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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의 미발굴 구역 — 지구물리탐사가 그린 지도와 발굴을 서두르지 않는 이유

튀르키예 남동부 괴베클리 테페는 발굴이 시작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유적의 5퍼센트 남짓만 드러났다. 땅속에는 거대 구조물 최소 20개가 더 있다. 느린 속도는 자금 부족이나 은폐의 결과가 아니라, 발굴이 되돌릴 수 없는 파괴이고 분석 기법이 계속 바뀐다는 판단에서 나온 선택이다.

2026년 9월 12일

5퍼센트라는 수치가 의심의 근거로 쓰이고 있다

괴베클리 테페를 소개하는 글에는 거의 빠짐없이 한 문장이 붙는다. 1995년에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아직 유적의 5퍼센트 미만만 드러났다는 문장이다. 이 수치는 남은 부분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하게 만드는 장치로 쓰이지만, 다른 방향으로도 쓰였다.

이 방향의 주장 가운데 가장 널리 퍼진 것은 그레이엄 핸콕의 것이다. 그는 넷플릭스 시리즈 《고대의 종말》에서 이 유적을 빙하기 말에 사라진 잃어버린 문명의 산물로 제시했다. 실증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이 시리즈에서 핸콕이 방문한 유적 가운데 빙하기 말에 실제로 해당하는 연대를 가진 곳은 괴베클리 테페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그보다 수천 년 뒤의 유적이다.

2024년 11월 조 로건의 팟캐스트에 출연한 지미 코세티는 고고학자들이 일부러 발굴을 늦추고 중요한 발견을 감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둥이 흙에 묻혀 있는데 2024년에 기술이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논법이었다. 그는 발굴이 느린 이유를 신비를 유지해 관광객을 계속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 찾았다.

NPR이 2025년 8월 9일 보도한 취재에서 리 클레어는 이 주장에 답했다. 그의 요지는 유적을 불도저로 밀어 한 번에 꺼내는 방식이 잘못이라는 것, 그리고 유적 전체를 파내어 미래 세대의 고고학자에게서 그 가능성을 빼앗는 선택은 이기적이라는 것이었다. 같은 취재에서 그는 이 유적을 둘러싼 여러 서사 가운데 어느 쪽이 옳은지 우리는 끝내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고, 음모론의 표적이 되면서 소셜 미디어 계정을 삭제했다고 밝혔다.

이 대립을 판정하려면 두 가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실제로 얼마나 파였고 땅속에 무엇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가, 그리고 그 수치가 무엇을 재는 값인가.

언덕 자체가 유구다

괴베클리 테페는 자연 언덕이 아니다. 사람이 살고 짓고 버린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인공 언덕이다. 라우라 디트리히를 제1저자로 하는 2019년 PLoS ONE 논문은 이 언덕을 높이 약 15미터에 지름 약 300미터의 붉은 흙더미로 기술하고, 그 표면이 여러 개의 작은 정상과 그 사이의 오목한 지형으로 나뉘어 있다고 적는다. 리 클레어가 2026년 Heritage 9권 5호에 실은 논문은 이 언덕의 면적을 9헥타르로 적는다. 1헥타르가 1만 제곱미터이므로 9헥타르는 300미터 곱하기 300미터에 해당하는 넓이다.

Tell. 튀르키예어로는 회육(höyük)이라고 한다. 같은 자리에 사람들이 수백 년에서 수천 년 동안 계속 살면서 집을 짓고 허물고 다시 짓기를 되풀이하면 폐기물과 무너진 벽체가 층층이 쌓여 언덕 모양이 된다. 이런 인공 언덕을 텔이라고 부른다. 서아시아 고고학에서 유적의 이름 앞뒤에 붙는 '텔'과 '회육'이 대개 이 뜻이다. 텔은 위로 갈수록 새로운 층이므로, 수직으로 파 내려가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위층을 걷어내지 않고서는 아래층에 닿을 수 없고, 걷어낸 위층은 기록으로만 남는다.

