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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자료 가설의 학설사 — 아스트뤼크에서 신문서가설까지, 그리고 홍수 기사가 시험대가 된 이유

창세기가 여러 자료를 엮어 만들어졌다는 설명은 1753년에 시작되어 1878년에 표준형이 되었고 1977년에 유럽에서 버려졌다가 2012년 북미에서 다시 세워졌다. 250년 동안 바뀌지 않은 것은 본문에 겹이 있다는 관찰뿐이고, 그 겹을 어떻게 나눌지는 지금도 정해져 있지 않다.

2026년 9월 12일

창세기 6장 끝과 7장 처음 사이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에 실을 짐승의 수를 지시하는데, 그 지시가 두 번 나오고 숫자가 서로 다르다.

וּמִכָּל־הָחַי מִכָּל־בָּשָׂר שְׁנַיִם מִכֹּל תָּבִיא אֶל־הַתֵּבָה לְהַחֲיֹת אִתָּךְ

우미콜하하이 미콜바사르 셰나임 미콜 타비 엘하테바 레하하요트 이타크

살아 있는 모든 것, 모든 육체 가운데 둘씩을 방주로 데려와 너와 함께 살아남게 하라.

창세기 6장 19절, 레닌그라드 코덱스 계열 마소라 본문(BHS)

מִכֹּל הַבְּהֵמָה הַטְּהוֹרָה תִּקַּח־לְךָ שִׁבְעָה שִׁבְעָה אִישׁ וְאִשְׁתּוֹ

미콜 하베헤마 하트호라 티카흐레카 시브아 시브아 이시 베이쉬토

정결한 짐승은 모두 일곱씩 일곱씩, 수컷과 그 짝으로 데려가라.

창세기 7장 2절, 레닌그라드 코덱스 계열 마소라 본문(BHS)

두 구절 사이의 거리는 여섯 절이다. 앞에서는 모든 짐승을 둘씩 실으라 하고, 뒤에서는 정결한 짐승을 일곱씩 실으라 한다. 같은 대목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도 바뀐다. 6장 22절은 노아가 אֱלֹהִים(엘로힘)이 명한 대로 했다고 적고, 바로 다음 절인 7장 1절은 יְהוָה(야웨)가 노아에게 말했다고 적는다.

이런 자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려는 시도가 250년 넘게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세워진 가설은 한 번 표준이 되었다가 버려졌다가 다시 세워졌다. 학설의 내용보다 학설이 겪은 이 부침이 더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지금 무엇이 확정되어 있고 무엇이 확정되어 있지 않은지를 판단하려면 그 부침을 따라가야 한다.

아스트뤼크는 성경의 권위를 지키려고 자료를 나누었다

자료를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은 1753년 브뤼셀에서 익명으로 나온 책에서 시작한다. 제목은 『모세가 창세기를 지을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원자료에 관한 추측』이었고, 저자는 프랑스 의사 장 아스트뤼크였다.

자료비평 독일어로는 크벨렌샤이둥(Quellenscheidung), 곧 자료 나누기라고 부른다. 지금 우리가 보는 한 편의 글이 실은 여러 개의 먼저 있던 글을 엮은 결과라고 보고, 문체·어휘·관심사·모순을 단서로 그 원래 글들을 다시 갈라내려는 작업이다. 영어권에서 source criticism이라고 할 때는 역사비평 전반을 가리키는 넓은 뜻으로 쓰기도 하므로 두 용법을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아스트뤼크의 동기다. 그는 성경을 방어하려고 이 작업을 했다. 홉스와 스피노자가 모세 저작을 부정한 것을 그는 지난 세기의 병통이라 불렀고, 그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자기 목표라고 밝혔다. 스피노자의 논거는 창세기의 모순과 중복이었다. 아스트뤼크는 그 모순이 모세가 사용한 서로 다른 원자료에서 왔다고 설명했다. 자료를 나누면 모세 저작을 지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방법은 당대 고전학에서 빌려 왔다. 학자들은 이미 일리아스 같은 고전 문헌에 문헌비평 도구를 적용해 서로 다른 전승을 갈라내고 가장 원형에 가까운 본문을 찾고 있었다. 아스트뤼크는 그 도구를 창세기에 가져왔다. 그가 잡은 표지는 둘이었다.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르는가 야웨로 부르는가, 그리고 같은 이야기가 두 번 나오는가. 창조 기사가 1장과 2장에 두 번 나오는 것, 사라와 이방 왕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 그 예였다.

