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년 거란에서 1599년 만주까지, 북방 왕조의 문자 창제 계보와 그 안에서의 훈민정음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일곱 명이 세종에게 언문 창제의 부당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렸다. 훈민정음이 공개된 1443년 12월에서 두 달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세종실록』 103권에 상소 전문과 세종과의 논쟁, 그리고 처결까지 실려 있다.
이 상소의 둘째 조목에 지금 논의와 직결되는 대목이 있다.
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예로부터 중국 안에서는 풍토가 달라도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일이 없었습니다.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의 무리가 각기 제 글자를 가지고 있으나, 이는 모두 오랑캐의 일이므로 말할 거리가 못 됩니다.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20일 경자 기사. 태백산사고본 33책 103권 19장 B면
최만리는 새 문자를 만드는 행위를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의 사례와 묶었다. 서번은 티베트를 가리킨다. 문자를 새로 만드는 일이 어디서 벌어졌는지를 15세기 조선의 고위 관료가 정확히 알고 있었고, 훈민정음을 그 계보 안에 놓았다는 뜻이다. 반대 논거로 든 것이지만 사실 판단 자체는 정확했다.
한글을 유례없는 발명으로 소개하는 설명은 이 대목을 빠뜨린다. 한글 창제 이전 500년 동안 중국 북방에서는 한족이 아닌 민족이 나라를 세울 때마다 자기 문자를 만드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920년 거란, 1036년 서하, 1119년 여진, 1269년 파스파가 그 계보이고, 한글 뒤로는 1599년 만주 문자가 이어진다.
거란은 요를 세운 민족이다. 나라를 세우기 전까지 문자가 없어 나무에 새겨 계약을 삼았다. 『요사』에 따르면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명하고 야율돌려불과 야율노불고가 만들어 신책 5년, 곧 920년 초에 대자를 내놓았다. 한자를 바탕으로 삼았고 3000자가 넘으며 획이 복잡하다.
4년에서 5년 뒤에 소자가 나왔다. 만든 사람은 야율질랄이며 위구르 문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다. 다만 소자는 위구르 문자와 겉모습이 닮지 않았다. 야율질랄이 태조의 아들인지 동생인지는 자료마다 엇갈린다.
거란 소자 네 자. 2020년 유니코드 13.0에 470자가 들어갔고 2024년 16.0에서 471자가 되었다.
한 나라가 문자를 두 벌 만든 이유는 확정되지 않았다. 거란어로는 대자를 큰 예식의 글자, 소자를 버금 예식의 글자라고 불렀다. 두 문자는 석각과 묘지명과 패자에 쓰였고 부족과 지명을 적고 시를 짓고 책을 번역하는 데 동원되었다. 금이 요를 무너뜨린 뒤에도 한동안 이어지다가 금 장종 명창 2년에 대자 사용이 폐지되었다.
거란 문자는 지금도 부분적으로만 해독되었다. 서하 문자에는 한자 대역 사전이 남아 있는데 거란 문자에는 사전이 없기 때문이다. 유니코드 등재 상황이 그 사정을 보여 준다. 소자는 2020년에 들어갔으나 글자마다 이름이 없다. 음가나 뜻을 이름으로 붙일 근거가 없어 코드값에서 기계적으로 이름을 만들었다. 대자는 2014년 예비 제안이 나왔지만 수록 범위와 글자 통합 문제가 풀리지 않아 아직 등재되지 않았다.
서하는 탕구트족이 지금의 중국 서북부에 세운 나라다. 1346년에 편찬된 『송사』에 따르면 경종이 고위 관리 야리 인영에게 명해 1036년에 문자를 설계하게 했다. 야리 인영은 1042년에 죽었다. 문자는 짧은 기간에 만들어져 곧바로 쓰였고, 국립 학교를 세워 가르쳤으며 공문서에 썼다. 외교 문서는 두 언어를 나란히 적었다.
