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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 법전과 십계명 비교 연구 — 쟁점은 십계명이 아니라 계약법전이고, 우열이 아니라 문서의 용도다

함무라비 법전과 십계명을 나란히 놓고 어느 쪽이 먼저이고 어느 쪽이 나은지 따지는 방식은 1902년에 만들어졌다. 그 뒤 한 세기 동안의 연구는 비교의 대상도 기준도 바꾸어 놓았다.

2026년 9월 12일

함무라비 법전과 성경의 관계를 물을 때 대개 십계명을 꺼낸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같은 조항이 함무라비 법전에도 있으니 모세가 바빌론에서 베껴 온 것 아니냐는 물음이다. 이 물음의 형태는 1902년에 굳어졌고, 그때 정해진 틀이 지금까지 대중적 논의를 지배한다.

학계에서 실제로 오간 논쟁은 다르게 전개되었다. 비교의 대상은 십계명에서 그 바로 뒤에 이어지는 법 모음으로 옮겨 갔고, 비교의 질문은 어느 쪽이 윤리적으로 우월한가에서 두 문서가 각각 무슨 용도로 만들어진 물건인가로 옮겨 갔다. 이 글은 그 이동의 경로를 따라간다.

1902년에 굳어진 비교의 틀

프랑스 발굴대는 1901년 12월 이란 남서부 수사 유적에서 작은 설형문자가 빼곡히 새겨진 검은 돌 조각을 찾아냈다. 두 달 뒤인 1902년 1월 나머지 두 조각이 나왔다. 세 조각을 맞추자 높이 2.25미터의 비석이 되었다. 바빌론 제1왕조의 여섯 번째 왕 함무라비가 기원전 18세기에 세운 것이었다. 비석은 원래 바빌로니아에 있었고, 기원전 12세기 엘람 왕 슈트룩나훈테가 전리품으로 수사에 가져다 놓았다.

발굴대의 아시리아학자 장뱅상 셰일은 발견의 중요성을 곧바로 알아보고 번역에 착수했다. 셰일의 프랑스어 번역은 유물이 발굴된 지 몇 달 만인 1902년 여름에 나왔다. 다른 언어 번역이 뒤를 이었다. 독일 아시리아학자 후고 빙클러의 1902년 독일어판은 부제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법전」이라 붙였다. 1902년 이전이라면 그 수식은 모세 율법의 것이었다.

처음에 성경의 역사성을 옹호하던 기독교와 유대교 학자들은 이 발견을 환영했다. 비석은 근동 역사의 아주 이른 시기에도 복잡한 법 체계가 있었음을 보여 주었고, 고등비평이라 불리던 문헌비평에 맞설 무기로 쓸 수 있었다. 고등비평은 성경 본문을 여러 시대의 자료가 겹쳐 편집된 결과로 읽는 방법론이며, 당시 율리우스 벨하우젠이 대표 주자였다. 고등비평에 강하게 반대하던 에두아르트 쾨니히는 함무라비 비석이 가나안 정착 이전의 히브리인이 원시적 유목민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고 보았다. 정통파 유대인 학자 젤리히만 마이어도 비석이 유대 고대사의 이해를 넓히고 성경 서술의 역사적 진실을 확인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이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베를린 대학의 아시리아학 교수 프리드리히 델리치는 1902년 1월부터 독일 동방학회에서 「바벨과 성경」이라는 연속 강연을 했다. 첫 두 강연은 빌헬름 2세 황제와 황후, 궁정 인사들이 자리한 곳에서 진행되었다. 델리치는 성경 본문과 설형문자 자료의 대응 목록을 제시하며 성경이 후자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두 번째 강연에서 비석 상단의 부조, 곧 왕이 신 앞에 선 장면을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모세와 명시적으로 연결했다.

델리치의 두 번째 주장은 더 논쟁적이었다. 그는 함무라비의 법이 성경의 법보다 발전했고 현대적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당대의 지적 지형과 맞아떨어졌다. 독일의 바빌론 발굴은 바빌로니아를 고도로 발달한 문명으로 그려 냈고, 바빌론적인 것은 곧 근대성의 상징이 되었다. 빙클러는 함무라비의 법이 성경 입법과 달리 실무적 필요에 응답한 것이라고 적었다. 법사학자 요제프 콜러와 아시리아학자 펠릭스 파이저는 1904년의 독일어 교정본에서 도덕과 법을 구분하는 근대의 방식이 고대 바빌로니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보기에 함무라비 법의 세속성이야말로 다른 모든 동방 문명의 신정적 법 체계보다 우월한 지점이었다.

이 평가에는 발화자의 자리가 작용했다. 델리치와 빙클러의 승리주의에는 반교권주의와 반유대주의가 섞여 있었다. 당시 히브리 성경의 위상과 고대 이스라엘의 기여를 둘러싼 모든 논쟁은 그 후예로 여겨진 근대 유대인 문제와 곧바로 연결되었다. 그렇다고 함무라비 편에 선 학자 전부를 반유대주의로 환원할 수는 없다. 펠릭스 파이저나 역사가 프리드리히 레만하우프트처럼 유대인이거나 유대계인 학자도 그쪽에 있었고, 모세를 옹호한 기독교 학자 다수는 유대인의 옹호자가 아니었다. 이들의 공통 동기는 유럽 학문의 그리스도 중심 관점을 거부하고 고대 근동을 그 대항추로 세우는 데 있었다. 콜러와 파이저가 신정을 거부한 것은 당대 독일 세속주의의 지형 안에서 종교의 위상을 다투던 자기 위치를 드러낸다.

