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남동부의 석기시대 유적 괴베클리 테페는 농경 이전에 거대 건축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킨 곳이다. 그 위에 세워진 '종교가 농경을 낳았다'는 해석은 30년 사이에 크게 수정되었다. 수정을 밀어붙인 쪽은 그 해석을 만든 연구팀 자신이었고, 대중에게 유통되는 설명은 아직 수정 이전에 머물러 있다.
괴베클리 테페는 튀르키예 남동부 샨르우르파에서 동북쪽으로 15킬로미터쯤 떨어진 게르무슈 산지의 꼭대기에 있다. 남쪽으로 하란 평야가 내려다보이고, 해발은 770미터 안팎이다. 언덕 자체가 사람이 쌓은 흙더미다. 높이는 15미터, 지름은 300미터쯤 되며, 라우라 디트리히와 공저자들이 2019년 PLoS ONE에 실은 연구는, 이 유적에서 나온 갈돌과 갈판 7268점을 분석하면서 유적의 지형을 함께 기술했다. 그 기술에 따르면 이 봉우리는 여러 개의 작은 정상과 그 사이의 오목한 지형으로 나뉘어 있다고 기술한다.
이 언덕이 고고학 기록에 처음 등장한 해는 1963년이다. 이스탄불대학교와 시카고대학교가 공동으로 벌인 대규모 지표조사에서 확인되었고, 조사에 참여한 피터 베네딕트는 이곳을 붉은 흙 언덕 여러 개가 오목한 지형으로 갈라진 지형으로 기록했다. 비탈에는 규석 조각이 흩어져 있었고, 지표에 드러난 석회암 덩어리를 보고 그는 작은 이슬람 묘지 두 곳이 있다고 판단했다. 같은 조사에서 함께 확인된 차요뉘 테페시가 더 유망해 보였기 때문에 우르파 쪽 언덕은 30년 넘게 손대지 않은 채 남았다.
그 30년 동안 이 지역의 신석기 연구는 다른 유적들이 이끌었다. 차요뉘, 자페르 회육, 할란 체미, 그리고 네발르 초리가 차례로 발굴되면서 수렵채집 생활에서 정주 생활로 넘어가는 과정의 밑그림이 만들어졌다.
하랄트 하우프트만이 이끈 네발르 초리 발굴은 1983년부터 1991년까지 진행되었고, 그곳에서 T자 모양으로 다듬은 석회암 기둥과 석조 조각이 나왔다. 이 유적은 1991년 아타튀르크 댐 담수로 물에 잠겼다. 발굴단원이던 클라우스 슈미트에게는 이 경험이 판단 기준으로 남았다.
슈미트는 1994년에 우르파 일대에서 문헌에 언급된 신석기 유적을 차례로 답사했다. 그해 10월 괴베클리 테페에 올라간 그는 지표에 흩어진 '묘비'가 신석기 시대에 가공한 석재, 곧 T자형 기둥임을 알아보았다. 당시 유적에는 차가 들어갈 길이 없어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발굴은 1995년에 샨르우르파 박물관 주관으로 시작되었고 하우프트만이 현장 책임을 맡았다. 슈미트는 1996년부터 발굴을 이끌어 2014년 7월 사망할 때까지 계속했다. 발굴 초기에 드러난 것은 지름 10미터에서 30미터에 이르는 원형과 타원형 구조물이었고, 그 둘레를 따라 T자형 기둥이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요리스 페터스와 슈미트가 2004년 Anthropozoologica에 함께 실은 보고에 따르면, 이 원형 구조물의 기둥은 높이 3미터에서 5미터에 무게가 10톤에 이르며, 2002년 발굴 시즌이 끝날 무렵까지 제자리에 선 채로 확인된 기둥은 37개였고 그중 22개에 동물 부조가 있었다.
괴베클리 테페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기둥의 크기보다 그 위에 붙은 해석이었다. 에드워드 배닝이 2023년 Open Archaeology에 정리한 바에 따르면, 슈미트의 주장은 네 개의 층으로 쌓여 있다.
첫째, 이 유적에는 주거가 없다. 둘째, 언덕 꼭대기에 물이 없으므로 사람이 상주할 수 없다. 셋째, 기둥을 채석하고 옮기고 세우려면 수백 명의 노동력이 필요하므로 넓은 지역의 수렵채집민이 주기적으로 모여들었어야 한다. 넷째, 따라서 조직화된 종교가 정주와 농경보다 앞섰고, 대규모 의례가 요구한 노동력과 식량 조달이 결국 동식물 순화를 불러왔다.