서하 문자 세 자. 획의 종류는 한자와 같지만 글자를 구성하는 방법이 다르다.
겉모습은 한자와 비슷하다. 획의 종류가 같기 때문인데 글자를 만드는 방법은 한자와 다르다. 한자의 상형이나 형성 같은 조자 원리를 그대로 쓰지 않았다. 2004년 집계로 이체자를 빼고 5863자가 확인되며, 한자와 마찬가지로 해서, 행서, 초서, 전서가 쓰였다.
서하 문자로 적힌 문헌은 12세기와 13세기에 집중된다. 불경과 그 주석서, 사전과 어학서, 한문 서적의 번역, 그리고 탕구트어로 지은 저작이 있다. 서하가 1227년에 무너진 뒤에도 원대까지 불경 일부가 만들어졌으나 탕구트어는 명대 어느 시점에 소멸했다.
문헌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경위가 특이하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러시아의 코즐로프 탐험대가 내몽골의 폐허 도시 카라호토 성벽 밖 탑 속에 숨겨져 있던 문헌을 발굴했고,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아우렐 스타인이 추가로 수습했다. 500년 넘게 잊혔던 문자 체계가 20세기 초에 통째로 되살아난 사례다.
여진족은 오랫동안 요의 지배를 받았고 거란어를 배웠다. 완안아골타는 거란어에 능했고 요를 깨뜨리고 포로를 얻은 뒤에야 거란 문자와 한자를 접했다. 금을 세운 뒤에도 안팎의 공문서가 거의 거란 문자로 작성되었는데, 거란 문자는 여진어와 거리가 멀었다.
아골타는 거란 문자와 한자를 익힌 신하 완안희윤에게 거란 대자와 한자를 바탕으로 여진 문자를 만들라고 명했다. 1119년, 금 천보 3년에 칙령으로 반포되었다. 이를 대자라 한다. 1138년에는 희종이 소자를 반포했는데 황제 본인이 만들었다고 전하며, 『금사』에 따르면 1145년에 처음 공식적으로 쓰였다.
여진 소자는 남은 자료가 거의 없다. 확실한 증거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중국 동북부에서 출토된 금과 은으로 만든 패자 세 점에 새겨진 여섯 글자짜리 명문 하나뿐이다. 두 무리로 나뉜 세로 배열이다.
유니코드 등재 과정이 이 사정을 그대로 보여 준다. 여진 대자는 2024년에 제안이 제출되어 심사가 후반부까지 진행되었다. 여진 소자는 2025년 6월 문자 부호화 작업반이 별도 블록 대신 거란 소자 블록 안에 넣는 방안을 승인했다. 남은 글자가 여섯 자뿐이라 독립 블록을 줄 근거가 부족했다. 제안서는 여진 소자 한 글자를 이미 등재된 거란 소자 글자와 통합하되 여진 글자의 각진 다리 모양을 반영해 자형을 고치자고 제시했다.
1260년 쿠빌라이 칸은 티베트 승려 팍파(1235~1280)에게 국사 칭호를 주면서 칭기즈 칸 시대에 만든 위구르계 문자를 대체할 새 국가 문자를 만들라고 명했다. 팍파는 사캬 판디타의 조카이며 열일곱 살에 몽골로 건너가 사캬파를 대표했고 숙부를 이어 이 학파의 다섯째 조사가 된 인물이다.
완성 시점은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9년 뒤인 지원 6년 2월 13일, 곧 1269년에 세조가 칙령을 내려 새로 만든 문자를 모든 공문서에 지역 문자와 함께 쓰도록 했다. 38자이며 티베트 문자를 확장해 만들었다. 티베트 문자는 인도 브라흐미 계통이고, 파스파 문자는 그 계통에서 유일하게 위에서 아래로 세로쓰기를 한다.
파스파 문자 네 글자. 몽골어로는 네모 글자라고 부른다.
