곧 최성기에 1천~2천 명을 지지하는 편이다. 이 폭 자체가 논쟁의 일부다. 동시 점유율을 낮게 잡으면 큰 마을이고, 높게 잡으면 당대 세계 최대 도시가 된다.
존 채프먼과 비세르카 가이다르스카는 이 유적들을 도시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같은 시기의 다른 취락들과 너무 달라서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논리다. 반대쪽은 이것을 저밀도 취락, 곧 주기적으로 모이는 집회 장소로 본다. 둘레 도랑이 방어 시설로 보기에 얕고, 가옥이 불에 탄 채로 나오는 비율이 높다는 점이 이 해석의 근거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남는 사실이 있다. 수백 헥타르에 이르는 계획된 취락이 기원전 4천년기 유럽에 있었고, 그 안에 지배자의 자리가 없다.
같은 성격의 사례가 그보다 3천 년 앞서 아나톨리아에 있었다. 튀르키예 콘야 평원의 차탈회윅은 9천 년 전 무렵부터 1천 년 넘게 이어졌고, 최성기 인구는 수천 명에서 8천 명으로 추정된다.
이 취락의 구조는 특이하다. 가옥이 벽을 맞대고 빈틈없이 붙어 있어 거리가 없다. 문도 창도 없이 지붕에 낸 구멍으로 드나들었으므로, 지붕이 곧 공용 공간이었다. 집 안에는 화덕과 화로와 평상이 있고 벽에는 들소와 독수리와 사람 손이 그려져 있다. 죽은 사람은 집 바닥 평상 아래에 무릎을 굽힌 자세로 묻었다. 나중에 머리뼈만 꺼내 회를 발라 다시 칠하고 돌려 쓰기도 했다. 집이 수명을 다하면 윗벽을 헐고 안을 돌과 흙으로 채운 뒤 같은 자리에 같은 평면으로 새 집을 올렸다. 이 반복이 쌓여 언덕이 됐다.
이언 호더가 이끄는 조사단은 25년 넘게 이곳을 발굴했고, 발굴한 모든 건물에서 주거 활동의 흔적을 확인했다. 광장도, 신전도, 행정 건물도 나오지 않았다. 수천 명을 다스릴 중앙 기구의 증거가 없다는 뜻이다.
차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집은 장식이 훨씬 화려하고 더 오래 쓰였으며 더 많은 사람을 묻었다. 호더는 이런 집에 ‘역사 가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 식량의 생산이나 저장을 더 많이 통제하지는 않았고, 그들의 무덤이 더 호화롭지도 않았다. 물질적으로 더 부유하거나 더 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부장품을 통계로 재어 불평등 지표를 계산한 연구는 예상과 반대의 결과를 냈다. 취락이 커질수록 부장품의 차이가 줄고 매장 관행이 더 표준화됐다. 인구가 늘면 부가 집중된다는 통념과 어긋나는 방향이다.
초기 발굴자 제임스 멜라트는 건물 크기와 부장품에서 사회적 불평등의 조짐을 읽었다. 이후 수십 년의 연구는 다른 결론에 닿았고, 호더는 이 상태를 강한 평등주의라고 불렀다. 다만 이것을 평등의 증거로 볼 것인지,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다른 질서가 있었던 것으로 볼 것인지는 여전히 다툼거리다.
세 번째 사례는 규모가 훨씬 크다. 기원전 2600년에서 1900년 사이 인더스 문명의 도시들은 격자형 도로와 표준화된 벽돌, 도시 전체를 훑는 하수 체계, 통일된 도량형을 갖췄다. 청동기 시대의 기술 수준으로는 최고에 속한다.