슈미트는 이 구조물들을 '엔클로저'라고 부르면서 지붕이 없는 열린 공간으로 기술했고, 성역을 뜻하는 그리스어 테메노스를 끌어다 붙였다. 넓은 지역의 집단이 하나의 성소를 함께 유지한다는 구도를 설명할 때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관리하던 고대 그리스의 동맹을 가리키는 암픽티오니아라는 말을 썼다.
이 해석에는 앞선 계보가 있다.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카우뱅은 1994년에 초판이 나오고 1997년에 재판이 나온 Naissance des divinités, naissance de l'agriculture에서 신석기 전환의 출발점을 상징 체계의 변화에서 찾는 주장을 폈다. 마을이 먼저 생기고 그 뒤에 조직화된 종교가 나왔다는 유물론적 설명을 뒤집는 구도였다. 슈미트의 괴베클리 테페 해석은 이 상징 혁명론에 물증을 붙인 사례로 받아들여졌고, 1999년과 2000년의 보고서 제목이 그대로 표어가 되었다. 먼저 신전이 왔고 그다음에 도시가 왔다는 문장이다.
해석의 난점은 발굴단 내부 자료에서 이미 보였다. 페터스와 슈미트의 2004년 보고는 기둥에 새겨진 동물과 충전토에서 나온 동물 뼈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기둥에 가장 많이 새겨진 것은 뱀으로 전체 도상의 28.4퍼센트였고, 여우가 14.8퍼센트, 멧돼지가 8.7퍼센트로 뒤를 이었다. 반면 뼈로 남은 동물의 주역은 가젤과 들소와 아시아야생당나귀였다. 뱀 뼈는 거의 나오지 않았고, 멧돼지는 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퍼센트에 못 미쳤다.
두 사람은 이 어긋남을 근거로, 이 공간이 사냥 의례를 위한 곳이었다는 설명이 성립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토테미즘과 샤머니즘과 장례 의례를 차례로 검토했지만 어느 쪽도 확정하지 못했다. 보고의 마지막 문단은 이 공간이 무슨 목적에 쓰였는지 제대로 답하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유보로 끝난다. 기둥 위의 동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발굴단 스스로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 유적이 '최초의 신전'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의 에드워드 배닝은 2011년 Current Anthropology 52권 5호에 「So Fair a House」를 실었다. 부제는 괴베클리 테페와 서아시아 토기 이전 신석기에서 신전을 식별하는 문제다. 이 논문은 슈미트 해석의 각 부분을 따로 떼어 검토했다.
배닝의 반론은 다섯 갈래였다. 먼저 신석기 유적에서 어떤 건물을 '신전'으로 판정하는 근거가 대개 불충분하며, 성스러운 공간과 세속 공간을 나누는 구분 자체가 현대의 관념을 과거에 투사한 결과일 수 있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이 유적에서 나온 물질 자료를 들었다. 수 톤에 이르는 석기와 격지, 도살된 동물 뼈, 목탄과 식물 유체, 그리고 갈판과 갈돌이다. 다른 유적에서라면 고고학자들이 주저 없이 일상 생활의 흔적으로 받아들일 자료라는 지적이다.
셋째로 노동력 계산을 직접 했다. 슈미트가 근거 없이 제시한 '수백 명' 대신, 배닝은 공학에서 쓰는 표준 기준과 보수적인 기둥 질량 추정치를 써서 굴림대 없이 지면 위로 기둥을 끄는 데 필요한 인원을 계산했다. 가장 큰 기둥 하나를 빼면 성인 20명 미만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는 2023년 회고에서, 당시 기둥의 4분의 1가량이 땅에 묻혀 있다고 가정했으나 실제로는 받침 홈에 몇 센티미터만 꽂혀 있었으므로 자신이 질량을 최대 20퍼센트 과대평가했다고 적었다.