방어 쪽의 대표작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동방학자 다비트 하인리히 폰 뮐러가 1903년에 낸 연구다. 뮐러는 함무라비 법전, 모세 법, 로마 최고(最古)의 입법이라던 12표법의 조항을 나란히 놓은 대조표를 만들었다. 그는 두 법의 긴밀한 대응을 인정하면서도, 성경 법의 표현과 배열이 더 원초적이므로 함무라비 법이 모세의 출처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론은 두 법 사이에 직접적 역사적 연결이 없고 둘 다 더 이른 시기의 원법(原法)에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모세는 베낀 사람이 아니게 되었고, 성경판은 그 원법에 더 가까운 것이 되었다. 이 타협안은 기독교와 유대교 학자 양쪽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뮐러는 윤리적 우월성이라는 두 번째 방어선도 세웠다. 함무라비 법전은 절도 같은 가벼운 범죄에도 사형을 두고 있어 성경 법보다 가혹하며, 노예 처우는 성경 쪽이 오히려 느슨하다고 그는 정리했다. 그러면서 모세가 지혜와 자비와 윤리적 위대함을 법에 처음 들여왔다고 적었다. 빈의 랍비 다비트 포이흐트방은 뮐러의 서평에서 더 나아가 두 법전 사이의 도덕적 단절을 강조하고, 함무라비에서 십계명으로 이어지는 직접 경로를 부인했다. 스위스 신학자 자무엘 외틀리는 1903년에 함무라비 법전이 반영하는 시민 생활이 계약법전보다 훨씬 발달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후자와 이후 토라의 법 모음에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신앙에서 나온 다른 정신이 있다고 썼다.

양 진영은 반대 결론을 냈지만 하나의 전제를 공유했다. 두 문서는 같은 종류의 물건이고, 따라서 어느 쪽이 더 낫고 어느 쪽이 더 오래되었는지 순위를 매길 수 있다는 전제다. 이 전제가 흔들리면서 20세기의 연구는 다른 곳으로 갔다.

비석에 실제로 새겨진 것

비석의 글은 고대 근동에서 나온 단일 설형문자 비문 가운데 가장 긴 축에 든다. 분량은 약 4,130행이며, 아시리아학자들은 셋으로 나눈다. 첫 부분은 프롤로그로 바빌로니아어의 높은 시적 문체로 쓰였고, 함무라비의 군사적 정복과 신전 건축, 그에 따른 신들의 선택을 서술한다. 가운데 부분은 산문으로 된 조문 275개에서 300개가량이며, 모두 "어떤 사람이 X를 하면 그에게 Y를 한다"는 하나의 형식을 따른다. 마지막 부분은 에필로그로 다시 시문이고, 비석 자체의 미래를 다룬다. 새겨진 글과 조각을 바꾸지 말라는 요구, 그것을 지킨 미래의 왕이 받을 복이 여기 들어 있다.

조문은 주제별로 묶여 있다. 첫머리의 1조부터 5조까지는 무고와 위증, 그리고 판사가 자기 판결을 뒤집는 경우를 다룬다. 6조에서 25조까지는 절도, 26조에서 41조까지는 국유지의 부역, 127조에서 194조까지는 가족법, 195조에서 214조까지는 폭행과 상해다. 비석 아래쪽에서 각 80행이 넘는 일곱 단이 고대에 갈려 지워졌고, 그 부분은 아직 온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조문 번호에서 13조와 66조부터 99조까지가 비어 있는 것은 이 훼손 때문이다.

훼손을 낸 사람은 엘람 왕이다. 그는 약탈해 온 기념물의 일부를 지우고 자기 비문을 새기려 했다. 루브르 비석에서 지워진 자리에는 결국 아무 글도 새겨지지 않았다.

비석 상단의 부조에서 왕은 서 있고 신은 앉아 있다. 앉은 쪽이 메소포타미아 태양신 샤마시다. 어깨에서 뻗어 나온 물결 모양의 광선과, 해가 뜨고 지는 산지를 뜻하는 발받침이 그를 태양신으로 지시한다. 태양신은 빛의 신이므로 실상을 비추어 밝히는 정의의 신이기도 하다. 샤마시가 왕에게 내미는 것은 막대와 고리다. 이 도상은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와 엘람에서 2천 년 가까이 쓰였고, 정의를 곧게 편 것으로 보는 메소포타미아의 관념에서 나왔다. 건축 기초를 바로 놓을 때 쓰는 말뚝과 줄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예일 대학의 아시리아학자 캐트린 슬란스키가 내놓았다. 왕은 코에 손을 대는 의례 동작으로 신 앞의 겸손을 표시하고 있다. 신이 왕에게 정의의 도구를 보이는 장면이라는 점이 이 도상의 요점이다. 법전을 건네는 장면으로 읽는 것은 후대의 연상이다.

