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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이야기 · 2

메소포타미아 홍수층과 흑해 가설 — 홍수 이야기를 특정 사건에 맞추려는 시도가 백 년 동안 연대에서 어긋나 온 과정

1929년 우르에서 유물이 없는 진흙층이 나온 뒤로, 홍수 이야기를 실제로 일어난 하나의 사건에 대응시키려는 시도가 반복되었다. 우르와 키시와 슈루팍의 진흙층은 서로 다른 시기의 것이었고, 흑해가 갑자기 잠겼다는 가설에도 반론이 붙었다. 남는 것은 이 이야기가 어떤 종류의 물을 그리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2026년 9월 12일

1929년 우르에서 나온 유물 없는 진흙층

영국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는 1920년대에 이라크 남부의 우르를 발굴하고 있었다. 우르는 기원전 3천년기 수메르의 주요 도시였고, 울리가 왕릉을 찾아낸 곳이기도 하다. 1929년 그는 왕릉 아래로 시굴 구덩이를 더 파 내려가다가 층의 성격이 갑자기 바뀌는 지점을 만났다. 깊이 약 12미터에서 토기 조각과 부서진 흙벽돌이 사라지고, 사람이 만든 물건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깨끗한 진흙과 모래층이 3미터 넘게 이어졌다.

사람이 오래 살면 그 자리에는 쓰레기가 쌓인다. 깨진 그릇, 재, 무너진 벽돌이 층을 이룬다. 유물이 전혀 없는 두꺼운 퇴적층은 사람이 살지 않는 동안 물이 실어 온 흙이 한꺼번에 덮였다는 뜻이 된다. 울리는 이것을 홍수의 흔적으로 발표했고, 그 발표는 곧바로 국제 뉴스가 되었다.

울리 본인의 주장은 널리 알려진 것보다 좁았다. 그는 지구 전체를 덮는 홍수를 주장하지 않았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덮친 국지적 대범람이 있었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세계 전부였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그가 낸 대중서가 크게 팔리면서 이 구분이 흐려졌다.

층서와 젬데트 나스르기 고고학에서 유적의 연대는 층이 쌓인 순서로 읽는다. 아래에 있는 층이 먼저 쌓인 것이고 위에 있는 층이 나중이다. 각 층에서 나오는 토기의 모양과 무늬로 시기를 구분하며, 그 시기 구분에 이름을 붙인다. 젬데트 나스르기는 기원전 3200년에서 3000년 사이에 해당하는 시기 이름으로, 키시에서 멀지 않은 젬데트 나스르라는 작은 유적에서 처음 확인된 토기 양식에서 따왔다. 어떤 홍수층이 젬데트 나스르기 유물 바로 위에 있다면, 그 홍수는 기원전 3000년 무렵이나 그 직후에 일어난 것이 된다.

키시와 슈루팍에서도 진흙층이 나왔다

울리가 발표하기 한 해 전인 1928년, 키시를 발굴하던 스티븐 랭던과 와틀랭이 이미 홍수층을 찾아냈다. 키시는 우르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도시다. 그들이 찾은 진흙층은 젬데트 나스르기 유물 바로 위에 놓여 있었다.

1931년에는 에릭 슈미트가 슈루팍에서 같은 것을 찾았다. 슈루팍은 지우수드라와 우트나피슈팀이 살았다고 이야기가 지목하는 바로 그 도시다. 여기서도 홍수층은 젬데트 나스르기 유물 바로 위에 있었다.

세 도시에서 모두 진흙층이 나왔다는 소식은 이야기가 사실에 근거한다는 증거처럼 읽혔다. 그런데 세 층을 나란히 놓자 문제가 드러났다.

세 진흙층은 같은 사건이 아니다

울리가 찾은 우르의 홍수 퇴적층은 적어도 기원전 3500년까지 올라간다. 키시와 슈루팍의 것은 젬데트 나스르기 위에 놓여 있으므로 기원전 3000년 무렵이다. 500년 차이다.