채석장이 이 계산의 배경이 된다. 이 유적이 올라앉은 석회암 대지가 그대로 석재 공급원이었다. 구조물에서 수백 미터 안에 기반암에서 떼어내다 만 기둥들이 남아 있고, 서쪽 대지 가장자리의 가장 큰 것은 완성했다면 이 유적에서 가장 큰 기둥이 되었을 물건이다. 석회암은 방해석이 모스 경도 3 안팎이어서 규석 도구로 가공할 수 있다. 윤곽을 규석 곡괭이로 새기고 자연 균열면까지 좁은 홈을 파 내려간 뒤, 나무 들보와 쐐기를 밑에 넣어 떼어내는 방식이다. 다만 기둥의 무게 추정치는 자료마다 편차가 커서 10톤대부터 수십 톤까지 제시되므로, 노동력 계산의 결과도 어떤 기둥의 어떤 추정을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넷째로 지붕 문제를 제기했다. 배닝은 여러 근거를 들어 이 구조물들에 지붕이 있었다고 보았고, 들보 배치까지 추정했다. 다섯째로 물 문제를 반박했다. 이 지역의 지하수위가 낮아지면서 옛 샘이 사라졌을 가능성, 유적의 암반을 깎아낸 일부 구덩이가 저수조일 가능성, 그리고 어느 시기든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면 물이 없어 정주가 불가능했다는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
여기에 더해 배닝은 층 II와 층 III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발굴단의 관심을 거의 받지 못한 소형 원형 건물들에 주목했다. 이 건물들이 시리아 유프라테스 유역의 제르프 엘아흐마르에서 집으로 해석되는 PPNA 건물과 닮았고, 따라서 괴베클리 테페의 '일상 주거' 후보라는 추정이었다.
배닝은 2023년 회고에서, 자신이 학계의 토론을 기대했으나 슈미트가 사망할 때까지 반박문을 내지 않아 실망했다고 적었다. 논문에 함께 실린 지정 논평을 빼면, 명시적인 반박은 올리버 디트리히와 옌스 노트로프가 2015년에 쓴 글 하나였다. 그 글은 슈미트의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콜린 렌프루가 제시한 의례의 지표 몇 가지를 덧붙였다. 산꼭대기 입지와 조각된 기둥과 벤치가 주의를 모으는 초점이라는 것, 동물 도상이 반복된다는 것, 건물과 조각의 규모가 공적 과시와 지출을 보여준다는 항목이다. 배닝은 이 지표들이 여러 문화의 주택에서도 확인된다고 응수했다.
슈미트는 2014년 7월 20일 60세로 사망했다. 그가 남긴 해석은 그대로 굳어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바뀐 경로는 다른 쪽이었다.
리 클레어는 2015년부터 독일고고학연구소의 현장 연구를 맡았다. 2015년과 2016년에는 보호 지붕의 기초를 놓기 위해 유적 곳곳에 심층 트렌치를 팠고, 동시에 20년치 발굴 기록을 다시 검토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결과는 2020년 e-Forschungsberichte des DAI 2호에 실렸다.
첫 번째 전제인 주거 부재부터 무너졌다. 유적 북서쪽의 K10-13과 K10-23 트렌치에 걸쳐 판 심층 구덩이에서, 자연 석회암 기반암 위에 또는 바로 그 위에 지은 원형과 타원형 건물들이 여러 채 잇대어 붙은 상태로 드러났다. 건물들은 작은 활동 공간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공간에서는 화덕이 연속으로 나왔으며 돌구슬과 뼈구슬을 만든 흔적과 이례적으로 많은 골각기가 함께 나왔다. 방사성탄소연대는 아직 없었지만, 건축 고고학적 검토와 층위 관계, 그리고 함께 나온 규석 도구의 조성으로 보아 PPNA, 곧 기원전 9500년에서 8700년 사이로 추정되었다.
이듬해인 2017년에는 보호 지붕의 빗물 배수관을 묻으려고 판 좁은 도랑에서, 언덕 서쪽 비탈에 잇대어 붙은 원형 건물들이 또 나왔다. 이 건물들도 기반암 바로 위에 지어져 있었다.
두 번째 전제인 물 부족도 흔들렸다. 2015년에 북서쪽 K10-55 트렌치에서, 지름 8미터에 깊이 2.8미터인 암반 굴착 구덩이가 드러났다. 구조물 H에서 동쪽으로 15미터 떨어진 자리다. 그 안에는 다듬은 석회암 판이 다량으로, 일부 구간에서는 거의 구덩이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서쪽으로 12미터 떨어진 K10-35 트렌치에서는 슈미트가 2013년에 판 시굴에서 기반암을 깎아 만든 수로가 나왔고, 그 수로 구간은 석회암 판으로 덮여 보호되어 있었다. 클레어는 이 시설들을 빗물을 모아 쓰는 체계의 일부로 볼 여지가 크다고 정리했다.
