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남동부의 괴베클리 테페는 농경이 시작되기 전에 거대 건축이 있었음을 확인시켰다. 여기서 '종교가 농경을 낳았다'는 결론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이 유적에서는 가축도 재배 곡물도 나오지 않는다. 자료가 지지하는 것은 긍정적 인과가 아니라, 농경이 정주와 기념비적 건축의 전제가 아니었다는 부정 명제다.
20세기 중반 이후 서아시아 선사학의 표준 설명은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사람들이 야생 곡물을 심고 거두기 시작하면서 식량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고, 저장된 잉여가 한곳에 머무는 생활을 가능하게 했으며, 정주 인구가 늘어나자 노동을 조직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위에서 기념비적 건축과 조직화된 종교가 나왔다. 농경이 맨 앞에 있고 나머지가 뒤따르는 구도다.
괴베클리 테페의 발굴은 이 순서의 앞부분을 무너뜨렸다. 요리스 페터스와 클라우스 슈미트가 2004년 Anthropozoologica 39권 1호에 실은 보고에 따르면, 기원전 9500년 무렵부터 세운 원형 구조물의 T자형 기둥은 높이 3미터에서 5미터에 무게가 10톤에 이른다. 이런 건축을 하려면 채석과 운반과 건립에 여러 사람이 오랜 기간 협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 유적의 퇴적층에서는 가축의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재배 곡물의 증거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주장이 붙었다. 슈미트는 대규모 의례가 요구한 노동력과 식량 조달이 수렵채집 경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고, 그 부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동식물 순화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원인과 결과의 방향을 뒤집은 설명이다. 이 주장은 지금 이 유적을 설명하는 가장 널리 퍼진 문장이 되었고, 동시에 발굴단 자신이 유지하기 어렵다고 정리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다루려면 한 덩어리로 묶여 쓰이는 세 가지를 갈라 놓아야 한다.
정주는 사람들이 한곳에 계속 머물러 사는 상태를 말한다. 야생 자원이 충분히 풍부하고 계절에 따라 안정적으로 확보되면 농경 없이도 정주가 성립한다. 순화는 사람 손에서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야생 동식물의 유전적 형질과 형태가 바뀌는 과정이다. 농경 경제는 한 공동체가 먹는 식량의 대부분을 재배와 사육으로 얻는 상태다. 세 과정은 같은 시점에 일어나지 않았고, 서아시아에서는 수천 년에 걸쳐 어긋난 순서로 진행되었다.
페터스와 슈미트는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중앙 발굴구역에서 나온 포유류 뼈를 집계했다. 동정 가능한 포유류 표본은 15471점이었고, 동정하지 못한 것까지 더하면 38704점이었다. 종별 구성은 다음과 같다.
| 종 | 동정 표본 수 |
|---|---|
| 고이터드가젤 | 7,949 |
| 들소(오록스) | 2,574 |
| 아시아야생당나귀 등 말과 | 1,177 |
| 여우(주로 붉은여우) | 971 |
| 양·염소류(대부분 무플론) | 944 |
| 멧돼지 | 863 |
| 토끼 | 386 |
| 무플론(별도 동정) | 293 |
| 붉은사슴 | 170 |
유제류가 전체의 80퍼센트를 넘었고, 그중 가젤이 41.8퍼센트로 가장 흔했다. 다만 표본 수와 실제 식량 기여도는 다르다. 뼈 무게로 환산하면 들소가 소비된 고기의 절반가량을 대고, 가장 자주 사냥된 가젤은 15퍼센트 정도를 댔다. 새는 20종, 물고기는 2종이 확인되었으나 양은 적었다.