문헌 쪽 연대는 키시와 슈루팍에 가깝다. 수메르 왕명록은 홍수 뒤 키시의 왕들을 스물세 명 늘어놓는데, 이 목록을 둘로 나누어 실제로는 열한 세대로 계산할 근거가 있다.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평균 재위 기간으로 환산하면 이 구간에 이백 년쯤이 배정되고, 홍수의 시점은 기원전 2900년에서 2800년 사이로 계산된다. 새뮤얼 크레이머는 1967년 글에서 이 계산을 제시하며, 이 시기는 울리의 우르 퇴적층에 붙이기에는 너무 늦다고 정리했다.

같은 계산을 뒤집어 보면 문제가 더 분명해진다. 울리의 퇴적층이 홍수 이야기의 홍수라면 왕명록의 계산이 500년 틀린 것이 되고, 왕명록의 계산이 맞으면 울리의 퇴적층은 다른 사건이 된다. 어느 쪽을 택하든 세 유적의 진흙층을 하나의 사건으로 묶을 수 없다.

두께는 규모가 아니고, 11킬로미터 옆에는 흔적이 없다

두꺼운 층이 더 큰 홍수를 뜻한다는 직관은 성립하지 않는다. 로버트 라이크스가 1960년대에 정리한 실측값을 보면 키시의 실트층은 평균 25센티미터가 되지 않고, 슈루팍은 약 38센티미터이며, 우르는 최대 3.3미터다. 한 지점에서 잰 퇴적층의 두께는 그 자리의 지형과 물길의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강이 굽이도는 안쪽에는 흙이 두껍게 쌓이고 바깥쪽에는 얇게 쌓인다. 두께에서 홍수의 규모를 읽어 낼 수 없다는 뜻이다.

규모를 판정하는 것은 분포다. 여기서 우르의 퇴적층은 결정적인 약점을 드러낸다. 우르에서 1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에리두에서는 같은 홍수의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찾았는데 없었다. 사람들의 세계 전체를 덮었다는 홍수가 걸어서 두 시간 거리의 도시에는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강이 자주 넘치는 지역이다. 크레이머는 1925년부터 1930년까지 우르 발굴에 참여했던 막스 말로완의 기록을 인용하며, 그 기간 동안 봄이나 가을에 사막이 물에 잠기지 않은 계절이 거의 없었다고 적었다. 반복되는 범람이 남긴 여러 개의 진흙층 가운데 어느 것을 고르느냐가 문제였다.

말로완이 1964년에 정리한 자리

막스 말로완은 울리의 우르 발굴에 젊은 조수로 참여했던 고고학자다. 그는 1964년 학술지 이라크 26권 2호에 62쪽부터 82쪽에 걸쳐 「노아의 홍수 재고」를 실었다. 이 논문은 지난 십 년 동안 수문학자와 지리학자와 지질학자가 메소포타미아 평야의 지형 체계를 연구해 왔고, 그 결과가 홍수의 실재 여부에 직접·간접으로 관심을 모았다는 진술로 시작한다.

말로완이 도달한 자리는 절충이다.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와 그것에 근거한 구약의 판본은 실제로 일어난 재난에서 나왔지만, 그 재난은 전 지구적인 규모가 아니었고 울리가 주장한 시점의 것도 아니었다. 크레이머는 이 결론에 동의하며 자기 글에서 말로완의 논문을 그대로 인용했다.

말로완의 절충은 지금도 이 문제의 기본 지형을 보여준다. 실제 범람이 있었다는 데는 이견이 적다. 어느 범람인지를 특정하는 순간 연대가 어긋난다. 백 년 동안 반복된 것이 이 형태다.