프롤로그가 왕의 임무를 규정하는 대목은 이 부조가 담은 내용을 말로 적는다.

inūmišu Ḫammurabi, rubâm na'dam, pāliḫ ilī, iâti mīšaram ina mātim ana šūpîm, raggam u ṣēnam ana ḫulluqim, dannum enšam ana la ḫabālim, kīma Šamaš ana ṣalmāt qaqqadim wasêmma mātim nuwwurim, Anum u Ellil ana šīr nišī ṭubbim šumī ibbû

그때에 아누와 엘릴이 나 함무라비의 이름을 불렀다. 신들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통치자인 나를 불러, 이 땅에 정의를 드러내고, 사악한 자와 악한 자를 없애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지 못하게 하고, 샤마시처럼 검은 머리의 사람들 위에 떠올라 이 땅을 밝히고, 백성의 몸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함무라비 법전 프롤로그, 제1단 27–49행. 정규화 아카드어는 리처드슨(M. E. J. Richardson)의 교정본을 따른 eHammurabi(OMNIKA 재단) 판, 한국어는 직접 옮김

여기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지 못하게"에 해당하는 구절이 dannum enšam ana la ḫabālim이다. 이 표현은 에필로그에도 다시 나오며, 함무라비 법전을 소개할 때 가장 널리 인용되는 문장이다. 왕의 정당성을 정의의 집행으로 설명하는 이 서술 방식은 함무라비의 발명이 아니다. 기원전 2100년경 우르 제3왕조의 우르남무 법, 기원전 1930년경 이신 왕조의 리피트이쉬타르 법도 전문에서 왕권을 신이 준 것으로 밝히고 약자 보호를 내세운다. 삼육대학교의 이종근은 우르남무 법과 리피트이쉬타르 법을 각각 다룬 논문에서, 왕권신수와 사법 정의와 약자 보호라는 이 주제 묶음을 수메르 법 전승의 문화유산으로 정리하고 함무라비 법에서 그것이 심화되고 확대되었다고 본다.

아윌룸, 무슈케눔, 와르둠 함무라비 법전은 사람을 세 계층으로 나누고 같은 행위에도 다른 처벌을 매긴다. 아윌룸(awīlum)은 자유인이다. 무슈케눔(muškēnum)은 고바빌로니아 시기에는 자유인이되 왕궁에 경제적으로 매인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아카드어의 이 낱말은 후대 히브리어와 랍비 히브리어에서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미스켄(מִסְכֵּן)의 어원이다. 와르둠(wardum)은 재산으로 소유되는 노예다. 상해 조문에서 같은 부위로 갚는 처벌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아윌룸일 때만 적용되고, 피해자가 무슈케눔이면 은으로 계산되며, 와르둠이면 그 값의 절반을 주인에게 물어 준다. 신분에 따라 형벌의 종류 자체가 바뀐다는 점이 이 법전의 기본 구조다.

십계명에 실제로 적힌 것

십계명은 히브리 성경에 두 번 실려 있다. 출애굽기 20:2–17과 신명기 5:6–21이다. 두 본문은 같지 않다. 안식일 계명의 근거가 다르고, 탐내지 말라는 계명의 항목 순서가 다르며, 가축에 관한 구절도 차이가 있다. 출애굽기 20:11은 안식일의 근거를 하나님이 엿새 동안 만들고 이레째 쉰 창조에 두고, 신명기 5:15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 구원에 둔다.

이 차이는 십계명의 연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슈탐과 앤드류는 1967년에 출애굽기판이 더 이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고 보면서도, 안식일 계명이 제사장 문서의 창조 기사와 연결되므로 문자로 굳어진 형태는 신명기판보다 늦다고 보았다. 프랑크로타어 호스펠트는 1982년에 신명기판이 원형이고 출애굽기판은 후대 편집자가 고쳐 시내산 서사에 끼워 넣은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 주장은 널리 반박되었다. 모셰 바인펠트는 1991년에 두 판본이 모두 더 짧은 원형의 확장이되 출애굽기판이 더 오래되었다고 보았다.

십계명의 첫 문장은 명령이 아니라 화자의 자기 소개다.

אָנֹכִי יְהוָה אֱלֹהֶיךָ, אֲשֶׁר הוֹצֵאתִיךָ מֵאֶרֶץ מִצְרַיִם מִבֵּית עֲבָדִים

ʾānōkhî YHWH ʾĕlōhêkhā ʾăšer hôṣēʾtîkhā mēʾereṣ miṣrayim mibbêt ʿăvādîm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다.

출애굽기 20:2. 마소라 본문(BHS의 대본인 레닌그라드 사본), 한국어는 직접 옮김

함무라비 법전과 견주면 세 가지가 다르다. 첫째, 형식이 조건문이 아니다. 사건을 가정하지 않고 명령만 적는다. 둘째, 처벌 규정이 없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문장 뒤에 도둑에게 무엇을 하라는 조항이 붙지 않는다. 셋째, 앞쪽 계명들에 대응하는 조문이 함무라비 법전에 없다. 다른 신을 두지 말라, 형상을 만들지 말라, 신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말라, 이레째를 구별하라에 해당하는 항목이 282개 조문 어디에도 없다.

겹치는 부분도 있다. 위증은 함무라비 법전 1조에서 4조가 다루고, 재산 범죄는 6조에서 25조가, 간음은 129조가, 아버지를 때린 아들은 195조가 다룬다. 그러나 십계명에서 이 항목들은 형벌 없는 명령문으로 적혀 있고, 탐내지 말라는 마지막 계명에 이르면 행위 이전의 욕구까지 금지 대상이 된다. 형벌을 매길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공통 항목만 뽑아 대조표를 만드는 방식으로는 두 문서의 관계를 판정할 수 없다. 살인과 절도와 간음과 위증을 금지하지 않는 사회는 유지되지 않으므로, 이 항목들이 겹친다는 사실은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보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성경 안에서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종류의 문장을 쓰는 대목은 십계명이 아니라 그 바로 다음에 나온다.

알트가 비교의 대상을 바꾸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구약학자 알브레히트 알트는 1934년에 『이스라엘 법의 기원』을 냈다. 알트는 오경의 법을 문장 형식으로 갈라 두 종류로 나누었다.