세 번째로 편년이 뒤집혔다. 2018년과 2019년에 특수 건물 A, B, C, D를 3차원으로 모델링하면서, 벽체의 진흙 모르타르에 섞인 유기물로 방사성탄소연대를 새로 쟀다. 충전토에서 뽑은 시료보다 결과가 훨씬 균질했고, 이 값들은 이 건물들이 종전에 인정되던 것보다 훨씬 오래 쓰였음을 보여주었다. 일부 건물의 마지막 건축 단계는 기원전 9세기 천년기 중엽에 해당했는데, 최초 축조로부터 500년이 넘게 지난 시점이다.
그 결과 층 III(원형 특수 건물, PPNA)과 층 II(사각형 건물, EPPNB)가 시기적으로 겹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슈미트가 세운 3층 구분은 폐기되었다. 모리츠 킨첼과 클레어가 2020년 Monumentalising Life in the Neolithic에 실은 글은 이 유적의 건물들이 오랜 사용 기간 동안 여러 차례 개보수를 거쳤다고 보고, 3단계나 4단계 대신 최소 8단계를 제시했다. 이 편년에 따르면 거대 건물의 일부는 사각형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한 뒤에도 계속 쓰였다.
네 번째로 매몰의 원인이 바뀌었다. 종전의 설명은 거대 건물들이 사용을 마친 뒤 의례적 동기로 일부러 흙에 덮였다는 것이었다. 클레어는 자료를 다시 검토한 결과, 유적 남동쪽 저지대의 특수 건물들이 인접한 높은 봉우리와 비탈에서 흘러내린 퇴적물에 잠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정리했다. 이 설명은 충전토가 어디서 왔는지, 왜 그 안에 PPNA와 PPNB 유물이 뒤섞여 있는지, 그리고 왜 그 흙에서 뽑은 시료의 방사성탄소연대가 그토록 들쭉날쭉했는지를 함께 설명한다.
이 판단은 2023년 D 구조물 발굴에서 직접 증거를 얻었다. 클레어가 2024년 Documenta Praehistorica 51권에 정리한 목록은 네 가지다. 건축 구조에 남은 손상, 잔해 속의 공기주머니, 무너진 지붕에서 나온 목재 들보의 음형, 그리고 잔해 기질 안에 보존된 지붕 미장 구역이다. 목재 들보의 음형이란 나무가 썩어 사라진 뒤 주변 퇴적물이 굳어 그 형태를 남긴 빈 공간을 말한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다. 충전토 안에서 단단하게 굳은 수평의 보행면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한 번에 메워졌다면 충전토는 한 덩어리여야 하는데, 중간에 사람이 밟고 다녀 굳은 면이 끼어 있다는 것은 건물이 반쯤 묻힌 상태로 한동안 쓰이다가 다시 묻혔다는 뜻이다. 사면 붕괴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는 결론이 여기서 나온다. 같은 논문은 B 구조물과 D 구조물의 재건축과 개조를 늘어나는 비탈 압력에 대응해 구조적 결함을 해결하려 한 시도로 읽는다.
지붕 미장과 들보 음형은 별도의 논점에도 관계한다. 슈미트는 이 구조물들을 지붕 없는 열린 공간으로 기술했고 배닝은 2011년에 지붕이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2023년 자료는 배닝 쪽에 무게를 싣는다.
같은 글에서 클레어는 이 서사를 만든 주체를 명시했다.
Therefore, it was the archaeologists themselves who delivered and subsequently cultivated the now popular opinion that Göbekli Tepe is the site of the »World's First Temples«.
그러므로 괴베클리 테페가 '세계 최초의 신전'이라는 지금의 통념을 내놓고 이후 키워 온 쪽은 고고학자들 자신이었다.
Lee Clare, "Göbekli Tepe, Turkey. A brief summary of research at a new World Heritage Site (2015-2019)", e-Forschungsberichte des DAI 2020, Faszikel 2, 82~83쪽 (CC BY-NC-ND 4.0)
주거 논쟁에서 가장 곤란한 자료는 갈돌과 갈판이었다. 라우라 디트리히를 제1저자로 하는 2019년 PLoS ONE 논문은 이 유적에서 나온 갈돌, 갈판, 공이, 절구를 3차원으로 모델링하고 사용흔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뒤 복제품으로 실험까지 했다. 분석 대상은 7268점이었다. 가장 흔한 형식의 갈돌에서는 곡물 가공에 따르는 사용흔이 확인되었고, 실험에서 이런 갈돌 하나로 8시간 작업하면 평균 4800그램의 가루를 낼 수 있었다. 500그램에서 1000그램을 한 사람의 하루치 곡물로 잡으면 5명에서 10명을 먹일 양이다.