1997년, 후보지가 흑해로 옮겨갔다

메소포타미아 평야에서 답이 나오지 않자 후보지가 바뀌었다. 1997년 컬럼비아 대학 라몬트도허티 지구관측소의 윌리엄 라이언과 월터 피트먼을 포함한 열 명의 연구자가 학술지 해양지질학 138권 1·2호 119쪽부터 126쪽에 논문을 실었다. 제목은 「흑해 대륙붕의 급격한 침수」였다.

내용은 이렇다. 마지막 빙기 동안 흑해는 바깥 바다와 끊긴 거대한 담수호였고, 그 수면은 출구보다 100미터 넘게 낮았다. 지중해의 수위가 빙하가 녹으면서 올라가다가 보스포루스 해협의 문턱을 넘었고, 짠물이 쏟아져 들어와 드러나 있던 대륙붕 10만 제곱킬로미터 이상을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잠기게 했다. 연구진은 대륙붕 밖에서 안쪽 수심 49미터 선까지 이어지는 침식면을 고해상도 탄성파 단면에서 확인했고, 그 위에 놓인 퇴적층 바닥에서 꺼낸 조개의 방사성탄소 연대가 모두 7150년 전후로 같게 나왔다고 보고했다.

이듬해 두 사람은 노아의 홍수라는 대중서를 냈다. 부제는 역사를 바꾼 사건에 관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었다. 여기서 두 사람은 물에 잠긴 해안의 신석기 농민들이 유럽 내륙으로 이주했고, 그 과정에서 농경과 함께 홍수의 기억을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그 기억이 성서의 노아 이야기가 되었다고 두 사람은 보았다. 방송 다큐멘터리와 신문이 이 주장을 옮기면서 흑해 가설은 널리 알려졌다.

연구진 자신도 뒤에 연대를 수정했다. 2003년 지구·행성과학 연례평론 31권에 실은 글에서는 사건 시점을 8,400년 전으로 올렸다.

흑해 가설에 붙은 두 갈래 반론

2007년 발렌티나 얀코홈바흐를 비롯한 연구진이 학술지 제4기 인터내셔널 167·168 합본호 91쪽부터 113쪽에 걸쳐 종설을 실었다. 지질학과 고생물학과 고고학 증거를 놓고 흑해 대홍수 가설들을 검토한 글이다.

첫째 반론은 수위 상승의 속도를 다룬다. 이들은 흑해의 수위가 점진적으로, 그리고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올라갔다고 보았다. 때때로 지금보다 높아지기도 했다가 결국 현재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격변 모델과 달리 중간 단계의 염도를 보이는 지층이 필요한데, 이 종설은 대륙붕의 자료가 그런 점진적 변화와 맞물린다고 판단했다.

둘째 반론은 사람의 이동 방향을 다룬다. 라이언과 피트먼은 8,400년 전부터 7,200년 전 사이에 흑해 저지대의 집단이 내륙으로 대규모 이주했다고 보았다. 얀코홈바흐 연구진은 이 주장에 어긋나는 정황을 제시한다. 홀로세 해진이 시작되는 시기에 오히려 반대 방향의 인구 이동, 곧 지중해 쪽에서 흑해 쪽으로 들어오는 이동이 있었다는 간접 증거를 이들은 제시한다.

두 반론은 성격이 다르다. 첫째는 사건이 있었느냐를 묻고, 둘째는 사건이 있었더라도 그것이 이야기의 기원이 될 수 있느냐를 묻는다. 후자가 더 곤란하다. 흑해에서 수위 변화가 있었다는 데까지는 합의가 가능하지만, 그 기억이 3000년 뒤 메소포타미아 서기의 점토판에 남았다는 연결은 증거로 확인되는 종류의 주장이 아니다.

본문이 그리는 물은 바닷물이 아니다

후보지를 찾는 작업에는 앞서 확인할 것이 있다. 이야기가 어떤 종류의 물을 그리고 있는지다. 길가메시 서사시 11토판은 홍수가 시작되는 순간을 자세히 적는데, 그 장면에 바다가 없다.