이 뼈들이 가축이 아니라는 판단의 근거는 세 가지였다. 첫째, 뒤에 가축이 되는 종들, 곧 양과 돼지와 소의 평균 크기가 크다. 순화가 진행되면 몸집이 작아지므로, 큰 개체가 주를 이룬다는 것은 야생 집단임을 뜻한다. 둘째, 연령 구성이 성체 중심이다. 가축으로 기르면 고기를 얻기 위해 어린 개체를 골라 도살하므로 연령 분포가 달라진다. 셋째, 암컷보다 수컷이 많다. 젖과 번식을 위해 암컷을 남기는 사육 집단의 구성과 반대다.
페터스와 슈미트는 이 뼈 집계를 근거로, 층 III의 동물 유체를 남긴 사람들이 아직 수렵채집민이었다고 정리했다. 슈미트 본인이 공저자인 보고에서 나온 판단이다.
한 가지 더 있다. 야생염소는 단 한 점도 동정되지 않았다. 두 저자는 이것을 표본 크기의 문제로 보지 않고 유적 주변 환경의 문제로 보았다. 나무가 드문드문 선 낮은 구릉과 물길을 따라 늘어선 숲이 섞인 지형은 야생양의 서식 조건에는 맞지만 야생염소에는 맞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식물 쪽 자료는 더 복잡하다. 라우라 디트리히를 제1저자로 하는 연구진은 2019년 PLoS ONE 14권 5호에 이 유적의 곡물 가공 도구를 분석한 논문을 실었다. 갈돌과 갈판과 공이와 절구 7268점을 3차원으로 기록하고 표면 사용흔을 관찰한 뒤, 복제품으로 실제 곡물을 갈아 보는 실험을 했다.
결과는 곡물 가공이 대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쪽이었다. 가장 흔한 형식의 갈돌에서 곡물 가공에 따르는 사용흔이 나왔고, 실험에서 그런 갈돌 하나로 8시간 작업하면 평균 4800그램의 가루가 나왔다. 한 사람의 하루치 곡물을 500그램에서 1000그램으로 잡으면 5명에서 10명분이다. 도구 일부에서는 밀과 보리가 속한 포아풀아과의 껍질과 줄기에서 나오는 식물규산체가 검출되었다.
사용흔과 식물규산체는 야생 곡물을 대량으로 거두어 빻았다는 사실까지는 지지한다. 그러나 그 곡물이 재배된 것이라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리 클레어가 2026년 4월 Heritage 9권 5호에 실은 논문은 현재 상태를 이렇게 정리한다.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가축의 증거가 여전히 나오지 않고, 형태학적으로 순화된 곡물의 유체도 층위상 늦은 PPNB 퇴적층에서 극히 산발적으로만 나온다.
2026년 4월에 공개된 실험실 분석은 인접 유적과의 비교를 더했다. 타쉬 테펠레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네즈미 카룰은 카라한테페와 괴베클리 테페 두 곳 모두에서 가젤 소비의 흔적이 강하게 나온다고 밝혔다. 다만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평지부터 높은 산지까지 여러 생태대에 걸친 동물이 훨씬 다양하게 확인되고 그 비율까지 정할 수 있었던 반면, 카라한테페는 가젤에 더 집중된 양상이다. 식물 쪽에서는 곡물이 주가 되리라고 예상했으나 콩과 식물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유적에서 곡물 가공 도구가 나온다는 사실이 농경의 증거로 소개되는 경우가 있다. 두 가지가 뒤섞인 서술이다.
야생 곡물을 베는 데도 낫이 필요하고, 야생 곡물을 먹으려면 껍질을 벗기고 빻아야 하므로 갈돌과 갈판이 필요하다. 도구의 형태와 사용흔만으로는 그 곡물이 사람이 심은 것인지 자생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에드워드 배닝이 2011년 Current Anthropology 52권 5호에 실은 논문은 이 유적에서 나온 수천 점의 사슬낫 날이 이곳 사람들이 곡물을 수확했음을 보여주며, 심고 가꾸었는지까지는 별개 문제라고 정리했다.
