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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례본이 없던 500년

한글의 제자 원리는 1940년에야 확인되었고, 그 전까지 기원설이 갈라져 있었다

1443년의 기록에는 원리가 없다

훈민정음에 관한 첫 기록은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기사다. 전문이 길지 않다.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고,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본떴으며, 초성과 중성과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뒤에야 글자를 이루고, 한자에 관한 것이든 우리말에 관한 것이든 모두 적을 수 있으며, 글자가 간단한데도 바꿔 쓰는 폭이 끝이 없다는 내용이다. 기사는 여기서 끝난다.

여기에는 글자를 왜 그 모양으로 만들었는지가 없다. 옛 전자를 본떴다는 한 구절이 있을 뿐인데, 전자는 한자의 옛 서체를 가리키므로 실제 제자 원리와 맞지 않는다. 이 기술을 남긴 쪽은 사관이다.

1459년에 나온 『훈민정음 언해본』도 사정이 같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세종의 서문을 우리말로 옮긴 책인데, 창제의 원리와 용법은 실려 있지 않다.

원리를 적은 책은 1446년에 간행되었다.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해 만든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그런데 이 책은 기록에만 존재했고 한 권도 전하지 않았다.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발견될 때까지 약 500년 동안 그러했다.

해례본과 언해본 해례본은 1446년에 한문으로 간행된 원본이며, 세종의 서문과 글자 사용법을 밝힌 예의, 집현전 학자들이 쓴 해설인 해례, 정인지의 서문으로 구성된다. 언해본은 1459년에 나온 것으로 해례본의 앞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며 해례 부분이 없다. 조선 후기와 근대의 학자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언해본 계열뿐이었다.

원리를 모르던 시기에 기원설이 갈라졌다

제자 원리를 밝힌 책이 없으니 한글이 어디서 왔는지를 두고 여러 주장이 경쟁했다. 실록의 옛 전자 운운을 근거로 한자의 고대 서체에서 왔다는 설, 원 제국의 파스파 문자에서 왔다는 설, 창호의 격자 모양에서 왔다는 설, 산스크리트 계열 문자에서 왔다는 설이 함께 돌았다.

이 주장들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자음 글자가 소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할 문헌이 없으면 남는 방법은 모양이 닮은 것을 찾는 일뿐이다. 파스파 문자는 실제로 한글과 조건이 겹친다. 1269년에 원 세조가 칙령으로 반포했고 네모꼴이며 티베트 문자를 확장해 만들었다. 조선 초의 학자들이 파스파 문자를 알고 있었다는 점도 확인된다.

실록의 기록도 이 논쟁을 부추겼다. 1444년 최만리 등이 올린 상소는 언문이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인용하면서, 글자의 형상은 옛 전문을 모방했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방식이 옛것에 반대된다고 적었다. 창제 당대에도 글자 모양의 출처를 두고 말이 갈렸다는 뜻이다.

해례본이 나오면서 이 논쟁의 핵심 부분이 정리되었다. 자음 글자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떴다는 설명이 책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문자에서 자형을 빌려 왔는지를 따지는 논의는 지금도 이어지지만, 제자의 기본 원리가 무엇이었는지는 더 이상 추측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1940년 여름, 안동

명륜학원 강사 김태준은 경북 안동 출신 제자 이용준에게서 집안에 훈민정음 원본이 대대로 전한다는 말을 들었다. 명륜학원은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이다. 두 사람은 안동군 와룡면 주촌의 이한걸 댁을 찾아갔다. 책은 세종이 쓴 예의편과 왕명으로 정인지, 신숙주를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이 쓴 해례편, 정인지 서문의 세 부분으로 31장이었고, 예의편의 첫째와 둘째 장이 빠져 있었다.

간송 전형필이 사들였다. 값은 1만 원이었고 당시 기와집 열 채 값에 해당했다. 여기에 수고비로 1000원을 더 얹어 주었다고 전한다.

공개 방식이 조심스러웠다. 1940년 7월 30일 조선일보 4면에 방종현의 이름으로 번역문 일부가 실렸다. 제목은 원본 훈민정음의 발견이었고 8월 4일까지 5회 연재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8월 11일에 폐간되었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밀어붙이던 시기였으므로 발견자도 소장자도 조용히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원 소장처를 두고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1950년과 1954년에 국어국문학회 학술지 『국어국문학』에 정철이 발표한 글이 원소장자를 안동 와룡면 주하동의 진성 이씨 이한걸(1880~1950)로 소개했다. 이한걸의 선조 이천이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세종에게서 직접 받았다는 전승도 함께 전한다. 반면 이용준이 처가인 광산 김씨 안동 종가에서 빼낸 것이라는 주장도 나와 있다. 두 설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이 책은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지금 서울 간송미술관에 있다.