설계 목표는 제국의 모든 언어를 한 문자로 적는 것이었다. 몽골어, 한어, 티베트어, 산스크리트, 위구르어, 페르시아어가 대상이었다. 쿠빌라이는 학교를 세워 가르치게 했다.
결과는 앞 글에서 다룬 대로다. 관리들은 마지못해 제한적으로만 썼고 실질적인 행정은 한자로 이뤄졌다. 1368년 원이 무너지자 한족 지역에서는 완전히 버려졌고 몽골인들은 위구르계 문자로 돌아갔다. 몽골어 기록의 마지막은 1352년경이다.
한글 창제로부터 150년 남짓 지난 시점에 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다. 『만주실록』에 따르면 1599년 누르하치는 몽골 문자를 만주어에 맞게 고치라고 명했다. 당시 만주족의 문서는 몽골인 서기가 몽골 문자로 작성했는데, 한족과 몽골인은 자기 말로 읽어 주면 문맹이라도 알아듣지만 만주족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누르하치의 문제 제기였다.
실록에 남은 대화가 구체적이다. 누르하치가 왜 우리말은 적기 어렵고 남의 나라 말은 배우기 쉬운가 묻자, 에르데니와 가가이는 자기 나라 말로 문자를 만드는 편이 낫겠으나 소리를 어떻게 옮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누르하치는 a 뒤에 ma를 붙이면 아버지를 뜻하는 ama가 되지 않느냐, e 뒤에 me를 붙이면 어머니를 뜻하는 eme가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해 보라고 지시했다. 두 신하의 반대를 누르고 몽골 문자를 만주어에 맞춰 고친 결과가 구만주문이며, 점과 원이 없는 문자라고 불렀다.
몽골 문자 네 글자. 만주 문자는 이 문자를 고쳐 만들었고 별도 유니코드 블록 없이 몽골 문자 블록을 함께 쓴다.
구만주문은 30년 넘게 쓰였다. 1632년 홍타이지가 학자 다하이에게 개량을 명했고, 다하이는 글자 오른쪽에 점과 원을 찍어 구별되지 않던 음절 글자를 갈랐으며 한어 차용어를 적을 음절도 보탰다. 이것이 신만주문이다. 청 초기와 중기에 황제의 조칙과 상주문과 교육과 번역에 만주 문자가 쓰였다.
누르하치의 문제 제기를 훈민정음 서문과 나란히 놓으면 구조가 같다. 자기 말이 있고, 그 말을 적을 수 없으며, 남의 문자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세종이 1443년에 적은 문장과 누르하치가 1599년에 던진 물음 사이에는 156년의 간격이 있으나 문제의 형태가 겹친다.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기사는 훈민정음에 관한 첫 기록이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 그 글자는 옛 전자를 본떴고, 초성과 중성과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뒤에야 글자를 이룬다. 한자에 관한 것이든 우리말에 관한 것이든 모두 적을 수 있으며, 글자는 간단하고 요약되어 있으나 바꿔 쓰는 폭이 끝이 없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한다.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기사. 태백산사고본 33책 102권 42장 A면
연도를 한 줄에 세우면 이렇게 된다.
| 연도 | 문자 | 명령한 쪽 | 만든 쪽 | 지금 상태 |
|---|---|---|---|---|
| 920 | 거란 대자 | 요 태조 야율아보기 | 야율돌려불, 야율노불고 | 소멸, 부분 해독 |
| 924경 | 거란 소자 | 기록 없음 | 야율질랄 | 소멸, 부분 해독 |
| 1036 | 서하 문자 | 서하 경종 | 야리 인영 | 소멸, 해독됨 |
| 1119 | 여진 대자 | 금 태조 완안아골타 | 완안희윤 | 소멸 |
| 1269 | 파스파 문자 | 원 세조 쿠빌라이 | 팍파 | 소멸, 장식으로만 잔존 |
| 1443 | 훈민정음 | 조선 세종 | 실록은 임금 친제로 적음 | 사용 중 |
| 1599 | 만주 문자 | 누르하치 | 에르데니, 가가이 | 쓰임 끊김 |
여섯 항목이 반복된다. 한족이 아닌 지배 집단이 나라를 세웠고, 한자가 자기 말을 적기에 맞지 않았으며, 최고 권력자가 문자 제작을 직접 지시했고, 학자나 승려가 실무를 맡았으며, 칙령이나 그에 준하는 방식으로 반포했고, 학교와 공문서로 보급하려 했다.