같은 논문은 순화 증거가 없다는 사실 자체를 다르게 읽었다. 재배 곡물의 직접 증거가 없는 상태는 초기 신석기 마을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보았다. PPNA 마을 가운데 재배 작물의 증거를 내놓은 곳은 아주 적고 PPNB 마을도 전부가 그렇지는 않으며, 보존 조건이 나쁘거나 회수율이 낮으면 초기 재배종을 찾아낼 확률이 떨어진다. 배닝은 이 시기에 수렵채집민과 농경민을 두 범주로 갈라놓는 서술 자체가 실제 경제와 맞지 않는다고 보았다. 초기 신석기 마을 사람들은 여러 세기 동안 사냥과 채집과 작물 돌보기와 동물 관리를 다양한 비율로 섞은 경제를 꾸렸고, 그 경제에 순화된 종이 아직 들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서아시아에서 밀이 순화된 자리는 분자생물학 쪽에서 좁혀졌다. 만프레트 호인과 프란체스코 살라미니를 비롯한 연구진은 1997년 Science 278권 5341호에 외알밀의 순화 기원지를 추적한 논문을 실었다. 서아시아 각지에서 모은 야생 외알밀 계통과 재배 외알밀 계통을 증폭단편길이다형성 표지 288개로 비교한 결과, 재배 외알밀에 가장 가까운 야생 집단은 튀르키예 남동부 카라자다 산지의 것이었다. 카라자다는 괴베클리 테페에서 북동쪽으로 3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화산체이고, 이 유적에서 육안으로 보인다.
이 결과는 슈미트 인과 논증에서 가장 강한 고리로 쓰였다. 순화가 시작된 자리가 이 유적에서 보이는 거리에 있다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먹이는 부담이 순화를 불렀다는 설명이 지리적으로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고리 자체가 그 뒤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호인의 연구는 서아시아의 작물 순화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좁은 한 구역에서 빠르게 일어났다는 이른바 핵심 지역 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받아들여졌다. 도리언 풀러와 조지 윌콕스와 로빈 앨러비는 2011년 World Archaeology 43권 4호 628~652쪽에 이 가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논문을 실었다. 요지는 이렇다. 이전 세대의 유전학 결과는 단일한 핵심 지역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유전 자료가 쌓이고 분석 방법이 정교해지면서 그 그림이 흔들리고 있으며 지리적으로 여러 기원을 가리키는 쪽으로 기운다. 특히 현대의 종자 수집 표본은 과거에 존재했던 야생과 재배 집단의 다양성을 불완전하게 반영하며, 그 안에는 이미 절멸한 계통들이 있었다.
이 논쟁은 정리되지 않았다. 핵심 지역 가설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다중 기원을 주장하는 연구들이 식물학과 유전학과 고고학 증거를 꼼꼼히 따져 보면 버티지 못한다고 반박했고, 호인 본인도 그 반박의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 상태에서 확인되는 것은 두 가지다. 카라자다 야생 집단이 재배 외알밀과 유전적으로 가깝다는 관측 자체는 유지된다. 그러나 그 관측이 순화가 그 한 자리에서 한 번 일어났음을 뜻하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후자가 흔들리면 이 유적과 순화 기원지를 잇는 지리적 근접성의 설명력도 함께 약해진다.
순화가 일어난 지역은 겹치지만 시점은 겹치지 않는다. 클레어가 2026년 논문에서 정리한 지역 편년에 따르면, PPNA 단계에는 이 지역에서 곡물 야생 조상종을 집중적으로 이용한 흔적이 없다. 북시리아의 무레이베트와 제르프 엘아흐마르와 텔 아브르 3에서 초기 형태의 전순화 재배가 추정될 뿐이다. 티그리스 상류의 구시르 회육 같은 유적에서는 야생 곡물조차 PPNA 층에서 나오지 않고 초기 PPNB 층에 가서야 나타난다.