학설의 출발점이 호교론이었다는 사실은 지금도 쓸모가 있다. 자료를 나누는 작업 자체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어떤 입장도 함축하지 않는다. 같은 도구를 쓰고도 정반대 결론에 이를 수 있고, 실제로 역사가 그렇게 진행되었다. 자료비평을 신앙의 반대편에 놓는 배치는 나중에 생겼다.

네 자료의 이름과 순서는 벨하우젠에게서 확정되었다

아스트뤼크보다 먼저 신명을 단서로 삼은 사람이 있었다. 헤닝 베른하르트 비터가 1711년 힐데스하임에서 낸 『가나안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권리』가 그것으로, 창세기를 계속 주석하는 형식의 책이었다. 다만 이 책은 당대에 거의 읽히지 않았고 학설의 흐름을 만들지 못했다.

흐름을 만든 것은 독일 학계였다. 요한 고트프리트 아이히호른이 1780년부터 1783년까지 라이프치히에서 세 권으로 낸 『구약 입문』은 신명 외에 문체와 특정 어휘 같은 문헌적 기준을 자료 분석에 추가했고, 엘로힘 계열과 야웨 계열의 문체가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그 손길이 창세기 바깥에서도 보인다고 주장했다. 1798년에는 카를 다비트 일겐이 『예루살렘 성전 문서고의 문서들』을 내면서 엘로힘 계열 안에 다시 둘이 있다고 보았다.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이 축적된 작업을 종합한 사람이다. 그는 자료를 발명하지 않았고 앞선 독일 학계에서 이미 나온 견해를 정리해 대중에게 전달한 쪽에 가깝다. 그의 핵심 저작은 두 권이다. 1876년부터 1877년까지 베를린에서 나온 『육경과 구약 역사서의 구성』, 그리고 1878년에 『이스라엘 역사』 제1권으로 나온 뒤 1883년에 『이스라엘 역사 서설』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온 책이다. 영역본은 1885년 에든버러에서 나왔다.

벨하우젠이 새로 한 작업은 자료의 연대 순서를 뒤집는 것이었다. 그는 각 자료의 시기를 본문 내부 표지가 아니라 이스라엘 종교 제도가 실제로 어떻게 발전했는가라는 독립된 기준으로 정하겠다고 밝혔다. 제사 장소를 예로 들면, 야웨 계열과 엘로힘 계열은 여러 곳의 제단을 허용하고, 신명기 계열은 기원전 620년경 요시야 개혁에서 제사 장소를 한 곳으로 모으라고 요구하며, 제사장 계열의 법은 그 집중을 요구하지 않고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전제하는 쪽이 요구하는 쪽보다 뒤라는 추론에서, 제사장 자료가 가장 늦다는 결론이 나온다.

제사장 문서(P) 오경 안에서 문체와 관심사가 뚜렷하게 구별되는 층을 가리킨다. 정형화된 문구를 반복하고, 족보와 연대와 치수를 즐겨 적으며, 제사 제도와 정결 규정에 관심이 집중된다. 창세기 1장, 홍수 기사의 날짜 계산, 각종 계보가 여기 속한다고 본다. 자료 가설의 다른 부분이 흔들릴 때도 이 층의 존재만큼은 폭넓게 인정되어 왔다.

이 배치가 이른바 JEDP, 곧 야웨 문서·엘로힘 문서·신명기 문서·제사장 문서의 네 자료 가설이다. 이후 100년 가까이 이 틀이 표준이었다.