그런데 다른 초기 문명에서 지배 계급을 가려내는 데 쓰는 표지가 인더스에는 없다. 호화로운 무덤이 없고, 개인을 기리는 기념물이 없으며, 큰 신전과 궁전이 없다. 모헨조다로를 처음 발굴한 사람들은 이 문명이 다른 초기 복합사회보다 훨씬 평등했다고 보았고, 그 뒤 100년 가까이 조사했지만 관리자 계급의 명확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애덤 그린은 2021년 Journal of Archaeological Research에 실은 논문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그가 보기에 초기 발굴자들의 관찰은 옳았다. 인더스에 불평등의 흔적이 없는 이유는 그 사회가 단순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부의 분포와 권력의 위계와 전문화와 도시성에 관해 연구자들이 공유해 온 가정이 틀렸기 때문이라고 그는 본다.
그린은 이 가정의 출처로 차일드를 지목한다. 지배 계급이 있어야 발전이 가능하다는 차일드의 전제가 고고학 사고의 밑바탕에 스며들었고, 그래서 전통적인 표지가 없는데도 인더스 도시에 엘리트가 있었다고 상정하는 연구가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모헨조다로에서 나온 석상에 ‘사제왕’이라는 이름이 붙은 과정이 그 예다. 이 석상이 사제인지 왕인지 확인할 자료는 없고, 이름은 해석에서 나왔다.
두 가지가 늘 떨어져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함께 나타난 사례도 분명히 있다.
우루크에서는 취락이 커지는 것과 권력이 짜이는 것이 나란히 진행됐다. 기원전 4천년기 후반 에안나 구역에 대규모 신전 복합체가 서고, 같은 시기에 원시 설형문자로 곡물과 노동과 가축의 출납을 적은 점토판이 나온다. 남은 문서 가운데 직업과 신분을 위계 순으로 늘어놓은 목록이 있어, 서열이 관념으로 정리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집트에서는 나카다 3기의 무덤 규모 차이가 뚜렷하고, 아비도스 U-j 무덤처럼 근동에서 들여온 포도주 항아리를 400점 넘게 묻은 사례가 나온다. 중국의 량주에서는 판산 묘역의 상위 무덤에 옥과 비단과 상아와 칠기가 들어가고 하위 무덤에는 토기만 들어간다. 스마오에서는 성벽을 쌓기 전에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안데스의 카랄-수페는 그 중간에 있다. 높이 28미터의 계단식 피라미드와 원형 광장을 세울 만큼 노동을 동원했지만, 문자도 토기도 없었고 지배자의 무덤도 확인되지 않았다.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두 축이 따로 움직인다는 것이 드러난다.
| 유적 | 시기 | 규모 | 권력의 표지 |
|---|---|---|---|
| 차탈회윅 | 기원전 7100~5900년 | 수천~8천 명 | 신전·광장·행정 건물 없음 |
| 트리필랴 거대 취락 | 기원전 4100~3400년 | 238~335헥타르 | 궁전·신전·계층 무덤 없음 |
| 우루크 | 기원전 4000~3100년 | 100~400헥타르 | 신전·회계 문서·직업 서열 목록 |
| 이집트 나카다 3기 | 기원전 3300~3100년 | 중소 규모 취락 | 왕묘와 부장품 격차 |
| 카랄-수페 | 기원전 3000~1800년 | 피라미드와 광장 | 기념 건축은 있고 왕묘는 없음 |
| 인더스 도시들 | 기원전 2600~1900년 | 1천 곳 넘는 유적 | 궁전·왕묘·대신전 없음 |
| 량주 | 기원전 3300~2300년 | 성벽 도시와 수리 시설 | 계층이 뚜렷한 무덤 |
표의 왼쪽 두 열과 오른쪽 열 사이에 규칙적인 대응이 없다. 규모가 크면 권력의 표지가 나온다는 관계도, 그 반대도 성립하지 않는다.
차일드의 열 가지를 두 묶음으로 나눠 보면 이렇게 된다.
취락의 성격에 관한 항목은 규모, 인구 밀도, 전업 분업, 원거리 교역, 혈연 아닌 거주지 기반 소속이다. 이 항목들은 발굴 자료로 곧장 확인된다. 가옥 수를 세고, 공방의 흔적을 찾고, 외래 물자의 산지를 분석하면 된다.