복원 과정에서 생긴 오류

발견 당시 표지와 앞의 두 장이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연산군이 언문 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던 시기에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했기 때문이라는 전승이 있다.

이한걸의 셋째 아들 이용준이 그 두 장을 채워 넣었다. 그는 안평대군체에 조예가 깊었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예의편 앞부분을 안평대군 필체로 모사해 복원했다.

이 복원에 실수가 있었다. 세종 서문의 마지막 글자 이(耳)가 의(矣)로 잘못 쓰였고, 구두점과 성조 표시에도 잘못되었거나 빠진 대목이 남았다. 원래 이 책은 구점과 두점, 그리고 한 글자가 두 음으로 읽히는 경우의 성조를 표시하는 권성까지 정확히 찍은 판본이었다. 구두점과 권성을 모두 표시한 체재는 1415년에 나온 『성리대전』과 일치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간송본의 앞 두 장은 20세기에 채워 넣은 부분이다. 국보로 지정된 문서가 근대의 보필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보필에 오자가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의 전래 과정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를 보여 준다.

해례본은 어떤 책인가

해례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세종이 직접 쓴 서문과 글자의 음가와 운용법을 밝힌 예의, 집현전 학사들이 쓴 해설인 해례, 그리고 정인지의 서문이다. 발견 당시 31장이었고 예의편의 첫째와 둘째 장이 빠져 있었다.

해례 부분은 다섯 편의 해설과 한 편의 용례로 구성된다. 글자를 만든 원리를 밝힌 제자해, 첫소리를 다룬 초성해, 가운뎃소리를 다룬 중성해, 끝소리를 다룬 종성해, 글자를 모아 쓰는 방법을 다룬 합자해, 그리고 실제 낱말로 보인 용자례다. 이를 오해오례라 부른다.

이 구성 자체가 이 책의 성격을 보여 준다. 글자표와 음가 대조표에 그치지 않는다. 설계 원리, 각 부분의 운용 규칙, 조합 방법, 실제 예시가 순서대로 들어 있다. 문자 하나를 처음부터 배울 수 있도록 짜인 교재이자 설계 문서다.

제자해가 실제로 적어 놓은 것

해례의 첫 번째 해설이 제자해다. 음양오행과 사시사방과 오음 같은 성리학의 틀로 서술되어 있어 읽기가 쉽지 않다. 그 안에 다음 구절이 있다.

正音二十八字,各象其形而制之。初聲凡十七字。牙音ㄱ,象舌根閉喉之形。舌音ㄴ,象舌附上腭之形。脣音ㅁ,象口形。齒音ㅅ,象齒形。喉音ㅇ,象喉形。

정음 28자는 각각 그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초성은 모두 17자다. 어금닛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다. 혓소리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떴다. 입술소리 ㅁ은 입 모양을 본떴다. 잇소리 ㅅ은 이 모양을 본떴다. 목구멍소리 ㅇ은 목구멍 모양을 본떴다.

『훈민정음』 해례 제자해. 정음해례 1ㄴ

다섯 글자가 기본이고 나머지는 여기서 파생된다. 제자해는 그 방법도 적었다. ㅋ은 ㄱ에 견주어 소리가 조금 세게 나오므로 획을 더했고, ㄴ에서 ㄷ으로, ㄷ에서 ㅌ으로, ㅁ에서 ㅂ으로, ㅂ에서 ㅍ으로, ㅅ에서 ㅈ으로, ㅈ에서 ㅊ으로, ㅇ에서 ㆆ으로, ㆆ에서 ㅎ으로 가는 것도 같은 뜻이라고 했다. 소리가 세지면 획을 더한다는 원칙이다.

어금닛소리 기본자
획 하나를 더한 거센소리
혓소리 기본자
획을 더한 단계
획을 한 번 더 더한 단계

같은 조음 위치의 소리가 세질수록 획이 늘어난다. 글자 모양이 소리의 성질을 담고 있다.