궁켈은 문서로 적히기 전 단계를 하나 더 넣었다

헤르만 궁켈은 자료 나누기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문서가 있기 전에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들은 입으로 전해지면서 이미 일정한 형태를 갖추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각 이야기는 원래 독립된 짧은 단위였고, 전승 과정에서 규칙적인 형식을 얻었으며, 문서 저자는 그 단위들을 모은 편집자에 가깝다는 그림이다.

궁켈은 그 전에 더 논쟁적인 작업을 했다. 1895년 괴팅겐에서 낸 『태초와 종말의 창조와 혼돈』에서 그는 바빌로니아 신화 전승을 성경 자료를 거쳐 유대교의 시작까지 추적했다고 주장했고, 창세기 1장 2절이 바빌로니아 창조 신화 에누마 엘리시의 영향을 받았으며 히브리어 תְּהוֹם(테홈, 깊음)이 여신 티아마트에서 파생되었다고 보았다. 이 어원 주장은 뒤에 언어학적으로 부정되지만, 그것과 별개로 궁켈이 도입한 구전 단계라는 층위는 지금도 살아 있다.

마르틴 노트는 여기에 또 한 겹을 더했다. 그의 1948년 저작 『오경 전승사』는 자료들 뒤에 공통의 주제 묶음이 있고 각 자료가 그 묶음을 각자 풀어냈다고 보았다. 노트의 작업은 전승사를 구약 해석의 독자적 대상으로 만들었고, 벨하우젠 이래 유지되던 육경 개념도 그가 다시 짰다.

여기까지가 학설이 쌓이던 시기다. 층이 하나씩 더해졌고 틀 자체는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린 것은 그다음이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세 권이 나오면서 합의가 깨졌다

오경 성립에 관한 주석학계의 합의를 깨뜨린 것으로 꼽히는 책은 셋이고 3년 안에 나왔다. 존 반 세터스의 『역사와 전승 속의 아브라함』이 1975년, 한스 하인리히 슈미트의 『이른바 야웨 문서』가 1976년, 롤프 렌토르프의 『오경의 전승사적 문제』가 1977년이다. 렌토르프의 책은 베를린 데그루이터에서 나왔고 분량은 본문 177쪽이다.

이 책들이 각각 겨눈 곳은 달랐다. 반 세터스는 족장 이야기의 연대 근거를 무너뜨렸고, 슈미트는 가장 오래된 자료로 여겨지던 야웨 문서의 독립성과 연대를 의심했으며, 렌토르프는 네 개의 연속된 문서가 나란히 흐르다 합쳐졌다는 모형 자체를 문제 삼았다. 렌토르프가 제시한 대안은 족장 이야기가 문헌적으로 독립되어 있던 개별 이야기와 이야기 묶음을 편집으로 연결한 결과라는 것이었다.

이 전환의 속도가 특기할 만하다. 오경 연구사를 정리한 서술들은 1977년 렌토르프의 책 출간 시점에 선을 그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이전의 연구는 문서가설 계열이 주류였고, 그 이후 독일어권 연구는 비문서가설 계열로 기울었다. 미국 학계는 그 시기에도 문서가설로 훈련받는 쪽이 다수였기 때문에,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새로운 물결이 몰려온 듯한 감각이 남았다.

전환의 배경에는 개별 주제에 대한 연구의 축적도 있었다. 왕정 이전 이스라엘의 제도와 종교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불확실하고 취약하다는 점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연구에서 드러났다. 창세기에 나오는 조상들의 하나님과 조상에게 주어진 약속이라는 주제도 유목민 종교의 한 유형으로 분류할 근거가 없다는 지적이 베른트 위르겐 디브너를 비롯한 연구자들에게서 나왔다. 이 지적들은 각각 한정된 주제를 다룬 작업이었고, 그것이 모여 큰 틀에 대한 신뢰를 낮췄다.