권력의 성격에 관한 항목은 잉여의 집중, 지배 계급, 조세, 기념 건축이다. 이 항목들은 확인이 간접적이다. 무덤의 부장품 격차, 창고 시설의 위치와 통제, 건축에 들어간 노동량 같은 대리 지표를 써야 한다. 그리고 대리 지표는 문화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부의 차이를 무덤에 드러내지 않는 관행을 가진 사회에서는 격차가 있어도 무덤에 남지 않는다.
나머지 항목인 문자와 산술과 양식화된 예술은 또 다른 축이다. 인더스에는 기호 체계가 있지만 해독되지 않았고, 카랄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량주에는 정교한 옥기가 있었지만 문자는 없었다.
세 축이 따로 움직인다면 ‘문명의 시작’을 한 시점으로 정하는 일은 기준을 먼저 고르는 일이 된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중국의 문명탐원공정은 문자와 청동기와 도시라는 전통적 기준 대신 국가의 출현을 기준으로 삼았고, 그 기준에서 량주가 문명 단계에 들어간다. 유네스코는 2019년 량주를 세계유산으로 올리면서 초기 지역국가라는 표현을 썼다. 반대로 문자를 요건으로 삼으면 량주도 카랄도 목록에서 빠진다.
도시와 국가를 한 묶음으로 보면 따라오는 명제가 하나 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위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명제다. 조정해야 할 일이 늘어나므로 조정하는 자리가 생기고, 그 자리가 권력이 된다는 논리다.
차탈회윅과 트리필랴와 인더스는 이 논리의 필연성을 약화시킨다. 세 곳 모두 수천 명에서 수만 명 규모였고, 계획된 배치와 표준화된 규격을 가졌으므로 조정이 이뤄지고 있었다. 조정하는 방식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 권한을 몰아주는 형태가 아니었을 뿐이다. 차탈회윅에서는 집집마다 같은 방식으로 짓고 같은 자리에 다시 짓는 반복이 조정의 역할을 했고, 트리필랴에서는 동심원과 방사형 도로라는 공유된 배치 규칙이 그 역할을 했다.
여기에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증거의 부재를 부재의 증거로 읽어도 되는가라는 물음이다. 궁전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궁전이 없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유적마다 다르다. 인더스는 100년 가까이 천 곳 넘는 유적을 팠으므로 부재가 무게를 가진다. 트리필랴는 자력계로 전체 평면을 얻었으므로 큰 건물이 있었다면 자기 이상으로 잡혔다. 차탈회윅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기원전 7100년 차탈회윅에 수천 명이 모여 살았지만 신전도 광장도 행정 건물도 없었다. 기원전 4천년기 우크라이나의 탈리안키는 320헥타르가 넘었지만 궁전도 계층이 갈리는 무덤도 없었다. 기원전 2600년 이후 인더스의 도시들은 도량형을 통일하고 하수 체계를 깔았지만 왕묘와 궁전이 없었다. 같은 시기 우루크와 량주와 이집트에서는 규모와 권력이 함께 커졌다.
이 대비는 두 가지를 말한다. 첫째, 규모가 커진다고 해서 위계가 따라오지는 않는다. 둘째, ‘최초의 도시’나 ‘문명의 시작’ 같은 물음은 자료보다 기준에 걸려 있다. 차일드가 열 가지를 한 묶음으로 제시한 이래 이 둘은 함께 따라다녔고, 그 묶음이 지금 풀리는 중이다.
앞으로 확인될 지점은 부재를 다루는 방법 쪽에 있다. 궁전이 없다는 관찰이 발굴 부족 때문인지 실제 부재인지를 가리려면 조사 범위를 수치로 밝히고 무엇이 얼마나 확인되지 않았는지를 함께 적어야 한다. 트리필랴에서 자력계로 전체 평면을 얻은 방식이 이 방향의 사례다. 유적 전체를 파지 않고도 큰 구조물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으면 부재의 증거력이 올라간다. 동시에 부의 차이를 무덤이나 건물에 드러내지 않는 사회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인더스에서 100년 동안 엘리트를 찾지 못한 것이 그 사회의 성격 때문인지 찾는 방법 때문인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