제자해는 예외도 밝혔다. 반혓소리 ㄹ과 반잇소리 ㅿ은 혀와 이의 모양을 본뜨되 몸체를 달리한 것이며 획을 더한 뜻이 없다고 했다. ㆁ도 가획의 예외로 적었다. 원리를 세우고 그 원리에서 벗어나는 글자를 따로 밝혔다는 점에서 이 문서는 설계 설명서의 성격을 갖는다.

오행 배속과 가운뎃소리의 원리

제자해의 나머지 분량은 다섯 소리를 오행과 계절과 방위와 음률에 배속하는 서술이 차지한다. 목구멍소리는 깊고 윤택하니 물에 해당하고 소리가 비어 통하는 것이 물이 맑고 흐르는 것과 같으며, 계절로는 겨울이고 음률로는 우에 해당한다고 했다. 어금닛소리는 나무, 혓소리는 불, 잇소리는 쇠, 입술소리는 흙에 배속했다.

현대의 독자에게 이 부분은 장식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이 배속이 제자의 근거를 서술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을 함께 보아야 한다. 15세기 조선에서 자연 현상과 인간의 소리를 설명하는 이론 틀이 성리학이었고, 새 문자가 자의적인 고안이 아닌 사물의 이치를 따른 것임을 논증하려면 그 틀을 써야 했다. 제자해는 첫머리에서 천지의 도가 음양오행 하나뿐이며 사람의 성음에도 음양의 이치가 있는데 사람이 살피지 못했을 뿐이라고 적고, 정음을 만든 일이 지혜로 경영하고 힘으로 찾은 결과가 아니며 그 소리를 따라 그 이치를 다한 것이라고 밝혔다.

가운뎃소리의 제자 원리는 따로 서술된다. 기본자 셋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모양을 본떴다. 둥근 점 ㆍ는 하늘의 둥근 모양, 평평한 ㅡ는 땅의 평평한 모양, 서 있는 ㅣ는 사람이 선 모양이다. 이 셋을 결합해 나머지 모음을 만든다. 자음이 조음 기관을 본뜨고 모음이 천지인을 본뜨는 두 갈래 원리가 한 체계 안에 들어 있다.

종성에 관해서는 따로 글자를 만들지 않고 초성을 다시 쓴다는 원칙을 세웠다. 종성부용초성이다. 28자라는 숫자가 적게 유지된 것은 이 원칙 덕분이다. 최만리의 상소가 언문을 27자로 적은 것은 종성을 별도로 세지 않는 계산 방식에서 나온 수치로 보인다.

정인지 서문이 밝힌 창제 시점과 경위

해례본의 끝에는 정인지의 서문이 붙어 있다. 이 글은 계해년 겨울, 곧 1443년 12월에 전하가 정음 28자를 창제하고 예의를 간략히 들어 보이면서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했다고 적었다. 실록 기사와 시점이 일치한다.

창제와 반포 사이에 2년 9개월이 놓인다. 그 사이에 최만리 등의 상소가 있었고,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해례 집필이 이뤄졌다. 해례본이 반대 상소에 대한 학술적 답변의 성격을 띤다는 해석은 이 시간 순서에서 나온다. 상소는 언문에 근거가 없다고 했고, 해례본은 근거를 조목조목 서술했다. 반포 이후로는 같은 종류의 반대 상소가 올라오지 않았다.

발견 이후 80여 년 동안 바뀐 것

해례본이 나온 뒤 한글 연구의 조건이 달라졌다. 제자 원리가 확정되면서 기원설 논쟁의 한 축이 정리되었고, 15세기 국어의 음운 체계를 재구성할 1차 자료가 생겼다. 해례본은 각 글자의 음가를 당대의 음운학 용어로 규정하고 실제 낱말 예시를 붙였으므로, 중세 국어의 소리를 추정하는 기준점이 된다.

글자 하나의 존재가 확인된 것도 성과였다. 지금 쓰이지 않는 ㆍ, ㆁ, ㆆ, ㅿ 네 글자가 어떤 소리를 적었고 왜 그 모양이었는지가 제자해와 용자례로 설명된다. 해례본이 없었다면 이 글자들은 용례만 남고 근거는 추정에 머물렀다.