형태학적으로 순화된 외알밀이 처음 확인되는 곳은 네발르 초리이고 시기는 초기 PPNB, 곧 기원전 8700년에서 8200년 사이다. 같은 시기에 양과 돼지와 염소를 가두어 기른 정황도 제기된다. 다만 클레어는 네발르 초리가 예외적인 사례이며 다른 유적에서 비슷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고 명시한다. 초기와 중기 PPNB 전반을 보면 채집 중심 전략과 작물 중심 전략과 혼합 경제가 공존했고, 작물은 야생형에 가까운 형태를 유지한 경우가 많았다. 작물 중심 경제로의 실질적 전환이 뚜렷해지는 시기는 훨씬 뒤인 후기 신석기다.
슈미트의 논증에는 중간 고리가 하나 더 있다. 대규모 의례에 많은 사람이 모였고, 그들을 먹이는 일이 수렵채집 경제로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는 단계다. 그 부담의 물증으로 제시된 것이 특수건물 충전토에서 나온 대량의 동물 뼈였다.
올리버 디트리히와 공저자들이 2012년 Antiquity 86권 333호 674~695쪽에 실은 논문이 이 해석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슈미트 자신이 초기 형태를 냈다. 건물을 의도적으로 메우던 시점의 대규모 축제에서 엄청난 양의 고기가 소비되었고, 그것이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유인이었으며, 발굴에서 나오는 많은 동물 뼈가 그 흔적이라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건물이 일부러 메워졌다는 전제 위에 서 있었다. 그 전제가 바뀌었다. 리 클레어가 2020년 e-Forschungsberichte des DAI 2호와 2024년 Documenta Praehistorica 51권에 정리한 바에 따르면, 남동쪽 저지대의 특수건물들은 의례적 매몰이 아니라 위쪽 비탈에서 밀려 내려온 퇴적에 잠겼다. 그렇다면 그 안의 동물 뼈는 축제의 잔해가 아니라 높은 곳에 쌓여 있던 쓰레기 퇴적이 쓸려 내려온 것이다. 클레어는 2024년 논문에서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축제 가설이 최근 몇 해 사이에 신뢰를 상당 부분 잃었다고 적었다.
맥주 쪽 근거도 따로 검토되었다. 라우라 디트리히를 제1저자로 하는 2020년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Reports 34권의 논문은 최대 165리터 용량의 석회암 구유 여섯 점을 맥락 분석과 사용흔 분석과 화학 분석과 실험을 결합해 다루었다. 구유 벽면에서 검출된 옥살산염이 맥주 제조의 증거로 논의되어 왔지만, 곡물이 물과 자주 닿기만 해도 옥살산염이 생길 수 있으므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논문의 정리다.
정리하면 슈미트 논증의 두 고리가 모두 근거를 잃었다. 순화가 시작된 자리가 가깝다는 고리는 단일 기원 모델이 논쟁 대상이 되면서 약해졌고, 사람들을 먹이는 부담이 있었다는 고리는 뼈의 출처가 바뀌면서 끊겼다.
괴베클리 테페는 기원전 9세기 천년기 후반부터 점차 버려졌고, 그와 함께 T자형 거석 건축이 사라졌다. 클레어는 이 시기에 이 지역 취락의 중심이 옮겨 갔다고 정리한다. 샨르우르파 주변의 구릉과 암반 지대에서 하란 평야의 귀르쥐테페,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아카르차이 테페와 메즈라 텔레일라트 쪽으로 이동했다. 이 지역의 초기 농경이 자리를 잡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다. 괴베클리 테페에서 거대 건축이 세워지고 유지되던 1500년 남짓 동안 이 유적에서는 가축도 재배 작물도 확인되지 않는다. 형태학적 순화의 첫 사례는 이 유적의 후기 단계와 겹치는 시기에 다른 유적에서 하나 나온다. 농경 경제로의 전환은 이 유적이 버려진 뒤 다른 장소에서 진행된다. 종교적 요구가 순화를 촉발했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촉발의 결과가 촉발한 자리에서 확인되어야 하는데, 확인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자료가 부족해서 생긴 공백과 구분해야 한다. 배닝이 지적했듯 보존과 회수의 한계 때문에 초기 재배종을 놓쳤을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러나 30년 동안 이 유적에서 수만 점의 동물 뼈와 7000점이 넘는 가공 도구가 나오는 동안 가축의 흔적이 한 건도 확인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표본이 부족해서 못 찾았다는 설명으로 넘기기 어려운 규모다.