결의법과 단언법 결의법(casuistic law)은 "만일 어떤 사람이 X를 하면, 그에게 Y를 한다"는 조건문으로 쓴 법이다. 구체적 사건 하나를 가정하고 그 처리를 정한다. 함무라비 법전 282개 조문이 모두 이 형식이고, 출애굽기 21–22장의 상당 부분도 그렇다. 단언법(apodictic law)은 조건 없이 "X를 하지 말라" 또는 "X를 하라"고 명령하는 법이다. 십계명이 대표 사례다. 알트는 결의법이 고대 근동에 널리 퍼진 형식이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주민을 거쳐 받아들였고, 단언법은 이스라엘 고유의 형식이라고 보았다. 알트의 이 구분은 이후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단언법이라는 범주에 너무 많은 형식을 집어넣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에르하르트 게르스텐베르거는 1965년 박사 논문에서 이 범주 자체를 비판했다. 게르스텐베르거를 지도하고 논문을 통과시킨 사람은 그 자신이 비판 대상이던 마르틴 노트였다.

알트의 구분이 세워진 뒤로 함무라비 법전과의 대조는 결의법 부분에서 이루어졌다. 성경에서 그 부분은 십계명 바로 다음에 온다.

계약법전 출애굽기 20:22부터 23:19까지, 학자에 따라 23:33까지를 가리키는 법 모음이다. 계약법전 또는 언약 법전이라 부른다. 이름은 출애굽기 24:7에서 모세가 낭독한 "언약의 책"에서 왔다. 서사 안에서 이 법은 십계명이 선포된 뒤 모세가 홀로 산에 올라 받은 것이고, 모세가 백성에게 전하자 백성이 지키기로 동의하는 언약 의식이 뒤따른다(출애굽기 24:3–8). 히브리 성경의 법 모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오랫동안 표준이었다. 함무라비 법전과의 대조는 대부분 이 본문을 두고 이루어진다.

대응하는 주제의 목록은 길다. 채무 노예(출애굽기 21:2–11과 함무라비 법전 117, 148–149, 154–156, 282조),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출애굽기 21:12–17과 14, 192–195, 207조), 가축 절도(출애굽기 21:35–22:3과 253–266조), 남의 밭에 가축을 놓아먹인 경우(출애굽기 22:4와 57–58조), 맡긴 물건을 도둑맞은 경우(출애굽기 22:6–8과 122–126조), 빌린 짐승을 잃은 경우(출애굽기 22:9–12와 266–267조), 짐승을 빌린 값(출애굽기 22:13–14와 244–249, 268–271조)이다. 이 목록은 브랜다이스 대학의 데이비드 라이트가 정리했다.

대응 중에서 수치까지 비교할 수 있는 대목이 채무 노예다. 채무 노예는 빚을 갚지 못해 본인이나 가족이 채권자 집에서 일하게 되는 제도다.

šumma awīlam eʾiltum iṣbassū-ma aššassu mār(ā)šu u mārassu ana kaspim iddin ū lū ana kiššātim ittandin, šalāš šanātim bīt šayyāmānīšunu ū kāšišīšunu ippešū; ina rebūtim šattim andurāršunu iššakkan.

만일 어떤 사람에게 채무가 걸려 그가 아내와 아들과 딸을 은에 팔거나 채무 노역으로 넘기면, 그들은 3년 동안 산 사람이나 채권자의 집에서 일한다. 4년째에 그들의 해방이 이루어진다.

함무라비 법전 117조, 제26단 54–67행. 정규화 아카드어는 휴너가드(J. Huehnergard, 2013)의 판, 한국어는 직접 옮김

כִּי תִקְנֶה עֶבֶד עִבְרִי שֵׁשׁ שָׁנִים יַעֲבֹד וּבַשְּׁבִעִת יֵצֵא לַחָפְשִׁי חִנָּם׃

kî tiqneh ʿeved ʿivrî šēš šānîm yaʿăvōd ûvaššəviʿit yēṣēʾ laḥofšî ḥinnām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6년 동안 일하고, 이레째 해에 값 없이 자유인으로 나간다.

출애굽기 21:2. 마소라 본문, 한국어는 직접 옮김

두 조문은 같은 문제를 다루고 같은 해법을 쓴다. 기한을 정해 두고 그 뒤에는 풀어 준다는 구조다. 기한은 함무라비 쪽이 3년, 성경 쪽이 6년이다. 노역 기간만 보면 바빌론 조문이 절반이다. 이 대목은 두 법의 관계를 논할 때 자주 빠진다. 성경 법이 언제나 더 관대하다는 서술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비석의 조문은 시행되던 법이었나

두 문서를 견주는 작업 전체가 걸려 있는 전제가 하나 있다. 함무라비 법전이 바빌로니아에서 실제로 적용되던 법이라는 전제다. 20세기 중반부터 아시리아학자들은 이 전제를 다시 물었다.

방향을 바꾼 논문은 두 편이다. 파울 크라우스는 1960년 『제네바』에 「고대 메소포타미아 법의 중심 문제: 코덱스 함무라비란 무엇인가」를 실었고, 장 보테로는 1982년에 「함무라비 '법전'」을 발표했다. 보테로의 글은 1987년 저서에 재수록되었고 1992년 영역본이 나왔다. 요하네스 렝거는 1994년에 「다시 한번: 코덱스 함무라피는 무엇이었나, 반포된 법인가 법서인가」라는 제목으로 이 물음을 이어받았다. 제목 자체가 쟁점을 그대로 담고 있다.