한편 해례본이 답하지 않은 물음도 남았다. 세종이 혼자 만들었는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는지는 여전히 미정이다. 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은 전하가 정음 28자를 창제했다고 적었고 해례 집필자 여덟 명의 이름을 밝혔다. 이 기술을 단독 창제의 근거로 읽는 쪽과, 임금의 업적으로 돌리는 사서의 관행으로 읽는 쪽이 갈린다. 실록도 같은 방식으로 적었으므로 두 해석 모두 같은 문헌 위에 서 있다.

실물의 상태에 관한 물음도 남았다. 간송본 앞 두 장이 20세기의 보필이라는 사실은 이 책이 1446년 판본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종 서문의 마지막 글자가 이(耳)에서 의(矣)로 바뀐 것은 문장의 뜻에 영향을 주는 오자다. 이 부분을 바로잡으려면 다른 판본이 필요하고, 그 다른 판본이 상주본이다.

자질문자라는 범주에 한글만 있지는 않다

글자 모양이 소리의 구성 요소와 대응하는 문자 체계를 자질문자라고 부른다.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이 『Writing Systems』에서 제안한 범주이며 한글을 그 예로 들었다. 이 책은 1985년에 처음 나왔고 1990년 스탠퍼드대학출판부에서 다시 간행되었다.

자질 음운론에서 자질은 소리를 더 쪼갠 성질을 가리킨다. 조음 위치가 어디인지(입술인지 잇몸인지 목구멍인지), 목청이 떨리는지, 공기가 터지는지 흐르는지 같은 항목이다. 보통의 알파벳은 소리 하나에 글자 하나를 배당할 뿐 글자 모양과 자질 사이에 관계가 없다. 라틴 문자의 p와 b는 목청 떨림 여부만 다른 짝인데 모양은 서로 무관하다.

그런데 이 원리가 한글에만 나타나지는 않는다. 확인되는 사례가 셋 더 있다.

첫째는 1840년 제임스 에번스가 만든 캐나다 음절문자다. 기호 하나를 네 방향으로 돌려 쓰면 붙는 모음이 달라진다. 글자의 방향이라는 시각 요소가 모음이라는 음운 요소에 대응하므로 자질 원리에 해당하며, 유니코드 관련 문서도 이 체계를 자질 음절문자로 기술한다.

glyph
오른쪽 방향 [pe]
glyph
아래 방향 [pi]
glyph
왼쪽 방향 [po]
glyph
위 방향 [pa]

같은 삼각형을 네 방향으로 돌린 것. 차례로 [pe], [pi], [po], [pa]다.

둘째는 1867년 영국의 알렉산더 멜빌 벨이 발표한 가시 언어다. 벨은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아버지이며 농인에게 말하기를 가르치는 교사였다. 그가 만든 기호는 목구멍과 혀와 입술의 위치와 움직임을 글자 모양에 담는다. 조음 기관의 모양을 본뜬다는 원리가 제자해의 발상과 같다.

벨은 1864년에 첫 저작을 내놓았고 1867년에 체계를 정리한 책을 간행했다. 구별 부호와 성조 29개, 자음 52개, 모음 36개, 이중모음 열두 개 남짓으로 이뤄지며, 이를 바탕으로 국제 음성 기호와 비슷한 성격의 표기와 속기용 표기를 따로 만들었다. 시연에서 그는 아들 그레이엄을 시켜, 자기가 듣지 못한 청중의 발화를 기호만 보고 그대로 재현하게 했다. 지역 사투리까지 정확히 적을 수 있었다.

가시 언어는 표준 유니코드에 들어 있지 않다. ConScript Unicode Registry라는 비공식 등록처가 사용자 영역의 한 구간을 배정했을 뿐이다. 일상용 문자가 아닌 음성 표기 체계였고, 다루기 번거로워 농인 교육 현장에서도 밀려났다.

셋째는 1989년 아들람이다. 자음 글자 모양이 조음 위치와 방법을 반영하도록 설계되었다. 바리 형제가 훈민정음을 알고 만들었다는 근거는 없다.

glyph
[a]
glyph
[d]
glyph
[l]
glyph
[m]

아들람 네 글자. 조음 위치와 방법을 글자 모양에 담는 설계 원리를 따랐다.

그러므로 한글이 유일한 자질문자라는 서술은 다듬을 필요가 있다. 자질 원리 자체는 여러 번 독립적으로 발명되었다. 한글이 남다른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그 원리로 만들어진 문자가 한 나라의 일상 문자로 500년 넘게 실제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시 언어는 특수 목적용이었고, 캐나다 음절문자는 지역 언어용이며, 아들람은 아직 확산 중이다.