지금까지 판 곳은 서로 떨어진 다섯 구역이다

발굴단은 T자형 기둥을 가진 거대 구조물을 발견 순서대로 A부터 I까지 문자로 부른다. 독일고고학연구소가 공개한 연구 개요에 따르면 이 가운데 A, B, C, D, G는 언덕 남동쪽 오목한 지형의 주 발굴구역에 있다. 관광객이 보는 보호 지붕이 덮인 곳이다. F는 남서쪽 언덕 정상에, E는 서쪽 대지에 있다. E는 상부 구조가 남지 않고 기반암을 깎아 만든 바닥과 기둥 받침만 남아 있다. H와 I는 북서쪽에서 나중에 연 구역에 있다.

에드워드 배닝이 2023년 Open Archaeology에 정리한 바에 따르면, 주 발굴구역에서 서쪽으로 길게 판 트렌치와 북서쪽 발굴로 확인된 대형 건물의 수는 9개까지 늘었다.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다. 평면으로 노출된 것과 아래까지 판 것은 다르다. 독일고고학연구소의 연구 개요는 기반암까지 완전히 발굴한 특수 건물이 C와 D 둘뿐이라고 적는다. 나머지는 상부만 드러난 상태이므로, 그 아래에 더 이른 시기의 유구가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2026년에는 새 구역이 열렸다. 타쉬 테펠레르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괴베클리 테페 발굴을 이끄는 네즈미 카룰은 2026년 8월 13일 아나돌루 통신에 이 작업을 설명했다. 보호 지붕 북쪽 약 1500제곱미터 구역에서 올리브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발굴이 가능한 상태를 만든 뒤, 가장자리에서 북쪽으로 진행하면서 지표 바로 아래에서 취락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사각형 평면 건물들을 드러냈다. 침식으로 벽체의 윗부분이 오래전에 깎여나간 덕분에 일부 건물에서는 바닥면까지 빠르게 도달했다. 카룰은 올해 계획이 이 구역 전체의 표토를 걷어내 지표 바로 아래의 건물 유구를 노출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땅을 파지 않고 그린 지도가 이미 있다

미발굴 구역의 내용은 완전한 공백이 아니다. 독일고고학연구소가 정리한 탐사 이력에 따르면 2003년과 2006년과 2007년과 2012년에 지구물리탐사가 수행되었다. 2003년에는 먼저 언덕의 넓은 범위를 자력탐사로 훑고, 이어서 선정한 구역을 지중레이더와 전기비저항 토모그래피로 조사했다.

지구물리탐사 땅을 파지 않고 지표에서 물리량을 재어 지하 구조를 추정하는 방법이다. 자력탐사는 흙과 돌의 자기적 성질 차이를 측정해 벽과 구덩이의 평면 배치를 지도처럼 그려낸다. 지중레이더는 전파를 땅속으로 쏘아 되돌아오는 반사를 읽어 깊이 방향의 경계면을 잡아낸다. 전기비저항 토모그래피는 전극으로 전류를 흘려 지하 단면의 전기저항 분포를 복원한다. 세 방법 모두 주변 흙과 성질이 뚜렷이 다른 구조물에 강하다. 반대로 연대와 용도는 알려주지 못한다. 지도에 원형 구조물이 찍혀 있어도 그것이 언제 지어졌고 무엇에 쓰였는지는 파 보기 전에 판정할 수 없다.

2003년 현장 보고에서 슈미트는 첫 결과를 정리했다. 자력탐사 지도에서 대형 구조물 10개 이상이 확인되었고 더 있을 것으로 보이며, 당시 발굴 중이던 A부터 D까지를 합치면 언덕 안에 최소 20개의 구조물이 있다고 본다는 내용이다. 구조물 하나당 거석 기둥 12개를 예상하면 전체 기둥 수는 200개를 넘는다.

탐사 결과에는 또 하나의 함의가 있었다. 원형 거석 구조물이 언덕의 특정 부분에만 몰려 있지 않고 전역에 분포한다는 점이다. 발굴이 남동쪽에 집중되어 생긴 착시가 아니라는 뜻이며, 이 판단은 올리버 디트리히를 비롯한 연구진이 2012년 Antiquity 86권 333호에 실은 논문에 인용되면서 널리 퍼졌다.