도구의 분포도 의미가 있었다. 사용흔이 남은 갈돌은 사각형 건물 안에 모여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가 사각형 건물들 사이와 주위의 열린 공간, 그리고 적어도 부분적으로 같은 시기였던 원형 건물 둘레에 있었다.
그런데 논문의 결론은 이 도구의 총량이 일상적 사용에 비해 너무 많다는 쪽이었다. 저장 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과 한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가젤을 대량으로 사냥한 정황을 함께 놓고, 저자들은 이곳에서 즉시 소비할 식량을 만들었으며 이 계절적 활동 집중이 대규모 노동 축제의 증거라고 해석했다.
배닝은 2023년 회고에서 이 대목을 짚었다. 일상 활동의 증거가 없다는 주장에서 일상 활동의 증거가 너무 많다는 주장으로 넘어갔다는 지적이었다. 그가 보기에 가장 단순한 설명은 이 유적에 많은 수의 주민이 살면서 일상을 꾸렸다는 것이었다.
사면 붕괴 모델은 매몰의 원인만 바꾼 것이 아니다. 그 흙 안에 들어 있던 것의 의미도 함께 바꿨다.
특수건물의 충전토에서는 대량의 동물 뼈가 나왔고, 이 뼈는 오랫동안 대규모 축제의 잔해로 해석되었다. 올리버 디트리히와 공저자들이 2012년 Antiquity 86권 333호 674~695쪽에 실은 논문이 그 해석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슈미트 자신이 초기 형태를 제시했다. 건물을 의도적으로 메우던 시점에 벌어진 대규모 축제에서 엄청난 양의 고기가 소비되었고, 그것이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유인이었으며, 발굴에서 나오는 많은 동물 뼈가 그 흔적이라는 설명이다.
리 클레어는 2024년 Documenta Praehistorica 51권 6~43쪽에 실은 논문에서, 특수건물의 동물 뼈가 침식으로 밀려 내려온 쓰레기 퇴적에서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축제 가설이 최근 몇 해 사이에 신뢰를 상당 부분 잃었다고 적었다. 같은 대목에서 그는 이 가설이 위험할 만큼 단순한 그림을 그린다고 덧붙였다. 고기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욕구에 이끌려 움직이는 노동력이라는 그림이다.
같은 논리로 바닥에 놓인 유물의 해석도 바뀌었다. 종전에는 특정 물건이 매몰 과정 직전이나 도중에 건물 바닥에 의도적으로 놓였다고 설명되었는데, 클레어는 이 주장이 이제 유지되기 어렵다고 적는다. 그 물건들은 침수 시점에 이미 그 자리에 있었거나, 사면 붕괴 과정에서 다른 건물이나 퇴적에서 밀려와 다시 쌓인 것이다.
맥주 쪽 근거도 따로 검토되었다. 라우라 디트리히를 제1저자로 하는 2020년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Reports 34권의 논문은 최대 165리터 용량의 석회암 구유 여섯 점을 맥락 분석과 사용흔 분석과 화학 분석과 실험을 결합해 다루었다. 그 논문은 구유 벽면에서 검출된 옥살산염이 맥주 제조의 증거로 논의되어 왔지만, 곡물이 물과 자주 닿기만 해도 옥살산염이 생길 수 있으므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정리했다.
이 연쇄가 연구사에서 갖는 무게는 작지 않다. 슈미트의 인과 논증은 대규모 의례가 많은 사람을 모았고 그들을 먹이는 부담이 순화를 불렀다는 구조였다. 축제의 물증이 사라지면 그 중간 고리가 끊긴다. 그리고 이 판단 변경을 이끈 것은 새 발굴이 아니라 퇴적이 어디서 왔는지를 다시 따져 본 작업이었다.