회의론의 근거는 셋이다. 첫째, 이 조문이 바빌로니아 사회의 규범으로 작동했다는 증거가 없다. 실제 재판 기록에서 이 비석을 근거로 든 사례는 드물다. 둘째, 조문 모음이 체계적이지도 망라적이지도 않다. 예를 들어 고의 살인을 정면으로 다루는 조문이 없다. 있는 것은 다툼 중에 사람을 죽인 경우(207조)처럼 고의가 아닌 사례다. 예일 대학의 크리스틴 헤이스는 그래서 고의 살인에 관해 바빌로니아 법이 무엇을 정했는지 알 수 없고 성경 법과 그 항목을 대조할 수도 없다고 정리한다. 셋째, 이 글은 서기관 교육 과정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비문은 수백 년 동안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학생들이 옮겨 적었고, 발췌본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도시에서 나왔으며, 그중에는 함무라비 사후 천 년 뒤의 것도 있다. 신바빌로니아 시기나 페르시아 시기의 단편 주석까지 발견되었다. 어떤 법 모음도 교육 과정에 이만큼 뿌리내리지 못했다.

세 번째 근거는 특히 무겁게 쓰인다. 목록 만들기는 메소포타미아 학문의 핵심 방법이었고, 목록의 구성 원리는 항목을 얼마든지 늘려 갈 수 있게 했다. 함무라비 법전을 이 목록 학문의 전통 안에 놓으면, 이것은 법전이라기보다 판결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다룬 학술 논고에 가까워진다.

반대편도 있다. 레이먼드 웨스트브룩은 1985년 『성서 연구지』에 실은 「성경 법전과 설형문자 법전」과 1989년 『아시리아학지』에 실은 「설형문자 법전과 입법의 기원」에서, 설형문자 법 모음이 규정하는 문서가 아니라 서술하는 문서라고 보았다. 입법 행위의 산물이 아니라 이미 통용되던 관행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새뮤얼 그린거스는 비석의 결정들이 일상의 계약 문서에 나타나는 법 관행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합의라고 정리한다. 함무라비가 재판에 개인적으로 깊이 관여했다는 증거도 있다. 그는 왕국 전역의 관리와 판사와 광범위한 서신을 주고받으며 재판 진행에 의견을 냈고, 하급 판사의 결정을 승인하기도 하고 문제 삼기도 했다. 이 편지 가운데 일부는 예일 대학에 남아 있다. 슬란스키는 이 서신을 근거로, 함무라비 치세에 실제로 내려진 판결과 그것을 이론적으로 확장한 사례가 비석에 모인 결정들의 주요 출처였을 수 있다고 본다.

펄라 바마시는 2020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낸 『함무라비 법전: 왕실 전통과 서기관 전통의 합류점』에서 세 번째 길을 냈다. 이 책은 함무라비 법전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바빌로니아 서기관 한 사람의 작업으로 본다. 그 서기관은 이전 법 모음을 베끼고 사례를 연구하면서 무엇이 공정한지에 대한 감각을 길렀고, 그 위에서 조문을 지어냈다. 바마시는 이 서기관이 앞선 서기관들보다 나아간 지점을 체계화와 암묵적 법 원칙의 구현에서 찾고, 그렇게 만든 조문 모음을 왕실 비문이라는 장르 안에 밀어 넣었다고 본다. 서기관 학문의 산물이 왕의 기념물 형식을 빌렸다는 설명이다.

비석 자신이 지목하는 독자를 보면 이 문제가 더 분명해진다. 에필로그는 왕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awīlum hablum, ša awatam iraššû ana maḫar ṣalmīya šar mīšarim lillikma, narî šaṭram lištassima awātiya šūqurātim lišmēma, narî awatam likallimšu dīnšu līmur, libbašu linappišma.

억울한 일을 당해 송사를 가진 사람은 정의의 왕인 내 상(像) 앞으로 와서, 새겨 놓은 내 비석을 소리 내어 읽게 하라. 내가 적은 귀한 말을 듣게 하고, 내 비석이 그의 송사를 밝혀 주게 하라. 그가 자기 판결을 보고 마음을 가라앉히게 하라.

함무라비 법전 에필로그, 제48단 3–19행. 정규화 아카드어는 리처드슨의 교정본을 따른 eHammurabi 판, 한국어는 직접 옮김

이 문장이 부르는 사람은 판사가 아니라 송사를 가진 개인이다. 글을 읽지 못해도 다른 사람이 읽어 주게 하라고 되어 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비석은 미래의 왕을 부르고, 자기 판결을 뒤집지 말고 자기 상을 치우지 말라고 요구하며, 그렇게 하는 왕에게 샤마시가 긴 치세를 주기를 빈다. 슬란스키는 이 두 호명을 근거로, 비석이 정의를 숙고하는 공적 공간을 만들어 내려는 물건이었고 동시에 함무라비가 정의로운 왕으로 기억되게 하는 장치였다고 읽는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상은 묘사된 존재의 현현으로 여겨졌고, 죽은 자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것은 그 존재를 이어 가게 하는 의례였다. 송사를 가진 사람이 비석 앞에서 왕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문을 외우게 한 구성은 이 관념 위에 있다.

이 논쟁의 결과는 비교 작업 전체에 영향을 준다. 함무라비 법전이 시행 법령이 아니라 왕실 비문이자 서기관 학문의 산물이라면, 그것을 성경의 법 모음과 견주어 어느 쪽이 실제 사회에서 더 인도적으로 작동했는지 묻는 방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점은 성경 쪽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라이트는 계약법전 역시 이스라엘이나 유다에서 실제로 시행된 법의 모음이 아니라 서기관의 창작물이라고 본다.