탐사의 신뢰도는 부분적으로 검증되었다. 북서쪽 오목지의 지중레이더 영상에는 원형 구조물 여러 개가 겹친 클로버잎 모양의 이상체가 나타났다. 2007년부터 이 구역을 실제로 발굴한 결과 H 구조물이 확인되었고, 발굴 상태는 지구물리탐사와 전기비저항 결과에 부합했다.

5퍼센트가 재는 것은 면적이 아니다

여기서 수치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9헥타르의 5퍼센트는 4500제곱미터다. 그런데 주 발굴구역만 해도 A부터 D까지의 구조물이 모여 있는 범위가 가로세로 수십 미터에 이르고, 여기에 E와 F와 H와 I, 그리고 2026년에 연 1500제곱미터를 더하면 평면으로 노출된 면적의 합계는 4500제곱미터를 넘어선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재는 대상이 다르다. 텔의 높이가 15미터이므로, 평면으로 일정 면적을 열었다는 것과 그 아래를 다 파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량이다. 파내야 할 퇴적물의 부피를 기준으로 잡으면 지금까지 걷어낸 양은 전체의 작은 일부에 그친다. 기반암까지 도달한 구조물이 둘뿐이라는 사실이 이 계산을 뒷받침한다. 5퍼센트라는 수치는 발굴해야 할 퇴적물 총량에 대한 보수적 추정으로 읽는 편이 실제와 맞는다.

층위 땅속에 쌓인 퇴적물의 위아래 순서를 말한다. 고고학에서 유물의 연대를 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이며, 어떤 유물이 어떤 층에서 나왔고 그 층이 다른 층과 어떤 관계인지가 확인되어야 그 유물이 언제 쓰였는지 말할 수 있다. 층위는 발굴 과정에서 관찰하고 기록하는 수밖에 없다. 흙을 걷어내면 그 관계는 사라지고 도면과 사진과 기록만 남는다. 발굴을 되돌릴 수 없는 작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겨 두는 선택은 분석 기법의 변화 속도와 연결되어 있다

최소한만 노출한다는 방침은 이 유적의 공식 문서에도 적혀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자료에 실린 발굴단의 보존 서술은, 원래의 물질을 가능한 한 많이 보존하기 위해 건물의 사용 이력을 파악할 만큼만 신중하게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밝힌다. 같은 자료는 발굴 초기부터 보존이 고려되었고 임시 지붕을 거쳐 영구 보호 지붕 두 동이 세워졌다고 적는다. 하나는 남동쪽 주 발굴구역을, 다른 하나는 북서쪽 오목지를 덮는다.

클레어가 NPR 취재에서 밝힌 방침은 원칙론에 그치지 않는다. 이 유적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 근거가 된다.

1990년대에 걷어낸 흙에서는 지금 쓰는 기법의 상당수를 적용할 수 없었다. 몇 가지 사례가 있다. 디트리히 연구진의 2019년 논문은 갈돌과 갈판 7268점의 표면 사용흔을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복제품 실험과 대조했으며, 도구와 퇴적물에서 식물규산체를 추출해 밀과 보리가 속한 포아풀아과의 껍질과 줄기를 확인했다. 라우라 디트리히를 제1저자로 하는 2020년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Reports 34권의 논문은 최대 165리터 용량의 석회암 구유 여섯 점을 대상으로 맥락 분석과 사용흔 분석과 화학 분석과 실험을 결합했다. 이 논문은 구유 벽면에서 검출된 옥살산염이 맥주 제조의 증거로 논의되어 왔지만, 곡물이 물과 자주 닿기만 해도 옥살산염이 생길 수 있으므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정리했다.