블룸 이후 유럽 학계는 보충 모형으로 옮겨 갔다

합의가 깨진 뒤 유럽에서 자리를 잡은 것은 보충 모형이었다. 에르하르트 블룸이 1984년에 낸 『족장사의 구성』과 1990년에 낸 『오경 구성 연구』가 대표작이다. 이 모형에서는 처음부터 완결된 네 개의 문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짧은 단위들이 뭉치고 후대에 층이 덧붙으면서 지금의 본문이 되었다고 본다.

보충가설 독일어로 에르겐충스히포테제(Ergänzungshypothese)라고 한다. 문서가설이 여러 개의 완결된 평행 문서가 합쳐졌다고 보는 데 비해, 보충가설은 핵심이 되는 서술이 먼저 있고 거기에 후대의 손이 계속 덧붙었다고 본다. 존 반 세터스의 형태에서는 광범위한 엘로힘 문서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고, 야웨 문서 저자가 여러 문서 전승과 구전 전승을 빌려 와 하나로 엮었다고 설명한다. 학자들이 야웨 문서와 엘로힘 문서라는 두 저자를 본 것은 그 편집물을 잘못 나눈 결과라고 본다.

연대 추정도 함께 내려갔다. 문서가설 계열이 오경의 저작을 기원전 10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놓았다면, 보충 모형은 7세기에서 5세기로 잡는다. 초기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 것이 이 재조정을 이끌었다.

이 모형이 합의가 되지는 않았다. 제사장 자료의 존재를 유지하면서 나머지 부분을 고전 가설보다 파편적으로 보는 여러 이론이 등장했고,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서가설과 단편가설과 보충가설을 결합하는 쪽이 오경의 길고 복잡한 문헌사를 설명하는 데 가장 그럴듯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영국에서는 헐대학교의 로저 노먼 화이브레이가 1987년 셰필드에서 『오경의 형성: 방법론 연구』를 냈다. 272쪽짜리 책이며 다루는 범위는 창세기부터 민수기까지로 신명기는 제외한다. 1부는 자료비평과 문서가설의 방법과 전제를 검토하고, 2부는 노트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발전시킨 양식비평과 전승사의 방법을 다루며, 3부는 단일 저자의 가능성을 포함해 화이브레이 자신의 대안을 제시한다. 그의 비판은 자료비평의 기본 방법을 겨눈다. 모순과 반복, 그리고 하나님을 부르는 이름이 바뀌는 것 같은 문체 특징으로 자료를 식별하는 절차의 전제 자체가 비논리적이고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이 그의 판정이다. 이름이 바뀐 자리를 설명할 길은 자료 교체 말고도 있다. 신학적 이유로 이름을 골랐을 경우와 글쓴이가 표현에 변화를 준 경우를 그는 예로 든다. 화이브레이는 벨하우젠이 네 개의 연속된 문서를 재구성할 때 가장 중시한 기준이 종교 관념과 관행이었고, 네 문서가 이스라엘 종교 진화의 네 단계를 반영한다는 것이 그 논증의 뼈대였다고 정리한다.

2012년 북미에서 문서가설이 다시 세워졌다

유럽에서 버려진 가설이 북미에서 되살아난 것이 최근 30년의 사건이다. 조엘 베이든이 2012년 예일대학교출판부에서 낸 『오경의 구성: 문서가설 다시 세우기』가 그 중심에 있다. 앵커 예일 성서 참고 총서로 나온 378쪽짜리 책이며, 창세기 37장의 요셉 매매, 민수기 11장의 광야 원망, 민수기 16장의 반역, 출애굽기 14장의 홍해 같은 개별 본문을 사례로 삼아 자료별 특징을 연속성·정합성·상보성·완결성으로 나누어 논증하고 마지막에 자료의 결합을 다룬다. 벤저민 슈워츠와 제프리 스타커트가 같은 계열이고, 이 흐름을 신문서가설 또는 신벨하우젠주의라고 부른다.