먼저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올라오고 그 안에서 폭풍의 신 아다드가 울부짖는다. 그다음이 결정적이다. 신 에라칼이 계류 말뚝을 뽑아내고, 니누르타가 지나가며 둑을 넘치게 한다. 계류 말뚝은 배를 강가에 매어 두는 기둥이고, 둑은 관개 수로의 물을 잡아 두는 시설이다. 강가의 시설이 차례로 무너지는 장면이다.

같은 토판 12행은 슈루팍이 유프라테스강 기슭에 자리잡은 도시라고 밝힌다. 수메르어 판본도 홍수를 폭풍으로 그린다. D단 첫 줄은 온갖 폭풍과 돌풍이 한꺼번에 일어났다고 적는다.

그러니 이 이야기가 그리는 것은 폭풍에 밀려 강과 수로가 한꺼번에 넘치는 사태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반복해 일어난 종류의 재난이며, 울리와 랭던과 슈미트가 진흙층으로 확인한 것도 같은 종류다. 흑해 가설이 설명하는 사건은 이것과 다르다. 해협을 넘어온 짠물이 담수호를 채우는 사건이고, 강도 둑도 계류 말뚝도 관계가 없다. 가설의 연대와 증거를 따지기 전에, 설명하려는 대상과 설명하는 사건의 종류가 어긋나 있다.

배가 걸린 산은 네 곳에 있다

정박지를 찾는 일도 사정이 비슷하다. 창세기 8장 4절은 이렇게 적는다.

וַתָּ֤נַח הַתֵּבָה֙ בַּחֹ֣דֶשׁ הַשְּׁבִיעִ֔י בְּשִׁבְעָה־עָשָׂ֥ר י֖וֹם לַחֹ֑דֶשׁ עַ֖ל הָרֵ֥י אֲרָרָֽט׃

밧타나흐 핫테바 바호데쉬 핫셰비이 베쉬브아 아사르 욤 라호데쉬 알 하레 아라랏

일곱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의 산들 위에 머물렀다.

창세기 8장 4절. 슈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경.

마지막 두 낱말은 하레 아라랏, 곧 아라랏의 산들이다. 복수형이며, 특정 봉우리가 아니라 지역을 가리킨다. 아라랏은 아시리아 기록에 우라르투로 나오는 왕국의 히브리식 표기다. 지금의 아르메니아 고원과 터키 동부, 이란 서북부에 걸친 넓은 지역이다. 오늘날 아라라트산이라 불리는 5,137미터 봉우리를 지목한 문장이 아니다.

고대의 판본들은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킨다. 창세기 8장 4절을 아람어로 옮긴 타르굼과 시리아어로 옮긴 페시타는 투레 카르두, 곧 쿠르디스탄의 산들로 적었다. 이는 반호 남동쪽의 주디산 일대를 가리킨다. 유대 문헌 희년서는 루바르산이라는 이름을 쓰는데 이 산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쿠란 11장 44절도 배가 알주디에 머물렀다고 적는다.

메소포타미아 판본은 또 다른 곳을 든다. 길가메시 11토판 142행에서 배가 걸리는 산의 이름을 앤드루 조지의 교정본은 니무쉬로 읽는다. 로버트 캠벨 톰프슨의 1930년 판본을 비롯한 이전 판독은 같은 자리를 니시르로 읽었다. 이 산은 이라크 쿠르디스탄 술라이마니야 부근의 피르 오마르 구드룬, 해발 2,588미터 봉우리로 보는 견해가 널리 쓰인다.

바빌론의 사제 베로소스가 남긴 기록은 또 다르다. 그는 배의 일부가 아르메니아의 고르디에네 산지에 아직 남아 있고 사람들이 거기서 역청을 긁어 부적으로 삼는다고 적었다. 요세푸스도 유대 고대사 1권 93절에서 같은 이야기를 전하며 그 산의 이름을 바리스라고 적었다.