연대측정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클레어가 2020년 e-Forschungsberichte des DAI 2호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2018년과 2019년에 특수 건물 A, B, C, D를 3차원으로 모델링하면서 벽체의 진흙 모르타르에 섞인 유기물로 방사성탄소연대를 다시 쟀다. 이 시료는 충전토에서 뽑은 시료보다 결과가 훨씬 균질했고, 그 덕분에 이 건물들이 종전에 인정되던 것보다 훨씬 오래 쓰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일부 건물의 마지막 건축 단계는 최초 축조로부터 500년 넘게 지난 시점이었다. 이 결과가 슈미트의 3층 편년을 폐기하게 만들었다.

충전토의 성격에 관한 판단도 뒤집혔다. 종전 설명은 거대 건물들이 사용을 마친 뒤 의례적 동기로 일부러 흙에 덮였다는 것이었다. 클레어는 기록을 다시 검토한 결과, 남동쪽 저지대의 특수 건물들이 인접한 높은 봉우리와 비탈에서 흘러내린 퇴적물에 잠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정리했다. 이 설명은 흙의 출처와 집수 범위, 그 안에 PPNA와 PPNB 유물이 뒤섞여 있는 이유, 그리고 그 흙에서 뽑은 시료의 방사성탄소연대가 들쭉날쭉했던 이유를 함께 설명한다. 2026년 논문에서 클레어는 사면이 여러 차례 미끄러져 내렸으며 여러 건물에서 확인된 지진 피해가 사면을 약화시킨 더 유력한 원인이라고 덧붙였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새로 파서 얻은 것이 아니다. 이미 확보한 자료에 새 기법을 적용하거나 기록을 다시 읽어서 얻었다. 20년 뒤에 지금보다 나은 기법이 나온다면 그때 파는 흙에서 지금보다 많은 정보가 나온다는 계산이 여기서 성립한다.

아직 비어 있는 자리는 목록으로 정리된다

발굴이 남아 있는 만큼 답이 없는 문제도 남아 있다. 클레어의 2026년 논문과 2020년 보고를 놓고 보면 공백은 네 갈래다.

첫째는 최초 점유 시점이다. 기반암까지 판 구조물이 둘뿐이므로 이 유적에서 사람의 활동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현재 신뢰할 만한 가장 이른 방사성탄소연대는 기원전 10세기 천년기 중엽의 PPNA 점유를 가리킨다.

둘째는 마지막 단계의 연대다. 클레어는 2026년 논문에서 괴베클리 테페의 최종 취락 단계에 대한 절대연대가 하나도 없다고 명시했다. 초기 PPNB 이후 층에서 연대측정용 유기물 시료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는 이를 다음 시즌들의 과제로 지목했다. 절대연대는 없지만 건축과 층위 증거는 있다. 1만 200년 전(calBP)의 급격한 기후변화 구간 이후에도 사람이 있었고, 이 단계에는 더 작고 둥근 공간이 초기 PPNB 구조물 위에 흩어져 나타난다. 폐허에 머문 사람들이 쓴 임시 거처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셋째는 무덤이다. 율리아 그레스키와 율리아네 핼름과 클레어가 2017년 6월 28일 Science Advances 3권 6호에 실은 논문에 따르면, 이 유적에서 나온 인골 조각은 691점이고 그 가운데 408점이 두개골에서 나왔다. 몸통 뼈는 283점이다. 두개골 세 개체에는 규석 도구로 판 깊은 홈이 있었고, 가장 잘 보존된 개체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주변에서 황토가 집중적으로 검출되었다. 연구진은 이 두개골들이 장식되어 어딘가에 매달렸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논문은 이 유적에서 매장 자체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 뒤 사정이 조금 바뀌었다. 클레어의 2020년 보고에 따르면 2017년 가을, 유적 남동쪽에서 또 다른 빗물 배수관 도랑을 파다가 여러 단계에 걸친 사각형 건물이 일부 드러났고, 그 바닥 아래에서 콩팥 모양의 매장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예비 분석에서 최소 3인분의 교란된 유해가 나왔다. 바닥 아래 매장은 토기 이전 신석기 주거 유적에서 흔한 시설이다.