이 재건이 고전 가설의 재진술은 아니다. 20세기 초의 문서가설을 그대로 되풀이하지 않고 더 정밀하게 논증된 새로운 형태로 제시되었으며, 그 결과 문서가설은 오경 연구에서 다시 유효하고 생산적인 접근으로 자리를 회복했다. 슈워츠는 2011년 논문에서 최근 연구의 비판이 문서가설을 기각할 근거가 되는지를 정면으로 따졌다. 그가 겨눈 것은 기각의 이유가 명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고전 모형이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불충분하다는 주장은 널리 퍼졌으나 그 판정의 근거는 적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진단이다.

여기서 확인해 둘 것이 있다. 지금 오경 연구는 합의가 없는 상태다. 새로운 합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서로 다른 관점 사이의 논쟁은 활발하며 때로 격렬하다. 확인되는 공통분모는 둘이다. 첫째, 오경이 여러 기원을 가진 복합물이라는 일반적 견해는 대다수 역사가가 여전히 받아들인다. 둘째, 제사장 자료의 존재와 성격은 폭넓게 인정된다. 그 층은 문체와 내용에서 뚜렷하게 구별되고 내부 일관성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지난 250년이 남긴 것을 정리하면 이렇다. 본문에 겹이 있다는 관찰은 그대로 살아남았고, 그 겹이 몇 개이며 어떤 순서로 쌓였는가에 대한 답은 세 번 바뀌었다.

홍수 기사는 자료 분할이 가장 잘 통하는 자리다

학설의 부침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무엇이 관찰이고 무엇이 해석인지 갈라내기 어렵다. 한 대목을 실제로 들여다보는 편이 낫고, 그 대목으로는 홍수 기사가 적당하다. 자료 분할이 가장 강하게 성립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맨 앞에 인용한 두 구절이 첫 번째 문제다. 6장 19절은 모든 육체 가운데 둘씩을 데려오라 하고, 7장 2절은 정결한 짐승을 일곱씩 데려가라 한다. 6장 20절이 새와 가축과 기는 것을 다시 둘씩이라고 못을 박기 때문에 앞의 지시가 개괄이고 뒤의 지시가 세부라는 해석도 간단히 서지 않는다.

두 번째는 기간이다. 7장 17절은 홍수가 40일 동안 땅에 있었다고 적고, 7장 24절은 물이 150일 동안 불어났다고 적는다. 8장 3절은 다시 150일 만에 물이 줄었다고 하고, 8장 6절은 40일이 지난 뒤 노아가 창을 열었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노아의 나이와 달과 날짜로 시점을 특정하는 표현이 따로 있다. 자료비평은 기간을 말하는 표현을 야웨 문서로, 노아의 생애를 기준으로 날짜를 매기는 정밀한 표현을 제사장 문서로 돌린다.

세 번째는 신명이다. 6장 22절의 엘로힘과 7장 1절의 야웨가 한 절 간격으로 붙어 있고, 이런 교체가 홍수 기사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이 셋이 겹치기 때문에 홍수 기사는 자료 가설이 가장 설득력 있게 작동하는 본문으로 꼽혀 왔다. 제사장 자료와 비제사장 자료 두 갈래를 가정하는 데 전문가들의 동의가 넓은 것도 그 때문이다. 다른 대목에서 야웨 문서와 엘로힘 문서를 갈라내는 작업이 대부분 포기된 지금도 이 대목의 이중 구조만큼은 남아 있다.

교차 구조는 통일성의 증거로 쓰이지만 그 이상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반대편의 대표 논거는 이 본문에 정교한 대칭 구조가 있다는 관찰이다. 움베르토 카수토가 이 구조를 상세히 기술했고, 고든 웬함이 1978년 『베투스 테스타멘툼』 28권 3호 336쪽부터 348쪽까지 실린 논문에서 다듬었다.