이 여섯 항목에서 훈민정음이 벗어나는 대목은 없다.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는 실록의 기술이 다른 사례와 갈리는 지점이기는 하나, 명령자와 제작자가 겹치는 경우는 여진 소자에도 있다. 1138년 소자는 희종 본인이 만들었다고 전한다.
앞에서 인용한 대목은 상소의 둘째 조목이다. 상소 전체는 여섯 조목으로 이뤄져 있으며, 각 조목이 무엇을 문제 삼았는지를 보면 15세기 조선에서 새 문자가 어떤 논점을 건드렸는지 드러난다.
첫째 조목은 외교 문제였다. 조선이 대대로 중화의 제도를 따랐는데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에 언문을 만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랍다고 했다. 언문이 옛 글자를 본떴다는 주장을 인용하면서, 글자 모양은 옛 전문을 본떴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방식이 옛것에 반대되어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에 흘러 들어가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사대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는 우려로 맺는다.
둘째 조목이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을 든 대목이다. 새 문자를 만드는 일은 오랑캐의 일이며, 중화를 써서 오랑캐를 변화시킨다는 말은 들었어도 중화가 오랑캐로 변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적었다. 중국이 조선을 두고 기자의 남긴 풍속이 있어 문물과 예악이 중화에 견줄 만하다고 해 왔는데, 이제 언문을 따로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일이라고 했다.
셋째 조목은 학문의 문제다. 설총의 이두는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려 어조에 쓴 것이므로 한자와 분리되지 않으며, 이두를 쓰려면 먼저 한자를 얼마간 알아야 하므로 이두 때문에 한자를 익히는 사람이 오히려 많아졌다고 주장했다. 반면 언문은 한자와 조금도 관련이 없으므로, 언문만 익혀 출세할 수 있게 되면 수십 년 뒤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적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소는 언문을 27자로 적었다.
넷째 조목은 재판 문제다. 세종이 언문으로 옥사를 적으면 백성이 억울함을 당하지 않는다고 한 데 대한 반박이다. 중국은 말과 글이 같은데도 옥송에 억울한 일이 많고, 조선에서도 이두를 아는 죄수가 자기 진술서를 읽고 허위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해 그릇 자백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재판의 공정함은 옥리에게 달렸지 문자에 달리지 않았다는 논리다.
다섯째 조목은 절차 문제다. 풍속을 바꾸는 큰일이니 재상부터 백관까지 함께 의논하고 중국에 상고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시행할 수 있는데,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구하지 않고 갑자기 이배 10여 명에게 가르쳐 익히게 하며 옛사람이 이미 이룬 운서를 가볍게 고치고 공장 수십 명을 모아 판각해 급히 널리 펴려 한다고 지적했다. 세종이 청주 초수리에 행차 중이던 상황까지 들어 급하지 않은 일을 요양하는 때에 번거롭게 한다고 했다.
여섯째 조목은 세자 문제다. 동궁이 성학에 잠심해야 할 때에 언문에 정신을 쏟는 것은 학업에 손실이라고 했다.