인과를 뒤집는 발상 자체는 슈미트가 처음 낸 것이 아니다. 자크 카우뱅은 1997년 Naissance des divinités, naissance de l'agriculture에서 신석기 전환의 출발점을 상징 체계의 변화에서 찾았다. 마을 생활이 먼저 자리 잡고 그 위에서 조직화된 종교가 나왔다는 유물론적 설명을 겨냥한 주장이었다.
카우뱅의 주장은 넓은 지역의 상징 자료를 근거로 삼는다. 슈미트의 주장은 특정 유적 하나를 그 주장의 물증으로 제시한다. 둘의 논증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반증 조건도 다르다. 카우뱅의 명제를 검증하려면 지역 전체에서 상징 자료의 변화 시점과 경제 변화의 시점을 견주어야 한다. 슈미트의 명제를 검증하려면 괴베클리 테페에서 의례 활동이 정점에 이른 시기와 그 주변에서 순화가 시작된 시기가 맞물리는지를 보아야 하고, 이 유적에서 촉발의 흔적이 나와야 한다.
배닝이 2023년 Open Archaeology에 적은 지적이 여기에 걸린다. 발화의 자리에 관한 문제다. 이 유적의 해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통로에서 슈미트의 인과 주장은 카우뱅의 상징 혁명론이 '입증되었다'는 형태로 반복되었고, 그 과정에서 물증의 범위가 무엇인지는 생략되었다. 심리학과 종교학 쪽 저술이 이 명제를 근거 검토 없이 받아 쓰는 사례를 배닝은 여러 건 열거했다.
괴베클리 테페의 자료가 지지하는 것과 지지하지 않는 것은 나뉜다.
지지하는 쪽은 농경 없이도 정주와 대규모 공동 건축과 복잡한 상징 체계가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이 유적에서는 야생 가젤과 들소가 육류의 대부분을 댔고, 야생 곡물을 대량으로 가공했으며, 그 상태에서 10톤짜리 기둥을 세운 원형 구조물을 1500년 넘게 유지했다. 여기에 더해 2026년 4월에 공개된 카라한테페의 실험실 분석은 그 유적에서 콩과 식물이 식물성 식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괴베클리 테페의 식물 유체 분석 결과는 아직 같은 수준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잉여 농산물이 정주와 기념비적 건축의 전제라는 통설은 이런 발굴 결과 앞에서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
지지하지 않는 쪽은 종교가 농경을 낳았다는 인과다. 가축의 증거가 없고, 재배 곡물은 늦은 층에서 산발적으로만 나오며, 형태학적 순화의 첫 사례와 농경 경제로의 전환은 시간과 장소가 모두 어긋난다. 발굴단 자신이 2026년 논문에서 이 주장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적었다.
남는 물음은 원인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점이다. 농경이 원인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사람들을 이 언덕에 모이게 하고 세대를 이어 건축을 유지하게 했는지는 아직 답이 없다. 클레어가 2026년 논문에서 제시한 방향은 기후 변동과 인구 변동을 대조하는 쪽이고, 그 논문 자신도 인과를 주장할 수 없다고 명시한다. 이 유적이 확정한 것은 한 가지 순서가 틀렸다는 사실이지 옳은 순서가 무엇인지는 아니며, 지금까지 나온 자료로는 그 이상을 말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