구조는 이렇다. 6장 9절의 도입에서 시작해 땅의 폭력, 파멸을 알리는 첫 번째 말씀, 방주에 들어가라는 두 번째 말씀, 홍수의 시작, 물이 불어남으로 올라갔다가, 8장 1절 상반절의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는 문장을 전환점으로 삼아, 물이 줄어듦, 땅이 마름, 방주에서 나오라는 세 번째 말씀, 다시는 멸하지 않겠다는 선언, 언약이라는 네 번째 말씀으로 내려온다. 숫자 배열도 대칭이다. 7일 대기, 다시 7일, 40일 비, 150일 상승, 150일 하강, 40일 대기, 7일, 다시 7일 순서로 놓인다.

웬함의 논증에서 정확히 짚어야 할 대목이 있다. 그는 이 구조를 근거로 문서가설을 기각하지 않았다. 논문은 자료가 둘로 나뉠 가능성을 다른 가능성들과 함께 인정한 채 시작하며, 저자가 일관되고 잘 짜인 이야기를 썼다는 점을 논증한다. 그 저자가 문서가설이 말하는 대로 두 자료를 능숙하게 결합한 사람일 수도 있고, 메소포타미아 기원의 옛 자료를 지금 형태로 편집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정리다. 비평가들이 부주의한 반복으로 본 것이 실은 대칭을 유지하려는 의도적 장치였다는 것이 논지이지 저자가 한 사람이라는 것이 논지가 아니다.

대중적 요약에서 이 논문이 단일 저자의 증거로 인용되는 일이 잦은데, 논문 자체는 그 주장을 하지 않는다. 학설을 검토할 때 자주 걸리는 자리가 여기다. 어떤 논문이 무엇을 논증했는가와 그 논문이 어느 진영에서 어떻게 인용되어 왔는가는 별개이고, 후자만 보고 전자를 짐작하면 틀린다.

교차 구조를 반대 방향으로 쓰는 연구도 있다. 스티븐 스콧이 2020년 『브리검영대학 연구 계간』 59권에 실은 분석은, 전체 교차 구조가 단일 저자를 가리킨다는 웬함의 명제에 반대하면서 야웨 문서와 제사장 문서가 각각 교차 구조로 지어져 있었다고 본다. 편집자는 두 교차 구조를 꼼꼼히 끼워 넣었고, 그 작업의 정교함으로 보아 편집자가 양쪽 구조를 모두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스콧은 두 판본이 유대 공동체의 여러 집단에서 각각 확립되어 소중히 여겨졌기 때문에 편집자가 어느 쪽도 버리지 않고 보존했다고 설명한다.

이 대립이 알려 주는 것은 구조의 존재가 저자 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칭이 있다는 관찰과 저자가 하나라는 결론 사이에는 한 단계가 더 필요하고, 그 단계를 채우는 것은 본문이 아니라 전제다.

연대 계산 쪽에서도 자료 분할에 대한 반론이 있다. 기간을 말하는 표현을 야웨 문서의 특징으로 본다면 7일과 40일뿐 아니라 150일도 같은 자료여야 하는데, 자료비평은 7일과 40일을 야웨 문서로 돌리면서 150일은 제사장 문서로 돌린다는 지적이다. 분할 기준이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 지적은 분할 자체를 무너뜨리기보다 어느 절이 어느 자료인지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는 쪽에 가깝다.

톨레도트 문구는 통일성의 증거로 쓸 수 없다

창세기에는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틀이 있다. אֵלֶּה תוֹלְדוֹת(엘레 톨레도트), 곧 이것은 누구의 내력이라는 정형 문구다. 2장 4절, 5장 1절, 6장 9절, 10장 1절, 11장 10절, 11장 27절, 25장 12절, 25장 19절, 36장 1절과 9절, 37장 2절에 나온다. 문구는 열한 번 등장하지만 36장의 두 번이 같은 단락을 열기 때문에 단락은 열 개다.

이 틀은 통일된 설계의 증거로 자주 인용된다. 창세기 전체를 가로지르고, 각 단락이 다음 단락으로 초점을 좁혀 가며, 창조에서 이스라엘로 시야를 축소하는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매슈 토머스는 2011년에 낸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펴내면서, 접속사 바브 없이 나타나는 다섯 개의 독립 표제를 구별해 내고 이 좁혀 가는 기능이 창세기와 오경 전체의 대구조를 규정한다고 주장했다. 양식비평과 언어학적 방법을 결합한 본문 내부 분석이며, 표본을 다루는 실증 연구와는 성격이 다른 구조 논증이다.