클레어가 2024년 Documenta Praehistorica 51권에 실은 논문은 이 유적에서 확인된 초기 PPNB 매장을 두 건으로 적는다. 그러면서 두 매장 모두 묻힌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알려 줄 어떤 표지도 내놓지 못했다고 정리하고, 상세 보고는 율리아 그레스키와 클레어와 요하나 도른이 준비 중인 논문으로 넘긴다. 정식 매장이 두 건에 머무는 상태가 계속될지, 아니면 묘역이 미발굴 구역에서 나올지는 미정이다.

넷째는 지붕이다. 슈미트는 거대 구조물을 지붕이 없는 열린 공간으로 기술했다. 배닝은 2011년에 여러 근거를 들어 지붕이 있었다고 보았고, 2023년 회고에서 발굴단 쪽에서도 지붕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서술이 늘었다고 정리했다. 그가 든 근거 가운데 하나는 잘 보존된 진흙 미장이다. 건물이 오래 열린 채로 있었다면 비에 씻겨 나갔을 것이라는 지적이며, 이 논지는 발굴단 자신의 2018년 글에도 나온다. 또 하나는 중앙 기둥의 불안정성이다. 발굴된 중앙 기둥들은 들보와 케이블로 받쳐야 서 있으므로, 원래는 지붕 구조에 의존해 지탱되었다는 추론이다. 이 문제는 천문 해석의 성립 여부와 직결된다. 구조물을 관측 시설로 보는 논의는 지붕이 없었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2023년 D 구조물 발굴이 이 항목에 직접 자료를 더했다. 클레어가 2024년 Documenta Praehistorica 51권에 정리한 목록에는 무너진 지붕에서 나온 목재 들보의 음형과 잔해 기질 안에 보존된 지붕 미장 구역이 들어 있다. 목재 들보의 음형이란 나무가 썩어 사라진 뒤 주변 퇴적물이 굳어 그 형태를 남긴 빈 공간을 말한다. 같은 논문은 특수건물의 내부가 대낮에도 인공 조명에 의존하는 어두운 공간이었으리라는 전제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지붕의 존재를 놓고 다투는 단계에서 그것을 전제로 삼는 단계로 서술이 옮겨 간 셈이다.

결론 — 발굴 속도는 자료를 다음 세대에 남겨 두는 방식의 문제다

괴베클리 테페의 미발굴 구역은 완전한 미지가 아니다. 2003년 이후 네 차례의 지구물리탐사가 언덕 전역에 최소 20개의 대형 구조물이 있고 기둥은 200개를 넘을 것이라는 지도를 그려 놓았으며, 북서쪽에서 그 지도의 예측대로 H 구조물이 나오면서 방법의 신뢰도도 일부 확인되었다. 발굴된 것은 A부터 I까지의 구조물과 그 주변이고, 기반암까지 도달한 것은 C와 D 둘뿐이다. 널리 인용되는 5퍼센트는 걷어내야 할 퇴적물 부피에 대한 추정으로 읽어야 한다.

발굴을 서두르지 않는 이유는 세 가지 사실에서 나온다. 층위는 걷어내면 기록으로만 남는다. 이 유적에서 최근 10년의 중요한 판단 변경, 곧 편년의 재구성과 매몰 원인의 수정과 곡물 가공의 규모 파악은 새로 판 흙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미 확보한 자료에 새 기법을 적용해서 나왔다. 그리고 식물규산체와 옥살산염과 사용흔 분석은 대부분 2000년대 이후에 실용화되었다.

남은 물음은 무엇이 언제 채워지느냐다. 최종 점유 단계의 절대연대는 발굴단이 스스로 과제로 지목했으므로 이른 시일에 채워질 공백이다. 최초 점유 시점과 묘역의 존재 여부는 기반암까지 파 내려간 면적이 늘어나야 판정할 수 있고, 그 작업은 정의상 되돌릴 수 없다. 한편 기둥에 새겨진 상징의 의미처럼 발굴량과 무관한 물음도 남아 있으며, 이 갈래는 구조물이 열 개 더 드러나도 같은 종류의 추정이 되풀이될 자리다. 발굴 속도를 둘러싼 논쟁이 실제로 가르는 것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 언제 누가 그것을 알게 되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