어느 쪽이 더 인도적인가라는 질문이 무너지는 자리

1902년의 우열 논쟁은 학술적 형태로 한 번 더 반복되었다. 히브리 대학의 모셰 그린버그는 1960년 『예헤즈켈 카우프만 기념 논문집』에 「성경 형법의 몇 가지 전제」를 실었다. 그린버그의 방법은 처벌의 종류를 놓고 두 법이 무엇을 생명으로 치고 무엇을 재산으로 치는지 되짚는 것이었다.

그가 든 대조는 이렇다. 성경 법에는 재산 범죄에 사형을 매기는 규정이 없다. 함무라비 법은 주거 침입을 즉결 처형으로 다루고 침입한 구멍 앞에 시신을 매단다(21조). 강도로 붙잡히면 사형이다(22조). 절도의 경우 신전이나 왕궁의 물건이면 30배, 무슈케눔의 물건이면 10배를 물리고, 물어 낼 것이 없으면 죽인다(8조). 출애굽기 22:1은 소를 훔쳐 잡거나 팔면 소 다섯으로, 양이면 양 넷으로 갚게 하고, 갚을 것이 없으면 몸이 팔려 절도를 변제하게 한다(22:3). 죽이지 않는다. 반대 방향도 있다. 민수기 35:31은 사형에 해당하는 살인자에게서 속전을 받는 것을 금지한다. 그린버그는 이 둘을 묶어, 성경 법이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환산하지 않고 재산을 목숨과 맞바꾸지 않는 원칙 위에 서 있다고 보았다.

버나드 잭슨은 1973년 『유대학 저널』에 실은 「성경 형법에 관한 고찰」에서 이 논지를 광범위하게 비판했다. 그린버그는 1986년 「성경 형법에 관한 추가 고찰」로 답했다. 이 왕복이 남긴 문제는 방법에 있다. 함무라비 법전이 체계적이고 망라적인 법 모음이 아니라면, 특정 조문이 없다는 사실에서 그 사회의 가치관을 끌어낼 수 없다. 고의 살인 조문이 없는 것이 바빌로니아가 고의 살인을 가볍게 보았다는 뜻이 아닌 것과 같다.

연대순으로 놓고 보면 진화 서사도 성립하지 않는다. 우르남무 법은 함무라비 법전보다 300년가량 앞선다. 이 법은 상해에 금전 배상을 매긴다. 다른 사람의 눈을 멀게 하면 은 2분의 1미나, 발을 자르면 10세겔, 몽둥이로 팔다리를 부러뜨리면 1미나, 구리 칼로 코를 베면 3분의 2미나, 이를 부러뜨리면 2세겔이다. 살인과 강도와 간음과 강간은 사형이다. 300년 뒤의 함무라비 법전은 자유인 사이의 상해에 같은 부위로 갚는 방식을 도입했다. 금전 배상에서 신체형으로 간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잔혹한 고대에서 인도적인 후대로 이어지는 직선을 그리려 하면 이 순서가 걸린다.

채무 노예의 기한도 앞서 보았듯이 반대 방향이다. 성경 법이 언제나 더 관대하다는 서술은 조문 단위로 검증하면 유지되지 않는다.

남는 차이는 우열이 아니라 계산 단위다. 함무라비 법전은 피해자의 신분에 따라 같은 행위의 대가를 다르게 매긴다. 아윌룸끼리는 같은 부위로 갚고, 무슈케눔이 피해자면 은으로 끝난다. 계약법전의 동해보복 목록에는 이 신분 구분이 없고, 대신 종에 관한 조항을 따로 두어 종의 눈이나 이를 상하게 한 주인은 종을 놓아주게 한다(출애굽기 21:26–27). 신분 차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뉘는 자리가 다르다.

차용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종속인가

대부분의 연구자는 두 문서의 유사성을 간접적이고 먼 관계로 설명해 왔다. 두 본문이 공통의 모(母)법 전통에서 각각 나왔거나, 메소포타미아 법 전통이 시리아·가나안의 서기관 전통에 흡수되었고 그것을 성경 서기관들이 물려받았다고 본다. 기원전 2천년기에서 1천년기로 이어진 구전 전통을 상정하는 설명이 여기 속한다. 웨스트브룩의 공통 법 전통 개념, 야코브 핀켈슈타인의 1981년 연구 『들이받은 소』, 버나드 잭슨의 2006년 저서 『지혜 법』, 에카르트 오토의 1993년 논문, 랄프 로텐부슈의 2000년 연구가 이 계열이다.

라이트는 다른 길을 냈다. 그는 1998년 가을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성경법과 근동법 강의를 준비하다가, 다른 주제를 다룬 두 차례 수업에 배정한 계약법전과 함무라비 법전의 본문이 각각 앞 수업 본문의 바로 뒤를 잇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날 몇 시간에 걸쳐 순차 대응을 더 찾았고, 저녁 무렵 열 개 항목의 목록을 만들었다. 이 관찰은 2003년 『마아라브』 논문, 2004년 『고대근동·성경 법사학지』 논문, 2009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낸 『신의 법 만들기: 성경의 계약법전은 어떻게 함무라비 법전을 사용하고 고쳤는가』로 이어졌다.

라이트의 주장은 계약법전이 함무라비 법전을 직접 자료로 삼았다는 것이다. 근거는 개별 조문의 유사성이 아니라 조문 배열의 순차 대응이다. 폭행·상해 대목이 그의 대표 사례다. 함무라비 법전은 196조에서 201조까지 눈, 뼈, 이의 세 부위를 다루며 신분에 따라 처리를 나눈다. 206조에서 208조까지는 다툼 중의 비고의 상해와 사망을 다룬다. 209조와 210조는 임신한 여자를 때려 유산시킨 경우다. 계약법전은 같은 주제를 같은 순서로 다루되 결과를 바꾼다.