그런데 이 문구를 통일성의 근거로 쓰려면 한 단계를 더 논증해야 한다. 비평 학계는 오래전부터 톨레도트 문구를 제사장 자료 계열로 분류해 왔다. 창세기의 족보 목록은 대부분 정형화된 표현과 혈통 연속성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제사장 자료로 돌려지며, 톨레도트 문구가 그 정형화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이 방향을 확정한 것은 카를 부데의 두 논문이다. 1914년 『구약학회지』 34권 241쪽부터 253쪽까지 실린 「엘레 톨레도트」와 1916년 같은 학회지 36권 1쪽부터 7쪽까지 실린 후속 논문이다. 부데는 1850년 벤스베르크에서 태어나 본과 베를린에서 공부했고 1900년부터 1921년까지 마르부르크대학에서 구약 신학과 주석을 가르쳤다.

부데의 주장은 통일성을 옹호하는 쪽이 기대하는 것과 반대 방향이다. 그가 본 바로는 제사장 자료에서 이 문구는 원래 일관되고 적절하게 쓰였고 오직 족보 목록의 표제 구실만 했다. 그런데 편집 과정에서 창세기의 다른 재료에까지 확대 적용되면서 본래의 뜻이 뒤틀렸다고 보았다. 부데 자신은 제사장 자료를 편집자의 작업이 아니라 한 사람의 저작으로 보는 입장이었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가 1934년 슈투트가르트 콜함머에서 낸 『육경 안의 제사장 문서: 문헌비평적 검토와 신학적 평가』 33쪽부터 40쪽까지가 이 흐름을 이어받아 큰 영향을 미쳤다. 폰 라트의 설명은 부데와 다르다. 그는 제사장 자료가 독립된 톨레도트 책을 재료로 삼았다고 보았고, 제사장 자료 자체가 여러 자료를 모은 결과이므로 그 안에 일관되지 않은 부분이 남았다고 설명했다. 노아의 톨레도트가 그 불일치를 보여 주는 두드러진 사례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두 사람의 설명이 갈라지는 것 자체가 알려 주는 바가 있다. 톨레도트 문구가 일관되지 않게 쓰였다는 관찰은 양쪽이 공유하고, 그 불일치의 원인을 편집자에게 돌리느냐 제사장 자료 자체의 복합성에 돌리느냐에서 나뉜다. 어느 쪽이든 이 문구는 단일 설계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톨레도트 틀이 가리키는 것은 일차적으로 제사장 자료의 설계이지 창세기 전체의 단일 저자가 아니다. 이 틀이 먼저 제사장 자료 안에서 확장되었고, 나중에 제사장 자료와 비제사장 자료를 잇는 용도로 후대 편집자가 사용했다는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반대 논거가 없지는 않다. 37장 2절의 톨레도트는 야웨 문서와 엘로힘 문서 재료로 이루어진 단락을 여는데, 그렇다면 이 문구를 제사장 자료의 후대 구성물로 보는 벨하우젠 학파의 설명이 그 자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25장 19절의 톨레도트 뒤에도 야웨 문서와 엘로힘 문서가 섞인 긴 단락이 이어지고 제사장 자료는 간간이 나올 뿐이다.

그렇다 해도 이 반론이 보이는 것은 톨레도트 문구의 귀속에 논쟁이 있다는 사실이지 통일성이 입증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문구를 어느 자료에 돌릴지가 미결인 상태에서 그 문구를 통일성의 증거로 삼으면 논증이 순환한다.