세종의 반박은 세 갈래였다. 설총의 이두도 음이 다르지 않으냐, 이두를 만든 본뜻이 백성을 편하게 하려던 것이라면 언문도 같은 목적인데 설총은 옳다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 첫째다. 둘째는 운서에 관한 물음이었다.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에 자모가 몇이냐,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느냐고 물었다. 셋째는 세자 문제에 대한 답으로, 나이가 들어 국사를 세자에게 맡겼으니 세미한 일도 참여해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둘째 갈래가 눈여겨볼 대목이다. 세종이 꺼낸 것은 정치 논리가 아닌 음운학이었다. 사성과 칠음, 자모의 수를 묻는 질문은 상대가 운서의 체계를 아는지 확인하는 것이며, 새 문자의 근거가 그 체계에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성모와 운모, 청탁, 오음의 틀로 서술된 것과 같은 자리다.
논쟁의 끝은 험했다. 세종은 소에 담긴 한두 마디를 물으려 불렀을 뿐인데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꿔 대답하니 죄를 벗기 어렵다고 하면서 일곱 명을 의금부에 내렸다가 이튿날 풀어 주라고 명했다. 정창손만 파직되었고, 김문은 앞뒤로 말을 바꾼 경위를 국문하라는 별도 전지가 내려졌다. 정창손이 파직된 이유는 삼강행실을 반포한 뒤에도 충신과 효자와 열녀가 나오지 않은 것은 사람의 자질에 달린 일이니 언문으로 번역한들 달라지겠느냐고 말한 데 있었다. 세종은 그 말을 두고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 아니며 쓸데없는 용속한 선비라고 했다.
훈민정음과 파스파 문자의 관계는 후대 외국 학자가 처음 꺼낸 문제가 아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1681~1763)이 이미 두 문자의 연결을 추정했다. 다만 이익은 근거를 많이 대지 않았다.
고려와 조선이 파스파 문자를 접한 경로도 확인된다. 고려는 1273년에 처음 파스파 문자로 된 문서를 받았고 그 뒤로 빠르게 익혔다. 그 문자로 된 칙서와 인장과 문서가 쌓였고 조선으로 넘어갔다. 조선은 이 문자를 계속 가르쳤는데 1423년 무렵에는 교육이 줄어든 상태였다. 1469년에는 파스파 문자 교재가 정부의 몽골어 교육 과정 목록에 올라 있다. 훈민정음 창제 시점을 전후해 이 문자를 아는 사람이 조선 조정 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현대의 논의는 미국의 한국학자 게리 레드야드(1932~2021)가 정리했다. 그는 1958년 학사 논문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영어로 옮겼고, 1963년 석사 논문에서 고려와 몽골의 초기 외교 관계를 다뤘으며, 1966년 버클리에서 박사 논문을 냈다. 제목은 1446년 한국어 문자 개혁이며, 1998년 서울 신구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레드야드의 주장은 한글이 파스파에서 나왔다는 것과 다르다. 그는 앞선 연구자가 파스파 글자 10개에서 한글 글자꼴을 끌어내려 한 시도를 두고 상당수가 억지라고 평가했고, 자신은 기본 자음 5개 또는 6개로 범위를 좁혔다. 그가 지목한 다섯 자는 해례본이 기본자로 삼은 ㄱ, ㄴ, ㅁ, ㅅ, ㅇ과 다르다. 중국 음운학에서 기본이 되는 ㄱ, ㄷ, ㅂ, ㅈ, ㄹ이다. 여섯째 기본자인 초성 ㅇ은 세종이 만들었다고 보았고, 나머지 글자는 해례본이 서술한 가획 규칙을 변형해 이 여섯에서 내부적으로 파생시켰다.
레드야드 본인이 오해를 경계했다. 그는 파스파 문자의 역할이 전체 그림에서 제한적이었음이 독자에게 분명해야 한다고 적었고, 이 연구가 나온 뒤 문자사 저술에 한국의 문자가 몽골의 파스파 문자에서 파생되었다는 문장이 실리는 것만큼 자신을 불편하게 할 일은 없으리라고 덧붙였다.