가장 뚜렷한 변경은 대리 처벌이다. 함무라비 법전 210조는 맞은 여자가 죽으면 가해자의 딸을 죽이라고 정한다. 계약법전의 대응 조문에는 이 처벌이 없다. 그 자리에 생명으로 생명을 갚는다는 문장이 오고 이어서 동해보복 목록이 붙는다.

וְאִם אָסוֹן יִהְיֶה וְנָתַתָּה נֶפֶשׁ תַּחַת נָפֶשׁ׃

wəʾim ʾāsôn yihyeh wənātattâ nefeš taḥat nāfeš

만일 해가 생기면, 너는 생명으로 생명을 갚아야 한다.

출애굽기 21:23. 마소라 본문, 한국어는 직접 옮김

라이트는 이 문장이 원래 자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끼워 넣은 것이라고 본다. 근거는 문법이다. 앞뒤 조문은 3인칭으로 쓰였는데 이 구절의 동사 וְנָתַתָּה만 2인칭이고, 뒤따르는 목록이 두 절 반을 차지하며 여덟 쌍으로 늘어난다. 함무라비 법전의 해당 대목은 세 부위만 다루므로, 눈과 이는 196조와 200조에서 오고 팔과 다리는 197조의 "뼈"를 둘로 나눈 해석이며, 화상과 상처와 타박은 206조의 "상처"(simmum)를 셋으로 나눈 것이라는 설명이다.

같은 변경이 들이받는 소 조문에서도 확인된다. 출애굽기 21:31은 소가 아들이나 딸을 들이받은 경우에도 앞의 규정대로 처리하라고 정한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없는 구절이다. 아이가 피해자여도 소 주인이 책임을 진다는 뜻이므로, 대리 처벌의 명시적 거부다.

라이트는 저술 시기를 기원전 740년에서 640년 사이로 본다. 신아시리아 제국이 이스라엘과 유다에 정치적·문화적으로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이고, 서기관 교육 자료로 함무라비 법전 사본이 많이 남아 있는 시기다. 이스라엘 북왕국이 무너진 것이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가 유다를 침공한 것이 기원전 701년이다. 하한선은 문헌 내적 근거에서 나온다. 계약법전은 그것을 딛고 그것에 응답한 신명기 법 모음보다 앞서야 하고, 신명기 법 모음은 통상 기원전 7세기 후반으로 잡힌다.

라이트는 이 연대에서 종속과 반대되는 해석을 끌어낸다. 계약법전은 지배 제국의 문화적 소재를 이스라엘·유다의 유산으로 가져와 다시 쓴 문서이고, 순응인지 전복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저항 쪽을 가리키는 표지가 있다고 그는 본다. 그가 드는 표지는 인간 왕 함무라비의 자리에 민족의 신을 놓고, 그 법의 계시를 민족이 생겨나는 순간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반론은 세 방향에서 왔다. 브루스 웰스는 2006년 『마아라브』 13권에 「계약법전과 근동 법 전통: 데이비드 라이트에 대한 응답」을 실었다. 계약법전과 닮은 요소는 함무라비 법전 외의 법 모음에도 나타나므로, 한 문서에 대한 직접 의존보다 더 넓은 법 전통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같은 학술지 같은 권에 「함무라비 법전과 계약법전: 브루스 웰스에 대한 응답」으로 재반론했다. 윌리엄 모로는 2013년 『비블리오테카 오리엔탈리스』 70권의 서평 논문에서 출애굽기 21:18–32의 폭행·상해 조문에 한해서는 의존이 확인된다고 보면서, 그 의존이 어떤 경로로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두 번째 반론은 연대 자체를 뒤집는다. 존 반 세터스는 2003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낸 『디아스포라를 위한 법서』에서, 계약법전 가운데 신명기 법전 및 성결 법전과 닮은 조항들이 실은 그 둘보다 늦다고 주장했다. 계약법전이 히브리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법 모음이라는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반 세터스는 바빌로니아 법의 영향 역시 바빌론 포로기의 접촉에서 나왔을 수 있으므로, 바빌로니아 법과의 유사성을 이른 연대의 근거로 쓸 수 없다고 보았다. 이 책은 2004년 캐나다 성서학회의 R. B. Y. 스콧상을 받았다. 버나드 레빈슨은 「계약법전은 포로기 저작인가: 존 반 세터스에 대한 응답」으로 반박했다.

세 번째 흐름은 차용의 성격을 다시 규정한다. 에카르트 오토는 2010년 『고대근동·성경 법사학지』에 실은 「계약법전과 함무라비 '법전': 설형문자법의 긍정적 수용과 전복적 수용 사이의 성경 법」에서, 성경 법이 설형문자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뒤집어 받아들이기도 했다는 틀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같은 틀이 신명기 연구에도 적용된다. 오토는 피에르 디옹과 한스 슈타이만스의 연구를 종합해, 기원전 7세기 유다의 지식인들이 에사르하돈 계승 조약을 전복적으로 전유해 신명기 6장과 13장과 28장을 지었고 그것이 신명기의 기원이라고 보았다. 2009년 튀르키예 남부 텔 타이낫에서 이 조약의 새 사본이 발견되면서 논쟁은 새 국면에 들어섰다. 조약이 제국 서쪽 속주에서도 맹세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한세대학교 영산신학연구소의 윤영준은 2024년 『영산신학저널』 69호에 실은 논문에서 이 발견이 문헌적 연결 주장을 강화하는 근거가 된다고 정리했다.