키카와다와 퀸의 시도가 걸린 자리

창세기 앞부분이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정면으로 논증한 연구도 있다. 아이작 키카와다와 아서 퀸이 1985년 내슈빌 애빙던에서 낸 『아브라함 이전에』다. 두 사람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를 섬세하고 능숙한 한 저자의 작품으로 보았고, 고대 근동의 원역사 문헌들과 비교하는 방법을 썼다. 저자가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조심해야 하며,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에서 그렇듯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보이면 잘못된 쪽은 독자의 눈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 이들의 태도였다.

이 주장에는 구체적인 반론이 붙어 있다. 두 사람은 4장 1절과 2절, 그리고 4장 17절에 주요 단락 경계를 두는데 그 자리에는 톨레도트 표제가 없고, 이들의 모형은 6장 9절의 톨레도트를 지나쳐 버린다. 창세기 전체의 톨레도트 구조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이 대목은 양쪽 모두에 해당하는 문제를 보여 준다. 통일성을 논증하는 쪽은 자기가 찾은 구조가 본문의 다른 구조와 충돌하지 않는지 보여야 하고, 자료를 나누는 쪽은 자기 분할 기준이 본문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되는지 보여야 한다. 두 요구는 대칭이고, 어느 쪽도 지금 완전히 충족하지 못한다.

결론 — 250년이 확정한 것은 본문에 겹이 있다는 사실 하나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한 문장으로 모인다. 창세기의 성립을 설명하는 가설은 세 차례 크게 바뀌었고, 그 변화를 관통해 살아남은 것은 결론이 아니라 관찰이다.

살아남은 관찰은 구체적이다. 짐승의 수를 지시하는 명령이 두 번 나오고 숫자가 다르다. 홍수 기간이 40일과 150일로 함께 적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한 절 간격으로 교체된다. 톨레도트 문구가 정형화된 형태로 열한 번 반복된다. 이 관찰들은 1753년에 지적된 것이 그대로 지금도 지적되며, 어느 진영도 이 자리들이 평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확정되지 않은 것은 그 관찰의 원인이다. 자료가 몇 개였는가에 대해 지난 250년 동안 네 개, 파편 다수, 핵심에 보충이 덧붙은 층, 다시 네 개라는 답이 차례로 제시되었다. 연대에 대해서도 기원전 10세기부터 6세기까지라는 답과 7세기부터 5세기까지라는 답이 갈라져 있다. 유럽과 북미의 주류가 서로 다른 모형을 쓰고 있으며 새로운 합의는 아직 없다.

판단이 나뉘는 자리를 확정하면 이렇다. 본문의 이질성을 서로 다른 자료가 합쳐진 흔적으로 보느냐, 한 저자가 의도적으로 사용한 서술 장치로 보느냐가 쟁점이다. 홍수 기사에서는 앞쪽 설명이 더 강하고 제사장 자료와 비제사장 자료 두 갈래에 동의가 넓다. 반면 창세기 전체의 대칭 구조와 톨레도트 틀은 뒤쪽 설명의 재료로 쓰인다. 그런데 그 재료들은 각각 반론을 안고 있다. 교차 구조는 두 자료가 각각 교차 구조였다는 설명과 양립하고, 톨레도트 틀은 제사장 자료의 설계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학설사의 부침을 모르는 채로 어느 한 시점의 결론만 인용하면 틀리기 쉽다. 문서가설을 학계의 정설로 소개하는 서술은 1977년 이후 유럽 학계의 상태를 반영하지 않고, 문서가설이 폐기되었다고 소개하는 서술은 2012년 이후 북미 학계의 상태를 반영하지 않는다. 두 서술 모두 각자의 시점에서는 옳았고 지금은 부정확하다.

남은 물음은 방법에 있다. 이 분야의 자료는 본문 자체와 고대 근동 문헌, 그리고 제한된 고고학 자료가 전부다. 같은 본문을 놓고 상반된 재구성이 200년 넘게 공존해 온 것은 어느 쪽의 논증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자료가 판정을 내려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료가 결정하지 못하는 자리에서는 전제가 결정한다. 그 전제를 드러내 놓고 따지는 것과, 결론만 골라 인용해 자기 입장의 권위로 삼는 것은 다른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