두 번째 해례본은 17년째 행방이 확인되지 않는다

2008년 7월 경북 상주에서 배익기가 집을 수리하며 짐을 정리하다가 같은 판본을 발견했다고 안동문화방송에 제보했다. 발견지를 따 상주본이라 부른다. 표제는 오성제자고로 적혀 있고, 훈민정음에 당대 연구자가 토를 달아 놓은 형태다.

학술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 이유가 그 주석에 있다. 상주본은 간송본과 같은 판본이며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으나 남은 부분이 책의 원래 크기를 유지하고 있고, 간송본에 없는 당대 연구자의 주석이 붙어 있다.

그 뒤의 경과는 소송의 연속이다. 상주의 골동품상 조 씨가 자기 가게에서 도난당한 물건이라고 주장했고, 2011년 5월 대법원이 조 씨에게 소유권이 있다는 판결을 확정했다. 조 씨는 2012년 문화재청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사망했으며, 그 결과 소유권은 국가에 있다. 배익기는 절도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뒤집혔고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형사 무죄가 소유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배익기는 2017년 4월 문화재청의 강제집행을 막아 달라며 청구이의의 소를 냈다. 2019년 7월 15일 대법원 3부는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을 내려 원심의 원고 패소를 확정했다. 국가의 집행 정당성이 인정되었으나 소재를 아는 사람이 배익기뿐이어서 실제 회수는 이뤄지지 않았다.

보존 상태가 문제다. 2015년 배익기의 자택에 불이 나 상주본 아랫부분 일부가 그을린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기준으로 발견 이후 17년째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국가유산청은 반환을 20여 차례 요구했으나 진전이 없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 소장은 형사 재판과 민사 재판에서 법원이 상반된 판결을 낸 것이 상황을 악화시킨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기존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제언했다.

두 판본은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자료다. 간송본은 앞 두 장이 20세기의 보필이고 그 보필에 오자가 있다. 상주본에 그 부분이 온전히 남아 있다면 1446년 판본의 원래 상태를 확인할 길이 열린다. 반대로 상주본의 훼손이 심하다면 간송본이 계속 유일한 완본 구실을 한다. 어느 쪽인지는 실물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결론 — 한글의 특별함은 책 한 권의 생존에 달려 있었다

1443년 실록 기사에는 한글의 제자 원리가 적혀 있지 않다. 1459년 언해본에도 없다. 원리를 적은 해례본은 1446년에 간행되었으나 기록에만 존재했고, 1940년 여름 안동에서 한 권이 나올 때까지 약 500년 동안 실물을 본 사람이 없었다. 그 기간에 한국의 학자들은 자기 문자가 어디서 왔는지를 두고 전자 기원설, 파스파 기원설, 창호 기원설, 산스크리트 기원설로 갈라져 있었다.

해례본이 나오면서 제자의 기본 원리가 확정되었다. 자음의 기본 다섯 글자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떴고, 같은 조음 위치에서 소리가 세지면 획을 더한다. 예외까지 따로 밝혀 놓았다. 앞의 세 편에서 살펴본 어떤 창제 문자도 이런 문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글을 설명하는 순서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창제자가 기록된 문자는 4세기 고트 문자부터 1989년 아들람까지 여럿이고, 국가가 칙령으로 반포한 문자도 920년 거란에서 1599년 누르하치의 문자까지 줄지어 있다. 자질 원리로 만들어진 문자도 한글 말고 셋이 확인된다. 세 항목 모두 한글의 전유물이 아니다. 남는 것은 창제 원리를 밝힌 동시대 해설서가 실물로 전한다는 사실 하나이며, 그 사실은 1940년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 결론에는 불편한 함의가 따라온다. 한글의 특별함을 떠받치는 근거가 책 한 권의 생존에 걸려 있었다. 이한걸 집안이 연산군 때 앞 두 장을 찢어내면서까지 그 책을 숨기지 않았다면, 김태준이 제자의 말을 흘려들었다면, 전형필이 기와집 열 채 값을 내놓지 않았다면, 1940년 8월 11일 폐간 전에 조선일보가 번역문을 싣지 못했다면, 지금도 한글의 제자 원리는 여러 가설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상주본의 소재가 확인되지 않는 상태가 10년 넘게 이어지는 지금, 같은 종류의 위험이 현재형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