논쟁의 세 갈래는 서로 다른 것을 다툰다. 웰스와 모로는 대응의 밀도가 직접 의존을 입증할 만큼 촘촘한지를 다투고, 반 세터스와 레빈슨은 계약법전의 연대를 다투며, 오토와 라이트는 차용이 확인된다면 그것이 문화적 종속인지 저항인지를 다툰다. 세 갈래 모두에서 1902년의 질문, 곧 모세가 함무라비를 베꼈는지는 쟁점이 아니다.

국내 연구가 쌓아 온 자리

국내에서 이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 논문은 감리교신학대학교 구약학의 임상국이 2012년 『신학과세계』 74호에 실은 「구약성서의 법전과 메소포타미아 법전과의 관련성에 관한 고찰: 『계약법전』과 『함무라비 법전』의 법제사적 영향을 중심하여」다(7–31쪽). 제목이 밝히는 대로 비교의 대상을 십계명이 아니라 계약법전으로 잡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법 자체를 다룬 연구는 삼육대학교의 이종근이 연속으로 냈다. 우르남무 법(『법학연구』 2008), 리피트이쉬타르 법(『법학연구』 2011), 에쉬눈나 법(『중앙법학』 2011), 함무라비 법(『법학논총』 2011)을 각각 도덕성이라는 기준으로 분석한 논문들이다. 이종근은 우르남무 법이 사형과 동해보복형을 제한하고 금전 보상을 하도록 했다는 점을 짚고, 함무라비 법에 대해서는 신분과 성별의 차별, 폭력성, 많은 사형 규정 같은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고대 사회에서 법의 도덕성을 제시한 의의가 있다고 평가한다. 단행본으로는 김영진의 『율법과 고대근동의 법 연구: 율법과 법전』(한들출판사, 2005)이 있다.

최근의 연구는 영향의 경로 자체를 문제 삼는 쪽으로 옮겨 가고 있다. 김아리는 2024년 12월 『역사학보』에 고대 바빌로니아 시기와 신바빌로니아 시기를 중심으로 고대 근동 법 전통이 내부 사회와 외부 지역에 미친 영향을 검토한 논문을 실었다. 윤영준은 2024년 『영산신학저널』 69호에서 텔 타이낫 사본 발견을 통해 신명기 28장의 저주와 에사르하돈 계승 조약의 관계를 다루면서, 오토와 슈타이만스를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같은 문헌 비교 방법으로 반대 결론에 도달해 온 교착을 지적했다.

결론 — 비교의 대상과 단위가 바뀌었고, 우열 판정은 1902년의 질문으로 남았다

함무라비 법전과 십계명을 나란히 놓는 대중적 비교는 세 가지를 잘못 잡고 있다. 비교의 대상이 잘못되었다.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문장 형식을 쓰는 성경 본문은 십계명이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계약법전이며, 알트의 1934년 형식 구분 이후 학계의 대조는 대부분 이쪽에서 이루어졌다. 비교의 기준이 잘못되었다. 조문이 없다는 사실에서 가치관을 끌어내는 방식은 함무라비 법전이 망라적 법전이 아니라는 사실 앞에서 무너지고, 우르남무 법의 금전 배상이 함무라비의 동해보복보다 300년 앞선다는 순서는 잔혹에서 인도로 가는 직선을 허용하지 않으며, 채무 노예 기간은 바빌론 쪽이 절반이다. 비교되는 물건의 성격이 잘못 전제되었다. 함무라비 비석은 시행 법령집이 아니라 왕실 비문이었고, 그 조문 모음은 천 년 넘게 서기관 교육에서 필사되고 주석까지 붙은 학문 텍스트였다.

그렇다고 비교 자체가 무의미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교는 더 정밀해졌다. 라이트는 조문 하나하나의 닮음 대신 배열의 순차 대응을 근거로 삼았고, 차이가 나는 자리를 의도적 변형의 증거로 읽는 방법을 제시했다. 대리 처벌이 사라진 자리, 신분 삼분이 둘로 줄어든 자리, 왕의 이름이 신의 이름으로 바뀐 자리가 그 증거다. 웰스와 모로는 그 대응의 밀도가 직접 의존을 입증하기에 충분한지 다투고, 반 세터스와 레빈슨은 계약법전이 언제 쓰였는지 다투며, 오토는 차용을 전복적 전유로 읽는다. 판정이 나뉘는 지점은 명확하다. 계약법전이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 유다 서기관의 작업이라면 함무라비 법전 사본은 그들이 접할 수 있는 자료였고, 포로기 이후의 작업이라면 접촉의 경로는 바빌론이 된다. 어느 쪽이든 누가 무엇을 먼저 말했는지가 아니라 서기관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고쳤는지가 쟁점이다.

남아 있는 물음은 경로의 물증이다. 신아시리아 시기 유다의 서기관이 아카드어 설형문자 문서를 직접 읽었다는 증거는 아직 부족하고, 텔 타이낫 사본은 조약 문서가 레반트까지 배포되었음을 보여 주지만 예루살렘에 있었음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신아시리아 시기 메소포타미아에 함무라비 법전 사본이 다수 남아 있다는 사실은 라이트가 연대의 근거로 삼는 자료이지만, 그 사본이 유다에 닿았다는 물증은 아니다. 이 공백이 메워지기 전까지 직접 의존설과 공통 전통설은 같은 본문을 놓고 다른 결론을 내는 상태로 남는다. 1902년의 논쟁이 두 문서의 순위를 다투었다면, 지금의 논쟁은 두 문서 사이에 사람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 자리에 있었는지를 다툰다.