실록의 옛 전자 운운도 이 논의에 얽혀 있다. 그 전자가 어떤 서체를 가리키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최만리의 상소는 이 표현을 인용하면서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방식이 옛것에 반대된다고 지적했으므로, 당대의 반대자들도 이 구절을 글자꼴에 한정된 언급으로 읽었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면 이 논쟁은 두 층으로 나뉜다. 제자의 원리가 무엇이었는가는 해례본이 답한다.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소리가 세지면 획을 더한다. 글자꼴의 착상이 어디서 왔는가는 해례본이 답하지 않으며, 그래서 지금도 논쟁이 남아 있다. 두 물음을 섞으면 논의가 엉킨다.
계보에 속한 문자들이 남긴 자료의 규모를 견주면 각 왕조가 문자를 얼마나 깊이 썼는지가 드러난다.
서하 문자는 남은 문헌이 가장 많다. 불경과 그 주석서, 사전과 어학서, 한문 서적의 번역, 탕구트어로 지은 저작이 있다. 카라호토에서 나온 문헌 덕분에 어휘와 문법이 상당 부분 복원되었고, 한자 대역 사전이 함께 나온 것이 해독의 결정적인 조건이 되었다. 2004년 집계로 이체자를 빼고 5863자가 확인된다.
거란 문자는 사정이 반대다. 대역 사전이 없어 해독이 부분에 그친다. 남은 자료는 석각과 묘지명, 패자와 명패가 중심이며 부족명과 지명을 적거나 시를 짓거나 책을 번역하는 데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대자는 3000자가 넘는다고 전하지만 판독된 글자는 그보다 훨씬 적다.
여진 문자는 그보다도 적다. 소자의 확실한 증거는 패자 세 점에 새겨진 여섯 글자짜리 명문 하나뿐이며, 두 무리로 나뉜 세로 배열이다. 유니코드 제안서는 이 여섯 자 가운데 하나가 이미 등재된 거란 소자의 한 글자와 거의 같다고 지적하면서 두 글자를 통합하되 여진 쪽의 각진 다리 모양을 반영해 자형을 고치자고 제시했다.
파스파 문자는 명문 수십 점과 소수의 문헌과 기물이 남았다. 1314년 취안저우에서 나온 기독교인 묘비도 그중 하나로, 파스파 문자로 양원셰의 묘비명이라고 새겨져 있다. 원 제국의 종교 구성을 보여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훈민정음은 이 비교에서 다른 자리에 있다. 창제 직후부터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동국정운이 잇따라 간행되었고, 무엇보다 창제 원리를 밝힌 해설서가 남았다. 다른 다섯 문자는 창제 사실을 적은 사서의 한두 줄만 남겼다.
위 표에서 지금까지 일상적으로 쓰이는 문자는 훈민정음뿐이다. 나머지는 소멸했거나 쓰임이 끊겼다. 원인을 찾으려면 문자 바깥을 봐야 한다.
거란, 서하, 여진 문자는 왕조의 문서 행정에 박혀 있었다. 국립 학교와 공문서와 번역 사업이 문자를 떠받쳤고, 그 제도가 무너지자 쓸 자리가 통째로 없어졌다. 파스파 문자는 제도 안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했다. 한자를 능숙하게 쓰는 관리들에게 새 문자를 내렸기 때문에 익힐 유인이 없었다. 만주 문자는 청이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동안에도 한자에 밀렸고, 지배층 스스로 한어를 쓰게 되면서 힘을 잃었다.
훈민정음이 놓인 자리는 달랐다. 대상이 한문 교육을 받지 못한 계층이었다. 최만리의 상소에도 이 점이 드러난다. 상소는 이두를 쓰려면 먼저 한자를 얼마간 알아야 하므로 이두 때문에 한자를 익히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주장하면서, 언문이 퍼지면 관리가 언문만 익히고 한자를 돌보지 않아 수십 년 뒤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뒤집어 읽으면 언문이 한자를 몰라도 쓸 수 있는 문자라는 사실을 반대자들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종의 답변도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세종은 설총의 이두를 만든 본뜻이 백성을 편하게 하려던 것이 아니냐고 되묻고, 언문도 같은 목적이라고 답했다.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해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도 쉽게 깨달을 것이라고 한 대목도 실록에 남아 있다.