슈미트 해석의 밑바탕에는 이 시기 주거 건축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가 이미 안다는 전제가 있었다. 차요뉘나 네발르 초리의 집과 다르게 생겼으므로 괴베클리 테페의 건물은 집이 아니라는 논법이다. 배닝은 2011년에 이 전제를 의심하면서, 당시 거의 조사되지 않은 인근 유적들이 발굴되면 T자형 기둥을 가진 대형 타원 건물이 이 지역의 '보통' 신석기 건축 형식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예측했다.
2021년 튀르키예 문화관광부가 타쉬 테펠레르 프로젝트를 출범시키면서 이 예측이 시험대에 올랐다. 괴베클리 테페, 카라한테페, 사이부르츠, 차크막테페, 세페르테페, 귀르쥐테페, 예니 마할레를 비롯한 여러 유적이 하나의 사업으로 묶였고, 괴베클리 테페 발굴은 이스탄불대학교와 샨르우르파 박물관과 독일고고학연구소의 공동 작업으로 전환되어 네즈미 카룰이 총괄하게 되었다.
카라한테페는 1997년에 존재가 알려져 있었고 2019년부터 체계적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는 250개가 넘는 T자형 기둥이 확인되었다. 배닝이 2023년에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이 유적에서 나온 건물군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폭 23미터의 준사각형 구조물로, 바닥과 측면 벤치 일부를 기반암을 깎아 만들었다. 괴베클리 테페와 마찬가지로 작은 주변 기둥들이 벽에 붙어 있고 두 개의 큰 기둥이 바닥 중앙에 서 있다.
에일뤼 외즈도안이 2022년 Antiquity 96권에 실은 사이부르츠 부조는 다른 방향의 자료를 더했다. 여러 인물과 동물이 한 장면 안에 배치된 구성이어서, 이 시기에 이야기를 담은 서사적 표현이 존재했다는 근거로 다루어진다.
2023년 9월 30일에는 괴베클리 테페 D 구조물에서 실물 크기의 멧돼지 조각이 나왔다. 붉은색과 흰색과 검은색 안료가 표면에 남아 있었고, 튀르키예 문화관광부는 이를 이 시기 최초의 채색 조각으로 발표했다. 조각은 H자 기호와 초승달과 뱀 두 마리, 그리고 사람 얼굴로 보이는 세 형상이 새겨진 받침 위에 놓여 있었다. 같은 시기 카라한테페에서는 높이 2.3미터의 인물상과 독수리 조각이 나왔다.
2025년에는 카라한테페에서 사람 얼굴이 뚜렷하게 새겨진 T자형 기둥이 처음 확인되었다. 팔과 손과 의복만 새겨져 있던 기존 기둥들이 사람을 나타낸다는 해석이 이 발견으로 강화되었다. 2026년 8월 25일에는 사람이 표범 등 위에 앉은 높이 70센티미터의 복합 조각이 발표되었다. 지름 3미터, 바닥을 판석으로 깐 구조물의 벽면 벤치 위에 놓인 상태였다. 이 유적에서 이미 나온 '표범을 등에 업은 사람' 조각과 사람과 동물의 자리가 뒤바뀐 구성이며, 상세한 발굴 보고서는 발표 시점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연구 체계도 바뀌었다. 1995년 이래 이 유적의 발굴과 연구를 지탱하던 독일연구재단의 장기 지원 과제는 2025년 8월로 종료되었다. 클레어가 2026년 논문의 연구비 항목에 그 사실을 적었다.
2026년 8월 13일에는 보호 지붕 북쪽에서 새 발굴 구역이 열렸다. 타쉬 테펠레르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이 유적의 발굴을 이끄는 네즈미 카룰은 아나돌루 통신에, 약 1500제곱미터 구역에서 올리브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발굴 가능한 상태를 만든 뒤 가장자리에서 북쪽으로 진행하면서 취락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사각형 평면 건물들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침식으로 벽체 윗부분이 오래전에 깎여나간 덕분에 일부 건물에서는 바닥면까지 빠르게 도달했다. 올해 계획은 이 구역 전체의 표토를 걷어내 지표 바로 아래의 건물 유구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클레어가 2026년 4월 30일 Heritage 9권 5호에 실은 논문은 고기후와 인구 변동을 대조하는 연구다. 그 서두에서 그는 이 유적의 성격에 관한 발굴단의 현재 입장을 명시했다.
[…] this narrative proves especially difficult to uphold considering there is still no evidence for domesticated animals at Göbeklitepe, and there are only extremely sporadic remains of morphologically domesticated cereals from stratigraphically late (PPNB) deposits.