정리하면 배가 걸린 곳으로 전승이 지목하는 산은 적어도 네 갈래다. 우라르투 지역, 주디산, 니무쉬산, 고르디에네 산지다. 이 중 셋은 서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어느 하나를 실제 장소로 확정하려는 작업은 나머지 셋을 설명하지 못한 채 남겨 두게 된다.

결론 — 실재를 묻는 질문과 특정을 묻는 질문은 답이 다르다

백 년 동안의 시도를 늘어놓으면 같은 형태가 반복된다. 한쪽에서 물의 흔적을 찾고, 다른 쪽에서 그것을 이야기에 붙이고, 연대를 맞춰 보면 어긋난다. 우르의 퇴적층은 기원전 3500년까지 올라가 왕명록 계산보다 500년 이르고, 키시와 슈루팍의 진흙층은 연대가 맞는 대신 두께가 30센티미터 안팎이며, 우르에서 11킬로미터 떨어진 에리두에는 흔적이 없다. 흑해 가설은 연대와 규모를 모두 확보하지만 설명 대상이 바뀐다. 짠물의 침입은 이야기가 그리는 강물의 범람과 종류가 다르다.

이 어긋남이 반복되는 이유는 두 개의 질문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실재를 묻는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도시를 덮는 범람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여기에는 답이 나와 있다. 여러 유적의 진흙층이 그것을 보여주고, 1925년부터 1930년 사이 우르 일대에서 거의 매 계절 사막이 물에 잠겼다는 관찰도 같은 방향이다. 말로완이 1964년에 확인한 것이 이 답이다.

다른 하나는 특정을 묻는다. 그 여러 범람 가운데 어느 것이 지우수드라와 노아의 홍수인가. 이 질문에는 백 년 동안 답이 나오지 않았고,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자료 부족만은 아니다. 이야기 자체가 반복되는 범람을 하나의 사건으로 압축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슈루팍이 유프라테스강 기슭에 있다는 서술, 계류 말뚝이 뽑히고 둑이 넘친다는 서술은 그 지역에서 되풀이되던 재난의 모양을 옮긴 것이다. 되풀이되는 것을 한 번의 사건으로 지목하려니 어느 진흙층을 고르든 나머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정박지 문제도 같은 구조다. 아라랏의 산들, 주디산, 니무쉬산, 고르디에네 산지가 각각 다른 공동체의 전승으로 남아 있다. 네 곳 가운데 하나를 실제 장소로 고르는 작업은 나머지 셋이 왜 생겼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반대로 네 곳을 각각의 전승으로 두면, 이야기가 전해지는 동안 각 지역이 자기 가까운 산을 정박지로 앉혔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왜 여러 이름이 남았는지까지 설명한다.

지금 열려 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어떤 환경에서 나왔는가라는 물음이다. 강 두 줄기가 자주 넘치고 도시가 강기슭에 붙어 있으며 관개 시설이 물을 잡아 두는 땅에서, 범람은 주기적으로 겪는 일이었다. 그런 조건에서 한 도시가 통째로 묻히는 경험이 반복되면 그것이 이야기의 재료가 된다. 특정 연도를 찾는 대신 이 조건을 묻는 쪽이 답이 나오는 질문이다.

연대 측정 기술이 정밀해지면서 개별 퇴적층의 시점은 계속 좁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정밀화가 이야기와 사건을 연결해 주지는 않는다. 우르와 키시와 슈루팍의 진흙층 연대가 앞으로 더 정확해지더라도,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점토판에 적힌 홍수인지를 가릴 근거는 본문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본문은 지난 150년 동안 계속 바뀌어 왔다.

이 글은 홍수 이야기를 다루는 세 편 가운데 둘째다. 첫째 편은 네 판본이 홍수의 원인과 결말을 어떻게 다르게 적는지를, 셋째 편은 본문 자체가 1872년 이후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