다만 이 설명을 성공담으로 끌고 가면 사실과 어긋난다. 조선 시대 내내 공식 문서는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한글이 공용 문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19세기 말 이후이며, 그전 400년 동안은 여성과 중인층과 승려와 소설 독자층이 쓰는 비주류 문자였다. 국가가 만들었으나 국가가 쓰지 않은 문자였고, 그 400년을 버티게 한 쪽은 국가가 아니었다.
세종이 혼자 만들었는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는지는 학계에서 논쟁이 이어진다. 실록은 임금이 친히 지었다고 적었고,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도 전하가 정음 28자를 창제하고 예의를 간략히 들어 보이면서 훈민정음이라 이름 붙였다고 적었다. 반면 해례의 집필에는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을 비롯한 여러 학자가 참여했다.
다른 사례와 견주면 이 논쟁의 성격이 분명해진다. 거란 대자는 태조가 명하고 두 신하가 만들었다. 서하 문자는 경종이 명하고 야리 인영이 만들었다. 여진 대자는 아골타가 명하고 완안희윤이 만들었다. 파스파 문자는 쿠빌라이가 명하고 팍파가 만들었다. 만주 문자는 누르하치가 명하고 에르데니와 가가이가 만들었다. 다섯 사례 모두 명령자와 제작자가 분리되어 있고 사료가 둘을 구분해 적었다.
훈민정음의 사료는 그렇게 적지 않았다. 실록도 정인지 서문도 세종이 만들었다고 적었을 뿐 실무자를 따로 밝히지 않았다. 이 기술 방식 자체가 다른 다섯 사례와 다르다. 세종의 단독 창제를 주장하는 쪽은 이 점을 근거로 삼고, 협찬을 주장하는 쪽은 임금의 업적으로 돌리는 사서의 관행을 근거로 삼는다. 두 해석 모두 같은 문헌 위에 서 있으므로 새 사료가 나오기 전에는 결판이 나지 않는다.
920년 거란 대자에서 1599년 만주 문자까지, 중국 북방의 정복왕조들은 나라를 세울 때마다 자기 문자를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1443년에 그 계보의 한가운데 놓인다. 최고 권력자가 제작을 지시하고, 한자로는 자기 말을 적을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며, 칙령으로 반포하고 학교와 문서로 보급하려 한다는 점에서 앞뒤의 사례들과 구조가 같다. 이 사실은 후대의 해석이 아니다. 1444년 최만리의 상소가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을 나란히 들면서 이미 적어 놓았다.
결말은 갈렸다. 거란과 서하와 여진 문자는 왕조와 함께 사라졌고, 파스파는 100년을 못 갔으며, 만주 문자는 청이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동안에도 한자에 밀렸다. 훈민정음만 남았다. 차이를 만든 것은 문자의 설계가 아니었고 그 문자가 향한 대상이었다. 앞의 다섯 문자는 이미 한자를 쓰는 관료 집단을 상대로 했고, 훈민정음은 한자를 쓸 수 없던 계층을 상대로 했다.
이 계보를 세우고 나면 한글에 관한 설명 하나가 무너진다. 한글이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발명이라는 문장이다. 유례는 한글 이전 500년과 이후 150년에 걸쳐 여섯 건이 있고, 그중 넷은 조선의 관료들이 이름까지 대며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글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 창제자 기록은 거란과 서하와 여진과 파스파와 만주 문자에도 있다. 칙령 반포도 마찬가지다. 남는 항목은 하나다. 만든 쪽이 왜 그 모양으로 만들었는지를 당대에 문서로 남겼다는 사실이다. 그 문서가 훈민정음 해례본이며, 1940년에야 발견되었다. 다음 글에서 그 500년의 공백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