이 서사는 유지하기가 특히 어렵다.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가축의 증거가 여전히 나오지 않고, 형태학적으로 순화된 곡물의 유체도 층위상 늦은 PPNB 퇴적층에서 극히 산발적으로만 나오기 때문이다.
Lee Clare, "Göbeklitepe in Palaeoclimate Context", Heritage 9(5), 2026, 179, 제2절 (CC BY)
여기서 '이 서사'는 괴베클리 테페가 신석기 전환의 결정적 증거이며, 초기 정주와 동식물 순화와 복잡한 사회경제 체계가 조직화된 종교의 요구에서 촉발되었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같은 논문은 이 유적이 상당한 규모의 주거 취락이기도 했다는 최근 몇 해의 재평가가 그 주장을 상대화했다고 적는다. 원인이라면 그 결과가 이 유적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남아 있지 않다는 논리다.
이렇게 정리되었는데도 '최초의 신전'이라는 설명은 줄어들지 않았다. 배닝은 2023년 회고에서 그 이유의 일부를 발굴단 자신의 발화 방식에서 찾았다. 학술 독자를 겨냥한 글에서는 신중한 진술을 내놓는 연구자들이 일반 독자를 겨냥한 글에서는 같은 신중함을 유지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그는 2020년에 나온 한 백과사전 항목이 PPNA의 주거 점유와 층 II의 주거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층 III 건물은 여전히 일상 활동이 없는 공간으로 서술하고, 이 유적의 해석을 두고 논쟁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유적의 지위 변화다. 괴베클리 테페는 2018년 7월 1일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튀르키예에서는 18번째였다. 2018년 말 튀르키예 문화부는 2019년을 '괴베클리 테페의 해'로 선포했고, 그해 방문객은 40만 명을 넘었다. 클레어는 2020년 글에서 이 통념이 세계유산 홍보 전략에서 차지하는 비중 때문에 떨쳐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적었다.
그 사이 학계 밖에서는 다른 종류의 서사가 자랐다. 배닝은 2023년 회고의 후반부를 여기에 할애했다. 잃어버린 선사 문명, 혜성 충돌, 에덴동산, 외계 방문자를 끌어들이는 주장들이다. 그는 이런 주장들이 공유하는 전제를 지적했다. 석기시대 사람들이 그런 건축을 스스로 해낼 만큼 영리하지 못했다는 가정이다. 그가 보기에 '최초의 신전'이라는 이름이 이 주장들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30년 동안 이 유적에서 다섯 가지가 뒤집혔다. 건물의 성격은 의례 전용에서 의례와 주거의 공존으로 바뀌었다. 편년은 단순한 3층 구분에서 서로 겹치는 최소 8단계로 바뀌었다. 매몰의 원인은 의도적 매장에서 지진과 사면 붕괴로 바뀌었다. 충전토의 동물 뼈가 밀려 내려온 쓰레기 퇴적에서 왔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축제 가설이 근거를 잃었다. 그리고 종교가 농경을 낳았다는 인과 주장은 발굴단 자신에 의해 유지하기 어려운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 네 가지를 밀어붙인 힘의 출처를 보면 연구사의 성격이 드러난다. 결정적 계기는 새로운 거대 발견이 아니었다. 다섯 가지 가운데 넷이 이미 파낸 흙과 이미 작성된 기록을 다시 읽어 나왔다. 2015년과 2016년에 보호 지붕 기초를 놓으려고 판 트렌치, 2017년에 배수관을 묻으려고 판 도랑, 그리고 20년치 발굴 기록의 재검토였다. 연대측정에서 시료를 충전토에서 벽체 모르타르로 바꾼 판단 하나가 편년 전체를 다시 짜게 만들었다. 배닝이 2011년에 제기한 논점들 가운데 지붕과 주거 인구에 관한 부분은 받아들여졌고, 노동력 계산은 여전히 정면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남는 문제는 수정된 해석이 유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발굴단은 2020년과 2026년에 각각 자기 서사의 출처와 한계를 문서로 적었지만, 세계유산 홍보와 관광 산업과 대중 매체가 쓰는 문장은 2006년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 간격은 자료가 더 나온다고 좁혀지지 않는다. 어느 시점의 해석이 어느 자료에 기반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 자료 축적과 별개로 필요하다는 뜻이며, 지금 이 유적을 둘러싼 가장 큰 공백은 땅속에 있지 않다. 해석이 유통되는 경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